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개혁운동 탐구

1. 머리말

불교는 개개인의 주체적 깨달음에 바탕한 해탈과 열반을 구경의 목표로 삼는 출가 지향의 종교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유가(儒家)에서는 불교를 ‘허원적멸(虛遠寂滅)’의 도피적·허무적 종교라든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무시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반인륜적 종교라고 비판해 왔다.

또한 서구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막스 베버(Max Weber)는 불교를 이웃의 행복이 아니라 개인적인 안심입명을 중시하는 개인구제의 종교로 보았다. 더 나아가 그는 “불교는 어떤 종류의 ‘사회적’ 운동과도 하등 관계가 없으며, 어떠한 ‘사회적·정치적’ 목표도 내세우지 않는다.”1)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베버의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근래에 들어 아시아 불교에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스리랑카에서는 수많은 스님들이 마을 개량 사업을 위해 주민들과 함께 길을 내거나 화장실을 짓고 학교를 세우며 일한다. 인도에서는 불가촉 천민 수백만이 불교로 개종을 했는데, 그것은 불교가 사회 개혁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카스트 제도로 인한 고통의 종식을 하층민들에게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3년 사이공 거리에서 틱쾅둑(Thich Quang Duc) 스님이 분신한 것은 현대 아시아 불교의 적극적 행동주의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기치를 내건 우리 나라의 민중불교운동도 그 영향과 의의가 적지 않다.

또한 국제적으로 보더라도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비폭력운동을 개념화하고 현실화한 불교인들의 기여는 매우 커서, 최근 노벨 평화상은 두 번이나 불교 지도자들에게 돌아갔으니,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가 바로 그들이다.2) 우리는 이제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불교해방운동(Buddhist Liberation Movements)·실천불교·민중불교 등으로도 불리우는 이러한 일련의 ‘불교 사회개혁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에는 유럽에서도 이러한 사회 참여적 불교 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3) 본고에서는 연구 범위를 스리랑카·인도·태국·베트남·일본 등의 아시아 불교에 한정시켜 고찰하기로 한다.

2. 불교 사회개혁 운동의 역사적 배경

근대 서구 사회에서는 성장의 신화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혁명의 신화에 기초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보급과 함께 이른바 ‘진보’의 이념이 더욱 일반화되었다.

특히 자본주의를 축으로 하는 진보에 관한 담론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정복과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착취와 함께 진행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진보’라는 말은 비서구 지역에 대한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분리시켜 이해하기 어렵다.

서구인들의 이러한 진보의 이념은 유럽 중심주의의 반영임과 동시에 물신주의와 경제성장에 광분하던 자본주의적 이성의 횡포라 할 것이다.4)

20세기를 전후로 하는 약 1세기 동안에,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설에 의거하고 있었다. 첫째, 동양은 정체적이며 진보가 없는 사회라는 가설, 둘째, 동양은 외부적 힘의 충격에 의해서만 변화할 수 있다는 가설, 셋째, 오직 근대 서구만이 그러한 힘을 가할 수 있으며 충격과 더불어 동양은 서구적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가설이 그것이다. 5)

서구인들은 이러한 가설을 불변의 진리로 알고 ‘문명의 진보’라는 미명하에 제국주의적 침략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의 유럽은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 점령하고, 특히 프랑스는 자기 나라의 20배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말까지 유럽의 지배하에 놓인 식민지는 지구 면적의 약 85%까지 확대되었고, 그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 대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시아였다. 6)

일반적으로 서세동점의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이 아시아 불교 전통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일차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는 아시아 민중들의 생활문화의 원천이었으며 사회통합을 이끌어온 정체성의 기반이었다. 아시아에서 불교는 종교와 철학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이며 이데올로기이고 동시에 아시아인의 가치관을 형성시킨 궁극적 원천이다.7)

이러한 불교적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아시아 전역에 유럽의 식민주의가 도래하고 서구적 가치관과 문물제도가 침투하자, 아시아의 불교계에는 바야흐로 긴장과 변화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긴장과 변화의 기운은 근대화를 촉구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으며 불교 승가로 하여금 비판적인 자기반성과 개혁을 시도할 것을 새롭게 요구하게 되었다.8)

이러한 상황이 한 동안 지속되다가, 아시아 불교계에 적극적인 사회개혁 운동을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는, 나라마다 약간의 시간적 차이는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폐막을 고한 후 서구의 식민주의가 붕괴되면서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구 식민주의가 붕괴되면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①패권주의 나라들의 정치·경제적인 예속에서 진정한 해방을 성취하는 문제, ②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자국 내의 민주화 문제, ③산업화를 통한 성장과 번영의 문제, ④평화와 안전의 문제 등을 떠안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불교의 사회참여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9)

3. 참여불교 운동의 제 양상

1) 인도에서의 불교개종운동과 TBMSG 담마혁명

인도에서의 불교 사회개혁 운동으로는 암베드카르(Ambedkar)가 주도한, 계급 차별에 대한 정치적 저항 운동으로서의 불교개종 운동과, 상가락시타(Sangharakshita)에 의해 창설된 범세계불교교단우의회(TBMSG:the Trailokya Bauddha Mahasangha Sahayaka Gana)의 담마혁명을 들 수 있다.

먼저, 암베드카르의 불교개종 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빔라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 천민 신분으로 끝없는 학대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때, 그와 그의 형은 교실 맨 뒤쪽에 자리 한 장을 펴놓고 조용히 앉아 있어야 했고, 공책을 선생님께 건넬 수도 없었으며, 물을 마실 때에는 신체적 접촉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위에서 입에다 부어 주었으며, 그 지역 이발사는 그들의 이발을 거부할 정도였다.

