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와의 비교적 관점에서

1. 서언

티베트 불교가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달라이 라마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큰 작용을 한 것이다. 티베트라는 나라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오지라는 점에서 신비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정치적 지도자와 정신적 지도자가 한 인물이라는, 현대판 신정(神政)정치라는 점이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티베트 인들의 불교의식 때문이다. 영웅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 영웅을 지지해 주는 민중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지도자를 지지하고 존경할 만큼 민중의 의식이 성숙하지 못하다면 그 사회에는 정신적 지도자가 나타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고 개탄하는 것은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민중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인물의 훌륭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하고 존경하기보다는, 잘난 사람을 짓밟아 버리려는 질투심이 팽배한 사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교의 인과관계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질투심 대신에 존경심을 가질 것이다. 전통적인 불교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고, 인구의 절반이 불교도라고 자랑하는 한국에서 불교도의 반만이라도 인과법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사회가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인해 살벌하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티베트 인들은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 전생에 쌓은 선업의 결과라고 보고 존경하며, 그 사람이 사회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긴다. 거기에 질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여기고 존경하며 그를 따른다. 만일 우리 사회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신비감을 풍기기 위해 주변환경을 관리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별대접을 받으려고 온갖 수단을 쓸 것이다. 물론 주위의 사람들도 그를 떠받들며 복을 빌 것이다.

우리의 이런 잣대로 티베트 인들의 사고를 가늠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달라이 라마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는 것은 중생을 돕기 위해서 관세음보살이 화현했다는 의미이다. 중생에게서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윤회에 동참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모든 수행자들에겐 이런 봉사정신이 철저하다. 그들이 수행하는 목적은 깨달음을 얻어서 중생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할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생을 돕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수행은 의미가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수행한다. 그 사명감은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자비심에서 우러나온 사명감이다.

생사를 거듭하며 고통을 받는 중생의 처지를 살펴보니, 과거의 어느 전생에선가 내 부모가 아니었던 중생이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제 살조차 아끼지 않고 베어 먹일 수 있는 사랑으로 자식을 보살핀다. 그렇게 친절을 베풀었던 부모가 고통스러운 윤회를 헤매는 것을 보면 자비심이 일어나 그들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그러나 그런 소망을 갖고 있더라도 윤회에서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하면 실제로 그들을 안내할 방법이 없다. 우선 붓다의 경지에 이르러 전지(全知)를 얻으면 중생의 근기에 맞춰 인도할 방법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중생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붓다의 경지를 얻으려고 수행하는 것이다.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서 붓다의 경지에 오르자 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부른다. 티베트 불교 수행은 그런 보리심으로부터 시작된다.

2. 왜 출가를 하는가

출가의 동기는 수행에 매우 중요하다. 번잡한 세간사를 떠나기 위해서 출가하는 것은 어느 불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어떤 사회에서는 출가하는 것을 현실도피나 책임회피로 생각하여 부끄럽게 여기고, 어떤 사회에서는 훌륭한 목적을 가진 축복된 일로 생각한다. 그런 의식들이 출가승들의 수행 환경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한국불교의 대부분의 출가자들은, 출가자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니 세속 식구들과의 인정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식구들을 만나도 반가운 척을 하지 말아야 하며, 어머니를 보살님이라고 부르고, 아버지를 처사님이라고 부르며 애써 남처럼 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게 모든 중생과의 사적인 정을 끊어 가는 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중생을 공평히 대하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특별한 정을 끊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나를 낳아서 온갖 궂은 일을 해가며 키워준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한 마음을 끊어버리고 어떻게 다른 중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지 의심스럽다.

부모에 대한 정마저 끊어버린 메마른 가슴에 어떻게 중생에 대한 자비로움이 생길 것인가. 현재의 내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알고 나면, 전생의 언젠가 내 부모였을 모든 중생에 대한 고마움을 실감할 수 있고,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그들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야겠다는 각오가 생기게 된다. 현재의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도 버린 사람이 어떻게 전생의 부모들의 고마움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겠는가. 여기서 한국불교의 출가자들과 티베트 불교의 출가자들의 마음 자세가 구별된다. 티베트에서는 자식이 출가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어서 중생을 해탈로 인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광으로 여긴다. 설령 그런 소망이 아직 불분명하고, 그저 스님들이 좋아서 출가했다거나 불교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부모가 자식을 출가시킨 경우에도, 출가한 후에 그런 출가의 의미를 철저히 가르쳐 가슴에 새기게 한다.

