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매 예이타 명상 센터 단기출가기

이슬람에서 불교학으로

미얀마라는 미지의 나라와 인연을 맺게 되어 이렇게 미얀마 불교 체험기까지 쓰게 될 줄은, 그리고 논문1)으로까지 관심이 넓혀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줄곧 한국에서 자란 나에게 불교는 익숙한 문화체계로 나의 생활에 스며들어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불교에 대해 공부를 한 적도 없었고, 절과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니었다.

석사 논문으로 수피즘(Sufism:이슬람 신비주의)에 대해 쓴 나는 박사 과정에 입학해서야 비로소 불교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 관심 주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 내적인 수행의 경향이 강한 수피즘이 나의 호기심을 끌었듯, 지금 역시 불교 수행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단기출가후 미얀마 재가 여신도(오른쪽)와 함께. 여신도가 입고 있는 복장은 여신도들이 수행할때 입는 틸라신복이다.
이슬람이 인도나 중국으로 전파될 때 정통 신학(순니파)보다는 수피즘이 그 관용적인 성향으로 인해 현지인들에게 더욱 환영을 받고, 이슬람 선교의 전도사 역할을 하였는데, 이 와중에 수피즘 역시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양자가 내세우는 교리나 사상(세계관, 우주관)은 다를지라도 궁극적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상에 드러나는 인간의 내적인 체험이나 수행의 방법은 서로 유사하거나 또는 서로 유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상호간의 교류가 용이하였던 것 같다. 이 주제는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라 생각된다.

미얀마에 옷깃을 스치게 된 경위

95년 박사과정에 입학한 나는 두 달 정도 학교를 다니다 결국 휴학을 하고 정처없는 여행(방황?)을 떠나게 되었다. 학문과 수행을 현실 속에서 병행하고 싶었던 나는 그 당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나 자신의 문제가 더 컸음을 지금은 인정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외부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던 터라, 환경을 바꿔서라도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현 상황이 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변화의 주체가 나임을 자각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여행 일정에 처음부터 미얀마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얀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떠남 자체가 어떤 계획하에 진행되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미얀마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삶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보다 근원적으로는 이 세상에 툭 던져진 것만 같은 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자서 진통을 앓고 있을 때였다.

여행중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으로부터 미얀마의 명상 프로그램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떻게 미얀마로 들어갈 수 있으며, 어디를 찾아가야 하는지에 관해 정신없이 들었다. 무슨 계시라도 받은 듯 조금은 흥분하며 인도로 향하려던 계획을 바꿔 미얀마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한국인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존하여 양곤으로 향하였다. 일러준 대로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찬매 예이타 명상센터(Chanmyay Yeiktha Meditation center)2)로 갔다. 미얀마 상황에 대해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무조건 기사 아저씨에게 맡겨 놓는 수밖에 없었다.

운좋게도 무사히 센터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는 이미 몇 분의 한국인 수행자들이 있었다. 도착한 그때가 마침 우안거(雨安居:waso, 미얀마력 3월, 양력 6∼7월) 기간이라 센터의 원장격인 우 자나카비왐사3) 사야도(U Janakabhivamsa Sayadaw)4)께서 센터에 상주하고 계셨다. 우안거(雨安居)가 아닌 때는 주로 외국으로 설법 여행(Dhamma tour)를 떠나신다고 하였다. 센터에 도착한 지 몇 일이 지나자 한국에서 몇 사람이 더 우안거(雨安居)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우안거의 첫째날에는 정성스레 공양물을 준비한 많은 사람들이 센터로 모여들고 아침부터 성대한 행사가 펼쳐진다. 그리고 우안거가 끝나는 날에는 신에게 올리는 등불로 온 마을을 밝히는데 이것은 붓다가 천상에 다시 태어나 그의 어머니에게 아비달마를 설하고 지상에 강림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파고다나 불상 앞에 등불이 켜지고 가정집에서도 불단에 양촛불에서부터 비싼 종류의 등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불을 밝히며,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고 관공서 건물을 화려한 등불로 장식하기도 한다. 특히 이 축제를 전후해서 부모님이나 주위의 연장자, 그리고 스승에게 과일이나 케이크, 롱지(longyi)5) 등을 선물하며 경배한다.]

