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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남 불교 페미니즘의 이상과 현실
영산원불교대학교 교수
[3호] 2000년 06월 10일 (토) 하정남 영산원불교대학교 교수

1. 서구문화와 불교의 만남

불교는 오랫동안 동양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종교였다. 그러나 불교가 동양과 아시아권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인 구미에 전파되었다.

문화적으로 동양과 서양은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미국에는 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이 사회 흐름을 좌우하고 있다. 불교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같은 동양권에서도 각 나라의 지배적인 사상과 문화의 영향으로 원시인도에서 시작된 초기불교의 형태와는 다른 다양한 불교의 모습을 발전시켜 왔다.

이제 동양을 떠나 서구에 이른 불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미국에서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초기에는 거의 학문적인 관심이었으나 점차 깊은 신앙과 수행의 단계를 거치면서 불교의 중심 가르침의 요체를 파악하고, 전통 불교 속에 있는 비본질적인 요소들과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다.

이제 미국인들은 나름대로의 불교에 대한 검증을 거쳐 아시아적 문화 틀을 과감히 벗고 새로운 아메리칸 불교를 지향하고 있다. 그 새로운 불교의 형성에 특히 페미니즘의 영향은 막대할 것으로 보인다. 리타 M. 그로스와 샌디 보우쳐를 비롯한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불교학자들과 여성 불자들은 진정한 미국적 불교는 여성들에 의해 보다 철저히 변화될 것이며, 새로운 불교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1)

이 글은 필자가 체험한 미국에서의 불교와 여성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미국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미 정보화의 흐름을 타고 미국의 여성운동과 학문 분야의 흐름은 세계가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해외에서의 여성과 불교에 관련된 필자의 소개 범위는 미국을 위시한 영어권이지만 지엽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계 여성운동의 흐름은 종교 내의 가부장제에도 이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인 만큼 세계 종교계의 큰 변화와도 맥이 통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글에 인용된 자료는 불교와 여성 관련 문제에서 제기되고 있는 쟁점들을 잘 간추린 것들이다. 아마 한국에 이미 소개되기도 하였을 것으로 본다.

보다 자세히는 본문에서 혹은 각주에서 내용 및 저자에 관해 소개할 것이다. 또한 내용을 정리하는 데 이론 중심보다 실제 불교수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체험과 관점과 그들의 주장들을 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2. 미국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미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호감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절 영국의 학자들이 인도의 고문화를 발굴하면서 팔리 어로 씌어진 원시불교경전을 비롯하여 산스크리스트 어로 된 대승불교 경전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수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어 이 경전들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영국, 미국, 캐나다를 비롯하여 서구의 호기심 많은 학자들의 의해 연구되었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던 일본인 스즈키 다이세츠에 의해 선불교(禪佛敎)가 소개되었고 점차 미국인들이 선수련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또한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학하였던 티베트 승려 초감 투룽파의 영향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후 미국에 건너와 콜로라도 주 보울더에 위치한 나로파 불교학교(Naropa Institute in Boulder)를 세워 일반인들이 티베트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막대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불교의 기본 가르침과 수행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또한 특히 살아 있는 부처로 알려진 신비적 존재 즉 달라이 라마의 영향력도 대단하다. 물론 이러한 외부적 영향만으로 미국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내면적으로는 미국이라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미국 민중들이 가장 프라이드를 갖는 부분은 평등과 자유주의를 위해 싸워 왔다고 자부하는 자신들의 역사이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를 싫어한다. 또한 미국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유태·기독교 문화의 전통에서 자라 왔다. 개개인이 직접적으로 종교에 참여하여 교육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러한 종교문화의 토양 속에서 길러졌다. 또한 미국은 100여 년 이상 페미니즘의 운동을 이끌어 왔고, 그 영향력은 사회·종교·학문 등 모든 문화의 영역에 미치고 있다.

