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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한국불교계의 유신론 / 김상현
특집 - 불교개혁운동 탐구
[4호] 2000년 09월 10일 (일)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1. 머리말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불교는 오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불교의 유신(維新)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1910년대에는 불교개혁에 대한 여러 논설이 발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한용운(韓龍雲)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과 권상로(權相老)의 〈조선불교개혁론(朝鮮佛敎改革論)〉, 그리고 박한영(朴漢永)의 여러 논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본고에서는 이들의 논의를 서로 비교·검토함으로서 이 시기에 대두했던 유신론의 내용과 성격을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수구파와 유신파의 갈등

승려의 도성출입(都城出入) 금지가 해제된(1895년) 후 서울에 원흥사(元興寺)가 창건됨으로써(1902년) 불교는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만해 한용운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원 후 2930년(1903)경부터는 조선불교의 유신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불교도들이 경성에 모여서 학교를 세우느니, 포교당을 세우느니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산간에서 도회로, 독선에서 도생(度生)으로, 이러한 것이 슬로우건이 되었다.1)

1906년에는 불교연구회가 설립되고, 명진학교(明進學敎)가 세워졌다. 만해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도 “십수 년래에 오교(吾敎)를 위하여 헌신·노력하여 유신을 도모한 자 한두 명이 아니었다.”고 했다.2) 1910년대에도 불교유신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은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에 실린 여러 논설로 확인할 수 있다. 퇴경은 〈조선불교개혁론〉을, 혜근(惠勤)은 〈변자(變者)는 불교의 공리론(公理論)〉을, 만해는 〈원승려지단체(原僧侶之團體)〉를 각각 이 잡지에 기고했고, 이 밖에도 불교 개혁에 관한 여러 논설이 발표되었다.

이 무렵 유신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포교와 교육이었고, 또한 제도의 개혁, 사원의 유지 등이 거론되기도 했다. 포교가 불교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견해는 일찍부터 대두했다. 김명희(金明熙)는 “금일 조선불교를 대발전의 길로 나아가게 할 기관은 인민 포교가 그 효시가 된다.”고 했다.3) 여러 사람들이 포교전도의 중요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혼성(李混惺)은 〈유아법려동포(唯我法侶同胞)는 인민(人民)에 대한 포교전도를 망야시무(罔夜是務)하심을 충고(忠告)함〉이라는 글을4) 그리고 정임화(鄭林給)는 〈포교전도가 시보불은(是報佛恩)〉이라는 글을5) 각각 발표했다.

14세의 생도 김금선(金金仙)까지도 〈포교의 진력(盡力)〉이란 글을 기고할6) 정도로 포교는 당시 불교계의 중요한 화두였다. 그러나 이 글들은 대개 불교 중흥의 좋은 기회를 맞아 포교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을 뿐,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교육의 경우, 특히 청년교육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었다. 이는 불교계의 미래사범(未來師範)을 양성할 필요 때문이었다.7)

그리하여 청년사범의 훈련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고,8) 교과(敎科) 개편에 관한 의견을 개진한 경우도 있었다.9) 이처럼 20세기 초 한국불교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역시 유신이었던 것이다. 퇴경은 장황한 불교개혁론을 발표했는데도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겨우 교육개혁에 그쳤다. 이에 비해 만해는 여러 분야에 걸쳐 유신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1910년대에 발표된 유신론 중에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역시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이었다. 1910년대의 한국불교계는 수구파(守舊派)와 유신파(維新派)로 대별되었는데, 수구파의 세력도 만만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두 유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타종교와의 경쟁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수구파 중에는 독존의식에 사로잡힌 채 누가 감히 불교와 경쟁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불교의 무쟁(無諍)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곧 “금일은 종교경쟁시대라고 하지만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한 대교(大敎)를 향하여 누가 감히 경쟁하겠느냐.”는 식이었다.10) 불법은 천겁(千劫)을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 보수파 중에는 개혁이나 유신을 주장하는 유신파를 파순(波旬)의 유혹에 빠진 것이라고 공격했다.

