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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관점에서본 여성 성불론
이현옥 동국대 강사
[3호] 2000년 06월 10일 (토) 이현옥 동국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불교가 발생한 인도사회는 여성의 처우와 지위가 아주 낮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성은 인류 역사의 발전단계에서 낮은 대우와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집단이었다. 따라서 여성의 문제는 일시적이고 단면적이기보다는 중층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갖는다. 그것은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인도사회는 가장 고질적인 여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곳이며 이 문제가 사회 문화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지역적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불교가 여성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인식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는 여성과 같은 소외 계층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고 동등한 입장에서 교화와 구제의 대상으로서 간주했다. 즉 반여성적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하여 자기 개혁과 비판을 통하여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와 능력을 가진 평등한 인간으로 인식하는 사상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개혁과 자기변모의 노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여성성불론(女性成佛論)이다. 여성성불론이란 여성의 자기 개발과 종교적 완성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도 자기 개발과 종교적 수행을 통하여 궁극적 깨달음을 얻어 완벽한 인격체를 가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에 대한 불교의 기본적 인식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성불론은 시대에 따라 변용되고 왜곡되어 본질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현재도 이러한 점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기존의 사회적 특성과 문화적 저항이 아주 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계가 이러한 편견과 저항을 극복해 가며 발전시킨 여성성불론은 소외와 갈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미래사회에 이론적 토대가 될 것이다. 또한 여성운동의 발전방향을 정립하는 데도 큰 의미를 갖는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러한 여성성불론의 성립과 사상의 변천과정을 인도사회와 불교교단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 그 의미와 중요성을 논의해 보려 한다.

2. 불교와 고대 인도사회의 여성관

불교가 출현하기 이전의 고대 인도사회는 토착 원주민과 아리안의 문화가 융화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질적 문화의 융화는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그 깊이와 폭을 더해 가면서 독특한 인도문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인도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여성적 문화는 사회문화를 창조적으로 이끌기보다는 여성의 위상을 왜곡, 폄하하는 불균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문화적 흐름은 오랜 세월 동안 인도문화권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인도사회가 문화적으로 반여성성을 띠게 된 원인을 통시적 시각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인도사회의 반여성적 문화를 지양하고 새로운 여성관을 제시함으로써 친여성적인 문화를 창출했던 부처님의 사상을 이해하려 한다.

