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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법통설의 형성과정과 문제점
박해당 서울시립대 강사
[3호] 2000년 06월 10일 (토) 박해당 서울시립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1,600여 년에 걸친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이 ‘대한불교 조계종’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조계종은 어떠한 종단인가, 조계종의 종지는 무엇이고, 종통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제기된다.

그리고 현재 교단과 학계를 망라하여 첨예한 견해의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종통 또는 법통에 관한 것이다. 먼저 1994년 9월 29일자로 공포된 조계종의 종헌에서 종지 및 법통과 관련하여 밝히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宗憲 前文

恭惟컨대 我 宗租 道義國師께서 曹溪의 正統法印을 嗣承하사 迦智靈域에서 宗幢을 揭揚하심으로부터 九山門이 列開하고 五敎派가 竝立하여 禪風敎學이 槿域에 彌漫하였더니 麗朝의 衰微와 함께 敎勢가 不振하려 할새 太古國師께서 諸宗을 包轄하사 曹溪의 單一宗을 公稱하시니 이는 我國佛敎의 特色인지라 世界萬邦에 자랑할 만한 事實이어니와 我宗은 朝鮮朝 5百年의 排佛毁釋의 政治的 法難에도 不撓不屈하고 縣絲의 慧命을 嗣續하면서 定慧雙修와 理事無碍를 提高하며 大乘佛敎의 成佛度生을 實踐하여 온 것이다. 爾來 宗名을 公稱하고 宗憲을 制定하여 戒法을 尊崇하고 理判을 推奬하여 內로는 正法眼藏을 秘傳綿綿케 하고 外로는 度生門戶를 豁開하여 敎化活動을 向上케 하니, 禪敎竝彰이 從此而始라 하겠다. 8.15 光復後 宗團의 淸淨과 僧風을 振作하려는 宗徒들의 願力에 의해 佛紀 2498(1954)年 淨化運動이 일어나 自淨과 刷新으로 마침내 宗團의 和合이 이룩되어 佛紀 2506(1962)年 3月 22日 宗憲을 제정하고 統合宗團이 出帆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敎團의 淸淨性과 三寶 護持의 基本틀이 다져지고, 修行衲者의 家風이 振作되었으며, 布敎와 伽藍佛事에 힘을 기울여 韓國 佛敎는 유례없는 敎勢 擴張을 이루었다. 그 후 敎團에 닥친 몇 차례의 法難을 극복하고 宗團 改革에 대한 宗徒들의 輿望에 副應하여 改革會議가 出帆하게 되었다. 이에 改革會議는 宗團 改革에 필요한 各種 措置를 취하고, 佛法이 衆生敎化의 萬代指針이 되며 敎團이 修行과 傳法의 永劫基壇이 되도록 宗憲을 改正하였으니, 宗徒 大衆은 民族統一과 文明史의 새로운 흐름에 對備하고 宗憲의 큰 뜻을 받들어 實踐하여 이 땅의 佛日을 萬古에 빛나게 하고 三寶를 法界에 流傳케 하라. 삼가 佛祖의 加護 밑에 우리 法孫 萬代의 向上과 繁榮을 빌며 이 憲章을 改正 公布하노라.

第 1 章 宗名 및 宗旨

第1條 本宗은 大韓佛敎 曹溪宗이라 稱한다. 本宗은 新羅 道義國師가 創樹한 迦智山門에서 起源하여 高麗 普照國師의 重闡을 거쳐 太古 普愚國師의 諸宗包攝으로서 曹溪宗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宗脈이 綿綿不絶한 것이다.
第2條 本宗은 釋迦世尊의 自覺覺他 覺行圓滿한 根本敎理를 奉體하며 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함을 宗旨로 한다. 第3條 本宗의 所依經典은 金剛經과 傳燈法語로 한다. 其他 經典의 硏究와 念佛 持呪 等은 制限치 아니 한다.

第 2 章 本尊, 紀元 및 嗣法 第4條 本宗은 釋迦牟尼佛을 本尊佛로 한다. 다만 종전부터 釋迦牟尼佛 이외의 佛像을 本尊으로 모신 寺刹에 있어서는 그 慣例에 따른다.

