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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생태학의 덕(德) 윤리적 접근 / 데미안 키온
데미안 키온 | 배상환 번역
[23호] 2005년 06월 10일 (금) 데미안 키온 배상환 번역

1. 서론

불교가 생태학적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근래에 자주 일어나는 논쟁이다. 처음부터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선 회의론자 중 한명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붓다나 그의 제자들이 생태학 문제를 깊게 숙고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는 별로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자료들도 종종 애매모호할 때가 많은데, 예를 들면 슈미트하우젠(Schmithausen)이 '친문명요소(pro-civilization strand)'와 '은둔요소(hermit strand)'를 비교하는 경우처럼 말이다.1) 각주1) Schmithausen L. Buddhism and Nature. Tokyo: 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1999, p.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시각에선 자연세계의 가치와 상태를 부정한다. 기독교의 가르침과 대조적으로 불교적 시각에서 비친 세계는 창세기(vv.9ff)에 보이는 신의 창조물로써 보기에 좋고, 선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불교학에선 세계가 소멸할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심지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것은 우주질서의 기본 특징처럼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자연의 최후 소멸은 윤회(sams ra)의 기본 특징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멸을 막으려는 노력도 순수한 망상에 사로잡힌 행동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검은 코뿔소가 있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인가 그렇지 않은가와 같은 생태학적 문제에 답해줄 뚜렷한 근거도 찾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자연보호를 도덕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으며, 왜 우리가 보존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뚜렷한 이유도 명시한 바 없다.

더 나아가 생태학 문제는 근본적으로 근대의 문제이며, 우리가 대면하는 온실의 가스나 지구온난화 같은 생태학적 문제와는 별개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불교학이 고대 우주학을 연구하지 않는 한 현대과학의 용어로 이루어지는 논의 속에서 어떤 식으로 참여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오늘날 뛰어난 과학지식을 가진 불교인들은 물론 많지만, 내가 보기에 전통적 핵심 지식인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용어로 자연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따라서 적어도 현재로서는 불교가 현대 생태학 문제에 대해 신뢰 있는 답변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불교 생태학이 확실한 신임을 얻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이안 해리스(Ian Harris)의 말에 동의하며, 이 분야에 관한 최근의 관심은 많은 부분 녹색의제(綠色議題)를 추구하는 서구인들이 주도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미국의 불교도이자 생태학 작가인 스테파니 카자(Stephanie Kaza) 역시 "현재시점에서는 생태학적 실천이 근본적으로 불교 전통에 의한 것인지, 미국 환경주의자들에 주도된 것인지 모호하다"라고 순순히 인정했다.2) 각주2) Sahni P. Environmental Ethics in Early Buddhism: A Virtues Approach. PhD: University of London, 2004, p.3에서 인용.

서론이 너무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볼 경우에, 불교는 생태적 관점에서 단일 체계가 아니며 어떤 환경문제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더 풍부한 배경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성급히 덧붙이고 싶다. 또한 불교학에는 환경 철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근원적 특성들이 있다. 이 논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특성 중 하나를 서구적 덕의 윤리 전통에 기대어 탐구하는 것이며, 불교생태학의 근간을 마련할 수 있는 최초의 도안을 그리는 것에 있다.

2. 덕의 윤리

덕의 윤리는 서구의 가장 오래된 윤리 이론 체계의 동체이며,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유래한 이 학문의 전통은 키케로와 같은 전통 로마 작가에 의해 계승되었고, 중세의 아퀴나스에 의해 다시 부활되었다. 기독교적 해석에서 볼 때 덕의 윤리는 종교개혁 전까지 우세한 접근방식이었지만, 계몽운동 시대의 다른 종교 윤리와 함께 비판을 받았다. 현대에는 의무론적 윤리설과 결과론적 윤리설이 성행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그 가설들의 취약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 결과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다. 1981년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덕의 상실: 도덕적 이론의 연구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3)이라는 영향력 있는 책을 출간하였다. 각주3) MacIntyre A.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 London: Duckworth, 1981.

이 책은 덕의 윤리적 문제를 부활 시켰으며, 덕의 윤리를 현대의 도덕적 문제의 해결점을 찾기 위한 주류적 접근방식으로 기술하였다. 필리파 푸트(Philippa Foot)나 로잘린 허스트하우스(Rosalind Hursthouse)등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 이 토론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기독교 윤리학 분야에서 덕의 접근방식을 이끌어나가는 주창자이기도 하였다.

3.중도로서의 덕의 윤리

덕의 윤리는 행동보다 행위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의무론적 윤리설처럼 혹은 규칙에 따르는 결과론적 윤리관처럼 행동의 결과를 강조하기보다는 인격을 더 강조하는 접근방식이다. 도덕적 행동과 결과를 부정하진 않지만, 탈실체화 된 행동이라고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핵심적으로 강조한다. 기독교적 덕의 윤리 접근방식을 생태학으로 발전시킨 근간의 저자 실리아 딘-드러몬드(Celia Deane-Drummond)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덕의 윤리에서는 다른 접근 방식과 다르게 단순히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행위자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보다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집중된다. 따라서 행동은 개인의 인품과 동떨어졌다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른 것이다. 덕의 윤리에서 기본 전제는 권리나 의무 혹은 책임에 선행해서 선함을 근본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덕의 윤리학자는 윤리적 행동이 특정한 규칙으로 체계화 될 수 있다는 발상을 거부한다.4) 각주4)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4.

