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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윤리의 응용 가능성 모색
허남결 동국대 강사
[3호] 2000년 06월 10일 (토) 허남결 동국대 강사
- D. 키온의 응용규범윤리학적 접근을 중심으로

1. 문제의 제기

어떤 철학체계나 종교사상을 막론하고 인간을 둘러싼 현실세계에 대한 구체적 입장표명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실로 무의미한 ‘말 모음집’에 지나지 않게 된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처럼 말해야 할 것이 산적해 있는 이때에 현학적이고 고답적인 뉘앙스로도 들릴 수 있는 “네 마음 자리 운운……”만 하고 있다면, 이는 차라리 한 위대한 사상의 직무유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윤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음 공부는 어디까지나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한 동기유발의 방편 내지는 수단의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 자체가 결코 도덕적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불교의 대내외적 평판과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일반 불자들이 이런 인식을 공유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더 커진다. 그런 점에서 불교윤리학자인 D. 키온의 다음과 같은 반문들은 오늘을 사는 불교인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실천적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는 오늘날 생명윤리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들에 기여할 만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불교적 관점’은 있는가?

나아가 불교는 그와 같은 관점이 단지 ‘개인적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1) 그 동안 인공유산, 뇌사와 장기이식, 태아실험 그리고 안락사와 같은 응용윤리학의 쟁점들은 전적으로 서양의 철학과 종교의 시각에서 다루어져 왔을 뿐, 이 과정에서 불교 고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불교는――자비롭고 인도주의적인 가치들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관심과 광범위한 존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지금까지 그것의 윤리적 원리가 오늘날의 도덕적 딜레마 속에서 어떻게 일관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고대 및 현대의 원전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 키온의 《불교와 생명윤리학(Buddhism & Bioethics)》(1995)은 현대의학이 제기한 주요한 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불교적 대응의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생명의 시작과 끝을 수태 순간으로부터 현세의 업을 다한 자연사(심장사)까지로 잡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열거된 생명윤리학적 쟁점들에 관한 불교의 입장은 언제나 단호한 거부로 나타나야 한다고 본다. 최근 들어 생명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들은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종교인 불교가 이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하고 있는지는 실로 의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생의학(biomedicine) 전반에 걸친 윤리적 상황들에 응용 가능한 일련의 불교적 원리를 정식화하려고 애쓴다.

그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선(목적 가치)으로 ‘생명(life)’, ‘지식(knowledge)’, ‘우정(friendship)’을 제안하고 그 선의 적용과 실현 여부를 각종 의료 행위의 선악 판단기준으로 삼는다. 이런 접근 방법은 서양윤리학적 용어로 말하면 이른바 응용규범윤리학(applied normative ethics)의 영역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규범윤리학의 원리를 현실의 문제상황에 적용하여 행위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입장이다.

21세기를 맞고 있는 지금 불교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는 생의윤리학의 여러 경우들에 관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관점을 개발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문명사회의 요청일 뿐만 아니라 불살생을 모든 계율의 으뜸으로 삼고 있는 불교윤리의 근본적 취지와도 전적으로 부합하는 일이다.

2. 불교와 서양윤리학의 접점

1) 불교와 의학의 관계

소니(R. L. Soni)는 “의학이라는 신성한 직업과 불교로 알려진 사상체계는 사실상 둘 다 그 나름대로 고통의 완화와 조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고통의 제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2)라고 쓴 바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의료 윤리학 사전(Dictionary of Medical Ethics)》은 ‘불교’ 항목에서 “불교와 의료행위를 지배하는 원리들은 상당 부분 공통적이다.”3)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런 추론의 근거를 사성제(四聖諦), 특히 고성제(苦聖諦)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고성제는 육체를 가진 모든 형태의 존재는 그들에게 내재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때문에 항상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괴로움(dukkha)’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일차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그 안에서 태어남과 죽음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존재 양식 그 자체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불만족스러움을 나타낸다. 업과 윤회의 교의에 비추어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성제에서 말하는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수반한 채 되풀이되는 태어남과 죽음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질병과는 별도로 언제나 사고의 위험도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의료기술이 지금보다 더욱 발달하여 현재의 평균 수명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병고나 죽음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성제에서 언급하고 있는 심리적 고통까지 염두에 둔다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고성제의 진리는 더 이상 상세하게 논의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자명하며,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광범위한 목록은 의사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삶의 근원적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불교 교단(승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광범위하게 지속되고 있는 일종의 사회복지제도라고 할만하다. 왜냐하면 승가는 2천 년 이상――그것의 다른 활동들의 와중에서도――병든 자의 치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나기 수세기 전부터 불교의 승려들은 이미 수많은 의학적 조건들에 대한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었다. 최근 지스크(Kenneth Zysk)는 B.C. 800년과 100년 사이에 인도 의학에서 일어난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전의 주술적 종교적인 치료기술로부터 “질병과 그 치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적 합리적 접근방법”4)으로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불교 승려들이다.

그에 따르면 초기의 인도 불교 사원들은 인도 의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활동들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 수도원 및 수녀원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비구들과 비구니 공동체는 의학의 제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율장 내에 의료행위를 성문화한 것은 아마도 인도의 의학 지식을 최초로 체계화한 것이자 또한 훗날 의료 행위를 다루는 교재의 모델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승려 치료사들(monk-healer)이 의학적인 치료를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대하고 또한 전문화된 교단 조직체들이 호스피스나 병원에서 봉사하는 모습은 교단에 대한 재가신자들의 계속적인 지원을 보장해 주었다. 나아가 의학을 교단의 주요 대학들의 교과과정에 편입시킨 것은 그것을 하나의 학과목으로 만들게 했다.

