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정 수필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시사 잡지를 뒤적거리던 중학생인 아이는 다급한 듯이 나를 부른다. 그러더니 ‘남미에서 양서류가 사라진다’라는 타이틀이 붙은 페이지를 보여준다. 아마존 유역의 광활한 열대림이 파괴되면서 환경 변화에 민감한 양서류가 무더기로 사라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아이는 수리남 푸른 개구리, 기니아 개구리, 마다가스카르 오렌지 개구리 등 이름도 생소한 개구리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귀여운 개구리와 도롱뇽들이 지구에서 사라져간대요.”하면서 안타까워한다. 양서류가 사라지는 이유는 광산을 개발하고 토목공사, 경지 개량 등으로 인한 환경 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한다. 특히 동물의 사료로 쓰이는 콩과 소고기의 수요가 급증하기 때문에 농경지의 면적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소를 키우기 위한 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도 처녀림으로 남아있는 아마존의 열대림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은 아이는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며칠 전 학교에서 육식에 관한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다면서 그 내용을 들려준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항생제의 70%를 소를 비롯한 가축들이 먹는데요. 그리고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0%를 소들이 먹어 치운다고 하니 굉장하죠. 그래서 지구에서는 기아가 일어날 수밖에 없대요.”

우리 집에서는 감기에 걸려도 항생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약을 먹지 않고 생강차를 다려 먹곤 하는데, 그렇게 나쁜 약을 가축들에게 먹일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항생제를 먹은 동물의 고기를 사람이 먹는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사육되고 있는 닭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서로를 쪼지 못하게 부리를 잘린 닭들이 날개짓 한 번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그 장면은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아이는 닭고기를 좋아해서 가족끼리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나는 집에서 닭튀김이나 시켜 먹을게요. 다녀오세요.”할 정도이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닭들이 그렇게 비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몰랐다면서 안타까워한다. 아이는 “나도 엄마처럼 채식주의자가 될까?”하고 묻는다.

불교에서는 불살생계를 들어 육식을 금하고 있으며, 스님들 또한 철저히 그 계율을 지켜 나가고 있다. 환경운동가인 J신부님은 불교에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있다는 것을 매우 부러워한다. 그런데 가끔 지면(紙面)을 통해서 ‘부처님 당시에는 육식을 금하지 않았다’는 글을 읽을 때면, 또 남방 불교에서는 굳이 육식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면 괜히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러한 글귀는 부처님 당시에는 육식을 허용하였으니, 지금이라도 육식을 허용하자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의 짧은 견해로 보았을 때, 유정? 무정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불성을 담고 있는 그 생명을 인위적으로 잘라 버린다는 것은 어쩐지 불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부처님 당시 육식을 허용했든지 아니했든지 그러한 시비를 떠나서 《능가경》에는 육식에 관한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이 나온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저희들을 위해 고기를 먹는 허물과 먹지 않는 공덕을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이 대답한다.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는 한량없는 허물이 있느니라. 보살이 큰 자비를 닦으려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먹는 허물과 먹지 않는 공덕을 말하겠느니라. 중생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고기 먹는 습관으로 고기 맛에 탐착하여 번갈아 서로 살해하며 어질고 착한 이를 멀리하고 생사의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이는 바른 가르침을 듣고, 보살 지위에서 참답게 수행하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또한 중생들을 여래의 경지에 들게 할 것이니라. 만약 모든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중생을 살해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때문에 고기를 구하고 또 사게 되니 자연히 죽여서 파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먹는 사람이 있어 죽인 것이므로 고기를 사먹는 이는 죽이는 이와 다를 게 없느니라.

내가 보건대 세상에 있는 고기치고 생명 아닌 것은 없소. 손수 죽이지도 말 것이요,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됩니다. 만일 고기가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내가 왜 사람들이 먹는 것을 막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고기를 먹는 것을 죄라고 말하며 여래의 종자를 끊기 때문에 먹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떤 일화가 생각난다. 어느 도살장에서 겁에 질린 방문객이 도살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나요?” 그러자 그 도살자는 “선생을 대신해 우리가 더러운 일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쏘아 붙였다. 방문객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동물을 직접 죽이지 않고 고기를 먹는 사람은 누구나 도살자에게 그 일을 의뢰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나 잡는 사람 그리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나 고기 먹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이나 모두 공업(共業)을 짓고 있는 셈이다.

J신부님은 채식만이 지구를 살리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달걀과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까지도 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이 너무 엄격하고 지나치지 않나 싶다가도 우유와 버터도 소로부터 얻어지는 것임을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환경운동가들의 이런 주장과는 상관없이 육류소비는 계속 증가되고 있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학교에서 육식에 관한 비디오를 보여 줄 만큼 우리나라도 과다하게 고기를 섭취하고 있나 보다. 상가(商街)를 살펴보면 한집 건너 고기집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도 육식의 심각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육식의 종말》을 쓴 제레미 리프킨은 소를 가리켜 ‘말굽 달린 메뚜기 떼'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사막화라든가 지구의 온난화현상 등 오늘날 지구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한 환경에 관한 문제 중 하나가 ’소의 사육‘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전 세계 열대우림의 손실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 예를 들어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사육된 쇠고기로 만든 1/4파운드짜리 햄버거 한 개에는 대략 75킬로그램에 이르는 생명체의 파괴가 뒤따른다. 여기에는 20~ 30종의 식물, 100여종의 곤충, 수십 종의 조류, 포유류, 양서류가 포함된다.”는 글이 기억에 남는다. 무심코 먹는 햄버거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생명체가 희생되어야 함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자체가 환경을 파괴하는 일임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을 좀 더 간소하게 단순화 시켜 나가야 할 것 같다.

시사 잡지에서 ‘지구상의 양서류 가운데 3분의 1이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 인간도 잠재적으로 멸종될 수 있는 상태로 빠르게 옮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읽었다. 우리의 식욕을 채우기 위해,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행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인간이라는 종’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중의 아이러니이며 SF영화를 연상케 한다. ‘환경 보호’가 화두가 되어 버린 이 시대에 육식을 금한다는 수천 년 전의 부처님 말씀이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다. 고기치고 생명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자비의 종자를 끊기 때문에 육식을 금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이제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생태계는 보호되어야 하며, 생태계 보호를 위해서 육식을 금해야 한다고 말이다.

닭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아이의 결심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겠지만, 지구의 어느 한 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아는 지구 어느 한편에서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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