그런 생각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출가자를 존경하며, 그들의 수행을 돕는 것을 공덕으로 여긴다. 출가자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사원을 방문해서 출가자의 사기를 북돋워 준다. 출가자는 중생들과의 연대감을 확인하고, 가족들은 출가자의 출가 목적을 환기시켜 준다. 가족에 대한 사적인 정 때문에 수행에 소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구체적인 중생들의 고마움과 그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중생 전체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만일 가족들이 출가자를 여전히 자기들의 식구로만 생각할 정도의 의식을 지녔다면, 출가의 의미는 중생 구제라는 큰 뜻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 인들은 출가자든지 재가자든지 불교를 이해하는 수준이 매우 높다. 훌륭한 수준의 출가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것은 훌륭한 재가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티베트 사회는 입증하고 있다. 티베트 인들의 기도는 “어머니인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서 제가 깨달음을 얻게 해 주십시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티베트 인들은 문맹인 경우에도 기본적인 기도문들을 암송할 수 있다. 어릴 적 할머니 등에 업혀 잠들 때부터 항상 들어왔던 노래가 기도문이거나 불경이기 때문에 티베트 인들은 스스로를 핏속까지 불교도라고 표현한다. 모든 중생이 어머니라는 것과 그들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 티베트 인들의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 출가자들이 속가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출가자들은 속가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방문하면 그들에게 불교를 설명하고, 재가자의 수행을 돕는다. 가족들은 출가자가 머무는 사원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을 당연시하며, 자신들과 개인적인 관련이 없는 사원이라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것을 공덕으로 여긴다. 그래서 티베트 사회에서는 한국 사찰과는 다르게 출가자들이 돈을 많이 내는 시주자의 비위를 맞추며 더 많은 돈을 끌어낼 궁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사원이 번성해야 출가자들이 경제적 고난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으며, 출가자가 수행을 잘해야 사회의 정신이 올바로 인도된다고 생각하는 재가 불교신도들이 사원의 경제를 후원한다. 게다가 한 사람의 출가자도 배출하지 않은 티베트 가정은 거의 없기 때문에 사원은 재가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재가자들은 가족을 보살피듯이 사원을 후원한다.

사원을 후원하되 현명하게 보살펴야 된다는 것을 재가자들은 잘 알고 있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공통적으로 최상의 보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이다. 출가자로서는 수행하는 데 필요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식이 필수적이며 재가자로서는 먹고 나면 형체가 사라지는 음식을 보시했기 때문에 보시 받은 물질에 대한 집착이 생길 염려도 없다. 깊은 산중의 토굴에서 홀로 명상하는 수행자가 있으면, 근처의 마을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음식을 문 밖에 놓아두고 내려온다. 누가 가져왔는지 밝혀 공덕을 드러내는 데 수행자의 시간을 뺏거나 수행을 방해하는 것은 죄라고 티베트 인들은 생각한다. 무주상보시를 하면서 공덕을 쌓는 것이다.

호사스런 음식이나 옷을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수행자를 타락시킬 수 있으므로 보시를 하는 사람이나 보시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 조심한다. 어떤 종교든 출가자들은 청빈해야 한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없애지 않으면 정신적 탐구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출가자들은 물질적인 생산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할 것을 각오하고 출가해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부터 출가자들이 음식을 탁발해서 먹고, 무덤가에 버려진 천들을 모아서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은 세속인들에게 물질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정신 세계를 탐구하려는 당당한 태도였다. 그렇게 청빈하게 사는 수행자들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들의 수행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음식을 바쳤다. 대개는 수행자에게 돈과 물질이 풍부하면 정신적인 탐구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출가자가 사회사업을 하는 경우라면 돈과 물질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돈과 물질을 관리하는 일은 세속인이 맡아서 할 일이지 출가자의 본분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부유한 신도의 무책임한 보시와 그것을 묵인하거나 부추기는 출가자의 행태가 한국불교 사찰을 청빈과 멀어지게 했다. 불교를 이용해서 축재하는 출가자들이 이따금씩 사찰 쟁탈전을 벌여서 한국 불교에 먹구름을 끼게 하는 것은 멍청한 신도들과 교활한 일부 승려들의 합작인 셈이다. 승가와 재가자의 상호협조의 태도나 내용에 따라서 결과는 발전과 퇴보의 양극단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티베트 불교와 한국불교의 두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티베트의 재가불자들은 출가 수행자를 맹목적으로 떠받들지는 않는다. 티베트 인들은 대체로 불교의 기본교리를 알고 있으며, 어떤 것이 올바른 수행의 길인가에 대해서 법문을 들을 기회가 많다.

