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대학교 의료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1. 장애인이란

장애의 개념을 알기 위해 먼저 장애가 없는 건강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세계보건기구(WHO)헌장의 첫 항목에 명시된 건강의 정의에 의하면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나 상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쾌적한 상태를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건강이란 사회적으로 만족스런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활현상을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측면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생명현상을 갖는 생물체이면서도 정신적인 기능이 특히 발달되어 있는 영적인 존재라는 점, 그리고 다수의 개체가 모여서 협동과 분업을 하는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점에 그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장애인에 대한 개념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일의적으로 장애의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장애의 원인이나 종별, 그리고 그 정도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문제에 접근하는 측면에 따라서도 서로 상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장애란 심신의 기능에 어떤 결함이나 손상이 있음으로 인해서 특수한 활동이나 기능이 제약되거나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이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되면 일반적으로도 일상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 필요로 하는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직업적인 모든 요건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자기 스스로 확보하기가 곤란한 사람을 흔히 장애자라 하는데, 여기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기본적인 관념은 장애에 대한 판단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 또는 기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장애란 사회의 요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미치기 위해 특별한 원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절대적인 편견이나 차별 의식은 철저히 배제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비록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원조, 즉 예방, 치료, 교육재활과 기타 서비스 등을 통하여 장애가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고, 또 상당한 사회적 요구에 도달할 수 있어서 결국에는 장애인 개개인이 지역사회는 물론 나아가서 전체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신의 결함 상태가 일상생활에 장해가 안되면 장애인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2. 장애인의 권리

인간은 법적 권리 이전에 존재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모든 인간에게 자체의 존엄성에 의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즉, 생존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 복지를 위해서는 장애인의 존재를 인식하여 장애인들도 시간적 공간적으로 함께 삶을 누리는 동등한 인권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올바른 장애인관을 확립하고 인격체로서의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의 인권보장이며, 사회의 양심과 인간성의 회복이며, 그 사회 모든 사람의 인권에 대한 철학의 확보이다. 그런데 인간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활하므로 어느 누구나 그 특정한 공간이 장구한 시간을 거쳐서 전승되어 온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배워서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고 행동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속해 있는 민족이나 국가의 가치체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1) 세계 역사 속에서의 변천 과정

세계 역사를 더듬어볼 때 장애인에 대한 사회 전체의 태도는 그 시대의 사상적 배경에 따라 크게 변천하여 왔으며, 이에 따른 장애인 복지의 방향도 많은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장애인들은 사회에서 버림을 받거나 유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장애인들은 폐기물 정도의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스파르타에서는 미(美)와 건강을 존중하여 장애인을 추한 인간의 표본으로 생각하여 유기하는 것을 제도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기독교사상과 함께 장애인은 종교적인 자선 차원에서 수용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 근대에 와서는 의학의 발달, 문예 부흥, 종교 개혁 등의 사회변화를 통해서 인간 존중의 사상이 발달하면서 그에 따라 경제적, 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한 복지 시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2)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의 변천 과정

(1) 고대·중세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사회·심리·문화적 배경으로 인과응보설과 윤회사상 등을 형성해 장애를 전생의 죄업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또 생활양식이 촌락 단위의 정착된 농경사회였으므로 육체 노동력이 요구됐으므로 장애인은 그 능력이 있는 인간에서 떨어져 나와 멸시와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2) 근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 말의 부패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 및 교화(敎化)의 이념으로 삼아 집권적인 관료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여 유교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었는데 유교의 가족주의, 상명(尙名)주의로 가족 내에 장애인이 있는 것을 가문의 수치로 생각하여 장애인을 숨어서 살게 했다. 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대우되고 이해되어 왔는지는 우리나라 속담에 잘 나타난다. 장애인에 대한 속담이 88개인데, 모두가 장애인의 인권을 짓밟고 있어, 장애인에게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3) 근대
개화사상을 토대로 하여 선교사에 의한 복음전도와 사회복지사업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런데 장애인 복지가 아주 영세한 장애인에 대한 의료적, 교육적 시혜로 출발했기 때문에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4) 현대
가장 변화가 많았던 격동의 시대였기 때문에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강자 위주의 의식구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을 치르면서 부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상이용사들이 사회적 불만을 폭발시키면서 보인 횡포에 사람들은 장애인을 무서운, 그래서 피하고 싶은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 6,70년대는 경제개발 제일주의로 사회의 의식구조는 모든 것을 경제로부터라는 식의 경제주의적 사고 체계를 형성하는 물질만능주의로 빠져들게 되었고, 그것은 정신적인 고갈을 초래했다.