말년에 불가촉 천민 인권 운동을 한 아버지의 영향과 인근 바로다주(州) 토후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암베드카르는 뉴욕 콜럼비아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런던 대학에서는 이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독일의 본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후일 정부각료·신문사 편집장·대학교수·법과대학원장 등을 지냈지만 주택 소유에 제한을 받거나 구타를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등 계급적 폭력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10)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힌두교인의 호의나 영국의 무계획한 지원, 그리고 불가촉 천민들의 개별적인 노력은 인도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으며, 오직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사회혁명만이 이러한 폭력과 편견을 줄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도를 망치고 있는 것은 영국이 아니라 카스트 제도라고 주장하고, 사원과 공공시설에 대한 평등한 출입을 주장하는 연좌데모와 집회를 이끌며, 힌두교도와 협상을 하기도 하고 불가촉 천민의 권리에 관한 소송을 법정에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의치 않았다. 그러자 암베드카르는 계급 차별의 상징인 《마누법전》 한 권을 불태우며 힌두교를 포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찾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그는 한 회의에서 1,000여 명의 피억압계급 지도자들에게, “자존심을 얻고 싶다면 개종하시오. 힘과 평등과 독립을 원한다면 개종하시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개종하시오.”라고 하면서 종교는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임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싯다르타 대학과 밀린다 대학을 설립하여 사람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그는 불교의 담마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가르치는 뛰어난 종교라고 보았으며, 붓다의 관심이 내세(來世)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현세에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있다는 점을 들어 붓다야말로 가장 위대한 종교지도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실론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그는 남은 여생을 불교의 부흥과 확산에 바치겠다고 선언하였다. 1951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설을 하고 글을 쓰며 ‘인도불교인협회’를 창설하는 등 쉬지 않고 노력하였다.11)

마침내 1956년 10월 자신을 따르는 약 50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인도 최고령의 챤드라마니 장로의 지도로 불교로 개종하였다. 6주 후에 암베드카르는, 힌두교도로서는 죽지 않겠다고 한 21년 전의 맹세를 지키고 타계하였다.12) 그러나 암베드카르의 불교는 과거의 여느 불교와도 다르다.

그의 저서 《붓다와 그의 가르침(The Buddha and His Dhamma)》에 의하면, 출가 생활, 선정과 깨달음, 업과 윤회, 전통적인 경전에 등장하는 기적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는 일이 없으며, 유부(有部)나 중관학파 그리고 유식학파의 사상과 사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불교에는 원래 사성제의 교리가 없으며 사성제는 경전 결집 중에 잘못 알고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3)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논의와 비판의 여지가 많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영국 출신의 불교개종자인 상가락시타 스님의 TBMSG 담마혁명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TBMSG는 인도의 새로운 불교도(암베드카르 불교인 그룹)의 종교적·사회적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1979년에 상가락시타에 의해 출범하였으며, 그것은 상가락시타가 이미 1960년대 말에 설립한 ‘서구불교종단(WBO)’과 ‘서구불교종단우의회(FWBO)’의 인도 지부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TBMSG는 엄밀하게 말해서 암베드카르와 상가락시타의 새로운 불교 이념이 결합한 혼합적인 운동으로, 암베드카르 박사의 비전이 주는 감화와 상가락시타 스님의 담마에 대한 청사진 그리고 로카미트라 법사의 조직력을 통해 주로 ‘이전의 불가촉 천민(ex-Untouchables)’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TBMSG는 크게 3개의 내부 조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①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 없이 포용하는 근대적 불교 교단인 ‘범세계불교교단(TBM)’, ②법적으로 구성된 종교조직인 협의의 TBMSG, ③‘바후잔 히타이(Bahujan Hitay: ‘만인의 이익을 위해’라는 뜻임)’라고 불리우는 사회활동 분과의 셋이다. ‘새로운 불교인의 새로운 종단’이라고 할 수 있는 TBM은 ‘실제적인 삼귀의’를 중시하는, 엄격한 출가자와 진지한 재가자가 함께 하는 교단이다. 이 교단의 구성원들은 우바새와 비구라고 하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피하기 위해 ‘다르마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법사(dharmachari, 여성은 dharmacharini)’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TBM은 150명이 넘는 지도자(90년대 초 기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전의 불가촉 천민’으로서 다른 암베드카르 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교사, 기술자, 정부 관리 등의 지위를 버린 사람들도 있다. 이전의 불가촉 천민 사회에서 TBM의 법사들은 다른 비구들보다 수행도 많이 하고 더 헌신적인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으며 출가 법사의 수는 아직 적지만 꾸준한 성장세에 있다.14)

다음으로 TBMSG는 본래 이 운동의 담마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법적인 행정상의 기구이다. 그 구성은 교단의 구성원(TBM)과 담마미트라(Dhammamitra, 담마의 우호자) 및 담마사하약(Dhammasahayak, 담마의 후원자)으로 이루어져 있다. TBMSG는 개종식을 기획하기보다는 이미 불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돕는 데 역점을 둔다.

이 운동은 이전의 불가촉 천민 불교인들이 ①담마의 실천을 통해 자신을 개혁시키고, ②다른 이들과 함께 사회를 개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하는 데 목적을 둔 담마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TBMSG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①담마 교육과정과 강연을 위한 대중 센터, ②더욱 집중적인 불교 수행을 위한 수련원, ③구성원들과 동료들이 서로 의지하며 여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주거공동체 등을 설립하는 데 힘쓰고 있다.

