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개혁운동 탐구

1. 서론

1) 연구목적

일찍이 붓다는 모든 존재가 무상(無常)함을 설하셨다. 또한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도 “어떤 사람이든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한결같이 인간의 대상세계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변해 버리는 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 사회나 집단의 변동도 이렇듯 무상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변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집합적 노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대상세계에 작용을 가하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 중에서도 특히 사회운동(social movement)은 인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집합적 노력이다.

이러한 사회운동은 사회의 변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회운동이 사회변동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사회변동은 또한 사회운동을 조건짓는다. 사회운동은 운동의 주체들이 살아가던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상황, 즉 정치경제적 조건이나 사회문화적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통상 사회운동론에서는 전자의 조건을 주관적 요인으로, 후자의 조건을 객관적 요인으로 분석적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회운동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우선 운동의 목표와 주체 그리고 결과를 파악해야 하지만, 운동의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또한 사회운동의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을 고려하면서 왜 그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운동의 과정)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불교계의 개혁운동처럼, 한 사회 속의 특정 집단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회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그 집단의 내부적 요인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불교의 개혁운동의 경우 많은 측면이 일차적으로는 종단 내부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 한국불교의 개혁운동의 시기, 속도, 그리고 정도 등은 종단 내부의 역학관계에 따라 달라졌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대부분의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경우 당시의 불교적 과제가 사회운동을 촉발하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일종의 사회운동으로서 한국불교 개혁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적 조건과 불교계의 제반 조건을 고려하면서 운동의 목표, 주체, 전개과정, 그리고 결과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목적은 현대 한국불교사에 등장했던 불교개혁운동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선 개별 개혁운동 발발 당시의 전체 사회의 사회적 조건과 불교 내적 조건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운동의 목표, 주체, 전개과정, 그리고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개별 운동의 특징을 파악한 다음, 이를 비교하고 종합함으로써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흐름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2) 연구방법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글의 목적은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다. 그러나 학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한국불교학계에서 조차도 아직 해방 이후 현대 한국불교사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도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현대 한국불교사는 고사하고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측면만 보더라도 아직도 개별 사실에 대한 확인이나 개별 사건에 대한 엄격한 검증조차도 학문적으로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또한 현대 한국불교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사건과 사실 중에서 무엇을 개혁운동으로 간주할 것인가에 관한 학문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도 않다. 게다가 현대불교 개혁운동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종단의 구성원 및 현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을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방법론적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우선 우리의 연구대상을 어떠한 존재론적 입장에서 규정하고 또 어떠한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현대 한국불교사를 상대적으로 잘 이해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료의 문제(수집·분석·검증)도 이러한 과학철학적 입장과 직결되어 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전제 위에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한국불교계의 담론 일반에서 개혁운동이라고 일컫는 거대한 사회적 사건 중에서 시기적으로 현대에 해당하고, 조계종단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면서, 동시에 사회운동적 성격을 띤 사회적 사건을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정의할 때, 우리는 우선 해방 직후의 불교혁신운동, 50~60년대의 정화운동, 80년대의 민중불교운동, 그리고 94년의 종단개혁운동 등을 연구대상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은 이러한 사회적 사건 하나 하나를 학문적으로 논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1) 이러한 사건들을 비교하고 그들 사이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파악함으로써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특징과 흐름을 파악해 보는 데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과 관련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을 구성하는 숲들의 특성을 확인해 보고 나아가 그러한 숲으로 이루어진 산맥의 흐름을 밝혀보고자 한다. 둘째, 한국불교계의 개혁 관련 쟁점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대별되고 있다.

하나는 의식개혁이나 수행풍토 조성을 포함한 정화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개혁의 측면이다.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을 이렇게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때, 일견 정화운동은 전자의 측면에서 대표성을 지니는 사례로 간주할 수 있고, 94년 종단개혁은 후자의 측면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2)

게다가 상대적으로 볼 때, 두 사건은 어느 정도 불교개혁적 성과를 거둔 사건이다. 이에 우리는 이 두 사건을 중심축으로 하여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흐름을 인식해 보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정화운동과 94년 종단개혁운동을 상대적으로 성공한 개혁운동으로 설정하고, 해방 직후 불교혁신운동과 1980년대 민중불교운동은 각각 정화운동과 94년 종단개혁운동의 전사(前史)로 다루고자 한다.3)