미얀마 인의 불교 체험, 신퓨(shinpyu)

미얀마 풍습에 따르면 남자 아이들은 9∼13세에 신퓨(Shinpyu) 의식을 치르게 된다. 신퓨는 며칠 또는 몇 주간 사원에서 수련을 쌓으며 승려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아이는 왕자처럼 비단옷을 입고 포좌(砲座)에 실려 사원으로 간다.

탁발나온 미얀마 동자승들
머리를 깎고 나면 머리카락은 흰보자기에 싸서 인근 파고다 아래에 묻는다. 고승이 건네는 바리를 받는 것으로 의식은 끝이 나고 아이는 승려생활에 들어간다. 여자 아이들은 이 시기에 귀를 뚫는 ‘나트윈(Nathwin)’을 치르고 아이의 단계를 벗어나게 된다.

신퓨 의식을 치른 이후에도 미얀마인들은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반복함으로써 불자로서의 자세와 예절을 익힌다.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승려가 되어 살기도 한다.

이 의식을 거치고 승원 생활을 한 후에야 비로소 독립된 젊은이로 인정되어 결혼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하는 것에서 신퓨 의식이 원래 성년식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미얀마 불교도의 대다수가 승려가 되어 승원에서 일정 기간 생활을 하는데 이는 신퓨라는 일종의 성인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 행사의 정점에 가서 두발 같은 온갖 장식품이 벗겨지고 가사가 입혀진다.

붓다가 한 것처럼 모든 세속적 욕망과 쾌락적 삶을 포기하고 열반의 경지를 구득(求得)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모가 기증한 8가지 승원생활의 필수품――하의 가사(thinbain)·상의 가사(eikathi)·망토 가사(dugou)·탁발 그릇(dhabei)·면도칼(thindounda)·바느질 도구(a)·허리끈(gabangjou)·물여과기(jeisi)――을 받아 가지고 승원에 들어간다. 승원에서 수련승으로서 10계를 준수할 것을 서약하면 모든 식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승원에 머무는 동안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승려로서 탁발 구걸의 생활을 해야 한다.

미얀마의 남성들은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승원 생활을 하기를 희망하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실행하고 있다. 이 시기에 불교의 교리나 세계관을 배우는 것 이상으로 계율에 따라 불교도로서의 행동 양식을 몸에 익힌다. 이것은 환속 후의 생활에 있어서도 그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배경이 된다.

단기출가 감행

처음 며칠은 다른 미얀마 여자 수행자들처럼 밤색 롱지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어깨에는 밤색의 스카프 모양의 천을 두르고 생활하였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단기 출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왕 할 것이면 제대로 형식도 갖추어 수행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가사(袈裟)나 수녀(정녀)복을 입고 지나가는 성직자들을 보면 웬지 모르게 한참을 쳐다보곤 하던 그 미분화된 감정의 덩어리, 항상 마음 한편에 있던 출가에 대한 동경 또는 미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단기 출가를 감행하게 하였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너무나 해보고 싶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기조차 하였다. 무의식 속에 항상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가 해소되어지는 느낌조차 들었다. 먼저 미얀마 여자 출가승6)들이 입는 분홍색 비구니 옷을 마련하기 위해 미얀마 시장에 나가 옷감을 끊고, 센터 안에서 신을 하얀색 슬리퍼, 그리고 간단한 생활 필수품 등을 사서 센터로 돌아왔다.

남자(현지인이든 외국인이든)가 출가 할 때는 후원자가 정해져 그 사람이 수행하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준다. 이때 잠시 느낀 나의 단상은 수행의 세계에서조차 여성은 늘 소외되고 있는 존재이구나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고, 그 순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림이 수행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항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미얀마 여자 출가승인 틸라신 투담마사리와 미얀마에서 이미 몇 년의 수행 경력이 있는 한국 여자 출가승의 도움으로, 다른 한 명의 한국인 여자 수행자와 함께 우 자나카비왐사 사야도(U Janakabhivamsa Sayadaw)로부터 수계를 받아 출가하게 되었다.

