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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김종만 전 불교신문 기자
[3호] 2000년 06월 10일 (토) 김종만 전 불교신문 기자

1. 호국불교는 불교인가 아닌가

구시대의 전유물쯤으로 여겨지는 호국불교에 대한 문제를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서서 새삼 제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접근이라고 여길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국불교의 폐해와 그 향수가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도 ‘호국’의 전통을 정치적 또는 학문적 분야에까지 자랑스럽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은 이 문제에 관한 한 공적 논의가 한번쯤은 있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함께 던져주고 있다 하겠다. 실제로 호국불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지만 한 번도 이를 공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지 못했던 게 저간의 사정이다.

더군다나 호국불교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한국불교만의 독특한 전통인데도 그간 이렇다 할 논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정치권력과의 우호관계로 반사이익을 얻자는 계산에서 불교계 일부 기득권 세력이 때때로 잘못된 호국 행태를 답습하려는 자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80년대 초 사회 일반 및 불자 대중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호국승군’의 발대식이 있었던 것은 호국을 가장한 불교의 또 다른 변질 양태였다.

이는 호국불교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져오고 있는 실례라 아니할 수 없다. 빛나는 역사와 전통일수록 겸허한 비판과 정치(精緻)한 연마의 과정이 요구된다. 그것이 바람직한 역사 인식이며 전통의 계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의 자랑으로 기록되고 있는 호국불교의 행태는 바람직했을까. 그 역사적 전개에 잘못은 없었는가. 이를 살펴봄으로써 불교에서 말하는 호국의 진정한 의미와 원리는 무엇이고 향후 호국불교의 전개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바람직한 것인지 공적 논의의 물꼬를 트자는 데 본고의 의도가 있음을 먼저 밝힌다.

먼저 필자는 ‘호국불교가 불교인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글을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 한국 역사에서 호국불교의 전개는 순수불교와는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불교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요소가 적지 않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데에는 충분히 반불교적 호국불교의 역사, 순불교적 입장에서의 논리가 뒷받침된다.

호국불교의 역사는 솔직히 말해 자생적으로 출발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고대국가의 형성과 강력한 왕권의 실현을 위해 당시의 지배층은 새롭게 도래한 고등종교인 불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불교는 지배층의 이러한 요구와 맞물려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 했다. 당연히 불교는 불법홍포와 교세신장을 위해서 그 시대의 왕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호국’과 ‘보호’의 상관관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호국이 ‘국(國)’과 ‘민(民)’을 위한 실천적 불사(佛事)로 전개되기보다 ‘왕조’와 ‘지배계급’의 집권논리를 옹호하고, 나아가 영토의 수호와 확장을 위한 살륙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일까지도 담당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광법사가 화랑도에게 제시했다는 ‘세속오계’다. 세속오계는 엄격한 불교의 계율을 세속사회에 탄력적으로 적용했다는 점에서 일부 사학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나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반불교적 윤리 의식을 수반하고 있다. ‘전쟁에 나서서 절대 물러서지 말라(臨戰無退)’는 내용은 맹목적인 충성을 부추기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을 그르치고 있다.

또한 생명을 가리어 살생을 허용하고 있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은 한낱 보잘것 없는 미물중생이라도 구제하고자 하는 불교의 자비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권력은 전쟁상태에 있어서 ‘죽음’과 ‘살인’을 ‘합법적’으로 강요하는 본질적인 ‘살생’의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가장된 ‘합법’에 올바른 정신과 문화를 창출하고 지도해야 하는 종교계까지 합세하고 나설 경우 그 전쟁은 더 비참하고 폐해가 더욱 확산된다는 사실을 동서양의 전쟁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얘기는 국민총화를 이루는 등 차원 높은 정신문화를 창출한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바꿔 말하면 영토합일을 이루기 위한 무력전쟁에도 나름의 공헌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시의 전쟁이 국민염원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중앙집권체제의 왕권을 강화하고 강력한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는 데서 근인(近因)을 찾아볼 수 있다면, 호국불교의 논리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호국불교는 중생 구제와 불국토 건설이라는 제 본질과 기능을 접어둔 채 왕실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떠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호국불교는 당연히 불교의 본질적 입장을 벗어난 사이비 불교, 정권의 비호 속에 안주하는 어용종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수모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부처님은 재세 당시 제자들에게 전법을 당부했고 마지막 열반을 앞두고서도 전법에 게으르지 말 것을 유촉했다.