그리고 정화운동 이후에 일어난 1970년대 종권분규와 94년 종단개혁운동에 뒤이어 발발한 98년의 사건은 각각 그 이전 개혁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간주하여 정화운동과 종단개혁운동의 평가와 연관시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셋째, 정화든 제도개혁이든 관계 없이 모든 개혁운동이란 본질적으로 기존체제(및 체제의 현상태) 중 일부를 새롭게 고치려는 운동이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사회적 갈등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개혁운동의 전개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개혁운동의 전개과정과 관련된 모든 갈등 현상이나 사건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개혁운동의 평가와 관련하여 유의미한 부분이나 사건의 흐름상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만을 다루고자 한다.4) 또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사건이나 갈등 현상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우리는 현상 뒤에 숨겨진 본질을 고려하고자 하며, 기본적으로 다원론적 입장을 고수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갈등 현상에 관한 이해와 관련하여, 재산상의 이해관계라는 경제적 요인으로 환원하는 시각에서부터 문중파벌이나 권력관계를 강조하는 정치적 시각, 그리고 심지어 제도론과 인적 자질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 과정에서 파생된 갈등현상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고 판단되고, 따라서 갈등현상을 궁극적으로 하나의 요인으로 환원하여 해석하는 결정론적 시각만으로는 이러한 복합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

이상과 같은 방법론적 전제 위에서 우리는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불가피하게도, 이 글의 구성에서 이미 몇몇 이름난 봉우리와 특징적인 나무들이 불가피하게 배제되어 있으며, 이 글의 전개과정에서도 높은 수준의 추상적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연구대상인 숲이나 나무에 관한 일부 현상조차 사상(捨象)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이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에 관한 거시적 패러다임을 모색하거나 일반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학문적 시도에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이 현대 불교 개혁운동의 흐름을 이해해 보려는 후발주자들이 밟고 지나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면, 이 글의 의의는 충분하다.

2. 정화운동

1)전사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장래를 결정적으로 규정하였던 역사적 시기는 미군정기(美軍政期)이다.

이 시기에는 민족의 장래가 일제 식민지의 여파를 완전히 벗어나 자주적 독립국가를 건설하느냐, 아니면 또다시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억압과 굴종의 암울한 역사를 되풀이하느냐의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한국불교의 혁신세력은 불교계의 당면 목표를 ‘자주불교·민중불교·민족불교’의 건설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첫째, 매불승려를 숙청함은 물론 식민지적 제도 및 법률을 철폐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또한 적산사원 등 일체의 재산을 통합하여 교단의 물적 기초를 구축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했다. 이것이 ‘자주불교’의 과제였다.

둘째, 해방 직후 조선조의 억불정책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진 한국불교는 이제는 사회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했다. 이 과제가 바로 이른바 ‘산중불교’를 극복하고 ‘민중불교’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셋째, 식민지하에서 오랫동안 망각해온 불교의 민족사적 지위와 역할을 자각하는 의식적 과제를 들 수 있다. 사실상 일제 36년간 일부의 선각자를 제외한 한국의 많은 승려들은 불교와 민족의 깊은 연관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민족사적 역할을 방관하거나 망각한 채 친일적 행각을 자행해 온 것도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불교의 민족사적 지위와 역할을 재인식하고 당시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민족사적 과제의 해결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것이 ‘민족불교’의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집합적 노력이 이른바 ‘불교혁신운동’이다. 당시 시대적 과제와 불교적 과제의 해결의 필요성을 자각한 일부 승려들 중에서 특히 재경(在京)승려가 중심이 되어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38선 이남의 대의원 60여 명이 참여한 전국승려대회에서는 일제에 복무했던 총무원 간부들을 대체하여 총무원 집행부를 새로이 구성하고 일제 총독부로부터 인가받은 종명(조선불교 조계종, 1941년)을 폐지하는 한편, 종단 중앙기관인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종무원’을 ‘조선불교 중앙종무원’이라 개칭하는 등 개혁활동이 전개되었다.5)

그러나 그것은 불교 내부의 반민족적·반불교적인 식민잔재를 청산하기에는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식민잔재 청산의 핵심인 친일, 부역승려에 대한 종단 차원의 대책이 전혀 마련되지 못한 채 몇몇 간부를 경질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종단 내부에서의 친일, 부역승려에 대한 숙청의 노력은 유명무실해진 채 적산사원의 관리권, 소유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변질되고 불교 내부의 식민잔재청산이라는 불교개혁의 대의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다양한 불교혁신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불교계 내부의 식민잔재 일소를 위한 실천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봉은사 소속사암의 청년 승려들이 결성한 조선불교청년동맹(위원장 이종익, 1945년 8월말경 창립)은 시내 적산 사찰 제1호인 장충단에 있는 박문사(博文寺)를 접수하고 이를 근거로 불교혁신과 식민잔재 청산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불교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좀더 조직적인 노력이 요청됨에 따라 이종익을 중심으로 ‘조선불교혁신회’를 구성하였다. 조선불교혁신회는 대중불교 실현을 목적으로 사찰재산의 통합과 적산사찰의 효율적 이용을 주장하고, 일제잔재 청산과 불교의 자주적 발전을 위한 토대를 형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전국승려대회 개최를 계기로 진보적인 청년승려들이 ‘조선불교청년당’을 결성하였으며 청년당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혁명불교도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종래의 모든 봉건적 형식(일제잔재 포함)을 타파, 숙청하고 교단개혁과 조국광복 사업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다방면의 실천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불교청년학생들은 친일부역승과 부패타락승을 숙청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조선불교학생동맹’을 조직하여 실천활동을 벌여 나갔다.6)