또한 정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불교적 해방이라고 한 암베드카르의 주장은 TBMSG 담마운동의 사회적 차원인 ‘바후잔 히타이’로 계승되고 있다. 1992년 말 현재 ‘바후잔 히타이’의 주요 계획에는 1,200명 이상의 어린이를 수용할 42개의 유치원, 600여 명의 초중고생을 수용할 15개의 합숙학교의 설립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280명을 수용하는 비합숙용 학습반과 190명을 수용하는 여성을 위한 글자교실, 125명을 수용하는 직업교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7,000명의 빈민지역 거주자들을 위한 건강 상담출장소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또한 여러 지방에서 다양한 스포츠·문화 프로그램과 이동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직업 프로그램과 조합 사업 등이 기획되고 있기도 하다. 이 운동에 소요되는 경비의 일부는 영국의 FWBO 후원자들이 결성한 ‘인도 원조회(AFI)’에서 지원하였으며, 이 AFI는 1987년 ‘카루나 트러스트(Karun.a Trust)’로 확대 개편되어 여전히 TBMSG와 ‘바후잔 히타이’의 사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고 있다.15)

2)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

모두의 행복을 위한 봉사캠프 운동을 뜻하는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Sarvodaya Shramadana Movement)’은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불교계의 대표적 사회개혁 운동이다. 1958년 재가자 아리야라트네(A.T. Ariyaratne) 박사가 창설한 사르보다야는 19세기 말엽에 시작하여 20세기와 ‘식민지 이후’ 시기까지 지속된 불교 부흥의 한 표상이었다.

일찍이 스리랑카는 11세기와 13세기에 힌두교 세력인 인도 남단의 촐라(Chola) 족의 침공을 받았고 14세기에는 회교도의 침공을 받았다. 16세기에는 포르투갈로부터 가톨릭을 강요당했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 18세기에는 영국으로부터 개신교를 강요당했다.16)

1873년, 스리랑카에서는 ‘파나두라(Panadura)의 논쟁’이라고 하는 유명한 종교논쟁이 있었는데, 이때 구나난다(Gunananda) 스님이 기독교도를 논파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17)

이러한 상황에서 담마팔라(Dhammapala)는 1891년 콜롬보에 ‘부다가야 대보리회(大菩提會)’를 창설하여 불교 부흥 운동을 전개하는데,18) 아리야라트네의 사르보다야 운동은 이러한 스리랑카 불교 부흥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다. 사르보다야는 1958년 콜롬보 나란다(Nalanda) 대학 학생들의 일련의 봉사 캠프에서 연원한다.

당시 이 대학 교수로 있던 아리야라트네는 학생들과 함께 한 가난한 마을에서 건물에 칠을 하고, 화장실을 만들며, 나무를 심고, 건강관리에 대한 강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와 그 친구들은 스리랑카 전역의 궁핍한 촌락에 많은 봉사캠프를 계속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이 운동이 출범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청년과 성인들이 동참하였다. 이 봉사 캠프는 ‘슈라마다나(노동력의 보시)’로 불리게 되며, 1958년에서 1966년 사이에는 이러한 슈라마다나 수백 개가 개설되어 30만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였다.

사르보다야는 1961년, 고대 도시를 부활시키기 위해 아누라다푸라에서 슈라마다나 캠프를 열었다. 여기서 참가자들은 이 운동의 이름를 ‘사르보다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으며 ‘불교적 가치와 원리에 따라 스리랑카의 정신적·경제적 재건을 위한 봉사를 운동의 목적’으로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67년, 촌락의 깨달음을 성취시키겠다는 ‘100개 촌락 개발 계획안’을 발표하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천했다. 사르보다야는 1971년까지 400개의 촌락에서 슈라마다나를 운영하면서 촌락의 깨달음을 이끌었고, 10년 후에는 2,000개의 촌락으로 확산되었다. 1972년 아리야라트네는 교수직을 물러나 이 운동의 지도에 헌신하며, 그 결과 ‘레이먼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받게 된다.19)

사르보다야는 규모가 커지자 학생 위주의 봉사캠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정부 기구(NGO)로 발전한다. 또한 국제적인 후원 단체의 도움으로 교육센터, 도서관, 미디어 센터, 회의장, 행정 부서를 갖춘 대규모 개발교육 종합시설을 모라투와에 건립하였다. 이 본부의 현관에는 “스리랑카에 사르보다야적인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팔정도의 불교이념에 어울리는 세계를 건설하고자 노력하는 젊은 남녀 훈련생이 머물고 있는 이곳의 이름은 ‘담삭 만디라(Damsak Mandira)’로서 법륜의 모양으로 세워졌다.”는 안내문이 쓰여 있다.

이를 계기로 사르보다야는 점점 거대한 운동으로 발전해가며, 1980년대에는 NOVIB(네덜란드), FNS(서독), NORAD(노르웨이), 헬베타스(Helvetas, 스위스) 등을 비롯한 20개 이상의 단체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들의 지원으로 사르보다야는 직업훈련학교·공동농장·유치원·슈라마다나 캠프 및 수천 명에게 강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때로는 정부와 비교될 만큼의 강력한 국가적 실체가 되기도 하였다.

1985년 사르보다야가 활동하는 촌락의 수는 스리랑카 전 촌락의 1/3에 해당하는 약 8,000에 달하였다. 1983년 6월에 발생한 참담한 소요사태 이후 사르보다야는 스리랑카의 다양한 민족단체들을 참가시켜 평화회의와 평화행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대통령의 요구로 몇 마일도 못 가서 중단되었지만, 83년 12월 6일 수천 명이 참가하여 가장 분쟁이 심한 지역을 통과하며 100일에 걸쳐 1,000마일을 행진하려던 것은 가장 극적인 계획이었다.

행진은 가끔 저항 세력과의 마찰을 일으켰지만, 아리야라트네는 “언제 어디서나 용감하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사르보다야에는 20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무기 든 자들에게 알려줍시다.”고 하면서 굽히지 않았다.20)

그러나 사르보다야는 그 사회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정부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그와 함께 후원자와 후원단체의 지원도 줄어들게 되어 그 미래는 밝지 않은 편이다. 이제 사르보다야는 새로운 자금원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와 그들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아리야라트네의 결의에는 흔들림이 없다. 마하트마 간디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사르보다야의 지도부는 이 운동을 위해 불교의 수행과 목적을 재해석하였다.