부처님이 전법을 강조한 것은 중생 구제를 위해서였다. 중생이 무명에 가리어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윤회하는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이들을 해탈문으로 인도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라는 중생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의 발로였다. 때문에 부처님의 이러한 중생사랑은 모든 불보살과 호법신장들에게 그대로 전수돼 지장보살의 경우는 ‘마지막 남은 하나의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성불을 미루겠다.’며 비원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정신은 이처럼 중생 구제에 있고 궁극적으로는 화택의 현실세계를 정토화해서 불국토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호국불교의 실천적 논리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면 이른바 호국불교는 불교 본래의 근본정신에서 일탈한 사이비 불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건대 한국역사 속의 호국불교는 중생의 편에 서서, 중생이 안고 있는 고통과 바람이 무엇인지 귀담아 듣고 해결하려 했던 의지가 절대 부족했다. 삼국시대와 고려조, 조선조의 전반에 걸쳐서 행해졌던 각종 법회나 불사도 중생고(衆生苦)의 해결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왕실의 천수와 국가안녕의 형식적 기원에 치중해왔을 뿐이다. 호국불교가 제대로 정립되고 그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 이념적 근거와 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제대로 살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 가는 지구촌의 한 일원으로서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그 불교적 대응책을 하루빨리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점에 주목해 불교의 호국원리와 이념적 근거를 고찰해 보고 이를 토대로 호국불교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호국불교의 이념적 근거

불교의 궁극적 이상은 중생 구제와 불국토 건설에 있다. 그런데 중생 구제란 신의 가호에 의탁해 구원받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치열한 자기 정진에 의한 ‘깨달음(解脫)’을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불교를 일러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자신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해 ‘자력 종교’라고도 말한다. 아무리 신통묘용한 능력을 가진 불보살이라 할지라도 특정 중생에게 직접적으로 ‘깨달음’을 안겨줄 수는 없다. 중생에 대한 제불보살의 비원은 바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과정의 완수에 있다. 즉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내외적 요건을 충족시켜 주는 일이며 이에 반하는 장애를 제거해 주는 것이 불보살의 중요한 행위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교의와 사상, 교단의 운영과 대사회적 활동도 중생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의 성취를 돕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점이 ‘호국’과 관련해 긴밀한 함수관계를 지니게 되고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 중생의 해탈은 현실의 공간 속에서 가능하다. 다시 말해 중생이 살고 있는 그 땅 그 시각에 구원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호국은 바로 중생이 해탈을 이룰 수 있는 현실의 시간적·공간적 형태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호국의 입장은 사회의 모순을 정화하고 중생의 삶을 안락하게 만들어 ‘깨달음’의 성취를 돕고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예토를 불국토화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구제관은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뿐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전개된다. 불교는 그리하여 중생요익(衆生饒益)의 기본정신과 실천적 보살 행위로 말미암아 언제 어느 곳이든 인류사회의 절대적 요청을 받았고 시시때때로 거기에 부응했다. 그것이 불교가 안고 있는 초국가적 초민족적 성격의 전개양상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의 호국불교는 이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우선 지나치다싶을 만큼 국수주의(國守主義)적 성향이 농후했다. 한 민족, 한 국가와 문명을 같이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정서적 요청도 있었겠지만 그야말로 ‘국수(國守)’의 불교로 행세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애초 호국불교는 ‘호국’과 ‘불교’라는 두 용어가 결합함으로써 상호모순이 전제됨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호국’이란 용어가 세속적,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조되고 있는 데 반해 불교는 출세간적이며 사해동포(四海同胞)를 아우르는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지향한다. 그런 불교가 특정 국가와 특정 민족만을 수호하겠다고 나선다면 타락한 불교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호국불교라면 순수불교와는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일체 중생을 구원해야 한다는 불교의 보편성마저 무시한 채 살생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호국불교라면 그것은 사이비 불교라는 비난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호국불교가 한국불교의 특색이라고 했을 때 그 근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호국불교의 경향을 조장하고 있는 대표적 경전은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이다. 이 경전의 〈호국품〉 제5에는 부처님께서 파사익왕에게 호국하는 방법을 가르쳐 반야바라밀을 수지하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과 반야계의 경전, 그리고 밀교계의 문헌에서 호국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인왕호국반야경》과 《금광명최승왕경》에서는 7난(七難)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소멸하기 위해 백고좌법회가 국왕들에 의해 봉행되기도 했다.

이들 경전에서 말하는 호국은 불교적 가치를 세속사회에서 이루기 위한 방편과 권도(權道)로서 제창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호국의 논리가 단순히 한 국가의 영토만을 수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중생이 살고 있는 국토를 사악(邪惡)과 전쟁으로부터 보호해 불교적 이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다는 데 그 뜻이 있다. 부처님이 파사익왕에게 호국하는 방법으로 ‘반야바라밀’을 수지하라고 당부한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불보살이 되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 행위다.