이렇듯 불교혁신운동은 불교개혁운동의 목표를 뚜렷하게 설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개혁운동의 주체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내외적 제약요인으로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극도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겪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으로 대표되는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불교 내부의 역학관계도 정화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듯이, 불교혁신세력의 요구가 손쉽게 수용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불교혁신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불교혁신운동은 ‘자주불교’라는 첫번째 목표조차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으며, ‘자주불교’의 과제는 정화운동의 태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2) 정화운동의 목표와 주체

정화운동은 대통령의 유시라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합법성과 ‘왜색불교의 청산 문제’라는 시대적 과제 및 비구승 중심의 청정수행가풍 확립이란 불교적 과제가 결합되어 발발한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이승만 정부의 정당성이 부인된, 따라서 정화유시의 효력이 상실된 1960년 이후까지도 지속되었는바, 이러한 사실은 대통령 유시의 법적 효력보다는 일제 잔재의 청산과 청정수행가풍 확립이란 불교적 과제가 이 사건의 보다 본질적인 이유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정화운동은 앞에서 살펴본 불교혁신운동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는 사회적 사건이다. 그러나 불교혁신운동이 주로 제도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정화운동은 인적 청산에 더 큰 비중이 놓여 있었다. 정화운동의 방향이 정화유시 및 일제잔재 청산과 청정수행가풍의 확립에 놓여져 있었지만, 이는 곧 대처승의 축출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정화운동의 보다 직접적인 목표는 대처승이 차지하고 있던 자산과 권력을 박탈하고 이를 비구승이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제의 청산과 청정수행가풍의 확립을 목표로 한 정화운동은 이권다툼과 분규로 변질될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다. 또한 정화운동이 비구승측과 대처승측 사이의 분규와 폭력을 동반하면서 전개됨에 따라 한국불교의 정통성 및 정체성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명분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화운동의 각 세력이 불교 내부의 사부대중과 불교 외부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의명분이 점점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대의명분이 중요해질 수록 정체성 문제는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주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비구승이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정화유시가 정화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정화운동이 정부의 개입과 주도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편, 정화운동은 전국민적 관심 속에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15년 이상 지속된 사건이었으며, 수많은 법정 공방을 거치면서 진행된 사회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법기관을 비롯한 유관 정부기구와 국민들의 여론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정화운동의 과정7)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는 내용의 정화유시를 발표하였다. 이 유시에 힘을 얻은 교정 만암 스님을 비롯한 독신비구승들은 1954년 7월 6일 종명을 ‘불교조계종’으로 하는 종헌을 제정하기 시작하여 1954년 9월 27일부터 3일 간 선학원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새로운 종헌을 채택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종조를 보조 국사로 하고 승단은 비구승단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당시 대통령의 유시와 새로운 종헌은 비구승들이 대처승으로부터 종권을 이양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였다. 게다가 비구승들은 이러한 법적 근거 이외에도 두 차례의 전국비구승대회(1954년 8월 24일과 9월 27일)를 개최하여 다시 한 번 종단 내적 합법화를 꾀하는 동시에 정당화와 세력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숫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던 대처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했으며 실제로 그러하였다. 불교정화사건은 이러한 이해갈등의 불가피한 산물이었다. 1954년 9월 30일 대처측 총무원과의 종권인계합의가 결렬되자 이후 비구측은 4차에 걸쳐 경무대를 방문하였고, 그때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시를 발표하여 4차에 걸친 유시를 발표하였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정화유시 발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처세력은 정화유시의 요구와 비구승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폭력사건이 빈발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한편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대처세력의 반격이 시작된다.

1960년 5월 30일 대처측은 부처님오신날 법요식 이후 ‘비구승은 물러가라’라는 시위를 벌이고 해인사·화엄사·통도사 등 10여 개 사찰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한편 비구측은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찰정화대책위원회의 무효 확인 소송’의 판결 날(1960년 11월 24일)이 다가오자 ‘불법에는 대처승이 없다’며 시위를 벌이는 한편 ‘불교정화대책위원회’(위원장 이청담)를 구성하고 승려대회를 개최하면서 대법원이 소송을 오판할 경우 순교할 것을 결의하고 재판 전날에 500여 명이 단식을 단행하였다.

또한 대법원의 판결이 고등법원으로 환송판결이 내려지자 500여 비구·비구니가 법정에 난입하였고 그 와중에 6명의 비구가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사건이 발발한 이후 1961년 3월 대법원은 결국 비구승단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지만, 양측의 갈등은 전국적으로 계속된다.

