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오 겐지 지음, 《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 김호성 옮김 동국대출판부

저자 마쓰오 겐지 교수는 일본 불교사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기존의 불교사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가마쿠라 불교에 대해 '관승', '둔세승'이라는 새로운 해석 구도를 도입하였다. 이 부분은 옮긴이의 해설이 자세하므로 부연은 피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구도를 통해 저자는 새로운 일본 불교사 해석방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이 책은 불교를 모르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집필한 일본 불교사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원서 자체가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어서 일본 불교사를 상세히 다룰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각 시대의 중요 인물들로 서술대상을 한정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교단과 인물을 중심으로 일본 불교사 전체의 윤곽을 잘 전달해주고 있다. 또한 일본 불교사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입문 역할도 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

옮긴이의 해설과 중복되는 것도 있겠지만, 이 책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현재 일본 불교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그 해답을 찾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우리들의 흥미를 자극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일본 불교가 한국 불교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다르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색다른 형태의 불교가 되어버린 일본 불교의 현실을 그대로 소개해준다. 즉, 첫째, 승려가 결혼함으로써 빚어지는 계율 경시이다. 일본의 경우는 사찰을 아들이 계승하며, 주지의 부인은 바쁜 사찰의 일을 함께 관장한다. 우리나라에도 결혼을 용인하는 종파가 있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둘째, 승려들은 석가모니의 교설 내용보다,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의 계통을 잇는 자신이 속한 종파 조사의 교법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서는 종조의 설에는 오류가 없다고까지 한다.

우리 불교의 각 종파에서 종조의 설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평가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셋째, 승려들이 장례불교에 종사하는 것을 들고 있다. 현대 종교는 장례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다. 일본 불교의 경우, 절 안에 묘소가 있고, 절은 그 묘소를 관리하는 곳이며, 장례 절차를 주관하는 기관이다. 현대의 사찰은 절의 토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등록된 신도(檀家) 수가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꺼려한다. 줄어들면 당연히 수입이 줄고, 늘어나면 그만큼 토지도 필요하고 관리 책임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장례불교는 우리에겐 없다.

둘째, 일본불교사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쇼토쿠 태자에 대한 서술을 보면 알 수 있다. 쇼토쿠 태자의 저술로 전해진 이른바《삼경의소(三經義疏)》는 일본인의 자랑거리였으나, 저자는 그것이 쇼토쿠 태자의 저작이 아님을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수용하고 있다. 연구자의 자세로서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저자는 자신의 소중한 일본 불교라 해도 문헌을 통해 언급할 수 있는 것만 말한다는 주의이다.

셋째, 제한된 지면 속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와 사상적 테마를 다루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그 속에서 의문을 던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36쪽의 '일본 최초의 출가자는 여성이었다'라는 절의 서술에서 "예컨대 야마타이국의 히미코와 같이 종교적인 일에 종사하는 데는 여성들이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여 저자의 판단이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생각해 볼 문제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일본불교를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흥미를 북돋아줄 수 있다.