第 5 條
① 本宗은 釋迦牟尼佛의 紀元을 檀紀 1789年(西紀 紀元前 544年)으로써 起算한다.
② 佛敎가 우리나라에서 公認된 紀元을 檀紀 2705年(高句麗 소수림왕 2년)으로써 起算한다. 第6條 本宗은 新羅 헌덕왕 5年에 曹溪 慧能祖師의 曾法孫 西堂 智藏禪師에게서 心印을 받은 道義國師를 宗祖로 하고, 高麗의 太古 普愚國師를 重興祖로 하여 以下 淸虛와 浮休 兩法脈를 繼繼承承한다. 第7條 本宗의 法脈相承은 師資間의 入室面授 또는 傳法偈의 授受로써 行한다.

위와 같은 종헌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조계종은 실질적으로 한국불교의 다양한 전통을 포괄하고 있는 종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의로부터 청허, 부휴로 이어지는 선사들의 법맥을 제시함으로써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법계에 대한 규정 또한 지금까지 제기된 법통설을 포괄적으로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아야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종조를 둘러싼 논쟁이 크게 일어난 시기는 1930, 40년대이다. 이 시기에 제기된 법통설을 보면 대략 한암(漢巖)이 주장한 ‘도의종조설(道義宗祖說)’과 임석진(林錫珍)이 주장한 ‘범일종조설(梵日宗祖說)’, 그리고 법통논쟁의 실질적인 양대산맥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보조종조설(普照宗祖說)’과 ‘태고종조설(太古宗祖說)’의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종헌의 규정은 도의종조설과 보조종조설 및 태고종조설을 절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종헌의 이러한 포괄적인 규정에도 불구하고 ‘보조종조설’과 ‘태고종조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조계종의 종정을 지낸 성철(性徹)의 경우 태고종조설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조는 물론이려니와 도의조차도 조계종의 법계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원택, 〈후기〉 《韓國佛敎의 法脈》 389쪽)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글에서는 조계종의 법통에 대해 이처럼 서로 대립적인 견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인맥을 밝히는 차원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인식 아래 이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2. 여러 가지 법통설의 형성 과정과 문제점

법통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조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서산대사 휴정의 법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여기에서는 먼저 휴정 스스로 밝힌 법계와 그의 사후 제기된 나옹법통설(懶翁法統說), 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제기된 보조법통설(普照法統說)의 순서로 각각의 주장을 알아보고, 그것이 가지는 문제점을 살펴보겠다.

1) 휴정이 밝힌 법통

휴정은 생전에 자신의 법계를 밝힌 적이 있다. 1560년에 지은 〈벽송당대사행적(碧松堂大師行蹟)〉과 1568년에 지은 〈경성당선사행적(敬聖堂禪師行蹟)〉의 발문(跋文)에 실려 있는 것이 그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사의 법휘는 지엄(智嚴)이고 호는 야로(좝老)이며 거처한 집은 벽송(碧松)이다.

    (중략) 먼저 연희교사(衍熙敎師)를 찾아가 원돈교의(圓頓敎義)를 물었고, 다음으로 정심선사(正心禪師)를 찾아가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은밀한 뜻을 격발하여 현묘한 뜻을 함께 떨쳤으니 깨달음에 이익되는 바가 많았다. 정덕(正德) 무진(戊辰)년 가을에 금강산 묘길상에 들어가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에 의심을 품어 오래지 않아 칠통을 깨뜨렸다. 또한 《고봉어록(高峰語錄)》을 보다가 ‘다른 세상으로 날려버려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 이전의 견해를 한꺼번에 떨구었다. 그러므로 대사께서 평생 발휘한 것은 고봉과 대혜의 선풍이다. 대혜 화상은 육조(六祖)대사의 17대 적손(嫡孫)이고, 고봉 화상은 임제(臨濟) 선사의 18대 적손이다. 아아, 대사께서는 (중국의) 바다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은밀하게 오백 년 전의 종파를 이어받았으니 마치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가 천년의 뒤에 태어나 멀리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실마리를 이어받은 것과 같으니, 유교나 불교나 도를 전하는 것은 하나이다.(〈碧松堂大師行蹟〉 《三老行蹟》 한불7:752중∼753상) 법(法)으로써 파(派)를 논하자면 벽송 선사는 (나의) 할아버지이고 부용(芙蓉) 선사는 아버지이며, 경성 선사는 삼촌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跋 〈敬聖堂禪師行蹟〉 《三老行蹟》 한불7:757중)

이를 통해 보자면 휴정이 파악하고 있던 법계는 등계정심(登階正心)-벽송지엄(碧松智嚴)-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지엄에 대한 서술에서 그에게 선을 가르쳐준 정심에 대해서는 단지 “깨달음에 이익되는 바가 많았다.”라고만 하였을 뿐, 정작 법맥은 곧바로 대혜와 고봉에게 연결시키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과연 휴정이 정심을 자신의 법계에 두었는지는 의문이다.