곧 다음의 기록이 그 경우다. 옛 청규(淸規)를 묵수하는 제방석덕(諸方碩德)이 몹시 놀라고 화를 내면서 말했다. “불조정법(佛祖正法)이 일월(日月)과 같이 밝고, 금석(金石)과 같이 견고하여 천겁(千劫)을 지나도 바뀌지 아니 하고 만변(萬變)에 처하여도 스스로 여여(如如)하여 세법(世法)과 서로 현격하게 소양(宵壤)을 판단할지어늘 금일에 개혁 이자(二字)가 어찌 나왔는고? 파순(波旬)이 배회하며 부추겨 유혹한 것이 아니겠는가?”11)

수구파의 보수적인 경향을 시고비금(是古非今)의 사상이라고 말한 경우도 있었다. 시고비금의 사상을 고수하는 수구파의 제덕(諸德)은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확고했다고 한다. 그들은 “비록 백 가지가 잘못되고 옳은 것이 하나도 없어도 옛것을 숭상하면 반드시 귀하다고 하고, 비록 만 가지가 완전하여 하나의 결함이 없어도 유신에 참여하는 자는 반드시 비난했으며, 하나의 유신이라도 제안하면, 반드시 놀라면서 우리 불교가 장차 망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12) 노승(老僧)들 중에는 불교전적(佛敎典籍)의 간행·유포까지도 반대하는 경우가 있었다.

즉 불교 유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불교전적을 신간(新刊)하려 하면, 불전을 함부로 유통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했는데, 그 견고한 주장을 깨기가 어려웠다고 한다.13) 퇴경은 수구파는 개혁이라면 호랑이를 본 것과 같이 놀란다고 했다.14) 그리고 만해는 이들 보수파를 노후부패하고 완고비열한 무리라고 하면서, 이들은 백방으로 (유신을) 저지하고 구습(舊習)을 고수할 뿐이라고 비판했다.15)

3.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만해는 1910년 12월 8일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고, 1913년 5월 25일에 이를 간행했다. 그런대 1913년 2월과 3월에 각각 간행된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13호 및 14호에는 만해의 〈원승려지단체(原僧侶之團體)〉라는 논설이 실려 있다.

이 글은 《조선불교유신론》 중의 논승려지단체(論僧侶之團體)와 같은 내용이다. 《조선불교유신론》 간행 직전에 이 부분을 잡지에 게재했을 수도 있지만, 책 전체의 내용이 이미 알려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만해는 조선불교 유신의 책임이 천운이나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고, 그 책임 또한 회피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16)

이처럼 불교 유신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나서는 자세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만해의 유신론이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스스로 경계하고 여러 승려들에게 알려서 실천하려는 강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해의 자세를 퇴경의 입장과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가 있다. 만해의 불교유신사상의 배경에는 그의 역사의식이 깔려 있다.

그는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의 세계도 아니요, 어디까지나 현재의 세계다.”라고 말하고 “그 시대에 맞는 불교를 구하고자 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고, 또 학술·정치·종교 등의 각 방면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던” 당시 20세기 초기의 우리 나라 형편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점이 그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은 전체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제1장으로부터 제4장까지는 만해가 이해하고 있던 불교관을 토대로 하여 뒤에서 전개할 구체적 문제 해결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밝히는 부분이다. 그는 이 부분에서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인데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수 있게 될 것임”과 “불교의 가르침이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에 입각해 있음”을 천명했다.

이어서 그는 승려교육, 참선, 염불당의 폐지, 포교의 강화, 사원의 위치, 소회(塑繪)의 폐지, 불교의식의 간소화, 승려의 권익을 찾는 길, 승려의 결혼 문제, 주지의 선거, 승려의 단합, 사원통할 등의 여러 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만해는 보수파의 피상적인 개혁이나 개량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말했다.

유신을 말하면서도 파괴를 기피하는 이는, 남쪽에 있는 월국(越國)에 가려 하면서 마차를 북으로 모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람은 유신을 능히 해내지 못할 것이니, 승려의 보수파가 유신을 감당할 수 있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 소위 폐단이란 실로 파괴하여야 할 자료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파괴해야 할 자료를 지닌 채 피상적인 개량이나 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릇 불교의 유신에 뜻을 둔 이라면 유신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파괴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17)

만해가 비판하고 있는 보수파의 피상적인 개혁이란 퇴경의 개혁론류(改革論類)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만해는 시대에 맞지 않는 구습의 타파를 다음과 같이 외쳤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들을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 좀더 유신을 잘 하는 사람은 좀더 파괴도 잘 하게 마련이다.18)

“유신은 파괴로부터” 혹은 “파괴는 유신의 어머니”라는 만해의 강렬한 주장 뒤에는 한국불교사에 대한 반성, 특히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던 여러 모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불만이 있었다. 이것은 낡은 전통에 얽매여 시대의 변천에 뒤떨어져 있던 당시 불교에 대한 비판이었고, 새로운 불교를 건설하려는 희망이었다.