몇 년 간 길렀던 긴 머리를 자르고 삭발한 머리를 감으려던 순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물컹하게 감촉되는 두피의 느낌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난생 처음 삭발한 민둥 머리를 느껴 보았던 것이다.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고등 학교 때부터 시작된 나의 긴 편력, 이렇게 먼 이국에까지 와서 삭발하며 내가 찾으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내몰고 있는 것일까?

순화되지 않은 채 날뛰는 그 원초적 에너지. 이렇게 떠돌 수밖에 없는 알 수 없는 답답함, 풀리지 않는 내적 갈증, 나를 옭아매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무서운 그 무엇. 미얀마에서 3개월간의 위파사나 명상은 나를 깊이 만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고, 혼돈스러웠던 많은 것이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명상 중에 있었던 구체적 체험이나 느낌은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기억의 단편인 노트조차 나의 수중을 떠난 지 오래이다. 또한 명상 기간 중에는 일체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어차피 지금의 나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생생한 체험을 전하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기만 하다.

우안거 중 에피소드들

우안거 결제 후 한 열흘 정도 지나 센터에 큰 행사가 있었다. 우 자나타 사야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재가 신도들이 푸짐한 선물을 마련한 것이다. 이 보시품들을 2층 법당에 진열해 놓고 제비 뽑기를 하여 비구 스님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대부분 가사나 양산, 생활 용품 등이었지만 그 중에는 꽤 비싼 물건이나 전기 제품도 있었다. 근처의 다른 절 스님들도 아침 일찍 찬매 예이타로 오셨다. 아침 공양을 드신 후 이 행사가 치루어졌는데, 센터 내 모든 사람들이 모여 스님들이 어떤 물건을 뽑는지 지켜보며 즐거워하였다. 늘 정적과 고요함 속에 쌓여 있던 센터가 한바탕 잔치 분위기로 바뀌었다. 다소 긴장되고 힘겨운 수행 기간 중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삭발과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진땀나는 일이었다. 처음 삭발한 후 일주일에 한 번씩 틸라신 투담마사리의 도움으로 삭발을 하곤 하였다. 계속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하여 하루는 마음을 먹고 점심 공양 후 방에서 혼자 삭발을 시도하였다. 조금은 떨리고 할 수 있을까 두려움조차 들었다. 어설픈 손놀림, 면도기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쩔쩔매다 겨우 방향감을 잡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삭발해 나갔다. 머리를 반 정도는 밀었는데, 반 남은 머리가 멀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이대로 나갈 수도 없고, 어슬프게 반만 삭발한 머리를 상상해 보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양인지. 그렇게 긴장되고 지루한 시간이 흘러 거의 마무리 될 무렵 ‘휴’ 이제 끝났다고 안심을 하려던 순간, ‘앗’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머리를 살짝 베이고 말았다. 이렇게 애숭이 중이 제 머리 깎으며 피를 보게 된 것이다. 이후 다른 스님들의 머리에 난 영광의 상처들이 새삼 눈에 띄여 피식 웃곤 하였다.

며칠 후 여행 비자를 명상 비자로 만드는 데 필요한 사진을 찍기 위해 미얀마 스님의 안내로 다른 외국 수행자들과 함께 센터 근처에 있는 사진관으로 갔다.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간 그곳은 우리 나라 60∼70년대 이발관 같은 음산한 분위기에 사진기 한 대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일단 안거에 들어가면 외부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특별히 사야도의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으러 잠시 나갈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제서야 겨우 미얀마 거리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랑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였다. 질퍽한 도로를 걸으며 센터로 돌아오는 길에 스치듯 외로움의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장면을 회상하는 지금까지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리고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 걱정을 잠시 하였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온 50대 정도의 여자 수행자와 방을 같이 사용하였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센터에 와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백발에 아주 맑은 분위기였다. 네달란드에 있는 수행 센터에서 이미 위파사나 명상을 수행한 경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기간에 단기 출가를 하였는데, 수행 기간 동안 나의 좋은 도반이 되었다.

