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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운동을 통해 본 불교개혁의 성격 / 김상영
특집 - 불교개혁운동 탐구
[4호] 2000년 09월 10일 (일)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

1. 머리말

동북아시아 지역에 전래된 불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 지역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사상·문화·예술 등의 발전에 끼친 공적은 지대한 것이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하지만 불교로 인하여 발생했던 각종 폐단 또한 적지 않았으며 그것이 문제가 되어 불교가 극단적인 탄압을 받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교는 사회의 발전과 관련하여 양면성1)을 지니면서 전개되어 왔으며 이 점은 한국불교사 전체를 통해서도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는 특성이다.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교는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종교로 자리하면서부터 동시에 부정적 측면을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불교 교단에 부여되었던 과도한 혜택은 국가경제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같은 현상을 우려한 지식인들은 자신의 신앙 여부와 관계 없이 불교 교단의 비대성을 경계하고 나섰다. 하지만 과도한 특혜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으며 이에 따른 승단의 부패상 역시 불교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존재로 자리하게 되었다.

결국 연이은 고승의 출현과 숭고한 신심을 지닌 많은 불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점차 이 지역 사회의 지배 종교로 자리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우리 역사 속에서는 조선시대라는 참담한 불교탄압기를 겪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불교가 각종 폐단을 극명하게 노출시키고 있을 때, 이같은 상황을 개혁하고자 했던 불교인들의 노력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교단개혁을 통한 전면적 개혁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었던 반면 수행가풍의 회복과 진작을 위해 자정적(自淨的) 개혁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불교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형성되었던 결사운동은 자정적 개혁의 시도라는 측면에서 주목되는 사례이다. 이미 5세기 초반 중국불교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던 신앙결사운동은 이후 최근까지 이 지역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신앙공동체 운동과 관련하여 마치 전범(典範)과도 같이 인식되고 있다.

그 결과 결사운동 사례는 불교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동안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기도 하였다.2) 하지만 신앙결사는 그 유형과 성격이 무척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신앙결사 전체의 불교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에 속한다. 국가권력과의 관계 여부, 구성원의 면모, 사상·신앙적 지향점, 결사의 지속성과 영향력 등 여러 분야에서의 특성이 제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신앙결사운동에 나타나는 불교개혁의 성격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3)

그러기 위해 우선 신앙결사의 성립배경부터 검토해 보고자 하며, 계속해서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지는 대표적 결사운동의 성격과 특성을 서술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결사운동의 불교개혁적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결사운동 가운데 그 취지와 성격이 뚜렷하게 보여지는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점은 이 글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 한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부 결사운동의 사례를 통해서나마 그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불교개혁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를 밝혀보는 것은 결사운동의 불교사적 의의를 부여하기 위한 기초적 과제에 속한다고 하겠다.

2. 결사의 성립배경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교사에서 최초로 발견되는 신앙결사는 동진(東晋)의 혜원(慧遠)이 주도한 백련결사이다. 402년 여산 동림사의 아미타불상 앞에서 1백 23명의 승속이 모여 서방정토 왕생을 기원하는 염불결사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결사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물론 혜원이 생존했을 당시에는 이같은 결사의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4) 하지만 그가 결사적 형태의 신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기록상 등장하는 최초의 결사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면 혜원의 백련결사를 최초의 결사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사’에 대한 어의적 해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결사의 사전적 정의는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회적인 결합 관계를 맺음, 또는 그 단체” “2인 이상의 동지가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합의에 의하여 조합을 만듦, 또는 그 단체” 등이다.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직된 관계를 나타내거나 그 단체를 표기하는 단어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결사라는 단어의 용례가 언제,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불교의 신앙결사운동이 전개되면서 결사라는 용어가 널리 확산되었으며,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사전적 의미로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일단 불교계에서 행해졌던 집단적 신앙운동에 대한 통칭적 의미로 제한시켜 이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였다. 결사의 어의적 검토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다른 사항은 ‘사(社)’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매우 포괄적인 자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글자의 뜻 가운데 결사와 연관된 의미로는 “주례(周禮)에서는 25가(家)를 사라고 하였다.” “민간에서 뜻에 따라 설치한 5가 또는 10가의 일단을 칭한다.” 등을 들 수 있다.5)

이로 본다면 중국에서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사’의 의미 속에 집단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어의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특정한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를 의미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지 않았을까 한다. 여하튼 결사운동이 행해졌던 사찰의 이름을 ‘사’로 칭한 이후 결사와 무관한 사찰들에게까지 이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감안한다면 결사가 불교 전체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6)

위와 같은 어의적 관점에 의해서 본다면 불교 신앙결사는 매우 폭넓은 범주를 지닐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결사·향도(香徒)·매향(埋香)·보(寶)·계(契)·도량(道場)·회(會)·사(社) 등의 다양한 표현이 모두 결사적 신앙운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될 정도이다. 그 결과 결사의 다양한 유형과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은 이 분야 연구에 있어 중요한 과제가 되기도 하였다.7)

