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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불교학 (13) 용수와 니야야학파의 논법 논쟁 / 문을식
문을식 철학박사
[23호] 2005년 06월 10일 (금) 문을식 candra21@hanmail.net

   

문을식
선문대 교수

들어가는 글

용수 논리학의 핵심인 사구분별, 딜레마, 귀류논법 등은 고타마 붓다를 시작으로 하는 사문들이나 빨리 불교 논리에 친근한 것이어서 <니야야 수뜨라> 등의 논리학에서 거부된 것들이다. 그렇지만 <짜라까 상히따(Caraka-sa hit )>, <방편심론(方便心論)>에서부터 <니야야 수뜨라(Ny ya-s tra)>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용수의 비판이 이 계통의 논리학 완성을 위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니야야 수뜨라>의 현존하는 형태와 그 이론은 용수의 부정논리를 개입시키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을 정도로 용수의 역할이 크다.

용수의 논서 가운데 <광파론(廣破論)>과 <회쟁론(廻諍論)>에 등장하는 대론자의 논의들 가운데 일부가 <니야야 수뜨라>에서 볼 수 있다. 반면 <니야야 수뜨라> 제2편과 제5편에 등장하는 대론자의 논의가 <광파론>이나 <회쟁론>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니야야 수뜨라>, <광파론>, <회쟁론>이 성립할 당시에 용수와 니야야 논사(이하 니야야로 약칭함)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논서에 등장하는 대론을 검토해 보면 용수의 상사(sama, 相應) 논법에 대한 태도, 또 이들 세 논서에 등장하는 대론 과정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논법 가운데 앞의 세 논서에 등장하는 용수와 니야야학파 사이에 그 정당성에 대한 첨예한 논리적 논쟁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 가운데 '무인 상사(ahetu sama)' 논법에 대한 논쟁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무인 상사' 논법의 의미

'무인 상사' 논법은 <니야야 수뜨라>에서 비판되고 있는 '자띠(j ti, 誤難)'의 24가지 논법들2) 가운데 용수의 논서에서 가장 많이 구사되는 논법이다. <니야야 수뜨라>(5.1.18)에 보면,

"이유가 삼시의 어느 경우에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무인 상사이다."

각주2) <니야야 수뜨라>(5.1.1)에 따르면, 同法·異法·增益·損減·要證·不要證·所立·分別·到·不到·無窮·反喩·無生·疑·問題·無因·義準·無異·可能·加得·不可得·無常·常住·果의 24가지이다.

논증식의 경우 능증(能證, s dhana)인 이유(因, hetu)에 근거해서 소증(所證, s dhya)이 증명된다고 한다. 하지만 ①능증은 소증보다 이전(p rva)일 수도 없고, ②이후(pa c t)일 수도 없으며, 또 ③이 양자가 동시(saha, yugapat)일 수도 없다는 논법이다. 다시 말해 능증에 의해 소증을 입증하는 논증식을 작성할 수 없다는 논증식 비판 논법이다.

<니야야 브하야>에 보면, ①만일 능증이 (소증보다) 이전에 존재한다면 소증이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능증하겠는가? ②만일 (능증이 소증보다) 이후에 존재한다면 능증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은 무엇의 소증이겠는가? ③만일 능증과 소증의 양자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무엇이 무엇을 능증하고 무엇이 무엇의 소증이겠느냐? 이유는 이유가 아닌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유가 아닌 것과의 공통성에 바탕을 두는 반대가 '무인 상사'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인지되는 근거인 논증에 바탕을 두고 지각되지 않는 목표인 논증해야 할 대상을 알아내기 위해 논증식을 작성하게 된다. 앞에서처럼 능증과 소증의 관계가도저히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논증식을 작성할 수 없다는 비판방법을 '무인 상사'라 한다.

논증식을 세우는 자는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자아의 상주를 논증하기 위하여 지각되지 않는 것을 이유로 한다. <방편심론>에서 반론하는 자는 "그대가 자아를 상주한다고 하면서 감관에 지각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이유가 '논증되어야 할 대상'(所證)에 대해서 과거에 있다면 그것은 벌써 소멸했고, 미래에 있다면 그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에 있다면 이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마치 소의 두 뿔이 동시에 나는 것과 같아 서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이것을 '時因[=시동] 상응', 곧 '무인 상사'라 말한다. 이처럼 두 존재 사이의 작용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시에 있기 때문에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은 용수가 즐겨 사용한다. 또 <니야야 수뜨라>도 그것을 알고 '무인 상사'라 하여, 이를 '논증식 비판' 논법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이 논법은 용수와 니야야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꽤 중요하다.