만해는 불교계에 누적된 여러 폐단을 타파하는 것이 곧 유신의 첩경이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던 폐단을 주저 없이 지적했다. 그는 당시의 불교계가 “조선인 중에서도 가장 하등에 속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고, “가난에 시달리거나 미신에 혹한 무리들이 흔히 승려가 되었기에 게으르고 어리석고 나약하여 불교의 진상에 어두운 형편”이라고 했다.19)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혼돈파가 전체 승려의 십의 구나 되며”20) “모든 승려가 하나도 방관자 아님이 없다.”고도 했다. “연구하고 논강(論講)하면서도 깜깜하여 아무 소득도 없는 사람이 십중 칠팔이고”21) “참선하는 사람들은 염세와 독선에 빠져서”22) “진정한 선객은 십분중 일분에 불과하고 어리석고 게으른 데다가 먹기 위해 들어온 자가 칠분이나 된다.”23)는 것이다.

당시의 “불교는 많은 미신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의식(儀式)은 번잡·혼란하고 비열·잡박하여 도깨비연극에 가깝다.”고 보았다. 그리고 “온 나라 사람들이 승려 보기를 소나 말이나 노예 같이 하여도 승려들은 이상하게 여기는 법도 없다.”24)고 했다. 이처럼 만해는 “오랜 세월 불교계에 누적된 폐단이 극에 달했다.”고 인식했다.

종교간의 경쟁이 치열하던 당시에 “불교는 패잔병마저 모으기가 어렵고 항복의 깃발마저 세울 힘이 없는 실정”이라고 했으며,25) “거의 오늘 하루를 넘기기 어려울 것 같은 형세에 있다.”고26) 보았다.

만해의 당대 불교에 대한 인식에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당시의 대부분 승려들이 일제의 불교정책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던 현실인식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조선불교유신론》에는 사찰령에 대한 비판은 없고, 오히려 일제의 통감에게 제출한 통감부건백서(統監府建白書)가 실려 있다.

이 사실에 주목하여 만해의 현실인식을 의심하거나 당시 불교계의 한계를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만해는 일본의 정치적 침략과 일본불교의 침투에 대한 문제에는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했다”는 주장이27)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리고 1913년에 간행된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 사찰령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처해금(帶妻解禁)의 주장에도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고, 더구나 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일제의 조선통감부라는 정치적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사찰령에 대해서 침묵한 사실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사찰령이 반포된 이후인 1913년이었지만, 이 책의 원고는 1910년 12월에 탈고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탈고된 원고일지라도 간행시에 내용을 수정하거나 첨삭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면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해는 이 무렵 임제종(臨濟宗) 운동 등의 일로 매우 바쁜 날을 보냈고, 이 때문에 《조선불교유신론》은 처음 탈고했던 그대로 인쇄에 붙였던 것 같다.

1913년에 간행한 이 책에 1910년에 썼던 서문을 그대로 싣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찰령 반포 이전에 탈고했던 《조선불교유신론》에 이 법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해서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 사실 만해는 일본의 정치적 음모와 사찰령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자주적 불교 발전을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이다. 그가 원종(圓宗)에 맞서서 임제종 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일제의 압력에 의해 임제종 간판을 내린 후에도 조선불교회(朝鮮佛敎會)의 조직을 통해서 불교의 자주적 발전을 모색하고자 했다. 만해는 박한영(朴漢永) 등과 함께 1910년 가을부터 임제종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이회광(李晦光)이 일본의 조동종(曹洞宗)에 연합시킨 원종에 맞서는 한국불교의 자주적인 발전을 위한 노력이었다. 1911년 1월 15일에 개최된 송광사 총회에서 만해는 임제종 임시 종무원의 관장대리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임제종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33세 때의 일이다.

