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경 동국대학교 선학과 강사

1. 들어가는 말

2007년 12월 31일, 사형수 여섯 명이 무기수로 감형되었다. 그 중 두 사람은 필자가 속한 불교교정위원팀에서 약 8년간 만나 온 불자들이다. 두 사람 모두 사형수로 복역한 지난 10여 년 간 진심으로 참회하여 새 사람이 된 불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 사람은 그 동안 필자와 가족만큼이나 속을 터 놓고 지내온 사이였다. 그들과 가족들의 심정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4년 전만 해도 사형집행 대신 감형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한국에서 사형집행은 정권이 바뀌는 해의 마지막 날이면 어김없이 시행되어 오곤 하였다. 김영삼 정부 말년에는 하루에 전국에서 20여 명이 넘는 사형수가 처형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 김대중 정권 말기가 다가오자 죽음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사형수들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필자의 자매였던 불자도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마지막 날, 뜻밖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섯 명의 사형수를 무기로 감형하였다. 그 중 하나가 필자의 자매였다.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 자신이 예전에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수였다는 사실, 그가 수형생활을 몸소 겪어 보았다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어서 이번에 노무현 정부도 집행 대신 감형을 선택하였다. 사형제 폐지는 사실 세계적인 추세가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이로써 실질적인 폐지 동참국이 된 셈이다.

필자는 지난 8년 간 교정위원으로서 서울구치소의 사형수 상담, 경전반, 청송교도소의 무기수 상담과 마약사범 교육을 해 왔으며 그 밖에 소년수들을 비롯한 전국의 다양한 재소자들과 만나왔다. 본고에서는 교정 현장에서 보아온 불교 포교의 현주소와 과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재소자에 대한 오해와 진실

아직도 재소자를 만난다고 하면 “죄 지은 사람, 업장 두터운 사람을 왜 도와 주는가?”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소위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나 ‘잘못된 형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무고하거나 억울한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우선 사형수의 경우이다. 사형수라고 하면 중한 살인죄를 연상하겠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후에 노벨평화상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에는 일본에서 수십 년간 사형수로 있다가 누명을 벗고 풀려 난 분이 직접 방한하여 자신의 기막힌 사연을 강연한 적도 있다. 국제단체에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법원이 잘못 선고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진범인 줄 알고 사형을 집행한 이후 진짜 범인이 잡히거나 스스로 자백하는 경우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 경우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은 국가와 사회에 의해 살해당한(!) 셈이다. 당사자뿐이 아니다. 사형수가 되면 온 가족(결혼한 경우 자녀를 포함하여)은 물론 친척, 친지들까지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오판 때문이라면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

2002년에 무기수로 감형되어 현재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김인제씨도 그런 경우이다. 비록 본인이 사건 당시 자포자기하여 죄를 뒤집어쓰기는 했으나 수사나 기소 내용 자체가 오류임은 분명하다. 그는 살인을 하지도 않았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그런데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사형수 생활을 11년이나 하고 온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용케 무기수가 된 지금 다시 최소 20년이 넘는 수형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무기수로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필자는 그의 자매교정위원으로서 시민단체 <희망을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그를 사면해 주도록 탄원서를 작성하여 5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와 법무부에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정치인도 경제인도 아니기 때문일까. 20대 말에 사건에 휘말리기 직전까지 김인제 씨는 우리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시민이었다.
다음은 그가 사형수로서 죽음을 준비하던 때 쓴 시이다.

작은 기도

제가 밟는 땅과 숨쉬는 공기에서
당신의 지혜를 느끼게 하시며
마음을 아래에 두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등심을 갖게 하소서.
다른 이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하시며
세상 만물 중 작은 하나임을 가슴 깊이 느끼게 하소서.
삶 속에서 고통의 바다를 만날 때
당신의 고행을 생각하게 하시며
피하기보다는 순응케 하시어
스스로 졌던 짐을 스스로 내려놓게 하소서.
걸음걸이 하나에 수많은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내 몸같이 아끼게 하시어
함부로 가벼이 여기지 않게 하소서.
한 마음 거둘 때가 오면 맑은 정신으로 그 때를 맞게 하시어
한 순간 낙엽이 떨어지듯 세상에 인연이 다한 날
선한 눈매 선한 웃음으로 그 곳으로 갈 수 있게 하소서.