이러한 와중에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다. 그리고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세력들은 즉각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를 구성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는 1961년 11월 9일과 12월 9일 불교정화에 대한 담화를 두 차례나 발표하였고 문교부에서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안’을 불교계에 제시하였으나 양측 모두에게서 거부되었다. 이에 박정희 의장은 1962년 1월 13일 “정부의 성의가 무시되고 분쟁이 계속되면 묵과하지 않겠다.”는 위협적인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 결과 양측은 1961년 1월 22일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 ‘불교재건비상종회’ 회칙을 입안하고 종회의원 30명(각측 15명)을 선출한다. 이렇게 탄생한 비상종회는 1962년 2월 12일 새종단(소위 통합종단)의 명칭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종조는 보우 국사로 하는 등 승려자격 문제를 제외한 종지, 종명에 완전 합의한다. 또한 비상종회는 1962년 3월 25일 새로운 종헌을 확정 선포하고, 종정으로 이효봉 스님(비구측)을 그리고 총무원장으로 임석진(대처측)을 선출함으로써 통합종단을 구성하였고 1962년 4월 1일 조계사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통합종단이 구성된 직후, 박정희 정부는 ‘불교재산관리법’을 공포하였고, 이는 양측 사이의 재산분규를 또다시 야기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당시 양측은 재산상의 이해관계 이외에도 종헌의 내용―특히 ‘승’의 자격문제―을 둘러싼 갈등, 종회 구성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감정적인 갈등 등이 폭발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결국 이러한 이해관계와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통합종단에 참여하였던 대처측은 총무원장 및 간부의 사퇴를 결의하고 ‘비구측과 투쟁할 것’을 선포한다.

이리하여 통합종단은 결렬되었고, 대처측에서는 ‘종헌무효 및 종정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후 양측은 이 소송을 중심으로 대립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다가 1969년 10월 23일 대법원이 마침내 비구측의 승소판결을 내림으로써 대처측은 독자적으로 ‘한국불교 태고종’을 창종하게 되었고 정화운동은 종결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정화운동은 왜색불교의 청산과 청정수행풍토의 확립이라는 목표를 모두 달성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성과만을 남겼다. 오히려 사찰접수 등 이권다툼으로 비화된 정화운동은 15년 이상의 분규, 국가(기구) 의존, 일부의 폭력사건, 불교재산의 망실, 그리고 군소 종단의 창종 등과 같은 무수한 부정적인 결과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4) 정화운동의 결과 : 제도화를 둘러싼 갈등

태고종의 창종으로 정화운동은 종결되었으나, 종단의 제도화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특히 일제잔재의 청산이라는 정화운동의 명분이 인적 청산과 이권다툼으로 변질되면서 제도적 측면에서 볼 때 아직까지도 일제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1970년대 한국사회는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합리성과 합법적 지배가 전일화되어가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불교 조계종의 분규는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발발하였다. 물론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종헌 개정을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종단 내부의 지배체제의 정비를 둘러싼 갈등에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불교 조계종단은 종단의 지배질서를 상징적 권력(카리스마적 권력)을 중심으로 재편하느냐 혹은 제도적 권력(합법적 권력)을 중심으로 재편하느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한 측에서는 종단의 권력구조를 종점 중심제로 체계화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종헌을 만들고자 하였으며, 다른 측에서는 총무원장 중심제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선종과 교종의 갈등, 이판과 사판의 갈등 등에 비견될 수 있는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성격의 갈등이었다.

문제는 어떠한 방식으로 권력구조를 재편하더라도, 그것은 인사권 및 재산권과 연관되어 있었고 세력의 교체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실질적인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갈등은 타협이나 봉합으로 귀결될 가능성은 처음부터 매우 희박하였다. 물론 이 사건은 제3 세력, 즉 전국신도회와 같은 신도집단이나 문공부와 같은 정부기구의 중재 노력으로 초반부에는 다소 봉합되는 듯 하였지만, 이러한 봉합상태는 두 측 사이의 갈등이 법적 분쟁으로 비화되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졌다.

결국 정화운동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해방 직후부터 한국불교계에 요구되었던 자주불교, 민중불교, 그리고 민족불교의 과제 중에서 자주불교의 내용 일부와 민족불교의 내용 일부만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를 얻기 위해 한국불교가 치루어야 했던 대가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또 컸다.

3. 94년 종단개혁운동

1) 전사

정화운동과 70년대 종권분규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불교는, 일제시대부터 교계 선각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또 실천되었던 과제, 즉 민중불교의 과제를 거의 달성하지 못했다.