1) 고대 인도사회의 전통적 여성관

인도는 고대부터 다민족의 활동무대였으나 인도문화 형성에 주된 역할을 한 것은 아리안이었다. 아리안은 외래에서 이주한 민족이었다. 아리안 족이 인도에 침입해오기 이전에 인도에는 이미 여러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다양한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원주민 중 북부 인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문다 인과 인더스문명을 일으킨 드라비다 족이 인도의 토착문명의 주종을 이룬다. 그들은 주로 평원지역에 소규모 촌락을 형성하여 모계 중심의 가족제도와 부족원으로 구성된 집단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공동사회의 수호신으로서 여신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성기·뱀·수목 등을 우주의 근원으로 여겨 숭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족제도는 모권을 우위로 하는 문화를 꽃피우는 계기가 된다. 특히 그들의 수호신이 여신이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이 문명이 여성 중심적인 사회구조를 가졌던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도 토착문화의 여성 중심적 성향은 새롭게 인도로 이주해 온 아리안과는 상반된 문화였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도사회 속에 다양하고 독창적인 친여성적 문화를 뿌리내려 오랜 세월 동안 인도문화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외래 민족인 아리안의 문화는 가부장제도로서 대가족 생활을 영위하는 씨족이나 부족단위의 사회구조였다. 이처럼 아리안 문화는 가부장제도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가족이나 사회구성원 속에서 남성의 가치와 권위는 여성에 비해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최소 규모의 사회단위인 가족 내에서는 남성 가장이 중심이었고 이러한 체제를 확대해서 부족단위에서는 왕이 중심이 되었다. 이 가족제도가 그 민족을 단합하고 운용하는 측면에서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성 우위의 문화를 낳는 부정적 측면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안 족이 인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혼혈이 일어나고 친여성적인 토착문화와 상충·융화하면서 초기에는 여성적인 문화에 대해 관대하고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아리안 족의 성전인 베다에는 여러 여신이 등장하며 《리그베다》와 같은 문헌에는 20편의 찬가가 우샤스라는 새벽의 여신에게 헌정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토착 원주민이 여신을 우주의 근원으로 인식하고 신봉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베다 시대에는 제례 및 종교의식에도 여성이 참여했으며 공식적인 중요한 행사에도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가정 내에서도 남편을 도우며 배우자로서 권리를 행사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부부란 개념은 ‘가정재산의 공동소유자로서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는 자’를 의미했던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도 여성은 남성과 같이 교육의 기회를 동등하게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우주의 심오한 이치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여성 철학자들이 인도사상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초기 베다 시기의 문화가 여성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은 당시의 인도인들에게 형성되어 있던 현세 안락적인 가치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사자의 영혼은 죽은 후 저승세계로 가서 조상과 재회하여 사후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 이 사후세계는 광명과 환희, 술과 가무가 있는 이상세계로서 제사를 잘 모시고 타인에 대해 보시를 잘 하고 고행을 하면 이 세계에 갈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악인에 대한 징벌이나 사후 심판의 관념이 아직 형성되지 않아 내세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은 그다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내세보다 현세의 즐거움과 안락을 더 중시했다. 《리그베다》 Ⅲ, 53이나 Ⅱ, 6에는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와 많은 자식들과 풍부한 재산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현실적인 기원들로 가득차 있다. 여기서 그들이 현실적인 가치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양순한 아내를 ‘가장 좋은 안식처, 최상의 쾌락’이라 하며 행복 중 제일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 아내의 가치와 지위를 그들이 상당히 중시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기 직전의 기원전 6∼5세기가 되면 아리안계의 문화가 우세해지면서 카스트(四姓) 제도가 생긴다. 그리고 성직자 계급인 바라문을 중심으로 인도사회는 계층적으로 분화되어 신분이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카스트 제도는 네 계층 간의 혼인과 물적교류 그리고 직업의 계승을 엄격히 금지하고 거주장소도 한정하여 계급과 신분의 차별과 신분의 상호이동을 엄격히 금지한다. 카스트 제도가 인도사회에서 정착하면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점차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

특히 계층간의 혼혈을 막고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에게도 정조의 의무가 요구되었다. 자연히 가족 내에서의 아내나 딸로서의 지위는 낮아지고 사회활동에 많은 제약과 의무가 따랐다. 또한 여성이 사회에서 활동하는 것도 통제되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출현하기 직전의 인도사회에서의 여성은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인권과 권리가 현저히 낮아졌으며, 자신의 신분과는 무관하게 낮은 신분계급에 해당하는 소외계층으로 점차 전락해 가고 있었다.

2) 여성의 출가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장

기원전 5세기 중엽 불교가 출현하고 나서, 여성이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종교생활을 한 흔적은 바로 출가승 야사의 어머니와 아내에 관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여인은 야사를 좇아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출가자들이 경제적으로 지탱할 수 있도록 재가자로서 옆에서 도우며 불교교단의 성립에 기여한다.

이들이 최초의 여성재가신도이다. 재가여신도와 불교와의 만남은 상당히 초기에 이루어졌으나, 여성의 출가는 후에 이루어진다.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에 대하여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여성 출가자, 즉 비구니의 출현과 그 교단의 성립은 상당히 늦어지게 된 것이다.

팔리 니카야에 의하면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는 출가에 뜻을 세워 처음으로 카필라밧투의 냐그로다 동산에 머물던 부처님을 찾아가서 세 번이나 가르침과 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후에도 그녀의 결심은 변하지 않아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다음, 뜻을 같이 한 샤카 족의 여인들과 함께 부처님을 좇아 정사의 문밖에 선 채로 출가의 허락을 재차 간청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자 아난다가 세 번이나 부처님에게 그들의 뜻을 전했지만 부처님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아난다는 “여성도 출가 수도하면 최후에는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뒤 부처님이 “여성도 출가 수도하면 아라한과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대답하자 그 말에 확신을 갖고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재간청했다. 부처님은 고심 끝에 비구니에게만 적용되는 여덟 가지 조항의 규칙(八敬法)을 준수하는 조건으로 출가를 허락하게 된다.