2. 니야야 수뜨라에 나타난 '무인 상사' 논법 논쟁

<니야야 수뜨라>에서는 '무인 상사' 논법에 대해서 제2장(2.1.8-1.16)과 제5장(5.1.18-20)의 두 군데서 언급하고 있다. 앞의 것은 니야야 수뜨라의 논의 소재인 16구의 가운데 제1구의인 '인식방법'을 다루는 부분이고, 뒤의 것은 니야야학파에서 잘못된 비판방법으로 여기는 '자띠'논법을 소개한 뒤 비판하는 부분이다.

이 제2편과 5편의 두 부분은 모두 먼저 대론자의 논의를 인용한 뒤에 그에 대해서 논박하는 경문을 싣고 있다. 그런데 제2편은 제5편과 같은 논의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제2편이 제5편보다 구체적인 개념의 쌍을 대입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먼저 <니야야 수뜨라>(2.1.8-11)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을 시작한다.

"현량 등은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방법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8)
"왜냐하면 만일 인식방법이 인식대상보다 이전에 성립한다면 현량은 감관과 대상의 접촉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9)
"만일에 이후에 성립한다면 인식대상의 성립은 인식방법들에 의한 것이 아니다."(10)
"만일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양자가] 동시에 성립한다면 각각의 대상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통각들이 순차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11)

이러한 것들은 용수의 비판과 같다. 단지 2.1.11에서 동시의 경우에서 인식의 방법과 대상이 동시에 있다면 많은 인식에 동시에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니야야에서 인식은 한번에 하나밖에 생기지 않는다는, "동시에 인식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의의 징표이다."(1.1.16)라는 정설에 위배된다. 이러한 것은 <니야야 수뜨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유가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논파는 하는 것이] 무인상사이다."(5.1.18)

<방편심론>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시에 걸쳐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여 '시동상응'(k la-sama)라고 부르며,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이 논법의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에 대해서, 니야야 논리가 이유의 설명에 주안점을 두고 있듯이 여기서도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이 논법을 '무인 상사'라 하고 있다.

어째든 니야야는 이것을 논박의 대상으로 삼고 대론자의 논법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이후의 두 경문에서는 이 논법이 '논법으로서의 정당성'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논증되어야 할 대상[所證]은 이유 때문에 성립하기 때문에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5.1.19)

<니야야 브하샤>에서는 '인식대상의 인식'이나 '성립되어야 할 대상의 성립'이 모두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분명히 지각되기 때문에 '이유에 의한 논증되어야 할 대상', '인식에 의한 인식대상', '성립에 의한 성립되어야 할 대상' 등은 모두 실재론적 입장에서 보면 삼시에 걸쳐 논파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부당함을 2.1.15에서는 '악기 소리'와 '악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또 삼시에 걸쳐 부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리에 의해서 악기의 성립이 있는 것처럼 그것은 성립하기 때문이다."(2.1.15)

이러한 비유는 <니야야 수뜨라>(1.1.5)에서 열거하는 세 가지 비량의 하나인 '경험적 추리'(p rvavat anum na, 如前比量)에 해당한다. 곧 이전에 언젠가 북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던 경험이 있을 때 나중에 '이유'인 소리만 듣고 '논증되어야 할 대상'인 북을 추리하는 비량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소리에 의해 악기의 존재가 증명되듯이 인식방법의 존재는 그 결과에 의해 알려지기 때문에 부정은 삼시에 걸쳐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나중에 있는 결과인 소리가 인식방법이 되어 앞에 있는 원인인 인식대상을 증명하기 때문에 용수의 부정은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무궁-반유 상사'9) 역설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니야야 수뜨라> 5.1.9.; "비유의 근거를 지목하지 않기 때문에, 또 반대의 비유에 의해서 반대되기 때문에 '무궁-반유 상사'의 양자이다." 더 설명하면 '무궁-반유 상사'에서 '무궁 상사'란 논증되어야 할 대상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비유(실례)를 드는데 처음에 들었던 비유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두 번째 비유를 들어야 하고, 그런 두 번째 비유 또한 타당성을 증명되어야 하므로 마침내 끝없는 비유가 필요하게 된다고 하여 논증식 작성 자체를 비판하는 논법이다. '반유 상사'란 논증되어야 할 대상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비유를 드는데 그런 비유와 상반된 비유도 들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 든 비유에 의한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논법이다.