비록 통합종단이 발족하면서 도제양성·역경·포교를 종단의 3대 종책과제로 설정하였지만, 한국불교는 교계 내부의 갈등과 불안정성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종책과제조차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지 못했다. 이러한 불교적 과제들이 80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80년대 한국사회는 사회민주화의 요구를 실천해 나갔던 시기였다. 이러한 불교적 과제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태동한 집합적 노력이 이른바 ‘민중불교운동’이다.8)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은 ‘사원화운동’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원화운동은 ‘세간의 승가화 = 승가의 세간화’라는 불이적 과제를 이론적으로 치밀하게 정립하고, 이를 기초로 한 실천운동으로 ‘전국불교 야학연합회’를 건설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 운동의 경우 사찰을 야학장소로 삼으려 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한편 1981년 7월 11일부터 16일까지 중앙승가대학에서 개최되었던 ‘전국청년승가 육화(六和)대회’에서는 전국의 학인스님들이 모여 불교개혁을 결의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 속에서 불교의 역할과 불교운동 속에서 승려의 역할까지 규정했다는 점에서 이후 민중불교운동의 발전에 큰 계기를 만든 사회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3년 7월 17일 범어사에서 개최된 ‘전국청년불교도연합대회’를 통해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조직화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대회에서는 전국 사찰의 수좌와 학인 스님이 약 1천 명 정도 참가하였다. 또한 이 대회는 한국불교의 역사적 평가는 물론 미래의 방향까지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바, 그것은 불교의 민중화·민족화·현대화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제시된 불교개혁의 내용은 1983년 9월 5일에 출범한 ‘비상종단’의 불교개혁논의에 그대로 제출되어 상당한 내용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한편 1985년 5월 14일에 출범한 ‘민중불교운동연합’은 불교개혁과 사회민주화를 보다 과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당시 사회운동의 부문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실천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동문제와 농민문제에 대한 실천적 개입은 민중불교운동연합으로 하여금 정부당국의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86년 5월 3일에 발생한 인천사태는 민중불교운동이 와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민중불교운동이 재활성화되는 계기는 1986년 9월 7일에 전국에서 약 2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불교의 자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천명한 ‘해인사승려대회’를 꼽을 수 있다. 이 대회에서는 그 동안 금기로 여겨졌던 ‘10·27 법난’을 ‘폭거’로 규정함은 물론 ‘호국불교’에 대한 개념을 ‘정권의 비호’가 아닌 ‘국민 일반의 비호’라고 확대해석함으로써 종전의 보수종단적 성격을 탈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계기는 1987년의 소위 ‘민주화대투쟁’을 전후한 수많은 대정부 투쟁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1988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회 전체가 북방정책에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불교계에서도 통일문제나 민족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민족자주통일 불교운동협의회’는 그 결실이었다. 특히 ‘민족자주통일 불교운동협의회’는 1989년에 결성된 ‘전국민주연합’에 가입함으로써 계급운동의 성격을 탈각하고 민족운동의 성격을 강조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민중불교운동의 흐름은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되지만, 1992년 김영삼 정부의 탄생과 함께 그리고 한국사회의 사회운동의 퇴조와 함께,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한다.

대신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을 이끌었던 주체세력들이 관심의 방향을 종단 내적 문제로 돌림으로써 민중불교운동은 스스로 종말을 고하였다. 결국 민중불교운동은 80년대 중반까지 불교개혁의 목표와 불교의 민중화(혹은 대중화)를 운동의 양대 축으로 설정하고 실천해 나갔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종단개혁보다는 사회민주화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의 역할에 집중하였다.

이렇게 볼 때, 민중불교운동은 사회참여라는 측면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반면에 불교개혁의 측면 ― 그 중에서도 특히 실천적 측면 ― 에서의 성과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적절히 반영하면서 등장한 민중불교운동은 일부 소장 스님들의 사회의식을 각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정치세력화하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이들이 1994년 종단개혁운동의 일부 주체로 활동하였음은 물론이다.

2) 94년 종단개혁운동의 주체, 목표, 그리고 전개과정9)

90년대 종단개혁운동의 주체는 범종추(범종단개혁추진위원회, 이후 범종추)였다. 범종추는 종단개혁을 통해 한국불교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겠다는 취지로 8개 승가개혁단체, 즉 동국대 석림동문회·선우도량·중앙승가대 동문회·동국대 동림동문회·실천불교승가회·전국승가대학인연합·중앙승가대 학생회·동국대 석림회 등이 모여 조직된 단체이다.

이들 단체의 단체명이 암시하듯이 이들 단체는 주로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 층들로서, 이 중의 핵심세력은 민중불교운동의 주체세력이기도 하다. 범종추는 조직의 당면 과제로 김영삼 정부의 정치자금 문제와 서의현 3선 반대를 내세웠으며, 장기적인 목표로는 불교의 체질개선을 전면적으로 단행하겠다고 제시하였다.

