해외불교 체험

스리랑카와의 첫 만남

80년대 중반 5공 정권이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고 있던 봄날, 나는 마치 이 땅이 싫은 사람처럼 서울을 빠져나가 그 시절의 전철 성북역보다 더 초라한(당시의 성북역은 지금의 어느 시골의 기차역과 다름이 없었다.) 카투나야케 국제공항에 내렸다.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 도쿄로부터 9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스리랑카.

새벽1시라 해도 열대는 열대이다. 후덥지근한 열대 바람과 함께 나의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인도양 위에 인도아(印度亞) 대륙의 엉덩이 부분에 마치 감자 덩어리처럼 널부러져 있는 섬나라인 스리랑카에 대해서는 우리 역사서에도 충분한 자료가 있다.

《삼국유사》에 완하국(琓夏國)·용성국(龍城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를 미루어보아 적어도 삼국 시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고승전》에도 두 지역간의 교류에 관한 많은 양의 자료가 있는데 특히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능가도(楞伽島)1) 또는 석란도(錫蘭島), 동상도(銅常島)로 잘 알려져 있다. 1) 능가도(楞伽島):비록 원시불교 경전의 이름은 아니지만 나라의 이름에 경전의 이름을 직접 쓴 나라가 스리랑카이다

가무 잡잡한 피부를 가진 운전기사가 모는 택시를 타고 공항에서 묵기로 약속된 숙소를 향해 가고 있는데, 얼마쯤 달렸을까? 공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큰 길 한 모퉁이에서 발견되는 우람한 모습의 불상. 그리고 한밤중인데도 그 불상을 비추고 있는 조명이 스리랑카의 특징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었다.2) 2) 물론 다른 종교의 상이 모셔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콜롬보와 국제공항 사이에 자엘라라고 하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과거부터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이 지역을 지나다 보면 스리랑카가 가톨릭이나 기독교 국가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많은 수의 예수의 상과 마리아의 상을 볼 수 있다.

뭇 중생들이 무명을 깨치고 광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듯이, 언제 걷힐지 모르는 어둠을 뚫고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말씀에 대해 수학할 ‘스리 나가 비하라야(聖龍寺)’에 도착하니, 스님들이 나와 반갑게 맞아 주며 목욕하고 휴식을 취하라 한다. 집에 두고 온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들이 베풀어주는 친절로 대신하며 나는 랑카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

첫번째 놀라움 학생 법회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스님인 스리 나가 비하라야의 마두루와웨 소비타 스님은 스리랑카에서도 몇 안 되는 훌륭한 설법가이다. 소비타 스님은 법문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법문 대상이 누구인지를 가리지 않는다. 스리랑카에 온 지 한 3일 정도 지났을까. 스님께서 차에 타라고 하신다.

스님과 나는 울창한 열대의 숲을 지나 두 시간 정도의 여행 끝에 시골의 조그만 사찰에 도착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낡은 건물들이 오래된 사찰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는 했으나 규모가 큰 절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러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사방이 탁 트이고 규모가 비교적 큰 강당에서 그 전 해의 어린이 학생 법회―이것을 스리랑카 말로 다함 빠살라(眞理의 학교, 法의 학교, 佛法의 학교의 뜻)라고 한다.―의 성적 우수자를 표창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참석한 어린이와 학생이 줄잡아 500명은 넘어 보였다. 아니, 이런 시골 마을에 있는 절의 다함 빠살라 참석 인원이 이리 많다니! 한국에 있을 때 기껏 70∼80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법회를 하면서 알량한 자부심을 가졌던 나로서는 부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다함 빠살라는 사원의 신도에 대한 평생 보장 시스템의 기초가 되는 제도이다. 뭐 거창하게 사원의 신도에 대한 평생 보장 시스템이라고 이야기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스리랑카 인들은 진정 부처님의 가피에서 태어나 부처님의 가피를 입으며 생을 마감한다.