그러면 이렇게 확장된 의미 속에서도 혜원의 백련사를 최초의 불교 신앙결사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필자의 사견이지만 혜원의 백련사는 보다 협의적인 개념 속에서의 최초 결사운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즉 단순한 신앙공동체적 모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결사로서 최초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상당수의 신앙결사운동 가운데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결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8)

그리고 이들 결사는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나름대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불교개혁적 측면이라든지 사상, 또는 신앙사적인 차원 등에서 불교 발전에 큰 공적을 남긴 결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근거로 역사적인 결사와 그렇지 못한 결사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학계의 연구성과가 제시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불교사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신앙결사운동의 위상이 보다 뚜렷하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같은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혜원의 백련결사 성립 배경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백련결사는 후대의 결사운동 사례에서 예외 없이 가장 대표적인 결사로 지칭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련결사의 성립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당시의 중국 사회상을 주목해 보자.

혜원(334∼416)이 생존해 있던 시기는 중국 전체 대륙이 전란에 휩싸여 있던 남북조시대에 해당한다. 그의 스승 도안(道安)이 전란을 피해 수행처를 수십 차례 옮겨야 했을 만큼 불교 수행자들에게 있어 이 시기는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백련결사의 근본 도량이 된 여산 동림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련되었다. 378년 전진왕 부견이 양양을 공격하여 그 다음 해에 이곳이 함락되자 도안은 부견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이송되었다. 부견은 일찍부터 도안의 명성을 듣고 그를 존경해 오고 있었는데 이곳을 함락시키자 무엇보다 도안의 이송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약 5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면서 중국불교를 영도하고 있던 도안의 교단은 이를 계기로 와해되고 만다. 혜원 역시 이 과정에서 스승과 헤어지게 되었으며 이후 형주(荊州) 상명사(上明寺)를 거쳐 여산 동림사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처럼 혜원에게 있어 안정적인 수행처를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절실한 문제였으며, 여산 동림사는 그러한 혜원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수행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384년 동림사에 정착한 혜원은 이후 입적할 때까지 30년 이상 여산 밖으로 단 한 차례도 나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백련결사라는 공동수행운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고승전》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의 내용은 백련결사 성립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참고가 된다. 혜원은 많은 무리를 영도하면서 도를 힘써 행하여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그치는 일이 없었다. 석가모니가 남긴 가르침은 여기서 다시 왕성하여졌다.

이렇게 해서 계율에 힘쓰고 욕망을 억제하고자 뜻하는 사람들이나 세속의 인연을 끊고 청정한 신앙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모여들고 혜원의 평판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 예장(預章)의 뇌차종(雷次宗), 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 신채(新蔡)의 필영지(畢穎之), 남양(南陽)의 종병(宗炳), 장채민(張菜民), 장계석(張季碩) 등은 모두 세속의 인연을 끊고 세속의 영예를 버리고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에 혜원은 정사의 무량수불 불전에 재를 올리며 서원을 세워 모두가 함께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약하였다. 혜원은 분위기가 엄숙하고 행동거지와 예의범절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를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몸도 마음도 함께 두려워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9)

여산 동림사에 주석한 혜원은 수행에 전념하였다. 그는 이곳에 별도로 선림(禪林)을 만들어 선수행에 매진하였으며 경전 연구에도 매달려 여러 저술을 펴냈다. 특히 이곳에서의 지계행(持戒行)은 매우 철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 수행자로서의 그의 풍모는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위의 자료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각지의 인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혜원은 402년 7월 28일, 이들 123명과 함께 반야대(般若臺) 아미타불상 앞에서 염불결사를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백련결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10)

이 글의 성격상 혜원이 왜 염불을 통한 결사를 시작하였는가 하는 등의 사상적 문제에 대해서는 서술을 피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던 사부대중과 함께 혜원이 결사적 형태의 수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의 문제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혜원은 사회적 혼란기를 피해 보다 안정적인 수행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 마련에 우선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산의 수행처가 마련되자 그는 자연스럽게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되었을 것이다.

혜원은 왕실에 의해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이후 300년 이상이 경과한 시점에 살다간 인물이었다. 이 기간 동안의 중국불교는 외형상 급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의 스승인 도안이 주력하였던 의궤(儀軌)의 제정이라든가 경전목록의 작성,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탈피 노력 등은 혜원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어 있던 시대적 과제였다. 특히 일정한 틀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교단을 정비하는 일은 당시 불교계가 해결해야 할 최대 과제이기도 하였다.