즉 자기 욕심을 버리고 세계에 봉사하는 것이 수행이 되었으며, 불교의 이상을 구체화하고 개인과 사회의 이중(二重)의 해방과정을 쉽게 이룩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개발하는 것이 그 목적이 되었다. 아리야라트네는 사회적 관심을 결여한 채 내세적인 목적만을 갖는 불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사회와 세계에 봉사하는 수행과 실천의 근거를 팔리 경전에서 직접 이끌어낸다. 경제적 활동에 대한 지침을 설하는 《구라단두경(Ku-t.adanta Sutta)》, 타인에 대한 의무와 사회윤리를 담고 있는 《육방예경(Sin.ga-lova-da Sutta)》, 현세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한 38가지 요소를 설명하는 《대길상경(Maha-man.gala Sutta)》, 좌절과 실패로 이끄는 행위를 설하는 《패망경(Para-bhava Sutta)》, 봉사만이 궁극적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임을 강조하는 《본생담(Ja-taka)》 등이 그러한 경전들이다.

아울러 아리야라트네는 사성제와 사무량심(또는 四梵住)과 같은 불교 근본교리의 실천적인 재해석을 시도한다. 사르보다야에 있어 수행의 목적은 개인과 사회의 깨달음을 통한 이중적 해방을 지향한다. 아리야라트네는 이러한 이중적 과정을 “다른 사람이 깨닫도록 돕지 못한다면 나 자신도 깨달을 수 없다.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남들도 깨달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사르보다야에서는 개인의 깨달음을 ‘인격적 깨달음’ 또는 ‘인격적 발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최고의 초세간적인 차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 전에 자신을 둘러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세속적 차원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사르보다야는 인간의 깨달음 및 발달 과정의 상호연관적 특성에 대해, 인격적·가족적·촌락공동체적·도시적·국가적·지구적 깨달음의 여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사르보다야에 있어 ‘발달’이란 서로 관련된 여섯 가지 요소 ― 사회적인 것·정치적인 것·경제적인 것·도덕적인 것·문화적인 것·정신적인 것 ― 가 각각 서로를 강화시켜 최상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통합과정으로서,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 사회의 사회·정치·경제적 요소의 혁신은 반드시 그 도덕적·문화적·정신적 요소를 재정비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통합적인 개발이라는 사르보다야의 이념은 식민지 시대 이후의 스리랑카에서 두드러진, 물질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개발 모델을 비판하며, ‘인간 중심적’인 개발 모델의 기본 목표를 물질적인 부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의 완성’에 둔다. 그리하여 사르보다야는 ‘빈곤도 없고 풍요함도 없는’ 경제 질서를 사회적 이상으로 추구한다.21)

3) 태국불교의 사회개혁운동

근대화 과정에서 태국의 불교 종단 내부에는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승려 중심의 전통이 점차 재가자에게 개방되고, 선정(禪定)에 대한 재가자들의 관심이 높아졌으며, 과거에는 주로 남성들이 하던 종교적 역할에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에 대응하는 두 가지 큰 흐름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보수주의 또는 근본주의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 또는 혁신주의의 흐름이다.

혁신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신앙과 실천을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데 힘쓰면서 현시대의 긴장과 혼란 및 죄악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나가려 한다. 붓다다사(Buddhadasa) 비구, 담마피타카, 프라웨트 와시, 그리고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 등이 교리와 종단의 개혁을 주장하는 혁신주의의 대표주자들이다. 이 중, 태국 사회와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붓다다사와 술락 시바락사의 개혁운동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붓다다사는 현대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붓다 담마(불교)’를 현대적 상황에 알맞게 적용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고, 현대 사회구조의 부도덕성과 이기주의에 대해 직설적인 비판을 해왔다. 그는 ‘수안 모크(Suan Mokkh:자유의 뜰)’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태국의 불교를 개혁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개혁은 궁극적으로, 그가 ‘이기적이지 않은 자연종교’라고 부른 그 어떤 것, 즉 경전이나 붓다 자체보다도 오히려 근원적인 불교의 진정한 원천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붓다다사 비구는 사성제·무아·공·연기 등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일상의 삶에 용해되어 있는 종교적 차원에 대한 현재적 재발견, 분열되어 있던 승려와 재가자 사이의 가교 역할, 과학과의 적합성, 지적인 엄격함, 담마의 세계관에 근거한 정치·경제적 논쟁의 해소 등을 성취할 수 있었다.22)

그의 활동은 사상·의미·가치·전망의 영역 속에서 다양한 매개 수단, 즉 강연·저작·잡지·시·시청각자료·‘수안 모크’와 그 시설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직접적인 정치적 활동이나 불교 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다.23)

하지만 그가 불교 단체와 진보 단체, 기독교, 그리고 사회 인사들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붓다다사의 주장 가운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의 ‘담마적 사회주의’이다. 그는 민주주의, 특히 서구 정부나 사업가 및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는 그 의미가 매우 애매모호하고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의 자유는 오염된 번뇌에 의해 이기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위험 요소이다.