우리가 흔히 스리랑카를 불교 국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스리랑카에 종교가 불교만 있기 때문이 아니다. 스리랑카 인 중 불교 신자는 70%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힌두교·회교·개신교·천주교 등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헌법으로도 다른 모든 종교의 활발한 포교 활동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태국의 경우 헌법에 불교 국가로 못박아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전세계에 인식되기는 스리랑카가 불교, 그것도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를 신행하는 대표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스리랑카가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이어서가 아니라 불교가 개개인의 평생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잉태부터 사망까지 아니 윤회까지 불교가 관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 임신을 하면 임신을 했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났다고 고하며,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말을 시작한다고, 글씨를 배우면 또 그렇다고 고하는 이런 일들이 생활화되어 있는 나라가 스리랑카다. 스리랑카 인은 대개 5세 때부터 불교를 교리적으로 접한다. 일요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은 하얀 꽃이 넘실거리는 강으로 변한다.

다함 빠살라에 참석하기 위해 깨끗하게 세탁한 하얀색 전통 의상을 입고 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절로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상상만 해도 눈이 부시다. 절에서는 참석하는 아이들을 1학년부터 10학년으로 나누어 수준에 맞추어 만들어진 《붓다》라는 교재를 가지고 불교를 가르치고 수행한다. 이 교재는 저명한 스님들과 불교학자에 의해 편찬되며 지속적으로 보완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척 알차다.

어린이 법회를 등한시해서 마땅한 교재 찾기도 쉽지 않은 우리의 입장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어린이나 학생은 미래를 책임질 바로 그 당사자가 아닌가. 절마다 학생들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니 걱정거리가 있을 법도 하다. 물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 문제 역시 자급 자족이 가능하다.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고 있다. 삼귀의나 오계, 발원문 같은 공통의식은 스님의 인도하에 모든 학생들이 같이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교리 공부는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가르친다. 어려서부터 다함 빠살라에서 배우고 수행했기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으나 후배를 가르칠 충분한 소양을 이미 갖추고 있다.

불교 교리 뿐만 아니라 참선이나 부모님을 위한 효도법회 등을 자신들의 수행과 곁들여서 십수 년 공부하므로 불교에 대한 맛을 보며 확신 속에 살 수 있게 된다. 1990년대 초에 내가 머물렀던 절은 당시로서는 조그만 절에 불과했다. 주변 역시 이교도가 많았고 특히 영국 교회를 등에 엎고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붓던 교회도 있었다.

그 절에서 몇 달 머무르는 동안 가끔 일요일마다 보이던 아이들이 서너 명씩 안 보이곤 했다. 스님에게 그 아이들이 어디 아프냐고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아픈 것은 아니고 근처의 교회로 갔다고 했다. 걱정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물론 그 아이는 돌아왔다. 진리에 토대를 둔 경우에는 금전이나 학용품으로 마음을 살 수 없음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었다.3)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이라는 당시로서는 천주교와 기독교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국가들의 무차별 공세 속에서 스리랑카의 불교가 회생할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불교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과 다함 빠살라였다.

가정은 불성 계발을 위한 곳

가정에서의 신앙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우리 한국불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심히 절에 와서 자식의 합격을 기원하는 보살님도 막상 자식들이 출가를 하겠노라 하면 대경실색을 한다.

스님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맑은 생활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자신의 복을 위해서 스님들에게 분에 넘치는 보시를 하려 한다. 스님들이 신도들을 바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한국불교를 황폐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집집마다 불상을 모셔 놓고 예불을 한다.

어느 스님의 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집안에 불상을 모셔 놓으면 큰일 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부처님과 같이 지내는 것이다. 물론 모셔 놓고 여법하게 예불을 하지 않으면 안 모시는 것보다 못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당만도 못한 생각을 가진 이들의 혹세무민에 불교인들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경전의 어디에도 집안에 불상을 모셔 놓으면 일이 잘 안 된다는 구절은 없다. 다함 빠살라 등에서 불교를 온전하게 접한 이들은 출근길에 부처님께 간단하나마 예불하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예불을 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보리수 나무를 향해 예를 올리는 운전 기사나 자리에서 일어나 보리수 나무나 길가에 조성된 불상을 향해 예를 올리는 이들을 너무 많이 그리고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가정에서부터 몸에 배서 생활화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태국처럼 남자는 일생에 한 번 승려가 되어야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 아닌데도 스리랑카의 불교가 의연한 것은 바로 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수행 때문이다.

아무나 스님이 되나요?

