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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교와 페미니즘을 말해야 하는가
안옥선 전남대 강사
[3호] 2000년 06월 10일 (토) 안옥선 전남대 강사

1. 왜 ‘페미니즘’인가?

우리 모두는 지역, 노소, 인종, 성별 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할 것이다.

타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나 폄하를 전제로 하여 얻어지는 나의 행복은 올바른 행복일 수 없으며 진정한 행복도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페미니즘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필자는 페미니즘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존중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사회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쯤으로 이해한다.

페미니즘은 의식과 제도의 차원에서 여성차별을 철폐함으로써 여성의 평등한 지위와 삶의 실현을 목표로 하지만 동시에 여성 차별적 의식과 제도가 사라진 정의로운 사회에서의 남성의 진정한 행복 달성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교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타인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무시될 때 편안할 수 없다.

나의 안락이 타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전제로 한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우리는 지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 앞에서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으며, 며칠 굶은 사람 앞에서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없으며, 또한 이웃의 아픈 신음소리에 개의치 않고 춤추고 노래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모두가 행복한 정의로운 사회, 특히 불교가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차별적 의식과 제도에 의해서 누구인가가 부당하게 대우받는 고통의 상황은 묵인되지 않을 것이다. 묵인될 수 없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특정 대상에 대한 부당한 대우나 고통을 담보로 우리만의 안락을 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뭇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여성만의 이념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전제로 하는 의식과 제도 속에서 반사이익을 얻어온 남성이 있다면 페미니즘은 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사람은 부당하게 대우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지만 누군가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담보로 한 일신의 편안함도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의 의식과 제도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여성이 존재하는 한 페미니즘은 여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갖는 문제의식은 빈부격차나 인종차별 혹은 환경오염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인류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2. 왜 ‘불교와 페미니즘’인가:불교의 이중성에 대한 해부

그러면 왜 ‘불교와 페미니즘’인가? 불교와 페미니즘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불교에 페미니즘이 요청되고 있는가?

불교는 친페미니즘적이면서도 반페미니즘적이다. 이중의 얼굴을 가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는 교리상 성평등주의사상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부처님도 성평등주의자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불교는 관습과 제도에 있어서 일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성 우월주의 내지는 남성 중심주의 입장을 반영하고 고수해 왔다.

서구에서의 ‘불교와 페미니즘’에 관한 연구들은 불교의 이러한 이중성을 잘 드러내 준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행해진 연구들은 두 방향에서 문제를 제기해왔다. 한편으로는 불교의 본래입장――연기, 공, 무아와 같은 불교의 핵심사상이 친페미니즘적이며, 부처님도 깨달음에 대한 여성의 성취능력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재천명해왔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불교전통 속에 전제된 가부장적, 여성 혐오적, 남성 중심적 관습과 제도를 비판해왔다.

요컨대 서구의 불교페미니즘 학자들은 부처님과 불교사상의 성평등주의의 입장을 천명하면서 승가라는 제도 안의 성차별주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해왔다.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행해진 대부분의 연구들에 의하면 불교가 현실적으로는 성평등적인 모습과 성차별적인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불교의 본래 모습 내지 부처님의 본래 입장은 성평등주의에 있다.

이러한 연구들에 의하면 불교 안의 성차별적인 특징은 가부장적 사회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면 현재 우리 불교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불교도 두 얼굴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불법에 의하면 여성이니 남성이니를 분별하지 않으므로 불교는 페미니즘을 필요치 않는다.” 옳은 말이다.

교설에 의하면 남성성 혹은 여성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대승경전, 특히 《유마경》에서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구분이 공의 입장에서 철저히 논파된다. 불법에 의하면 남성성도 여성성도 실체적·고정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남성이니 여성이니를 분별하거나 또 분별에 의거하여 차별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승만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여래장을 가진 존재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이미 페미니즘의 이상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불교에 무슨 페미니즘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비구니 팔경계법에 의하면) 젊은 비구 스님이 연로하신 비구니 스님의 인사를 앉아서 받는 것은 당연하며, (여성변성성불설에 의하면) 여성은 이승에서 여성의 몸으로 성불할 수 없으므로 성불을 하려면 먼저 남성의 몸을 받아야 한다.