인도와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불교는 그 전 역사를 통해 치료기술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치료사들을 매우 존경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의학과 종교가 가장 잘 조화를 이룬 한 예를 보여주었다.5) 이와 같은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특히 초기에는――승려들이 의학에 전문직업인적인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들이 있었다.

비른바움(Birnbaum)은 이러한 제한들은 “재가신자들을 습관적으로 치료하는 것에 대한 경고(특히 보시를 받기 위한)”이자 “초기 불교의 관습인 정신적 수행에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직업적인 의사가 되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경고”6)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옳은 지적이다. 의학은 세속적인 기술로 여겨졌고 따라서 승려들은 그보다 더 우선권을 갖는 일(수행)에 종사해야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교단 내에서 승려들의 의료기술은 엄격한 교단생활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건강한 육체를 확보하는 수단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불교의학의 최초 수혜자들은 승려들 자신이었다. 붓다는 다른 모든 세속적 관계를 끊고 출가한 그들이 서로 돌보는 것은 도덕적 의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비른바움은 불교 승려들이 의학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를 세 가지로 잘 요약하고 있다.

“……승려는 자신의 동료 승려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재가신자들에게 자비행을 베풀기 위해 치료기술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불교의 가르침을 확산시키기 위한 신뢰를 얻는 데 편리한 한 수단으로 치료기술을 배웠을 것이다.”7) 당시보다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상황은 다소 달라졌을지 모르나 일어나고 있는 도덕적 쟁점들은――분석을 해보면――근본적으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의 윤리적 과제는 경전에 나오는 도덕적 판단의 이면에 있는 원리를 좀더 분명하게 다듬고, 나아가 이를 새로운 환경에서 충실하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2) 불교와 서양윤리학

불교는 매우 광범위한 대상들에 적용되는 도덕가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는 별도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근본경전과 주석서들은 그것에 의해 불교 윤리학이 이해되는 이론적 틀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을 결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떠한 경전적 패러다임도 갖고 있지 않은 새로운 문제들의 해결을 추구할 때, 또는 두 가지 이상의 가치가 갈등하는 양상을 띠게 될 경우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동양적 가치인 불교와 현대 문명을 주도하고 있는 서양의 만남이 빈번해질수록 점점 더 부각될 것이다. 불교에 귀의한 많은 서구인들은 그들의 경험이 두 단계로 구분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첫 단계에서 그들은 불교가 그들의 정신적 욕구를――서양 종교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권위적인 태도와는 대조적으로――직접적이고 신선하며 실천적인 방법으로 언급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번째 단계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들이 배운 가르침들을 자신들의 생활에서 부딪히는 실천적 문제들에 적용시키려고 할 때 일어난다. 여기서 그들은 불교가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적지 않게 실망하게 된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전통 불교에서는 익숙하지 않았던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교를 배우는 주요한 중심지 중의 하나인 티베트가 어느 모로 보나 반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최근까지도 중세 봉건국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냉정하게 말해 불교는――서양인들의 눈으로 보면――제3세계의 현상이자 수백 년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전근대적인 사상에 불과하다. 어쨌든 불교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의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으려면 현대사회의 논제에 올라 있는 수많은 쟁점들과 직접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양의 불교는 점차 서양의 불교인들로부터 많은 문제들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라는 압력을 받게 될 것이 확실하다.

이에 불교는 기존의 교과과정에 윤리학이라는 새로운 과목을 추가하는 것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불교는 이미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가르침들을 통해 서구 문명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그 보답으로 서양은 철학적 윤리학의 전문지식을 빌려줌으로써 불교윤리학의 발전에 기여해야 하리라고 본다. 말하자면 “윤리적 측면들을 강조하는 불교연구는 21세기의 불교인들이 직면할 시대적 과제가 될 것이다.”8)

3) 불교윤리의 실천 근거

우리가 불교 윤리학을 논의하려고 할 때 제기되는 첫번째 질문은 ‘불교적 관점’으로 여겨지는 것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불교는 많은 분파를 지닌 고대의 한 전통이며 나아가 그것이 접촉하게 된 수많은 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또한 영향을 받은 하나의 전통이기도 하다. 오늘날 만나는 불교의 세 가지 주요 형태는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고 있는 불교학파인 상좌부 불교, 티베트 불교 그리고 정토신앙과 선(禪) 및 다른 종파들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불교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어떤 중심적 권위가 없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무조건 “쟁점 x에 관한 불교적 관점은 …이다.”9)와 같은 종류의 권위 있는 진술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물론 그 언급 대상이 정통이냐, 가톨릭이냐, 개신교 또는 다른 교파인가를 명시하지 않은 채 기독교적 관점에 대해 일반적 진술을 하라는 것도 똑같이 그릇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학파들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논의의 목적상 ‘불교적 관점’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실제로 불교에서 윤리학(특히 교단의 윤리)을 교의보다 더 큰 응집력이라고 간주할 만한 이유들은 많이 있다. 윌리암스(Paul Williams)는 “불교에 존재하는 대승과 비대승을 조화시키는 요소는 승려와 그들의 계율 준수에 의해 제공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불교 내의 상당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도덕 규범에는 상대적 통일성과 안정성이 있다.”10)라고 결론 짓는다. 상좌부 불교와 티베트 불교 그리고 동북아 불교 학파의 대다수는 기본적인 행위규범에서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대안적 시각들도 없지 않지만 그와 같은 소수의 관점은 전체의 합의를 위협할 만큼 대표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불교적 관점’이 주요 불교학파들 사이의 공감과 합의를 나타내는 것이자 또한 경전에 기초한 것이기를 바란다. 이를 좀더 체계적으로 정식화하기 위해――즉, 어떤 관점이 정통이거나 또는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함축을 지닌 ‘불교적 관점’으로 기술되려면――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해야 한다고 본다.