이미 페미니스트들은 종교 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경제 등 전영역에서 여성들 스스로를 규정하고 변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미국 여성들이 자신의 전통종교가 아닌 불교를 믿는 이유는 이러한 배경과 관련이 있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해탈로 표현되는 자유정신이 강하다. 불교의 자유정신은 공(空)사상으로 표현되는 근본 진리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자유정신은 스스로를 자유주의 신봉자로 여기는 미국인들에게 관심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종교문화의 주류인 기독교의 원죄설에 의하면 인간은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잠재적인 악을 내면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이므로 미국인이 스스로 자부하는 자유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원죄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2) 또한 기독교의 교의는 절대화되어 있어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으며 의심해서도 안 된다. 페미니스트 불교학자로 잘 알려진 리타 M. 그로스는 대학시절 신약의 몇 가지 부분에 대한 신빙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을 이유로 그는 루터란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제명되었다. 이러한 유태·기독교 문화는 자연히 자유와 합리성을 원하는 미국인에게 멀어질 수밖에 없다.3) 그들이 유태기독교와 다른 새로운 대안적인 영성을 추구할 때 불교의 가르침은 신선하게 다가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미국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누리면서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경제적인 활동과 자기 개인의 전문직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한 현실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압박하는 사슬이 되면서 정신적 여유를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해탈을 추구하는 선수련은 정신적 자유를 원하는 미국인들에게 매력적인 영성의 길이다. 평등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주장해 온 미국은 또한 여성의 자유를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의 모든 관행에 항거하며 여성이 완전한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사회·정치·경제·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남자들의 보조역이 되기를 거부하고 남자와 동등하게 주체적으로 참여하고자 정치적 운동을 열심히 전개하였고 그 성과 또한 괄목할 만하다.

그런데 페미니즘 운동가들의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분노(anger)’와 관련이 있다. ‘분노’는 여성운동가들에게 대한히 중요하다. 여성이 가부장제에 수동적으로 안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자기선언을 하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한 용기는 ‘분노’의 감정에서 나온다. 분노는 자포자기하지 않는 고귀한 정신의 힘으로 여성들은 그 에너지로 자신의 변화와 사회변화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서구 전통에서 ‘성스러운 분노’라는 개념을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분노는 단기간의 목적 성취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분노는 인간에게 긴장을 필요로 하므로 그 힘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여성운동가들이 쉽게 지칠 수 있다.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불교가 이러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한다고 보고 있다. 샌디 보우쳐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Sandy, p.7∼9).

그는 페미니즘 활동가였고, 불교에서 페미니즘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정신적 힘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샌디 외에도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불교에 대하여 호감을 갖는데, 보다 구체적인 것은 이 글의 ‘불교와 페미니즘’에서 소개될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참선을 통하여 ‘분노’라는 단기간의 고도의 에너지를 요구하는 사회운동에서 지친 마음을 평화롭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돌릴 수 있었고,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려 부드럽고 지속적인 새로운 생산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불교는 사회의 성차별이나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하여는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해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불교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또한 가부장제 문화의 모순을 정확히 읽어내고 비판하면서 ‘깨달음’의 관점으로 사회를 재구성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가부장제를 묵인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4)

3. 종교와 페미니즘5)

페미니즘과 불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미국에서의 종교와 여성에 관한 연구와 최근의 논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여성운동의 물결이 점차 커지면서 많은 여성들이 기존의 종교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며 가부장제 종교를 떠나 새로운 영성을 추구하거나 전통종교 속에 남아 있더라도 종교상징과 오랜 전통을 이루어 온 신학체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신학 즉 여성의 관점을 보완하여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 가부장제 뒤안에서 빛을 보지 못한 여성들의 번뜩이는 지혜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지난 20여 년간은 여성의 자유운동으로 결집된 성과에 힘입어 불교 속의 여성운동도 급격한 변화를 이룬 시기이다. 1960년대에는 가부장적 신의 이미지와 정신적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교회체계의 역사를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비판하였다. 1970년대 후반기와 1980년대에는 현대여성들이 자존감을 얻고 자기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여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신성을 다양한 문화 속에서 찾았다.

이러한 작업에 참여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학자이면서 전통종교의 신학자이거나 교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종교가 남성/여성으로 정형화하는 틀을 만들었고, 그것이 아직도 우리 사회와 정치와 경제 체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데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기부터 1990년대에는 여성종교학자들은 전통종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즉 전통종교의 구원의 틀을 다시 해석하고 다시 짜는 일을 도모하고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기존의 남자들이 그리고 남자 우월적인 종교들이 여성 자신들을 규정해 온 틀을 거부하고 여성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여성을 규정하고 재개념화하는 일을 하면서 전혀 새로운 구원의 틀을 엮고 있다.

그들이 엮고 있는 구원의 틀은 남성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정립하고,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함께 주체적으로 온전한 인간으로 참여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의 종교이다.