그가 무엇보다 《십송율(十誦律)》의 번역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실도 이러한 측면을 반영하는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교계의 성장을 경계하는 정치적 압력이 행사되기 시작하였다. 불교교단을 장악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명한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은 이 과정 속에 저술된 것이다.11) 398년부터 동진의 권력을 장악한 환현(桓玄)은 402년에 이르러 출가 사문의 왕에 대한 예경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문의 사태(沙汰)까지 단행하였다. 같은 해에 “사문은 경전의 가르침을 진술하고 의리를 설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계율을 닦아 고치고 정돈하여 큰 교화를 널리 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에 위배됨이 있는 사람은 모두 파면하도록 하라. 오직 여산은 도와 덕이 있는 곳이니 수색하지 않아도 좋다.”라는12) 명을 내려 승려 사태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사문불경왕자론》을 통해 환현에게 출가 사문의 도를 밝힌 바 있는 혜원은 자신에 대한 압력 여부와 관계없이 불교 교단에 대한 외압적 상황을 놓고 적지 않게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선택한 것이 결사적 형태의 공동체 신앙운동이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환현의 불교탄압, 그리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혜원의 결사적 수행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자료를 주목해 보자.

도대체 사문은 어찌하여 뜻은 높고 먼 경지에 두고 있으면서도 행위는 그리 천박하고 야비한가? 이익을 찾기에 급급하여 잠시도 쉼이 없고 혹은 전답을 개간하여 농부처럼 살고 혹은 행상 교역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이익을 다툰다.어떤 자는 의도(醫道)에 긍지를 가져 경솔하게 한서(寒暑)를 바꾸고, 어떤 자는 이단의 무리와 책략을 꾸며서 생업으로 삼으며, 어떤 자는 점을 쳐서 제멋대로 길흉을 논하고, 또는 도리를 벗어나 권위를 빙자하여 시의에 영합하고, 어떤 자는 재산을 축적하여 필요 이상의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쓸데없는 공론만 하며 앉아서 백성들의 공양을 축낸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덕이 몸에 배어 있지 않고 행동이 예법에 크게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잠시 착한 일을 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어찌 뛰어나게 아름다운 일이라고 드러낼 수 있는 일인가? 사문들은 스스로 이러한 일들은 그만하고 그 풍속을 한결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문들이 하는 짓거리는 시정에 무익하며 다스리는 도는 유해한 것이어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질병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서는 대환(大患)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3)

이 인용문은 석도항(釋道恒, 346∼447)이 지은 〈석박론(釋駁論)〉 가운데 일부를 옮긴 것이다. 도항은 원(袁)·하(何) 두 사람이 당시 사회의 시정을 논하면서 다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였는데 이 가운데 불교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 있자 이에 대한 논박 성격의 글을 지었다. “나는 그들의 논의가 세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렵혀서 영구히 삿된 미혹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까 염려되고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어” 이 글을 지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글의 내용은 손님과 주인 간의 문답 형식을 빌어 작성되었는데 위의 내용은 불교 비판론자의 주장 가운데 일부이다. 위에서 표현된 내용이 모두 당시 불교의 현실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승려 스스로 표현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당 부분은 당시 불교계의 문제점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특히 도항과 혜원은 같은 동진 왕조에서 거의 동시대에 생존하였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도항이 서술한 이 내용은 혜원도 함께 느끼고 있던 당시 불교의 문제점이었을 것이다.14)

결국 이 시대의 불교 교단은 사회에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위에서 들었던 환현 같은 인물은 그러한 문제점을 빌미로 하여 승려 사태까지 추진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혜원은 바로 이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승려 본연의, 또는 불교 본연의 모습을 보이고자 결사적 형태의 수행을 추진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혜원 백련결사의 가장 중요한 성립배경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통해 볼 때 혜원의 백련결사 성립 배경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극심한 사회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혜원은 마땅한 수행처를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운 혼란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스승과 헤어지고 난 후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동림사는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도량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며, 백련결사는 이같은 인식 속에서 결성된 신앙공동체 운동이었다.

남북조시대는 전쟁이 빈발하고, 기근·질병 등으로 민중들이 극심하게 시달리고 있던 때였지만 이 시대에 불교는 오히려 성장을 하였다. 물론 이 시대의 불교 성장은 국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물리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혼란한 시대에 수행자의 표상과도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신앙을 통한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던 혜원의 노력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일이다.