관승 둔세승이라는 새로운 해석 구도는 유효한가

앞에서 이 책은 저자의 독자적 일본 불교사 해석방법을 반영했다고 하였고, 이에 대해서는 역자가 후기에 자세히 적었다고 소개했다. 여기서 저자의 해석구도의 특징을 한 가지만 짚어본다면, 저자 자신이 다른 연구논문에서 밝히듯이 종래의 통설에서는 구불교의 개혁파로 분리되었던 에이존, 묘에를 가마쿠라 신불교 교단에 포함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분류에 대해 옮긴이는 관승과 둔세승의 구분이 유효하긴 해도 적어도 니치렌의 일연종에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 이유는 니치렌은 권력과의 연계를 꿈꾸었기 때문에 둔세승에 포함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이라 마사유키(平 雅行)교수의 서평과 서평에 대한 마쓰오 교수의 반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이라 교수 비판의 요점은 우선, 첫째, 관승을 배출하는 득도수계제도가 가마쿠라시대에는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둘째, 협의의 둔세승에 있어 입문의례를 통한 구성원의 정비된 재생산 시스템은 확인이 어렵다. 셋째, 현밀체제론에서 말하는 이단적 사상가와 그들의 후계자를 구별해야 하는데- 후계자 집단은 묘에, 에이존 등과 같이 개혁운동의 한 형태로 본다-, 마쓰오 교수의 논의에서는 이단파가 없다. 넷째, 관승집단도 개인구제 활동에 큰 지장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해 마쓰오 교수는 첫째의 비판에 대해서 득도수계제도는 변화가 있을지언정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즉 관승의 배출 제도는 엄연히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비판에 대해서는 금후 사례 보강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였지만, 가설자체는 유효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셋째의 비판에 다이라 교수의 다른 연구 논문을 통해 구불교는 정치와의 융합을 주로 하고, 신불교 사상은 배타성 편집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체제에 대한 혁명성(이단)을 의미하고, 그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는 주장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종교적 구제와 정치적 해방은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반박한다. 즉 정치권과 공생한다고 해서 그것이 종교적 차원에서 혁신성이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저자가 관승과 둔세승의 이분법을 사용하는 것은 사상의 혁신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기존에 구불교에 포함된 사상가들도 신불교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넷째 비판에 대해서 저자는 관승 집단이 의도적으로 거리에서 설법하면서 집단 조직을 형성한 경우는 없다고 하여 반박하고 있다.

일본 불교사에 대해서 무지한 필자이기는 하지만, 다이라 교수의 신랄한 태도를 통하여 마쓰오 교수의 새로운 시도가 일본 불교사학계에 수용되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일본 불교사 연구자에게 마쓰오 교수의 불교사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대답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관승 둔세승의 모델에 대해서 평가할 수 있는 점은 일본 불교 승려의 존재 형태를 두 가지로 분류함으로써, 둔세승이 가진 특수성을 명확히 드러내었다는 점이다. 다만, '둔세'에 대응하는 용어로서 '교중(交衆)-승려 일반의 집단'이 있는데, 양자를 반복하는 승려도 존재하였다. 또한 도다이지(東大寺)나 고후쿠지(興福寺)에는 양자가 병존하였다. 따라서 양자를 고정적 내지는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의 차원에서 잘못된 해석일 수도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둔세승=신불교'라는 이해방식은 묘에, 에이존 등을 포함한 둔세승 승단이 '개인'을 구제하는 '새로운'불교라고 평가하는 것인데, 둔세와 개인구제가 반드시 결합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즉 호넨 이전에도 이미 둔세승은 존재하였지만, 그들 모두가 '개인'구제를 지향한 것도 아니다. 둔세승(광의)과 둔세승 집단(협의)을 구별하고 있지만, 양자의 교의를 구별하는 설명이 없다.

나아가, 개인 구제라고 할 때 저자는 '개인'을 '민중'과는 다른 개념으로 파악하지만, '개인'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구불교에 대해서는 '공동체에 매몰된 사람들'을 구제의 대상으로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도시 공동체인 교토의 도시 민중이나 지배집단은 '개인'이 아닌가. 만약 개인이 아니라 한다면,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에이존은 장원이나 도시 사람들에 대해서 구제활동을 벌였다. 나아가, 신불교의 교단이 지배자나 영주 등에 눈을 돌린 것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교단이 지배집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그것은 개인 구제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명하지 않으면, 왜 신불교가 탄생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입문의례로서의 수계를 신불교 성립요건으로 보고 독자의 입문의례(득도 수계의식)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교단성립의 요건이지, '신불교'의 요건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신불교의 수계는 다른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불교가 돌연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남도불교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마쓰오 교수의 새로운 분류법 자체와 그리고 의미부여에 대해서는 일본 불교사학계에서 평가 도상에 있는 만큼 우리도 더 많은 연구 논문과 자료를 읽고, 분석하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본각사상에 대해서

본각사상은 협의의 의미로는 일본의 중세 천태본각사상을 가리킨다. 69쪽에는 본각문에 근거하여 중생은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에, 어떤 수행도 필요하지 않다는 현상 절대 긍정사상으로 정리되어 있고, 옮긴이의 해설에 의하면, 수행을 외면하게 하는 이론으로 작용하여 이러한 까닭에 현재 비판받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문제를 여기서 조금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근년에 주요 테마로 등장한 비판불교의 비판대상이 되었기도 하고, 저서와 옮긴이의 서술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이다.

