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미국 아메리칸 대학 철학과 교수

들어가는 말

선불교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표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주장해온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그러나 이 여덟 글자의 한자어는 선종(禪宗)을 다른 불교 종파보다 우위에 놓으려는 종파적 노력에 일익을 담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선불교 자체를 이해시키는 데는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는지도 모른다. 이는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는 표현이 형성된 지 근 천여 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 이 표현이 만들어놓은 역사, 그리고 이 표현이 현대에 이해되어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불교의 전통에서 선불교의 불립문자설, 알음알이 장애설은 승려들 사이에서 불교에 대한 무지를 낳았다.2) 각주2) 심지어 퇴옹성철(退翁性徹, 1912-1993)만큼 철저히 선적(禪的) 전통을 유지하려고 했던 인물도 근대 한국 불교를 혁신하고자 할 때, 언어와 알음알이를 선수행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승려의 교육을 가장 중요한 한국불교 혁신의 요소로 삼았다는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이제 막 시작된 서구불교의 맥락에서 보면 전통적으로 이성적 논리에 철학적 담론을 전적으로 맡겨 왔던 서구인들에게, 선불교의 불립문자설은 선불교를 동양의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한계를 형성하고 있다.

과연 선불교의 불립문자는 문자를 거부하는가? 알음알이가 깨침에 장애가 된다는 선불교의 논리는 논리를 거부하는가? 불교가 언어와 논리를 배제한다는 주장은 간화선(看話禪)에 오면 더욱 심해진다. 화두를 들어서 깨침을 얻는다는 간화선에서 화두는 원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간화선풍의 불립문자-알음알이 장애설은 화두에 대한 어떠한 논리적 해석도 이단(異端)으로 취급하는 풍토를 형성해 왔다.

화두선을 선의 언어 논리로 해석하려는 이 글은 이런 점에서는 의도적으로 선불교의 이단이기를 시도하는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선불교에서의 언어의 문제, 특히 보조 지눌(普照 智訥, 1158-1210)의 《간화결의론 (看話訣疑論)》에 나타난 간화선에서의 언어와 사고의 문제를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뽕띠(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철학에 나타난 질문(interrogation)의 철학 그리고 그의 언어관과 연관해서 간화선이 우리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사고 양식, 그 안에서의 언어의 역할에 대한 논리적 해석을 시도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고착화된 현실, 현실의 고착화

보조 지눌의 《간화결의론》은 그의 후계자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에 의해 지눌 사후에 출판되었으며, 이는 한국 선불교에서 일종의 방향전환을 제시한 작품이다. 이 글에서 지눌은 교학이 불교의 사상을 설명하고 언어를 사용하는데 나타난 실체론(實體論)적인 모습을 비판하면서 질문의 행위를 이용하는 공안선(公案禪)을 말하고 있다. 가상의 수행자가 질문을 하고, 지눌 자신이 답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글에서 지눌은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의 《오교장(五敎章)》의 교판에서 특히 화엄교학(華嚴敎學)과 돈교(頓敎)의 문제를 지적하고 공안선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간화결의론》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눌은 계속해서 화엄교학과 간화선의 차이, 그리고 간화선과 현수법장이 그의 교판에서 선과 동일시한 돈교의 차이를 밝히는 것을 통해 간화선의 가치를 인준하려하고 있다. 이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리는 지눌이 화엄교학과 간화선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이 글의 후반부에서 보게 될 메를로-뽕띠의 형이상학적 실체론 비판,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질문의 행위를 통한 주관과 객관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양상과 유사함을 발견하게 된다.

선사와 제자사이의 질문과 답으로 구성되어있는 공안은 수행자에게 패러독스, 혹은 비논리적 문구를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안의 전통은 분명 지눌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며, 지눌은 그의 《간화결의론》에서 중국의 공안 전통 속에 잘 알려진 공안 서적에서부터 여러 문구를 빌려오고 있다. 그러나 지눌의 《간화결의론》은 문구를 빌려온 중국의 공안선 서적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즉, 지눌은 《간화결의론>에서 공안선을 화엄교학이나 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눌이 《간화결의론》에서 논의하고 있는 간화선론은 분명, 지눌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대혜종고(大慧宗 , 1089-1163)의 간화선에의 접근과도 차이가 있다.

대혜는 조동종(曹洞宗)의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의 선을 묵조선(默照禪)이라 부르며, 이것이 묵념부동(默念不動)하기만 하여 선기(禪機)를 잃고 있다고 비난하였던 반면, 공안을 드는 간화선을 강조했다.