4. 불교와 페미니즘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불교의 기본 가르침을 배우고 선수행을 하면서 페미니즘과 불교와 유사성이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리타 M. 그로스는 불교와 페미니즘의 유사성에 대하여 1980년에 불교의 여성(Women in Buddhism)을 주제로 한 모임(conference)에서 발표하였다.6)

그로스에 의하면 불교와 페미니즘의 첫번째 유사성은 이론보다 체험을 바탕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론보다 체험을 중시하므로 자신의 의지를 따라 그리고 어디에서나 목적을 향하여 정진하도록 용기를 북돋운다는 점이다.

셋째는 불교와 페미니즘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는가를 밝히는 데 관심을 둔다는 점이다.(Sandy, p. 58) 샌디 보우쳐는 기독교의 믿음을 가졌었고 또한 수년간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사회변화를 위해 활동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페미니스트들이 불교에 호감을 갖는 이유를 세 가지 점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불교가 절대자로서의 신을 지칭하지도 않고, 전능한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로서의 복종적인 관계도 없다. 불교의 핵심이 자기 자신의 체험을 신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전통이나 믿음이니 성직자의 가르침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체험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일방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점이 페미니즘과 유사하고 생각하였다.

두번째는 실재를 탐구하는 방법에서 불교와 페미니즘의 유사성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가설에 대하여 준엄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페미니트들이 가부장제의 가설과 그 규범에 대하여 하는 것에 상응한다. 불교 수행은 자신의 육감과 사상과 느낌의 본질을 드러내도록 하는 여러 가지 수행체계와 수많은 시간을 들여 참선을 하거나 하는 방법들이 있다. 페미니즘 역시 도그마도 아니며 신조(creed)나 믿음(faith)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진실을 탐구하는 수단이며, 여성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기 위한 여권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다. 페미니스트는 상황을 관찰하고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다.

셋째, 불교는 사람들의 진정한 본성인 불성은 무지의 베일에 가려 있다고 가정하고,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지속한 거짓 구조와 잘못 개념화된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에 의해 속박당해 왔다고 가정한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우리가 베일을 벗기고 우리 속에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과 인간의 잠재력을 드러내도록 한다.

또한 불교와 페미니즘의 목적은 제한된 이념과 조건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샌디 보우쳐는 이러한 불교와 페미니즘의 유사성 때문에 여성들이 불교에 매력을 느낀다고 하고, 불교명상수련에 관심을 갖는 여성그룹이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Sandy, p. 2) 미국의 불교 수행에 심취했던 많은 여성들은 서구의 가부장적 종교와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선수련 센터를 떠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서구여성들이 직면한 불교의 가부장제와 그 문제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5. 불교 권위의 추락 사례와 페미니스트들의 도전

샌디 보우쳐는 산타쿠르츠의 한 선(禪)센터에서 처음 선을 배웠고, 불교의 기본 가르침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불교 수행이 그 자신의 글쓰기에 좋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그는 거기에서 다른 서구 종교들과 똑같은 남성 우월주의를 깊이 느꼈다고 한다. 불교전통의 여러 수행자들 가운데 여성의 이름은 없었으며, 또한 선센터 내에서도 강의를 한다든지 하는 규범적인 것은 남자들이 하고 여자들은 보조적인 일과 부엌에서 일을 거드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Sandy, p. 10)

불교가 페미니스트들과 일반여성들 사이에 심각하게 문제가 된 것은 1981년과 1982년과 1983년에 걸쳐 개최된 여성과 불교 회합에서였다. 1982년과 1983년 회합에서 남자 선수련 교사들과 여자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 스캔달이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많은 여성들은 분노했고, 선수련센터들을 떠나는 사태들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페미니스트 불교인들에게 불교의 가부장제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에 나로파 불교대학(Naropa Institute)에서 불교와 여성에 관한 회합이 있었다. 이 회합은 불교학과의 쥬디 짐머(Judith Jimmer)가 준비했고, 카나다와 영국을 비롯하여 미국의 12개주에서 50여 명의 여성들이 모였다.

이때 페미니즘과 불교의 인터섹션에 리타 M. 그로스와 수잔 무어코트(Susan Moorcott) 그리고 샌디 보우쳐도 참석하였다. 1982년에 나로파에서 지난해의 2배나 되는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두번째 여성과 종교 회합이 열렸고, 그 회합의 마지막 즈음에 한 참여자가 당시 초감 투룽파와 그의 여자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 스캔달에 대하여 나로파의 학장에게 질문을 하였다.