① 경전 내에서의 그것의 권위 ② 경전이 아닌 문헌 또는 주석서들에서의 그것에 대한 확인 ③ 이와 같은 첫번째 두 집단의 원전들에서 모순적인 증거나 반증들의 부재 ④ 그 관점은 범불교적이라는 증거(대부분의 대승학파 및 비대승학파에 의해 주장되어야 한다.) ⑤ 그 관점은 폭넓은 문화적 토대에 걸쳐 주장된다는 증거 ⑥ 그 관점은 오랜 기간 동안 일관되게 주장되어 왔다는 증거 등이 곧 그것이다.11)

위에서 열거한 점들이 어떤 관점에 호의적이면 호의적일수록 그것을 불교적 원리들의 확실한 표현이라고 여길 근거는 그만큼 더 커진다. 이와 함께 경전의 해석 문제에 대한 불교적 입장은 우리의 관심상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논증의 기초를 경전에 두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화석을 캐려고 하는 도덕적 고고학자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전에는 결코 정식화될 수 없었던 의문들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으며, 나아가 경전으로부터 오늘날의 필요에 부응하는 적절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경전의 해석 문제가 대두된다.

두번째 점은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단순히 지식의 수동적 전달자로만 인식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의 목적과 필요, 그리고 목표들 자체가 우리가 사용하는 경전의 선택과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뜻한다. 경전을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쓸모 없는 것으로 거부하는 것은 원전에 대한 순진한 객관화(a naive objectivisation)에 빠지는 것이며 창조적인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우리는 불교윤리학을 그리피스(Paul Griffiths)가 “비교 문화적 철학하기(cross-cultural philosophizing)”라고 기술했던 계획에 포함시켜도 될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철학이란 초문화적 인간활동이며, 그것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동일한 전통 내에서 이루어지고 또한 모든 문화 내에서 동일한 규범에 의해 이루어진다.”12)는 명제의 진리를 전제하는 활동이다. 불교는 우리들에게 인간의 모든 영역에 걸친 일련의 보편적인 교의와 실천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불교가 그 자체로서 보면 언제나 어떤 특정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은 자신의 도덕적 가르침들을 보편적 원리의 표현(다르마)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4) 행위의 주체 문제:인간, 동물 그리고 인격체

생명윤리학의 많은 쟁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 주체의 본성 및 지위의 문제와 관계된다. 일부의 철학자들은 ‘인격’인 도덕 주체와 ‘인격이 아닌’ 다른 도덕 주체 간의 구별이 가능하며, ‘인격’만이 완전한 도덕적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인간 존재들은 완전한 도덕적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단언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거부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도덕적 관심의 영역을 동물로 확대하려고 하며 더 나아가 식물 생명에게까지 확장하려고 한다.

여기서 해결되어야 할 대부분의 문제들은 인간 존재와 관련되지만, 불교는 서양사상보다 훨씬 큰 도덕적 지평을 채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을 번갈아 가며(cross-species) 윤회한다는 믿음 때문에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불교윤리학의 독특한 성격이다. 불교는――인간은 그의 본성에 정신적(nama) 측면과 물질적(rupa) 측면 양자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전통적인 인도철학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 그러나 붓다는 이 분석을 통해 마침내 그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이 확인될 수 있는 다섯 가지 범주(五蘊) 또는 차원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생명은 ① 물리적 육체 유기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② 느끼고 ③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개인은 이와 같은 능력들을 사용함으로써 ④ 특정한 습관과 성향들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각각의 인격을 현재의 다른 개체들과 구별해 준다. 하지만 감정과 사고가 경험의 구조물을 규정짓는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⑤ 의식(vin??na)이다.13) 의식은――육체적 경험이든 지적 경험이든――모든 경험에 역동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vin??na는 눈과 귀, 신체, 코, 혀가 각각의 대상들과 접촉할 때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고 그리고 맛보는 형식으로 일어난다.