팔경법은 비구 승단의 보호와 감시를 전제한 행동규범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하파자파티의 출가 이후 부처님의 아내였던 야쇼다라를 비롯하여 샤카 족의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하고 나중에 그외의 여성 출가자들이 합류하여 비구니 교단이 발족되었다. 비구니 중에는 남성 출가자를 능가하는 자질을 갖추고 폭넓은 활동을 하는 자도 나타난다. 이러한 일화에 보이는 여성 출가자에 대한 부처님의 미온적인 태도는 부처님이 여성의 능력과 자질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여성의 출가에 대한 부처님의 신중한 태도와 우려는 승단 내의 종교 생활과 당시의 인도사회의 생활양식과 맞물려 있다. 남성 출가자, 즉 비구는 출가 생활의 원칙으로 네 가지 규범(行四依法)을 지키게 되어 있다.

첫째는 걸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는 아주 남루한 옷 한벌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는 나무 아래 정좌하는 선정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넷째는 비상약 이외에는 어떤 물건도 소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도의 자연환경에서 연약한 체력을 가진 여성이 이러한 수행생활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의 기후는 고온다습하여 3개월간 비가 내내 오는 우기가 있어 출가자의 유행 생활을 어렵게 했다.

특히 숲속에서 홀로 좌선하며 살아가는 수행 생활은 맹수와 도적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출가자로서는 아주 힘들고 목숨을 위협받는 행위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많은 출가자들이 실제로 그와 같은 이유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의 승원처럼 정착 생활이 아닌 유행 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여성 출가자들은 남자 출가자의 보호와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출가 생활은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여성들을 승단 내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교 출현 당시의 인도의 사회구조는 카스트 제도가 정착된 계급사회였으므로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많은 제약과 의무를 부가했던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여성들에게 교육이나 사회활동뿐만 아니라 인도인들이 가장 중시했던 종교활동도 금지했으므로 여성의 출가 수행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러한 인도인의 반여성적 시각은 초기경전인 《불설옥야경》에서 여성의 몸을 열 가지 나쁜 것(十惡事)으로 규정하거나 《앙굿타라 니카야》 Ⅱ에서 ‘여성을 자제력이 없고 질투나 탐욕이 많으며 지혜가 적은 것’ 등으로 표현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당시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선입감의 정도를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도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일소하고 그들을 승단 내로 받아들일 경우 오는 불교계 내외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신중히 고려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친여성적 태도는 세계현상을 상호연관적으로 보는 부처님의 연기설이나 실체화 고착화를 부정하는 무아설에 그 사상적 근거를 두고 있으며, 갈등과 대립을 비판하는 무소유의 실천 수행에 의해 인도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경전에서 부처님은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적 신분적 구별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한다. 《숫타니파타》에서 “출생을 묻지 말라, 행위를 물어라.”라고 말하거나 “몸을 받아 태어난 것들에는 각기 구별이 있지만 인간 사이에서는 그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사이에서 구별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그 명칭에 의한 것뿐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평등관의 근저에는 개인의 출생보다는 사람의 능력이나 자질을 존중하는 면이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출신종족, 계급, 성의 차이가 사람을 차별하는 정당한 이유가 절대 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래서 불교교단에 들어와 수행자가 된 사람은 석자(釋子)라 부르며 완전히 평등하게 대한다.

그리고 출가 후의 연수에 따라 그 서열을 결정한다. 이와 같은 불교의 평등관은 당시 인도사회에 커다란 반항을 불러 일으키며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여성을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출신성분과 성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불교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불교계의 여성 인식과 그 의미

부처님의 여성 출가자 수용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적 여건에서 볼 때 거의 혁명적인 사건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도의 사회구조와 반여성적 풍토는 여성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으며, 특히 종교행위를 가장 신성한 행위로 간주했던 인도인의 생활방식에서 여성의 종교생활은 커다란 도전이었고 파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부처님 입멸 후 팔경법 속에 보이는 여성출가에 대한 부처님의 유보적 태도는 불교계에 여성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시각을 낳게 했다. 바로 여성불성불론(女性不成佛論)과 여성성불론(女性成佛論)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시각에 대한 논의는 불교계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밝히는 좋은 전거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불교계가 부처님의 사상을 어떤 시각에서 사회 문화적으로 교섭하며 친여성적 문화를 창출해 갔는가를 살필 것이다.