티베트에는 사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사원은 티베트 인들의 생활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원이 많은 만큼 법문을 들을 기회도 많다. 재가자들이 올바른 출가자의 행동을 판단할 기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출가자들이 본분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존경받을 수가 없다.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에게서 물질적인 필수품들을 제공받아 수행에 전념할 수 있으므로 재가자들을 고맙게 여기고, 정신적인 면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불법을 가르친다. 재가자들은 중생의 해탈을 도우려는 목적으로 수행하는 출가자들을 존경하며 물질적으로 후원한다. 이렇게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상호보완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출가자들은 출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재가자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기적인 세속사에 얽매여서 번뇌를 많이 일으키고 죄를 지을 기회가 많은 재가자들보다는 물질적인 욕심이 없이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자들 중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재가자들은 출가자들을 존경한다. 반면, 재가자들이 세속에 살면서 수행에 방해되는 환경을 극복하면서 수행하는 것이 오히려 강력한 수행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의 수행을 존경한다.

다시 말하면, 출가자나 재가자나 모두 함께 불교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티베트 사회에서는 이렇게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걸쳐 불교 수행을 장려하는 힘이 강하다. 서로를 동등하게 여긴다면 서로를 무시할 거라고 오해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모두가 불성(佛性)을 갖고 있고, 그 불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어떻게 남들을 무시할 수가 있겠는가. 귀한 집 자식은 밖에 나가서도 귀한 대접을 받게 마련이다.

불성을 가졌으면 부처님 가문의 자식이니, 그 자식들이 부처님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윤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 모두를 미래의 부처님으로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 생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런 경험을 통해서 번뇌를 정화하고, 공덕을 쌓고, 불성을 개발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티베트 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남들에게 건전한 도움을 주는 것이라면 직업에 귀천을 두지 않는다. 티베트 불교 출가자는 계율을 지켜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재가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재가자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잘 수행하도록 보호한다.

한국 사회에서처럼 승려와 재가자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상하의 예의를 지나치게 엄격히 지키는 일은 티베트 사회에는 없다. 물론 달라이 라마와 같은 고승들 앞에서는 승려나 재가 신도들이 자연스런 존경심 때문에 저절로 허리를 굽혀 합장하며 절을 한다. 달라이 라마도 다른 고승들 앞을 지나갈 때면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다른 고승들은 더 깊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완성된 수행자일수록 겸손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가 신도들이 고승들을 방문하기도 쉽다.

고승들은 불교 수행의 결과를 보여주는 예들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그 예들을 보면서 수행에 대한 열망을 키우고, 수행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수행에 필요한 것들을 후원하고 싶어한다. 고승들은 출가자와 재가자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동등한 제자로 취급한다. 재가 신도들이 고승들을 뵐 때는 집안의 대소사를 하소연하고 푸념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재가자들은 자신들이 세속적 탐욕과 번뇌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고승들이 지도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지, 자신들의 세속적 탐욕을 성취시킬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의식들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 인들은 사소한 집안 일로 고승들을 번거롭게 하거나, 수행하는 시간을 방해하면 오히려 자신들이 더 많은 무지를 쌓는다고 생각하고 피한다.

결국 수행승들이나 신도들이 스스로를 동등하게 불성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인정해야만 자신을 존중할 수 있고,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상대방을 존중해줄 수 있다. 불교는 모든 사람의 불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당당하게 만들어 준다. 비록 지금은 무지와 번뇌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밖으로 드러남으로써 병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 그 병을 없애면 지혜가 드러날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과 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삶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번뇌를 정화해감으로써 부처님의 경지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중생이 완성을 향해서 길을 가고 있는 도중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불제자들은 서로가 동등할 수밖에 없다.