둘째, 불교계에 대한 외압의 대처 방안으로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환현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수행자적 모습을 상실하고 있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그들을 승단에서 내쫓는 사태를 감행하였다. 또한 승려를 국가 권력에 복속시키고자 사문도 왕에게 예경해야 한다는 왕배론(王拜論)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혜원의 노력은 논리적 저항과 수행풍토의 진작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사문불경왕자론》의 찬술이 논리적 저항이라고 한다면, 백련결사의 구성은 수행풍토의 진작을 위한 노력이었다. 비록 권력자의 탄압에 맞서 극단적인 저항을 하지는 않았지만 혜원의 이같은 노력은 당시 불교 교단을 보호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현실 불교의 타락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 개혁을 위해 결사를 성립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동진불교에서 나타나는 타락상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혜원은 이러한 타락상을 극복하는 것이 곧 불교의 자존과 발전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두 개인의 노력보다 많은 대중의 참여가 필요하였을 것이며, 그 결과 사부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적 신앙운동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청정한 대중생활의 모습을 꾸준히 실천해 가면서 불교 비판론자들의 시각이 교정될 수 있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며, 아울러 제 길을 가지 못하고 있는 타락한 집단에게도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나름대로 기대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백련결사는 이후 결사운동의 전범과도 같이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불교가 고비에 처할 때마다 결사적 형태의 수행이 유행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결사운동의 대표적 사례

혜원 이후 중국불교에서는 결사의 형태가 상당히 다양하게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법사(法社)라는 이름으로 결사가 행해지기도 했으며, 송(宋) 시대에도 다양한 형태의 결사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15)

이러한 결사 가운데 성상(省常, 959∼1020)의 정행결사(淨行結社)와 같이 불교사적 업적이 뚜렷한 경우도 있었지만, 결사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결사의 본질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들도 많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보이는 결사의 사례 역시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나타난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몇몇 불상의 조상기를 통해 고구려 백제 등의 신앙공동체적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보다 다양한 형태의 기록이 전하는데 이들 내용을 검토해 보면, 삼국시대의 결사는 불상 조성 등의 불사적(佛事的) 성격을 띤 결사가 주류를 이루며 통일신라 이후에는 특정 교리나 사상을 배경으로 한 결사가 많다는 점이 발견된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의 결사는 화엄결사가 유행하였던 흔적이 보이는데, 8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9세기 말에 이르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16)

아래의 두 자료를 검토해 보자.

① 신룡(神龍) 원년 을사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眞如院)을 고쳐 세웠다. 이때 성덕왕은 친히 백관들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을 세우고, 또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당에 모셨다. 여기에 지식(知識) 영변(靈卞) 등 다섯 명으로 하여금 《화엄경》을 오래 돌려 가면서 읽게 하고 이어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해 오랫동안의 공비(供費)로,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군으로부터 창조(倉租) 1백 석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는 것을 정해 놓은 규칙으로 삼았으며,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 보쯤 되는 모니첩(矣尼帖)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과 밤나무밭 6결, 좌위(坐位) 2결을 내어서 장사(莊舍)를 세웠다.17)

② 한 소리로 서로 호응하고 진실로 우리들의 원을 따라 모든 선을 봉행한다면 누가 우리 문도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18)

①은 705년 개창(改創)된 진여원에서 화엄결사가 조직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진여원을 비롯한 오대산의 신앙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의 연구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지만,19) 오대산은 이처럼 신라불교의 결사와 관련해서도 주목되는 곳이다. 이때 결성된 화엄결사는 성덕왕이 직접 주도하였으며 결사에 소요되는 경비 역시 전적으로 국가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②는 884년경(또는 885년) 황복사(皇福寺)에서 개최되었던 화엄결사의 발원문 가운데 일부를 옮긴 것으로 여기서 표현된 ‘우리 문도(吾徒)’는 곧 화엄종을 가리킨다. 이 표현 이외에도 이 발원문은 화엄종의 반성과 분발, 또는 결속을 다짐하는 문구가 들어있다. 따라서 황복사 결사는 선(禪)의 전래에 따른 화엄종단의 갈등과 위기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처럼 8∼9세기에 성립된 화엄결사는 왕실에 의해 직접 주도되거나 화엄종단의 결속을 위해 추진되는 등 혜원의 백련결사와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따라서 이때의 결사와 불교발전, 또는 불교개혁과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서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결사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의 결사는 불교의 부패, 타락상과 연계되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결사가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먼저 시기상 가장 앞서는 수정(水精)결사의 내용부터 검토해 보도록 하자. 수정결사에 대해서는 권적이 지은 〈지리산수정사기〉20)가 전하고 있어 그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결사의 일원이었던 권적은 이 기문의 앞 부분에서 자기의 해탈(自度)만을 추구하는 부류를 비판한 뒤 다른 사람과 함께 해탈의 도를 추구하면서 후퇴하지 않는 것이 이리(二利) 즉,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모두 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수정결사를 결성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사를 주도한 승려는 혜덕왕사 소현의 제자인 진억(津億)이다.