덕의 윤리적 다른 핵심요소는 삶 전체의 맥락에서 행동을 바라본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하 나의 장면보다는 전체 영화가 더 중요한 것과 비슷하다. 특별한 인격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이유는 균형 잡히게 원숙한 삶을 살면서, 충만하고 행복하게 번영한 상태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덕의 윤리적 목표는 인간의 잠재적 만족이며 그에 따르는 장기적 행복이기 때문에 결과가 고려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상태를 기독교에서 아름다운 것(beautitudo) 또는 축복(blessedness)이라고 번역하여 행복(eudaimonia)라고 했다. 반면에 도덕적 행동의 결과에 주시한다면 덕의 윤리는 축적된 경험으로 볼 때 위험한 장소를 알려주며, 장기적으로 인간 행복에 이바지하지 않는 행동들은 피해야 한다는 규율과 지침을 포함할 정도로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4.덕의 정의

덕은 목적에 가장 적합한 것이며 탁월한 것이다. 칼의 덕은 날카롭고 잘 자를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적 맥락에서 덕이란 실천이나 습관화를 통해 관습화 되여 자연스러운 성격의 어떤 특징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phronimos)를 지닌 인간에 의한 원칙, 그 이성적 원칙이 결정하는 (우리와 연관된) 중용, 그 중용의 범위 안에서의 선택(prohairesis)과 관련한 성격의 상태(hexis)'가 덕이라고 정의했다. 5) 각주5) Nicomachean Ethics ii.6, 1106b36-1107a2. W.D.Ross(trans) Oxford, Clarendon Press, 1992.
허스트하우스(Hursthouse)는 덕은 '인간이 행복(eudaimonia)의 상태에서 번성하며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성격적 특징'이라고 정의하였으며, 이어리(Yearly)는 '판단을 내리는 인간의 우수성을 통하여 번영으로 이르게 하는 것을 실천하고, 욕망하고 느끼려는 성향'이라고 정의했다. 6) 각주6) Macmillan T. 'Virtue-Based Ethics: A Comparison of Aristotelian-Thomistic and Buddhist Approaches.' Religion East and West 2002(2):37-50에서 인용.

서구 전통에서는 네 개의 중요 기본덕목으로 분별력(prudence), 정의(justice), 절제(temperance), 그리고 강인성(fortitude)을 꼽았다.7) 각주7) 기독교는 이것에 신학적 3덕이라 불리는 믿음, 희망, 자비를 덧붙인다.
분별력은 '행동의 지침이 되는 실천적 이성의 덕'이라고 말했다. 8) 각주8)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4.

분별력은 라틴어 쁘루덴띠아(prudentia)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이며, '실천적 지혜'이라고 보통 번역하는 그리스어 프로네시스(phronesis)로부터 파생했다. 실천적 지혜는 공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움직이는 이성이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의 영역은 인간사와 연관된다. 눈앞에서 해결하고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지 기하공리(幾何公理)나 수학 원칙과 같은 불멸의 진리를 고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후자는 공론적 지혜(sophia)의 문제이다. 현대 영어 'prudence'는 절약이라는 의미로 쓰이며, 국민의 지갑을 쥐고 흔드는 정치인들이 더 선호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윤리적 담론에선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이 덕목이 없다면 다른 덕목들은 방향과 목적을 상실하기 때문에 모든 덕의 '어머니'로 자주 그려져 왔다. 아퀴나스는 분별력의 단순한 정의를 '인간사의 지혜'라고 내렸으며, 이 지혜의 실천은 매일 삶에서 맞닥뜨리는 실용적인 문제들을 결정하는 고도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아퀴나스는 분별력을 세 가지 단계로 다시 분류했다. 개인의 선이 목표인 개인적 분별력과 가족생활을 위한 가정의 분별력 그리고 공공의 선이 목표인 정치적 분별력이다.9) 각주9)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4.

분별력의 영역은 사색, 숙고, 명상, 비판적 자기 성찰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정의 실천이다. 이 과정은 순수하게 묵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당면한 문제를 자세하게 고찰하는 것과 과학지식과 같이 자연세계에 대한 경험 지식을 요구한다. 어떤 행동도 모호함과 우연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언제나 인간의 선택과 행동에는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되기 때문이다. 실천적 이성은 공론적 이성과 다르게 유한한 열망만 가능하며, 따라서 덕의 윤리에서는 백퍼센트 참이라고 보증된 행동이란 없다. 예를 들면 항상 미리 정해진 규칙코드를 따르거나, 결과주의 스타일로 행동의 대안을 자로 재듯이 용의주도하게 미리 따지는 것 등은 불가능하다.