초감 투룽파는 잘 알려진 티베트 승려였기 때문에 당시 이 문제는 예민한 사항이었다. 문제가 제기되자 여러 참여자들이 체험과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였고, 그들은 분노했다. 1983년에는 로드 아일랜드주에 있는 선센터에서 여성과 불교 회합이 개최되었다.

여기서 다시 남자 선수련 교사들과 제자들 사이의 성스캔달과 알콜남용과 그들의 힘을 남용하는 사례가 폭로되었다. 수잔 무어코트는 여러 선수련센터들을 방문하면서 접하게 된 놀랄 만한 사건들을 말했다.(Sandy, p.12∼13; p.63∼69)

앞의 티베트 승려 외에도 다른 한국 일본 등 다른 아시아권의 선센터에서도 똑같은 사실들이 밝혀져 미국 여성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불교의 권위는 심하게 손상되었고, 많은 여성들이 선센터를 떠나 스스로의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7)

6. 페미니스트들의 불교 비판

자신의 구원에 방해가 된다는 확신 때문에 아내와 어린 핏덩이 자식을 버리고 떠난 남자에 의해 창시된 종교가 과연 여성의 관심과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부처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이 구원을 열망하여 가사의 모든 의무를 벗어버리고 출가를 원했을 때, 여성의 출가를 반대한 남자에 의해 창시된 종교가 과연 여성의 관심과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까?8)

대부분의 서구의 여성불자들이 불교 내에서 처음 경험하는 것은 여성비하와 여성혐오론과 가부장제, 즉 아시아의 가부장제이다. 따라서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을 할 수 없다는 여인불성불설(女人不成佛說) 혹은 변성남자성불설(變成男子成佛說)이 나오게 되고, 이것은 곧 불교 수행에서 여성 수행자에게 모델이 될 만한 여성 대가(female master)가 없는 결과에 이른다.

또한 재가자들은 단지 승가의 경제적 후원자일 뿐 전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불교 수행에 참여하지 못하고 주변화된다. 여기에 불교의 성/속, 출가/재가, 영/육, 남/여 이분법과 그 정신세계의 위계질서로 불교 가부장제를 이루고 있음이 발견된다. 텐진 팔모는 인도에서 처음 공부하고, 홍콩에서 구족계를 받고, 이태리에서도 수행을 하는 등 3, 40년을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데 보냈다.

그가 처음 구도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인도로 가서 캄트룰 린포체라는 승려의 제자가 되었을 때 100여 명의 비구들 가운데 유일한 비구니가 되었다.9) 텐진 팔모가 경험한 티베트는 남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나라였다. 그가 여자라는 이유로 비구들은 거리를 두었고, 낮에 일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혼자 식사하고 잠자는 등 불편한 숙소에서 지내야 했으며, 비구니로서 그는 출가단체나 재가단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가 경험한 티베트의 승가는 남성 지배적이었다.

비구들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토론을 하는 반면에 비구니들은 공부도 할 수 없었고, 단순한 종교의례를 준비하거나 지역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거나 승가의 부엌에서 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타일랜드를 비롯한 이른바 소승불교 나라에서는 비구니는 비구 앞에서 뒷걸음으로 물러서야 하고, 비구니의 몸이 비구의 좌선하는 방석에라도 몸이 닿으면 안 되었다.

어떠한 종교의례에서도 비구니는 비구들 뒤에 앉아야 하고, 음식을 제공받을 때도 제일 연장자인 비구니라도 당일 계를 받은 비구보다도 뒤에 해야 한다. 팔모는 여성은 영적으로 이등시민으로 취급받는 것을 보았고, 남자 승려의 법설에서 여성의 몸은 불결하고 열등하다는 말도 들었다. 이러한 여성혐오론 때문에 티벳을 비롯한 아시아 불교계의 여성들이 하는 주요 기도는 다음 생에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고자 함이다. 팔모는 여성혐오론을 정당화하는 불교에 심한 회의를 느꼈다.10)

다이아나 포올11)은 유태·기독교처럼 불교도 남성이 창립한 조직이며, 가부장적 힘의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남성 지배의 영향으로 여성성은 불경스럽고 불완전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불교의 남자들은 다른 종교의 남자들과 같이 특정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 여성이 해야 할 규범들을 만들었다. 또한 출가 위주의 승단에서 재가는 경제적인 후원자에 불과했다.