스리랑카의 불교가 궁핍함 속에서도 여유롭게 부처님의 정법을 유지할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는 ‘맑은 승단’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승단 중 맑지 않은 승단이 어디 있겠는가만은 지금껏 폭력으로 얼룩지거나 아니면 취처를 하거나 은처를 하는 등 승려답지 못한 승려가 목청을 돋우면서 마치 자신들이 정법을 호지(護持)하고 있는 듯이 떠드는 스님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한국불교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 스리랑카의 승단은 신선함을 넘어 충격이었다.

한국의 출가와 스리랑카의 출가를 비교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은 물론 도저히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마음을 가눌 길 없게 된다. 구족계단이 설치되면 스님이 되려는 자식을 만류하려는 부모의 모습이 심심치않게 보이는 한국과 철저하게 가족의 축하를 전제로 하는 스리랑카에서의 출가는 시작부터 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출가를 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의사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아들이 8, 9세가 되었을 때 그것도 비교적 총명한 아들에게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사항과 수행자가 되었을 때의 공덕을 소상히 일러주면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출가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본다.

아들은 이미 다함 빠살라를 통해 불교를 접하고 승려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출가 여부에 대해 자신의 명확한 의사를 표명한다. 가정의 합의와 본인의 동의에 의해 출가가 결정되면 소년의 부모는 원하는 사원의 스님을 찾아가 자식의 출가 문제를 상의하고 허락을 받아낸다. 스님의 허락이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4) 4) 스리랑카의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전 대통령도 절에서 일을 하며 소년시절을 보내고 출가하기를 원했지만 스님의 허락을 받지 못해 끝내 스님이 되지 못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그는 수상은 물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매년 1,500분이 넘는 스님들을 모셔놓고 진행하는 대규모 피릿의식을 했다.

출가를 허락받은 소년은 적당한 날을 택해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사미계를 받는다. 그 동안 길렀던 머리를 깎아주고 하얀 고깔을 씌우는 절차를 거친 후 승복을 입힌다. 물론 처음의 승복은 부모나 은사 스님이 보시한다. 눈물겨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출가 수행자가 되는 아들을 위해 부모가 승복을 보시하다니. 그리고 부모는 아들에게 큰절을 한다.

이제 예토의 속인과 정토로 나아가는 수행자가 구별되는 것이다. 비록 10여 살밖에는 안 되었지만 출가한 스님에게 사회는 수행자로서의 대접을 다해 준다. 사미 스님은 ‘피리웨나’라고 하는 승려 전문 교육기관에서 팔리 어 등 불교 언어와 경전은 물론 영어 그리고 경제 등 내외전의 학습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속해 있는 절에서 행해지는 신도들을 위한 각종 의식에도 참석하며 스님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 스무 살이 되면 구족계를 받게 된다. 구족계단은 종단별로 전국의 큰 사찰 몇 군데를 정해 설치된다.5) 5) 1988년 구족계단에 참석하기 위해 전세 버스를 타고 오던 스님 40여 명이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아 11살된 사미 한 분을 남겨 놓고 모두 살해당해 유래 없이 큰 다비식이 열렸던 것은 아주 가슴 아픈 기억이다.

구족계를 받는 스님들의 출신 마을에서는 스님이 구족계를 받는 것을 경사로 여기고 부모는 물론 친척, 마을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 구족계단이 설치된 절로 구름같이 몰려든다. 구족계를 받는 스님은 마지막 계를 받기 직전에 왕의 복장을 한다. 속인으로서 마지막 치장을 해보는 것이다.

스님이 되면 찰 수 없는 시계도 차고 각종 보물로 치장을 한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의 법명에는 그 스님의 출신 마을 이름이 붙는다. 위에서 소개했던 마두루와웨 소비타 스님의 경우 마두루와웨는 출신 마을의 이름이고 소비타는 법명이다. 출신지인 마두루와웨 마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제도는 중복되는 법명으로 인하여 스님에 대한 혼돈에 빠질 염려가 없어 더욱 좋다.

여기서 소년의 경우만 소개하는 이유는 스리랑카에 여승이 없어서가 아니다. 스리랑카의 여승은 비구 승단에서 구족계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근래까지만 해도 사미니만 있었다. 최근에 비구니계를 받고자 하는 여승들이 늘어나면서 네팔 등 외국에서 한국이나 일본 등 외국 스님을 모셔 놓고 비구니계를 받은 적이 있다.