1) 부파 및 초기 대승불교의 반여성적 사상

초기 경전인 《아함경》이나 율전의 원형 부분에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가 널리 전파되는 과정에서 손상되거나 누락됨이 없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성관이 그대로 일반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함경》과 율전의 원형 대부분은 마우리아 왕조기에 성립되었다. 마우리아 왕조는 불교를 치국이념으로 할 정도로 불교에 호의적인 왕조였다.

이 점 때문에 인도사회에 팽배해 있던 왜곡된 여성관에 흔들리지 않고 부처님의 여성관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옹호하던 마우리아 왕조가 붕괴하고 슝가 왕조가 인도에 세워지고 바라문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불교는 종교적 탄압을 받게 되고 안정된 교단생활이 보장될 수 없었다. 불교계가 인도 정국과 교단 내의 변화로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불교계의 여성관도 사상적 혼란과 왜곡이 심화되게 된다.

이 시기 불교계는 여러 개의 부파로 점차 나뉘면서 각 부파교단마다 계율과 수행생활에 다소의 차이가 생기고 부처님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수행생활의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또한 바라문 부흥운동은 반여성적 문화를 일상생활에까지 미치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바라문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바라문교에서 주목한 것은 일반대중들의 일상생활을 깊이 지배하는 제의적 행위의 전통이었다. 그래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의무와 의례적 규범들을 상세히 규정한 경전이나 고대 인도인의 생활규범을 더욱더 완전하게 체계적으로 제정해 놓은 법전을 편찬하여 새로운 사상적 기틀을 다지게 된다. 이 법전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것이 《마누법전》이다.

이 법전의 저술 목적은 남성의 생애를 네 주기로 나누고, 이 시기 동안 지켜야 할 사회적 의무와 규범들을 준수하며 살아가도록 하여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마누법전》에서 규정하는 생의 네 주기는 남성 위주의 행위규범으로서 여성은 단지 남성의 보조자나 종속적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마누법전》에는 “여성은 늘 독립하지 않는다.” “계집은 본래가 악성이다.”는 등의 표현과 함께 “베다를 독송함이 불가능하다.” “제사를 행할 수 없다.”는 등 차별 발언이 곳곳에 실려 있다.

이러한 편견에 의해 여성은 재산소유와 유산상속에서 제한을 받았다. 여성의 존재 이유는 어디까지나 조상과 신들을 위해 종교적 의무를 계승해 나갈 사내 자식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누법전》 등에 “여성의 자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명기하고 여성은 출가 전에는 친정아버지를, 출가 후에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하는 의존적 인격체로 명시한다.

남편에게 복종하는 행동이 아내의 최고 의무이며, 조상의 제사를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식을 낳는 것이 절대조건이 되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성은 이혼을 당했다. 이것은 당시 인도인들이 현세의 자손이 영속적으로 제사의 책임을 다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내세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 제사를 중시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해 장례식을 집행하고 조상의 봉제사를 계속 이어갈 자식을 이 땅에 남긴 자만이 천상에 이르러서 환희에 흘러넘치는 생활을 지속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임신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처와 반드시 동침할 것을 종교적 의무로서 부과할 정도였다. 남아를 낳지 못한 여성이 버림과 구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바라문 부흥운동은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마누법전》과 같은 법전의 이론적 뒷받침에 근거해 여성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고 감시하는 반여성적인 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전대의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구속이 강화된 것이며 반여성적인 문화가 확고하게 인도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바라문 문화의 영향으로 불교계의 친여성적 성향도 변화를 겪게 된다. 불교계의 친여성성은 부파불교와 초기 대승불교 시대에 반여성적 인식으로 바뀌게 된다. 여성이 성불할 수 없다는 여성불성불론의 사상이 교단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여성불성불론은 주로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과 여래32상호설(如來32相好說)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먼저 여인오장설이란 여성에게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어 제석천·범천·마천·전륜성왕·부처님과 같은 존재는 될 수 없다는 사상이다. 실로 여성의 종교생활 전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불설초일명삼매경》 《법화경》 《대지도론》 같은 경론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인 《불설옥야경》 등에는 삼종설(三從說)은 있는데 오장설은 없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기원전 1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론에 보이는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여인의 몸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니, 첫째 범천왕이 될 수 없고, 둘째 제석, 셋째 마왕, 넷째 전륜성왕, 다섯째 부처님이 될 수 없으니 어찌 여인으로 성불을 빨리 이룰 수 있으리오.(《법화경》 〈제바달다품〉) 또 여인에게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니 전륜성왕·제석천왕·마왕·범천왕·부처님이 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대지도론》 권 2)