뇌의 신피질(neocortex) 구조는 의식이 반성적 자기인식, 기억 그리고 상상력과 같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지적 양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허용한다. 불교는 개체적 존재를 긴 궤도를 가진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이해한다. 이 궤도 안에서 개인의 삶은 상이한 시간대에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며 어떤 한 삶 내에서는 여러 단계를 거친 발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러한 단계들을 글자의 형태로 표시해 보면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여기서 A는 수태를 나타내고 Z는 죽음을 나타낸다. 그 사이에 있는 B는 태내에서의 삶을 나타내고 C는 어린시절을, P는 ‘인격성’의 조건들이 성취되는 시점을, 그리고 X는 이미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는 시간, 예컨대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에 빠진 경우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은 일련의 글자들, 즉 ABCPZ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정상적인 수명으로 나타낼 수 있게 된다. 이제 이 코드(code)는 우리가 가령, ‘윌리엄(William)’의 것이라고 여길 네 개의 인간 존재 시리즈를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의 첫번째 삶에서 윌리엄은 어릴 때 죽었으며(ABCZ), 두번째 삶에서 그는 정상적인 삶을 살았고(ABCPZ), 세번째 삶에서 그는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에 빠졌으며(ABCPXZ), 그리고 네번째 삶에서 그는 태내에서 죽었다(AZ). 위의 삶 중 두 경우에서의 글자 P는 윌리엄이 그의 인간 존재의 절반 부분에서만 ‘인격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머지 두 경우에서 그는 다른 어떤 존재, 예컨대, ‘비-인격체(non-person)’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윌리엄을 다른 시간대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다루게 된다. 즉, P가 코드 내에 나타날 때에 그의 권리는 존중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비-인격체로 다루어질 것이다.

이런 도덕적 판단에는 ‘인격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그것을 정의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위험성이 따른다. 불교가 ‘인격성’의 기준을 거부하려고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인격성’ 개념이 도덕적 우주를 좁히는 것을 포함하는 반면, 불교적 경향은 그 우주를 확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또 다른 도덕적 기준인 유정(sentiency)의 주된 매력은 이를 동물계에 적용할 때 상대적으로 덜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불교가 그것을 채택해야만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가? 고통을 느끼는 능력은 불교적 도덕세계의 경계선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가리키는 하나의 유용한 지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뭇 생명들이 도덕적 존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능력 때문이라는 결론이 곧바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유정은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말 그대로 그와 같은 능력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것은――고통스런 치통을 경험한 어떤 사람이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도 있으나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유정이 객관적인 도덕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정이 하나의 지표라기보다는 도덕적 원리로 기능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인격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낳는다.

예컨대, 도덕적 가치의 리트머스(litmus) 시험으로서의 유정의 선택은 인간 본성의 다섯 가지 범주들 중 두번째가 우선적으로 고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붓다가 그의 인간 분석에서 구태여 다섯 가지나 되는 목록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셈인데,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두번째 것, 즉 감각(vedana)에서만 찾아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 원전에는 오온 중의 어느 하나가 이런 식으로 간주되거나 또는 간주되어야 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다섯 가지 범주들이 언급될 때 그것들은 대개 하나의 총화(ensemble)로 논의되고 있다. 오온설에 대한 붓다의 설명은 그 다섯 가지는 모두 하나의 전체의 동등한 측면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그것들 중 어느 하나 단독으로는 존재의 본질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둘 혹은 셋, 또는 다섯 이하의 어떤 순열도 존재의 본질을 획득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도덕적 지위를 유정에서 찾으려는 시도와 관련하여 두 가지 다른 문제들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첫번째 문제는 개념적으로 유정의 힘을 존재의 다른 모든 힘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이런저런 이유로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한 인간 존재(또는 동물)를 상상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가령, 그와 같은 존재는 유전적인 기형일 수도 있다. 그 존재는 도덕적 지위를 결여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한편, 만약 과학자들이 유전공학적 조작을 통해 인간존재로부터 고통을 제거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도덕적 관계의 토대는 무엇일까?

고통이 없는 세계에서는 윤리학에 대한 어떠한 논리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에만 집착하는 윤리학이 성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 지위의 결정요소로서 이와 같은 특정인자 하나만 채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두번째 문제는 만일 제1의 도덕적 명령이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것이라면 고통 없이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생명체가 잠자는 동안 고통 없이 살해된 경우를 상상해 보라.

어떤 잘못 때문에 그 살인자는 유죄일까?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피해자의 자율성 문제이다. 이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 범인은 아무런 죄도 없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불교가 생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유정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으로 생각되지 않으며 불교 원전들 또한 특정한 생명 형태들을 도덕적 존재로부터 구분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종류의 측면들을 탐구하는 데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불교 원전들로부터 나온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살아 있는 존재들은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 고유의 내재적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을 바꾸면 불교에서 생명은 양도불가능한 천부적인 가치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5) 기본적 선의 추구

이제 우리는 불교가 자신의 윤리적 결정들에 도달하는 원리들에 관해 나름의 입장을 표명할 시점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불교윤리학의 근거가 되는 도덕원리들은 원전에서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즉, 사회상황의 변화와 함께 상이한 도덕적 계율들의 정식은 끊임없이 충돌하게 되지만 상대적으로 이에 대한 정당화를 제공하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족스러운 도덕적 정당화는 계율들과 인간의 선에 대한 불교적 견해 사이의 개념적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나아가 윤리학과 깨달음 사이의 관계를 좀더 분명하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불교에서 맨먼저 떠오르는 정당화 양식은 결과론적 양식이다. 예컨대, 계율을――그것을 지키는 데서 나오는 결과들을 언급함으로써――정당화하는 양식이 곧 그것이다. 그들이 왜 계율을 지키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불교인들은 전형적으로 선업을 통해 확보된 것으로 생각되는 천상에서의 환생을 언급할 것이다.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 문헌들은 어느 곳에서나 도덕적 행위와 이러한 행위의 선한 결과들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란 실행된 행위들에 외재적인 어떤 것이란 인상을 낳는다.