특히 승단을 후원하는 재가 여성들은 승가의 어머니라 불리면서도 비구들의 수행의 관점에서는 멀리해야 할 존재들이었다. 다이아나 포올은 《불교의 여성(Women in Buddhism)》의 서문에서 불교에서의 여성성을 두 가지 측면으로 포착한다. 하나는 여성성은 측량하기 어렵고 감각적이고 파괴적이며 자연에 가깝다. 악의 힘으로서의 여성성은 남자를 유혹하고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문화와 사회와 종교의 이름으로 억압되고 억제되고 정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파괴적 여성성은 남성의 권위로 정복되지 않는 힘이 있는데 이것이 여성성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었다고 본다. 두번째 여성성의 측면은 지혜롭고 모성적이고 창조적이고 부드럽고 헌신적이다. 여성성의 긍정적인 측면은 영향력과 초월적인 세계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특히 여성성이 모성으로 나타날 때 여성성의 자연적인 힘인 성적인 힘은 억제되어 균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성은 남성의 외로움과 고통을 달래주는 긍정적인 역할이 된다. 첫번째 관점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구별된 이원론적인데 비하여, 두번째 관점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통합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 상호보완적이다. 티베트 불교의 경우에는 몸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갖는데, 종교적 스승에 대하여는 절대시하는 승가의 가부장제와 결합한 애매 모호한 관점 때문에 서구 여성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신성한 결합에 대한 탄트라 가르침은 실제로 서구 여성을 당혹하게 한다. 특히 탄트라에서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수행에서 여성의 몸은 성스러움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때로 소위 영성지도자 즉 구루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불교 수행을 하고자 하는 서구 여성들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게 되는 등 앞에서 지적한 대로 자신의 종교적 지위를 남용하는 사례가 된다.

불교 전통에서 스승이나 구루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심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구루에 대한 절대적 신심은 구루를 곧 부처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부처로서 제자에게 신비적 합일을 제안할 때 불교 수행을 원하는 여성 제자가 거절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구 여성들은 구루와 제자와의 이러한 관계가 불교 조직과 권위주의를 강조하는 가부장적 산물이라고 보았다.

앤드류 하아비12)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가부장적 관계 대신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며, 절대적 권위의 스승보다는 도반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텐진 팔모는 절대적 권위로 복종을 원하는 구루 대신에 좋은 선생이 필요하다고 한다. 잠파 쵸키13)는 모든 사람은 각자 내면의 지혜 혹은 내면의 구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외부적인 구루는 우리의 불성을 나타내도록 도울 뿐이라는 것이다.

남자 스승과 여성 제자 사이에 발생하는 성적인 스캔달은 서구 여성들에게 금욕수행(celibacy)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금욕 수행이 무가치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금욕 수행의 목적은 에너지를 승화시켜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하여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금욕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텐진 팔모는 결혼의 여부는 개인이 선택할 사항이라고 보았다. 그는 승려가 결혼을 함으로써 여자와 자녀와 함께 살아보고 여자와 여성의 관점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Vicki, p. 135) 출가 승려의 금욕 수행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가족을 떠나 구태여 암자나 호젓한 토굴(cave)이나 은신처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구 페미니스트 불자들은 여성과 여성적 가치가 불교 전통 속에서 왜곡되고 무시되었던 것은 정신적인 고독을 위하여 출가승들이 선택한 ‘은둔처 혹은 토굴(cave)’14)의 이념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 숲속의 오두막이라는 의미의 ‘은둔처(cave)’의 이념은 오랫동안 불교 수행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토굴’로 불려지는 은둔처의 지향이 불교 가부장제의 상징이 되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 여성 불자들이 출가 수행의 이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 기간 동안의 피정(retreat)은 수행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그들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온 생애를 그렇게 세상을 떠나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해탈과 가족 그리고 토굴과 문화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보다 철저한 수행 즉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려고 한다.

7. 서구 여성 불자들의 새로운 도전:어떻게 탈가부장제 불교를 세울 것인가?

    수천 년 동안 지속해 온 피라밋 모양의 남성적인 위계적 구조 대신에 왜 원의 중심에 최고지도자가 있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거리에 있는 원모양의 조직체제를 만들지 않는가?

    왜 숭배의 장소가 수직적인 라인으로 되어 있는가? 왜 보다 여성적인 원리인 둥근원이나 나선형은 아닌가? 왜 양육(nuture)의 능력이 수행에 포함되지 않는가? 왜 불교의 이념이 초월적인 것으로 묘사되기보다 몸의 성스러움과 구체성에 대하여 더 많은 강조를 하지 않은가?