확실한 것은 지엄이 대혜와 고봉의 《어록》을 통하여 깨쳤다는 것과, 그것이 휴정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 점은 휴정의 법계를 논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또한 휴정은 위로 정심까지만 말하고 있을 뿐, 그 위는 어떻게 되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휴정이 더 이상의 법계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법계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전통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건 휴정은 분명히 자신의 법계를 벽송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전통으로 규정하고 있다.

2) 나옹법통설

휴정이 말하지 않은 정심 이전의 법계에 대한 언급은 휴정 사후인 1612년에 허균(許筠)이 지은 〈청허당집서(淸虛堂集序)〉와 〈사명비(四溟碑)〉에 처음 보이는데, 그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청허당집서〉에 보이는 것은 다음과 같다.

    도봉영소(道峰靈炤) 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法眼)과 영명(永明)이 전하는 바를 얻어 송(宋)의 건륭(建隆)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현풍(玄風)을 크게 떨쳐 말법의 중생들을 구제하였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비로소 선양되어 우리 나라의 승려들이 이에 임제와 조동(曹洞)의 선풍을 얻어 계승하였으니, 선종에 끼친 공적이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국사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도장신범(道藏神範)에게 전해졌으며, 청량도국(淸凉道國)과 용문천은(龍門天隱) 평산숭신(平山崇信) 묘향회해(妙香懷瀣) 현감각조(玄鑑覺照) 두류신수(頭流信修)의 6세를 거쳐 보제나옹(普濟懶翁)을 얻게 되었다.

    나옹은 오래 원나라에 머물면서 두루 여러 선지식을 참방하고 원통한 경지에 곧바로 나아가니 빛나는 선림(禪林)의 사표가 되었다. 그 법을 전해받은 이는 남봉수능(南峰修能)을 적사(嫡嗣)로 하며, 정심등계(正心登階)가 이를 이었으니 곧 벽송지엄의 스승이다. 벽송은 부용영관에게 전해주었으며, 그 도를 얻은 이 가운데 오직 청허 노사(淸虛老師)만을 칭하여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한불7:659하∼660상)

이에 따르자면 휴정은 중국 법안종의 법안문익(法眼文益)으로부터 영명연수(永明延壽)를 거쳐 도봉영소-도장신범-청량도국-용문천은-평산숭신-묘향회해-현감각조-두류신수-보제나옹-남봉수능-등계정심으로 이어진 법계에 속하게 된다. 한편 〈사명비〉에 나오는 법계는 이보다 간략한 형태로서, 영명연수-보조지눌(普照知訥)-나옹혜근(懶翁慧勤)-부용영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청허당집서〉에 실린 것과 비교해 볼 때 나옹혜근에서 부용영관으로 이어지는 법계는 〈청허당집서〉에 나와 있는 것으로써 보충할 수 있으나, 새롭게 등장한 보조지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는 난감한 문제이다. 허균이 제시한 법계는 이 밖에도 상당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 법계에 따르자면 정심을 거쳐 휴정에게 이어진 종파는 법안종이 된다. 그런데 휴정은 지엄 이후의 법통이 임제종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나옹혜근이나 보조지눌은 결코 법안종 승려가 아니다.

그리고 이 법계에 등장하는 정심 이전의 사람 가운데에는 도봉영소, 보조지눌, 나옹혜근만이 실제로 존재했고, 나머지는 실제 존재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스승과 제자로서 가르침을 주고 받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휴정조차 언급하지 않았던 정심 이전의 법계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짜맞추었다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처럼 허균이 제시한 법계는 그 역사적 사실성에 비추어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계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먼저 현재는 전해지지 않지만 허균의 시대에 이와 같은 주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휴정의 입적으로부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때에 이 글을 지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설득력이 없다. 만일 그와 같은 법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자신의 법계에 대한 관심이 결코 없다고 할 수 없는 휴정이 이에 대해 의견을 밝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어디에도 그와 같은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 전통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휴정이나 나옹, 보조의 선풍이 결코 법안종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설령 그러한 주장이 있었다 하더라도 폐기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허균의 창작인가. 허균에게 글을 청한 이가 유정(惟政)의 제자인 혜구(惠球) 등 여럿이고, 문집의 발간과 같은 일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어서, 분명 허균의 글에 대한 제자들 사이의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또한 타당하지 않다.