붓다다사는 점증하는 빈곤·범죄·군비증강·환경파괴·자살·마약 남용 등 우리 시대의 심각한 사회문제들은 민주주의가 이기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는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이며, 폭력의 원인이고, 평화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공공이익이 우선시되고 개인보다는 사회가 더 근본적인 것이며, 전체로서의 사회에 대한 관심과 필요가 개인적인 것보다 우선시되는 관점이자 태도를 의미한다.24)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의 복수나 유물론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붓다다사는 ‘담마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우리는 붓다다사의 이 주장 앞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의 이념이 감각과 물질을 좇는 이기적 욕망의 자유와 동의어는 아닌지 진지하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가 불교지식인이자 사회비평가인 술락 시바락사는 방콕에서 출생하였으며 웨일즈와 영국에서 대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작가·출판인·강사·다양한 국제회의 참가자·평화인권운동가·NGO창립자·불교인 사회비평가·지성적인 도덕주의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태국불교협회’에서 발행하는 《비사카 푸자》의 명예편집장을 13년간 맡았으며, ‘태평양 아쉬라마’의 회원이자 ‘미래 문화 관계 동남아시아 연구회’의 초대회장을 지냈다. ‘코몰 킴통 재단’을 설립하였고, ‘개발에 관한 아시아문화포럼(ACFOD)’의 워크숍 진행자로 선임되었으며 그 회지인 《아시아의 활동》의 발행인이 되었다.

1989년, 평화와 비폭력·인권·환경·대안 경제학·가족간의 유대·여성문제 등의 다양한 활동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제 참여 불교인 조직망(INFB)’ 회의를 처음으로 소집하였다. 그는 이외에도 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술락은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지만, 원칙적으로 행동주의자다. 그는 꼼꼼하고 이성적인 논증보다는, 개인과 사회의 변혁을 소중히 여기는 자신의 일관된 입장에서 연설을 하고 글을 쓴다.

사실 그는 보다 뛰어난 인간 존재의 발전과 관련성이 결여되어 보이는, 이기적인 지식의 추구를 강하게 비판해왔다. 그래서 그는 학자나 철학자보다는 주창자나 예언자로 이해되기도 한다.25) 술락의 개혁적 불교사상은 그의 이른바 ‘소문자 b의 불교’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말하는 소문자 ‘b’의 불교에는 ‘실존주의’ ‘본질주의’ ‘보편주의’라는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이 담겨 있다. 먼저 실존주의적 특성이란 불교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뜻한다.

불교는 현재의 문제들을 해석할 수 있는 실천적 적응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혼돈과 위험 속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술락의 생애와 활동을 음미해 보면 소문자 ‘b’의 불교의 실존주의적 특징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본질주의란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본질적인 핵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때의 불교(또는 교리)는 술락이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거된 순수한 본래의 불교를 가리킨다.

반면에 대문자 ‘B’의 불교는 변용된 불교로서 진부화된 의식불교이자 국가종교로 형식화된 불교이며, 태국의 쇼비니즘과 군사적이고 침략적인 가치와 결탁한 그런 불교를 가리킨다. 그는 소문자 ‘b’의 불교의 본질적인 핵심을 ‘무아(無我)’의 가르침으로 해석하며, “여러분은 (특별한)신앙을……믿을 필요가 없으며, 붓다를 예배할 필요도 없고, 어떠한 의례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잊지 않고 늘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여러분의 의식을 개조하여 더욱 무아가 되도록 하는 것이며…….”라고 말한다. 26)

술락에게 무아의 도덕적 등가물은 ‘비착취’인데, 그는 보시를 ‘착취하지 않는 훈련’으로, 지계를 ‘착취적인 행위의 결과를 이해하는 것’으로, 선정을 ‘우리가 착취적인지를 알 수 있는 비판적 자각’으로 해석한다. 또한 그는 불살생(不殺生)에 대해,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않는 행동에서 그치지 않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포기하는 것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에게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생활수단을 빼앗는 것도 일종의 살인이다. 화학비료나 제초제를 사용함으로써 미생물이 풍부한 토양을 황폐화시키는 것도 살생이며, 많은 동물의 감소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숲을 파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낭비와 사치로 살고 있다면 이 역시 불살생계를 어기는 것이다. 끝으로, 소문자 ‘b’불교의 보편주의적인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술락의 보편주의적이고 초교파적인 통찰에 있어서는 물론, 기독교와의 대화에서도 무아는 그 중심을 차지한다. 술락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가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나지만 무아라는 궁극적 가치를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은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된다. 이것은 불교의 무아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27)

술락과 붓다다사의 주장에는 종교적인 것과 도덕성이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관이 나타나 있다. 사회부흥을 위한 술락의 통찰이 혁신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불교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붓다다사 비구에게서 영향을 받은 통찰이라고 할 것이다.

4) 베트남과 틱낱한의 참여불교

베트남 불교인들은 20세기 최대 비극의 하나인 베트남 전쟁을 통해 사회적 사건이 종교적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트남 사회개혁운동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은 틱낱한(Thich Nhat Hanh, 1926∼)이다. 현대 베트남 불교의 선사(禪師)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불교 사회개혁운동의 중요한 실천 원리를 제공하며 제도적 폭력에 맞서 저항했다. 그

대가로 1966년 미국을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고 있지만, 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국제 참여불교 운동의 지도자로서 주목받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베트남의 불교 사회개혁운동은 1963년 남베트남 디엠(Diem) 정권의 종교적 탄압에 대한 저항을 계기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운동의 목적이 점차 확대되고, 급기야 반정부 투쟁과 평화를 위한 반미 투쟁으로 발전해갔는데, 이것은 역사적 선례가 드문 일이다. 당시 디엠 정권은 그 해 석탄일에 게양된 불교기들을 훼손함으로써 불교계와 국민들을 자극했다. 불교도가 전국민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베트남에서 이 사건은 대규모 군중 시위를 촉발시켰다. 하지만 디엠 정권은 경고도 없이 그들을 향해 발포했다.