” 전반부가 불교 본래의 이념이라면 후반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우리 불교의 현주소일 것이다. 그리고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가 불법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불교의 이중성 또한 불교 자체의 이중성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불교 일반과 마찬가지로 우리 불교도 이념적으로는 성평등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의식과 제도 속에서 성불평등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불교 또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 요구된다. 불교 일반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이상과 같은 이중성은 성불평등적인 우리 불교의 현실을 은폐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제도 불교 속의 성불평등적 현실이 불교 본래의 성평등 이념에 의해서 채색되어온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지각할 때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우리의 모습을 실제의 우리 모습과 동일시하여 우리의 현실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현실 모습을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자기가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채색하고 미화하여 자기에 대하여 착각한다. 이러한 우리의 고질적 성향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가혹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관대한지도 모른다.

오늘날 불교 속의 성불평등적 현실이 불교의 성평등주의적 이념에 의해 채색되어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원론적으로 부처님의 입장과 불교의 이념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페미니즘의 이론과 실천의 토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제도 속에 드러난 불교의 현실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한편으로는 불교가 갖는 원래의 친페미니즘적 성향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불교 현실에 은폐되어 있는 반페미니즘적 성향을 밝혀냄으로써 원래의 불교이념을 실현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이 때문에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3.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상의 논의에 의하면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불교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불교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은 불교 본래의 입장을 명백히 함과 동시에 반불교적이거나 비불교적인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고 분명하게 인식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적 입장을 명백히 하는 것과 반불교적이고 비불교적인 현실을 드러내고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모두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아 불교가 지향하는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즉 이 모두는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고루 좋은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궁극 목표로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동일한 작업인 것이다.

그런데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불교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을 핵심으로 하지만, 보다 다양한 문제들과 논의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이중성에 대한 해부(아래의 1)과 2))를 포함하여 다음의 여섯 가지 내용들이 ‘불교와 페미니즘’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1) 불교­부처님의 친페미니즘적 본래 입장에 대하여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여성을 하나의 소유 개념으로 보았던 여성 차별 사회에서 최고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고 여성 출가자 교단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였다. 여성도 당당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깨달음의 주체임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부처님은 사람됨의 기준을 타고난 지위와 성별이 아닌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brahmacariya)’로 삼았다. 불교학자들이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거나 방편설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일부 경전의 여성 차별적인 구절이나 교법을 제외한다면 초기경전은 깨달음에 이르는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고 고무한다.

이상과 같은 부처님의 입장을 올바로 정리하는 것은 여성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의 올바른 전승과 실천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 여성에 대한 부처님의 본래 입장을 명백히 한다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핵심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방부 초기경전에 나타난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는 여성성불불가설(혹은 북방부 초기경전에 나타난 ‘여성은 다섯 가지 장애를 갖고 있다’는 여성오장애설)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보다 후대에 발전한 대승불교에서의 ‘여성은 몸을 남성의 몸으로 바꾼 후에 성불한다(즉, 여성의 몸으로 성불은 불가능하다)’는 여성변성성불설도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다. 경전에 나타나는 여성 차별적 교설들은 서양에서는 해석학적 문제로 간주되어 왔다.

서양의 여성 불교학자들은 부처님이 깨달음에 대한 여성의 능력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고 수행을 독려하였다는 점을 들어 경전의 여성 차별적 교설들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보거나 방편적 견지에서 설해진 것이라고 본다. 특히 여성 차별적 교설들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경전의 이러한 교설들이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와 남성 수행자 중심의 교단운영 체제의 소산이라고 보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논의들은 계속되고 있다.