그 당시 센터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외국인 수행자들이 있었다. 호주·캐나다·미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네덜란드·베트남 등에서 온 사람들과 미얀마 남녀 재가 신도들이 참으로 열심히 수행에 정진 하였다. 그때 일상생활 속에서도 실천 가능한 위파사나 수행이 한국의 일반 대중들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으로 활용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였는데, 현재 많이 대중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좌선(Sitting Meditation)·경행(Walking Meditation)·일상 생활 관찰하기(Daily Life Meditation)가 주된 명상법으로, 그 중에서 일상 생활 관찰하기는 바쁜 사회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아주 유용한 수행 방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관(觀)할 수는 없겠지만,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삶과 수행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위파사나 수행법이 한국에 점진적으로 소개되어 수행법에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 주고 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대승불교인 선불교의 수행법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현 시점에서 남방 불교의 수행법을 접할 수 있는 장들이 마련된 것은,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된다.

수행의 나날들

하루 일과는 아침 3시 30분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4시에서 6시에 사이에 경행 및 좌선, 6시부터 7시 사이에 아침 공양을 하는데, 간단한 죽 종류가 마련된다. 7시부터 10시 30분까지 경행 및 좌선 수행을 각자 법당에서 행한다. 10시 30분부터 12사이 점심 공양을 한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상이 구분되어 마련되는데, 아주 풍성한 상차림이었다.

이후는 오후불식(午後不食)으로 간단한 음료 이외에 일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12시부터 5시까지 경행 및 좌선을 하고, 5시부터 6시 30분까지 법문 및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있다. 6시 30분부터 10시까지 경행 및 좌선을 하고, 10시 이후에는 자율 정진을 하게 된다. 점심 식사 후 외국인들이 각자 법당에서 좌선이나 경행 수행을 하는 동안, 미얀마 현지인들은 1층 법당에서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는다. 이때 법당에서 들려오는 팔리 어 삼귀의 독송 소리와 대중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수행의 분위기는 장엄하고도 엄숙하였다.

파고다에 미얀마 정장차림을 하고 참배나온 남자 재가 신도들.
나모 탓사 바가바토 아라하토 삼마삼붓닷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ambuddhassa:존귀한 분, 공양받을 만한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우안거 동안 외국인들은 일주일 두 번 사야도로부터 인터뷰를 받는다. 자신이 수행하면서 느꼈던 바를 점검받거나, 의심나는 것을 자유롭게 물을 수 있다. 아침 8시 외국인 비구의 인터뷰가 있고, 오후 6시에 외국인 여자 수행자(nun)의 인터뷰가 있다.

미얀마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갖는 존경심은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큰스님을 뵈면 바깥일지라도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미얀마 재가 신도들도 스님들께 정해진 시간에 인터뷰를 받는데, 그 진지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엄숙해 보였다. 부처님 당시 녹야원이나 죽림정사 등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어울려 있는 풍경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점심 공양 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물론 이 시간조차도 끊임없이 관하여야 하는데 시종일관 잘 관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주로 2층 법당에 가서 수행하였다. 1층 법당에서 미얀마인들을 위한 법문이 있을 때는, 외국인 여자 수행자들도 남자 수행자들이 주로 수행하는 2층으로 올라가 명상할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갈 때도 발걸음의 듬(lifting)과 밈(pushing) 그리고 내림(dropping)을 관하면서 천천히 장소를 이동하여야 한다. 2층 법당은 큰 홀로 되어 있어 경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법당 옆으로 난 발코니에서도 슬로우 모션으로 느릿 느릿 경행하는 수행자가 한두 명 있었다.

그 한가롭고 정적인 분위기, 물론 내면에서는 큰 전쟁이 치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때는 우기(雨期)라 2층 법당에 올라가 좌선을 얼마쯤 하다 보면 거의 같은 시간, 거의 같은 자세로, 거의 같은 부위에 통증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장대비가 쏟아 붓는다.

그 청량한 느낌. 몸은 피곤하고, 다리는 아파 자세는 바꾸고 싶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 힘들어 할 때 구세주라도 되는 양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는 나를 각성시켜 주는 신호탄 같았다. 미얀마 명상센터에서 위파사나 명상을 하며 흘린 눈물이 아마도 한 양동이는 될 것 같다.