우선, 일본의 본각사상은 용어는《대승기신론》에 의거하지만, 사상의 전개는《법화경》의 의거한다. 스에키 교수의 이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천태본각사상은《법화경》의 적문(迹門)과 본문(本門) 중에 본문사상과 결부된다. 본문이란 역사적 불타는 방편적 존재로서 진실의 불타는 영원의 옛날에 성불한 불타를 설하는 부분이다. 일본 천태에서는 본문은 구체적 현실(事)의 단계, 적문은 진리성(里)의 단계로 보고 전자를 후자보다 높이 평가한다. 여기에 관심(觀心)을 중시하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관심의 대상은 범부가 그대로 본래적 진실임을 관상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세계를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로 긍정하는 사상은 초목이 발심수행하여 성불한다는 일본 독자의 초목성불론으로도 전개된다.

이상은 스에키 교수의 설이다. 이로부터 본다면, 단순히 수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통하여 체득할 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카야마 교수가 본각사상에 대해서 '지성을 경시한 깨달음의 체험주의'라고 비판한 배경에는 이러한 본각사상의 일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협의의 의미로 일본 중세 천태사상을 가리킨다는 정의한 이유는, 마쓰모토 시로 교수, 하카야마 노리아키 교수의 여래장사상 비판 내지 본각사상 비판에서 본각사상 개념의 포함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광의의 의미로 본다는 취지에서 스에키 교수가 구분지은 것이다. 이와나미(岩波) 불교사전 제2판(2002년)을 찾아보면, 본각을 협의로는 일본 중세천태에서 전개된 본각문의 사상, 광의로는 '본각'을 핵심어로 한 사상을 지칭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비판받는 것은 단지 일본 천태사상뿐 아니라, 여래장 사상 전반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비판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이후 일본 불교학계에서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서 현재까지 깊이 있게 논의되는 문제이므로, 적절한 판단을 위해서 본각사상에 대한 연구저서 및 논문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서의 내용에 대해서

이 책은 짧은 지면에 많은 정보를 축약적으로 소개하고 있기에,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의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자잘한 문제로서는 가마쿠라 시대의 신란이 꿈에 쇼토쿠 태자로부터 받은 계시의 내용이 소개되지 않은 채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소개하지는 않으면서 그 내용을 전제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89쪽을 보면 신란이 결혼해도 좋다는 주장을 한 것이 꿈에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나, 정작 계시의 구체적 내용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 내용은 혹시 신란이 여성을 범하게 된다면, 그것은 쇼토쿠 태자 본인이 여성으로 되어 그렇게 한 것이며, 일생동안 신란의 삶을 장엄하고, 임종에 이르러서는 아미타불의 극락에 인도하겠다는 계시였다. 신란의 주장은 이러한 꿈의 계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둘째, 헤이안 시대까지를 관승, 가마쿠라 시대를 둔세승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다루지 못한 부분들도 있을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정도 예를 들자면, 나라시대 로벤(良辨)의 원력으로 성취된 도다이지이의 개안공양(752년)이라는 커다란 점안불사(點眼佛事)를 서술에서 제외하였다. 이 부분은 로벤 주위의 인물과 사찰과의 관계, 그리고 외국에서 도래한 승려를 통하여 당시의 일본불교의 포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며, 이후 일본불교가 확실히 중국불교 중심의 불교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꼭 다루어야 할 부분이다. 또 가마쿠라시대의 경우 둔세승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바람에 일본 화엄종의 최대 저술가인 교넨(凝然)이 제외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가마쿠라 불교가 신불교로만 이야기 될 수 없음을 독자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서술해야할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셋째, 교단사와 인물사가 중심이 되다보니, 꼭 짚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사상적 문제가 생략되곤 하였다. 예를 들어, 오와(應和)의 종론(963년)에 대해 명칭은 언급하지만, 그것이 어떤 문제로 발발된 논쟁이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 입문자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행히 간단하게나마 옮긴이의 해설이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 바라며, 더 자세한 내용은 이와나미 사전 등에서 볼 수 있다.