3. 무엇을 위해 수행하는가

1) 수행의 회향처는 어디인가

사회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며, 불교의 수행이 어떻게 회향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과학이 현대의 물질문명을 이끌어가는 속도만큼 불교가 사회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할 수 없다면 불교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찰에서 행해지는 형식적인 의례나 특정 문화의 옷으로 포장된 전통불교문화를 답습·고수하려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불교는 일종의 문화상품으로 전락하고 일상생활에서 사라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마음의 번뇌를 없애고 평화를 찾으려는 것일 뿐, 불교의 의례나 문화적 관습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불교 본래의 취지를 잊지 않고 지킨다면 불교는 인류가 살아 있는 한, 인간 관계를 잘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불교를 통해 무엇인가 눈에 띄게 생색이 나는 물질적 성과를 보여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개발시키기 위해 긍정적으로 노력하며, 다른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중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불교는 인류의 정신계를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존재로 남아 있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타종교의 왕성한 종교활동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한국의 불교종단은 사월초파일에 거창한 연등놀이를 하여 불교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신도들을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연등행사의 규모는 커져만 간다. 그날 하루 연등 행렬을 하기 위해서 수개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수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 수많은 연등이 만들어진다. 연등을 만드는 데 소모된 엄청난 양의 종이들은 초파일이 지나고 난 뒤에는 종이 쓰레기로 변하고, 연등 행렬의 흥분과 설레임은 큰 종파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조금 있겠지만, 불교도로서의 자부심이 진정 무엇인가를 되새겨볼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필자에게는 한국의 거창한 연등행사가 교세를 유지하려는 안간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연 부처님 오신 날, 한국의 불자들은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 또 모든 중생을 위해서 불교가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불교가 존재해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새겨보는 것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셔서 제자들에게 진리의 길을 안내해 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축하하는 것이 석탄일의 참뜻일 것이다. 부처님이 오신 것을 왜 축하해야 하는지,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사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연등 켜고, 북적대는 절에 가서 소풍 온 기분으로 즐겁게 먹고, 축원카드를 읽어준 것만으로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 다음 날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일상생활로 돌아오고 마는 초파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초파일 하루만이라도 긴장을 풀고 놀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부처님의 자비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겐 할 말이 없다. 진지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성향에 아부하려는 사람들이 종교를 가벼운 위안거리로 변질시켜가고 있다. 종교는 진지한 것이다. 심각하게 인상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지하게 종교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종교 본래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

티베트 인들은 부처님 오신 날과 성불한 날과 열반한 날을 같은 날로 정했다. 부처님이 정말 역사 속의 어느 날에 태어나셨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탄생일을 추정해서 기념한다. 티베트 인들은 음력 4월 15일을 탄생일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그들은 연등행사를 하지 않는다. 다른 거창한 기념행사도 없다. 오히려 그날은 개인적인 수행을 맘껏 하는 날이다. 4월 14일 밤부터 사람들은 탑돌이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절을 하든지, 진언을 하든지, 명상을 하면서 밤을 지새운다. 15일 새벽에는 고승이 주도한 가운데 법회를 열고, 부처님이 수행하셨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날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단식을 하며 수행하기로 서약한다. 법회가 끝난 후에는 모두 각자가 알아서 하루 종일 수행하는 일로 보낸다. 절에서 특별히 하는 법회는 없다. 이날 하루는 모두가 부처님의 경지를 향해서 수행에 몰두하는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묵언하고, 세속적인 관심에서 벗어난다. 세속인들도 출가인들도 모두 자신들의 불성에 대해서 숙고하고, 자신들이 윤회 속에 있지만 수행의 길을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부처님 탄생일과 성도일과 열반일을 하루에 다 모아서, 그날은 철저히 부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하고 수행하는 날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 다음날에 이어지는 세속 생활에도 의식의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티베트 인들이 불교를 수행하는 동기 자체가 남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서 부처님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불교는 사회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회가 불교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면 요란하고 화려한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불교정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2) 수행은 출가자의 전유물인가