나머지 덕의 특징을 간단히 말하자면 정의는 '사회 질서 속에서 타인과 함께 하는 타인에 대한 인간의 행동의 윤리덕'으로 정의된다. 10) 각주10) Macmillan TF. 'Virtue-Based Ethics: A Comparison of Aristotelian-Thomistic and Buddhist approaches.' Religion East and West 2002(2):37-50, p.42.

정의는 타인과의 관계를 좌우하는 것과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점에서 다른 덕과 구별된다. 개인 간에 크게는 사회 속에서 공정하고 올바른 관계를 찾는 원칙이다. 아퀴나스는 '정의는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을 공평하게 해주는 습성'이라고 말했다.11) 각주11)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1.
공정한 선택이 글로 쓰여 체계화됐을 때 법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불굴의 정신 혹은 용기는 '탁월함에 도달하는 데 장해가 되는 감정의 관리와 절제의 보존적 윤리덕'으로 정의한다.12) 각주12)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4에서 약간 수정.
이것은 '선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깨달아 힘든 상황 앞에서 곧게 설 수 있는 능력, 말하자면 선을 위해 고통 받으려는 의지'로 정의될 수 있다.13) 각주13)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1.

더 나아가 '용기는 분별력이 인지 되여 정의가 구축한 선을 보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14) 각주14)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1.

절제의 덕은 '탁월함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감정의 관리와 통제와 관련된 성향의 윤리적 덕성'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15) 각주15)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4에서 약간 수정

이것은 자기통제와 열정을 승화시켜 그것들이 행위자의 이익을 바라는 자기중심적 성향인 인지력과 판단력을 왜곡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절제는 이성이 지배하는 자기 절체와 연관되고, 순결이나 겸손 같이 비슷한 덕을 지지하며, 자만이나 분노 같은 무절제한 행동을 중화한다. 절제의 실천은 균형 잡히고 통합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평온한 상태와 통합된 성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5.불교와 덕

이제부터 방금 설명한 네 가지 기본덕목을 불교적 관점에서 고찰해보려 한다. 이 시점에서 덕의 윤리는 불교의 도덕적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점차적으로 합의점을 도출한다면 불교의 가르침이 붓다, 아라한, 보살 등에 서 나타나듯이 일생을 통해 반야나 연민 등의 덕을 실천하여야 인간 완성이 얻어진다는 주장은 상대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아닌 듯하다. 또한 불교가 오늘날의 생태학 문제를 욕심, 이기심, 무지, 무감정 등 심리학적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는 경향도 사실이라 생각한다. 나의 제자인 프라가티 샤니(Pragati Sahni)의 최근 논문에서 인용하면,

십중팔구 초기 불교인들은 환경적 재앙이 심리학적 재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뒤떨어진 기술이나 나쁜 자연 보호 방법이 재앙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나쁜 행동이나 태도(욕심, 미움, 망상)를 탓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문제가 그릇된 관점, 즉 마음의 장애에서 발생한다는 사실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16) 각주16) Sahni P. Environmental Ethics in Early Buddhism: A Virtues Approach. PhD: University of London, 2004, p.13.

이러한 심리상태의 역기능은 곧 덕의 윤리가 지양하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자연의 장기적 안녕의 문제는 기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반야, 연민, 자기훈련, 깨어있는 마음과 같은 인간 가치에 의존한다고 보는 공통의 출발점은 가진 것 같다.

이제 위에서 말한 네 가지 기초덕목의 문제로 돌아가서, 분별력 혹은 실천적 지혜는 반야의 동의어인 듯하다. 반야는 진실을 이해하는 지적능력이며 삼매(sam dhi 혹은 bh van )와 결합하여 양성되고 심화된다. 일반적인 불교학에서 실천적 이성보다 공론적 이성을 강조한다는 것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반야는 일반적으로 괴로움, 무아, 연기와 같은 불교의 가르침이 가지는 불멸의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본다.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특정적인 것을 고려하여 실용적인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이성의 연관성을 설명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반야와 지식의 경계가 얼마나 정확하고 체계적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하겠지만, 아마 실용적 지성은 지식이 명시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에는 실용적 선택을 내리는 심리 과정에 대해서 최초의 관심(vitarka), 지속적 고찰(vicara), 이해(adhimok a), 그리고 선업(ku ala karma)의 선택(cetan )과 같은 보조적 심리기능에 관한 약간의 정보가 있다. 이 과정의 본질이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반야의 어떤 단계 혹은 지식이 환경적 문제를 연구하고 분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은 반야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내려져야 한다. 단지 한정된 전문가 집단뿐만 아니라 이상적으로는 폭넓은 시민 집단이 그들의 경험을 살려 증거들을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은 분별적 정책의 필수불가결한 예비조건이다. 결과로 예측된 미래의 문제들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것은 눈앞의 생태학 재앙과 비상사태에 대해 시급한 결정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지성의 숙제이다.

