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1. 우리의 상황과 ‘아시아적 가치’ 논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분석은 일정한 거리를 기본 요건으로 한다.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상황은 그 자체로 다양한 외연을 갖고 있고, 그럼에도 나와 우리라는 끈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공통의 기반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서 우리가 좀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인 가치 또는 정신의 영역은 객관적인 분석을 쉽게 용인하지 않는 주관성을 전제로 해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 주관성에 어느 정도 유념하거나 때로는 아예 유념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담론을 전개하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정신의 영역이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믿음이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부여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밀레니엄 시대’를 맞고 있는 현재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가치체계를 어떻게 잡고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와 역사·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온 현재의 중국인들은 지금 어떤 가치체계를 갖고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와 그들 사이의 유사성은 얼마나 유지되고 있고, 그에 상응하는 차별성을 얼마나 갖고 있을까? 오늘 우리의 공동 담론은 바로 이와 같은 화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아시아인’ 또는 ‘아시아인’이라는 공통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우리들은 최소한 그 기준에서 볼 때는 동일성을 갖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조금만 다른 기준을 적용시키면 거의 같은 점이 없거나 다른 존재들로 규명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의 눈 또는 초점을 잡는 일은 다른 작업을 위한 기본적인 요건으로 자리매김된다. 아시아인, 좀더 좁혀서 동아시아인이라는 규정은 우리가 스스로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이다.

서구의 침략에 노출되어 온 이래로 그들에 의해서 주어진 역사적 개념인 ‘동아시아인’이라는 굴레에, 마치 모든 의복이 서구화되어가는 과정에 젖어들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데 새삼 이 개념을 문제삼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도 바로 그들 서구의 학자들이다. 물론 서구인들에 의해 일정 부분 조작된 동양과 동양학에 대해서 집중적인 조명을 하게 해 준 것은 사이드(Edward W. Said)라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대학 교수이지만, 그 역시도 스스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딜레마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타인에 의해 주어진 개념으로서의 ‘아시아인 패러다임’에 스스로 익숙해져서 그것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왔던 우리들이 바로 그 타자에 의해서 다시 반성의 계기를 갖게 되는 이중적 상황에 처해 있는 지금, 어떤 자세로 이 논의에 참여해야 하는 것일까? 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당연히 주체적인 자세로 이 논의에 임하고 또 그런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이다. 그렇지만 이 상황 속에서 주체성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무엇인지를 누군가 구체적으로 물어온다면, 정확한 답을 해 주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논의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참여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 논의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힘과 현실적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한국의 학자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어떤 관점에서 이 논의에 참여하고 그 결과를 어떻게 정리해서 수용해 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 작은 고찰도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선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가 전개된 과정을 비교적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정리해 본 후에, 그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동아시아적 가치 문제와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살피고, 마지막으로는 오리엔탈리즘적 한계에 유의하면서 불교적 관점에서 동아시아적 가치 논의를 새롭게 전개해 보는 순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2. 아시아적 가치 논의의 전개과정과 오리엔탈리즘

1)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최근의 논의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는 그것이 배태하고 있는 타자성 때문에 아시아인들이 아닌 비아시아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근대적 형태의 아시아에 관한 논의는 유럽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대상으로 유럽 이외의 지역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그 중의 매력적인 한 대상으로 아시아가 인식되기 시작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산업 혁명과 더불어 유럽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서구인들의 ‘오리엔트(東方, Orient)’라는 개념적 인식에 공간적 확대가 이루어지게 된다.1)

오리엔트는 본래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그 동쪽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는데, 유럽인들의 침략적 공간 확대와 더불어 현재와 같이 아시아라는 개념과 동일시되기에 이른다. 그 중에서 동아시아는 한국과 일본, 중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었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가 서구인들의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한국과 대만 등을 비롯한 이 지역 일부 국가들의 경제적 성취에 대한 세계의 평가라는 계기를 통해서이다.

동시에 그것에 영향을 받은 우리들 자신이 자신감이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를 찾아가는 과정과도 맞물리면서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이 1990년대 들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2) 그런데 1990년대의 동아시아 담론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진다.