    왜 비물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것(earthness)은 성스럽게 여기지 않는가? 왜 관계(relationship)가 더 존중받지 않는가? 그리고 왜 성스러움의 길에서 여성 배우자들은 뒤쪽에 위치지워짐으로써 항상 관람자들에게 여성의 역할이 남자의 역할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투사되게 하는가?

    여성 파트너도 남자 파트너처럼 똑같이 정신적인 깨달음의 과정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토굴(cave)이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 토굴은 돌봐야 할 여성과 자녀들을 이롭지 않게 여기는 남성 특권적인 것이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남자들은 그들의 가족들을 떠나서 그들의 영성을 단련하기 위하여 고독한 명상수행에 긴 기간 동안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부처님과 예수와 다른 모든 성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를 이 세상에 오게 한 모성의 본능이 왜 영성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하는가? 출가를 위한 암자나 토굴은 너무 오래 지속해 온 가부장적 이념이다.(Vicki, p. 190∼191)

서구 여성들은 남성 지배적인 불교가 여성과 여성성을 비하시킴으로써 출가 위주의 수행체계를 정통수행 방법으로 인정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 결과로 여성 수행자를 위한 모델로서의 살아 있는 여자 스승 혹은 여성 대가(female master)가 없다는 것이며, 여성 특유의 정신과 신체에 맞는 수행법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가정과 직업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를 떠나 불교 수행을 하도록 하는 ‘토굴’지향의 불교 수행은 실제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가족의 문제, 여성 문제를 비롯한 각종 인권 문제와 민주화 문제나 환경 문제 등 사회 제반의 문제에 무관심하도록 하였다.15)

1) 여성 수행의 길

서구 여성들이 남성 지배적인 기존의 불교승단에서 겪은 좌절과 분노는 불교 수행을 위하여 스스로의 길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특히 나로파 불교대학(Naropa Institute)의 불교학과장 쥬디 짐머(Judith Jimmer)가 이끈 ‘불교의 여성(Women in Buddhism)’ 회합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2년에 나로파에서 제기된 불교 수행 교사들의 여자 제자들과의 성스캔달은 더욱 영성지도자로서의 여성이 없다는 것이 절감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로파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개최한 3차 불교의 여성 회합에서는 불교 속에 존재하는 여성성의 원리에 관한 논의가 주된 테마이었다.

탄트라 전통의 타라(Tara)를 비롯하여 서구인들이 지혜의 완성(wisdom of perfection)이라고 번역하는 대승불교의 프라즈나파라미타(Pran??a?amita?)의 이념에서 여성 부처님(female buddha)의 가능성과 모델을 찾는다. 이렇게 전설적인 여성 부처님 혹은 여성 구루가 문헌 속에는 나타나지만 실제로 서구인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실재적인 모델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성 구루에 대한 설화나 이념은 여성들에게 가능성을 시사하므로 간과할 수는 없다.

툴트림 알리온은 그의 저서 《지혜의 여성들》16)에서 여성적 측면에서 가치있는 티베트 불교의 많은 정보와 문헌 속에 나타난 초기 여성 구루들의 전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툴트림 알리온은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 비구니 계를 받고 수행생활을 했었고,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여성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얻는 지혜를 영성수련으로 연결시키는 수행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어머니의 길이 신성하고 힘있는 영성의 길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영성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훨씬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소위 세속생활 속에서 나온 여성의 지혜에 대한 원자료들이 개봉되지 않은 채 있다. 이러한 여성의 지혜의 보고가 개봉되지 않은 것은 지난 2∼3천 년 동안 남자들이 영성의 길을 정의해 왔기 때문이다.

남성의 영성의 특징은 자연과 분리되고, 탄생·죽음·자녀양육 등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상적인 것에서 분리된 그러한 영성이다.(Allione, p. 20.) 여기에서 알리온은 여성의 수행 방법이 남성의 수행 방법과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남자들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지혜(prajn??, wisdom)와 진공(s??yata?, emptiness)과 균형을 유지하듯이 여자들도 세련된 길(upa?a, skillfull methods)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삶은 고통이며 고통을 일으키는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전통 불교에 대하여 알리온은 비판적이다. 즉 전통 불교의 수행 방법은 수행자가 자신의 감정에 참여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분리하여 그것을 관찰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리온은 수행자가 자기 자신과 감정을 분리하지 말고 그 감정을 해탈의 수단으로 삼는 방법을 주장한다.