그러면 일반 재소자의 경우 우리 사회의 법 정의 구현 지수는 어느 정도일까. 역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흔히 ‘죄값을 받아야지’라고 하지만 동일한 잘못을 하더라도 그 사람의 재산 등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재판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억울하거나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을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화에 바탕한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도 부인과 정부를 죽인 죄를 쓴 무고한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도소 포교에 대해 우선 불자들이 풀어야 할 오해는 재소자는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는 것과 마땅히 공정하고 합당한 형을 받아 살고 있으니 할말이 없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나아가 부처님 말씀대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누구도 큰소리치며 남을 정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 자신이나 내 가족도 어느 전생에 자신의 무명 때문에 혹은 억울하게 감옥에 가거나 죽게 된 일이 있었을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지는 편견 중 하나는 재소자들에게는 포교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법을 어긴 사람들이니 그만큼 마음이 완고할 것이고 부처님 말씀을 잘 받아들이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반대이다. 그들은 부처님 말씀을 안 찾는 게 아니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상상외로 많은 전국의 재소자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찾고 있으며 스님들에게 상담을 받고 싶어한다. 사실 불교야말로 신앙 이전에 곧바로 고(苦)와 고를 멸하는 법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참회와 업장소멸을 위한 정진과 노력 등 고통받고 있는 재소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불교의 마음의 원리와 자비라고 볼 수 있다.

교도소 포교는 어렵다. 그러나 포교대상인 재소자들이 완고하거나 외면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만큼도 스님과 불자들이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3. 교도소 포교의 현황

현재 우리나라에는 60여 개의 교정시설(구치소와 교도소 등)이 있다. 지금부터는 대표적으로 ‘교도소’라 칭하겠다. 그 곳에 수용되어 있는 재소자는 약 6만 명이다. 각 교도소에는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교정위원회(혹은 교화위원회, 종교위원회 등)’가 있다. 그리고 교정위원회는 종교별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현재 원불교는 서울구치소에만 유일하게 정식으로 구성됨)의 성직자와 일반신도들이 자원봉사로 포교와 상담을 하고 있다.

각 종교에서는 1주일에 한 번 법회 혹은 예배일이 지정되어 원하는 재소자들이 참가하도록 한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금요일이 불교 법회날인데 평균 150-200명(강당 최대 수용인원. 여사는 별도로 50명 정도)이 참석한다. 사형수들은 원칙적으로 법회에 참석할 수 없다. 단 작년에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수계하신 때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허락된다. 전국 교도소의 법사는 대부분 스님이지만 재가불자가 하는 경우도 많다. 불교 교정위원 중 승속을 합하여 조계종 소속은 절반도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지방은 천태종, 태고종 등의 활동이 활발하다.

매주 한 번의 법회 외에 일반 불교교리, 경전반, 혹은 정기적인 자매상담시간 등이 있는데 교도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종교별로 작은 사무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지정받는다. 작게마나 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곳도 있고 지원이 미약하여 되지 못하는 곳도 있다.

여건상 한 반에 몇 명 이상이 모이기는 어렵다. 횟수는 한 달에 한 번에서 매주 한 번까지 다양하다. 대개 평일 오전이나 오후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의 교리나 상담 시간을 갖게 된다. 수계식은 일 년에 한 번 하는데, 많은 불자들이 수계받기를 원한다. 그 외에 법무부에서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교도소 내 정신교육이나 마약교육을 담당하는 교정위원들도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불교 교도소 포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담당인원이나 재정이 너무나 취약하다는 점이다. 특히 기독교나 천주교와는 비할 수가 없다. 기독교는 교정활동을 하려는 성직자나 교회의 신청이 너무 많아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천주교는 아예 교단에서 교정담당 성직자들을 임명해주고 일정기간 그 일에만 전념하도록 모든 면에서 지원해준다. 예산 지원은 당연하므로 담당 성직자는 아무 걱정없이 활동할 수 있다.