앞서 말했듯 중생의 구제수단인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시간적 공간적 형태를 지켜주는 것이 호국이라고 했을 때 중생이 살고 있는 땅이 외침(外侵)과 재란(災亂) 등으로 황폐화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데 있어서의 중대한 장애다. 깨달음을 충족시켜 주는 전제조건은 평화에 있다. 중생의 세계가 심적으로든 물적으로든 평화의 구도가 구축돼 있을 때 구제 기능도 활기를 띠게 마련이다.

평화의 기본조건은 내란이나 전쟁을 유발하는 객체적 주체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것이 위협받을 때 적극적으로 호국의 실천 행위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호국불교는 중생을 지켜주기 위한 당연하고도 적극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당장 중생들이 외부의 흉폭한 침략자들에게 총검으로 살상되고 짓밟히고 있는데 이를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 구제의 원력을 세운 보살들은 파사현정의 의지로 중생을 섭수하고 삿된 무리들을 절복시킨다. 섭수와 절복을 현현하는 보살들은 때로는 인자한 모습으로 다가서기도 하지만 사천왕과 같이 분노한 모습으로 사악을 절복시킨다. 이것은 세속사회의 죄악을 징치(徵治)함으로써 불국토 건설과 정법사회를 구현하고 마침내는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일구어내기 위해서다. 이것이 호국과 불교라는 두 용어가 상호 모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교’ 앞에 관형어인 ‘호국’이 허용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보살의 구제대상은 일체 중생이다. 힘없고 나약한 중생을 우선 제도해야 한다는 순차적 논리는 적용되지 않는다. 보살이 비록 사악한 무리들을 절복시킨다고 해서 그들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다같은 중생이며 구제 대상이기 때문이다. 구제를 방해하는 일체의 사악을 제거하는 것도 보살의 할 일이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일체 중생의 제도와 불국토의 건설이다.

일체 중생 속에는 흉악무도한 무리도 있을 것이며 힘없는 중생을 괴롭히는 압제자도 있을 것이다. 이들을 모두 구제하지 않고서는 불국토가 이룩될 수 없다. 따라서 보살은 섭수와 절복을 통해 모든 이들을 정법에 귀의토록 하는 본질적 구제관을 전개한다. 정법의 실현은 곧 일체평등과 평화를 보장하는 불교의 진리당체다. 정법이 바로 서면 세간의 부정과 부패가 있을 수 없고 구조적 모순 또한 통용되지 않는다.

그럴 때 중생의 현실적인 삶이 평화로워지고 보다 윤택해진다. 또 중생들로 하여금 탐진치 삼독심과 무명을 여의게 하여 참다운 생명가치를 구현토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탈의 문을 통과해 영원한 복덕과 안락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종교적 이상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말이 허황되게 들릴지 모르나 현실의 세계를 이처럼 불국토로 가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하고 호국불교가 바로 그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 수가 없다.

그런데도 한국불교에서의 호국불교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돼 왔는가. 중생 제도와 불국토 건설을 위한 호국의 의지를 높이 불살랐던 사실(史實)은 불행히도 찾아보기 어렵다. 불교가 국교로 채택됐던 고려조에도 호국불교의 기개는 드셌지만 이후 압박과 설움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호국’의 본질적 내용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중생 제도와 불국토 건설을 기치로 한 정법으로 민중을 섭수하고 지배자의 잘못을 절복받아야 했음에도 호국불교가 그 주체인 중생을 외면하고 지배자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머리를 조아린 업보라 하면 지나친 말일까. 호국불교가 진정한 이념과 원리를 갖고 거듭나려면 이러한 문제의 핵심을 잘 살펴 냉철한 반성과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3. 호국불교의 역사적 전개

우리 나라에 전래된 초기 불교의 성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떠한 의도와 목적으로 유포되었느냐 하는 점은 이후 한국불교사의 성격을 결정짓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고구려의 소수림왕대는 중앙집권의 고대국가를 마련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백성들은 비록 ‘인과적 교리로서의 불교’ ‘구복으로서의 불교’ ‘도덕으로서의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지배계급에서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인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관념 형태를 형성하고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고구려의 초기 사원은 대부분 ‘흥국(興國)’ ‘흥복(興福)’을 기원하는 호국적 성격의 사원으로 건립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들에게는 피화초복(避禍招福)하는 불교를 권장하고, 국가는 새로운 종교사상에 의해 백성의 정신을 하나로 결집하면서 국가의 안녕과 융성을 꾀하려 했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마찬가지였다. 침류왕 원년 인도승 마라난타에 의해 전해진 백제불교도 국가적 환영을 받았다. 백제 초기의 불교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별로 없으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신왕(阿莘王)이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영을 내렸다고 한다.