만해는 1914년 8월경 조선불교회의 설립을 추진한 바 있는데, 다음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한용운은 불교회를 조직하고 삼십본산주지 범위 안에 들어가지 말게 하고, 독립으로 불교 확장을 도모하고자 하며, 각 본산 주지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 피차 의견이 충돌되어 분쟁이 끊일 수 없었다.28)

이 기록을 통해서 만해는 일제의 사찰령에 구속받지 않는 독자적인 불교 진흥을 추진하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본산 주지들의 반대와 일제 당국의 제재로 조선불교회의 설립은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또 다시 불교동맹회로 명칭을 고치면서까지 자주적인 불교 발전을 모색했다. 불교동맹회의 경우에도 삼십본산주지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사찰령의 문제를 인식한 때문이었다.

만해는 3·1운동 직후에 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사찰령이 신앙의 자유를 구속했다고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종교와 교육은 인류 생활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일로서 어느 나라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없거늘 조선에 대해서만은 유독 종교령을 발표하여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29)

물론 이 무렵에 이르러서야 그가 사찰령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30) 아니었다. 만해의 사찰령 폐지를 위한 노력은 훗날 정교분리(政敎分離) 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4.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

일제는 1911년 6월에 사찰령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이 법을 제정하면서 밖으로는 한국불교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당시 불교계 일각에서는 이 법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는 이도 없지 않았지만, 이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사찰령에 의해서 불교가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찰령에 의해서 불교의 유신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 경우도 있다.

선각제씨(先覺諸氏)가 유신설을 질창(迭唱)하여 왈(曰) 사원유지니 인민포교니 청년교육이니 경향에 차진피맹(此進彼萌)하는 활(活)기가 춘행만국(春行萬國)에 매화(梅花)는 환영하고 유안(柳眼)은 규(窺)저하는듯 차제에 사찰령을 반하(頒下)하시고 사법(寺法)을 반포하니 교망(翹望)하던 촌지(寸志)에 송무백열(松舞柏悅)의 감을 실로 자임(自任)키 어렵다.31)

사찰령의 반포로 송백(松柏)도 기쁨의 춤을 춘다고 하면서 이 법령을 유신을 이룰 계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사찰령을 토대로 하여 조선시대이래로 침체되었던 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것은 당시 불교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퇴경 권상로(1879∼1965)는 《조선불교월보》 3호(1912년 4월)로부터 18호(1913년 7월)에 이르기까지 〈조선불교개혁론(朝鮮佛敎改革論)〉을 12회에 나누어 연재했다.32)

《조선불교월보》는 18호로 폐간되기는 했지만,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잡지였을 뿐만 아니라, 퇴경이 편집 겸 발행인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퇴경은 1910년에 원종(圓宗) 종무원(宗務院)의 찬집부장(纂輯部長)을 맡았고, 34세 때인 1912년 1월에는 《조선불교월보》 사장에 취임했다.

그리고는 바로 이 달에 원흥사(元興寺)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이회광(李晦光)을 은사(恩師)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처럼 퇴경이 원종 종정(宗正) 이회광과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고 있었음에 유의하면, 그가 이회광의 여러 일을 돕고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이 무렵은 사찰령에 의한 일제의 불교 개편이 진행되고 있었다.

1911년에는 사찰령이, 그리고 7월에는 사찰령시행규칙이 각각 공포되었다. 이에 의해서 이해 11월 이후에는 삼십본산의 제1대 주지가 차례로 인가되었다. 그리고 1912년 6월에는 일제에 의해 원종(圓宗) 및 임제종(臨濟宗)의 문패가 철거되고, 삼십본사주지회(三十本寺住持會)에서는 사찰령을 준봉하기로 하는 한편, 일제가 내세운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을 종명(宗名)으로 채택하여 조선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원(朝鮮禪敎兩宗各本山住持會議院)이라고 했다. 이로서 본사주지들은 일제의 불교정책을 그대로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조선불교개혁론〉을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조선불교월보》에 연재한 퇴경의 입장이 이회광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퇴경은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곧 다음이 그것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 위험하고 이처럼 맹랑한 개혁을 제창하는가 하면, 나도 실로 스스로 알지 못하는 바라. …… 오늘 내가 불각(不覺)중에 개혁(改革) 2자의 명사는 창도(唱導)하였으나, 쌍방의 이해(利害)는 어떻게 할까? …… 홀연히 이 문제를 구술(口述)하고 또 홀연히 이 이해(利害)를 생각하니, 어찌 함구(緘口)함만 같겠는가?33)