여성의 깨달음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에 대하여 정확히 안다는 것은 여성 불자뿐만 아니라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불교의 모든 수행이 깨달음으로 귀결될진대, 아무리 노력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면 도대체 누가 불교를 진지하게 수용하려고 하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불교와 페미니즘’ 논의에 있어서 여성성불불가설과 같은 교설이 부처님의 본래 입장도 아니며 불교의 본래 정신에도 어긋난다는 것을 학적으로 규명해내는 작업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2) 현재 시행되고 있는 불교의 성불평등적 의식과 제도를 드러내고 교정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의 성평등주의적 입장은 여러 불교전통 국가에서 현실적으로 잘 시행되고 있지 않다. 아직까지도 동남아시아의 여러 불교국가에서는 여성 출가수행자에 대한 수계가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성 출가자 교단도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불교는 훨씬 앞서 있지만 종단 운영이나 설법에 있어서 여성 출가자들은 남성 출가자들과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또한 여성 출가자들은 남성 출가자와 동등하게 상호존중의 예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심리적으로는 출가수행자들마저도 ‘여성의 성불은 이승에서는 불가능하므로 성불하기 위해서는 일단 다음 생에서 남성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녀 출가자들에 대한 불평등 대우와 불평등 제도의 근간이 되고 있는 비구니 팔경계법은 그 성립사에 관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나아가고 있는 진보의 방향과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도 검토되어야 한다. 성별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류가 지향하는 방향에 역행한다면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도 이것은 비판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일부 불교학자들이 추정한 대로 비구니 팔경계법이 경전의 편집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온 보수적 비구들에 의해 첨가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이 법은 부처님의 의도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재고되어 마땅하다.

또한 다른 일부 불교학자들의 주장대로 그 당시 사회분위기를 고려한 부처님이 이 법을 방편으로 설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 법은 더 이상 방편설일 수 없다. 방편은커녕 오히려 해악이 될 수 있다. 비구니 팔경계법대로 성별에 근거하여 예를 따진다면――예컨대 단지 남성 수행자라는 이유만으로 젊은 비구 스님이 나이 많은 비구니 스님의 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누가 황당해 하지 않겠는가?

불교적 관점에서도 사람됨이나 수행자됨은 행동의 질에 있지 성별에 있지 않으며, 예우를 받는 것 또한 행동의 질, 즉 덕의 높고 낮음에 있지 성별에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경전의 특정 부분이나 조항을 들어 부처님이 성차별주의자였으며 불교 또한 성차별적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과 불교의 본래 입장에 어긋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또한 그런 부분이나 조항에 근거하여 성차별적 관념이나 제도를 확대하고 고착시키는 것은 불교를 퇴보시키는 일이라는 점에도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실은 성별에 대한 부처님의 본래 입장을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데는 적극적이지 못하다. 제도화된 불교 속에는 비구니 팔경계법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성차별적 제도와 관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일차적으로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성불평등의 제도와 관습에 대한 문제를 분명히 하고 그 교리적 근거를 따져보는 것이다. 공개적 논의의 과정에서 그것들이 반불교적이라고 판단된다면 버리거나 교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공개적 논의의 과정은 성불평등 문제에 대한 명료화, 성불평등의 현실에 대한 확인, 불교의 본래 입장에 대한 재확인, 그리고 의견수렴 과정을 의미하지만 성차별적 관습과 제도를 철폐하고 불교 안에서만이라도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해 간다는 데 그 최종적 의미가 있다.

3) 여성의 관점에서 한국불교의 역사를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성의 관점에서 한국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러한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큰 법문들이 주로 비구 스님에 의해서만 설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비구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인데 이것은 또 무슨 연유에서일까?