다만 이상과 같은 조건들을 감안해 볼 때 유정의 제자들이 상의하여 법계를 만들어내었고, 그것이 허균의 글을 통해 표출된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러한 법통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조선불교가 고려불교의 전통과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법계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나옹혜근의 중요성이다.

나옹은 태고보우(太古普愚)와 더불어 고려말 임제선풍을 드날린 고승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무학자초(無學自超)-득통기화(得通己和)로 이어지는 법맥을 통하여 조선전기 불교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는 무학자초와 득통기화의 활동과 이른바 삼대화상(三大和尙)에 대한 예경을 통하여 잘 나타난다. 따라서 나옹은 조선불교계에서 기성의 권위와 정통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법계에서 휴정으로 이어지는 법맥이 나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은 이러한 권위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서라고 생각된다. 나옹을 휴정의 법계로 보는 시각은 이외에 회백(懷白)이 1637년에 지은 〈제월당대사집서(霽月堂大師集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가 태고법통설이 정립된 이후라는 점에 주목해서 보자면, 휴정 사후 그의 문하에서는 각각 나옹법통설과 태고법통설을 주장하는 대립적인 견해가 있었으나, 태고법통설이 대세를 장악하게 되면서 결국 나옹법통설은 힘을 잃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으로 볼 때 허균이 제시한 법계는 휴정의 문하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이전의 한국불교 전통을 종합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정통법맥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확연히 드러나는 역사적 비사실성, 특히 휴정 스스로 임제종맥임을 천명하였음에도 법안종의 법계에 속하게 되는 문제점 등으로 인하여 이 법계는 곧바로 비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새로운 법계의 탄생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그것이 태고법통설이다.

3) 태고법통설

태고법통설은 편양언기(鞭羊彦機)가 1625년에 지은 〈봉래산운수암종봉영당기(蓬萊山雲水庵鍾峰影堂記)〉에 처음 나타난다. 여기에서 언기는 휴정의 제자인 사명당 유정의 법계를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4문파의 자손들이 임제종의 선풍을 잃지 않은 데에는 그 근원이 있다. 우리 동방의 태고 화상이 중국의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幻庵)에게 전하였다. 환암은 소온(小穩)에게 전하였고, 소온은 정심에게 전하였다. 정심은 벽송에게 전하였고, 벽송은 부용에게 전하였다. 부용은 등계에게 전하였고, 등계는 종봉(鍾峰)에게 전하였다.(한불8:253하)

또한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때에 언기가 지은 〈청허당행장(淸虛堂行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릇 사람들에게 보이는 말 속에 임제종풍을 잃지 않은 데에는 본원이 있다. 우리 동방의 태고 화상이 중국의 하무산에 들어가 석옥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에게 전하였다.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였고, 구곡은 등계정심에게 전하였다. 등계정심은 벽송지엄에게 전하였고 벽송지엄은 부용영관에게 전하였다. 부용영관은 서산등계에게 전하였다. 석옥은 곧 임제의 적손이다.(한불7:735중)

여기에서 언기는 휴정의 법맥이 임제의 적손임을 강조하면서 그 근원을 태고보우에서 찾고 있는데, 글 전체의 맥락으로 볼 때 사자상승(師資相承)보다는 임제의 종풍에 더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언기는 지엄 이후의 선풍이 임제종풍임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자상승의 법맥이 확실하지 않다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휴정은 지엄이 간접적으로 대혜와 고봉의 법을 이어받았다고 밝히는 정도로 처리하고 넘어갔지만, 스승으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은 제자를 통해서만 법이 전해진다고 하는 선종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언기는 보우에서 정심으로 이어지는 법계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법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인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 법계는 사실이 아니라 언기로 대표되는 휴정의 일부 문도들이 임제종 정통법맥임을 내세우고자 임의로 만들어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언기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 태고법통설은 기존의 나옹법통설과 더불어 휴정의 문하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옹법통설을 버리고 태고법통설을 정통으로 확립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은 1640년에 중관해안(中觀海眼)이 쓴 〈사명당행적(四溟堂行蹟)〉에 실려 있다.