퇴경의 이러한 자세에는 문제가 많다. 불각중에 생각해서 제창한 개혁, 그러기에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고, 쌍방의 이해에 관해서도 원만하게 해결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퇴경은 개혁을 제창하면서도 개혁의 인물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을 뿐, 그 개혁을 자신이 주도할 생각은 없었다.

6천의 승려에게 그 의무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끝까지 개혁자를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었다. 퇴경이 말하고 있는 쌍방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는 수구파와 유신당의 개혁에 대한 견해를 조정하고 조화하려는듯, “수구파는 개혁이라하면 호랑이를 본 것과 같이 놀랄 것이며, 유신당은 독사를 본 것과 같이 의심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퇴경의 견해를 원종 세력과 임제종 운동 세력 간의 대립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34)

그러나 이회광의 제자 퇴경의 개혁론이란 일제의 불교정책을 추종하는 삼십본산주지들의 입장을 교묘하게 대변하는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퇴경은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당시를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욱일(旭日)이 서광(舒光)에 동풍(東風)이 원불(遠拂)하여 삼천리 반도는 대화(大和) 판도에 동재(同載)하고, 2천만 생령은 천황량로(天皇兩路)에 균점(均霑)하여 일초일목(一草一木)이 무비향양(無非向陽)이오, 필부필부가 각안기소(各安其所)하니, 오제(吾用)가 수욕의전무무(雖欲依前貿貿)하여 자이이척(自貽伊戚)인들언(焉) 유성천자재상(有聖天子在上)하여 이허기자루화외야(而許其自漏化外耶)아.35)

이처럼 식민지시대의 도래를 찬탄하는36)퇴경의 현실인식에 주목하면, 그가 주장하는 불교 개혁에서 자주적인 발전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퇴경의 천황 찬양을 임의단체로 존재하던 불교교단을 공인받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37) 이 글을 쓰던 1912년 8월에는 이미 사찰령에 의해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으로 공인받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퇴경은 사찰령에 의한 삼십본산제도를 두고 “육천다인(六千多人)이 삼십대단(三十隊團)을 이루어 발전할 것”이라고 찬양했다.38) 그리고 그는 “오교(吾敎)의 근일(近日) 즉관리서(卽管理署)시대로부터 연구회(硏究會)시대, 종무원(宗務院)시대와 내지 현금(現今)의 회의원(會議院)시대까지”라고 하여, 1912년 6월에 삼십본사주지회의에서 결정한 조선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원(朝鮮禪敎兩宗 各本山住持會議院)을 현금(現今)의 회의원(會議院)시대라고 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그는 분명한 시대인식에 바탕해서 개혁이념을 전개하고 있었다고 보는 이도39) 있지만,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이회광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동시에 사찰령 중심의 인식일 뿐이다. 퇴경은 유신(維新)과 개혁(改革)을 굳이 구별하면서 유신에 앞서서 먼저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유신이란 중흥이자 쇄신으로 가장 긴급한 것이지만, 유신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개혁이 아니면 유신할 수가 없고, 개혁을 거치지 않은 유신은 불완전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유신을 주장하는 이들은 왜 개혁을 버리거나 경시하거나 생략하려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는 개혁의 필요성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을 뿐, 그 구체적인 방법이나 내용에 대한 서술은 매우 간략하다. 그가 장황하고 화려하게 서술하고 있는 개혁이란 일제의 사찰령에 의한 삼십본산제도의 실천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는 유신을 기도하는 이들이 반대 방면에서 만든 단체를 비판했던 것이다.