왕이 예경(禮敬)으로 불교를 환영하고 불법 숭신으로 복을 구하라는 영을 내린 것은 고구려에서와 마찬가지로 흥국과 흥복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법흥왕 15년(528) 이차돈의 순교사건을 분기점으로 해서 널리 불교가 유포된다.

이렇게 한국의 불교 전래는 수입 초기부터 왕실의 절대적인 비호와 국가적인 차원에서 흥국, 흥복을 위한 이상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불교와 국가간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긴밀함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삼국을 통일하는 신라에 있어서 불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여기에는 자장, 원광, 원효, 의상과 같은 고승의 힘도 컸지만 진흥왕을 비롯한 역대 제왕들의 불법 숭신과 불교 보호정책에 힘입은 바 또한 크다. 신라 제왕의 불법 숭신은 그들의 칭호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법흥왕(法興王)은 법을 흥성케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바로 진리를 흥성케 하는 일(眞興王)에 일치했고, 그것은 참된 지혜(眞智王)로 이어졌으며, 다시 참된 평화(眞平王)와 선한 덕(善德王)과 참된 덕(眞德王)의 표방으로 전개되었고, 다시 무열왕과 문무왕, 신문왕(神文王)으로 이어져 마침내 최초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출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

제왕의 불법 숭앙은 불교계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터이다. 따라서 불교는 불교대로 국가정책의 호응을 반기면서 ‘신라불연국토설(新羅佛緣國土說)’을 내세워 각종 호국불사를 전개했다. 가령 자장은 삼국간의 전쟁이 치열하던 선덕왕 때 호국사찰 황룡사에 9층탑2)을 세웠고, 원광은 화랑을 상대로 세속오계를 설했으며, 혜량 법사는 팔관회를 개설하여 위국충렬의 전몰 장병의 넋을 위로했다. 또 무열왕 당시 신라의 조천성(助川城)이 백제의 공격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을 때도 승려 도옥(道玉)은 “승려된 자는 위로는 도를 닦아 마음을 밝히고 아래로는 남을 이익되게 해야 하거늘 나와 같은 인간은 겉모양만 승려지, 한 가지도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으니 싸움터에 나가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낫겠다.” 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맹렬히 싸우다 전사했다.

이를 계기로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앙양돼 승리를 거두게 됐다고 한다. 또 진평왕 때 신라가 고구려의 빈번한 공격을 받아 곤경에 빠졌을 때도 왕명을 받들어 수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글, 이른바 걸사표(乞師表)를 지은 이는 고승 원광 법사였다. 원광은 걸사표를 지으면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남을 해치는 일은 승려로서 취할 바 아니나 내가 왕의 땅에 살며 왕의 수초를 먹으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어……”라는 말을 전하고 있다. 이같은 예로 보아 신라에 있어서 불교는 호국이었고 호국은 곧 불교였다.

당연히 국가와 불교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졌다. 고려 왕조 역시 신라의 호국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고려 태조의 십훈요(十訓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불보살의 가피력에 의해서만 국가가 흥왕(興旺)할 수 있고 국민이 평안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국이상국집》 ‘서보통사행동전방(西普通寺行同前랴)’에 나오는 글을 인용해보자. 태조가 나라를 창건할 때에 오랑캐를 물리치고 난리를 진압하려면 심법을 천양함으로써 법을 정하였는데 무릇 갑병(甲兵)을 수선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금강보검으로써 악의 징후를 꺾는 것만 같지 못하고, 금성을 쌓아 수어(守禦)를 도모하는 것은 본분겸추(本分鉗鎚:선가에서 敎導의 의미로 쓰이는 말)를 빌어서 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하는 것만 같지 못하며, 양식을 운반하여 만 명의 군사를 먹이는 것은 한 명의 선승(禪僧)을 길러서 먼저 그 경비를 더는 것만 못하다.

즉, 한 사람의 선승을 양성하는 것이 병사 만 명을 육성하는 것보다 그 경비면에서나 국력을 신장하는 데 있어서 훨씬 가치있는 국방책이라는 것이다. 태조의 이같은 인식은 고려의 역대 제왕에게도 면면히 이어진다. 따라서 고려조에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법회가 설행(設行)되었다. 고려 제8대 현종 11년 내전에 1백 사자좌를 설하여 3일간 《인왕경》을 설한 것을 필두로 ‘인왕경 도량’ 혹은 ‘금광명경 도량’ ‘장경도량’ ‘연등회’ ‘팔관재회’ ‘반승회(飯僧會)’가 빈번하게 치러졌다. 그런데 이러한 각종 법회가 백성들의 정신을 풍요롭게 가꾸어 주거나 생활에 유익함을 안겨주는 데 치중했다면 법회 문화의 저변화에도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법회는 기복제례의 형식에 치우쳐 재원만 낭비하는 ‘소비법회’에 그쳤다. 고려시대 법회의 대부분은 현세이익적인 것이나 호국적인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어느 것이나 다 국민정신의 단합과 내우외환의 극복을 목적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그 시행의 종류와 횟수가 번잡했을 뿐 아니라 관제 일변도로 흘러 혼란스런 양상마저 띠었다. 이러한 예는 《고려사》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각종 법회 종류가 83가지에 달하고 시행 회류(回類)가 1,038회를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3)