그러나 불교에서 발견되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행위의 결과들에 대한 관심은 불교를 ‘결과론적’으로 규정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과론적 윤리학 이론들은(공리주의가 하나의 예이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전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소박한 결과론적 정당화는――불교가 동기를 강조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불교적 맥락에서는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어떤 행위들은 그로부터 나오는 결과와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그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결과론적 정당화가 거부된다면 계율이 특정한 종류의 행위를 금지하는 다른 이유를 제시해야만 한다. 붓다는 업을 결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cetana), 다시 말해 도덕심리학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붓다는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동기론적 요인들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지만, 도덕에는 단순한 ‘선의’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그것에 의해 도덕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할 기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붓다는 ‘결과’ 및 ‘현자의 의견’과 같은 객관적 요인들을 언급한 적이 있다. 결과의 언급은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면밀하게 사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자의 의견은 식자들 사이의 단순한 과반수 투표 이상의 의미를 포함한다. 즉, 그것은 숙고된 행위 방향은――이를 적절한 불교적 양식을 통해 이성적인 분석을 할 만한 위치에 있는――사람들 사이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결과’와 ‘현자의 의견’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러한 요구 조건은 행위의 옳음은 거기에서 행위가 비롯되는 동기 이상의 그 무엇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행위의 결과와 그로부터 행위가 실행되는 동기의 그 어느 것도 그것 자체로서는 특정한 일들이 왜 옳고 그른가를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 있어서 도덕적 정당화의 지배적 양식은 행위자의 심리와 행위의 본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를 모두 고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와 같은 모든 요인들에 적절한 무게를 부여하고 있는 계율의 정당화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불교의 계율은 어떤 종류의 행위를 삼가하는 일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 조금만 숙고해 보면 계율은 보호할 만한 어떤 가치들의 방향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적 명령으로서의 계율의 정식은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은 행위를 염두에 둔 사람은 어떤 가치 또는 ‘선(goods)’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계율 자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형화될 수 있으며, 또한 구체적 필요와 요구에 따라 재배열되고 재정식화될 수도 있다. 정말 완벽한 계율의 목록은 거기서 어떤 가치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환경을 세부적으로 제시한 목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작업은 쓸모 없는 현학적 노동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삶의 복잡다단함은 그것을 결코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 대신 계율은 중요한 가치들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들을 알리는 데에 만족한다. 여기서 키온은 불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세 가지 근본적인 가치들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생명(life)과 지식(knowledge), 그리고 우정(friendship)이 ‘기본적(basic)’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서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지식은 우정이 아니며, 우정은 생명이 아니고 생명은 지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생명과 지식 그리고 우정이 ‘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인간 존재로서의 완전한 삶에 기여하는 사물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것들은 각각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존재의 본성(붓다)에 독특한 공헌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적 성취 또는 발전의 근본적 측면들이다. 이들이 선이라는 사실은 어떠한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컨대, 지식이 무지보다 선호되고, 그리고 외로운 것보다 친구를 갖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생명과 지식, 그리고 우정이 선이라는 것은 이들이 본질적으로‘바람직한(desirable)’ 가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컨대, 돈이 그런 것처럼 단순한 도구적 선들은 아니다. 돈은 어떤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선인 반면, 기본적 선들은 그 자체로서 선이다.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항목은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어떤 표준적 불교 정식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근본적 불교 가치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많은 경전들은 넓은 의미에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생명은 “다양한 형태들과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경계선을 갖는 하나의 현상”이며 그것은 “세포들과 조직, 기관들과 유기체, 그리고 식물, 동물, 인간과 신, 나아가 개인과 집단, 종(species)과 계(system)”로 기술될 수 있는 하나의 속성이라고 주장되어 왔다.14) 자이나교도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같은 일부의 사람들은 더 나아가 무생물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를 영혼이 들어 있거나 생명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이러한 견해의 흔적은 후대의, 특히 동북아시아의 불교학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슈바이처 식의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식물과 미생물들, 심지어 자연현상까지도 도덕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반대로 인도와 티베트의 학파들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생명의 관계를 평등적인 것이 아니라 위계적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모든 환생 중에서도 가장 상서로운 것으로 간주되며 그 위계구조의 맨 꼭대기 위치를 차지한다. 이것은 불교의 생명존중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생명은 열반에 이를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본질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붓다의 교의에 따르면 업의 삶만이 이러한 잠재력을 가진다. 생명이 ‘본질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긍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업의 삶’이란 업의 역사를 가진 삶, 다시 말해 도덕적 전기를 갖는 삶을 전제한다. 업의 삶은 환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다른 형태의 ‘삶’과 비교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결론이 옳다면 그것은 불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생명 자체, 즉 생명의 ‘살아 있음’――예컨대, 식물이나 손톱과 머리카락의 성장과 같은 생물학적 과정에서 볼 수 있는――이 아니라 정신적 목적을 갖는 삶 전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적 선들 가운데 두번째 것은 불교 문헌에서 사실상 핵심개념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불교에서 지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여기서 말하는‘지식’이란 반야(pan??, prajn?叭볍琉?? 어 sophia와 동의어)로 알려진 순수지식 또는 이론적 지식을 의미하며 그것은 불교 교의의 진리를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다. 지식은 추론과 반성, 선정(禪定), 논리 등에서 지적 능력을 올바로 사용한 결과이다. 불교는 모든 지식을 똑같은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일반적 지식(정보)을 이론적 지식인 다르마에 종속시키려고 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전적으로, 그리고 오직 지식의 길로만 보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불교가 지식을 하나의 기본적 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이것은 불교가 지적인 선 이외의 다른 인간적 선들도 인정한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만족스러운 태도는 아니다. 개인들은 이성의 사용을 통해 그들이 하는 선택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도 어떤 깨달은 추론자(붓다)가 도달한 것과 똑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불교의 목적은 단순히 윤리학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완전무결한 의미에서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다. 동시에 그 목적은 윤리적 행동을 위한 적절한 동기부여를 갖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윤리적으로 옳은가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되며 동시에 지식이 밝혀주는 선들을 실현하는 일에도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우리와 다른 존재들간의 관계인데, 그것이 곧 세번째 기본적인 선인 우정이다.