구성비율에 있어서 여성 출가자와 남성 출가자의 수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하는데 종단의 주요 직책들은 거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전담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불교사에서 비구니 스님들의 행장에 대해서는 왜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일까? 우리 역사 속에는 큰 비구니 스님이 아예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주목받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잊혀진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변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불교역사에 대한 여성적 시각에서의 접근을 요청한다. 우선 여성의 관점에서 우리의 불교역사를 재점검하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으며, 잊혀진 사료나 무시되어 온 자료들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발굴하고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불교경전 일반은 남성 출가자들의 주도로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형성되고 해석되어 왔으며 불교사 일반 또한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정리되어 왔다. 이는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여성의 관점에서 우리의 불교사를 검토하고자 할 경우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여성 출가자들과 여성 재가불교도들의 활동과 역할을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 예컨대 신라시대의 비구니 스님에 의한 비구니 교단의 자주적 운영 혹은 고려시대 생활 불교 속에서의 여성 불자들의 주체적인 불교이해와 신행활동에 대해 밝힘으로써 우리 역사에서의 여성 수행자들과 여성 불교도들의 활동을 여성의 입장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세계의 역사를 동양인의 관점에서 다시 쓰고 동양의 역사를 한국인의 관점에서 다시 쓰며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다시 쓰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불교역사에 대해 여성적 관점에서의 검토, 재정리, 재구성하는 작업은 오늘날의 우리 불교의 모습을 진단하고 앞으로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과 동일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의 불교는 과거의 불교사를 계승하고 있으며 미래불교 또한 현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성평등적인 불교의 핵심교리들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활용하는 방안, 그리고 불교 수행법의 페미니즘적 적용·활용의 방안에 대해서도 모색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교설인 연기, 공, 무아가 내포하고 있는 비실체주의적이고 비규정적이며 반결정론적 특징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실체적으로 보지 않으므로 여성에 대한 어떠한 결정론적 혹은 관습적 규정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여성성이든지 남성성이든지 변화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여성 혹은 남성에 대하여 그 특징이나 역할을 고정해 놓을 수 없다.

인간의 사회적 역할은 물론 인간의 본성이나 성품도 가변적인 것으로 이해되므로 성별에 따라 역할을 규정하고 성품에 대해서도 단언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남성성이든지 여성성이든지 본래부터 결정되어 우리에게 각인된 것이 아니며 이것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불교의 핵심사상은 인간의 성에 대하여 어떠한 형태의 단언적이거나 결정론적 태도도 거부한다.

불교의 핵심교리들이 이상과 같이 고정되고 규정된 형태의 성정체성(sexual identity)을 거부한다면, 불교는 고정되고 결정된 성정체성에 근거한 어떠한 형태의 성차별적 담론과 제도도 거부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서구의 일부 학자들은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한 사상적 친화성과 유대성을 밝히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또한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만이 가진 독특한 수행법으로서의 여러 가지 명상법은 고통스러운 현실이나 정의롭지 않는 현실에 대하여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예컨대 불교의 다양한 명상법들 중에서 ‘일상의 행위 속에서 매순간 깨어 있는 명상법(念, sati)’을 생각해 보자. 이 명상법은 남녀평등 실현을 위한 현장이나 투쟁의 장소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명상법에 의해서 분노를 촉발시키는 상황에서도 이에 함몰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분노의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과 타자 모두를 파괴하는 불필요한 적대감을 피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평등사회 구현을 위한 노력의 현장에서 불교의 명상법이 얼마나 유용한지에 대한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의 고백도 불교의 이러한 명상법이 갖는 구체적 효과를 지적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불교 속에는 페미니즘적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행법들이 풍성하다.

따라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이와 같이 유용한 기법들을 재발견하고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요컨대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성평등적인 불교의 핵심교리들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나아가 불교의 수행법들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재발굴하고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5)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한 검토는 시대적 요청이다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불교가 어떠한 형태의 남녀 차별적 관념이나 제도를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본래 정신 혹은 불교의 정신에 역행하는 것일 뿐더러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임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불교가 어떠한 형태로든 차별적 관념과 제도를 고수하고자 한다면 미래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정의를 고착시키고 역사를 퇴보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는 불교 스스로가 스스로의 목에 칼을 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성차별 담론의 퇴조와 성평등 실현을 위한 노력의 분출일 것이다. 혹자는 금세기는 여성의 능력이 인정되고 발휘되어 여성이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세기라고 말한다.