보통 사람들은 수행자라고 하면 세속을 벗어나 출가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물론 그들은 세속에 얽매인 사람들보다는 많은 시간을 전적으로 수행에 종사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야 하는 일이 그들만의 과제는 아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 수행은 출가자나 재가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경우, 대부분의 출가자나 재가자들은 수행을 출가자의 전유물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구태의연한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이 불교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알음알이만 있고 지혜는 없으면서 감히 출가자들과 맞먹으려고 한다고 비난한다. 반대로 불교 교리에 대해서 박식하다고 자처하는 일부의 재가자들은 출가자들이 지식도 없고 수행력도 없으면서 권위만 내세운다고 비난한다. 이런 현상은 중생 모두가 윤회에서 벗어날 과제를 동일하게 안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고무적인 사실은 요즈음 대도시에서는 포교원이나 불교 교양대학이 많이 세워져서 교리를 잘 아는 신도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재가 불자들의 수행활동도 활발해졌다. 지방 신도들에게도 활발한 불교 교육의 혜택이 주어질 수 있다면 한국 불교계는 건설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지식이 불교의 지혜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불교에 대한 지식을 얻는 목적도 그 지식을 사용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티베트 인들이 불교를 수행하고 공부하는 것은 지식의 습득보다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생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목적이다. 이렇게 수행의 목적이 중생들을 돕기 위한 것이므로, 불교 수행에 필요한 지식은 남을 도울 수 있게 만드는 방편일 뿐,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소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지식을 얻었다고 자만심을 갖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우월감을 행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간주된다. 지식은 수행을 돕는 도구일 뿐이므로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은 말장난에 불과하며 쓸모 없는 것이다.

그래서 티베트에서는 불교 지식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존경받지만 지식만을 모아서 말장난하는 사람들은 설자리가 없다. 불교의 지식을 수행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거나 생계수단으로 삼는 나라에서는 학술 세미나는 빈번하게 열리고 말장난은 무성하지만,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안내할 수 있는 지혜가 나오지는 않는 것 같다. 한국불교는 출가자를 우월하게 여기고, 재가자를 열등하게 여기는 풍토를 암암리에 심어 왔다. 계율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과 생각을 통해서 도덕적인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많은 계율을 지키는 사람일수록 부도덕한 행동을 피하고 덕을 쌓을 기회가 많아진다.

덕을 많이 쌓으면 지혜를 쌓기가 쉬워진다. 공덕과 지혜의 두 날개를 온전히 갖추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많은 계율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수행력이 강화되어 깨달음을 얻기가 쉬워진다는 말이다. 계율을 지키며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한국불교의 기반을 부패시키고 수행을 약화시키고 있는 원인 중의 하나는 이런 근거 없는 우열의식이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모두 해탈을 향해 가는 수행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수행하는 과정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자비심을 일으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세속에서나 출세간에서나 모두 할 수 있는 수행이다. 세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사물과 사태에 대해서 자비심을 일으키려고 노력할 수 있다. 자비심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을 세속생활에서도 할 수 있다. 다만 세속에 살면 수행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수행하기가 출가 수행자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기 쉬운 편의를 위해서 출가를 한다.

출가와 재가는 수행상의 편의나 방법에 관한 문제이지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을 구분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 인들은 출가자나 재가자들이나 모두 겸손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서로의 수행에 도움을 준다.

4. 티베트 불교와 한국불교 수행의 특징 비교

이제는 티베트 불교 수행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한국불교의 상황과 비교해보려고 한다. 티베트 불교의 장점 중의 하나는 ‘람림’이다. 람(lam)은 길이라는 뜻이고, 림(rim)은 단계라는 뜻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단계들을 ‘람림’이라고 표현한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인 람림의 전통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11세기에 티베트에 온 인도의 고승 아티샤로부터였다. 아티샤는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티베트 승려 장춥외의 질문에 대해서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이라는 책을 써서 대답했다.

《보리도등론》에는 수행하는 마음자세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하급의 마음자세를 가진 수행자는 내생에 좋은 환경에 태어나려는 목적으로 수행한다. 중급의 마음자세를 가진 수행자는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수행한다. 상급의 마음자세를 가진 수행자는 윤회하는 모든 중생들을 해탈시키려는 목적으로 수행한다.