여승의 사회적 역할 역시 비구 승단의 사회적 역할 못지 않게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스리랑카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의 하나인 종족 갈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평화 대행진이나 빈곤 퇴치 운동, 노약자 보호 운동 등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이들이 바로 여승들이다.

히랄루워

스리랑카 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단어 가운데 ‘히랄루워(Hiralluwa)’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아주 상스러운 욕보다 더 치욕적인 말로 인식되고 있다.

히랄루워란 승복(僧服)의 스리랑카 말인 ‘씨우라(siura)를 버린 이’라는 말로 ‘아라한의 경지를 약속받은 영광스럽고 고귀한 승복을 벗고 중생들의 천박한 세상으로 되돌아온 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구족계를 받을 때 온마을이 떠들썩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지만 막상 여법하게 수행을 하지 못하고 환속하게 되면 당분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살던 마을에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먼 지역으로 가서 살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환속한 이들을 천박하고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은사 스님이 제자를 결혼시키면서 환속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환속하더라도 불교계에 몸담으면서 사원과 불교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저명한 몇몇 불교 학자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살아있는 부처님, 보리수 나무 스리랑카 불교인들에게 보리수 나무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다. 보리수 나무가 스리랑카에 처음 소개된 것은 불교가 처음 소개된 다음 해 아쇼카 황제의 딸이자 마힌다 장로의 누이인 비구니 상가미타에 의해서이다.

이후 보리수 나무는 스리랑카 인들에게 법당, 탑과 더불어 중요한 신앙대상이 되었다. 사찰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보리수 나무는 일반인들의 예배 대상이다. 아침에 집에서 예불을 마치고 출근하더라도 길에서 보리수 나무를 보면 다시 예배를 한다.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마하보디나 갈루따라의 보리수 나무는 전국적인 참배객들로 유명한데, 이 보리수를 참배하면서 신도들이 함에 넣은 돈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금이 있을 정도이다. 사찰에서는 보리수 나무를 중심으로 ‘보디푸자’라는 공양 의식을 한다. 보디푸자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는 제단에 꽃과 향, 등을 밝히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주로 해가 질 무렵에 시작하여 약 12시간 정도 진행된다.

보시:적선 그리고 공덕

다나(da-na)는 불자들에게는 보편화되어 있는 의식으로 보시(布施)를 뜻하며, 스리랑카에서는 스님들에게 음식물과 필수품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준다는 의미만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사업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나는 주고 또 공덕을 받고 그리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좋은 제도이다. 태국이나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재가자들에게 가서 탁발을 해오나 스리랑카에서는 신도들이 음식을 마련하여 사원으로 가져가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집으로 스님들을 모셔와서 공양 즉 식사를 대접한다.

신도들은 관혼 상제는 물론 생일, 출산, 입학, 사업의 시작 등 일이 있을 때마다 스님들에게 집에서건 사찰로 찾아가서건 공양을 대접한다. 공양물로는 밥과 카레가 주를 이루며 육류도 포함되어 있다. 스님들은 음식의 내용으로 신도의 신심을 평가하지 않는다. 음식물 이외의 공양물은 스님들이 평소에 사용해야 하는 필수품들이다.

승단이 출산에서 사망까지의 인생을 책임져 준다면 재가자들은 스님들이 출가해서 입적할 때까지 여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보좌해 준다. 출가하여 스님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면 승복·책·우산은 물론 교통비·의약품 등 출가자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다. 이 모든 것을 검소한 범위 내에서 신도들이 책임져 준다.

그러므로 초상을 치루면서 스님에게 얼마를 드려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일이나 불사를 추진하면서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도는 일은 스리랑카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스님을 보좌한다는 것 이외에 보시의 또 다른 기능은 스님의 수행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계율을 어기고 수행을 게을리하는 스님이 있는 사찰은 보시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식생활에 곤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느 사찰은 다나가 많이 들어와 다른 절 스님을 모셔가기까지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찰은 실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바른 스님에 바른 신도이다. 그러므로 다나는 재가자가 승단의 청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제도이기도 하다.

상좌부 불교 속의 타력, 피릿

자력으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도록 노력한다는 상좌부 불교권에도 타력적인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호주(護呪)라고 하는 피릿(pirit) 의식이 그것이다.