두 번째로 전통적 덕인 정의는 불교에서 유사한 개념이 없다. 불교사상에는 정의라는 개념이 실질적으로 인식된 바 없다.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법'을 제외하고는 정의를 표현하는 특정한 단어는 찾기 힘들다. 《담마파다》의 19장에서는 주로 '판단', '정의', '청렴' 등으로 번역한다. 팔리어 dhamma a는 즉 '법에 주(住)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256절에는 '성급하게 갑자기 결정(sahas )을 내리지 않는 사람', '옳고 그름(attha anattha ca)을 모두 생각하는 현명한 사람(pa ita)'이라고 적고 있다. 그 다음 구절은 '법에 주(住)하는 사람, 즉 정의로운 사람은 차분하게 결정을 내리고(asahasena), 법과 일치하고(dhammena), 공평한(samena) 결정을 내린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간략하게 언급된 자료 외에는 플라톤으로부터 롤스까지 몇 세기를 내려오며 많은 양의 문헌을 양산해낸 서구전통과는 놀랄 만큼 대조적으로 불교의 중요한 사상가들은 정의의 의미에 대해서 아주 조금 탐구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참고자료와 객관적인 잣대로 집단의 이익을 판단하는 개념이 부재로 인하여 충돌하는 이익 사이에서 불교생태학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즉각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문제가 발생한다. 정의의 덕은 자원의 분배가 공정해야하며 부자가 가난한 이를 착취하는 것처럼 한 집단의 희생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막는 것과 같은 공정성을 요구한다. 사회경제학과 환경체계의 상호관계는 복합적이라고 했으며, 정의는 모든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존중되는 것을 보호해야 하고, 또한 환경정책이 에릭 캣츠(Eric Katz)가 말한 대로 "이기심에 따른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철학적이고 윤리적 이성이라는 안전한 토대 위에" 세워지도록 보호해야 한다.17) 각주17)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4.

희귀종의 서식지를 파괴할 것이냐 혹은 지역사회를 위해서 골짜기를 침수시켜 수력발전소를 세울 것이냐의 문제는 신중한 판단과 공정한 해결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선택을 제시한다. 불교학에서는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 어떤 배경을 택할까? 연민(karu )같은 전통적 덕은 당연히 양쪽 모두에게 연민을 가져야하기 때문에 어떤 방향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 공식에서 욕심과 미움을 버린다 해도 여전히 어려운 선택은 남아있다.

정의는 분별력을 넘어서는 특정한 역할이 있다. 말하자면 정의는 일반원칙, 규칙, 실천코드, 법, 협약 등을 세워서 개인의 응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역할이 있다.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고 환경보존이 국제적 협동을 요구하는 오늘날에는 정의는 필수적이다. 세상 모두가 현명하다면 자발적으로 공정한 해결책이 나겠지만, 이익이 충돌하고 구속과 굴복하는 세상에서 정의는 중요한 임무를 지닌다. 따라서 불교생태학이 명확하고 정확한 정의의 개념도 없이 어떤 기능을 할 것인지는 불문명하다.

정의와 상반되게 불교는 절제의 덕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들이 많다. 특히 불교 문헌에 자기통제나 자기절제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다. 예를 들어《담마파다》는 감각 통제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하지만 절제의 덕이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 것은 아마도 계율의 복합적 계념일 것이다. 계율은 유혹을 뿌리치고 도덕적 순수함을 보존하게 해주는 내재화된 훈련능력이다. 실제로는 이 두 가지가 종종 목표와 결과에서 일치하기도 하지만 계는 정진(v rya)라는 외적 책임과 비교될 수 있다. 붓다고사(Buddhaghosa)는 계의 특성(lakkhana)을 '몸의 행동의 조화(sam dh na)와 모든 선한 상태의 근간'이라고 말한다.18) 각주18) Visuddhimagga I.2

계는 종교적 의식과 심리 발달의 근간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마치 지구가 식물들과 씨앗들이 자라도록 하는 것과 도시가 세워질 수 있도록 토지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또한 다른 덕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마치 갑옷, 우산, 동굴과 같아 보인다. 19) 각주19) 참고자료. Keown D. The Nature of Buddhist Ethics. Basingstoke: Palgrave, 2001, pp.48-54.