①이유와 논증해야 할 대상의 관계가 삼시에 걸쳐 성립되지 않는다면 삼시에 걸쳐 성립되지 않는다는 그런 부정 또한 삼시에 걸쳐 성립되지 않는다. ②이와 달리 그런 부정만은 삼시에 걸쳐 성립된다면 이유와 논증해야 할 대상의 관계가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성립되지 않아, ①에서는 '무궁 상사', ②에서는 '반유 상사' 논법을 이용하여 '무인 상사' 논법을 부당하다고 논박하고 있다.

"또한 부정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에 '부정되어야 할 것'은 부정되지 않는다."(5.1.20)

<니야야 브하샤>에서는 부정이 있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부정이 부정되어야 할 것의 이전, 이후, 또는 동시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유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인식방법을 세우는 것은 확립된다.'라고 주석한다.

다시 말해 부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부정 작용과 부정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무인 상사' 논법에서 보면 '부정 작용'이 '부정 대상'보다 앞설 수도 없고, 뒤설 수도 없으며, 또 양자가 동시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니야야의 비판은 <니야야 브하샤>에서 '무인 상사' 논법을 거꾸로 이용하여 논박한 것이라고 주석하고 있지만, 아마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파논리를 포괄하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용수의] 부정도 삼시에 걸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2.1.12)는 뒤에서 보게 될 <광파론>(12)와 <회쟁론>(20)에서 니야야의 반론과 같다. 용수는 <광파론>(13)과 <회쟁론>(69)에서 니야야의 반론은 각각 '인허타난(認許他難)' 또는 '소증 상사(所證 相似)'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니야야 수뜨라> 제2편은 이에 대꾸하지 않고 2.1.13에서 "[용수는] 모든 인식방법을 부정하기 때문에 부정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 것은 인식방법이 아니다'라는 것을 예증하고, 이유를 달기 위해서 용수는 현량이나 다른 추리를 사용해야 했다. 그때 인식방법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또 2.1.14에서는 "또는 그것(인식방법의 부정)이 인식성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인식방법이 특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이것은 언어의 실체성을 인정한다면 모든 것의 실체성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따라서 이것은 '무궁-반유 상사'적 역설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곧 인식방법이 부정된다면, ①그러한 부정 또한 인식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부정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고, ②그와 반대로 그러한 부정만은 인식성을 가진다면 삼시에 걸쳐 부정을 통해서 모든 인식방법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인식방법은 부정되고 어떤 인식방법은 긍정된다는 꼴이 되어, ①에서는 '무궁 상사', ②에서는 '반유 상사' 논법을 이용하여 '무인 상사' 논법을 부당하다고 논박하고 있다.이처럼 <니야야 수뜨라>에서는 '무인 상사' 논법을 비판하고 있다.

3. 광파론15)에 나타난 '무인 상사' 논법 논쟁

각주15) <광파론>(Vaidalya-prakara a)은 72개의 간결한 경(s tra)과 그에 대한 용수의 자주(自註, prakara a)로 되어있다. 이 책은 '인식수단(pram a, 量)을 비롯한 16구의를 파척하는' 론이라고 말해지듯이, 오로지 <니야야 수뜨라>의 첫머리에 설해진 16구의를 공성의 입장에서 비판하기 위해서 지어진 용수의 인명(因明, Hetu-vidy )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산스끄리뜨 본이나 한역본은 없고 다만 티베트 역본만 현존한다.

<니야야 수뜨라> 2.1.12에서 "부정은 불가능하다. [그런 부정 또한]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나 5.1.20에서 "또 부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정당하는 것은 부정되지 않는다."에서는 '인식방법'이 '인식대상'보다 앞서거나 뒤일 수 없고, 양자가 동시적일 수도 없다는 '무인 상사'적 논파에 대해, 그런 '부정' 또한 '부정대상'보다 앞서거나 뒤일 수 없고, 양자가 동시적일 수도 없다는 의미로 논박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무인 상사'적 부정 또한 '무인 상사'적 논법으로 비판될 수 있으므로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용수는 <광파론>(11)에서 "다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은 앞뒤로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실재성을 '무인 상사'적으로 삼시에 걸쳐 논파하는데 그 주석을 보기 하자.