피릿 의식은 파릿타(paritta)라고도 하는 염송 기도의 일종으로 특별한 경전을 암송함으로써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 또는 액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고 믿는 의식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도 행한다. 피릿 의식 때는 《라타나》 《망갈라》 《카르니야 멧타》 등의 경전을 암송한다.

특히 12명의 스님이 참석하는 마하 피릿은 저녁 9시경에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에 끝난다. 이를 위해 ‘피릿 만다파야’라는 건물을 세워 의식에 이용하는데 이 건물의 재료로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뭇잎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경비나 낭비의 문제가 별로 없다.

피릿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재가자들은 피릿 눌이라는 실(絲)을 잡고 의식에 참여했다가 의식이 끝난 후 짧게 잘라서 왼팔에 감고 다니는데 그러면 몸도 보호가 되고 하고자 하는 일도 잘된다고 한다.

포야(Poya) 축제

포야는 달이 꽉 찬 날(滿月日) 즉 보름을 의미한다. 평소에는 양력을 사용하면서도 유독 불교적인 의식에서는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달은 매월 한 번씩 꽈악 차서 보름달이 되고 보름달이 주는 풍만함은 스리랑카 인들에게 사랑으로 넘치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스리랑카 인들에게 보름 즉 포야는 부처님이고 삶이고 생활이다. 포야는 일 년에 열두 번 윤달이 끼면 열세 번 있다. 그 중 중요한 포야는 웨삭(양력 5월), 뽀송(6월), 에살라(7월)를 들 수 있다. 특히 웨삭 포야는 부처님의 탄신, 성도, 열반일을 의미한다.

4월 초파일, 납월 팔일, 음력 2월의 팔일과 보름을 여래 4성일로 지내는 우리와는 날짜에 있어 차이가 있다. 웨삭 포야가 되면 전국 각지의 절들은 최대의 명절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다. 법회는 물론 길 가는 행인을 위한 보시의 집 운영, 연극이나 찬불가 공연 등 각종 문화행사로 전국이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각 가정에서도 가족의 서원이 담긴 등을 직접 만드어 건다. 또한 포야가 되면 일반음식점은 물론 특급호텔에서조차 술을 팔지 않는다. 수년 전 어느 포야 때의 일이다. 찬드리까 구마라뚱가 대통령이 국정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콜롬보 시내에 있는 특급 호텔을 찾았다.

피로를 풀기 위해 대통령은 호텔의 웨이터에게 맥주를 주문하였다. 하지만 웨이터는 포야이기 때문에 맥주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은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느냐고 이야기했고 그 웨이터는 포야 때 술을 마시는 것은 불손하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믿기지 않겠지만 결국 대통령은 그 호텔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6) 6) 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사찰이나 고궁을 갈 때 반바지 차림이나 런닝셔츠에 슬리퍼 바람 또는 술 냄새를 풍기며 가는 한국인들을 떠올린다. 무엇이 바른 참배이고 바른 관람 태도인가? 그리고 술을 마시고 입장하는 참배객이나 관람객을 당당하게 저지하지 못하는 관리인이나 수도자들 역시 안쓰러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도량을 호지하려면 비록 가난하지만 스리랑카의 웨이터 정도의 자세는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비파사나

굳이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말한다면 자기를 돌아보는 수행법이 얼마나 발전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수행법이 없는 종교가 있겠는가만은 불교의 선(禪)수행 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선수행 중에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 상좌부 불교국가들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마타(samatha, 止)이고 다른 하나는 비파사나(vipassana-, 觀)이다. 특히 비파사나는 팔리 어 경전 맛지마 니카야의 《사티파타나숫타》나 디가 니카야의 《마하 사티파타나숫타나 숫타》(이 경에 상응하는 한문 경전은 아함부 중아함의 《念處經》이 있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방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 직접 수행했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비파사나는 바른 관찰을 통해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하며 이 인식을 통해 집착할 것과 집착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방법으로, 이 깨달음은 스스로를 최고의 평온 상태로 이끈다. 이 경에는 “존재의 정화를 위해,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고통을 없애며 올바른 도를 얻기 위해, 그리고 열반의 깨달음을 위한 한 길(eka-yano maggo : the only way)이 있다. 그것을 사념처(四念處)라 한다.”고 되어 있다.