    못난 제자인 해안은 오석령(烏石嶺) 망주정(望洲亭)의 가장자리 아랫자리에 앉은 보잘것 없는 사람이나, (사명)대사의 정통 제자인 혜구, 단헌(丹獻) 등이 전국의 문도들과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청허는 능인(能仁)의 63대, 임제의 25세 직계 자손이다.

    영명은 법안종이고, 목우자(牧牛子)는 별종(別宗)이며, 강월헌(江月軒)은 평산으로부터 분파된 것이다. 이 비(허균이 지은 비문이 있는 비)에는 우리 스승이 임제로부터 전해지는 순서가 잘못되어 있으니, 만일 후세의 지혜에 눈멀고 귀먹은 이가 오래도록 전한다면 눈과 귀를 놀라게 할 일이 어찌 없겠는가? 해안은 비록 변변치 못하지만 올바르게 적는 붓은 가지고 있는데, 이 비를 가지고 와서 재삼 청하기 때문에 (중략) 삼가 쓴다. (한불8:75상∼중)

여기에 등장하는 혜구는 허균에게 사명당의 비문을 청하러 갔던 당사자로서, 나옹법통설을 창안해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참여한 자리에서 태고법통설로 의견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나옹법통설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결정으로 인하여 태고법통설은 휴정 문하에서 정통의 주장으로 확립되었고,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문헌들에서 금과옥조로 떠받들렸다. 이들이 나옹이 아닌 태고를 선택한 이유는 몇 가지 관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임제종풍의 순수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옹보다는 태고가 낫다. 나옹과 태고 모두 원나라에 가서 임제종 승려인 평산처림(平山處林)과 석옥청공(石屋淸珙)에게서 각각 인가를 받고 돌아와 임제종풍을 드날렸다. 그렇지만 나옹은 이에 더하여 중국 선종에 속하지 않는 지공(指空)화상의 법 또한 이어받았다. 따라서 임제종의 순수성이라는 점에서 나옹보다는 태고가 더 낫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또 다른 이유는 나옹의 법계가 조선전기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무학자초와 함허득통으로 이어지는 법맥인데, 이것은 결코 등계정심에서 휴정에 이르는 법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휴정의 법맥을 나옹에서 찾게 된다면 그것은 무학-함허 법맥을 정맥으로 인정하고 스스로 방계임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옹은 피해야만 한다. 더욱이 태고의 경우는 조선 이후 법맥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새로이 법계를 구성하는 데 부담이 없었다. 또한 나옹이 이미 허균이 제시한 법맥에 핵심적인 인물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허균이 제시한 법통설은 이미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옹을 다시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태고법통설 또한 나옹법통설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나옹법통설과 마찬가지로 정심 이전의 법계를 아무런 근거 없이 짜맞추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선문의 사자상승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는 큰 문제를 낳는다.

선문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깨달음을 인가하고 인가받는 관계이기 때문에 반드시 몸소 만나서 법을 주고 받아야 한다. 그런데 휴정이 밝힌 바에 의하면 지엄은 정심으로부터 선을 배워 깨달음에 많은 이익을 얻기는 했지만, 결코 깨달음을 인가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엄의 깨달음은 《대혜어록》과 《고봉어록》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 누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말은 없다.

이로 보자면 정심은 결코 지엄의 사법사(嗣法師)가 아니다. 휴정이 지엄의 법맥을 정심이 아니라 중국의 대혜와 고봉에 바로 이었던 것도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태고법통설에서는 정심을 지엄의 사법사로 규정하고 있으니,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구곡각운(龜谷覺雲)과 등계정심의 관계, 구곡각운과 환암혼수(幻庵混修)의 관계, 환암혼수와 태고보우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한 마디로 이들이 법을 인가해주고 인가받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는 것은 사실로서 확정되지 않는다.

이처럼 태고법통을 구성하고 있는 인맥은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태고법통설은 한번 휴정의 문도들에 의해 확립되고 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통의 법통설로서 자리잡고 있으며 조계종의 종헌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4) 보조법통설