이러한 목표를 내세운 종단개혁운동은 1994년 3월 23일 범종추의 공식화와 지도부의 구성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3월 26일 범종추는 보다 구체적으로 ‘종단개혁을 위한 구종법회’를 시작함으로써 실제적인 투쟁은 가시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하여 27일에는 통도사를 비롯한 전국 승가대학의 학인 스님들이 구종법회에 참석했으며, 조계사 주변에 불교개혁관련 플래카드를 붙였다.

동시에 원로스님과 중진스님들 중의 일부가 ‘3선 연임’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교수불자와 청년불자 등 재가불자들이 연합세력을 구성하여 구종법회에 동참하였다. 이에 종단 내 기득권세력은 경찰병력을 동원해 줄 것을 종로경찰서에 요구하였고, 조계종의 요구라는 미명하에 진입한 경찰들은 총 400여 명의 스님들을 체포하여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득권세력은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3월 30일 선거를 치룰 수 있었고, 마침내 1994년 3월 30일 1천 5백여 경찰병력의 보호 속에 중앙종회를 열어 총무원장으로 서의현 전총무원장을 선출하였다.

이에 개혁세력측의 원로 스님들이 3선을 반대했으며, 종회무효를 선언했다. 또한 종회의원 중 11명의 스님들이 범종추 등 개혁세력을 지지하고 나섰다. 심지어 일부의 스님들이 개혁 성공을 위한 단식투쟁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4년 4월 5일 불교계의 원로 스님들이 대각사에서 원로회의를 열고, 3월 30일 종회무효, 서의현 총무원장의 즉각퇴진, 그리고 4월 10일 승려대회 소집 등을 결의하였다.

4월 10일 승려대회에는 스님들 약 2,000명과 재가불자 약 1,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5개 안건, 즉 서암 종정 불신임, 서의현 총무원장 불신임, 서원장의 일체공직 박탈, 종단개혁위원회 해산, 개혁회의 출범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종단개혁운동의 주체로 태어난 개혁회의는 “양심적인 원로, 중진스님 1백~1백 20명으로 구성되어 조계종의 입법·행정·사법 등 전권을 위임받아 종헌 및 종법 개정, 비민주적 종단제도의 정비 등 종단개혁을 추진해 나갈 것”임을 밝혔다.

그 후 개혁세력은 5개 결의사항을 대중의 의견을 물어 통과시킴과 동시에 개혁회의의 구성원칙과 활동계획을 발표한 후, 총무원 청사 공식접수에 들어갔다. 그러나, 총무원 청사의 접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물리적 폭력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4월 13일 새벽 06시 서의현 전총무원장은 총무원장직을 사퇴할 것을 공표하였다. 이에 4월 15일 개혁회의는 임시 중앙종회를 열고 서의현 총무원장의 불신임을 결의하고, 개혁회의법을 제정함과 동시에 중앙종회를 해산함으로써 불교개혁의 합법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개혁회의는 종권구조를 바꾸기 위해 종헌종법을 개정하였고, 그것에 근거하여 종권구조를 3권 분립의 원칙에 입각하여 재구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90년대 종단개혁운동은 입법·사법·행정뿐만 아니라 교구본사의 주지 임면권조차 행정수반의 통제하에 있었던 구종권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3) 94년 종단개혁운동의 성과와 한계

94년 종단개혁의 성공으로 등장한 이른바 ‘개혁종단’은 종헌종법을 개정하여 공표하였다. 개정 종헌종법은 총무원 중심제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총무원·교육원·포교원 등 3원 별립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비롯하여 교구본사 중심제의 종무행정체제, 중앙종무기관의 삼권분립 구조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권구조의 개혁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더욱이 ‘개혁종단’은 1995년도와 1996년도 연속 ‘제도개혁의 정착과 보완’을 제1의 종책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종단개혁의 노력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개혁종단은 태생에서부터 국가권력과 세속법에의 의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동시에 분규와 폭력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록 개혁종단이 종권구조를 상당히 개혁했다 하더라도, 종정의 권한과 총무원장의 권한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개혁의 제도화는 사부대중의 의식개혁과 개혁적인 문화의 정착 위에서 비로소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개혁종단은 이를 등한시하였다. 특히 승가교육과 신도교육의 문제는 획기적인 개혁이 요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아무런 개혁적 성과를 남기지 못하였고, 이는 개혁의 제도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실제적인 의미에서 개혁의 성과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1998년 총무원장 선거가 다가오면서 종단개혁운동의 주체는 분열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다가 총무원장의 권위와 종정의 권위 사이의 갈등, 그리고 문중별 이해관계가 결합하면서 1998년 또다시 분규와 폭력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4. 종합적인 요약과 흐름의 특징

이상으로 우리는 조계종단 내부의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정화운동과 90년대 종단개혁운동을 축으로 하여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흐름을 개관해 보았다.