지눌이 대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특히 《간화결의론》에서 자신의 공안선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대혜어록》에서 다분히 많은 부분을 인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간화결의론》에서 지눌의 문제의식은 대혜의 문제의식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지눌은 묵조선의 묵념부동의 선수행 방법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대혜가 그랬듯이 성리학자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구조 안에서 선수행을 좀더 사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참여 불교를 시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눌의 간화선을 논하며 무조건 대혜의 영향을 언급하는 전통을 넘어 지눌과 대혜의 간화선의 차이를 좀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눌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심재룡은 묵조선을 비판하지 않은 지눌의 의도를 지눌의 "회통적 관용성"으로 설명하고 있으며,《간화결의론》의 첫 글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지눌의 문제의식은 철저히 화엄교학과 선수행의 관계 정립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목표는 사실상 지눌이 공안선을 《간화결의론》에서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간화결의론》을 형성하는 다섯 개의 질문 중에서 그 첫 번째 질문이 화엄의 사사무애법계와 간화선의 십종병 간의 관계를 묻는 것이고, 또한 마지막 질문인 다섯 번째 질문에 있어서 다시 화엄과 선과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간화결의론》에 나타난 지눌의 주장이 간화선 자체와는 관계없이 화엄교학과 선과의 관계 정립에만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눌이 보고 있는 간화선의 성격 자체가 이 둘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데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지눌의 불교를 세 번의 깨침의 경험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지눌은 혜능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으며 중생의 진여자성(眞如自性)을 확인했고, 이통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통해 중생이 그대로 부동지불(不動智佛)임을 확인했으며, 대혜종고의 《대혜어록 (大慧語錄)》을 통해 선의 열린 정신을 보았다. 주체의 진여자성과 객관 세계를 통해 나타나는 부동지불이 결국은 하나라는 깨침, 그리고 주체와 세계의 이와 같은 하나 됨이 간화선의 방법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실행 가능하다는 깨침을 통해 우리는 지눌 불교의 구조 안에서 간화선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화엄교학은 세계의 다양한 존재자가 갈등 없이 공존하는 화엄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화엄의 사법계(四法界)의 '사사무애(事事無碍)' 즉, '존재와 존재 사이에 거리낌없음'이라는 세계의 모습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사사무애의 세계관의 이론적 근거는 물론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다. 연기론은 세계와 존재를 복합적 인과론의 세계로 이해한다. 경전에 나타나는 연기론의 가장 고전적인 설명 중 하나는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생김으로 이것이 생기고, 저것의 없어짐은 이것의 없어짐이다." 라는 것이다.

초기 불교의 연기관을 나타내는 이 문장은 모든 유위(有爲)는 원인에 의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존재자가 단독적 실체(實體)를 가진 닫힌 존재일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화엄교학은 초기불교의 이러한 연기관에 용수(龍樹 150-250?)의 《중론(中論)》에서 연기가 곧 공(空)이라는 이론을 합하여 성기론(性起論)을 전개한다. 즉, 연기하는 것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연기란 그 극에 있어서는 불기(不起)이며, 이는 《60 화엄(華嚴)》의 <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에서는 성기 사상으로 나타나고 《80화엄(華嚴)》의 <여래출현품 (如來出現品)>에서는 여래의 성품의 나타남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의 현상의 일어남은 다양한 조건의 맞물림에 의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불교의 존재론은 존재와 세계에 대한 실체론적 접근을 미연에 방지한다. 존재의 상호연관성에 근거하여, 화엄교학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의 정체성(正體性)을 반정체성(反正體性)으로 규정한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호작용의 연기에 의해 획득하므로, 이론적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현상 간에는 갈등이 일어날 수 없다. 이를 화엄교학에서는 법계무애연기(法界無碍緣起)라고 본다. 화엄교학은 이처럼 초기의 연기론을 현상계까지 연장시키고, 자신들의 교학을 불교의 여러 학파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원만한 학파, 즉 원교(圓敎)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지눌의 입장에서 보면, 화엄 교학은 그 이론이 아무리 완전하다고 해도, 불교의 반실체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실체론적 경향을 가진 언어와 논리를 통해 제시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언어와 논리는 그 자체가 계속적으로 해체되지 않는 한 논리 그 자체를 고착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고, 이러한 논리의 고착화는 불교가 제시하고자 하는 세계의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돈교는 언어와 논리를 떠나는 것으로 언어와 논리의 고착화를 벗어나고자 한다. 따라서 돈교에서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불성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존재는 근본적으로 공(空)한 것이므로 사고를 떠나고, 언어를 끊음으로서 사고와 언어가 구성해 놓은 틀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면 개인은 마음의 근본적 공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고의 일어남은 존재자가 여전히 이름과 형상에 잡혀있다는 증거이다. 이름과 형상이 마치 자족적(自足的) 실체인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돈교는 수행자에게 언어와 사고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언어와 사고의 제거로 드러나는 존재의 공성(空性)을 돈오(頓悟)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묻는다. 이 경우 언어와 사고를 끊는 주체는 누구이며, 끊겨지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만일 존재가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성(自性)을 결여하기에 모든 것이 공하다면, 제거되어야하는 사고 역시 공한 것이다. 이는 결국 궁극적인 입장에서 보면, "생각하는 주체도 생각되어지는 객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주체와 객체라는 개념은 이 경우 단지 일시적 합의에 의해 작동하는 언어적 표현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인정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고를 끊는다는 생각 그 자체 역시 불이론(不二論)적 관점에서 보면 주관과 객관을 인정하는 이원론을 재도입하는 모순을 저지르게 된다. 파괴자와 파괴되어지는 것 사이의 분별이 일어나는 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없애야하는가 하는 것의 구분이 분명히 존재하는 한, 공성의 비실체론(非實體論)적 성격을 실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론적 입장에서 보면, 화엄교학과 돈교는 모두 충실히 불교의 연기론과 공의 이론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법계무애연기 사상이나 공의 이론이 이론화 작업이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결정체화, 혹은 침전성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이는 또한 불교교리의 언어적 표현은 항상 그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부정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론화, 언어로의 표현화를 위해서 세계 안의 존재들은 매 순간 진공의 상태 안에 놓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메를로-뽕띠가 형이상학적 실체론에 대해 비판한 것이 바로 지눌이 화엄교학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에서 보게 된다.