우정이 불교의 종교적 삶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라자바라무니(Phra Rajavaramuni)에 따르면 “불교의 사회 윤리학에서 모든 사람은 친구이며 이는 모든 사람을 친구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15)고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할 때는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우리들의 도움과 지원을 제공하며 나아가 모든 면에서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이다. 우정을 도덕적 관계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은 자비와 같은 단일한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우정의 주요 요소들은 동료에 대한 자애와 선의지의 태도, 그들 사이의 평화와 화목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그들의 이익을 우리 자신의 이익과 똑같이 여김으로써 그들에 대해 공정하게 행동하려는 성향 등을 모두 포함한다. 목적론적 윤리이론에서는――우리는 불교가 그렇다고 믿는다.――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도덕적 판단을 인간의 삶에서 추구되어야 할 목적으로서 무엇이 좋은가 또는 무엇이 가치 있는가에 대한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개의 기본적 선들은 불자 개인이 추구해야 할 불교윤리적 목적을 대표한다.

쉽게 말해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고 지식을 향상시키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을 깊고 폭넓게 하는 것은 불교적 선이다. 인간의 완성, 즉 깨달음은 이러한 선들을 실현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기본적 선들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인칭과 무관한 관점(impersonal standpoint)에서 보아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기를 바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기본적 선에 참여하게 할 의무가 있는 한편, 선의 실현에 대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비도덕적인 행위는 이 점에서 실패하며 언제나 자기 중심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막거나 배제하며, 그 선의 어떤 측면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비축해 둔다. 이러한 인칭과 무관한 보편적 차원의 기본적 선들이 갖는 도덕적 함의는 내가 기본적인 선을 부정하는 것이 잘못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또는 문화적 선호에 바탕을 둔 도덕의 상대론적 이해는 배제되어야 한다.

6) 경전의 뒷받침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이론이 평가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은 그 이론의 설득력과 이론의 예측에 대한 반증례(counter-example)가 경전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제안된 이론에 대한 설득력의 부족과 반증례들은 불교가 생명과 지식, 그리고 우정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경전적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문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와 같은 가치들을 장려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반하는 어떤 증거가 발견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생명은 인간의 기본적 선이라는 주장의 반증례는 불교 원전들에 기술되어 있는 종교적 자살의 사례가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월셔(Wiltshire)는 팔리 경전에 나와 있는 세 가지 경우를 “용서되지는 않지만 죄는 아닌 것이 분명한 자살의 사례들”16)로 들고 있고, 라모트(Lamotte)는 후대의 불교문헌에서 가치 있는 자기희생(self-immolation)의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17) 또한 경전에는 설득력이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를 들고 있다. 이 사례는 붓다 자신이 판단을 내린 규율의 문제와 관계된다. 그때 어떤 비구가 아팠다. 다른 비구들은 동정심에서 그에게 죽음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다. 그 비구는 죽었다.

다른 비구들은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이런 의아심이 생겼다. ‘우리가 금기의 위반을 범했는가?’ 이 비구들은 그 문제를 여래에게 보고했다. 그는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금기의 위반에 대한 죄가 있다.”라고 말했다.18) 위의 사례가 제기하는 문제점은 그 비구들이 한 행위가――이에 대한 처벌은 평생 동안의 공동체 추방이다.――교단규범의 위반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범주의 죄를 저질렀다는 말을 들을 만큼 잘못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이다. 그들이 동정심에서(karun??na) 행동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런 동기는 매우 칭찬할 만한 일일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그 비구들의 죄를 면제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행위의 옳음이 동기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들의 죄라고 생각되는 것은 동료 비구의 고통에 대해 동정심을 발휘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의 판단은 동기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죽음은 고통의 종식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되었다. 그 결정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어떤 행위의 방향은――만일 그것이 목적으로서든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든 의도적으로 기본적 선에 어긋나는 일을 포함한다면――결코 옳은 일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키온은 어떤 행위의 과정이 도덕적으로 옳으려면 그것은 선한 동기에서 나오되, 그것의 일부로서 기본적 선에 반하는 의도를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한 동기는 어떤 도덕적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의도 자체는 그것이 선한 동기에서 나와 기본적인 선들과 조화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옳은 것이 된다. 요약하자면, 기본적 선(목적)과 동기, 의도 그리고 결과들은 서로 맞물려 있으며, 기본적 선들에 대한 관심과 적절한 방향 정립으로부터 불교적 의미의 여러 가지 좋은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키온의 윤리학 방법론을 응용규범윤리학적 접근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 목적론적 기준을 적용하여 인공유산, 태아실험, 출산조절, 식물인간, 뇌사, 안락사 등과 같은 생명윤리학의 쟁점들에 대한 불교적 판단을 유도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그의 결론은 언제나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한결같이 ‘생명’이라는 기본적 선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이는 말을 바꾸면 곧 불살생계를 어긴 것과 마찬가지이다.