게다가 군의 발포에 항의하는 많은 승려와 활동가들을 체포하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 무렵 전세계가 경악할 만한 일이 발생했다. 6월 11일, 틱광둑(Thich Quang Duc) 스님이 정부에 항의하며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한 것이다. 다음날 불길 속에서 좌선을 한 채로 죽어가는 그의 사진이 미국 언론의 1면을 장식했다. 이를 계기로 불교인들의 분신이 잇따랐고,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사원이 모든 반정부 활동의 중심이 되자, 디엠 정권은 사이공과 후에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사원에 군인들을 투입했다. 당시 미국에 체류중이던 틱낱한은 디엠 정권의 인권 침해 사실을 UN에 알렸고, 곧 진상조사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사단이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승려가 분신했다.

그리고 11월 1일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디엠 정권은 종말을 맞이했다. 이후 새 정권은 불교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많은 승려들을 포함한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그리고 불교계에서는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를 통일한 ‘베트남 통일불교회(Unified Buddhist Church of Vietnam)’가 조직되었다. 당시의 경험을 통해 이들은 현실에서 불교 교리를 실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러한 원리를 알리는 것이 불교인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되찾으려는 불교인들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불교인들이 정치적 목표와 종교적 목적을 하나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조건에 부합한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교계는 남이나 북, 또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자는 데 있었다.

불교계 지도부는 반전 정서를 모아 선거에 대한 요구로 집중시켰지만, 사이공 정부는 여론의 압력을 무시했고 1966년 5월에 대대적인 군사적 탄압이 가해졌다. 이로써 불교계는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 속에서 성공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공 정부로부터 무참히 짓밟혔다. 실제로 UBC(Unified Buddhist Church)가 1968년에 입수한 자료를 보면, 사이공의 한 교도소 일지에는 1,870명의 수감자 중 1,665명이 ‘불교인’으로, 50명이 ‘공산주의자’로 기록되어 있다.28)

베트남 불교계의 사회개혁운동을 살펴볼 때 가장 극단적이고 상징적인 저항은 바로 승려들과 신자들의 잇따른 분신이다. 그것은 어떠한 운동단체에 의해서도 계획되지 않은,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개인적 결단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분신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참을 수 없다는 명백한 표현이며, 다른 이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강력한 행위였다.29) 당시 틱낱한은 이들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이 모두를 일깨우기 위해 행해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30)고 말했다.

베트남에서 전개된 사회개혁운동의 포괄적인 행동 원칙은 틱낱한의 사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가능한 한 빨리 모든 참혹한 고통을 중지시키고, 그럴 수 없다면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베트남 국민의 생존이었다. 둘째는 분쟁에 연루된 모든 것에서 떨어져 있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 사회개혁운동이 중도(中道)와 대승적 차원에서의 불이(不二)를 표방한 것은, 분쟁의 두 당사자는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상황의 양면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반대한 것은 압제자나 미군 병사가 아니라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통의 근원은 바로 제도적 폭력이었다. 베트남 사회개혁운동의 중심에 섰던 UBCV는 예언자적 소수 집단이 아닌 주요한 종교단체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카리스마를 가진 한 사람의 뛰어난 지도자가 이끌어간 운동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들의 사회개혁운동은 사원에 갇힌 불교를 현실사회로 끌어내 일상적 삶의 모든 면에 참여하고 봉사하도록 기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중도적인 행동은 불교적 의미 이상으로 사회개혁운동의 국제적인 논의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불교 운동가들은 새로운 정권과 협조하여 전체 국민에 봉사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불교계가 ‘대중적인 정치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정권은 또다시 승려들을 투옥하고 불교를 탄압했다.

UBCV는 1981년 불법(不法) 종교단체로 규정되어 국내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고, 감옥에는 여전히 불교인들을 포함한 양심수들이 수감되어 있다. 베트남의 사회개혁운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투쟁이다. 불교인들은 이 모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 틱낱한과 함께 조화와 치유를 위해 일하면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봉사할 날을 기대하고 있다.

5) 일본의 창가학회

근대 일본에서 창가학회(創價學會)만큼 불교적 이념에 기초하여 광범위한 사회·정치·문화 운동을 전개해온 종교단체는 없다. 창가학회는 일본 불교에서 유일하게 자생적인 종파를 만든 니치렌(日蓮, 1222∼1282)의 교리를 따르는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출발했다.

니치렌은 일본 역사상 가장 격동기라 할 수 있는 가마쿠라(鎌倉) 시대(1185∼1333)의 인물이다. 그는 당시의 혼란상을 말법(末法) 시대의 도래로 간주하고 오로지 《법화경(法華經)》의 가르침만이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누구든 단지 ‘나무묘호렝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법화경》의 제목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쌓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창가학회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1871∼1944)와 그의 제자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1900∼1958)가 1930년에 조직한 ‘창가교육학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창가교육학회의 목적은 마키구치의 교육 이론을 학습, 토론하여 그것을 편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교육철학자로서 평생을 바친 마키구치는 인간이 가치를 만들어낼(創價)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마키구치는 자신의 교육철학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928년 일련정종(日蓮正宗)에 귀의하면서 종교에 의지하게 되었다. 활동의 중심을 니치렌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방향으로 재조정하면서 1930년대 후반에는 다양한 계층의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마키구치는 전쟁을 반대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고, 도다 조세이도 함께 체포되었다가 1945년에 풀려나 ‘창가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학회 재건에 나섰다. 도다는 좌절에 빠진 전후의 일본인들에게 행복과 삶의 의미, 그리고 안정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창가학회는 상당수의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핵심 추종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1958년 도다가 사망했을 당시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함으로써 그는 국가적인 저명 인사가 되었다.