(5) 세계 장애인의 해 이후
UN이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를 기해,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장애자라는 단어도 실질적으로 그때부터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불구자나 지체부자유자 등의 명칭이 혼용되었는데, 명칭의 통일이 장애인 복지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장애인이라는 계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장애인을 특별시 여기는 인식을 낳았다. 1988년에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를 치르면서 많은 인식 변화가 있긴 했어도 너무나 상품화된 단순한 전시효과 정도의 인스턴트식 의식변화였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3) 한국인의 장애인관

한국 사람의 전통적인 장애인관은 장애의 원인을 미신이나 천벌로 여겨 객관적으로는 멸시와 조롱으로, 주관적으로는 열등감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견해는 한국 민족 특유의 동질의식으로 인한 보편적 인간의 지향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 동질의식은 이질성을 강하게 배척하는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같은 민족만으로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누리며 수천 년을 살아왔기에 이질성에 미숙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질의식이 더욱 강해지는데 그럴수록 동질이고 평균된 보편성의 것에 가치를 두게 되며 평균과 동떨어진 이질의 개성 있는 것일수록 비가치화(非價値化)한다.

그러기에 사람의 경우도 평균인간, 동질인간, 보편인간을 지향하게 되며 그 기준에서 이탈될수록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이렇게 개성이 평가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질에 대한 개성 지향보다 이것저것 고루 갖춘 완전 지향을 하게 되며, 이것이 한국인에게 강한 완전의식의 형성요인이 되었다. 이런 완전의식이 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편견을 갖게 했다. 개별자요, 불완전자로 말이다. 그리고 양반제도 또한 편견구조를 조성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더욱 조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3. 불경 속의 장애인

부처님이 살아 계실 당시를 중심으로 해서 각 장애 유형별로 어떤 장애인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시각장애인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시각장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는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 사람은 바로 아나율이다. 아나율(阿那律 Aniruddha)는 카필라성 출신으로 곡반왕의 아들이다. 부처님께서 아나율이 천안(天眼)제일이라고 했는데 천안이란, 멀고 가까움, 안과 밖, 낮과 밤을 불문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또 아주 미세한 물질도 능히 보고, 시간을 초월하여 중생들의 내세에 관한 것도 알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아나율이 이런 천안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실명으로 인해서였다. 그런데 아나율이 실명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어느날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아나율이 깜빡 잠이 들었다. 그것을 본 부처님은 아나율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출가했는가?” “지금부터 부처님 앞에서는 잠자지 않겠습니다.” 아나율은 이렇게 맹세를 하고 불면(不眠)으로 정진했다. 그래서 아나율의 눈에 병이 났다. 부처님께서는 치료를 받도록 권했지만 아나율은 계속 정진을 했기에 완전히 실명을 해버렸다. 그런데 아나율은 그 실명으로 천안을 얻게 되었다. 그러니까 실명은 잠을 자지 않을 정도로 한 지독한 노력 때문에 비롯된 것이지 전생의 업 때문에 빛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실명은 노력을 뜻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실명으로 천안을 얻은 것으로도 잘 나타난다. 그러니까 실명은 빛을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 눈이 할 수 없는 인식 기능을 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도 실명을 한 제자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나율은 앞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늘귀를 꿰기가 아주 힘들었는데, 부처님께서 아나율을 위해 바늘귀를 끼워주셨다고 한다.(증일아함경)

부처님이 아나율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바늘귀를 손수 끼워주시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부처님은 참 인간적인 사랑의 실천자임을 알 수 있다.