"인식방법은 인식대상보다 앞서거나 뒤이거나, 양자가 동시적이든가 일 것이다. 그 가운데 만일에 인식방법이 인식대상보다 앞서 있다면 그 경우 앞의 것은 뒤의 것의 인식방법이라고 하겠지만 뒤의 것인 인식대상은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인식방법이고, 무엇이 그 인식방법에 결정되는가? 또 만일 (인식방법이 그 대상보다) 뒤에 있다고 한다면 벌써 인식대상이 존재하고 있을 때에 무엇이 그 인식방법이 될 것인가? 왜냐하면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벌써 완전히 생겨난 것의 인식방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토끼의 뿔(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 등도 인식방법이 되어버리는 잘못에 빠지기 때문이다. 또 만일 '(둘이) 동시에 있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동시에 생겨나는 소의 두 뿔이 원인과 결과로서 (관계하는 것)은 불합리 한 것 같다."

또 여기서 <니야야 수뜨라>(2.1.8)의 인식방법이 인식대상보다 앞에 있는 경우의 용수의 비판은 <니야야 수뜨라>(2.1.9)에 있고, 인식방법이 인식대상보다 뒤에 있는 경우의 비판은 <니야야 수뜨라>(2.1.10)에 인용된다. 양자가 동시에 있는 경우의 비판은 <니야야 수뜨라>(2.1.11)와 약간 취지를 달리 하고 있는데 <니야야 브하샤>(5.1.18)는 용수의 동시에 있는 것의 비판과 일치한 것은 이미 니야야학파의 경우에서 본 바와 같다.

그러자 적대자인 니야야는 제12절에서 '무인 상사' 논법을 거꾸로 이용하여 그런 논파적 부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용수는 <광파론>(12와 주석)에서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부정 또한 타당하지 않다."(12)
"용수는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삼시에 걸쳐 언제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그대의 행위,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부정도 부정되어야 대상에 대해서 앞에 있든지, 뒤에 있든지, 동시에 있든지 어느 하나일 테지만 그 부정도 (인식방법과 같은 이유로) 삼시에 성립되지 않는다.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말 또한 어떤 방법으로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것에 의한 부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12 주석)

여기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을 부정하는 것도 부정대상보다 먼저거나 나중이거나 동시일 경우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째 부정되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말은 어떻게 부정될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 부정할 수 있겠는가. 둘째 만약 부정이 성립하게 될 때에는 삼시에 걸쳐서 고찰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도 마찬가지로 성립된다면 이 양자의 성립에 대해서 힐난할 필요가 없다. 셋째 이처럼 부정과 부정대상이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을 때는 부정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니야야가 삼시의 형태로써 부정에 대해 삼시의 형태로써 다시 부정하는 이런 식의 논리는 <니야야 수뜨라> 제5편에 등장하는 '자띠' 논법 가운데 '무궁 상사'(prasa ga sama) 논법에 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무궁 상사' 논법은 늘 그와 짝을 이루는 '반유 상사(pratid nta sama)' 논법을 수반해야 한다.

<광파론>(12 주석)에서도 또한 다음과 같이 '반유 상사'적 논의를 니야야의 논박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만일 (그대가) '부정은 성립된다'고 한다면 삼시에 걸쳐 음미한 내용이 같은 내용이라면 인식방법과 인식대상도 성립할 것이고, 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그대는 두 경우의)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여 이 부정되는 대상과 부정하는 주체가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부정(이라는 작용)도 있을 수 없다."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존재성을 '무인 상사' 논법으로써 삼시에 걸쳐 부정하기는 했지만 그런 부정 자체는 삼시에 걸쳐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인 상사' 논법의 보편타당성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무인 상사' 논법으로써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에 대한 처음의 비판도 또한 그 타당성을 잃게 되어, '무인 상사' 논법에 의해 부정될 수 없다고 니야야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또 만일 중관론자가 '무인 상사' 논법이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을 부정하는 데는 쓰일 수 있지만 부정 그 자체를 부정하는 데는 쓰일 수 없다고 한다면 어느 경우에는 이 논법이 타당하고 어느 경우에는 이 논법이 부당한 것인지 그것의 서로 다름을 설명해야 하고, 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서로 다름을 말해야 한다는 구절을 덧붙이고 있다.이 구절은 <니야야 수뜨라>(2.1.20)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대론자의 논의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다른 인식수단의) 작용이 없음을 보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작용이 없음이 아님을 보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이것은 <니야야 수뜨라>에서 대론자의 논박을 인용하고 있는 2.1.18과 의미에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경문은 '인식방법이 인식방법에 의해 성립한다면 다른 인식방법이 성립하는 것으로 귀결된다'(2.1.17)는 것의 '무궁 상사' 논법적인 경문과 짝을 이루는 '반유 상사' 논법적 경문임으로 볼 수 있다.