1997년 하반기에 우리와 인도네시아가 연이어 국제통화기금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그 동안 긍정적인 관점에서 논의되어 왔던 동아시아 담론이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는 것이다.3)

이 입장에 따르면 이러한 아시아의 경제적 몰락은 그 발전의 토대를 이루고 있던 개발 독재와 정경 유착, 시장 기능의 경시 등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이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담론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예를 들어 크루그만(P. Krugman)은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룩한 동아시아의 ‘용’들에 대해서 ‘종이 호랑이(Paper Tiger)’에 비유하면서, 이들의 기적적인 발전이 더 이상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비판을 이미 1994년에 제기하고 있다.4)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1997년 하반기 이전까지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발전의 원동력이 바로 ‘동아시아적 가치’라고 평가하는 방향이었다. ‘동아시아적 가치’라는 동일한 대상을 놓고 시기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전혀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관점과 초점의 차이는 평가자 내적인 차원에서도 가능한 일이고, 경제 발전이라는 외양 자체의 변화에 따라서도 다른 평가는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논의들이 주로 동아시아인들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 즉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데서 생긴다.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동아시아라는 지역 자체의 존재가 모두 비동아시아라는 타자적 준거에 의해서 주어진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반된 평가의 공존은 우리들의 가치체계에 많은 혼란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타자성은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경제 발전 또는 쇠퇴를 설명하는 기본 요건으로서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현재의 혼란을 초래한 원인에 대해 분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2)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정의와 동아시아인의 정체성 문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상대적 위치에서 만들어진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 구별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 방식이다.5)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다. ……오리엔탈리즘이 그 정도로까지 권위 있는 지위를 획득한 결과, 사람들은 누구도 동양에 관하여 쓰거나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경우에, 오리엔탈리즘이 사고와 행동에 가한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6)

1978년에 출판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서설에서 그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정의이다. 이 책에서 사이드는, 서구인들에 의해서 형성된 조작적 개념인 ‘동양’과 ‘동양인’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침략적 의도에 바탕을 두고 마련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허구적 동양학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비판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형성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과 오늘의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이르는 방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7)

동양학이라는 번역어와 등치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여러 정의 중에서, 대체로 구미 세력의 아시아 지배라는 구조적 차원을 전제로 한 ‘타자화되고 유럽과 미국 지향적인 특성을 갖는 제한된 지역학’이라는 정의가 최근에 서구 학자들에 의해서도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8)

이러한 일종의 지역학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 최근에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자본주의 내부의 변화와 지식인들의 자민족주의 탈피 경향,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문화의 탈민족화 등의 요인에 의해서 도전받고 있던 중에, 동아시아 국가의 경제 위기가 표면화되었고 그 결과 그 학적인 한계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는 딜릭(A. Dirlik)의 분석은 오리엔탈리스트의 위기 의식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9)

오리엔탈리즘은 그것의 형성 과정을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외적인 힘과 내적인 논리가 모두 정치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동양’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하는 데 피할 수 없는 통로로 자리잡고 있다. 사이드가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서양 사람들 누구도 오리엔탈리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동양에 대해 생각하거나 쓸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동양인들 스스로도 어떤 형식으로든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 속에서 동양과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를 ‘동양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도 역시 재검토해 볼 문제이지만, 논의의 전개 과정에서 이 개념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동양인에 속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워낙 넓기 때문에 우리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동아시아인을 ‘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동아시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양인’으로 한정지어 사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동아시아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있다. 최소한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를 구분하고, 그것에 따라서 여러 가지 논의를 전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동아시아인들의 정체성을 문제삼으면 몇 가지 점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우선 과연 이들을 같은 범주에 묶을 수 있는 어떤 동일한 정신적 요소와 같은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도 있고, 좀더 나아가 이들이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을 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과제로 남겨 두기로 하고, 여기서는 단지 최소한 현재의 동아시아 지역에 지속적으로 거주하고 있고 역사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의 정신적 배경만을 문제삼고자 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교적 전통과 불교적 전통에 초점을 맞추고 동아시아인들의 정체성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인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공유하면서 각각 다른 문화를 창조하기도 했지만, 그 외양의 차이와 함께 그 내부적 요소의 차원에서 동일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 중에서 이론적 체계를 갖춘 사상에 한정지어 말한다면 먼저 유교 사상의 영향을 공유했고, 다음으로는 불교 사상을 공유했다. 이러한 동아시아인들의 정신적 전통 공유는 물론 시기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이 사상에 접하게 되는 순서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으로 이어진다. 그렇기는 하지만 각각의 문화권에서 최소한 수백 년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체계화된 사상들 이전에 샤머니즘을 공유하기도 했고, 이후에는 서구의 기독교와 계몽사상 등의 유입, 그리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공유했다는 점도 기억되어야 한다.