염처 즉 사티(sati)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 (bare attention)’을 의미하며 몸·느낌·마음·법의 염처 네 가지가 있다. 사념처를 포함한 모든 수행의 단계를 37조도품(助道品)이라 하여 37가지로 나타낸다. 이에는 사념처·사정근(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이 수행을 하는 스님들은 마을의 사찰이 아닌 숲속의 사찰에서 별도로 수행을 한다.

이들은 새벽 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거의 대부분을 수행으로 보낸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을 지니기 때문에 재산이라곤 4자구(資具) 즉 의복·음식·침구·의약품과 물주전자, 약간의 책 등 만을 지니고 있으며 무소유의 승단 정신을 실천하여 시중의 스님들처럼 피릿이나 공양 등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스리랑카 남부의 ‘섬의 암자 (The Island Hermitage)’나 중부 불치사(佛齒寺)가 있는 옛 도시인 켄디 주변의 ‘숲속의 암자 (Forest Hermitage)’와 ‘간두보다 선센터’ 등이 유명하나 웬만한 사원은 거의 대부분 비파사나를 수행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필자는 스리랑카 남부 엘피디에 마을 근처의 사원에서 수행했는데 이 사원은 마을에서 수 킬로 떨어진 정글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원은 1958년 수행하던 스님이 표범에 물려 죽는 사고가 났을 정도로 정글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도 하루 한끼만 공양하는 일종식을 철저히 지킨다.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신도들이 준비한 공양을 가지고 스님들의 수행처까지 오는 것이 아니라 일주문 옆의 공양소가 따로 있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 하는 공양이지만 공양 때가 되어서 신도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왼손에 발우를 받쳐들고 오는 스님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스님들은 법랍순으로 수행처에서 내려와 공양소로 걸어오는데 그 순간 무시무시한 정글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바뀌고 마치 아라한들이 천상을 거니는 것 같다.

종단은 셋, 배는 하나

스리랑카 승단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과거 끊겼던 법맥을 태국으로부터 다시 이어와 현재 스리랑카의 최대 종단이 된 씨암종, 미얀마에서 받아들인 아마라푸라종과 라만야종이 그들이다.

이들 종단은 출가를 허용할 때의 신분의 문제나 승복의 착의법, 구족계단의 설립 등 소소한 몇 가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 차이가 없다. 출가할 때의 신분의 문제는 카스트와 관련이 깊은데 씨암종의 경우는 아직도 고위가마라는 농부 이상의 카스트에 속한 이들만 승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스리랑카에 카스트가 만연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리랑카에도 인도 문화의 특성의 하나인 카스트가 있었지만 평등을 내세운 불교가 전래되면서 아주 오래 전부터 카스트는 무너졌으며 지금은 교통의 발달과 도시화의 진행 등으로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 세 종단으로 이루어진 스리랑카 불교의 특징은 화합이다. 팔리 경전을 소의 경전으로 하고 수행법이나 다비식 등 각종 의식이 같아서 스리랑카에서 의식을 하고자 하는 신도들은 아무런 혼돈 없이 동일한 내용의 의식을 치룰 수 있다.

승려들 사이에서도 종단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씨암종의 승려가 아마라푸라나 또 다른 종단의 사찰에 기거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으며 다른 종단의 승려들 또한 마찬 가지이다. 이 또한 종단간의 위의의 문제로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스리랑카 종단에는 총무원이라는 상설기구가 없다. 교구에서도 그렇고 지역별로도 그렇다. 평소에는 진정한 정신적인 지주이신 종정 스님만 계시다가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중진 스님들이 모여서 상의를 하고 필요한 경비는 각 사원에서 갹출하여 행사를 치른다. 본인이 기억하는 중진 스님들의 회의로는 1988년 당시 스리랑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JVP라는 반정부 단체의 문제였던 것 같다.

이후에도 정부 정책에 대해 조언을 할 필요가 있을 때 이런 회의가 열린다. 이를 보고 비효율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어느 나라의 불교는 효율성 찾다가 수행도 제대로 못하고 4년에 한 번씩 큰 싸움을 하느냐고 반문하면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스리랑카의 승단을 보면 화합할 수 없는 승단은 출발점에서부터 승단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스리랑카의 내전, 그리고 불교가 하는 일

스리랑카 내전은 종족 분쟁인가 아니면 종교 분쟁인가?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 나라의 한 일간 신문은 다른 신문들과는 달리 유독 스리랑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스리랑카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이고 있는 깊은 관심은 스리랑카를 불교국가로 몰아세우면서 불교도들 역시 그들이 신앙하는 종교처럼 잔인한 전쟁을 일삼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들의 기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어처구니 없게도 불교도들이 행하는 선행은 쏙 빼고 그 지역의 안 좋은 부분을 강조하면서 불교도들 역시 전쟁을 좋아하는 것처럼 편집해서 기사로 내보낸다.