생태학의 측면에서 볼 때 수양된 자기 통제와 절제를 잘하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에 비해 지구의 자원을 덜 낭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계로 절제된 사람은 방종할 가능성이 적고, 더 많이 축적하고 소유하려는 소비주의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있다. 계를 실천하는 국가는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소비 양상에 차이를 보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통제와 자기수양과 관련된 계는 네 번째 덕과도 공통점을 가진 듯하다. 강인성은 역경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는 것을 말하는데, 계는 확실히 그런 능력을 훈련시킨다. 보살의 육바라밀행 중에 네 번째로 유명한 정진(v rya)이라는 좀 더 특정한 덕이 있다. 정진은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용맹스럽고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피하지 않는 불굴의 덕이다.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책임감을 가지는 일에 결의와 목적의 굳은 의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로 강인성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용어를 쓰든 생태학자들이 세계적 규모로 착수하는 종류의 프로젝트는 모든 단계에서 방해물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보다 많은 강인성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지구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방출 감소 프로젝트와 같은 작업은 수년간의 계획과 협상 그리고 교육을 필요로 하며, 그 이후에도 합의점을 이끌어내고 목표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간단히 말해 불교적 덕이 서구의 기초덕목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그 체계적인 개요를 다소 미흡하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네 가지 중 세 가지 덕은 불교와 동의어를 찾은 것 같다. 정확히 떨어지지는 않지만 각각의 문화와 사회가 내리는 평가에 따라 특정한 덕의 중요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예상한 결과이다. 불교생태학 역시 서구와는 다른 면을 강조할 수 있고 주된 덕목도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기본덕목과 서구의 것이 정확히 일치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공통적인 부분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불교학은 넓은 범주에서 다른 덕들이 많다. 6가지 보살의 실천 가운데 보시(d na)와 인욕(k nti)은 언급되지 않은 덕이다. 불교 문헌에는 보시와 관련하여 아주 뛰어난 예가 많은데, 그 중에는 배산타라(Vessantara) 태자 이야기가 모범이 되며, 암컷 범들에게 스스로를 먹이로 희생한 보살들도 보인다. 개인이나 국가에 돈, 시간, 자원을 기부하는 것은 최근 쓰나미(tsunami)의 경우와 같이 재해 구조작업의 자원이 되며, 많은 생태학적인 작업을 수행하는데 뿌리가 된다. 다른 중요한 덕은 동정(amukamp ), 연민(mett ), 부끄러움(hiri), 침묵(anabhijjh ), 깨어있는 마음(sati) 그리고 선묘방편(up ya-kau alya) 혹은 가르침을 주는 능력 등이다.

6.덕의 윤리와 생태학

비록 덕의 윤리가 많은 응용 윤리 분야에 기여했지만 생태학과 관련해서는 많이 진보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덕은 고대 윤리 체계이고 근본적으로 현대의 문제에 대응하기 부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덕에 근간을 둔 생태학이 어떻게 진보할 것인가? 토머스 힐 주니어(Thomas E. Hill Jr)는 덕에 뿌리를 둔 환경윤리를 제안한 첫 번째 필자이다. 그는 자연생태가 보존되기 위해서 필요한 인간의 이상들을 말하였으며, 환경과 특별히 관련된 덕을 밝혔다. 특히 그는 겸손, 감사, 자아사랑을 자연을 돌보고 감사하게 하는 덕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생물적인 자연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주제는 반드시 덕의 부재가 아니라 특정한 특징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어떤 특징의 계기가 덕의 발전에 근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연 파괴를 일삼는 자들은 자연 질서 속의 그들의 위치를 올바르게 인식 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무지하거나 매우 겸손하지 못하다. 반드시 그렇게 볼 수 없지만 경험적으로 보아 그들의 태도는 무지함, 좁은 시야, 스스로의 입장에서 한정된 집단과 분리해 중요성을 보지 못하는 능력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그들 스스로는 자연적 존재라고 인정하길 거부하기 때문이다.20) 각주20) Sahni P. Environmental Ethics in Early Buddhism: A Virtues Approach. PhD: University of London, 2004, p.186에서 인용.

힐은 겸손의 덕을 강조하다. 겸손은 부절적한 행동을 절제하거나 적당한 예절을 고취하는 hiri(자기에 대한 부끄러움)과 ottappa(타인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는 용어에 망라되는 겸손과 수치심 같은 불교에서 함양하도록 권고하는 특징들과 흥미로운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견(aha kara)와 교만(m na)은 종종 비판하였다. 《기세인본경(Agganna Sutta)》에 의하면 외형과 관련한 자만과 증산만심(增上慢心, m n tim na)의 개념 때문에 물질이 생겼으며, 우주의 파괴를 야기하는 천상의 생존자들에 의해서 소비가 이루어 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제프리 프라즈(Geoffrey Frasz)는 겸손의 개념을 맥락에 맞게 수치화하거나 적합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힐의 주장을 상세히 기술하려 했다. 그는 이 덕을 개방성(openness)이라고 새롭게 이름 짓고, 그것을 거만(너무 겸허하지 않은 것)과 가식적 겸손(너무 겸허한 것)사이의 중간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개방성이란 인간이 다른 생물의 하나인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을 세우는 환경의 덕이다. 이런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은 자연에 배타적인 사람이거나 자연의 광대함과 장엄함 앞에 개인성을 모두 잃은 사람이 아니다. … 우리는 타인을 향한 개방성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 … 그것은 사랑의 느낌과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양성하기 때문이다. … 이런 특성이 자연을 향해 유사한 개방성을 양성할 것이다. 21) 각주21) Sahni P. Environmental Ethics in Early Buddhism: A Virtues Approach. PhD: University of London, 2004, p.192에서 인용.

개방성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불교의 덕은 없을지라도 《브라흐마-비하라(Brahma-viharas)》에 나타난 사랑(metta), 연민(karuna), 기쁨(mudita), 평온(upekkha)과 같은 행동과 유사하다. 내면을 바꾸는 효과에 더해서 이런 태도들은 타인을 챙기고, 연민을 느끼고, 사랑하는 개방적이며 이타적인 특성이 있다. 스스로를 포함해 모든 존재에 대해 긍정적인 성향을 요구하고, 거만함을 지양하면서도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한다.