한 가지 주의해야 될 것은 우바새, 우바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우바새, 우바이에 대해서는 43쪽에서는 출가예비군이라고 되어있으며, 47쪽의 표에서는 '스님의 계층'이라는 절에서 표에 재가신자라고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 용어로 하면 '행자'일 것이다. 이 부분은 우바새, 우바이의 원뜻에 얽매이지 않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번역에 대해서

다음은 번역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가장 걸리는 번역이 신란이 쇼토쿠 태자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의 원어인 '夢告'를 그대로 우리말 음으로 읽어 '몽고'로 번역한 것이다. 그와 같은 의미의 몽고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는 없다. 이렇게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음독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정착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했어야 한다.

전문가들이 그냥 사용한 일본식 한자어가 사용되는 가장 비근한 예는 '진검승부'라는 말일 것이다. 일본식 한자어의 우리말 음이 버젓이 예전부터 있었던 표준말처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夢告에 대해서는 38쪽과 87쪽에 옮긴이의 주석이 있는데, 그것을 잘 응축시켜 적절한 우리말 용어로 풀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그 외에 마음에 걸리는 번역을 몇 개 지적하자면, 18쪽에 '이렇게 변한 일본인'이라는 것은 '일본인 이런 점이 이상하다' 정도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86쪽에 '아름다운 구절을 덧붙여' 는 '아름다운 가락을 붙여서' 정도가 좋을 것이다. '구절'의 원문은 '節'이다. 이것은 '후시'라고 읽고, 여기서는 '염불의 멜로디'를 의미한다. 171쪽에 라쿠고(落語)에서 사용하는 정해진 형식 중에 '∼라고 걸어서', '∼라고 설한다', '그 마음은' 이라고 번역한 부분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예를 들어 보충할 수 있겠다.

<예>(1) '찢어진 창호지문'이라고 제(수수께끼)를 내어 (2)'겨울의 휘파람새' 라고 제(수수께끼)를 푼다(3) 그 의미는 '하루(春,貼る)를 기다린다' 라는 형식이다. 이것을 3단 수수께끼라고도 한다. 즉 (1)은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다. (2)는 (1)의 해답이다. (3)은 답이 그러한 이유 또는 의미이다.

보충 설명하면, 찢어진 창호지문은 '바르는(貼る)'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겨울의 휘파람새'는 봄을 알리는 새이기 때문에 하루(春, 貼る는 둘 다 '하루'라고 읽는다)를 기다리는 의미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왜 (1)의 답이 (2)인가를 생각하는 수수께끼로써 말이나 문장에 있는 숨어있는 의미를 묻는다. 일본에서는 한자의 영향으로 나라시대부터 즐겼으며, 에도시대에 위와 같은 3단의 수수께끼로 정착한다. 거기에 선불교의 영향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 번째 '그 마음은'으로 번역된 부분은 '그 의미는' 정도로 번역해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心'자는 일본 불교문헌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그 때는 '意'와 동의어이다.

이상 자잘한 번역의 오류를 지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번역의 공로가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옮긴이의 노력 덕분으로 일본의 사상적 기반이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는 저자의 생각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옮긴이는 그 이상의 관심을 갖는 독자를 위하여 친절히 해설을 덧붙이고, 참고가 될 만한 1차 자료와 2차 자료를 정리해 주었으며, 원서에는 없었던 색인을 첨부해주어 일본불교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 일본어 사용 인구의 40%는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 일본에 관심이 많고, 일본의 사상과 불교사를 알고자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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