고려조 호국불사 중 최대의 것은 대장경 판각이다. 고려의 대장경 판각은 전후 2회에 걸쳐 행해졌는데 초조장경은 현종 2년(1011)에 착수해 문종에 이르기까지 약 40년에 걸쳐 1,106부 5,048권을 새겼다. 그러나 이 대장경은 몽고군에 의해 재가 되고 말았고 강화로 수도를 옮긴 고종은 대장도감을 두고 대장경을 다시 새기기 시작, 16년에 걸쳐 1,512부 6,791권 81,258판을 완성시켰다. 이것이 현재 해인사에 소장된 고려 팔만대장경이다. 이 방대한 불사도 오로지 외적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발원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이다.

이처럼 나여(羅麗) 양조(兩朝)의 불사는 각종 법회 설시, 사천왕사 창건, 조탑조불, 장경판 조각 등 진호국가(鎭護國家)와 관련되지 않은 게 없었다. 특히 고려 숙종 때는 수없이 침입하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항마군(降魔軍)이라는 승병(僧兵)의 상비제도가 창설되어 정규군으로서 호국의 선봉이 되기도 했다. 고려 말엽에는 전선조병(戰線造兵), 조총사격수, 화약제조병 등 전문적인 기술병은 승군이 독점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고려에 있어 불교와 국가간의 관계가 신라와 그 유형을 달리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와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것은 같으나 신라의 불교는 국민윤리 확립에 주안점을 두었던 데 반해 고려불교는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국가의 안녕을 비는 기복소재(祈福消災) 형태로 변모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신라불교에 있어서도 기복의 형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질적 차원에서 고려불교와는 궤를 달리한다. 불교에 대한 국가의 융숭한 대접으로 인해 국가재정이 고갈되고, 승려의 타락으로 척불론이 대두된 것은 어쩌면 고려식 호국불교의 맹점에 따른 인과응보일 수도 있다.

조선왕조는 불교의 폐해를 여실히 목격한 터여서 초기부터 숭유억불정책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辯)》 등을 통한 배불론은 불교를 근본교리에서부터 현실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각도에서 그 병폐를 지적, 조선조 배불정책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배불정책과 관련해서 특기할 점은 승군의 조직이 국토수호와 자발적 구성요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관제(官制)에 의해 동원됐다는 점이다. 건국초기부터 주자학을 관학(官學)으로 신봉하던 유교주의자들은 승려를 무위도식자로 인식했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군역(軍役)이란 이름 아래 국민을 동원할 때 승려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다.

토목수리공사, 세미(稅米)의 운반을 위한 수로의 개착공사 등은 한 예에 불과하다. 또 각종의 지물(紙物)을 생산했던 관영제지소인 조지서(造紙署)에 승군이 배속됐다. 후에는 지물생산의 상납 책임을 사찰이 떠맡게 되면서 전국 대부분의 사찰은 과중한 지역(紙役)에 견디지 못해 사유재물(寺有財物)을 탕진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태종 때에는 한국불교사상 유례없는 폐사척불(廢寺斥佛)을 불러 교세는 일시에 된서리를 맞게 됐고 여진족과의 긴장관계가 조성됐을 때는 북방 경계에 승려들이 동원돼 정군화(定軍化)됐다.

이후 조선조 5백 년 동안 사찰은 기방이 되고 동불(銅佛)을 녹여 쟁기를 만들어야 하는 등 극심한 배불의 소용돌이 속에서 승려들은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산중에 은거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을 당하자 불교도가 분연 궐기하여 국난타개에 앞장섰던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임란 당시 구국 선봉에 섰던 군사들은 휴정·영규·유정 등에 영도된 의승군들이었다. 영규는 5백여 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성 탈환에 성공했고 강원도에서 승군을 조직한 사명당 유정은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군량미를 조달해 산성을 쌓았고 적진을 드나들며 왜장과 담판하는 등 전란의 극복에 크게 공헌했다.

