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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의 실천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23호] 2005년 06월 10일 (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한번은 몸답고 있는 오슬로 대학교의 한 행정 직원과 불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필자의 어투가 너무 설교적이라서 그랬는지 “당신은 불교로 개종(改宗)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질문을 받고 필자는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기독교의 개종 의례인 세례와 비견될 만한 수계식이 불교에 있는 것은 잘 알지만, 불교인을 외람되게 자처하면서도 아직 정식으로 계를 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변명도 아울러 하는 식으로, “불교에도 기독교적 세례에 근접하는 의례들이 있지만, 그러한 형식을 거치지 않고도 불교의 근본정신을 의식하면서 지킬 것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경우 넓은 의미의 불자로 간주될 것”이라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예상했듯이, 상대방은 “불교의 근본정신과 불자로서 지켜야 할 덕목이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였다. 그래서 기억나는 대로 근본오계부터 시작하여 《범망경》의 가장 이상적인 부분들을 나열해주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필자 자신에게 한 가지 답이 없는 물음이 남아 왔다. 불자로서 근본적으로 지킬 것을 지키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

얼핏 보면 부처님의 근본오계가 분명하게 주어진 덕분에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바는 다 밝혀져 있다.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팔거나 마시지 말라 등등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지계(持戒)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의 범위가 무엇인지, 지계 실천의 방법이 무엇인지, 질문은 한두 가지 아니다.

예컨대 근본 중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죽이지 말라’는 계율부터 조금 더 철저하게 생각해보자. 필자는 군인이나 경찰에 속하거나 도살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기에 중생에 대한 살해를 ‘직업상’ 입힐 일이야 없다. 하지만《범망경》에서 나온 부처님 계율의 내용을 보면 단순히 직접 살해만 금한 것이 아니고 ‘방편으로 죽이는 것’, ‘죽임을 찬탄하는 것’, ‘죽임을 보면서 기쁘게 따르는 것’, ‘죽임의 인(因)을 만드는 것’, ‘죽임에 대한 기쁜 뜻을 가지는 것’ 도 아울러 죄로 정해진 것이다.

그 논리는, 예수가 여성을 음탕하게 쳐다보는 자가 이미 그 마음속에서 음행(淫行)을 저질렀다고 말한 것과 상통할 것이다. 몸, 입, 생각(身·口·意)으로 짓는 업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현실적 과(果) 못지않게 심적인 인(因)에 주목하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살해에 대한 긍정적 생각과 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살해 그 자체와 동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죽임의 인을 만드는 일’까지 문제시 한다면,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수십 명의 군인들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략의 현장에 국비로 파견한 노르웨이 정부에 세금을 내는 필자의 입장은 곤란해진다. 물론 필자가 내는 세금 중에서 미군 침략의 지원에 들어가는 돈이야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수많은 평화주의자들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내는 세금이 국방부의 지출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평화의 세금’과 같은 제도를 아직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이다. 즉, 병역 거부를 통해 국가적 살인의 악업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군부 비용 부담 거절’이라는 것이 병역 거부에 비해 훨씬 덜 알려지고 전혀 제도화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맥도널드와 같은 곳에서 음식 먹거나 시티뱅크 등의 미국 은행을 사용할 때, 저 재벌들이 이라크 등을 침략하는 미국에 세금을 낼 뿐만 아니라 부시라는 대량 살인의 주범을 대통령으로 만든 공화당에 거액의 정치 자금을 내는 등 미 제국의 살인의 악업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을 우리가 과연 자주 생각하는가?

필자는 가장 악명이 높은 미국 재벌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사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지만, 그러한 구매를 완벽하게 피할 수 없다. 또한 미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관투자자들이 거의 절반 정도의 주식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의 주요 업체들이 과연 미 제국의 살인의 악업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아직 자이툰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 중인 노르웨이 군인들과 달리?