반면 불교는 어떠한 체계적, 조직적인 지원 없이 완전히 개인의 원력으로 알아서 해야 한다. 스님들의 경우 바쁜 일정 속에서 따로 정해진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한다. 재가자들 역시 스스로 시간과 후원금 등을 마련해야 한다. 교정위원이 되면 회비도 매월 내게 된다. 기본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재소자 영치금과 각종 책, 법회 때는 떡과 물품 등 물질적으로도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도소 직원들로 구성된 전국불자교정인 연합회가 있지만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역시 타종교에 비해 지원이 없다는 것이 소속 회원들의 호소이다.

이와 같이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교도소 불교 포교의 현실이다. 전국에서 가장 멀고 외진 곳인 청송교도소, 특히 ‘교도소의 교도소’라고 불리는 청송 제2 교도소의 경우 불교 교리나 상담 신청자는 많으나 교정위원 겨우 몇 명만이 적은 횟수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가 서울에서 청송까지 다니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여전히 교정위원은 절대 부족이다.

반면 그곳 기독교 교정위원 신청자는 너무 많아 다 수용하지 못하고 되돌려 보내고 있는 형편이다. 어느 교도소나 비슷한 실정이라고 알고 있다.

지방의 한 사형수 불자의 경우 근처에 있는 큰 조계종 사찰에 편지를 했으나 아무 답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스님이나 불자들은 청해도 만나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인 반면 기독교 목사님들은 끈질기게 찾아온다고 한다. 불자인 줄 알면서도 당신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며 편지도 하고 영치금까지 넣어주며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간 불심이 깊지 않은 사람은 이런 상황이 몇 년간 계속되면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원래 불자였다가 개종하는 경우가 일어나고 있다. 재소자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듣는 이야기이다. 즉 새로운 사람들에게 힘들게 포교하는 문제 이전에 불자였던 사람까지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뼈아픈 현실이다. 불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충실히 불법을 전해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솔직한 불교의 현주소이다.

자발적 불자 외에 가능한 유동 포교대상 인원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워진다. 어려운 상황에서 얼마든지 마음을 열고 부처님 법을 접하여 불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재소자들을 많이 만났었다. 그러나 현재 있는 불자 재소자들도 제대로 챙기기가 역부족인 상황이어서 마음만 답답하게 돌아서야 했던 경우가 수도 없다.

4. 교도소 포교의 과제

첫째, 재소자에 대한 불교 포교는 단순히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동정심이나 보살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평등사상과 생명존중사상에 바탕하여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반경》의 일체중생실유불성 천명과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일체중생 제도에 따른 실천 원리이다.
필자도 만일 불자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이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적이 많았다. 특히 사형수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부처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변화시키는 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앙굴리마라를 교화시켜 수행자로 만드신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항상 함께 하셨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만났고 눈물 속에 올린 기도도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의 근본은 부처라고 하셨으니 그들도 업식에 가리웠을 뿐 근본은 역시 부처였다. 그 말씀대로 믿고 대해왔고 사실임을 직접 목격해왔다. 가장 감사한 일들은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게 되는 때였다.

물론 그에 못지 않게 실망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자 중생일 뿐인 것을 알았다. 불자라고 하면서도 정진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변하기가 어려운데 남이라고 다르겠는가. 부처님은 이런 나를 포함하여 어느 한 중생도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내가 그 누구를 포기하랴 하고 오기가 나곤 하였다. 불법의 인연을 지어놓으면 그들이 이 생에 안 된다고 해도 어느 생엔가는 반드시 청정하고 밝은 자성을 찾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둘째, 교도소 포교는 불자로서 보살행과 보시의 실천이다. 지난번 사형수 감형이 있은 후 한 불교계 언론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을 묻기에 “불교계는 지원이 약해서…” 하고 말을 시작하자 “아, 그건 항상 나오는 당연한 이야기이고요.”라고 하였다. 복지분야에 대해서 불교는 어디에서나 지원이 약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순간 그에게 공감은 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 슬퍼졌다. 특히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라고 한다. 상구보리 못지않게 하화중생과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 대승정신 아닌가. 불교가 복지에 약하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니며 합리화되어서도 안 된다.