선조 38년, 임진왜란 공신에 대한 녹공(錄功)이 있을 때 34명의 스님들이 1∼3등 공신에 포함된 것만 보더라도 승군들이 세운 공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전란이 끝난 후에도 승병들은 계속해서 군대조직으로 남아 산성을 쌓고 국토를 지키는 국방의 역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한다는 의승병들의 중생제도를 위한 자발적 행동이었다기보다는 왕권에 의해 조작되어 ‘병역’으로 바뀌어진 어용호국이었으며 또 다른 불교탄압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조선왕조의 강권에 계속 시달렸다는 얘기도 되지만 본분사로의 회귀를 망각한 채 스스로 왕의 신병(臣兵)으로 처지를 낮추어 관계개선을 도모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러한 불교는 결국 자생능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더욱더 중생들과 멀어지는 은둔불교로 몸을 감추게 된다. 전법도생의 부처님 유촉이 조선사회에 들어와 단절되는 순간이기도 하거니와 이 땅의 중생이 어떠한 삶을 살든 ‘나 몰라라’ 저버리는, 보살도로서의 직무유기이기도 했다.

세속사회는 이러한 와중에서도 격변의 물줄기를 타게 된다. 개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19세기, 한반도에도 변화의 파고가 출렁댔지만 산속 깊이 은둔해 있는 불교는 이 사실마저 모른 채 좀체로 동면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결국 불교는 서구화로 줄달음치는 새로운 시대사조 속에서도 이렇다 할 중심을 잡지 못하고 격변의 와중에 점차 중생들로부터 멀어져가게 되었다.

이처럼 불교가 더욱 혼란과 고통의 와중을 헤매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교가 중생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중생들로부터 멀어진 것은 불교 내부에 그 요인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정법에 기초하지 못한 ‘호국’의 오도에 그 원인의 일단이 있다고 본다.

4. 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중생의 구원은 중생이 살고 있는 현존의 시간과 장소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호국은 중생이 구원될 수 있게끔 해탈하는 데 필요한 시간적 공간적 형태를 지켜주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모순된 사회의 정화와 중생의 삶을 안락하게 만들어 깨달음의 성취를 돕고 현실의 예토를 불국토화하자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했었다.

불교의 최고 이상이 일체의 중생 제도와 불국토 건설에 있는 만큼 ‘불교’ 앞에 어떠한 관형어가 붙든 그 목적하는 바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호국’이라는 관형어는 컴퓨터로 말하면 일종의 ‘소프트웨어’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방편(내용)과 권도(실천)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목적을 향한 환경설정만큼은 뚜렷하게 제시돼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방편과 권도가 목적에 반한다면 그것은 불교를 가장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역사 속의 호국불교가 과연 이 목적을 제대로 수행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많다. 중생 개념의 ‘민’과 불국토 차원의 ‘국’과의 관계에서 호국이 성립돼야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호국불교의 역사적 사례는 줄곧 이와 배치되고 있다. ‘호국’의 역할만 강조됐지 ‘불교’의 역할은 절대 부족했다. 즉 ‘깨달음(구원)’의 전제조건인 평화를 거스르는 정책에 대한 견제, 정법으로서 중생을 제도하려는 노력, 중생사회를 이롭게 하려는 실천적 행위 등은 우리의 호국불교사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반면에 세속왕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눈길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충성심만이 호국불교의 이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 예로 신라시대 왕이 지방출장을 갈 때 늘 A급의 수행인물로 승려들이 동반했다. 왕의 지방출장은 민심수렴의 목적도 있었지만 충신정성(忠信精誠)과 위국충절하는 공로자 위로에 보다 큰 의도가 있었고, 왕권의 강화와 지방출장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승려들의 국왕 수행은 국왕에 대한 충성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불교계의 행정적 수반자이자 정신적 지도자로 일컬어지던 승통 또는 국사 등은 왕에 대한 충성심을 백성들에게 호소하거나 왕의 생일 또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불교행사가 있으면 직접 제문을 지어 올리는 등 중생을 돌보는 것보다 국사와 관련된 일에 더 비중을 두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불교의 안위를 위해 불가피한 점이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중생 제도와 불국토 건설이라는 목적을 위한 노력도 함께 병행됐어야 했다. 왜냐하면 불교 본래의 목적이 외면된 호국불교는 그 이념과 원리를 놓고 본다 해도 진정한 호국일 수 없기 때문이다. 호국불교는 교의적으로도 잘못된 행태를 걸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다. 불교의 교리는 중생의 이런 저런 문제를 해결하거나 또는 ‘깨달음’을 위한 환경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비폭력의 효용성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 나타난 호국불교는 왕권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대국가의 정복을 합리화하고 계급구조마저 심화시키는 배후역할을 맡았다. 실제로 원광의 세속오계와 걸사표는 당시의 국가관과 결속돼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과 영토확장에 정신적 무기로 활용됐고 가야 정복을 단행하는 데도 일조했다. 또 하나 간과돼서는 안 될 것이, 불교는 특정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사해동포를 아우르는 세계성을 띠고 있으며, 계층과 세대, 시간과 공간을 한정짓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구촌 어느 구석의 어느 한 중생이라도 빠짐없이 구제하겠다는 비원을 세워놓고 있는 종교가 불교다.