좌선을 하다보면 슬픔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회나 비탄의 감정이 이는 것도 아닌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뚝뚝 떨어지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위파사나 명상을 하면서 고질적인 습관 하나를 지켜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폭죽 터지듯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생각의 관성 작용 때문에, 이러다 정신 분열증에 걸리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던 그 습의 뿌리를 발견하여, 뚜렷이 관(觀)함으로써 긴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다시 이 질병이 도지려 함을 본다. 지켜보는 수밖에…….

앙곤 시내 불교 유적지

수행 중에는 묵언이 원칙인데, 센터 내에서 미얀마 현지인들과 몇 마디 주고 받던 중 알게 된 한 미얀마 아주머니께서 나의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 일견 당혹스러워 주저하고 있는데 그분이 나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튼 이렇게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여자 수행자(nun)에게는 후원자가 없다.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분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절에 오실 때면 언제나 비누나 기타 생활 필수품 한두 가지를 챙겨 주시던 그분의 따뜻한 마음과 딸의 해맑은 모습은 지금도 나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내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거하시던 한 아주머니 역시 새삼 기억에 떠오른다. 슬그머니 바나나 한 다발을 웃으며 건네주시고는 쑥스러운 듯 돌아가신던 그 뒷모습. 센터에서의 3개월은 나에게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던 내가 절의 규율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안거 동안의 수행은 많은 것을 투명하게 해주었고, 그후 미얀마를 떠나 17개월 정도 계속된 배낭 여행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3개월의 안거가 끝나고 환계하기 직전 나의 후원자였던 분이 자기 집에 초대해 주셨다. 처음으로 명상 센터 밖의 불교 문화를 접한 날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의사로 그 당시 다른 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라고 하였던 것 같다.

생활이 풍족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얀마 중산층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가구도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우리 나라 뒤주 같은 나무 궤짝에 옷들을 넣어 두었다. 집에는 고승들의 사진이 많이 놓여 있었다. 어떤 스님은 신통한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다고 하였다. 아마 미얀마 인들도 스님들의 신통력이나 이적에 대해 꽤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친정 어머니, 그들 모녀와 함께 인도의 오토 릭샤 같은 자동차를 타고 쉐다곤 파고다로 갔다. 미얀마를 흔히 탑의 나라라고 하는데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가 그 중 가장 유명하다.

미얀마의 상징으로 높이 99m의 황금 첨탑의 위용을 갖춘 화려한 쉐다곤 파고다는 양곤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데, 2,500년 전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상인 형제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머리카락을 받아 이곳에 모신 것이라고 한다.

이 탑에 사용된 금만도 60톤에 달하며, 수많은 다이아몬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파고다로 올라가는 길도 어마어마하고 파고다 자체의 화려함과 웅대함에 그저 놀라기만 하였다. 무엇보다 파고다 이곳 저곳에 자리잡고 앉아 명상이나 기도에 전념하거나, 향이나 초를 피우고 참배하는 미얀마 인들의 모습에서 이곳은 불교가 바로 이들의 삶이며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고다 입구에 늘어선 가게에서 미얀마 염주를 몇 개 샀다. 3개월 간의 안거를 무사히 마치고, 미얀마 승복을 입은 채, 미얀마 인들 속에서 쉐다곤 파고다를 참배하는 기분이 묘하였다. 낯설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다. 인종이나 국적을 초월하여 불교 아니, 인간의 원초적 종교 심성이 우리를 하나로 이어준 것 같다.

미얀마의 불교유적지

안거가 끝나고, 한국인 몇 분과 함께 미얀마 현지인의 안내로 양곤 시내에 있는 박물관, 기념품상, 술레 파고다 등을 돌아 보았다. 술레 파고다(Sule Pagoda) 역시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파고다들과 마찬가지로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되었다고 한다. 현재 주위는 상가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안에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잠시 참배하고 나왔다. 우자나카 스님의 배려로 외국인 수행자들은 양곤 근처의 불교 유적지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나는 이미 환계(還戒)를 한 뒤라 분홍색 수행자(Nun) 옷을 벗고 일반 재가 여신도들이 입는 밤색 롱지로 갈아 입었다. 양곤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고는 남부 미얀마의 수도이자 거대한 도시로 몬 왕조 시대인 573년에 건설되었다. 칼야니시마(Kalyani Sima) 근처에 위치한 셰터랴융(Shwethalyaung)의 불상은 길이가 55m, 높이 16m나 되는 거대한 와불(臥佛)이다.