청송교도소의 경우 하루에 다녀오려면 승용차로 왕복 10시간이 넘게 소요된다. 지난 몇 년 간 그 길의 반은 눈물로 지나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직원은 냉소하며 “여기는 열이면 열이 나가도 다시 들어오는 사람들인데 헛수고한다.”고도 하였다. 정말 실망한 경우도 많고 고비도 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곳에서 상담했던 사람 중 출소하여 정말 마음잡고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도 몇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셋째, 불교의 사회적 책임으로 보더라도 교도소 포교는 중요하다. 재소자는 사실 소수이면서도 다수이다. 현재 6만이라는 재소자 수는 소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6만 명이 아니다. 가족,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 등 관련자들을 생각하면 직접 연관된 사람만 최소 몇 십만 명이다. 경찰이나 법조인을 포함하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 전체에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피해나 영향을 생각하면 결코 사회 일부의 문제라고 간과할 수 없다. 법과 범죄는 한국사회 전체와 시민의식과 생활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얼마 전 BBK 등의 여파만 생각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재소자들은 그들만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는 이방인이 아니다. 외국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실화로 다룬 번역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라는 책도 참고해볼 만하다.

출소한 후 재범률이 높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다. 교도소에서 방치하고 변화되지 못하여 악업을 다시 짓게 되는 경우 그들은 혼자 업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때 피해자는 다름 아닌 우리 일반시민들이다. 그들의 업은 그들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화의 결과는 바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가끔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사회에서 말하는 대책은 근본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범죄 방지 대책에서는 원인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범죄는 기정사실로 하고 그 사람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검거할 것인지가 주된 전략일 뿐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가장 확실한 승리는 적 자체가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재소자들이 진심으로 참회하여 선한 시민이 된다면 적이 아닌 아군이 되는 것이다. 재소자들을 교화하려 노력하는 것, 그들에게 포교하여 참된 불자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범죄와의 전쟁일 수도 있다.

물론 실업률과 빈부의 차이를 줄이는 등 사회구조적으로 변화 발전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불교적 인성교육과 이를 통한 마음 다스리는 정진이 따르지 않는다면 범죄율을 줄이는 데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 법의 근본은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변해야 행동이 변하고 삶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보면 출소 이후에까지의 포교로 이어질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로선 바랄 수 없는 희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도소 포교는 소수자인 재소자들만이 아니라 바로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교화 프로그램이 보다 체계적, 전문적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재소자를 위하여 만든 프로그램은 거의 전무하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2년 전쯤 조계종 포교원에서 재소자를 위한 마음 수행 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계획이 보류되었고 아직까지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형수 불자들과 담당 교정위원들이 2002년부터 천일기도를 해 오고 있는데 1월 말로 이천일 회향을 하였다. 시작 당시는 아직 사형집행이 계속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불자로서 우리는 단지 육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업장 소멸과 진정한 참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 속에 있는 청정한 자성을 찾아 바르게 정진하는 참된 불자가 되고자 하는 발원이었다.