불교의 ‘세계일화’는 일불제자(一佛弟子)로서의 전중생의 화합과 평화를 의미한다. 그런 불교는 세계의 종교이지 어느 특정 국가와 특정 민족만을 위한 종교일 수는 없다. 다른 종교의 예를 들어보자. 가령 개신교의 경우 그들은 ‘기독교 대한 쭛쭛회’ ‘기독교 한국 △△회’ 등의 이름을 사용한다. 이들이 스스로를 이렇게 호칭하는 것은 기독교의 세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불교는 ‘대한불교 쭛쭛종’ ‘한국불교 △△종’ 식이다. 스스로 불교를 한 국가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가두어 놓고 있다. 마찬가지로 호국불교라고 했을 때의 ‘호국’은 불교의 세계성을 한 나라에만 한정지우는 모순을 지니게 된다.

물론 한 나라의 평화 없이 전세계의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세계성 한정’ 발언은 설득력을 잃게 되지만 ‘호국’의 생리는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수반하고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완고한 민족주의는 공존공생의 윤리보다는 자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민족간의 충돌이 있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진다는 점에서 불교의 원리와는 차이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가 우선된다면 불교의 핵심적 가치인 사해동포적 자비주의는 상대적으로 박탈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과거 고구려·백제·신라가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서로 침공과 방어를 거듭했거니와 태국과 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 등 아시아의 불교국가들도 그들의 민족적 이익 앞에선 불교의 화쟁과 평화와 화합 자비정신은 공중에 떠있는 ‘안개사탕’에 불과했다. 중생세계에 있어서 ‘불교’라는 광대무변한 틀이 ‘호국’이란 작은 그릇에 맥을 못췄던 것이다. 이는 호국불교의 실천논리를 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반성의 대목이 되고 있는 것은 불교의 호국활동 내용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거나 기복적 형태로 흘렀다는 점이다. 고려조 당시 각종 법회종류가 83가지에 달했고 시행 횟수만도 공식적으로 1,038회나 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 국가가 주관하는 호국 기원 법회는 대규모로 치러졌고 그 횟수도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호국법회라는 것이 정법 선양과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과 확산의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을 불보살들에게 기원하는 형식적인 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정법의 실천과 국민들의 가치관 함양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했음은 당연했다. 따라서 호국법회는 왕실의 발전과 번영을 가져오는 대신 막대한 국고를 탕진하고 불교의 타락을 부채질함으로써 오히려 고려조의 멸망을 앞당기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류의 기원법회와 불보살의 가피만을 기원하는 기복식 법회가 날로 확산되고 있음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호국의 ‘국’은 중생이 살고 있는 터전(국가)이 돼야 함에도 일부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왕실에 국한됐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호국의 형태는 훗날 조선조에 들어와 왕실의 버림을 받자 중생 제도라는 본분사를 망각한 채 깊숙이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 것에서 잘 드러난다. 호국불교의 자생적 기반은 중생에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호국불교는 거꾸로 왕실과 일부 권력자를 상대로 한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런 점에서 지난 86년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이 “호국은 권력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民)를 보호하는 데 그 참뜻이 있다.”고 한 것은 본인의 행보와 관계없이 의미만으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5. 호국불교의 나아갈 방향

지금까지 호국불교의 이념과 원리를 순불교적 입장에서 살피면서 역사적으로 전개된 호국불교의 사실(史實)을 반성적으로 고찰해보았다.

그 결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정법에 기초하지 않은 불교는 생명력의 소진을 불러오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폐해를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드러났지만 특히 고려불교의 경우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빈번했던 정교 유착적인 각종 법회로 말미암은 불교의 타락과 이에 따른 생명의 단축, 국고의 탕진으로 인한 백성의 경제적인 핍박 등은 좋은 교훈으로 남고 있다. 앞으로의 호국불교의 나아갈 방향도 이러한 뼈아픈 교훈을 거울삼아 정법에 입각한 측면에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전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정법은 국법을 포섭하고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각종 난마를 풀어헤칠 수 있는 진리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먼저 호국불교가 제대로 정립되기 위해선 불교적 입장에서의 호국이 무엇인가 하는 그 정확한 의미를 정립해야 한다. 호국불교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확립될 때 비로소 호국불교에 대한 이념과 철학이 바로 설 수 있다. 몇 년 전 교계에서는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구호만 그럴 듯 했을 뿐 ‘세속화’와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사회화’의 이념과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아 혼란스러움마저 안겨준 예가 있다. 마찬가지로 ‘불교’ 앞에 붙는 ‘호국’의 관형어가 어떤 정신과 실천방안을 가져야 될는지 확실하게 하기 위해선 먼저 그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부처님은 《인왕반야경》에서 파사익왕에게 호국의 방법으로 ‘반야바라밀’을 수지해 실천하도록 당부하였다. ‘반야바라밀’이란 생사를 벗어나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일컫는다.