"또는 그것(다른 인식방법)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방법의 작용이 없이도) 인식방법이 성립하듯이 인식대상이 성립한다."(2.1.18)

이것은 '어떤 인식방법이 다른 인식방법에 의해 성립한다면 계속해서 무한하게 인식방법의 존재가 요청되고(2.1.17), 그렇지 않고 다른 인식방법이 없이 인식방법이 스스로 성립한다면 인식대상도 또한 인식방법이 없이 스스로 성립하는 꼴이 된다'(2.1.18)는 역설 구조를 <니야야 수뜨라>에서는 두 경문으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다.
이처럼 <니야야 수뜨라>에서 '무인 상사' 논법(2.1.8-2.1.11)과 '무궁-반유 상사' 논법(2.1.17-2.1.18)으로 나누어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존재성을 대론자가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광파론>(12)에서는 니야야에서 중관론자의 '무인 상사' 논법적인 인식비판을 '무인 상사' 논법과 '무궁-반유 상사' 논법을 혼합하여 비판하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니야야에서 '자띠' 논법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때 사용하는 논법 또한 '자띠' 논법이다.

이어지는 <광파론>(13-14)에서 용수는 <니야야 수뜨라>에서 '부처(負處, 패배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인허타난(mat nuj )'의 오류를 거꾸로 이용하여 니야야를 논박하고 있다.

<니야야 수뜨라>(5.2.20)에 따르면 '인허타난'이란 '자기주장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타자의 주장에서 과실을 귀결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광파론>(13 및 주석)을 보면,

"부정이 성립한다면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또한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앞에서 (그대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기 때문에."(13)

"삼시에 걸친 음미에 의해 부정하는 경우에는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도리어) 성립하는 것이 된다고 그대가 말한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앞에서 (그대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대는 앞에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란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우리의 비판을) 인정한 것에 바탕을 두고 나중에 그런 (자기의) 잘못이 생긴 것을 보고 우려하며, 부정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고 잘못을 생각해서 반론을 하지 않았는가?"(13 주석)

이것은 인식방법과 인식대상 사이의 삼시적 관계성을 부정하는 중관론자의 주장에 대해 <니야야 수뜨라>(2.1.12)에서 비판한 것을 용수가 다시 '인허타난'의 오류를 통해서 비판한 것이다. '인식방법'과 '인식대상' 사이의 삼시적 관계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양자가 부정되는 것이라면 그와 똑같이 '부정'과 '부정대상' 사이에도 삼시적 관계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니야야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용수는 니야야의 이런 주장은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부정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논박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한 순간 자신의 패배를 시인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①용수: 인식방법과 인식대상 사이에 삼시적인 관계성이 부정되므로 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②니야야: 그런 부정 또한 부정대상과의 삼시적 관계성이 부정되므로 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③용수: 위와 같은 논박은 인식방법과 인식대상 사이에 삼시적 관계성을 부정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인허타난의 오류에 빠진다.

<광파론>(14와 주석)에서는 이러한 '인허타난'의 오류를 이용한 논박은 더 이어진다.

"만일 (그대가 일단)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 이상 인정했을 때 벌써 논쟁은 끝났다."(14)

"왜냐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그대가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론했을 바로 그때 자신의 잘못을 피하려고 하면서 그대는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없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없기 때문에 (용수의) 부정은 무엇인가'라고 (그대는) 말했다.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 뒤에 (그대는 나의) 부정을 물리쳤기 때문에 (그대가 자신의 잘못을) 처음으로 인정했을 때 벌써 논쟁은 끝났다."(14 주석)

또한 <광파론>(15 및 주석)에서는 비유를 들어 보충하고 있다. 대론자가 만일에 부정되는 대상이 없다면 부정이라는 것도 없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옳지 않다. 실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상상을 제거하는 것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치 어떤 사람이 그다지 깊지도 않은 냇물에 바라면서 깊다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공포에 빠져 있을 때 그 사람의 공포와 걱정을 없애주기 위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여기에는 깊은 물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없는데 그것이 있다고 상상하는 의식을 제거하는데 적합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정되는 것이 실재하지 않을 때 부정되는 것을 거꾸로 표현하여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대론자가 '대상이 없는데 부정이 행해지듯이 인식대상이 없이 인식방법이 성립하는 것이다'고 말해 우리들의 논의에도 같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같은 오류가 대론자 자신에게도 있는 것을 인정한 바로 그 점에 의해 논쟁은 끝난 것으로 인정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용수는 니야야에서 신봉하는 논리학적 원리인 '인허타난'의 오류를 거꾸로 이용하여 니야야를 역공해서 대론을 끝낸다.