바고에 위치한 셰터랴웅의 와불(臥佛)
994년에 조성되어 여러 번의 수난과 이에 따른 보수 과정을 겪었으며, 125년 동안 가려져 있다가 1881년 영국인들이 양곤-바고 간 철도 건설 사업을 하는 도중에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바고로 불교 유적지를 보러 가던 중 길가에 여러 신들을 모셔 놓은 사당 같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 민간 신앙인 ‘낫(nat)’을 섬기는 곳인 것 같다.

현지인의 점심 공양이 있어 우리 일행은 그 집으로 향하였다. 길가에 늘어선 목재 건물들은 아주 낡아 있었고, 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하수 오물은 그대로 하천과 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이 물을 그대로 식수로 사용하여 말라리아·설사·이질·결핵·간염이 만연하다고 한다. 농촌 지역의 가옥은 주로 대나무집으로 바닥, 벽, 지붕 할 것 없이 모두 대나무가 주재료이다.

대나무 집은 대체로 두 칸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하나는 부엌이나 저장 창고로 쓰이고, 나머지 다른 공간은 침실과 거실로 사용하고 있다. 집안에 변변한 가구가 없는 것이 특징일 정도로 미얀마 인들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으로 미얀마 스님들이 신도 집에서 공양받는 모습을 보았는데, 먼저 발을 씻을 물을 마련해 주었다.

파간의 파고다들.
그리고 나서 가족들이 스님들께 예를 올린 후 공양을 올렸다. 우리 일행도 정성껏 마련해 주신 음식물을 대접받고 다시 유적지 여행에 올랐다. 바고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차이 푼(Kyaik Pun)은 신소푸 여왕에 의해 왕으로 지명된 담마제디 왕이 1476년에 건립한 것이다. 사각의 거대한 돌 기둥에 사방으로 불상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데 높이가 30m나 되었다. 서쪽 방향에 있는 불상은 1930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파손되어 있었다. 하루 일정의 여정을 마치고 센터로 돌아왔다.

며칠 센터에 머물면서 인도 비자도 발급받고, 파간과 만달레이 여행 계획을 세웠다. 미얀마에서 외국인이 개별적으로 여행을 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과 애로 상황이 있었다. 우선 정부가 지정한 숙박 시설에 머물러야 하며, 또한 그 비용을 태환권이나 달러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기차 비용은 현지인의 몇 배가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버스로 여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양곤 교외의 허름한 버스 터미널에서 겨우 표를 구해 파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확하게 몇 시간 걸렸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거의 하루가 걸려서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다. 광활한 미얀마 대륙을 터덜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달렸다. 때때로 물소들이 늪 속에서 허느적 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중간 휴게소 같은 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저녁 무렵 파간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당혹스러웠던 일은 잠시 휴식 및 볼일을 볼 수 있게 버스가 서자, 미얀마 사람들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제히 버스 주변에서 일을 보는 것이었다. 모두 롱지를 입고 있으니 그대로 앉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다. 바지를 입고 있던 나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인도에서나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는데 미얀마의 화장실 문화도 역시 아주 간편하였다.

아주 늦은 시간에 파간에 도착하여 어렵게 지정된 숙소를 찾아 방을 구하였다. 다음 날 자전거를 빌려 타고 파간의 파고다 순례에 나섰다. 수많은 탑의 숲, 그 속에 조각된 어마어마한 불상들, 그리고 파고다 위에 올라가 내려다 본 파간의 전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파고다 사이의 넓게 뚫힌 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바라본 파간의 저녁 노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를 가슴에 안겨주었다.

지금도 때때로 그 하늘, 그 노을을 상상하며 마음 속 여행을 떠난다.