3. 불교적 관점의 윤리적 적용

1) 인공유산(abortion)

생명을 의도적으로 종식시키는 행위인 인공유산의 도덕성 문제는 그 생명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정통불교에서는 수태(conception) 순간을, 출생 이후 어린아이 단계를 거쳐 어른이 되는 질서정연한 발달과정의 출발점으로 본다. 경전에 따르면 수태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① 미래 부모의 성행위가 있어야 하며 ② 그것은 여성의 가임기간 동안에 이루어져야 하고 ③ 이때 주변에 환생 가능한 중간 단계의 존재(중음신)가 머물고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19)

이 조건들은 서로 시차를 두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작용한다. 따라서 중음신(의식)이 여성의 자궁 안으로 내려오는 그 순간부터 생명의 씨앗은 이미 자라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불교는 수태를 곧 생명 자체와 동격으로 보는 것이다. 경전은 계속하여 이후의 태아발달 모습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20) 유명한 주석가인 붓다고사(Buddhaghosa)는 수태와 자연적인 죽음 사이에 있는 어느 시점에서 인간의 생명을 고의로 파괴하는 유산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개체적 존재(attabhava)는 이 조그만 물질(태아)로부터 시작하여 나아가 점차 나이가 들고 120살까지 이르는 자연적 수명을 가지게 된다. 죽기 전까지의 이 모든 과정 내내 그것은 하나의 인간 존재이다.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빼앗는 사람’이란 어구는 태아의 단계(kalala)에서 ‘불에 그을리고 깔아 뭉개거나 약을 사용함으로써’, 또는 그 다음 단계에서 ‘이와 유사한 종류의 공격을 가함으로써’ ‘생명을 떼어 놓는 것’을 말한다.21)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불살생계를 어긴 자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생명’의 선을 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에 반하는 행위를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수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즉 정자가 난자를 뚫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생명에 대해 매우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유산을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살인과 같은 범주에 넣어 생각하게 된다.22) 이런 입장은 최근의 달라이라마(Dalai Lama)에 의해서도 거듭 확인되고 있다.

유산은 살아 있는 존재를 죽이는 그릇된 행위로 간주됩니다. 비구와 비구니들에게는 출가 서원 자체의 파괴를 가져오는 네 가지 유형의 그릇된 행위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인간 존재 또는 인간 존재로 형성되는 와중에 있는 어떤 것을 죽이는 일입니다.23) 이런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유산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불교인들은 이를 철저하게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될 행동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불교종파나 특정한 지역에 따라서는 낙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거나 현실로 받아들이는 곳도 있다.24)

그러나 불교의 기본 관점에서 보면 유산은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을 그 생명의 의사에 반하여 죽이는 잔인한 살인행위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곧 모든 계율의 으뜸인 불살생계를 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2) 태아실험(embryo research)

태아실험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효과적인 피임법의 개발과 유전적 이상의 발견과 치료, 불임 해결 그리고 기타 다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적들은 대부분 불교와 공유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태아의 파괴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불교의 생명존중 사상과 배치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동안 실험실에서는 갖가지 이유로 수백 명의 인간 태아가 만들어지거나 파괴되었다. 때때로 인간의 태아는 토끼나 원숭이, 양 속으로 옮겨지기도 했으며 인간과 동물의 잡종 만들기 실험도 행해졌다. 어떤 연구자들의 목적에는 이식용 인간기관을 얻는 것과 유전자 조작을 통한 새로운 종의 창조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태아실험을 통해 얻은 결론은 위에서 언급된 많은 유익한 목적들이 아직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생명을 실험실에서도 조작 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인명 경시 풍조만 낳았을 뿐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태아에 대한 이와 같은 파괴적 실험은 인공유산과 마찬가지로 생명이란 기본적 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자 불살생계의 위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연구의 목적이 순수한 이론적 지식이라면 그것은 생명이 지식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설사 그 목적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생명을 우정에 종속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독립적인 가치를 갖는 기본적인 선들은 그 본질상 도구화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태아실험에 대해 사실상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25)

3) 뇌사(brain death)

이른바 뇌사 개념은 1968년 하바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가 죽음을 뇌의 모든 기능들의 정지라는 관점에서 정의한 이후, 일반화되기 시작한 의학용어이다. 이것은 대뇌와 중뇌, 뇌간 그리고 상부의 척수 단계를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뇌기능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데 한마디로 ‘되돌릴 수 없는 혼수상태(coma)’이다. 뇌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① 무감각과 무반응 ② 무운동이나 무호흡 ③ 무반사 작용 등이다.26) 그러나 불교는 전통적으로 육체와 영혼의 지능을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는 죽음 개념을 채택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인간 본성의 모든 차원들에 똑같은 무게를 부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불교적 입장에서는 전체적 생명의 일부인 고도의 정신능력을 상실했다고 해서(뇌사) 곧바로 생물학적 의미의 생명이 죽었다고 선언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신체기관 간의 유기적 통합기능이 문자 그대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 것을 지칭한다. 당연히 의식의 돌이킬 수 없는 상실로서의 죽음 개념 즉, 뇌사는 거부된다. 뇌사의 불인정은 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장기의 적출 및 이식수술과 모순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27)