도다에 이어 창가학회의 지도자가 된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1928∼)는 현재까지 창가학회를 이끌어오며 도다가 세운 확고한 기반을 이어받아 창가학회를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내에서 창가학회의 회원은 1천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대체로 도시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창가학회가 오늘날과 같은 거대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힘과 호소력뿐만 아니라 철저한 조직화와 회원들의 열정적인 포교, 2차대전이라는 재앙으로 신뢰를 잃은 신도(神道), 그리고 불교국가의 국민들에게 현대적인 불교를 제공했다는 것 때문으로 볼 수 있다.31)

창가학회는 깊고 폭넓은 사회개혁운동을 펼친다는 점에서 일본의 신흥 종교 가운데 전례가 없다. 이들은 공명당(公明黨)을 발판으로 하여 정치권에까지 진출하였고, 창가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를 건립하는 등 자체적인 교육제도도 갖추고 있다. 창가학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전반적인 사회 제도를 급진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선 또는 정화시킴으로써 인류에게서 탐진치의 삼독(三毒)을 제거하는 것이다.32)

종교는 도덕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기초로서 역할해야 한다는 믿음 아래 종교적 이상주의와 현실적인 사회 활동 프로그램을 근본적으로 혼합시키는 데 활동의 중점을 두었다. 참된 세계 평화의 실현을 위해 창가학회는 오랜 동안 반전활동을 펼쳐왔다. 초대 회장 마키구치는 반전을 주장하다 옥중에서 사망했고, 제2대 지도자 도다는 1957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금지선언’을 발표했다.

평화 교육은 창가학회가 펼치는 반전 운동의 핵심인데, 이들은 전후 세대들에게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알려줌으로써 반전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국제적인 활동에 있어서 창가학회는 UN을 지원하고, 국제 지부라고 할 수 있는 ‘국제창가학회(Soka Gakkai International)’는 비정부기구(NGO) 대표부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SGI는 현재 156개국의 회원국을 거느리고 전세계에서 평화, 문화, 교육운동을 펼치며 타 문화간 인력과 사상의 교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창가학회가 공명당을 발판으로 정치 활동을 펼치는 것은 사회의 다른 측면들과 종교가 강한 연관성을 갖는 일본 사회의 전통에서 연유한 것이다.

공명당은 일본에서 종교를 바탕으로 성공한 최초의 정당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을 ‘왕불명합(王佛冥合)’, 즉 종교는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는 믿음을 근거로 정당화한다. 불교의 자비라는 종교 정신과 정치 이념이 결합될 때 국민들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창가학회는 경제적 사회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인간사회주의’와 니치렌 불교의 인간주의적인 철학에 기반한 ‘불법(佛法)민주주의’의 조화를 정치적 이념으로 제시한다. 그간 상당히 배타적인 경향을 보이던 창가학회는 1970년대 이후로는 종교적 활동과 세속적 활동을 철저히 구분하고 있다.

현재의 창가학회는 교리와 신앙의 측면에서만 배타적일 뿐, 사회적인 프로그램에서는 비회원 학자나 학생들도 참여하고 있고, 창가학회 회원이 아닌 전세계의 많은 지도자들과도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창가학회가 펼치는 일련의 사회개혁운동에 대해 일본 대중과 언론의 시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고, 기존 불교계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니치렌의 가르침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일련정종과의 마찰이 두드러진다.

재가자 집단에 불과한 창가학회가 본사(本寺)의 권위를 공격하고 있다는 일련정종의 주장에 맞서, 창가학회는 자신들은 니치렌에게서 직접 소임을 받은 완전 별개의 단체라고 주장한다. 일련정종과의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겠지만, 중요한 것은 창가학회가 실질적으로 니치렌 불교의 또 하나의 종파로서 성장해나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창가학회가 불교에 관심조차 없던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리고, 국제적인 종교단체로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4. 현대 아시아 참여불교 운동의 특징과 문제점

1) 특징

이상에서 살펴본 현대 아시아 불교계의 사회개혁운동의 특징을 한 마디로 규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개혁운동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르고, 개혁운동을 주도한 불교 지도자들의 불교관과 개인적 성향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우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혁신주의적 특징이다.33)

위에서 살펴본 인물들 중에는 신전통주의적인 특성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관심사가 ‘사회 변혁’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혁신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보다야 운동, 암베드카르, TBMSG, 술락 시바락사는 특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혁신하는 데 관심이 많았으며, 이에 부응하는 형태의 불교를 만들고 있다.34)

둘째, 균형 있는 삶의 추구이다. 아리야라트네는 불교를 정신적인 가르침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불교를 다음 세계로 한정시켜 버리는”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열 가지 조건(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안전한 물의 적절한 공급·의류·균형 잡힌 음식·소박한 집·기본적인 건강관리·통신시설·연료·실생활과 관련된 교육·문화시설과 종교시설에의 자유로운 접근)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또한 암베드카르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치·사회적인 차원을 가장 강조하였지만, 그의 견해에 의하면 정신적인 차원 역시 필수적인 요소이다. 반면, 정신적인 차원을 상대적으로 가장 강조한 사람은 붓다다사이지만, 사회적 차원 또한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35) 셋째, 출가와 재가의 융화이다.

불교 사회개혁운동의 주인공들 중에는 출가자도 있고 재가자도 있다. 그러나 대개 이들은 출가와 재가를 고집하지 않는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지 않고 포용한다. 그 구성원들을 모두 법사(dharmachari)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TBMSG의 ‘범세계불교교단(TBM)’은 이 점에 있어서 특히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2) 문제점

앞에서 살펴본 불교 사회개혁운동은 이론적인 면이나 실천방법의 면에서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점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승가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문제이다. “불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를 기본으로 한다.” 이것은 스리랑카 싱할라 족의 학자·승려·운동가인 라훌라 스님이 1946년에 한 말이다. 싱할라 족의 독립을 앞둔 당시, 공공의 문제에 승려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 수상과 각종의 언론이 비난을 하고, 전통 승단의 종정이 공식적인 경고를 하는 등 비판이 거셌는데 라훌라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사회·정치적인 참여는 ‘비구의 유산’이며 불교의 핵심이라는 역사적 입장을 밝히는 중요한 진술을 하였다.