이에 아래에서는 이 글에서 거론하였던 불교계 내부의 거대한 사회적 사건들을 간략하게 요약한 다음, 이를 토대로 개별 개혁운동을 다양한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 단절성과 연속성의 차원에서 연관시켜 봄으로써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특징과 흐름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해방 직후 한국사회에 주어진 민족적 과제와 불교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난 불교혁신운동은 당시 불교계에 혁신적인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불교혁신의 방향은 왜색불교에서 민족불교로, 그리고 산중불교에서 민중불교로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불교혁신운동의 과정은 분규나 폭력을 수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교혁신운동은, 비록 당시 불교계에 참신하고 정당한 문제제기를 하였다는 성과를 남겼지만, 종단 내의 실제적인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다만, 이러한 문제제기는 정화운동으로 이어졌고 15년 이상과 수많은 대가를 지불한 정화운동의 결과 비로소 왜색불교 청산이라는 결정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50~60년대 정화운동은 세속적 권력의 동원, 세속법에 의한 법적 소송, 그리고 사찰접수를 둘러싸고 전국적 차원에서 진행된 크고 작은 분규 등이 상호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전개되었고 그 휴유증은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왜색화 청산과 정통성의 회복이라는 성과를 남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자주성 훼손, 태고종의 창종으로 인한 분종, 이권싸움이라는 불명예와 사회적 위신의 추락, 그리고 불교재산의 유실 및 망실 등의 상처를 남겼으며 사찰접수의 반복과 지속이라는 후유증까지 앓게 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정화운동은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성과 이외에 뚜렷한 제도개혁적 성과를 남기지 못했으며, 그러한 한계로 말미암아 한국불교 조계종단은 1970년대의 분규라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은 불교혁신운동이나 정화운동의 목표와는 다른 새로운 목표, 즉 호국불교 및 어용불교를 민중불교 및 민족불교로 전화하려는 불교 내적 과제와 사회민주화운동이라는 목표하에 발발한 사회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민중불교운동은 후반기로 갈수록 점차 불교 내적 문제보다는 사회민주화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하는 방향으로 내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민중불교운동은 약 10년 이상 지속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과정에서 운동 그 자체로 인한 분규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을 수 있었고 동시에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활발한 사회참여의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민중불교는 불교의 사회참여라는 변화 이외에 별다른 개혁적 성과를 남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화세력을 추수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다만 민중불교운동은 90년대 종단개혁운동의 주체세력이 되었던 일부 소장 스님들의 의식화와 정치세력화에 공헌한 의의를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94년 종단개혁의 성공으로 등장한 이른바 ‘개혁종단’은 총무원 중심제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총무원·교육원·포교원 등 3원 별립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비롯하여 교구본사 중심제의 종무행정체제, 중앙종무기관의 3권분립 구조 등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개혁종단’은 종정의 권한과 총무원장의 권한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개혁종단은 승가교육과 신도교육의 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도 개혁종단은 문중에 의해 형성된 종단 내 불평등구조를 비롯하여 다양한 불평등구조를 해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이 이룩한 사회참여의 관심과 폭을 오히려 축소시키거나 소멸시켜 버린 결과를 낳았다.

이상의 내용을 운동의 주체, 운동과정상의 분규 여부, 그리고 운동의 성과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불교혁신운동과 민중불교운동은 소수의 개혁적인 의식을 가진 스님들과 재가신도가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분규나 갈등을 수반하지는 않았으나 종단개혁적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반면에 정화운동과 종단개혁운동은 불특정 다수의 사부대중이 운동의 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적 주체는 출가 스님들이었고, 폭력적인 분규를 수반하였으나, 각각 유의미한 종단개혁의 성과를 남겼다.

요컨대 대사회적 문제를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불교개혁운동은 사부대중의 폭넓은 참여가 허용되고 폭력도 동반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에, 종단 내적 문제를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불교개혁운동은 주체세력의 범위가 출가수행자로 한정될 뿐만 아니라 분규나 폭력이 수반되는 특징을 보였다. 그리고 종단 내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개혁운동은, 긍정적인 성과이든 부정적인 결과이든, 큰 후유증을 남긴 반면에, 종단 외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운동의 후유증은 크지 않았다.

둘째, 정화운동과 종단개혁운동을 비교해 보면, 대의명분상 정화운동은 인적 요인(人的 要因)에 초점을 둔 반면에 종단개혁운동은 제도적 요인(制度的 要因)에 초점을 두었다. 그 결과 정화운동은 지속기간이 길었음은 물론 갈등과 폭력의 정도가 보다 심했지만 종단개혁운동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일시적인 갈등과 분규를 수반했을 뿐이라는 차이가 있다.