그는 함께 수학하던 혜약(慧約) 등과 함께 “출가한 사람은 한 번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뿐이다. 만일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나 후한 이익을 바란다면 어찌 본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한 후 자신들의 뜻을 성취할 만한 도량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결국 수정결사는 자리와 이타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수행의 필요성을 전제하면서, ‘높은 명예(高名)’나 ‘후한 이익(厚利)’을 바라지 않는 구성원들이 결성한 결사운동체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표현은 진억이 탄식한 내용, 즉 출가자가 높은 명예나 이익을 바라는 것은 본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이 표현은 현실 불교에 대한 진억의 비판의식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실 고려시대의 불교는 건국 초기부터 지나친 불사와 승단에 대한 과도한 혜택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에 종파불교의 정착에 따른 종파간 갈등 역시 고려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상태였다.

수정사가 개창되는 1129년은 고려불교의 이러한 문제점들이 이미 극명하게 노출되고 있던 시기로 이해된다. 태조 왕건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귀족세력들의 과도한 불사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으며, 승단에 부여되는 특혜 역시 시대가 흐를수록 점차 누적되어 고려후기가 되면 국가경제 전반에 걸쳐 심대한 타격을 줄 정도의 상황에 이르고 만다.21) 또한 종파불교의 갈등상도 갈수록 심화되어 왕자 출신이었던 의천이 유가종 세력에 밀려 해인사로 퇴거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22) 이때의 종파 갈등에는 왕실과 귀족세력(仁州李氏)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함께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관료들의 비판과 승단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려불교의 상황은 오히려 계속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진억은 이같은 문제점을 통감하여 수정결사 운동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다음의 내용을 통해 수정결사의 취지와 성격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① 사(社)에 모인 모든 사람은 온화롭고 엄숙해 잘못이 있으면 충고하고 잘한 일은 칭찬하며 서로 자극을 받아 밤낮으로 노력하며 함께 서방에 이르기를 목표로 하였다. 우수한 사람이나 덕망이 높은 이로서 사원에 거처하는 이에게는 일정한 법규에 구애되지 않고 경을 읽든가, 염불을 하든가, 참선을 하든가, 공부를 하든가 간에 마음대로 자유롭게 지내도록 하였다. ② 대사는 사의 사업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대중과 더불어 상의하고 나라에서 명령을 내리시어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청하였다.

그것은 곧 지금부터 덕을 이루어 사원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번갈아 가면서 사주(社主)가 되는데, 기한은 3년 전후로 정하고 서로 교대하여 감히 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한 방법이다.23) 먼저 ①에서는 결사 구성원들의 수행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데, 이들은 일단 서방정토에 이르는 것을 공동의 수행 목표로 삼았던 것 같다. 또한 우수한 사람이나 덕망이 높은 이(逸人耆德)에게는 특정한 수행 형태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풍경(諷經)·염불·좌선·수혜(修慧) 등을 뜻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밝혀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던 교선의 대립 문제라든가 종파 간의 갈등을 고려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②는 결사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구비한 이후 그 결사의 사주에 대한 규정을 정해 놓은 내용이다. 즉 수정사의 사주는 교대를 원칙으로 하되 임기는 3년 전후로 한다는 원칙을 밝혀 놓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수정사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밝혀 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당시 불교계의 주지직을 둘러싼 잡음을 고려한 규칙으로 생각된다. “종실과 상부 이하 진신(縉紳)으로서 명망 있는 자, 선원과 강원의 고승으로부터 일반 신도에 이르기까지 입사를 원했던 사람이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수정결사는 당시 불교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결사는 왕실과 귀족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점으로 인해 그 순수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초(超)종파적, 초세간적 수행을 위한 노력은 고려중기 불교사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불교계에서는 두 차례의 중요한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 지눌의 정혜결사와 요세의 백련결사가 그것인데, 이들 두 결사는 한국불교사 전체를 통해 가장 대표적인 결사로 평가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정혜결사는 지눌의 독창적 선사상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먼저 기존 연구를 토대로 하여 이들 두 결사의 개략적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혜결사와 백련결사의 내용 비교 정혜결사와 백련결사는 동시대에 결성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결사 개창자의 사상적 특수성에 따라 두 결사 사이의 적지 않은 차이점도 발견된다. 이들 두 결사가 지니고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는 작업은 이 시기 결사운동의 역사적 성과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 두 결사에서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특성부터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현실 불교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다. 앞서 약술한 내용과 같이 고려불교는 이미 건국 초기부터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지나친 불사, 승단에 대한 과도한 혜택, 종파의 분열상, 정치세력과의 유착 현상 등 실로 다양한 문제점들이 고려 초기부터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두 결사가 결성되던 시기의 고려후기 불교계 역시 이같은 현상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무신정권의 집권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불교계의 참담한 현실은 이 시대 불교계의 상황을 대변해주는 사례로 이해된다. 지눌과 요세는 이러한 불교의 현실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의 자료를 참조해 보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들의 소행을 아침 저녁으로 돌이켜보면 어떠한가? 불법에 핑계하여 ‘나’다 ‘남’이다를 구별하여 이양(利養)의 길에서 허덕이고 풍진의 가운데에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아아, 삼계를 떠나려 하면서도 속세를 벗어난 수행이 없고 한갓 사내의 몸이 되었을 뿐이요, 장부의 뜻이 없어 위로는 도를 닦는 데 어긋나고 밑으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렸으니 진실로 부끄럽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일을 탄식하고 있었다.24) 《권수정혜결사문》의 이 내용은 지눌이 보았던 고려불교의 현실이며, 정혜결사 운동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현실 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은 요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의 “오직 대사가 종교가 쇠해가던 때를 당하여 크게 법당을 세워 법을 듣지 못하던 세속을 놀라게 하여 뿌리 없던 신심을 서게 하며, 조사의 교리가 다시 일어나 천하에 선포되게 하니 본원력으로 말세에 태어나 여래의 시킨 바 되어 여래의 일을 행하기를 어찌 이렇게 했겠는가.”라는 표현이나, “대사가 산 속에 자취를 감춘 지 50년 동안 서울 땅에 발을 붙이지 않았고 몸소 시골에 있는 친척들의 일을 간섭한 일이 없었다.”는 표현들이25) 모두 이와 관련한 내용일 것이다.