만약 다른 종교의 교주였다면 아나율을 위해 바늘귀를 끼워주지 않고 그가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장애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지적장애

지적장애라고 하면 잘 모를지도 모른다. 지적장애는 정신지체의 새로운 명칭이다.

부처님은 그때 이미 조금 늦게 되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주리반득 이야기에서 잘 알 수 있다. 주리반득(周理般得)은 주리반특(周理般特)이라고도 하는데 범어로 츄리 판타카(suddhipanthaka)라고 한다.

주리반득은 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여행을 하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쌍둥이였다. 첫 번째 태어난 아들은 반득이고, 두 번째 태어난 아들은 주리반득이라고 이름지었다.

반득은 길이라는 뜻이고, 주리는 작은 이라는 의미여서 길에서 태어난 작은 아이라는 이름이다. 그런데 형 반득은 아주 총명했는 데 반해 주리반득은 아주 어리석었다. 요즘도 쌍둥이를 낳으면 영양상태가 고르지 못한 경우 한쪽 아이가 지적장애가 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상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주리반득은 어찌나 둔했는지 3년 동안 수행을 했지만 글귀 하나를 제대로 못 외웠다.

당연히 주리반득에게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만 주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주리반득은 자신의 신세가 너무 한심해서 청소를 하다 말고 엉엉 울었다. 그때 지나가던 부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이유를 묻자 주리반득은 자기는 아무래도 부처님 법을 배울 수 없을 것 같다고 한탄했다.

그런 주리반득에게 부처님은 청소와 빗자루라는 말만 외우도록 하셨다. 그런데 주리반득은 청소를 외우면 빗자루를 잊어버리고 빗자루를 외우면 청소를 잊어버렸다. 그런 주리반득에게 부처님은 수행자들의 방을 청소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주리반득은 겸손하게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여 자기 동료인 수행자들의 방을 청소했다. 주리반득은 아주 열심히 청소를 해주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 주리반득은 그 깨달음을 부처님께 전했다. “부처님, 빗자루는 이 세상의 더러움을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 사람들도 지혜의 빗자루로 마음속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 말에 부처님은 환히 웃으며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뻐하셨다.

그 후 주리반득은 동료들 앞에 나아가 설법을 할 정도로 존경받는 수행자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바사익왕이 크게 놀라며 이유를 물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반드시 많이 배우는 것을 요하지 않습니다. 행하는 것이 으뜸입니다.”

지적장애인에게 인간 취급을 안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그들도 지식의 습득이 아닌 행동을 통해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경우에도 인격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장애인에 대해 편견을 갖지 말도록 충고해주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3) 지체장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요소 요소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은 웃다라가 척추장애(곱추)를 가지고 있었음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우다야나 왕의 왕비 샤마바티는 불교에 깊이 귀의했는데, 왕비는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녀인 웃다라로 하여금 바깥소식을 전해 받았는데, 왕비가 원하는 소식은 법회에서 하신 부처님 말씀이었다.

그래서 웃다라가 법회에 참석하여 들은 이야기를 왕비에게 전해주곤 했는데, 웃다라는 머리가 좋아서 법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어 왕비의 신심(信心)이 더욱 돈독해 갔다. 그런데 둘째 왕비 마간디야가 샤마바티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왕에게 중상모략적인 정보를 주었다. 화가 난 왕은 당장 부인을 죽이려고 했지만, 왕비의 자비스런 얼굴을 본 왕은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왕비에게 자기의 잘못을 사과했다. 그런 왕의 태도에 마간디야는 더욱 질투심이 끓어올라 왕이 출타한 틈을 타서 샤마바티 내전에 불을 질렀다.

그때 다른 시녀들은 모두 도망가기에 바빴지만 웃다라는 도망가지 않았다. 샤마바티를 구하려고 끝까지 불 속을 헤매다 불 속에 묻히고 만다. 변하지 않는 그 마음, 그것을 몸에 장애가 있는 웃다라만이 가지고 있었다. 웃다라는 총명할 뿐만 아니라 의리도 있었다. 이것으로 불경 속에는 장애인이 아주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4. 불교의 사회복지

1) 불교사회복지사상

보살행에 자원봉사에 대한 이론적 학문적 연구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불자들의 사회참여를 권유하기 위해서일까. 한동안 갈등을 했다. 그러다 후자를 택했다. 불교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하화중생이 바로 자원봉사이다. 그리고 보살은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자원봉사자이다.