4. 회쟁론32)에 나타난 '무인 상사' 논법 논쟁

각주32) <회쟁론>(Vigrahavy vartan )는 70개의 시송(詩頌)과 그 하나하나의 시송에 대한 용수 자신의 해설로 이루어졌다. 제1송-제20송 사이에는 용수의 대론자로 등장하는 실재론자인 적대자가 용수에게 퍼부은 '논쟁' 부분에 속하고, 제21송-71송까지는 실재론자의 논쟁에 대한 용수의 '차단' 부분에 해당한다. 이 책은 연기의 입장에서 니야야학파나 설일체유부의 유자성론(有自性論)을 논파하는 작품인데, 특히 내용적으로 그 자체도 공성에 지나지 않는 '공성의 설시'의 타당성을 논증하는 점에 특색이 있다. 이 책은 산스끄리뜨, 한역, 티베트 역이 모두 현존한다.

<광파론>에서는 '무인 상사' 논법이 '인식방법'과 '인식대상' 또는 '부정'과 '부정대상'이 실재성 여부에 대해서 보았다. 그러나 <회쟁론>에서는 이 논법이 공성을 부정하는 것은 정당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대론이 이루어진다. <회쟁론>에서 대론자는 중관론자인 용수를 논박하는데 오히려 용수가 즐겨 사용했던 '자띠' 논법을 쓰고 있다.

그 가운데 '무인 상사' 논법을 써서 용수를 논박하는 것은 제20송과 그것의 주석이다.

"부정이 먼저 있고 부정되는 것이 나중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부정이 나중에 (부정되는 것이 먼저) 있어도, (둘이) 동시에 있어도, (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은 어디까지나 있다."(20)
"이 (자성이 없다고 하는) 부정에 대해서, 부정이 앞에 있고 부정되는 것이 나중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정이 있을 때는 아직) 부정되는 것이 없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부정한다고 하는 것인가?

또 부정이 나중에 있고 부정되는 것이 앞에 있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부정되는 것이 먼저 벌써 존재했을 때 부정은 무엇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또 부정과 부정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부정은 부정되는 것에 대한 작용원인으로 되지 않을 것이고, 부정되는 것이 부정에 대한 작용원인으로 되지 않는다.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개의 사물 사이에 작용이 없는 것은) 예를 들면 토끼(의 머리)에 동시에 나있는 두 개의 뿔 가운데 오른쪽 뿔은 왼쪽 뿔에 대한 작용원인도 아니고, 왼쪽 뿔은 오른쪽 뿔에 대한 작용원인도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모든 것은 자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존재성에 대한 '무인 상사'적 부정에 대해서 '무인 상사'적으로 논파하는 니야야의 논리와 같다. 다시 말해 '부정 작용'이 '부정대상'보다 먼저 있다면 대상 없는 작용은 의미가 없다. 반대로 '부정 작용'이 '부정대상'보다 나중에 있다면 벌써 부정 부정된 대상이 존재하는데 다시 부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양자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마치 인과적으로 관련이 없는 소의 두 뿔처럼 어느 것이 어느 것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로 '자성은 어디까지나 있다'고 하여 용수의 논리를 논파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니야야가 '무인 상사'적 논법으로 공성의 부정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용수는 제69송에서 다시 비판하고 있다.

"삼시에 걸쳐 [부정이 타당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고 그대가 비판하)는 것은 벌써 답변되었다. 그 것은 (우리가 제63송에서 대답한 내용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선행, 후행, 동시라는) 삼시에 걸친 (능·소 관계를 비판하는) 부정하는 논거는 공성론자들이 받아들이는 것이다."(69)