근현대에 이르러 이불화(李佛化), 이종익(李鍾益) 등에 의해 역설된 보조법통설의 핵심적인 주장은 심재열의 〈조계종조는 왜 보조국사인가〉(《多寶》 20호)라는 논문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보조법통설에서도 태고법통설에서 내세우고 있는 구곡각운에서 등계정심을 거쳐 휴정에 이르는 법맥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구곡각운이 환암혼수가 아니라 졸암연온(拙庵衍카)의 사법제자이고, 졸암연온은 보조지눌의 수선사(修禪社) 법맥이기 때문에 휴정은 보조법맥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휴정 이후의 한국불교는 보조법통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결국 태고법통설과 보조법통설의 논쟁에서 핵심은 구곡각운이 태고법통설의 주장처럼 환암혼수의 제자인가, 아니면 보조법통설에서 주장하듯이 졸암연온의 제자인가 하는 것이다. 이 논쟁을 판가름할 가장 중요한 문증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이색(李穡)의 〈남원승련사기(南原勝蓮寺記)〉로서, 졸암과 구곡의 관계를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戊戌之秋 其將示寂也 以雲師 於族爲甥 於法爲嗣 付以寺事(민족문화연구회편, 《국역동문선》 원문영인부분, 121쪽 하단 왼쪽) 이에 대한 해석은 “(졸암이) 무술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려고 하면서, 구곡각운이 혈족으로는 조카이고 불법으로는 법을 이어받은 제자인지라 절의 일을 맡기었다.”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자면 구곡은 환암혼수가 아니라 졸암의 법계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태고법통설을 주장하는 성철은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於法爲嗣’의 ‘嗣’를 ‘師’로 바꾸어서 “인척으로는 생질이 되며, 법으로는 스승이 되어 각운(구곡)에게 절의 일을 부촉하였다.”(《한국불교의 법맥》 25쪽)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전해지는 어떤 문헌에서도 ‘嗣’를 ‘師’로 바꿀 만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원문을 잘못 보았거나 임의로 원문을 변조하였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욱이 그렇게 바꾸어서 한 해석을 그대로 따르자면 구곡은 연온의 조카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되어, 제자인 연온이 맡고 있던 절을 스승인 구곡이 이어받는 참으로 기묘한 관계에 이르게 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구곡각운이 환암혼수의 제자가 아니라 졸암연온의 제자이기 때문에 보조의 법맥을 잇고 있다고 하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휴정이 보조의 법맥에 속한다는 보조법통설은 타당한 주장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구곡각운이 졸암연온의 제자로서 보조의 법맥을 잇고 있다고 하여도, 구곡각운에서 등계정심을 거쳐 벽송지엄에 이르는 과정에 많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인맥에 의존하고 있는 한 보조법통설 또한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5) 기존 법통설의 문제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불교 조계종의 법통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고,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휴정이 처음 제시한 벽송지엄에서 자신에 이르는 법계만이 분명할 뿐, 나머지 모든 법통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법통은 이제 더 이상 사실의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사실의 뒷받침이 없는 법통을 만들어내야만 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스승과 제자가 직접 대면하여 인가를 받아야만 깨달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선종의 사자상승의 이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휴정의 법통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이미 중국에서는 이러한 이념에 의거하여, 이른바 석가모니와 가섭의 삼처전심(三處傳心)에서 시작되어 보리달마에 이르는 서천(西天)28조설(祖說)을 지어내었으며, 보리달마에서 혜능(慧能)에 이르는 중국의 선종 법계를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선의 선종 승려들이 자신들의 법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때, 기꺼이 그 일에 착수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나옹법통이나 태고법통과 같은 유형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필요에 의해 형성된 법통은 더 이상 사실의 기술이 아니다. 이것은 쇠락해 있던 조선의 불교를 중흥시킨 서산 이후의 불교계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하나의 이념적 규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선종이 선택한 태고법통설은 과연 조선불교의 실질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가. 태고법통설이 보여주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태고 이전의 한국불교 전통이 모두 부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태고 이후의 불교는 이전의 불교와 전혀 다른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특히 보조지눌에 의해 확립된 한국 선불교의 수행체계와 간화선법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고법통설에 따르자면 보조지눌은 설 자리가 없다. 결국 태고법통설은 자신들이 이미 그 영향력 안에 들어 있는 이전의 한국불교 전통을 부정하고 태고보우라는 매개를 통하여 중국의 임제종 전통과 직접 연결하고자 하는 조선 승려들의 의식지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적 사대부들이 건국이념의 하나로 내세웠고, 조선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갔던 ‘사대모화(事大慕華)’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휴정 이후의 조선 불교는 실질적으로는 지눌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법통으로는 중국의 임제종에서 태고보우로 이어지는 법계에 속하는 기형적인 이중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재의 조계종이 보우로부터 이어지는 법통설을 이념적으로나마 사실이라고 규정하여 채택함으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첫째, 종헌에서 규정하고 있는 법계는 도의에서 지눌을 거쳐 보우로 이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조계종이 정하고 있는 입실면수(入室面授)의 사자상승법이나 태고법통설에 따른다면 보우는 지눌이나 도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계종의 법맥은 입실면수의 법칙에 맞지 않는 이전의 법맥과 법칙에 맞춘 이후의 법맥이라는 모순되는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둘째, 한국불교는 임제종의 적손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는 서당지장의 법을 이었는데, 서당지장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이고, 마조도일은 남악회양(南嶽懷讓)의 제자이다. 그런데 임제종의 종조인 임제의현(臨濟義玄)은 마조도일에서 백장회해(百丈懷海), 황벽희운(黃檗希運)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어받고 있으며, 서당지장은 이 법맥에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도의를 종조로 하는 한국불교 조계종은 인맥으로 볼 때 임제종의 정맥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성철이 태고법통설을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법맥상의 불일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계종의 법맥에서 보조지눌은 물론이고 도의조차도 제외해 버리자는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태고보우를 종조로 규정할 경우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조계종이 간화선에 대해서 정맥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간화선은 송의 대혜종고(大慧宗┳)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우리 나라에 받아들여 수행법으로 완성한 사람은 보조지눌이다. 그런데 입실면수의 전통에 의하자면 지눌은 대혜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간화선의 정맥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태고보우를 종조로 할 경우에도 나타난다. 태고법통설을 주장하는 성철이 최종적으로 제시한 법맥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시작하여 달마와 혜능을 거쳐 이어진 법맥은 원오(?悟)를 지나면서 대혜와 호구(虎丘)의 둘로 나뉜다. 그런데 태고보우가 인가를 받은 석옥청공은 대혜가 아니라 호구에서 비롯된 법맥이다.(《한국불교의 법맥》 187∼188쪽) 따라서 청공을 통해 보우로 이어지는 법맥은 간화선의 정맥이 아니다.