감정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고 충실히 체험하여 우리 속에 있는 선/악의 이분법을 치유하고 지혜로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의 에너지를 체험하도록 게슈탈트 이론과 다른 서구 심리치료의 기법들을 선수련에 도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만 강조하던 수행에서 보다 구체적인 감정과 육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수행은 앞으로 여성적 가치와 관련이 있는 현대 자연에 대한 문제해결에도 연결된 비전을 보이고 있다.(Sandy, pp. 72∼75.)

텐진 팔모도 탄트라와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여성 구루와 혹은 여성 부처님의 가능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 문헌을 읽었다. 텐진 팔모는 여성불성불설에 대한 논쟁은 가부장제 문화와 남성 우월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여성이 오히려 남성보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여성의 특별한 첫번째 자질은 예리함과 선명함이다. 그가 말하는 선명함은 차가운 추상적인 앎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험한 구체적 앎이라는 의미이다.

둘째는 여성의 특징은 양육적(nuturing)이며 부드럽고 온화하다. 자녀를 위하여 자기희생을 감행할 수 있는 모성은 바로 보살심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여성의 영성에너지는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아이가 찾기 이전에 엄마는 아이의 욕구를 알고 이미 거기에 있는 것처럼, 여성은 선정(禪定)을 통하여 발아될 수 있는 신비적 열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텐진 팔모는 여성과 남성의 수행에서 차이는 생리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즉 남자는 여자보다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기가 쉬우나 성욕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신체적 특성상 안락과 안정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것이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기 쉬우므로 여성의 수행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여성이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여성이 아이를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여성이 아이를 사랑하듯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여성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위대한 힘이 된다.(Vicki, pp. 125∼138.)

2) 성스러움으로서의 세속 생활

‘토굴’의 삶으로 상징되는 초세속적 삶을 지향하는 전통 불교의 수행은 서구에서 끊임없이 논쟁되었다. 특히 서구 여성 수행자들의 경우 아시아에서는 진짜 승려로 대접받는 상황이 아니면서 미국이나 자기 나라에서도 아시아와 같은 불교 수행자에 대한 대우에 대하여는 잘 모른다.

미국의 여성 수련자들은 마음놓고 수련하도록 자신의 생계가 보장되어 있지도 않으므로 불교 수행의 이념과 실제 생활에는 많은 갈등이 발생한다. 또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서구에서 싹트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많은 여성들이 출가의 길을 선택했고, 수행에 전념도 해보면서 그러한 출가 생활이 결코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 점도 많이 체험하였다. 히말라야에서 혼자 10여 년을 수행하는 등 40여 년 간 비구니 생활을 해 온 텐진 팔모도 세속을 완전히 벗어난 ‘토굴’수행의 장단점을 말한다.

그는 평생을 피정, 즉 초세속적 생활로 보내는 것보다 일정 기간은 피정 수행과 세속 생활을 적절히 겸하는 것을 권한다. 피정 수행은 필요하지만 온 생애를 보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툴트림 알리온의 경우는 ‘토굴’생활은 불필요하고 오히려 세속 삶이 진정한 수행장소라는 것이다.

토굴 수행에 대하여는 서구 여성들만이 아니라 서구 남자들도 수정을 요구한다. 긴 세월의 토굴 수련은 정신 이상과 고립감을 야기시킬 수 있으므로 수행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수 년 간의 토굴 수행보다 2∼3개월은 토굴에서 그리고 2∼3개월은 세상에서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서구의 삶의 양식에서 수 년 간씩 고립적인 수행 생활을 하는 것은 이미 적합하지가 않다. 또한 독립적인 삶을 지향해온 서구인들이 승려가 되어 남의 시주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상호간에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현재 아시아에서 들어온 승려나 선수행의 지도자들도 미국인들이 완전한 출가 생활을 서원(Monastic Vow)을 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 상황이다.

실제로 그들은 적절한 단기간의 피정(retreat)으로 선수행을 체험하고 있는 추세이다. 서구인들은 철저한 출가 생활 자체가 이념이 아니라 불교수행을 합리적인 사고로 수용한다. 즉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전체성(wholness)을 추구하고 균형(balance)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선수행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선수행의 정점을 극단을 버리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3) 탈가부장제 불교로의 패러다임 전환