1960년에 메를로-뽕띠는 '헤겔 이후의 철학과 반철학'이라는 강의를 했다. 이 강의는 1961년 봄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되고 만다. 이 강의 앞부분에서 메를로-뽕띠는 말한다. "철학과 그의 적 사이에서는 어떠한 싸움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사실상,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철학이 비-철학으로 남아 있으면서 철학이기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중략) 진정한 철학이 철학에 비웃음을 보낸다. 왜냐하면 이 철학은 반철학적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문장은 철학의 본질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일으킨다. 메를로-뽕띠가 이 문장에서 말하고 있는 철학의 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의 반대편에 섬으로서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철학은 어떠한 철학일 것인가? 철학의 내면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 그 밖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철학은 자신의 모습을 획득하게 된다. 이처럼 철학에 대한 패러독스적 정의를 제시하고서, 메를로-뽕띠는 자신의 철학적 담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고, 그 모습은 사후에 출판된 저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1964)》 와 《세계의 산문(散文)(La prose du monde, 1969)》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메를로-뽕띠는 계속해서 관념철학의 주관주의와 과학의 객관주의에 나타나고 있는 몸과 마음, 주관과 객관, 초월적 주관주의와 경험론적 실체론 등의 이원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관념철학은 전적으로 능동적인 역할을 통해 주체가 세계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적 객관주의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주체가 철저히 수동적이라고 본다. 두 사고 양식은 모두 실체론적인 태도에 근거한다. 전자는 생각하는 주체가 실체한다고 보고, 후자는 객관적 세계가 고정불변으로 실체한다고 본다. 메를로-뽕띠는 이 두 사고를 모두 거부하고, 주관과 객관의 이원화에 대신하여 이 둘의 상호 관계성 속에서 세계와 존재를 보려고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성찰과 질문"그리고 "질문과 변증법"이라는 장(章)에서 메를로-뽕띠는 주관주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메를로-뽕띠는 존재를 전적으로 주관의 분석적 숙고로 정의하는, 데카르트적 생각하는 주체를 비판한다. 데카르트적 사고에서 '존재는 즉 사고'로 변화되어 버린 세계는 '나는 곧 생각'으로 정의되는 주관이 자신의 성찰을 통해 건축한 세계가 마치 있는 그대로의 실체인 양 이해된다. 그러나 메를로-뽕띠에게 세계는 데카르트가 보는 세계처럼 주관이 자신의 사고를 통해서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존재와의 부단한 만남을 통해 형성되는 자연적 환경이다.

따라서 메를로-뽕띠는 주관적 관념철학은 주관, 세계, 그리고 타자 모두를 진공상태에 있는 '사고(思考)'로 축소하는 삼중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닫힌 세계관과 대비해서 메를로-뽕띠는 주체, 세계 그리고 타자 모두를 그들의 "세계로 향해 열려있음(ouverture au monde)"으로 특징짓는다. 메를로-뽕띠는 말한다. "우리는 관념철학이 세계를 사고되는 것(noema)으로 전환시킨 것을 비난할 뿐 아니라 사고하는 주관을 단지 '생각'으로만 규정짓고, 그 주체와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주체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게 왜곡시킨 것을 비난한다."

관념철학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비판은 결국 이 철학이 가지고 있는 실체주의적 경향에 있는 것이다. 존재를 불변의 본질을 가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고'로 실체화(實體化)함으로써 관념철학은 존재의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미리 닫아버린 것이다.