결국 태고법통설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입실면수의 법칙을 곧이곧대로 적용할 경우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대혜종고에서 비롯된 정맥이 될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입실면수의 사자상승을 전제로 하는 태고법통설을 토대로, 그것을 한국의 선불교 전통과 연결시키려할 때에는 한국불교 스스로가 임제종의 방계, 비정통으로 자리매김될 수밖에 없다. 결국 임제종이라는 중국의 종파에 대한 혈연적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인맥 중심의 법통관이 오히려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법통설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휴정 이후의 법맥에 관한 것이다.

현재 종헌이나, 모든 법통설에서 휴정 이후의 법계는 부용의 제자인 휴정과 부휴의 양 법맥이 이어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휴정 이전 불교계의 주류는 나옹에서 무학, 기화로 이어지는 법맥으로서, 이는 휴정과는 다른 법맥이다. 그리고 이 법맥이 갑자기 끊겼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없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휴정, 부휴의 법맥이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하여도, 모든 조선의 승려가 이 법계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단지 휴정, 부휴의 법맥만이라고만 한다면, 조선불교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포기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휴정, 부휴의 법계상승에서도 문제는 드러난다. 선문의 법계란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반드시 깨달음을 인가하고 인가받는 관계여야만 한다. 그런데 휴정 이후에 과연 그렇게 해서 사자상승의 법맥을 이어간 이가 몇 대에 걸쳐 몇이나 되는가.

또한 일정한 스승이 없이 스스로 깨친 이들은 어떠한 법계에 속하게 되는가. 만일 입실면수의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자면 깨달음을 인가받지 않고서는 그 법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국불교계에서 휴정의 법계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현재 조계종이 공식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도의와 보조지눌, 태고보우를 모두 포괄하는 법맥은 스스로 규정한 입실면수의 원칙과 모순된다. 그럼에도 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모두 포괄하려는 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인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입실면수와 전법게라고 하는 인맥 중심으로 법맥이 이어질 것임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인맥을 증명할 수 없는 과거의 전통과 인맥으로 이어질 미래의 법계라는 모순이 가져다주는 부담을 끝내 떨치지 못한다.