이처럼 지눌과 요세는 모두 자신들이 처해 있던 불교계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 개혁을 위해 결사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둘째, 결사 구성원들의 신분상 유사점이다. 우선 두 결사를 주도해 갔던 승려들이 주로 독서층·향리층 출신이었다는 점은 이미 밝혀진 내용이다.26)

이같은 유사점은 이들 결사가 기존의 왕실 중심, 귀족 중심의 불교를 배제한 상태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항이다. 즉 이들은 기성 교단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불교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신분적 배경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결사에 참여했던 구성원들의 신분에서도 유사점이 발견된다. 왕실과 귀족 등의 지배계층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신분계층이 두 결사의 결사자로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백련결사의 경우는 정혜결사보다 민중 참여의 폭이 더욱 넓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들 결사의 대중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주목되는 일이다. 셋째, 철저한 수행 위주의 결사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유사점이다.

지눌은 1182년 담선법회에 참가했던 동학들에게, “이 회가 파하거든 우리는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동사(同社)를 만들어 항상 선정을 익히고 아울러 지혜를 닦기에 힘쓰며 예불하고 경 읽기와 나아가서는 노동으로 운력하는 데까지 각각 자기 맡은 일을 하자.”27)고 권유하면서 처음 결사를 제의한 바 있다. 그리고 이같은 수행 위주의 결사 정신은 이후 그대로 실천에 옮겨졌다. 요세의 경우는 보다 구체적인 수행법을 제시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서참회(徐懺悔)’라는 별칭을 들을 만큼 철저한 참회수행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매일 53불에게 열두 번씩 절을 하였는데 모진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단 하루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양대 결사는 구성원들의 철저한 수행운동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이같은 노력이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넷째, 지눌과 요세 모두 독창적 사상을 바탕으로 결사를 이끌어 나갔다는 점이다. 지눌의 선사상이 독창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특히 삼문(三門)의 체계라든가, 하택신회의 사상과 이통현 장자의 화엄관을 채택한 점 등은 지눌의 대표적 독창성으로 알려져 있다. 요세 역시 의천과는 다르게 선에 대립되는 천태종 특유의 면목을 선양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아울러 천태지관·법화삼매참·정토구생의 삼문을 통해 실천강령을 마련하였다는 점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같은 점을 중시하여 고익진 선생은 “보조나 요세와 같은 당시의 불교사상가들은 전통의 계승에 있어서 맹목적인 고수보다는 자유로운 독창성을 추구했던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28)

이상과 같은 두 결사의 유사한 측면이 보이는가 하면 이들 결사 사이에는 서로 다른 특성도 존재하고 있다. 특히 두 인물의 정토신앙을 수용하는 자세가 서로 달랐다는 점은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여기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상술하기는 어렵지만 요세의 정토신앙을 수용하는 자세가 보다 적극적이었으며, 이것은 요세의 불교사상이 피지배층 즉 대다수의 농민과 천민층까지도 대상으로 할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항이다.29)

이로 인해 요세는 정토신앙이 민중 속에 깊이 정착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도 평가된다.30) 이 외에도 두 결사의 계승과 사회적 영향, 최씨정권과의 관계, 대몽(對蒙) 의식 등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두 결사는 고려후기까지 그 명맥이 계속 이어지지만 지눌과 요세의 결사정신은 시대가 흐를수록 쇠퇴해져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오랫동안 한국불교는 침체기에 빠졌으며 의미로운 결사운동 사례 역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의 불교에서 결사운동의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함허득통(函虛得通, 1376∼1433), 석실명안(石室明眼, 1646∼1710),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등에 의해 결사가 구성되었으며 향도·계 등의 결사적 신앙체도 여러 차례 결성되었음이 밝혀졌다.31)