또한 현재의 상황 속에서 몇 가지 차이는 있지만 각각 산업화에 어느 정도 성공하여 세계경제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아시아인들은 그 역사 속에서 각각 상대방을 타자, 더 나아가 적으로 상정해 놓고 서로 침략하거나 오랜 시간 적대시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과 중국 양국은 현재까지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침략 경험을 잊지 못하고 일정한 경계심을 갖고 있고, 중국과 우리 남한의 경우에도 한국 전쟁 당시에 서로 적이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지금도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전시에 준하는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경험들 속에서 현재의 동아시아인들은 서로를 동일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타자로 인식하고 있는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그럼에도 오리엔탈리즘적 배경 아래에서 형성된 서구의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타자성보다는 동일성과 유사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동아시아와 동아시아인들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은 일정 부분에서는 수용될 수 있고, 다른 영역에서는 거부될 수 있고 또 거부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체성은 상당 부분 타인에 의한 자신의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우리에게 그러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동양학이 그들 침략 목적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역할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 되거나, 아예 잘못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통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다시 정리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동아시아인의 정체성이 대체로 그 사상적 배경의 공유와 역사적이고 문화적 교류의 과정, 그리고 현대에 와서 서구적 산업화에 일정 부분 성공했다는 점 등에 의해서 형성되었고 또 그 과정은 지속되고 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현재 동아시아인들의 가치관 구조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상적 가치체계와 역사적 경험 사이의 연계성을 치밀하게 분석해 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가설에 대한 입증 문제는 논외로 하고, 단지 현재의 동아시아적 가치와 동아시아인들에 관한 논의에서 문제삼는 동일한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유교와 불교가 현재의 동아시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라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 아시아적 가치론의 한계와 불교적 보완

1) 우리의 유교 자본주의론과 동아시아적 가치론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최근의 관심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아시아 지역, 특히 동아시아 지역 일부 국가의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10)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East Asia)는 공통의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는 전제가 이 논의들에서 수용되고 있는데, 이 공통의 가치체계가 유교적 전통 속에서 마련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유교 자본주의론’으로 발전시켰다. 막스 베버의 유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고찰에서 연원하는 유교 자본주의론이 우리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비교적 주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11)

그렇지만 유교 자본주의론은 1990년대 후반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그 논의의 전개 과정이 급격한 전환을 이루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즉 1997년 후반에 우리가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것을 계기로 해서 유교적 요소가 우리의 자본주의 발전에 긍정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분석에서 오히려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과 배치되어 자본주의 발전에 치명적인 함정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분석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논의의 전환은 상당수의 관련 학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 주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1998년 이후에는 동아시아적 가치와 유교 자본주의론에 관한 논의를 주도해 왔던 사회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의 목소리는 작아진 반면, 그러한 논의에 비판적 검토를 요구하는 철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그러한 혼란을 반영하는 한 징후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유교 자본주의론이나 동아시아적 가치론에 관련된 거대한 담론들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경험적 요인의 변화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목소리를 자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담론에 포함되어 있는 기본적인 개념의 문제나 보편성의 문제를 다시 검토하는 철학적 논의가 자연스럽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12)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철학계의 논의가 단일한 결론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자료들에 근거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합의에는 이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첫째는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가 우리의 상황과 연계되어 주체적으로 진행되지 못했고, 그 결과 우리의 논의는 수입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아시아적 가치가 우리의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들은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인들에게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13)