5. 박한영의 교육·포교론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1870∼1948)은 한용운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주도하여 한국불교의 일본 예속화를 막았던 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불교유신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과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조선불교월보》 및 《해동불보(海東佛報)》 등의 잡지에 불교유신에 관한 많은 논설을 발표했다. 특히 《해동불보》는 석전이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아서 1913년 11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간행한 것이다. 석전은 1912년에 〈불교강사와 정문금침(頂門金針)〉이라는 논설을40)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당시의 불교강사류가 심한 병에 걸렸다고 진단하고, 그 병을 공고(貢高)·뢰산(賴散)·위아(爲我)·간린(葛吝)·장졸(藏拙) 등의 5종으로 분류했다. 불교강사류는 당시 불교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이들이다. 그런대 이들이 대부분 심한 병에 걸렸으니, 정문금침으로 그 위급함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의 정문금침으로 공고자는 허심박학(虛心博學)해지고, 뢰산자는 용맹정근(勇猛精勤)하게 되며, 위아자는 망아위생(忘我爲生)하게 되고, 장졸자는 호문광익(好問廣益)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석전은 당시 불교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강사들의 자각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불교가 세계에서 더 없는 진실의 종교로 숭배될 수 있게 하고 조선의 불제자로 하여금 세계문명의 흐름에 동행할 수 있기를 희망했던 것이다.41)

전시대의 불교가 노후(老朽)한 원인에 대해서는 대법운수(大法運數), 조정의 압력, 유교의 침모(侵侮) 등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석전은 고려의 전성시대로부터 치료하기 어려운 병근(病根)이 유전·만연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곧 진상교육(眞相敎育)이 불완전하여 이해(理海)와 복전(福田)을 민족사회에 발휘점익(發揮霑益)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2)

이처럼 과거 불교의 병폐를 교육의 불완전으로 파악한 석전이 불교의 교육, 특히 불교청년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는 신불교를 회복하기 위하여 청년도제를 올바른 방향으로 교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만약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미래 불교의 죄인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까지 했던 것이다. 석전은 도제 교육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교양도제(敎養徒弟)는 소융삼보(紹隆三寶)〉라는 논설을43) 통해서 도제의 교양이야말로 삼보를 소융시키는 초인(初因)이라고 했고, 〈불교청년과 보통과(普通科) 졸업〉,44) 〈청년불교계에 대하여〉45) 등의 논설에서도 불교청년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석전은 포교에 관한 여러 논설을 발표하여 포교이생(布敎利生), 즉 포교로 중생을 이익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불교계에는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포교소와 연구소 등이 곳곳에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포교 내용이나 방법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석전이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당초 교육이 불완전하고, 강의 교재가 순수하지 못하며, 비지원력(悲智願力)이 불충분하고, 단중(壇中)의 의식이 잡다하여 일시에 유신키 어려운 상황이었다.46) 또한 포교의 내용과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곧 종래의 설법 유풍이 중류 이상에게는 관계가 없고 다만 부녀자나 영혼계(靈魂界)를 위한 것이었고, 교체(敎體)는 서론과 결론이 분명하지 않고, 소설적인 이야기가 많았다는 석전의 비판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석전은 세계인민에게 대승교리를 소개해야 하고, 그 방법은 논리학의 삼단논법으로 해야 하며, 세계 보통의 설교의식을 참용(參用)해야 하며, 그 연구는 불교 교리에 널리 통한 다음에 과학·철학·문학·사회학 등을 함께 연구하여 포교해야 한다고 했다.47)

그리고 석전은 포교의 강요를 네 가지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의하면, 포교인은 비지원(悲智願)의 세 마음을 정립해야 하며,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청년을 교육하여 세계적 포교인을 길러야 하고, 대승교리를 간략하게 요약한 포교자료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48) 이처럼 석전은 포교인의 자격과 자세, 그리고 포교의 내용 및 방법 등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피력했던 것이다.

6. 맺는말

본 소고는 1910년대 한국불교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유신론에 관하여 한용운과 박한영과 권상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최근 권상로의 불교개혁론을 주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론에는 자주성의 문제가 없지 않고,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이에 비해서 한용운과 박한영의 유신론은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이중에서도 당시 불교계의 제모순을 지적하면서 과감한 개혁을 주장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박한영의 개혁론은 청년교육과 진정한 포교에 그 초점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1910년대의 유신론만을 살펴보았을 뿐, 이 이후에 전개된 여러 개혁론에 대해서는 미처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끝>

김상현
현재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저서로는 《원효연구》 《신라의 사상과 문화》 《신라 화엄 사상서 연구》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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