하지만 이 시대의 결사운동은 그 사상성이나 영향력 등의 측면에서 전 시대의 결사와 비교하기 어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의 결사는 극렬한 억불 상황 속에서 그나마 조선불교를 유지시킬 수 있었던 ‘조선불교의 생명력’ 차원에서 앞으로도 꾸준히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 이후의 불교사 속에서는 특히 경허(鏡虛, 1849∼1912)의 결사운동이 주목된다. 그는 1899년 해인사, 1902년 범어사에서 각각 구체적인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추진했던 결사운동은 지눌의 정혜결사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창조적 변용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혜쌍수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선과 미륵신앙의 회통·겸수를 지향하였다는 사실 때문인데, 여하튼 경허는 ‘보조선의 근대적 계승자’로 불리울 만큼 정혜결사 정신을 근대에 구현시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또한 그의 제자 한암(漢岩, 1876∼1951)의 결사운동과 관련한 자료도 최근 발굴되었다. 한암 역시 사상적 측면에서 보조의 정혜결사를 계승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는데, 앞으로 스승 경허의 결사와 연계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32)

4. 결사운동과 불교개혁

결사운동과 불교개혁의 상관성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개혁’ 또는 ‘불교개혁’의 개념적 성격이 함께 검토될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는 불교개혁의 의미와, 역사 속에서 찾아지는 결사운동의 불교개혁적 의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따라서 과거의 결사운동을 현대적 개념의 불교개혁으로 이해한다면, 그만큼 결사운동의 불교개혁적 성향은 제한적인 범위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 속에 나타난 불교개혁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 첫째는 교단개혁적 성향의 개혁이다. 대개 물리적 힘에 의해 교단의 구조를 개혁하려고 했던 시도들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일이나 태고 보우가 원융부를 설치하고 불교개혁을 시도했던 일들이 그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 관련한 문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는 상태이지만, 그가 천태종 개창을 통해 당시 불교교단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아울러 그가 천태종을 개창하는 과정에 왕명에 의해 선종 세력을 다수 흡수하였다는 점은 이때의 교단개혁에 물리적 힘, 즉 불교 외적인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의천의 때 이른 입적으로 인하여 그가 천태종 개창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교단개혁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천태종 개창에 따른 고려불교의 변화상은 매우 큰 것이었으며, 천태종 개창은 곧 의천이 지니고 있던 교단개혁적 의지의 소산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이나 보우의 교단개혁을 위한 노력 등은 모두 왕조시대 체제 아래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국가 권력에 종속되어있던 승단이 독자적으로 교단을 개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진하고자 했던 교단개혁은 세속 권력의 동의 아래에서 가능하였으며, 따라서 왕조시대의 교단개혁은 결국 세속권력과의 타협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33)

교단개혁적 성향의 개혁에 이어 두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자정적(自淨的) 성격의 불교개혁 노력이다. 이것은 세속권력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교단개혁과는 판이하게 구분되는 성격의 개혁운동으로, 앞서 살펴보았던 결사운동의 사례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이들 자정적 성격의 노력들이 진정한 의미의 개혁인가에 대해서는 다소의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다음의 자료를 검토해 보자.

혹은 도를 말하고 혹은 참선을 하고 안거와 두타행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부처님 계율대로 하였다. 사방에서 승려와 신도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와 사찰에 꽉 찼으며, 명예와 벼슬, 아내와 자식도 버리고, 의복도 찢어 버리고 머리를 깎아 승려를 따라 함께 오기도 하였다. 왕·공경·선비·평민 등이 이름을 쓰고 입사한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34)

지눌이 수선사(송광사)로 결사 도량을 옮긴 이후의 상황을 묘사한 글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지눌과 결사 구성원들이 ‘한결같이 부처님 계율대로(一依佛律)’ 살아가고자 하였다는 표현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혜결사와 백련결사는 철저하게 수행 위주의 결사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 불교개혁운동 차원에서도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했던 결사는 무엇을 인위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운동이 아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 인용문의 표현대로 그저 ‘부처님 계율대로’ 살아가자는 다짐을 하고 그 취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묵묵히 실천 수행만 했을 뿐인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회귀’에 가까운 노력이었다. ‘부처님 계율대로’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자는 일종의 자정적 자각운동이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혜원의 백련결사나 진억의 수정결사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결사운동들은 예외 없이 무엇을 바꾸고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 부처님 계율대로 살아가면서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했던 수행운동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들 사이에서는 그 수행방편의 차이, 즉 사상적 차이만 어느 정도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 불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결사운동은 분명 불교개혁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 시대의 불교는 불법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지눌을 비롯한 결사 주도자들이 스스로는 개혁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타락한 불교 교단의 모습이 팽배해져 있던 시대에서 이러한 노력은 일종의 개혁운동으로 비추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의 관점에서 이들을 불교개혁운동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는 이유 역시 같은 선상에서 이해되는 일이다.