또한 불교 문헌이 반복해 강조하는 단순한 생활과 충만함을 통해 자연의 안녕도 조장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욕(ar ga)과 만족(santu i)도 생태학적 문제를 지탱하는 기초적인 덕이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물질만 지니면서 끈, 그릇, 일용할 양식, 간단한 숙소와 약으로 제한된 소유물을 가지는 것은 천연자원을 최소한으로 소비하는 실천이다. 반대로 높은 침대나 화환, 장식품과 같은 사치 물품들을 지니는 것은 그와 반대이다.

생태학의 맥락에서 고려해야하는 부차적으로 중요한 덕은 비폭력과 평화적 수단이라는 의미의 아힘사(ashi s )이다.22) 각주22) 슈미트하우젠이 지적했듯이 아힘사와 사랑 같은 많은 덕은 생물이나 생태계보다 인간에게 향한 것이고, 시초가 생태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런 덕이 지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생태학적 측면에서 다뤄지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 덕은 동물에 대한 특별한 취급 방법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의 함축적 의미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동물을 죽이는 것은 금지하지만, 보존 목적에 필요하다면 특정한 종은 가려내는 것은 허용한다. 인구증가를 조절하지 못하면 불교생태학의 시각에선 균형 잡힌 자연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원이 제한됐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또한 인간의 건강에 해를 미치는 동물은 도살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도 있다.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발한 이후에 오백 만에 가까운 동물들이 1997년 3월과 10월 사이에 도살되었다. 이 정책은 아힘사의 원칙과 충돌하는가? 그렇다면 이 문제 혹은 인간에게 전이될 수 있는 병에 대한 불교적 해결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어 불교 생태학은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모기의 박멸을 허용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동물과 인간의 상호관계에 관한 윤리 법칙에 진지하게 평가해야 하며, 인간중심주의라는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7.인본주의 대 생명중심주의

덕의 윤리가 지금까지 생태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가능한 다른 이유는 해결이 아닌 문제 자체로 간주되는 학문분야에서의 덕의 윤리가 기여하는 것이 너무 인간중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주체에 중점을 둔 윤리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인간과 경쟁하는 고유의 가치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생명 중심적 접근방식을 채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3) 각주23) 화이트힐에 따르면 불교 덕의 윤리는 생명 중심적 생태학이라는 점에서 서구의 것보다 유리한 입지에 있다.

불교의 사상에 도덕적 커뮤니티는 인류보다 넓게 포함한다. 나는 어떤 학자가 말하듯 그 범위가 그렇게 넓지는 않다고 밑에 언급했다.이것의 가장 좋은 예는 제임스 러브락(James Lovelock)의 가이아(Gaia) 이론이다.24) 각주24) Lovelock J. Gaia: A New Look at Life on Earth. Second ed. Oxford: OUP, 1987.

그는 지구의 모든 종이 생태적 평형을 만들려고 일제히 행동하는 유기적 총제로 세계를 본다. 가이아 가설의 새롭고 다양한 해석은 가이아를 다시 신성시된 자연을 주재하는 지구여신과 같은 성격을 부여하려 한다. 이렇게 자연이 윤리적 행위자로 간주된다면 덕의 윤리는 자연의 행동에 적용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개념은 추론적 해석이라는 문제가 있다. 전통적 덕의 윤리학자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윤리행위자는 유일하게 인간이다. 하지만 침팬지나 돌고래 같은 특정한 동물이 고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현대의 발견을 생각한다면, 인간 이외의 생물이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험적(a priori)으로 도외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기억이나 예측 혹은 이성적 판단 같은 필요한 심리적 능력을 가진 종이 있다면, 그런 능력의 단계까지 덕을 실천 능력을 가졌다고 가정하는 것이 이성적일 것이다.

유일하게 인간 어쩌면 몇몇 동물들만이 윤리 행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로 덕의 윤리를 인간중심적이라고 비난 할 수 있을까? 어떤 생태학자들은 당연히 이런 인간중심적인 면을 결점라고 생각하지만, 덕의 윤리를 주창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인류가 먼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구의 문제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환경문제는 우리의 인간본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급하게 나서서 나무를 껴안고 코알라를 귀여워하기 전에 인류자체가 직면한 가치와 생활습관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인간이 기후변화나 수질오염, 삼림 벌채, 사막화나 일반적인 자원의 부당한 사용 등에 야기되는 많은 생태문제의 해결도 실용적이라고 거의 증명된 바 없는, 낭만적인 자연 철학에 기대기보다는 인간태도를 개선하는 것이 관건인 듯하다. 실제로 인간 이외의 생물을 도덕적 커뮤니티의 능동적 참여자로 그리는 것도 일종의 인본주의의 배후이다.25) 각주25)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4에서 암시.