인류 역사에서 불교를 믿는 정치 집단이 공격적인 전쟁을 한 적은 결코 없다. 많은 이들은 지금의 스리랑카의 내전을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 한다. 스리랑카의 주요 종족인 싱할라 족과 분리 독립을 원하는 타밀 족의 대부분이 믿고 있는 종교가 불교와 힌두교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 같다.

하기는 여기에 힘을 보태주려는 듯 과거 김영삼 대통령 시절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정권의 종교 편향을 꾸짖고 공정한 정책 수행을 촉구하면서 신문에 게재한 광고에서조차 스리랑카의 내전을 종교 분쟁으로 서술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인들 스스로 누워서 침뱉는 일을 한 것이다. 스리랑카의 내전은 종교 분쟁이 아니라 종족 분쟁이다.

산업혁명을 통해 막강한 힘을 구축한 영국인들의 탐욕은 스리랑카라는 조그만 섬나라를 온전하게 버려둘 수 없었다. 무력으로 스리랑카를 지배하던 영국에게 스리랑카는 단지 원료 공급국이자 자신들의 생산품 소비 시장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은 스리랑카의 정신인 불교를 우습게 보았다.

스리랑카 인들이 스리랑카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영국의 식민 정권에 대해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인들은 그때부터 인도 남부의 타밀 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와서 대체 노동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강제 이주를 당했던 타밀 인들의 후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의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종족 갈등의 뿌리이다.

이런 뿌리를 단지 스리랑카에서 싸운다고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 갈등으로 보다니? 이런 종족 갈등의 와중에 스님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보살행 그 자체이다. 수시로 타밀 분리주의자와 정부군의 대표를 만나 평화를 호소하는 스님, 전장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부상 군인이나 전쟁터와 가까워 폐허가 된 마을의 주민들을 위로하는 스님, 마을의 어린이를 위하여 각종 사업을 전개하는 스님 등 이들은 모두 목숨을 내맡긴 채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들 스님들의 공통된 의견은 마치 간디가 인도가 나뉘는 것을 반대했던 것처럼 나라가 나뉘게 되면 평화는 영원히 요원하다는 것이다. 전쟁과 테러,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는 그곳 스님들을 보면서 진정으로 숙연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듯하나 필요한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나라 스리랑카에는 무엇이 있는가? 불교를 공부하러 온 이들 중에 어떤 이는 배울 것이 없는 나라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할 것이 많은 나라라고 이야기 하니 참으로 종잡기 어려운 나라인데, 내가 보기에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것 같은 나라임은 틀림없다.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고 또 느려서 화끈(?)하지도 못하고.

일반 사회뿐 아니라 불교조차도 그러하다. 일반 기업이나 학교에 서류 하나 제출하면 그 결과를 받는 데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심지어는 한국에서는 하루면 될 일을 해결하는 데 6개월이 걸린 적도 있다. 그런데 후일 생각해 보니 그 과정이 나에게는 수행이었다. 일체유심조라고나 할까. 서둘러 결과를 보려 하고 또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른 일을 도모하는 데 이력이 나 있던 나에게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수행이었다.

스리랑카! 벅찬 이름은 벅찬 상태로 남아 있어야 더욱 가슴이 뿌듯한 것이리라. 그곳에서의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의 체험에서 비록 그곳이 혼돈의 와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곳의 생활이 나에게는 삼세(三世)를 확인하는 도량이었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가난하고 더러운 곳이라 하더라도 부처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곳,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여법하게 수행하고 아라한이 되었으면 하는 자그만 바람을 심연에 새겨본다. <끝>

송위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케레니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교육 연구소 진(眞) 소장. 논문으로 〈팔리 사티파타나 숫타와 한문 염처경에 대한 비교 연구〉 〈장아함 세기경과 팔리경전 비교 연구〉 〈존재의 분석으로서의 염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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