라훌라에 따르면 승려는 전통적으로 ‘세간에 봉사하려고 윤회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며, 붓다와 그 가르침을 따라 언제나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며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설법하기로’36) 서원한 사람들이다.

또한 유럽 식민주의를 배경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스리랑카에 들어오면서 불교 승가의 전통적인 역할의 대부분(특히 사회복지활동)이 그들에게 침식당했다. 그리하여 비구들에게 남은 것은 경전 암송과 설법, 그리고 사원 안에서 세상을 등지고 게으르게 사는 삶이었다.37)

라훌라의 저서 《비구의 유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는데, TBMSG를 창설한 영국의 승려 상가락시타의 반응이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상가락시타는 《비구의 유산》에 대해 “진정한 불교인이라는 것이 물질적 행복을 진작시키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그는 테라바다의 목표인 열반이라고 하는 ‘초월적’ 상태나 대승불교의 이상인 ‘초월적인’ 보살행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다.”38)고 비판했다. 곰브리치(Richard Gombrich)나 키타가와(Joseph M. Kitagawa) 등도 붓다를 결코 사회개혁가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봉사의 내용과 방법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사회봉사’를 승가의 주요한 사회적 역할로 보는 라훌라의 입장만큼은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 교단은 ‘출가―재가’라는 이원구조를 통해 이루어져 있는 만큼 출가자와 재가자의 유기적 관계를 무시하고 불교의 목적과 의미를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한 우리의 삶은 적어도 생물학적 차원·사회역사적 차원·정신(종교)적 차원이 유기적이고도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바, 이러한 총체적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불교가 삶의 사회적 차원이나 생물학적 차원을 소홀히 생각하거나 부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둘째, 사성제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암베드카르가 사성제는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고 제자들이 잘못 포함시킨 것이라고 한 주장은 결코 수용될 수 없다. 그는 아마도 사성제가 고통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는 가르침이라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사성제는, 비록 형식은 다르지만, 불교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핵심적 진리인 연기법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연기법과 사성제는 똑같이 ‘괴로움의 자각을 통한 괴로움의 극복’을 설하는 희망의 가르침으로서 개인적·실존적·심리적인 내용과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경전을 보면, 연기법과 사성제의 가르침에는 이미 우·비·고·뇌(憂·悲·苦·惱)라든가 애별리고(愛別離苦)·원증회고(怨憎會苦)·구부득고(求不得苦)와 같은 사회적 성격이 강한 괴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 괴로움의 원인은 개인적인 무명과 탐욕만이 아니라 사회적 무명과 사회적 탐욕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무명과 탐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꼭 개인만의 것으로 보는 것은 경직되고 편협한 이해이다. 아리야라트네나 술락 시바락사와 같은 관점에서 사성제를 해석해도 무방할텐데,39) 암베드카르는 너무 주관적이고도 극단적인 이해에 빠져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폭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틱쾅둑 스님의 분신은 당시 세계인들에게 어떤 의미에서건 큰 충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법화경》〈약왕보살본사품〉의 소신공양에 비견되는 거룩한 종교적 행위로 보는 시각도 있고, 자신에 대한 일종의 폭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불교는 타살과 자살은 물론 일체의 무력과 폭력을 원칙적으로 배격한다.40) 또한 자신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행위를 가장 훌륭한 행위로 간주한다.41)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스님의 분신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크나큰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 그보다 더 지혜로운 방안이 없고 그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 없는 ―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더욱이 그 선택이 자기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실현이요 삶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최선의 창조적 ‘삶’이었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지혜와 자비 실현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는 행위였다면, 스님의 분신은 찬탄하여 마땅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하여, 붓다다사 스님은 ‘담마적 사회주의’, 그것도 ‘독재적인 담마적 사회주의(Dictatorial Dhammic Socialism)’를 주장하였다.42)

스님은 이 용어를 상당히 독특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어쨌든 사회주의적 경향의 이상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불교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양자택일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똑같이 중요시하지만, 불교적 자유는 단순히 시장에서 돈을 모으는 자유가 아니고, 불교적 평등은 단순한 외적 소유의 평등이 아니기 때문이다.43)

굳이 말하자면 불교는 ‘열린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동기론적 자유주의’임과 동시에 ‘결과론적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현대 아시아의 참여불교 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한정된 지면에 여러 나라를 다루다 보니 심도있는 연구가 되지 못하고 개괄적인 고찰에 그치고 말았다.

더욱이 미얀마·대만·중국의 비구니 및 비구니 교단, 아직은 완전한 비구니라고 할 수 없는 여성불교인, 이를테면 스리랑카의 ‘다사 실 마타보(Dasa Sil Matavo)’·태국의 ‘마에 지(Mae Ji)’·미얀마의 ‘틸라신(Thilasin)’·티베트의 ‘아니(Ani)’ 등의 새로운 움직임과 위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지 못했다.

또한 미얀마의 불교사회주의운동과 우리 나라의 민중불교운동에 대해서도 지면상의 이유는 물론, 위에서 살펴본 나라들의 사회개혁 운동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는 이유로 다루지 못하고 말았다.

끝으로, 아시아의 참여불교 운동은 대체적으로 그 태생적 배경 때문에44) 다소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있고, 이론과 지도력을 갖춘 몇몇 인물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일과성으로 끝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러한 참여불교의 보편적 이념과 이론을 더욱 체계화시키고, 그 이념에 따라 제도와 조직을 강화하며 국제적인 연대활동 등을 통하여 참여불교 또는 불교사회개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더욱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가야 할 것이다.<끝>

박경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역저서로 《민중불교의 탐구》(공저) 《원시불교 사상론》 《불교사회경제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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