"삼시에 걸쳐 부정을 나타내는 (그대의) 이유는 벌써 비판이 끝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삼시의 이유를 들어 부정 등 여섯 가지 존재를 비판하는 것을 논증되어야할 대상으로 삼는데 우리 또한 제63송에서 부정을 비판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대와 우리는) 증명되어야 대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실로 이렇게 (제20송에서 부정을 비판했던) 그대의 말에 의해, 부정은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으며, 부정(이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이 부정의 대상인 그것도 마찬가지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부정과 부정되는 것이 없을 때 그대가 (중관자의) 부정은 부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삼시에 걸쳐 부정을 말하는 이 논거야말로 (우리) 공성을 논하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우리야말로) 모든 것의 자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69송 주석)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그대가 나를 논박하기 위해 거꾸로 공격한 삼시에서의 이유는 벌써 대답되었다. 그것은 논증되어야 할 것(s dhya, 所證)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입장에서는 증명되어야 하는 것(s dhya sama, 소증 상사)이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 또 논증되어야 할 것과 논증수단 사이의 관계가 앞, 뒤, 동시의 삼시의 어느 경우에도 성립할 수 없다는 반(反)이유(pratihetu)는 우리들 공성론자들에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니야야가 용수의 공성적 부정을 논박하기 위해 역공격하는 데에 쓴 삼시적 이유는 니야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증명하려고 했던 '공성적 부정의 부당성'과 마찬가지로 증명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논박의 도구로 쓸 수 없다. 곧 삼시에 걸친 논파법인 '무인 상사' 논법은 공성론자(중관론자)의 도구이지 니야야의 도구일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소증 상사'는 '논증해야 할 것과 마찬가지로 증명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를 가진 술어이므로 <니야야 수뜨라>에서는 16구의(句義, pad rtha) 가운데 13번째 구의인 '사인(似因, hetv bh sa)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38) 제5편 제1장에서 설명하는 24가지 '자띠'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소증 상사란 '사인'의 하나이기도 하고 '자띠' 논법의 하나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니야야 수뜨라>나 <니야야 브하샤>39)각주39) 宮坂宥勝, 앞의 책, p.75 참고. 에서는 '사인'으로서 '소증 상사'는 '이유'가 논증해야 할 대상[소증]과 마찬가지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말하고, '자띠'로서의 '소증 상사'는 '비유(d nta)가 논증해야 할 대상과 마찬가지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회쟁론>(69송)의 주석에 등장하는 '소증 상사'는 '이유'가 논증해야 할 대상과 마찬가지로 증명을 필요로 하는 부당한 이유인 '사인'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용수는 이어서 '자신은 어떤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제63송을 다시 인용한다.

"나는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으며, 부정되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부정한다'는 이런 방은 그대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63)

지금까지 '무인 상사' 논법을 이용한 니야야의 '용수의 실체(자성) 부정'에 대한 비판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용수는 그런 비판은 '소증 상사'의 오류에 빠져 있다.
②삼시에 걸친 비판법인 '무인 상사' 논법은 중관론자의 도구이지 니야야의 도구가 아니다.
③니야야에서는 용수가 무엇인가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용수의 부정을 '무인 사유'적으로 논파하지만 용수 자신은 아무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의 대상도 없다.

이처럼 용수는 세 가지 논거를 들어 니야야를 다시 비판하고 있다. 니야야는 이 가운데 마지막 논거를 '부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으로 보고, '부정이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 다시 이에 대해서 반론을 계속 편다.

"부정은 삼시의 어느 경우에서도 성립한다. (부정되는 것에 대해서) 앞에 있는 (부정적) 근거도 있을 수 있고, 나중에 있는 근거도, 동시에 있는 근거도 있다. 그 가운데서 앞에 있는 근거라고 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와 같다. 나중에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제자와 같으며, 동시적인 것은 불빛에 대한 등불과 같은 경우이다."

니야야는 이것이 '부정작용'은 '부정대상'보다 앞서건 뒤에 오건 동시적이건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무인 상사' 논법에 대한 논박이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부정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니야야의 이와 같은 비유는, 앞에서 보았듯이 '무인 상사' 논법을 비판하는 "논증되어야 할 대상[所證]은 이유 때문에 성립하기 때문에 삼시에 걸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5.1.19)와 그의 예로 든 "또 삼시에 걸쳐 부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리에 의해서 악기의 성립이 있는 것처럼 그것은 성립하기 때문이다."(2.1.15)와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이유(能)와 논증되어야 할 대상(所), 인식방법(能)과 인식대상(所), 부정작용(能)과 부정대상(所)과의 관계의 각각에 대해 능소의 둘 사이에 삼시적인 연관성을 검토하면서 둘 사이의 존재성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용수와 니야야 사이의 논쟁이 중심이다. 그런데 니야야에서는 이와 같은 능과 소의 삼시적인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니야야 수뜨라>(2.1.15)에서 나오는 소리와 악기의 비유는 <니야야 수뜨라>(1.1.5)에 나오는 세 가지 비량 가운데 경험적 추리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전에 북을 두드리면 북소리가 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이 나중에 그 소리를 들을 경우 '이전의 경험과 같은 북소리'임을 알고 그 북을 추리해내듯이 '논증되어야 할 대상'과 '이유'의 관계는 삼시적으로 부정될 수 없다고 한다.