4) 식물인간(PVS)

뇌사와 식물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뇌간(brain stem)의 죽음을 뜻한다면, 후자는 뇌의 신피질(neocortex)이 기능을 상실한 경우이다. 따라서 뇌사상태와는 달리 식물인간 환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계속 숨을 쉴 수 있으며 소화작용도 이전과 다름없다. 그러나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볼 수 없으며, 귀는 있으나 들을 수 없다. 부분적인 반사운동은 가능하나 자발적인 운동을 하거나 쾌락 또는 고통을 느끼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인식기능과 감정 조절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28)

이와 같은 신피질의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불교윤리학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다른 감각기관의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불교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말은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가 자연적인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가족과 의료진은 적절한 간호와 치료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는 죽은 시체가 아니며 또한 최근의 뇌사 판정기준에 따르더라도―뇌간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으므로―의학적으로도 엄연히 살아 있는 존재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환자를 대상으로 직접적인 행위에 의해서든, 간접적인 태만 또는 방임에 의해서든 죽음을 의도하는 것은 분명한 살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거부하고 버리는 것은 환자가 가족과 친구들을 통해 우정의 선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고의로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곧 생명과 우정의 선을 동시에 포기하는 결과를 낳는다.

5) 안락사(euthanasia)

안락사는 어떤 상태에 있는 환자를 그에 대한 의학적인 배려의 일환으로서 적극적인 개입이나 소극적인 유기에 의해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을 말한다. 붓다는 당시 승려들의 안락사 풍조에 대해 바라이죄를 적용할 만큼 매우 엄격했다. 승려가 의도적으로 어떤 인간 존재에게서 생명을 빼앗거나 또는 그의 칼잡이(knife-bringer)가 되려고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간에 그 또한 규범에 패배한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공동체 안에 머물 자격이 없다.29)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의 계율은 무엇보다도 죽이는 것과 죽음을 야기하는 것, 이 둘 모두를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안락사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든 이를 실행하는 사람과 요구하는 사람은 모두 불살생계를 파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안락사를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생명이 하나의 기본적 선이라는 우리들의 암묵적 합의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불교는 수단으로서든 목적으로서든 결코 죽음을 의도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경전의 기본정신이다. 그러나 불교계 내에서도 안락사를 둘러싼 미묘한 입장 차이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논객들로서는 Philip Kapleau, Phillip Lecso, Louis van Loon 등이 있다.30)

이들의 주장은 안락사에 반대하는 불교의 기본 입장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안락사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때로는 안락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불교는 본질적으로 안락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불교가 무엇보다도 생명을 최우선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거나’ 또는 ‘죽음을 칭송하는 것’ 등에 의해 죽음을 생명보다 높게 다루는 것은 생명이 하나의 기본적인 선이라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죽음을 영원히 극복하는 데 있다.

이 말은 죽음의 긍정이나 죽음을 선호하는 선택은 이러한 목적을 가진 인간적 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안락사에서―그것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또는 고의적인 것이든 간에―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이와 같은 불교적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 즉, 살인이기 때문에 불교윤리적 입장에서 볼 때 안락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최근 들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안락사의 입법화 문제가 얼마나 공공의 목적을 증진시킬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지극히 회의적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생명을 인위적으로 종식시키는 것은 업의 순환과정 속에 있는 인간 존재의 자연적 삶을 막거나 방해하는 악업을 짓게 된다.

4. 맺는 말

키온이 행위의 선악판단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세 가지 기본적 선인 지식, 생명, 우정은 불교적 덕목들의 현대적 요약이자 보편화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조심스런 시도로 보인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가톨릭 신학자이자 종교적 지성으로 존경받고 있는 한스 큉(Hans Ku촱g)이 역설하는 ‘세계윤리(Global Ethic)’의 확립 가능성에 동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견해는 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장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키온의 시각은 매우 참신하고도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시론의 성격이 강한 나머지 다소 작위적인 경전 인용이 없지 않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부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키온은 불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폭과 깊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논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노력들은 동양의 속깊은 ‘사상’이 서양의 간결한 ‘행위’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응용 윤리학의 영역)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고와 행동은 시공간과 관계 없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서로 다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이 말이 새삼스럽게 상기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단순 소박함(simplicity)’의 미학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문제는 간단하다. 아는 것만큼만이라도 먼저 실천하려는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운 부처님 말씀만으로도 불교윤리적 행동(예컨대, 자비행)을 몸으로 옮기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본다. 이제부터는 제발 아리송하고 화려한 이야기로만 들릴 수도 있는 말의 성찬보다는 조그만 일에서부터 부처님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 줄 때가 아닌가 싶다. 불교윤리는 결코 일반인들의 도덕 상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혹시 우리 불자들은 채식문화(정신문명)의 상품성에 현혹된 나머지 막연한 우월감에 젖어 육식문화(물질문명)가 지니고 있는 영양분(합리성)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심오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합리적인 원리를 통해 표현될 때 비로소 실천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건강한 삶의 지혜는 그 두 문화의 조화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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