이와 같이 기원 전후의 불교 교단은 여성을 불완전한 인격체로 인식하여 부처님이 말한 평등사상과 위배되는 입장을 취하였다. 당시의 불교교단은 교단의 분열과 대승불교의 출현 등 내외적인 사상의 변화가 아주 심한 과도기 상태였고 불교계를 주도하던 이들 대부분이 남성 출가자들이었다. 또한 경·율·론을 정리, 편찬한 주체도 남성들이었으므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가 이 전적에 배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여성적 인식이 교단을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성도 하기 힘든 수행의 최고 경지에 여성이 오를 수 없다는 몰이해를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경론에 보이는 오장의 전거들이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의 친설(親說)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법화경》의 언급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 성문 사리불이 말한 것이다. 또한 《대지도론》의 내용도 논자가 말한 것이며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친설은 아니지만 교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경론에 삽입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승불교의 출현은 불타관(佛陀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부처님의 입멸 후 부처님을 추모하고 이상화하는 작업은 부처님의 신체를 32개의 모습으로 정형화하였다. 다시 말해 여래는 범부와 달리 성스런 32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 가운데 음마장상(陰馬藏相)이란 것이 있다.

여래의 성기가 말의 성기처럼 숨겨져 있다는 의미로서 여래는 여성이 아니라 바로 남성이라는 것이다. 원래 남자였던 부처님의 모습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여래를 남성으로 정형화한 것에 불과하나 후대에 여성불성불설을 자리잡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와같이 부파교단 및 일부 초기 대승불교 교단에 여성오장설과 여래32상호설이 유포되면서 교계에 남성 우위의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2) 대승불교의 친여성적 사상

부파불교나 초기 대승불교 내에서 여성불성불설이 자리잡으면서 교단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낮아지게 되었다.

실제 여성들의 교단 생활은 남성에 비해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부파승단 내의 남성 출가자인 비구가 250여 계를 지켜야 하는 데 비해 비구니는 348여 계에 이르는 엄격한 계율을 지켜야 했다.

이것이 여성의 보호와 배려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여성 출가자들의 종교 생활을 제약하는 점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교단이 남성 출가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여성 출가자들의 권리와 발언권은 미약한 상태였다. 따라서 여성불성불설이 교단 내에서 남성 출가자의 우위와 여성 출가자들의 종속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점이 여성 출가자와 재가신도들을 종교생활에서 배제하고 남성 출가자 중심의 교단 분위기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부파교단의 분위기는 결국 초기 대승불교에도 영향을 끼쳐 여래32상호와 관련한 여성불성불설을 나오게 한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원래 출가와 재가, 남성과 여성 등 대립적 인식의 틀을 부정하고 인간이 갖는 편견과 형상의 벽을 허무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하는 보살은 특정 계급 출신이나 성의 구애 없이 누구라도 자리이타적인 보살행을 하면 스스로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대승불교 교단의 기본적 입장과 기존 부파교단이나 부파의 영향권에 있는 일부 초기 대승불교의 교단의 태도가 서로 상충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세력을 가졌던 부파교단에 비해 약세였던 대승불교 교단이 부파교단의 반여성적 분위기를 쉽게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문화나 풍토에 익숙한 기존 교단의 반발이나 저항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반발을 무마하면서도 대승불교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여성성불론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필요에서 불교계에 등장한 것이 여성변성남자성불론(女性變成男子成佛論)이다. 여성변성남자성불이란, 여성은 여성 몸 그대로는 성불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남성의 몸이 된 뒤에야 성불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상은 불경이 편찬될 당시에 이미 있었지만 구체화된 것은 초기대승경론에 의해서이다.