이처럼 결사운동이 지니고 있는 불교개혁의 성향은 교단개혁적 성향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을 유념하여야겠다. 그러면 결사운동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불교개혁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에서 다음과 같은 발원을 하고 있다. 그

러므로 이 결사에 들어와 마음을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본말을 알게 하여 모든 논쟁을(口諍) 그치고 그 권실(權實)을 분별할 수 있게 하며 대승법문을 바르게 수행하는 길에서 그릇된 공부를 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바른 인연을 함께 맺고(同結正因), 정혜를 함께 닦으며(同修定慧), 행원을 함께 닦고(同修行願), 불지에 함께 태어나고(同生佛地), 깨달음을 함께 증득하는(同證菩提) 등 이러한 모든 일들을 모두 함께 배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래세에는 시방세계에 자재로이 노닐면서 서로 주인과 손이 되어 함께 도와 이루며 정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중생을 널리 구해 제불의 크신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부처님의 눈으로 이 작은 정성을 증명해 주시옵소서. 널리 이 법계의 무지한 중생들을 위하여 이렇게 정혜를 함께 닦자는 원을 발하옵니다.35)

〈권수정혜결사문〉을 비롯한 지눌의 저서 어디에서도 교단을 개혁하거나 불교를 개혁하겠다는 등의 의지가 표출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지눌은 의천과 같이 세속의 힘을 빌려 교단개혁을 추진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불교개혁의 방법은 이렇게 자정적 성향이 강한 자각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결사정신은 상당히 구체적이면서 실천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서 든 다섯 가지의 사항이 이를 말해 준다. 이 부분은 〈권수정혜결사문〉의 끝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일종의 결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표현이다. 여기서 지눌은 동결정인(同結正因)·동수정혜(同修定慧)·동수행원(同修行願)·동생불지(同生佛地)·동증보리(同證菩提) 등의 다섯 가지 원을 발하고 있다.

선인(善因)의 결사 구성원들이 함께 모일 수 있기를 발원하고(同結正因), 그들과 함께 정혜와 행원을 닦을 것을 발원하였으며(同修定慧·同修行願), 계속해서 불지에 태어나 깨달음을 성취할 것을 발원하고 있는 것이다(同生佛地·同證菩提). 그리고 이러한 발원을 성취하기 위해 지눌과 결사의 구성원들은 ‘부처님 계율대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불교인들에게 있어 상당히 개혁적 성향의 운동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그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정혜쌍수’의 수행법은 사상적 개혁으로 불리워도 좋을 만큼 혁신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5. 맺음말

신앙결사운동은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불교가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많은 선각자들은 그 대안으로 결사운동을 주창하였으며 그 성과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이들 결사운동이 내세우고자 했던 정신, 즉 결사 정신의 근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적지 않은 오해가 있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결사운동들이 과연 무엇을 하고자 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주안점을 두고 서술하였다.

그 결과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이들 결사는 철저한 수행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들은 타락한 현실 불교에 대한 강한 반성운동으로 결사를 시작하였으며, 그 개선을 위해 결사 구성원들의 수행을 최우선적 과제로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결사를 주도했던 인물들의 사상적 특성에 따라 각 결사가 역점을 두었던 수행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눌의 정혜결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들이 ‘부처님 계율대로’ 살아가는 형태의 수행에 전념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결사운동의 성과를 불교개혁적 차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이들 결사는 불교의 무엇을 바꾸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귀적인 성격이 강한 취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사운동의 개혁성은 ‘부처님 계율대로’ ‘부처님 법대로’ 수행하자는 회귀성에 있었다는 다소 모순된 결론을 도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의 개혁은 여러 가지 방향에서 추구될 수 있다.

특히 현대사회와 같은 환경 속에서 불교는 마땅히 변해야 하고, 그 방법 또한 더욱 다양하게 추구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결사운동은 그 어떤 개혁보다 불법의 본질이 왜곡되고, 수행자의 수행풍토가 타락한 현실을 되돌려 놓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개혁이 아닐까. <끝>

김상영
동국대학교 사학과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역사학과 졸업.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논저서로 〈고려중기의 선승(禪僧) 혜조 국사와 수선사〉 〈일연과 재조대장경 보판〉 〈우담 정시한의 생애와 산중일기 내용 분석〉《전통사찰총서》(전13권, 공저) 《봉은사지》(공저) 《낙산사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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