그 예는 다르지만 <회쟁론>(69)의 주석에서 니야야가 주장하는 세 가지의 관계도 '논증되어야 할 대상'과 '이유'의 관계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든 실례이므로 <니야야 수뜨라>(2.1.15)에서 들었던 '소리와 악기'의 실례와 같은 맥락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인 상사' 논법적 비판에 대해서 니야야가 다시 비판한 <니야야 수뜨라>(5.1.19)나 2.1.15, <회쟁론>(69)에 등장하는 논리는 모두 같은 바탕 위에 있다. 이 때문에 '무인 상사' 논법을 둘러싼 용수와 니야야 사이이의 논쟁의 역사에서 가장 마지막 논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용수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서에 대해서 앞(의 제20송 이후)에서 지적된 잘못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만일 그렇다면 그대는 부정이 참으로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대는 자신의 주장과 모순하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본체의 부정도 성립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회쟁론>에 나타난 '무인 상사' 논법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용수: '자성(svabh va)의 부정'(회쟁론 이전의 용수 논서)
②니야야: '자성의 부정'에 대한 '무인 상사'적 부정(제20송과 그 주석)
③용수: '자성의 부정'에 대한 '무인 상사'적 부정에 대한 그릇된 이유(似因) 가운데 하나인 '소증 상사'로 부정(제69송 주석)
④니야야: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조명과 등불의 예를 들어 자신의 ②에서의 부정이 성립함을 주장(제69송 주석에서 용수가 인용: <니야야 수뜨라>(5.1.19)나 (2.1.15)와 같은 논리)
⑤용수: ④처럼 주장하면, 첫째로 그것은 다시 '무인 상사' 논법과 같은 방식으로 비판되고, 둘째로 부정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되므로 ②와 같은 부정을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제69송 주석에서 용수의 답변)

나오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 <니야야 수뜨라>, <광파론>, <회쟁론>에서 '무인 상사' 논법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니야야와 용수 사이의 논쟁사의 요점을 논의의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1. '무인 상사' 논법 소개
1-1. <방편심론>: '시동 상응' 논법 소개
1-2. <니야야 수뜨라>(5.1.18): '무인 상사' 논법의 의미와 원칙 소개
1-3. <니야야 수뜨라>(2.1.8-11): '무인 상사' 논법의 예 소개
1-4. <광파론>(제11절): '무인 상사' 논법을 이용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 비판

2. '무인 상사' 논법에 대한 니야야의 비판
2-1. <니야야 수뜨라>(5.1.19): 이유와 논증되어야 할 것(소증)을 통한 '무인 상사' 논법 비판
2-2. <니야야 수뜨라>(2.1.15): 소리와 악기의 비유에 의한 '무인 상사' 논법 비판
2-3. <니야야 수뜨라>(5.1.20): 부정의 불가능성
2-4. <니야야 수뜨라>(2.1.12): '무인 사상'적 부정의 '무인 상사'적 불가능성
2-5. <니야야 수뜨라>(2.1.13-14): '무인 상사' 논법에 대한 '무궁-반유 상사'적 논파
2-6. <광파론>(12절): 적대자가 '무인 상사' 논법을 '무인 상사'적 '무궁-반유 상사' 논법으로 비판
2-7. <회쟁론>(제20송): 용수의 '자성 부정'의 부정을 '무인 상사' 논법으로 비판

3. '무인 상사' 논법 비판에 대한 용수의 다시 비판
3-1. <광파론>(제13-14절): 제12절에 등장하는 적대자의 논의를 '인허타난'의 부처로 비판
3-2. <회쟁론>(제69송 주석1): 제20송의 비판을 '소증 상사'의 사인으로 비판

4. 용수의 새로운 논의
4-1. <광파론>(제15절): 부정 대상이 없다면 부정도 없다는 적대자 논의를 비판
4-2. <회쟁론>(제69송 주석2,3): 제20송과 동일하게 논파된다고 니야야 비판

문을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논저서로 〈가우다빠다의 불살생과 용수의 중도설〉 〈마야설의 불이일원론적 이해〉 《인도의 사상과 문화》, 역서로 《힌두교 입문》 《인도철학의 자아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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