그러니까 자원봉사의 기원은 우리 불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은 자원봉사가 아닌 자원활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봉사라는 말이 위에서 아래로 베풀어주는 시혜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그 행위를 받는 입장에서는 유쾌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자원봉사 대신에 활동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보살행에는 이미 그런 교만이 없다. 자신의 수양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보살행은 수준 높은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고쳐서 다듬을 것도 없는 보살행을 사회에 일반화시켰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어서 빨리 보살행을 자원활동과 접맥시켜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긴다.

2) 보살행(菩薩行)의 경전적 해석

보살(Bodhisattva)은 보제살(菩提薩)의 약어로 Bodhi와 sattva의 복합어이다. Bodhi는 깨닫는다는 뜻이고 sattva는 존재라는 뜻으로 중생을 가리킨다. 즉,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다. 경전에서는 보살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에서는 “보살은 많은 중생을 완전한 열반으로 이끌어 들인다.”고 말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동시에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 보살의 마음이다.” 혹은 “보살은 큰 서원을 세워 마음이 부동하며 정진하여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보살은 불성(佛性)의 자비심을 내어 항상 모든 사람을 도와서 복되게 하며 즐겁게 해야 한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대신해서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나쁜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좋은 일은 타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에서는 “보살은 비록 집에 있더라도 모든 욕망을 조절하여 탐욕과 인색함이 없이 목숨을 버릴지라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보살은 집에 있으면서 마땅히 중생을 안락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서는 “보살은 중생들의 부모가 되어 그 괴로움을 제거해 준다.”고 말한다.

경전에 나타난 보살행을 분석해보면 남을 위해 자비심을 내어 자비행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최대의 선행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살은 항상 고통 속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일마니보경(遺日摩尼寶經)》에서는 “광야나 산에는 연꽃이 피어나지 않고 방죽의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열반 속에서는 보살이 생겨나지 않고 애욕 속에 보살법이 생긴다.” “중생의 고통이 있기 때문에 보살이 있는 것이고 그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보살이 할 일이며, 그런 행동을 보살행이라고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보살은 사회 속에 뛰어들어 복지증진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보살의 자세에 대해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였다.

《화엄경》에서는 “한 사람의 중생을 위함도 같고 일체중생을 위함도 같아서 큰 자비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에 안주하게 한다.” 그리고 “보살은 한 생각도 피곤하고 염증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피곤하다거나 싫어졌다거나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3) 보살행과 자원활동

이상에서 보살행과 자원활동이 왜 한 묶음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원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타종교인들이기 때문에 불교에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교의 사상 속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봉사 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사회복지사업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 보면 보살은 사회사업가이고 중생은 사회복지사업의 대상자로 규정짓고 있다. 그 대상자를 구제하고자 헌신하는 모습은 자원활동가의 희생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보살은 자원활동가인 것이다. 여기에서 꼭 짚고 가야 할 것은 보살의 개념을 자원활동가와 접목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지 보살과 자원활동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살은 넓고도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일시적인 봉사가 아니라 영원한 봉사이고, 보살은 도와주는 데서 끝이 아니고 중생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보살은 겸손하다.

상불경(常不輕) 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공손히 합장을 하며 “나는 당신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해탈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모든 중생들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는 겸손함을 보살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보살은 자기자신의 수양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마음이 건실하다. 그 자기수양은 《승만경》에서 찾을 수 있다. 승만부인이 부처님 앞에서 10가지 서원을 하는데 그것이 곧 보살의 길이다.
그 10대 서원은

1. 계를 범할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2.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3.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4.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5. 인색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6. 재산을 가난한 중생을 위해 쓰겠다.
7. 애착하지 않는 마음과 만족함이 없는 마음과 거리낌이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대하겠다.
8. 고독한 사람, 갇혀 있는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 등 가지가지의 고통과 재난을 당하는 중생들을 본다면 잠시도 버리지 않고 반드시 이익되게 하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
9.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거두어들이겠다.
10. 이 모든 것들을 끝내 잊지 않겠다.