각 중생에 따라서 이 세 가지 마음자세 중 하나를 타고난 것이 아니라, 각 중생이 그 세 단계를 모두 거치는 것이다. 이 세 등급의 수행은 처음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가 차례로 밟아가야 할 수행의 단계들을 설명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세 등급으로 나누어 단계적인 수행을 설명한 저술 형식이 후대에 계속 쓰여지면서 티베트의 모든 종파에는 ‘람림’이라는 수행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람림 수행에서는 초보자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불교 수행의 기본은 듣고 생각하고 명상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듣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한 다음에 명상함으로써 우리의 내면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는 가르침을 듣고 생각하고 명상하는 단계를 계속해야 한다. 한국불교의 경우, 마치 화두선(話頭禪)이 수행의 전부인 것처럼 출가자에게 참선에 대한 것을 주로 가르친다. 조사 스님이 남긴 참선에 관한 어록을 읽는 것이 강원교육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강원은 화두선을 참구할 마음을 일으키는 준비과정과 같은 역할을 한다. 육도윤회나 인과법 같은 것은 너무 기본적인 이론이어서 거론할 필요도 못 느끼는 듯하다. 그러나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의 참상에 대해서 절실히 생각해보지 않고 인과법을 확고히 믿지 않는다면 어찌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는 자비심이 일어날 것이며,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자비심과 성불의 확신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은 수행은 나아갈 방향도 모르면서 이리저리 달려가는 사람과 같다. 게다가 참선을 시작하고 나면 알음알이를 버린다는 구실로 경전이나 서적을 읽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과연 수행자들의 근본 지혜를 밝혀내는 지름길이 될 것인가. 누구나 그렇게 분별망상을 단번에 뚝 끊고, 분별심 없는 근본 지혜를 드러낼 수 있는 최상근기일까. 수행은 자신을 솔직히 분석하고 인정하는 겸손에서 시작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을 통해서 설명하고, 몸으로써 행동에 옮기고, 마음으로써 생각하는 예를 보이는 사람이 현재의 스승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스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스승 없이 수행하는 사람은 불교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빗나가기 쉽다.

한국에서는 저마다 큰스님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은 많은데도 스승 없는 현실을 개탄하는 소리가 높은 것은 남을 스승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거만함 때문에 스승의 중요성을 모르고 수행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초급의 마음 자세를 가진 사람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죽음에 대해서 명상한다. 그 다음에는 삼악도의 고통에 대해서 명상한다. 지옥과 아귀와 짐승들의 세계에서 받는 고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을 때가 수행하기에 가장 적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윤회의 고통이 두려워지면 삼보에 귀의할 마음이 생긴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귀의의 대상인 불·법·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찰한다. 그 다음에는 윤회의 원인인 업에 대해서 고찰한다.

업의 법칙을 이해하면 다음 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선업을 쌓아야 하므로 계율을 지키게 된다. 중급의 마음 자세를 가진 사람은 윤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 때문에 개인적인 해탈을 구하고, 해탈을 가져오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고집멸도의 사성제에 관해 명상한다. 그 다음에는 윤회를 거듭하면서 동반되는 고통에 대해서 숙고한다. 그 다음에는 윤회의 주원인인 번뇌의 성격과 종류를 고찰하고, 번뇌가 업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고찰한다. 그리고 죽음과 중음신(中陰身)과 환생의 과정에 대해서 명상한다. 그 다음에는 인과법과 십이연기법에 관해서 고찰한다. 그 다음에는 해탈을 얻기 위해서 계·정·혜를 닦아야 한다. 상급의 마음 자세를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해탈을 구하는 마음에서 수행한다.

중생들의 상이한 기질에 맞는 적합한 방법으로 그들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고 싶어한다. 그런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중생들의 고통을 참기 어려워하는 자비심에서 나온다. 보리심이 일단 일어났으면 그것을 발전시켜야 한다. 우선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전생에 내 어머니였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내게 베풀었던 친절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중생 모두에게 애정을 느끼며, 그들 모두가 고통스런 윤회에서 벗어나서 평화로운 해탈을 얻기를 바라는 자비심을 기른다. 그 다음에는 실제로 보리심을 실천하는 수행을 한다. 나의 행복을 다른 중생들에게 바치고, 그들의 고통을 내가 대신 떠맡는다고 상상하는 수행과 나보다 남을 더 소중히 여기는 생각을 기르는 수행을 한다.

그 다음에는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해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의 육바라밀을 닦는다. 각 단계를 확고히 수행한 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에 수행자는 자신이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수행의 단계들을 마쳐서 공덕과 지혜의 양 날개를 갖춘 후에는 탄트라 수행을 하라고 권고한다. 탄트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성과 연기법에 대해서 확고히 이해한 사람이 이 생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즉시 얻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다. 강력한 수행인 만큼 위험도 크다. 탄트라 수행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통력을 보이거나 남들보다 빨리 성취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이 윤회에서 고통받는 것을 오래 두고 볼 수가 없다는 자비심이다.