다행히 이라크 독립운동의 탄압에 직접 투입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가적 살인에 대한 직접적 지원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일단 자이툰 부대 파견이라는 미국의 국가적 살인의 상징적 지원을 감행한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내는 한국 재벌과의 거래는 계율의 엄격한 해석의 입장에서 정말 괜찮을까? 피할 수 없는 일들이니까 그냥 눈감고 하는 수밖에 없지만,《범망경》의 말씀을 생각하면 마음에 적지 않게 걸린다.

평화 유지에 힘써야 할 인간의 집합인 국가들이 대신에 살인을 일삼으니까 그들과의 불가피한 관계가 ‘죽이지 말라’는 계율과 상충될 위험이 있기도 하지만, 죽임을 찬탄하거나 죽임을 기뻐하는 것을 죽이는 악업과 같은 일로 본 부처님의 논리에 비추어 본다면 필자의 내면세계가 과연 어떻게 보이는가? 사이공의 함락, 즉 베트남의 통일과 베트남에서의 미 제국 간섭 종료 30주년을 전 세계적으로 경축했던 적이 있었는데, 필자 역시 그 당시의
사진을 보면 기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베트남에서의 미 제국의 퇴치…. 거의 반 천년동안의 구미 자본주의 세계의 침략 역사에서 피해자들이 침략을 격퇴시키고 전 세계에 침략자의 추악한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쾌거는 바로 베트남 인민의 승리가 아닌가?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베트남의 독립, 통일 투사들이 아무리 정의의 편에 섰다고 해도 그들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렇게 했기는 하지만? 폭력적 수단을 쓰고 역시 또 하나의 폭력 기제인 근대 국가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 이상 그것 역시 과연 살생의 악업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웠던가?

침략에 대한 저항이야 애당초 살의(殺意)가 없었던 자의 정당 방어라 치더라도 소련과 중국을 모델로 하기도 한 북베트남의 공산 세력이 ‘악질 지주’나 ‘외적 부역자’를 집단 처단하고, 트로츠키주의자 등 ‘이데올로기적으로 불온한 분자’를 대량 살해하는 것은 광기에 충만한 근대 국가라는 폭력의 덩어리가 늘 초창기에 한 바탕쯤 거치는 ‘내부적 타자의 청산’이었으며 결코 단순한 정당 방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근대적 정치 체제를 이루고 근대적 전쟁을 치르는 한, 근대 특유의 동질성이라는 강력한 집단적 욕망과 타자에 대한 살인적 배타성을 어느 누구도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베트남 독립, 통일 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마음은 없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들이 적어도 상대적으로 올바른 일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양쪽에서 나온 독립, 통일 전쟁의 결과에 대해 자기도 모르게 흐뭇해하는 필자의 마음은 과연 죽임을 기쁘게 여기지 말라는《범망경》의 말씀에 그대로 부합되는가? 아닌 듯하다.

필자는 이성으로는 상대적으로 올바른 일과 그렇지 못한 일들을 분류시키는 세속적 입장과, 살인적 광기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종교의 절대적 입장을 구별하여 후자의 우월성을 인식할 수 있어도, 마음이 그래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마음공부가 아직 제대로 안된 모양이다.

결론을 대신하자면, 입교의례와 출석을 중요시 내지 거의 절대시하는 타종교와 달리 불교는 단순한 의례 참여 여부나 행동으로 신자의 진실됨을 판단하는 차원을 초월하여 몸과 입, 생각 차원의 실천을 요구하는, 가장 깊고도 ‘잘하기 어려운’ 종교다. ‘불자’의 범위가 넓기에 불교의 이상에 애매하게 동조하는 사람까지도 흔히 ‘나는 불자다’고 하지만, 필자 같으면 자기 자신을 불자로 부르기에 주저한다. 남들이 불자냐 물어본다면, 불자가 되도록 노력 중이고 잘 안될 때가 많다고 답하는 것이 가장 현실에 가까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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