이렇게 보살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지런히 닦은 다음에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게 되는 것이다. 보살은 행동으로만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은 4가지가 있다. 이것을 사섭법(四攝法)이라고 한다.

보시섭(布施攝)―중생에게 필요한 재물이나 법을 보시하여 이끄는 방법
애어섭(愛語攝)―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이끄는 방법
이행섭(利行攝)―선행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여 이끄는 방법
동사섭(同事攝)―중생의 근성에 따라 행동을 같이하여 이끄는 방법

보살은 다각적인 면에서 중생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교의 보살은 이타행의 표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타행이 자원봉사 이상의 큰 자비의 실천인 것이다.

5. 불교 장애인복지의 발전 방향

불교와 장애인은 거의 관련이 없거나 아니면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장애인을 무시한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이다. 불교야말로 장애인을 편견 없이 대하고 있다. 장애인은 부처님의 제자로 등장을 하거나 혹은 시녀일지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애인의 모습이 소외가 아니라 이끌어가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부처님은 장애를 고쳐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예로, 앞을 볼 수 없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부처님께 설법을 요청했다. “부처님, 사람들은 세상에 빛이 있다, 색깔이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부처님께서 빛이 있는지 없는지 말씀해주시고 있다면 제가 알 수 있도록 설명해주십시오.” 그때 부처님은 설법을 하지 않으시고 지바라는 의사를 불러 그 바라문의 눈을 치료해주도록 했다. 다행히 수술로 시력을 되찾을 수 있었는데 시력을 찾은 바라문은 자기 눈으로 빛과 색이 있음을 확인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부처님은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셨다. 만약 부처님께서 바라문이 불쌍했다면 어떤 위로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장애인의 문제를 감상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사회복지 차원으로 해결하시려 했다. 만약 다른 종교의 교주였다면, 그 자리에서 자기 손으로 바라문의 눈을 뜨게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의사를 시켜 수술을 해주도록 했다. 이 두 가지로 불교의 장애인관은 충분히 정리가 된다. 불교에서는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에 장애인관은 긍정적이다. 그리고 장애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주어 사회 속에서 그 능력을 평가받게 하기 때문에 장애인관은 미래지향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의식은 불교의 업설(業說) 때문에 부정적이 되었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업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업(Karma)은 만든다(kr)를 어원으로 하는 개념이고 작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업을 만드는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불특정 다수이다. 그것을 연(緣)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혼자 만든 업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하반신마비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그 개인의 업으로만 판결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그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업의 필연성은 외면적인 것, 즉 신체 남녀의 구별과 같은 외적 생물학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업의 작용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사사끼 겐쥰) 불교는 인간적 생존에 관한 종교이기에 내적인 의지를 조건으로 해야 한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출생을 묻지 말고, 단지 행위를 물어라.”《숫타니파타》

이렇게 본다면 장애를 개인의, 또는 한 가정의 업으로 볼 수 없다. 긍정적인 장애인관의 걸림돌이 되어온 업 문제를 이렇게 해석을 하는 데 납득이 된다면 우리 불교에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정립시킬 근거를 마련해줄 수 있다.

6. 맺는 말

앞에서 한 사회를 지배하는 기준에 따라 장애인관이 결정된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가질 수 있다. 전생의 죄를 운운하는 업설은 사상의 표피적인 면만을 가지고 유출한 왜곡된 논리이고,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이루게 하는 논리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모든 존재는 공간적, 시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생성, 발전한다는 것이 연기론이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과 고통이 곧 나의 고통과 아픔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교의 장애인관은 장애인과 일반인을 구분하지 않는 원융(圓融)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장애인들이 원하는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다. 올 4월 11일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 이슈가 될텐데 불교의 장애인관으로 장애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무너지고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될 것이다. ■

 

방귀희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 석사. 우성대학교 의료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KBS 작가, 복지TV 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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