이 생에 즉시 깨달음을 얻어서 중생들을 빨리 돕겠다는 염원 때문인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수행 수준이 높은 것은 민중들이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불교에 접근했을까. 티베트에 불교가 국교로 정해진 8세기 중반에 띠송데짼 왕은 국가가 관리하는 번역청을 만들었다. 이 번역청에서는 당시에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 불교경전들과 중국에서 가져온 한역 경전들을 티베트 어로 번역했다. 산스크리트 경전을 티베트 어로 번역한 사람들은 인도 출신의 고승들과 인도에 유학해서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한 티베트 인들이었다.

정부에서는 산스크리트를 티베트 어로 번역하는 모범용례책을 만들어, 정확하게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하게 했다. 만일 그 모범에 맞지 않게 자의적으로 번역한 책이 나오면 국가에서 그 책을 압수해서 없애 버렸다. 그렇게 정확한 기준에 맞춰서 철저한 감독하에 산스크리트 경전들을 티베트 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티베트 어 번역본을 산스크리트로 거꾸로 번역해서 잃어버린 산스크리트 경전을 복원하는 경우들도 있다.

불교가 티베트에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8세기 때부터 티베트 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된 불교경전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일상어로써 불교를 익힐 수 있었기에 불교교리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가 있었다. 티베트의 불교는 처음부터 지식인들이 독점하는 어려운 언어로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알고 믿는 불교가 될 수 있었다.

민중이 알고 믿는 불교이었기에 불교는 민중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 점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지 1천6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한국인은 여전히 어려운 한문에 이렇게 저렇게 해석을 달아가며 불교를 이해한다. 일반 신도들은 한문 경전을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일반 신도들이 맹목적인 불교도가 되기 싫다는 생각으로 불교 교리 공부를 시작하면, 깊이 들어갈수록 어렵고 모호한 한문용어에 부딪히고 좌절하기 십상이다. 우리 말로 된 불교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한문을 알아야만 불교 교리를 깊이 공부할 수 있는 이 풍토가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인가? 대중이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복이나 비는 들러리의 상태로 남아 있고 불교의 교리는 지식인들의 말장난 거리로 남겨둔 채로 방치한다면 한국불교는 퇴출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려면 대중들이 우리 말로 정확히 표현된 불교의 가르침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로 쓰인 불교가 아니라, 쉽고 정확한 용어로 표현된 불교가 필요하다. 그런 작업을 몇몇 사찰이나 개인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실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를 정확히 이해한 수행자와 연구자들이 범불교적으로 토의해서 공통된 용어로 번역해서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5. 맺는 말

‘붓다는 중생을 해탈하게 하고, 보리심은 붓다를 만든다’고 한다. 성불의 실제 원인은 보리심이다. 성불의 유일한 목적은 중생들을 해탈하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리심을 가진 사람은 성불에 필요한 공덕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겠지만, 보리심이 없으면 수행을 지속할 수가 없다.

한국불교의 수행 풍토에서 가장 미비한 점이 보리심의 결여가 아닐까 싶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말은 한국 사찰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선 상위의 깨달음을 얻고, 다음에 아래로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식의, 상하관계나 우열관계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생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어야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중생을 도우려는 마음과 깨달음을 구하는 노력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이타적인 동기와 이기적인 동기의 차이가 수행자들의 수행에 성공과 실패라는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날 때까지 돕기 위해서 자진해서 윤회 속에 남겠다는 서원을 세운 존재이다. 그 훌륭한 보살이 자기 생명처럼 아끼는 중생을 범부가 우습게 본다면 얼마나 주제넘은 일이겠는가.

출가자든 재가자든 번뇌에 찌든 중생이긴 마찬가지다. 보살은 그런 모든 중생들을 자식처럼 아끼며 도우려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출가자든 재가자든 모두가 보살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자식들임을 인식하고, 서로 돕는 형제들의 마음으로 수행해야 할 것이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졸업.동국대 인도철학과 석사.인도 델리대학 불교학 박사.역서로 <인도불교사상사><해방자 붓다 방항자 붓다><행복의 열쇠><아름답게 사는 지혜><쉽고 깊게 읽는 불교입문><삶의 네가지 진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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