혹자는 더 나아가서 금세기는 여성에 의해서 주도될 것이라고 말한다. 과장된 구석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하여 쌓아 두었던 벽이 지속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도 여성 지도자와 전문인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더디기는 하지만 이러한 추세가 늘고 있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의 진출이 거부되었던 많은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가 허용되고 있고 여성의 기여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역사의 흐름이며 대세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세에 대하여 불교는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하여 답하고 성평등 실현이라는 미래사회의 이상에 대한 불교의 기여를 탐색해 보기 위해서도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다. 논의를 통하여 인간, 사회, 자연, 세계에 대한 불교 고유의 관점이 미래의 평등 사회 실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도 모색해 보아야 한다.

6) 해외의 여성 불교와 그 실천에 대해서 검토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불교는 문화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핵심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이념은 다르지 않다. 다만 표현되는 모습이 다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실천되는 불교도 문화권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서양 여성의 관점에서 보는 불교사상과 그 실천은 우리 한국 여성의 관점에서 보는 그것과 다를 수 있다. 우리가 불교를 보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유교문화로 대표되는 삶의 틀을 탈피할 수 없듯이 서양의 여성들은 기독교라는 문화적 틀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삶의 전통과 체험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불교의 이해와 실천에 있어서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해와 실천에 있어서 우리의 모습과는 다른 다양한 불교를 접해 봄으로써 우리의 이해와 실천을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우리가 서양의 여성불교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해외의 여성불교와의 상호 영향 내지는 교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 내의 차별적 제도들에 대하여(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성차별에 대하여) 범세계적으로 연대하고 공동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 먼저 요청되는 것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 각지의 여성불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방안에 대한 모색은 현존하는 범세계적 여성불교 단체 혹은 사이버 여성불교 단체들에 대한 파악과 참여를 그 시발로 할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페미니즘’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다양한 페미니즘의 이론과 실천전략들 중에는 동조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가도 실천가도 아니며 오히려 문외한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성별을 근거로 수많은 부정의들이 실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도적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불교는 관념적으로는 성평등을 표방하면서도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표리부동하고 이중적이며 더 위선적일 수 있다. 물론 불교인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남성-여성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진정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멋진 선남선녀도 많다.

특히 다른 종교인과 비교해 볼 때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화된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다. 이것은 불교의 성평등주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쨌든지 제도적 불교가 성차별적인 모습을 지닌다는 것은 불교인 다수가 성차별적 제도와 관습에 대하여 묵과하거나 안주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한 바는 간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별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의식과 삶 속에서 부처님이 가르친 불교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불교현실 속에 성별과 관련하여 불교의 본래 정신과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본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성평등-성불평등 문제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논의의 과정은 우리들 스스로가 문제의 실상을 인식하고 그 교리적 근거를 따져보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해결을 위한 필수조건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성차별적 제도 및 관습을 철폐하고 불교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와 공론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성차별적인 제도나 관습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그 수혜자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수혜는 수많은 익명의 피해자들에 대한 불이익이나 부정의를 담보로 한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정의롭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성차별적인 제도나 관습 속에서 침묵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러워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혹자는 연기, 무아, 공에 대한 설법으로 불교의 평등사상을 만천하에 천명하고, 《유마경》 《승만경》에 나타난 성평등 사상으로 불교의 해방정신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 혹은 그녀는 개인적으로는 불교의 성평등주의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현실 속의 성불평등의 제도와 관습에 대하여 침묵하고 방관하며 수혜자의 입장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삶 또한 진실성이 결여된 삶이라고 규정해야 하지 않을까? <끝>

전남대 심리학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미국 하와이 대학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현재 전남대 강사. 저서로 <Compassion and benevolence>.논문으로 <초기불교 윤리의 한 이해><초기 불교 윤리의 프라이버시 지양성과 公私구분 거부성>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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