마지막으로 이제 이러한 논의의 주도권을 우리가 되찾아서 우리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할 시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일정 부분에서는 동의하지만, 기본적으로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아시아적 가치와 동아시아적 가치를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개념의 포괄 범위로 보면 물론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가 동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지만, 우리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를 진행하고자 할 때는 동아시아적 가치를 구분해서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아시아적 가치를 구성하는 공통의 사상적 배경은 유교와 불교이고, 따라서 이 두 사상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동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를 정리한 후에 그것과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라든지, 현재의 동아시아인들의 가치관 구조와의 관련성 등을 분석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두번째로는 논의의 주체성 문제이다.

이제 동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의 주체는 우리여야 한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의문을 던지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이 논의의 효율성 문제나 기타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 주도권을 갖고 재검토해 보아야 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그 과정에서 서구 학자들의 논의와 연구 결과를 참고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동아시아적 가치와 유교 자본주의론에 관한 논자의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동아시아적 가치에 속하는 요소에 대한 재정리가 필요한데, 논자는 이것을 크게 공동체 의식과 금욕적 도덕성의 두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공동체 의식의 차원은 물론 동아시아의 경우에 유교적 공동체와 불교적 공동체의 전통에 근거해서 형성된 것이고, 그것이 현재까지 가족과 회사, 연고적 공동체주의 등으로 남아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며, 불교보다는 유교의 영향이 더 크게 미쳐서 형성된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금욕적 도덕성의 경우에는 유교보다는 불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이 요소는 베버의 지적과 같이 청교도적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어떤 동아시아적 가치가 동아시아에만 있는가’가 아니라, 그런 가치가 동아시아에서 어떤 배경에서 형성되어서 현재 어떤 형태의 가치 체계로 남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기존의 논의는 대체로 ‘그런 가치가 동아시아에만 고유한 것인가’라는 점에 초점을 두거나, 그것이 동아시아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를 매우 피상적으로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와 윤리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개인주의적 전제란 상호간에 무지의 장막에 둘러싸인 ‘고립된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물질적 욕구 충족을 지상의 목표로 삼는 그러한 인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동아시아인들의 공동체 의식과는 상당 부분 긴장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그럼에도 동아시아적 가치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보는 것은 베버적 가설을 상당히 수정해서 수용하는 것이다.14)

즉 자본주의의 발전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적 요소와 밀접하게 연계되고 동시에 공동체적 의식과 연계되어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설 설정은 문화와 정치·경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보다 상위의 문제와도 연계되는 것인데, 어떻게 보든지 두 영역 사이의 연계성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고 단지 두 영역의 연계 구조가 어떤 양상을 띠는지를 놓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따름이다.

유교 자본주의론이나 아시아적 가치 논의는 그 중에서 문화적 요소가 정치·경제적 요소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적극적인 해석인 셈이다. 문화적 요소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인 해석은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 더욱 부각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문화는 정신적 영역뿐만 아니라, 물질적 영역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문화론적 관점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고, 동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도 문화 다원주의적 기반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적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전통은 과연 무엇인가? 문화적 요소에 대한 고려는 이러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더 나아가 이 전통이 서구화 과정 속에서 어떤 형태로 전환되어 현재에 존속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은 쉽사리 답해질 수 없는 거대한 담론으로 연결되고 말지만, 최소한 전통을 보는 우리의 시각조차도 서구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오리엔탈리즘적 비판에는 귀기울여야 한다. 개방성을 유지하면서 전통에 대한 살아 있는 접근을 통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 남아 있고 또 남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유교와 불교라는 두 산맥을 거쳐 가야만 한다.

그런데 유교 자본주의론은 그 중에서 유교에만 초점을 맞추고 오히려 동아시아의 전통 속에서 우리들의 심층적인 의식 구조의 더 많은 영역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불교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 결정적인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불교에 대한 주목은 특히 동아시아의 세 나라 중에서는 우리와 일본의 경우에 더 많은 적실성을 지닐 수 있을 만큼 현재에 살아 있다.15) 이 지역의 자본주의 발달에 관한 논의에서 불교적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이다.