셋째, 운동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종단 외적 문제와 관련된 사회운동의 경우 재가자의 참여가 적극적이고 오히려 출가수행자는 상징적 대표자나 후견인의 위상을 갖고 있는 데 반하여, 종단 내적 문제에 있어서는 출가수행자가 매우 적극적이며 비구니 스님과 재가자의 참여는 제한되거나 배제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편, 현대 한국불교의 개혁운동은 기존의 한국불교가 불교 외적인 사회적 요구와 불교 내적인 종단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개혁운동들 사이에는 운동의 목표, 주체, 그리고 전개과정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운동사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개혁운동은 새로움의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개혁운동과 동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불교의 개혁운동의 흐름은 어느 정도의 규칙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운동의 목표, 주체, 그리고 전개과정의 형식이 반복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첫째,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은 운동의 목표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뚜렷하게 대비되는 흐름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곧 종단 내외적 문제를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개혁운동의 흐름과 종단 내적 문제를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개혁운동의 흐름이 그것이다. 불교혁신운동과 민중불교운동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정화운동과 종단개혁운동은 후자에 해당한다.

둘째, 70년대 종권분규와 1998년 사건은 모두 종정 중심제와 총무원장 중심제 사이의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던 사건으로서, 이는 종권구조를 결정하는 중핵적 요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사건까지를 포함하며 해석한다면,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흐름은 운동의 주된 목표가 종단 내외적 문제(불교혁신운동)에서 종단 내적인 구조문제(정화운동)로 발전하고 마지막으로 종권구조의 본질적 문제(종정 중심제―총무원장 중심제)로까지 접근했다가 다시 동일한 과정(민중불교운동 ―종권구조개혁운동―1998년 사건)을 반복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종단 외적 문제와 관련된 사회운동은 종단 내적 문제에 종속적이거나 종속되지는 않더라도 종단 내적 문제가 대두할 경우 주변화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그 결과 종단 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은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단명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서론에서 밝혔듯이 이 글은 많은 전제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 연구의 학문적 토대의 부실함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글이 비록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개관에 머무르고 말았지만, 그 흐름과 특징에서 시사하듯이 실천적 의미에서 볼 때 한국불교는 여러 가지 새로운 개혁과제를 안고 있다. 이에 여기에서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학문적 과제와 실천적 과제 중 몇 가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우선, 학문적 차원에서 볼 때, 현대 한국불교 운동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남겨 놓고 있다.

첫째, 자료의 객관적 검증과 사실의 확인은 매우 시급한 학문적 과제로 남아 있다. 둘째, 방법론적 차원에서도 개념이나 시기 및 사건의 구분과 선택 등에 대한 규정과 기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적 합의가 시급한 과제이다.째, 이론적 차원에서 개혁운동과 관련된 유관요인들 사이의 이론적 관계의 정립은 물론, 현상적으로 드러난 사건과 그 아래에 숨겨져 있는 본질 사이의 관계를 어떤 시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학문적 논의가 시급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과제들이 해결될 때 주장의 신뢰성, 타당성, 그리고 일반화 가능성 등이 확보되고 나아가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패러다임이 형성될 것이다. 다음으로 불교개혁의 실천적 과제를 몇 가지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계종통이나 이념과 결부된 인적 청산의 문제가 정화운동으로 해소되었다고 전제할 때, 오늘날의 과제는 인적 청산의 문제가 아니라 인적 자질 향상의 과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한다.

이는 한국불교가 현대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적 자질 향상의 유일한 방법은 교육과 수행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종단차원의 과감한 혁신과 투자가 요구된다. 둘째, 비록 94년 종단개혁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미해결 부분이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환경의 변화에 민감한 제도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제도 개혁은 지속되어야 한다.

특히 삼보정재의 운용 및 관리 방안에 관한 제도적 장치는 물론 문중 중심의 파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합리적 절차와 장치도 더욱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비록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겠지만 지난 세기 한국불교의 개혁과정은 갈등·분규·투쟁·쟁탈 등의 문화를 만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구분과 차별의 파당 문화를 만들어 왔다.

화합중을 이상으로 하는 한국불교는 이제는 그러한 문화 그 자체를 개혁의 목표나 대상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파벌간 이해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가 만들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화합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변화추세를 고려하면 이러한 화합의 문화는 그 동안 종단 내적 문제에 소외되어 있던 비구니 스님 및 재가신도의 참여까지를 포함하는 문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의 이념에 따라 종단 외적 사회문제에 보다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 협력하여야 한다. 특히 한국불교가 대승불교 이념을 현실 속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사회문제에 대한 출가 수행자의 무관심이 더 이상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오늘날 한국불교가, 특히 스님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시민운동을 전개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끝>

 유승무
한양대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사회학박사.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포교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불교사회학의 성립조건(Ⅰ·Ⅱ)》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