《법화경》 〈제바달다품〉에는 용녀성불(龍女成佛)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용녀는 사리불에게 여성에게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므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듣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부처님께 나아가 성불할 것을 기원하며 열심히 수행을 한다. 그리고 여성의 몸에서 남성의 몸으로 변하여 성불을 이루는 것이 용녀변성성불에 관한 주요 내용이다. 여기서 부파승단에 존재하던 여성불성불설(女性五障說)을 사리불이 대신하여 밝히는 것과 여성의 몸으로 성불하기를 원하는 용녀가 대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타협점을 바로 용녀가 남성의 몸을 빌려 성불하는 변성성불론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여성변성성불론은 《법화경》 외에도 《무량수경》 《대아미타경》과 같은 민중신앙의 소의경전에 주로 나타난다. 《무량수경》에 보면, “설사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시방 무량 불가사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여인이 나의 이름을 듣고 환희하여 보리심을 일으켜 여자 몸을 싫어하고도 목숨이 다한 뒤에 다시 여성이 된다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습니다.”라는 원이 있다.

이는 보통 변성남자성불원으로 불리고 있다. 여기서 본원이란 부처님이 성불하기 이전, 즉 보살로 계실 때에 세운 서원이라는 뜻이다. 이 원은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法藏) 비구의 48원 중 제 35원에 해당하는 변성남자원이다. 이 원은 《대아미타경》에서는 제2원에 해당되는데, “나의 나라에는 부인, 여인이 없고, 나의 나라에 태어나는 여인은 모두 남자로 변하길 원한다.”라고 되어 있다. 당시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정도와 어려움이, 좋은 몸을 받아 안락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여성의 몸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토경전에서 대개의 사람들이 여성으로서의 삶을 원치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관무량수경》에서는 여성의 현세의 성불은 허락하지 않으나 당래의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의 내용도 있다. 초기 대승경전에서 여성이 남성의 몸을 빌려 성불하거나 또한 현세는 성불을 못하지만 장차 미래세에 성불할 수 있다는 과도기적인 여성성불론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존 불교계의 남성 우위의 수행관에 제동을 걸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중용적 이론으로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 교단은 여성변성성불론으로서 당시 교단 내외에 팽배해 있던 반여성적 문화를 일소하고 대승불교흥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여성을 종교 생활의 장으로 실제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친여성적 문화가 불교계에 점차 조성되자 간헐적으로 주장돼오던 여성즉신성불론(女性卽身成佛論)을 불교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법화경》 〈법사품〉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멸도한 이후에 남 몰래 한 사람을 위해 《법화경》의 한 구절이라도 설하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바로 여래의 사도요, 여래가 보내어 여래의 일을 한 사람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설법자를 선남자 선여인으로 보고 있다. 《법화경》에서는 설법자를 법사(法師)라 부르기도 하고 보살(菩薩)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이것은 여성이 교단 내에서 남성의 보조자가 아니라 법을 설하는 주체자이자 실천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팔리 증지부에는 한역 아함경과는 달리 ‘선남자 선여인’이란 호칭을 쓰지 않고 ‘선여인 선남자’라며 여성을 먼저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대승교단 안에 여성이 실제로 상당히 많았으며 남성 못지 않게 활발히 활동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후에 대승불교 교단이 인도 사회에 정착하자 여성성불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직접적으로 여성성불을 주장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여성즉신성불론이다. 여성의 몸 그대로 성불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이 사상의 핵심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성 인식을 가장 잘 계승한 불교의 완벽한 여성론이라 할 수 있다. 《유마경》과 《승만경》 같은 중기 대승경전에는 여성의 몸으로 직접 성불하는 천녀와 승만부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마경》에서 천녀는 수행의 가르침을 주어야 할 성문승 사리불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남녀의 차별은 없으며 실로 공한 것이라는 심오한 이치를 말한다.