만달레이에서의 추억들

파간에서 만달레이로 향하였다. 만달레이는 좀더 상업 도시의 냄새가 풍기며 번화해 보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주인이 근처에 축제가 있다고 알려주어 그곳으로 가보았다.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통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설 무대 위에서 아마츄어 가수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사원 주변으로는 여러 가지 불교 용품과 불교 의례에 필요한 울긋 불긋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큰 모조 지폐로 부채 모양을 만들어 진열하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만달레이 시장에서 이것 저것 장 구경을 하다가 양곤의 명상 센터에서 나의 머리를 삭발해 주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던 틸라신 투담마사리를 우연히 만났다. 양곤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만달레이 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니 너무나 반가웠다. 그녀는 만달레이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중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고 있던 투담마사리는 나에게 그녀의 친척집에 함께 가자고 하였다. 친척집은 상업을 하시는 집 같았는데 미얀마에서는 꽤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식사 대접을 융숭히 받았다. 온 식구들이 신기한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투담마사리(앞줄 왼쪽)와 그의 친척집에서.
그리고 안주인 되는 분이 자신의 딸이 입던 미얀마 전통 의상을 내어 주며 입어 보라고 권하셨다. 여자 가족들이 아주 신나 하면서 옷 입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리고는 멋지게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까지 잡아주는 것이었다. 이방인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어준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분들의 마음에 항상 평화와 안정이 깃들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투담마사리와 남자 친척분이 마하무니 파고다로 안내해 주셨다.

만달레이 공항에서 북서쪽으로 1.5km 지점에 마하무니 파고다가 있었다. 이곳은 원래 1784년에 보도파야 왕에 의해 설립되어 왕국에서 이곳의 동쪽 문 입구까지 벽돌로 포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4년 화재로 파괴되고, 현재의 파고다는 비교적 최근에 완성된 것이다. 이 파고다는 라카잉(방글라데시와의 접경지역)에 있는 묘하웅(Myahaung)에서 만달레이로 가져온 마하무니(Maha?uni:Great Sage)상(像)으로 특히 유명한데, 마하무니 파고다는 이 오래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11세기 파간 왕조의 아노라타 왕도 이를 파간에 가져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보도파야 왕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라카잉에 들어가 옮겨 온 것이라 한다. 3.8m 높이의 이 불상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나, 오랜 시간에 걸쳐 무수한 불교 신자들에 의해 지금은 15cm 두께 이상의 금으로 완전히 씌워져 있다. 그러나 여성은 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금을 기증하고 싶으면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매일 아침마다 불상의 얼굴이 의례적으로 씻겨지며, 매년 2월 초에는 이곳에서 마하무니 파고다 축제가 열려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든다고 한다.

만달레이 마하무니 파고다내의 마하무니 불상앞에서.
다음날 자전거를 빌려 타고 만달레이 언덕으로 향하였다. 미얀마의 건조 지대에 자리잡은 만달레이는 1856년 민돈 왕이 건설한 도시로 1860∼85년 콩바웅 왕조의 최후 도시가 되었다. 영국이 미얀마를 점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수도였으므로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만달레이 시(市)의 북동쪽에 높이 236m의 만달레이 언덕과 기슭에 위치한 쉐 난도(Shwe Nandaw)승원, 쿠토도 파고다(Kuthodaw Pagoda), 마하무니 파고다 등에서 콩바웅 왕조 예술의 순수성을 볼 수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영국의 용병인 구루카 인과 일본 저항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만달레이 언덕에는 곳곳에 불교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곳의 불교 유적들은 주로 은둔 승려였던 우 칸티(U Khanti)에 의해 조성된 것들이라 한다. 이곳 정상에 오르면 만달레이 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정상 부근에 거대한 불상(Shweyattaw)이 왕궁을 향해 선채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붓다가 제자 아난다와 같이 이곳에 왔을 때 지금의 왕궁을 가리키며 지금으로부터 2,400년이 되는 해에 이곳에 위대한 도시가 건설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민돈 왕이 1857년에 아마라푸라(Amarapura)에서 만달레이로 수도를 옮기고 바로 그곳에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며칠 간의 파간과 만달레이 여행을 마치고 양곤으로 돌아온 후, 미얀마를 떠나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우연한 기회에 미얀마에 100여 일 머무르면서 깊이 있는 위파사나 수행은 하지 못하였으나, 미얀마 불교의 살아 있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스케치하듯 맛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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