동아시아론의 기원이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되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과정과 연계되어 있다는 역사적 분석에 주목해 보면, 그들이 일종의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에 사로잡혀 그랬든 아니면 소서구의식(小西歐意識)에 사로잡혀 그랬든 최소한 주체적인 자각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으며, 일종의 강박 관념과 타자화의 요구에 떠밀려 자신들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다는 과장된 의식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것이 동아시아 공영권론이다.16)

이러한 동아시아 공영권론의 서구적 변형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유교 자본주의론과 아시아적 가치론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중적인 타자화를 요구하면서 새로운 담론 체계로 밀려왔다가 이제 지적인 혼란만을 조성해 주고 나서 표류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가 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아예 이 논의를 우리의 지적인 담론의 장에서 추방해 버리는 것과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수용하여 주체적으로 재구성을 시도하는 것 사이의 선택이다.

논자는 두번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그 이유는 우선 이 논의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가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또한 적극적으로 수용할 경우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과 조화라는 화두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적 가치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분석에 앞서 반드시 그것을 형성한 배경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유교와 불교를 고르게 배려하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 동시에 우리의 정치와 경제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른 다양한 전통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고려해야만 한다.

2) 우리의 경제 발전과 불교적 전통의 연계성

일반적으로 불교는 경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속세의 일에 무관심하기를 가르치는 불교적 전통에 비추어 봐도 그렇고, 현재의 절들이 주로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현대적인 의미의 경제 생활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그러한 편견을 낳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 불교의 공통된 전통으로 남아 있는 선불교(禪佛敎, Zen Buddhism)의 경우에 경전공부보다는 참선을 통한 즉각적인 깨달음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수행에만 치중하고 기껏해야 최소한의 수행공동체만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실생활의 경제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런데 현대 한국인들에게 불교는 이면적인 세계에서는 지나치게 물질과 소유에 집착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잊을 만하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등장하는 스님들의 몽둥이와 피흘리는 모습은 무소유와 무아(無我, ana?man)를 강조하는 불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현실의 물질과 소유에 집착하는 듯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 주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17)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귀농운동을 주도하는, 일종의 대안 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한국불교의 희망을 보여 주고 있는 스님들이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 불교의 경우에는 단편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어떤 재벌 그룹의 회장이 불교에 귀의해서 스님이 된 다음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불교와 경제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의 모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동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에서 불교적 요소에 대한 경시는 기본적으로는 막스 베버의 불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불교의 구원론이 출가자에게 한정되어 있었으며 불교의 합리화는 오히려 세속 사회를 ‘마술의 정원’으로 남겨 놓게 되어 주술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은둔적 성격의 종교성을 결과했다고 해석하고 있다.18) 이러한 베버의 분석이 중국에 한정지어 이루어졌고 그런 한계와 오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불교가 동아시아인들의 의식 구조에 스며들어 있고 그것이 서구화 과정에서도 어떤 형태로든지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는 전거들은 많이 있다.

베버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현세의 덧없는 관습에 적응하는 것은 타락의 표시일 것이며, 유교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완성은 불경스럽게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 이상’이라고 동양적 종교와 대조적으로 파악한 청교도윤리는 바로 불교윤리의 핵심적 요소이기도 하다.19)

이러한 현실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서 결정적 영향을 발휘했다는 베버적 전제를 수용한다면, 동아시아 국가의 자본주의 발전에도 유교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영향이 더욱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가설도 충분히 성립될 수 있다. 불교윤리의 핵심은 연기(緣起)에 토대를 둔 동체자비(同體慈悲)의 구현이다. 이러한 동체자비의 윤리는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구별하지 않음은 또한 공(空)으로서의 자아관에 근거한 것이다.20)

