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송 광동중학교 교장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가(家)가 한국에서의 역할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사가 일전에 신문지상에 소개된 바 있다. 이 기사를 보는 순간 부러운 감정이 불쑥 솟아오름을 강렬하게 느꼈다.

요즘 말로 ‘문화코드’가 전혀 다른 기독교가 이 땅에서 100여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토착화에 성공하고 사회 중심 문화로 자리 잡은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일하다고 할 만 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교육사업을 통한 기독교 선교정책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연세대 등 수많은 기독교계 대학과 사립 중·고등학교의 절반을 넘는 기독교계 학교 교육은 이질적 문화와 보수적 정서를 뛰어 넘어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성공한 선교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이 땅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 떠난다는 언더우드가에 대한 신문기사는 그런 의미에서 큰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이제 기독교 교육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주동력으로 그것이 튼튼한 기반위에 올라섰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실제 한국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는 사교육과 사교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기독교 교육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를 불교계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해인사, 불국사 등 세계적 불교문화유산과 겨레의 혼에 스며있는 불교 친화적인 정서로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힘을 수급 받지 못한다면 한국불교는 박물관 불교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최근 급속한 물질문명과 현대문명에 식상한 많은 이들이 전통사찰 수련법이나 웰빙 물결을 타고 명상, 참선 다양한 수행법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나마 반가운 현상이라 하겠다.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현상들을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소모성 소프트웨어에 불과하며, 앞으로는 지속적인 하드웨어에 속하는 시스템과 비젼이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기독교 교육의 성공을 불교 교육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지금부터라도 불교계 내부에서 불교계 학교의 양적 성장을 위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지금 같이 전국 30여개에 불과한 불교계 학교 조직이라면 미래를 보았을 때 별다른 발전은커녕 퇴보만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계가 공교육의 틀을 통해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 각계각층에서 그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처럼, 불교계도 학교 교육을 통해 많은 불자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지금부터 정책을 세우고 차근차근 추진해 나간다면 10년 안에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으며, 2-30년 후에는 다양한 불자 인력을 수급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 설립령의 변화, 대안학교, 외국 학교의 국내 진출 등 많은 교육환경의 변화 속에서 그 틈새를 잘 활용한다면 지금의 두 배 내지 세 배되는 불교 교육기관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위를 살펴보면 신심 깊은 많은 불자들이 교육사업에 종사 하고 있으면서도 불교교육과 연결 고리를 맺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최상승 공덕이 불교교육에 있음을 주지시키고 흔쾌히 불자 교육에 앞장설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불자가 운영하는 학교들을 불교 교육의 기반으로 삼는 한편, 학교 신설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대부분의 기독교 학교의 경우, 설립자의 신앙적 의지에 의해 기독교 학교로 유지 발전되고 있다. 이에 반해 불자가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나타내고 그것을 학교 교육에 반영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앞으로 불교계는 다른 어떤 정책보다도 학교 교육을 통한 인재 저변 확대야말로 가장 현실적이며 확실한 포교 정책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미래의 꿈나무인 청소년 교육과 포교에 더욱 관심을 갖고, 학교 교육에서불교 교육을 적극적으로 할 때에 불교계의 앞날에 대한 비젼은 더욱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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