생물권에 대한 이론에서 시작해서 생태학은 윤리학의 근간으로 만다는 것은 더욱이 주객전도의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건전한 생태학 실천이 세워질 수 있는 윤리적 토대이다. 덕의 윤리는 생태드라마의 중심에 인간을 놓지만, 오로지 인간의 이익만 생각해야 한다는 걸 주장하지는 않는다. 덕의 윤리는 확연히 인간 이외의 것들을 인식하면서 자연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진 것이다.

덕의 윤리의 고대 개념은 '공익(common good)'이다. 이것은 개인의 안녕과 번영을 공동체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며, 개인 간에도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상호 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모든 생명의 번영해야 인간도 번영할 수 있다는 주장과 일치한다 할 수 있다.26) 각주26)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4.

단순히 인간이 생물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의 관리인이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관점과는 조금 다르다. 이런 체계에서 모든 생물은 각각의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단지 인간이 특수성은 때때로 총제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이다. 스테판 클라크(Stephen Clark)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통에 따르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각각의 생물에 고유의 자리를 허락하고 총체적 미를 감상 한다. 그것은 인간이 때때로 총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알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다른 형태 생물보다 우월하다. 지금까지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우월함'은 (현대 인본주의가 주장하듯) 다른 생물보다 더 많은 권리를 스스로 부여해서가 아니라, 생물들이 그들의 몫을 지켜줄 수 있는 (그리고 상응하는 의무가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27) 각주27)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66에서 인용.

인간과 타생물의 구분은 위계적 우월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생물의 차이점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은 도덕적 커뮤니티에 포함될 수 있지만, 인간과 같은 도덕 행위자로서는 아니다. 실리아 딘-드러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인간의 도덕적 커뮤니티에 동물을 포함하는 것은 동물이 어떤 면에서는 인간 윤리의 조상처럼 행동하긴 하지만 동물의 특정 행위를 인간처럼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어떤 의무와 공동의 삶을 나누기 위해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존재도 환영받는 인간의 선택이라고 제안한다.28) 각주28) Celia E.Deane-Drummond,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73.

이러한 관점은 동물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로 보지도 않는다. 동물은 모든 생물이 공유하는 생명계의 부분이고, 따라서 동물의 이익은 공익적 고려에서 제외될 수 없다. 이러한 이익은 단순히 인간의 이익 혹은 단일한 생물을 위한 이익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이익이 공익을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 인정된다는 좀 더 총체적 안녕을 위한 이익이다. 인간이 이런 이익을 다른 종들보다 좀 더 명확하게 인지하기 때문에, 인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고려해서 동물의 안녕을 보살필 의무 혹은 최소한 책임은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을 실천하는 차원은 어떤 의미인가? 인간이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고 가죽 신발과 가죽 재킷을 입지 말아야 하는가? 중도적 덕의 윤리학은 보편적으로 봤을 때 과장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복합적인 것이며 특정 상황에서 추상적으로 제정하기는 힘들다. 고기를 소비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식용이라는 이유에 의해서 필요하며,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하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고기 소비를 포기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선진국에서는 식용으로 길러지는 가축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이 가축들은 진정 애완동물도 아니기에 선량한 도시인이 잘 보살필 수도 없다.29) 각주29) 채식주의자의 윤리적 의무라는 주장을 비판하는 논쟁은 Celia E.Deane-Drummond의 The Ethics of Nature. Oxford: Blackwell, 2004, p.75에 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인공적으로 잘 길러지고 고통 없이 도축되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나은 상황인가에 대한 질문도 있다.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좀 더 분별 있는 선택은 절제의 덕을 실천하고 고기의 소비를 줄이도록 권장하는 것과 같다. 연민의 덕과 연관해서 기업적 농장에서 이루어지는 잔인한 관례를 금지하는 등의 가축이 길러지는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캠페인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생물이 자원을 위해 경쟁한다는 점과 공공의 이익을 생각했을 때 한 종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종과 분쟁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토끼의 개체수가 너무 많아지면 초목은 파괴되고 다른 종에 병을 옮기는 병균이 된다. 개개의 생명 손실이 정말로 안타깝지만 종의 범위에서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는 추려서 죽이는 것이 분별 있는 행동인 듯하다. 인간을 위협하는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나 다른 해충을 박멸하려는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생물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공익의 요소로 그들의 이익을 인정한다면, 이 행성에서 공유하는 인간과 타생물의 차이점도 인정한다.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고, 다른 동물들이 가질 수 없는 추상적 논리적 사고가 가능하다. 이러한 추상적 능력은 피해와 이익을 나누어 볼 수 있는 큰 능력이기에 오만과 우월감에서 벗어나 책임감을 느끼고 겸손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선물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점과 동물을 소위 말해 동조자로 보아 종의 차별을 비판할 수도 있다.

여전히 인간은 차별성으로 인하여 다른 종들과 비교되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티벳 문헌에 자주 발견되는 '소중한 인간 부활'이라는 문장과 인간 부활의 어려움을 표현한 옛 그림에서 이러한 사실을 빗대어 예기할 수 있다.30) 각주30) E.g. S.v.475; S.ii.263; A.i.35; M.iii.169. Harvey P. An Introduction to Buddhist Ethics: Foundations, Values and Issu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29f를 참고.