이 윤리는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집착을 내지 않는 마음에 근거를 둔 무소유의 덕목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소유권 개념과 근본적인 충돌의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베버의 청교도윤리에 대한 분석과 유사한 맥락에서 본다면, 불교윤리가 동아시아적 금욕의 도덕성을 발전시키는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실제로 불교윤리가 자본주의와 만날 때 보여 주는 경제윤리로서의 모습을 슈마허는 ‘작은 것에의 지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21)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소비하고 나머지는 타인에게 기꺼이 내 줄 수 있는 자세는 소비적 자본주의와는 분명히 상충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적 자본주의 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이상과는 부합되는 것임에 틀림없고 이러한 자본주의가 동아시아의 문화 속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의 앞날을 보장해 주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22)

동아시아적 가치 논의에서 당연히 중시되어야 하면서도 실제로는 경시되어온 불교윤리에 관한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선 동아시아적 가치의 대표적인 두 덕목으로 꼽히는 공동체 의식과 금욕적 도덕성이 동아시아인들의 의식 속에 형성되는 과정에서,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적 가치의 구체적 내용들이 과연 고유성을 갖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교와 불교에서 지향하는 공동체가 기독교에서 지향하는 공동체와 본질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금욕적 도덕성의 경우에도 현세 지향적 유교윤리가 내세적이고 윤회적인 불교윤리에 흡수되면서 청교도주의의 금욕성과는 다른 형태로 정착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 주체적인 논의 지향의 과제―결론을 대신하여

우리 학계의 대부분의 논의가 그러하듯이, 동아시아적 가치와 유교자본주의에 관한 논의도 기본적으로는 수입품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다만 그 수입품이 우리 자신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과 그러다 보니 좀더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과 같은 경제 위기에 직면하여 단순한 이론이 아닌 현실적 차원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당위를 부여받고 있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양 또는 동아시아에 대한 모든 서구적 담론과 그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동양인들 스스로의 담론은 사이드의 지적과 같이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하고 있는 지금 이 논의도 역시 그러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 한계를 알고 접근하는 것과 아예 인식하지 못하고 그 보편성에만 집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많은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이 작은 논의에서 논자는 기존의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가 그 하위 범주에 속할 수 있는 동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와 구별되지 않은 채 전개됨으로써 몇 가지 점에서 불명료한 점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하면서 특히 기존 논의가 동아시아적 가치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두 배경 중에서 유교에만 주목하는 한계를 드러냈음을 밝혀 보고자 했다.

또한 서구의 논의들을 우리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수용하기보다는 기본틀을 우리의 상황과 꿰어 맞추는 방식으로 전개됨으로써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는 한계와 상황 변화에 대해 적실성 있게 대응하지 못하는 한계로 드러났음도 지적하고자 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이 논의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시아적 가치를 동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의로 한정짓고, 그것이 형성되는 배경과 현재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 남아 있는 전통적 요소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병행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 논의에서는 주로 전자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즉 동아시아적 가치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 의식과 금욕적 도덕성을 중심으로 이러한 전통적 요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불교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동시에 우리가 주목하고자 했던 점은 이러한 모든 논의가 과연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고 또 얼마나 적합한 것일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일이었다.

즉 동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라는 개념이 과연 가능하고 또 바람직한 개념인지에 대해 의심하면서도 공동의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불교와 유교를 공유하고 있고, 다른 측면에서는 서로간의 이익 충돌과 함께 상호의존적 무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한 현실 속에서 최소한의 유효성과 적합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입장을 선택하고자 했다.

다만 이러한 입장은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적 확산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비판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통과 현대, 또는 서구화 사이에서 야기된 중첩된 혼란을 윤리와 가치관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고 있다. 이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동양학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서구인들이 부여해 준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소위 ‘객관화되고 보편적인’ 지식과 만나야만 비로소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오리엔탈리즘이 축적한 지식의 양과 질이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체성 있는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주체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적 과제이다. 주체성은 모든 의존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런 의존 속에서 우리 자신의 관점과 문제 의식을 잃어 버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동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서구인들의 논의가 갖고 있는 한계를, 그 논의의 객체이면서 동시에 주체이기도 한 우리들의 체험과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비판적으로 극복해내는 과정을 통해 우리들의 담론이 재구성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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