서구 여성들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수용하면서 아시아의 가부장제에 뿌리한 전통 불교를 서구인들의 삶에 적합한 방향으로 재창조하려고 한다. 이러한 변신을 위하여 불교의 중심교리에 대한 재해석과 재개념화가 필요하다. 또한 여성 수행자들을 위하여 전통 불교 속에서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는 새로운 이미지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여 불교철학, 불교교단 조직, 그리고 불교역사에 걸쳐 광범위하게 깊게 연구한 사람이 리타 M. 그로스다. 그는 1970년대 후반기와 1980년대에 미국종교학회에서 여성과 종교 분과장을 맡기도 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종교 일반과 여성 분야에서도 잘 알려진 학자이며, 철저한 불교 수행자이다. 그의 새로운 불교 혹은 페미니스트 불교의 전망에 대하여는 1993년에 발표한 《탈가부장적 불교(Buddhism after Patriarchy)》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리타 M. 그로스는 불교의 주요 개념들을 재개념화하기 위한 관점으로 해탈(Nirva?.a)로 표현되는 정신적 자유(freedom)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17) 그는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 즉 자유라고 보았다. 불교 수행자들은 정신적 자유를 위하여 출가를 단행한다. 그로스는 여기서 그 정신적 자유가 “세계로부터의 해탈(Freedom From the World)”인가 아니면 “세계 내에서의 해탈(Freedom Within the World)”인가를 분명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불교는 동양에서처럼 서구에서도 세계 부정적인 종교(a world-denying religion) 혹은 반세계적인 종교(an anti-worldly religion)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교 내에서 보면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향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동시에 세계 내에서의 자유를 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로스는 세계 내에서의 해탈이 세계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하기보다는 보다 탈가부장적 전망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불교의 해탈에 대한 이념의 근원은 사성제에서 나온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를 보면, 멸제는 고와 집의 멸이며 도성제는 멸에 이르러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말한다. 부처님은 인간 삶을 사고팔고(四苦八苦)의 고해로 보았고, 고의 원인은 무명과 욕망이라고 하였다.

또한 불교의 해탈은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 보듯이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전통적인 불교이념 즉 세계로부터의 해탈의 해석이 유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사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생사를 자유자재로 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세계 내에서의 해석이 내재되어 있다. 불교사를 통하여도 이 두 가지 관점은 함께 내려온다.

그러나 불교 전통이 일반적으로 초세속을 지향하도록 보편화되어 있는 것은 초기 인도불교에서 지배적이던 반세속적인 이원론적인 해석 때문이라고 리타는 본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의 변화가 피안을 향하기보다는 이 세상의 삶을 중요시 여기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서구에서 보면 초기 기독교 시대에 형성된 피안적 종교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피안적 종교 지향은 가부장제의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피안 지향의 종교가 여성혐오론과 가부장제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8. 맺는 말

서구의 새로운 불교문화 모색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을 한두 가지 더 언급한다면 다양한 불교의 만남 그리고 불교와 유태·기독교의 만남이다.

미국에는 소승불교 대승불교 티베트 불교를 비롯 일본불교·중국불교·한국불교·태국불교·미얀마불교 등등 여러 가지의 불교 모습들이 공존한다.

이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미국인들이 혼란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서도 불교라는 이름 아래 공존하는 다양한 불교의 형태들은 미국인들에게 아시아권의 문화와 낡은 가부장제를 벗기고 불교의 본질을 찾아 미국불교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미국에는 전통적인 유태·기독교가 있다. 사람은 자기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고 살 수 없다. 서구인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새로운 종교 사상인 불교를 유용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자신들의 종교 전통인 유태·기독교 전통과 불교와의 만남, 대화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영성의 면에서 보면 종교의 울타리라는 것이 난센스일지도 모른다. 불교 수행의 궁극목적이 깨달음을 얻는 것인데 그 깨달음이 진공(眞空, emptness)과 관련이 있다면 현재 미국에서 활발히 전개되는 불교와 유태·기독교와의 대화는 한발 더 나아간 움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페미니스트 불자들이 더 잘하는 것 같다. 아마 그 이유는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여성 영성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미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아시아의 불교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시아의 불교와 다른 새로운 불교문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 새로운 불교의 태동에 페미니스트의 관점과 영성이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속 생활과 수행을 둘로 보지 않은 여성주의 영성의 모색은 사회변화의 문제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새로운 불교전통의 창출에도 중요한 관점이 될 것이다. 그것은 범종교적인 변화와 함께 범불교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새로운 불교의 흐름이 될지도 모른다.<끝>

미국 웨스턴 미시간대학교 대학원 비교종교학 석사.원광대학교 철학박사.현재 영산원불교대학교 교수. 여성문제 연구소장.논저서로 <한국 신종교의 남녀 평등사상연구>(1997), <종교적 영성 및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1999)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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