즉 중생들로 하여금 저마다 참다운 삶과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공업(共業)중생으로서 다함께 불국토를 만들어나가는 데 기여토록 하는 실천방안이 바로 호국의 원리다. 불교적 호국의 실천방안은 여러 가지 형태가 가능하다. ‘사회 및 경제정의의 실현’ ‘복지시설의 확충’ ‘인류평화의 구축’등 불교가 현대사회에서도 앞장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이러한 과제를 세부적 실천운동으로 이끌어내고 국민생활의 전반까지 파고들어 성과를 축적해낸다면 호국불교는 분명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 둘째는 확대 재생산적 구조를 갖추는 일이다. 고려와 조선불교가 진실로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었던 이유는 왕실에만 의존했던 그 당시의 생리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불보살의 가피에만 의존케 하는 형식적인 중생 교화에 있었다. 당연히 모든 법회 및 의례는 기복적 형태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불자들이 행해야 할 계율의 실천 등은 암묵적으로 무시되었다. 이런 구조로는 전법도생의 부처님 유촉이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중생에게 필요한 불교, 구석구석 중생을 찾아가는 불교이면서도 제발로 중생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불교가 돼야만 한다. 물론 중생을 유익케 하는 요소, 만중생에 대한 평화와 자비와 구제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갖추게 된다면 불교의 세계화는 그리 먼 시간의 일은 아니다. 이렇게 될 때 중생 구제의 호국원리는 보다 탄력적인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는 호국의 대상은 분명 중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국의 ‘국’은 왕이나 권력자가 아니라 중생과 중생이 살고 있는 터전이다.

중생과 중생의 터전을 ‘호국’의 ‘국’으로 파악했을 때 호국불교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중생이 살고 있는 터전이 전쟁과 환경 문제 등으로 살상과 고통의 위기에 빠지게 되면 이를 해결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또한 압제자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면 그 핍박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 또 중생이 탐진치 삼독과 무명으로 숱한 반목과 갈등 대립을 야기하면 진리의 등불을 밝혀 해탈의 세계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중생을 위하면서 참된 행복과 영원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호국불교가 해야 할 일이다. 넷째는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에도 나와 있듯이 파사현정의 정신을 실현해야 한다.

절대부동의 엄청난 힘을 가진 권력자라 할지라도 사악함이 있으면 사천왕의 기개로 조복받아야 중생들을 위해 마땅할 것이며, 중생이 살고 있는 사회가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로 만연하다면 정의로서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불교가 왕조시대나 일제시대에 행했던 왕실의 ‘천수’나 ‘무운장구’를 축원하는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생을 위한 천수천안의 불교가 돼야 한다.

중생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무엇으로 인해 신음하는지 언제 어디서나 최첨단 고정밀의 안테나처럼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는 중생들이 당장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있는데 법당에서 요령을 흔들며 ‘세계평화’를 아무리 축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쟁과 기아와 질병으로 중생이 죽어 나가면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의식이나 해주는 불교가 되지 말고 사전에 그와 같은 죽음의 원인을 차단하는 노력을 기울여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전자문명시대를 살고 있는 중생 세계는 현재 말 그대로 전광석화와 같은 변화를 실감하며 새로운 세기에 적응하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가 새롭게 재편되며 인류의 삶도 크고 빠른 폭으로 변화돼 가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질 높은 문화와 전자문명도 인간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불교의 역할이 쉼없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때 그 역할을 부단히 찾아내서 중생과 함께 호흡하며 구원의 환경설정을 보다 쾌적하게 가꿔줘야 할 의무가 불교에 있다. 그 실천적 방향은 그간 호국불교에서 보여준 잘못된 관행과 불명예를 털어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호국불교의 참신한 새출발이기도 하다.<끝>

대전대학교 국문과 졸업. 불교신문 취재편집차장을 거쳐 법보신문 편집부장을 역임했다.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논문으로 <오도송(悟道頌)에 나타나는네가지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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