서양의 정신과 의사이자 불교 심리치료사인 David Brazier는 그의 저서 《禪 치료(Zen therapy)》에서 교도소에 필요한 교화 내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범죄자에 대한 우리의 치료를 생각해보자.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벌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더 나쁜 경험을 하게 만들어야 어느 날 갑자기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현실과는 다르다. 감옥이나 소년원을 살펴보면 수감자들에게 심한 벌을 내리면 내릴수록 그들의 재범 가능성은 더욱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오심 때문에 공공 정책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증오심의 번뇌가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중략…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지 더 많은 아픔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약 가두는 우리들이 도우려는 마음보다 해치려는 마음이 깔려 있다면 어떻게 범죄자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범죄자는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앞으로 불교의 교리와 마음 수행에 바탕한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개발되기를 희망한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불교의 재소자에 대한 교도소 포교의 현황과 앞으로 실천해야 할 과제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재소자에 대한 불자들의 오해와 편견은 정확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재소자 포교는 불교의 평등사상과 생명존중사상에 바탕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복지 분야 중에서도 재소자 포교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악업과 범죄를 없애기 위한 근본 대책이라는 점에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재소자 포교는 단순히 소외된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보살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정법에 기초하여 그들 속에 존재하는 불성을 믿고 스스로 참회하고 업을 녹여가는 정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불교를 알고 싶고 상담받고 싶어하는 재소자들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부응한 포교활동은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종단 등으로부터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소수 봉사자들이 개인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물질적,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중국 북경에서 상담전공 학자를 비롯하여 상담관련자들과의 만남의 자리가 있었다. 중국에서 교정 상담은 아직까지 한참 요원한 이야기이다. 특히 마약관련자는 거의 예외없이 수시로 사형을 집행해오고 있고 숫자도 상당하다. 그들은 우리나라 교정 상담 이야기에 대해 처음엔 조금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그래서 북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2008년 북경올림픽 상징 문구를 언급하였다.

다름 아닌 ‘One World, One Dream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었다. “당신들은 상담을 전공하거나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상담자의 기본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북경올림픽의 꿈은 모두가 차별 없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 하나의 세계에는 어떤 예외도 없어야 할 것이며 재소자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중국인들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라는 말에 상당히 호응하며 분위기가 호전되었다.

이와 같이 21세기는 지구촌의 시대이고 비불자인 일반인들에게도 이제 평등사상과 인권존중사상은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불교는 21세기 인류의 대안사상이라고도 한다. 인종, 계층, 언어, 문화, 직업, 지위, 성별 등에 걸림 없이 시방삼세 언제 어디서나 ‘그 곳에 계시는 부처님’은 우리의 생활 속 실천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현세의 지옥인 교도소 역시 부처님이 계신 바로 그 곳이다.

성철스님 법어에도 “미천하게 보이는 파리, 개미나 사납게 날뛰는 이리, 호랑이를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여야 하거늘 하물며 같은 무리인 사람들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살인·강도 등 극악한 죄인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때 비로소 생명의 참 모습을 알고 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생명의 참모습>, 1981년)라고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지장도량이 많다. 이왕이면 지장 기도를 올리는 것에서 나아가 지옥중생까지 모두 제도한다는 지장보살의 원력을 삶과 행으로 실천해가는 불자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원 드린다.

무고한 사형수였던 불자 김인제 씨의 시에서 한국불교의 지장보살행에 대한 염원을 보게 된다.

그 곳에 그 사람이 있다

모두가 외면하는 그 곳에 그 사람이 있다.
몸도 마음도 쇠사슬에 묶여
절망의 눈물 흘릴 때,
가만히 손수건 내민 사람이 있다.
내가 어둠이었을 때 자신의 빛이 죄인양
스스로를 꺼버린 한 사람이 있다.
세상의 돌팔매에 멍든 가슴을 감출 때
자신의 가슴을 먼저 보여준 사람이 있다.
내가 삶을 낭비하여 끝을 얘기할 때
따스한 눈으로 시작임을 말해주는 한 사람이 있다.
고통 속에서 증오를 떠올릴 때
더 가까이 다가앉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람처럼 온다 아무런 얘기도 없이,
원래 있던 것처럼 그렇게 찾아온다.
그는 물같이 스며든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스며든다.
고통과 절망이 있는 곳에 그 사람이 있다.
바람이 되어 물이 되어, 그 곳에 그 사람이 있다. ■

 

황수경 / 이화여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학교 선학과 강사, 법무부 교정위원, 불교인재개발원 교육분과장, 불교상담개발원 연구위원, 군 상담위원, 불교여성개발원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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