3. 인맥 중심의 법통을 넘어서

법통과 관련하여 이상과 같은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은 그것이 인가를 해주고 받는 스승과 제자라는 인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맥 중심의 법계는 불교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붓다는 결코 후계자를 정한 적이 없으며, 《열반경(涅槃經)》에서 천명한 바와 같이 “사람이 아니라 말, 말이 아니라 뜻”에 따라 그것이 바른 법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선문의 사자상승 이념은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출가자의 핏줄은 진리의 핏줄이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단지 나의 스승이 누구인가만을 따지는 법통론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다. 만일 그런 식의 사자상승만으로 진리를 따진다면 붓다도 결국 깨닫지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 인맥 중심의 법통관은 폐쇄적인 문중의식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인맥 중심의 법통관을 더욱 고착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자상승의 전통에서 스승은 진리의 유일한 판단기준이며,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권위로 자리를 잡는다. 이는 결국 특정한 스승에서 특정한 제자로 이어지는 닫힌 인맥 관념을 형성하게 되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이들이나 전통을 배척하는 배타적인 문중의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특정한 문중만이 법통을 이은 정통이고, 나머지는 방계라는 잘못된 법통 관념을 낳게 된다. 이러한 관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일 뿐더러, 열린 태도로 진리를 추구해야 할 수행자의 마음을 특정한 계파에 묶어 버리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인맥을 통해서 법통을 확인하려고 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법통설 자체가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법통론의 양대산맥을 형성해온 보조법통설이나 태고법통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것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규정하여 이를 입증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해왔다. 그 결과 분명한 증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문헌을 해석하고 억지스러운 주장을 되풀이하는 소모적인 논쟁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법통논쟁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처럼 사실도 아니고 이념적 필요에 따라 허구적으로 구성된 법통설과 그에 대한 집착은 결코 불교적 입장이 아니며, 스스로를 좁은 법계 안에 한정시켜 버리는 구속이 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인맥 중심의 법통설이 요청될 때가 있었을 것이고, 이에 부응하여 그러한 주장들이 등장하였다.

나옹법통설은 조선 이전의 한국불교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며, 태고법통설은 반대로 태고보우 이전의 한국불교 전통과 단절하고 중국 임제종의 정통적인 흐름이 새로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기 위하여 주장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상황이 바뀐 오늘, 과거에 형성되었던 법통관에 대해 반성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논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실상을 들여다볼 때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은 순수한 선종이 아니라 한국불교 1,600년의 다양한 역사적 전통들을 모두 이어받고 있는 종합적인 종파이다. 이미 종헌에서 경전공부, 염불, 지주(持呪) 등을 허용하고 있고, 총림에는 선원과 더불어 강원, 율원, 염불원 등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 조계종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선종의 법통만으로 조계종의 법통을 따지기로 하자면, 이는 한 부분에 대한 법통은 될 수 있겠지만, 조계종 전체를 아우르는 법통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불교의 특성을 통불교(通佛敎)로 규정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고, 이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종파가 현재의 조계종이다. 그런데 통불교의 뿌리는 후기신라 초기에 활동했던 원효(元曉)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현재 주장되고 있는 선종 단일계의 법통설에 따르자면 원효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결국 조계종은 통불교적 전통 속에 있으면서, 그 전통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해 버리는 모순을 범하고 만다. 따라서 이제 조계종은 선종의 사자상승이라는 제약된 관점을 버리고 한국불교의 종합적 전통이라는 열린 관점에서 법통을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요컨대 현재와 같이 특정한 인맥에 근거한 법통 안에 스스로 갇힌 상태에서는 인맥 중심의 파벌주의로 흐를 뿐, 보편적인 깨달음의 추구와 중생의 구제라고 하는 초인맥적인 목표를 위한 한국불교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세속적인 혈통주의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인맥 중심의 법통 관념을 벗어나 한국불교를 새롭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과거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의 전통을 일구며 미래의 한국불교를 건설해 나간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조계종은 어떤 것을 이어받고, 어떤 것을 버리며, 어떤 것을 재창조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논의해야한다.

그럴 때 도의 선사나 보조지눌은 물론이려니와 태고보우나 청허휴정조차도 잘못 씌워진 법통의 굴레를 벗어나 진실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만이 전통의 무비판적인 맹종이 아닌 전통에 기반한 창조적 계승이 가능하며, 한국불교의 발전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끝>

박해당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 졸업(철학박사).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ㅌ측별연구원. 경희대,서울시립대 강사, 논문으로 <기화(己和)의 불교사상 연구><승조(僧肇)의 공관(空觀)-부진공론(不眞空論)을 통해본 공의 의미><불교의 생명관><중국초기 불교의 인간이해><원효의 장애이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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