당연히 많은 불교인들은 이 시점에서 인본주의적인 이 논쟁에 동의하지 않고, 동물이나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인간과 동일한 도덕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찬얀(Chan-jan)이 마음속으로 그렸던 것처럼 잎사귀와 나무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주장은31) 덕의 윤리학적 관점에서 쉽게 동의 할 수 없다. 각주31) Lafleur W. 'Enlightenment for Plants and Trees' in Kaza S, Kraft K. Dharma Rain: sources of Buddhist environmentalism. 1st ed. Boston, Mass.: Shambhala Publications, 2000, pp.109-116를 참고하라.

8.결론

덕의 윤리학적 접근방식이 불교생태학의 윤리에 근간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요약하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첫 번째 이유는 덕의 윤리가 불교학의 실천과 전통 그 자체에 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담마파다》에 따르면 인간완성의 불교적 이상은 모든 존재를 친절과 연민으로 대하고, 솔직하고 청렴하게 생활하며, 감각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진리를 말하고 올바르게 진실한 삶을 살고, 부모와 가족 그리고 생존을 속인에게 의지하는 은둔자와 브라만에게 봉사하는 등의 임무를 충실히 행하는 자가 행하는 덕으로 정의한다. 비구 보드히(Bodhi)는 그의 글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내와 용서로 분쟁을 피할 수 있다. 미움이 더 큰 미움으로 응하는 것은 복수와 보복의 순환만 지속시킬 뿐이다. 미움의 진정한 승리는 관용과 사랑으로 미움을 버리는 것이다(4-6). 비난하는 말을 받아치지 말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 (134) 화에 굴복하지 말고 수레를 모는 마부처럼 조종해야 한다. (222) 다른 이의 과실을 집어내는 대신 자신의 허점을 성찰하도록 훈계해야 하며, 은 세공 자가 은을 정화시키듯 내면의 불순물을 정화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50,239) 만약 과거에 죄를 지었다 해도 낙담 혹은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길은 급격하게 변할 수 있으며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한 자는 구름이 가신 후의 달처럼 세계를 환히 밝히기 때문이다. (173) 인간적인 덕을 구별하는 진정한 자질은 관용, 진심, 인내와 연민이다. (223) 내면에 이런 자질을 발전시키고 연마함으로서 스스로의 양심과 조화를 이루며 다른 존재와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붓다는 덕의 향기는 세상의 모든 꽃과 향료보다 달콤하다고 말했다. (55-56) 선한 인간은 히말라야산처럼 멀리서부터 빛나고 어디에 가든 사랑받고 존경받는다. (303-304)32) 각주32) Introduction to Acharya Buddharakkhita's translation of the Dhammapada.
http://www.accesstoinsight.org/canon/sutta/khuddaka/dhp1/index.html. Accessed 27 January 200

이러한 가르침과 일치하는 불교생태학은 새로운 일련의 환경문제를 전통적 덕의 측면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만약 윤리적 경향의 사람이 자연을 대하는 구체적 태도를 예증하자면 붓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그에게 있어 동물과 자연을 해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며, 그런 행동은 전혀 붓다답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생태적 덕의 윤리로 인간에게 모색되는 것이다. 불타가 자연을 해치는 행동은 그려진 적 없으며 오히려 주거( v sas)나 희열( r mas)과 같은 소박한 자연 환경에서 지내는 것을 즐긴 듯 보인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어도 생태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지는 못한 것 같다. 말하자면 미래를 보여주는 유리구슬이 없는 것과 같이, 덕이 모든 상황에서의 최선의 방법이 됨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덕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어떻게 현재의 문제를 이해하고 도출해 낼 수 있는 가능한 행동을 실천하거나 거부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덕 문제의 본질을 명확히 이해하여 타인의 관점을 경청하고, 대안의 찬반양론을 깊고 통찰력 있게 명상하고 고찰하여 결론을 도출해내 결정된 사실을 성실하게 수행하도록 한다. 프라즈(Frasz)는 '환경적 덕의 윤리는 행위자의 사고와 실천에 새로운 습관을 조장한다. 즉각적으로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행동을 전체적이고 생태학적인 사고를 토대로 새로운 방침을 마련하는 것이다.'33) 각주33) Sahni P. Environmental Ethics in Early Buddhism: A Virtues Approach. PhD: University of London, 2004, p.214에서 인용.

《기세인본경》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세계는 거주자의 성품의 거울이라고 했다. 따라서 윤리적인 사람이 환경에도 좋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약 불교의 가르침대로 덕을 실천했다면 지금과 같은 생태적 재앙을 맞지 않았을 것이고, 적어도 포괄적이며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을 다루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대미안 키온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대학 불교윤리학 교수

배상환
동국대 불교학과 학사 졸, 인도 바라나스 힌두 대학교 석사 박사 수료 및 박사 학위. 현재 동국대 BK21 연구교수. 주요 논문으로 <아비달마 교학에서 본 무위법의 소고><我見과 無我見의 相反關係> <대승경전에 담긴 생태학적 가르침> <생태계 위기극복을 위한 사제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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