이렇게 사리불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수행정진하여 성불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 《승만경》에도 승만부인이 대승보살도의 구현에 의해 부처님으로부터 성불의 수기를 받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나타난다. 여기서 승만부인은 당래에 수기를 받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대신해 법을 설하는 설법자이다.

후에 《승만경》은 이러한 면모 때문에 여래장사상의 근간이 되면서 계층과 성에 구애되지 않는 모든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대승불교는 대승경전에 보이는 여성즉신성불론을 통하여 부처님의 친여성적 인식 태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계층과 장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새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며 창의적인 친여성 문화를 주도해 갔던 것이다.

4. 맺음말

고대 인도사회는 혼혈과 문화적 융화 속에서 친여성적인 토착 문화와 반여성적인 아리안 문화가 공존하다가 우주의 본질을 여성성으로 보는 토착민들의 세계관이나 문화적 성향, 그리고 아리안들의 현세적 가치관이 혼합하여 친여성적인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교가 출현하기 직전의 인도사회는 아리안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제식만능주의와 바라문의 사회적 부상으로 사회구조가 계급화하면서 반여성적 인식 태도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계급제 사회로 변모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성의 불교입문과 그에 대한 부처님의 허락은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는 혁명적 사건에 비견될 만한 일이었다.

부처님의 친여성적 인식 태도에서 그가 여성을 남성과 같은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있으며, 근원적으로 인간의 구원과 해탈은 외부로부터의 간섭이나 제제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문제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수행방식과 사회적 편견 때문에 여성의 출가자를 신중히 고려했던 부처님의 태도는 후에 불교계에 여성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인식을 낳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하나가 부파불교나 초기 대승불교 교단 일부에 존재했던 여성불성불론이고 다른 하나가 대승교단이 기본적으로 견지해온 여성성불론이었다. 초기불교계에 없었던 여성불성불론이 불교계에 나타났던 것은 인도 정국과 교단 내의 변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불교를 옹호하던 마우리아 왕조가 붕괴하고 바라문교를 신봉하는 슝가 왕조가 인도 정국에 등장하였다. 이어 바라문 부흥운동이 일자 남자의 생애를 네 주기로 나누고 《마누법전》과 같은 법전에 의해 사회적 의무와 제례규범을 지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법전은 출가자와 일반대중들의 생활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까지 바라문 문화가 급속히 파고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전에서 규정하는 생의 네 주기는 남성 위주의 행위규범으로서 여성은 단지 남성의 보조자나 종속적 존재일 뿐이며 제사를 모시고 남아를 낳는 행위 외에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은 전대의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구속이 강화된 것이며 반여성적인 문화가 인도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바라문 문화의 영향으로 불교계의 여성인식도 변화를 겪어 여성이 성불할 수 없다는 여인오장설과 여래32상호설 등이 율장 혹은 《법화경》이나 《대지도론》 등에 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주체는 모두 성문승 사리불처럼 부처님 이외의 사람들이었으며 부처님의 친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불교계에 남성 우위의 문화를 형성하게 한 것만은 분명하였다. 당시 실세였던 부파교단의 반여성적 인식 태도를 쉽게 해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 교단의 반발을 무마하고 부처님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여성성불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대승불교계에 등장한 것이 여성변성성불론이었다. 이 과도기적인 사상은 기존 교단과 갈등을 빚지 않고도 대승불교흥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여성을 수행 생활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인식이 차츰 불교계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자 여성즉신성불론이란 여성성불론을 《유마경》과 《승만경》 등에서 전면에 내세우면서 불교사상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인오장설과 여래 32상호설에서 거론되던 여성불성불론은 여성변성성불론이란 과도기적 형태를 지나 여성즉신성불론이란 형태로 사상적 완결을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성성불론은 불교계 내외의 여성 인식 변화와 삶의 방식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사회계층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사회계층간의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불교의 실현에 크게 공헌했던 것이다. <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논문으로 <청변의 공사상 연구><인식과 언어의 가유(暇有)의 문제 ><용수 공행관의 형성과 그 의미><용수의 정치이념과 그 실제-보행왕정론을 중심으로>역서로는 <반야 등론석><보행왕정론><회쟁론><용수보살권계왕송><권발제왕교계><용수보살위선타가왕설법요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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