결국 메를로-뽕띠와 지눌의 문제의식 안에 있는 것은 존재자는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즉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화엄교학은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객관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존재자는 그 객관화되어 설명된 세계와 분명히 유리되어 있다. 지눌은 《간화결의론》에서 화엄 교학이나 선이 말하는 국극적인 가르침은 동일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지눌이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수행자가 그 객관화된 세계를 자신의 세계 안에 구현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눌과 메를로-뽕띠는 세계의 모습을 깨끗한 논리적 담론으로 구성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이 주체가 자신이 형성해 놓은 담론 안에 세계를 담아내려는 의지를 알음알이라고 보았고, 메를로-뽕띠를 포함한 탈근대철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의지를 서구 근대 형이상학의 최대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세계는 인간이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닫혀져 있는 구조로 파악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눌은 존재자와 세계의 관계의 막혀있음을 간화선이라는 선수행을 통해 열 것을 제시한다. 화두 참구를 통한 세계의 열림은 데카르트 철학전통의 순수 주관성, 그리고 주관과 객관 사이의 절대적 이원화에 반해서, 메를로-뽕띠가 전통적 형이상학적 입장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의 '얽힘(intertwining)'을 근거로 하는 '질문(interrogation)'의 철학을 제시한 것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우리는 화두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된다.

2. 질문이라는 행위- 그리고 세계의 열림

메를로-뽕띠에게 있어 존재의 본질, 시간, 공간 등 일반적으로 철학적 주제라고 정의되는 것에 관한 질문이라고 해서, 일상적 현실에 관한 질문보다 더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그는 다양한 현실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본질로 환원시켜, 애초에 질문을 일으킨 의심들을 해결해주려고 하는 본체론적인 접근이 철학자들이 의미를 찾는데 꼭 필요한 접근방법이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철학이 이와 같은 본질론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현실적 실제적 세계의 변화와는 결별된 채, 존재와 세계에 대한 진리를 제시해왔다고 비난한다.

긍정문, 평서문, 혹은 부정문과 달리 의문문은 존재자 안에서의 일어나는 불일치에 의해 시작된다. "몇 시 일까?"하는 단순한 질문이 질문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날 때, 질문이라는 행위는 질문자와 동일시 될 수만은 없는 어떠한 영역을 질문자의 내부에 열어준다. 이 질문의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 의해 열려진 공간은 점차적으로 질문자 자신의 잠정적 조건들을 드러내게 된다. 존재자는 이 시공적(時空的) 존재조건들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특정 논리를 통해 주관이 정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메를로-뽕띠는 이 순간이 바로, 질문이라는 행위에 관여된 참여자들, 즉 질문을 하는 주체와 질문의 대상이 되는 객체가 카이아즘(chiasm)적 혹은 교차적(交叉的) 움직임 안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질문의 행위가 일어날 때, 질문의 행위자와 질문되어지는 대상사이에는 그리스어의 카이, 즉 영어의 엑스(X)의 두 선의 관계와 유사한 관련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질문의 행위자는 질문되어지는 대상에 대해 어떠한 우월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질문되어지는 대상 역시 단지 질문자의 욕망과 의도와 의미 체계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기를 기다리는 빈 존재가 아니다. 이 관계를 메를로-뽕띠는 철저히 상호적이라고 본다. 즉, 이 둘 사이에서는 '교차적'이고 '얽히고 섥힌'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이 관계를 '보임의 교차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내 눈이 사물을 본다'라는 익숙한 표현은 사실상 보임이라는 현상의 반절정도 밖에 설명해 내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보는 자는 단지 보이는 것을 볼 뿐 아니라, 보이는 것에 의해 보여진다. 이와 같이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는 보는 자, 즉 주체가 보이는 것, 즉 객체를 본다고 해석하는 실체론적 사고 양식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위계질서 하에서 인식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메를로-뽕띠는 말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은 서로 상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보고, 무엇이 보여지는 지 알 수 없게 된다."

교차성의 시각은 메를로-뽕띠에게는 철학적 질문의 행위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인 질문의 행위는 이미 형성된 답으로 채워지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질문의 행위일 수는 없다. 질문이 질문자의 마음에서 형성되었을 때, 질문을 하는 자와 질문 사이에서는 보임에 있어서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가 형성된다. 질문자 안에서의 불일치와 동요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사이의 간격을 나타내주고, 급기야 질문자는 자신의 존재가 단절적이고 자족적 실체가 아니라 세계의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열려진 존재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메를로-뽕띠의 이와 같은 존재에 대한 인식은 주체를 철저히 '생각하는 존재(Ego-cogito)' 로 보았던 데카르트적 자아의 개념에서 서구 대륙철학의 자아관이 커다란 전환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논의를 선불교의 공안으로 방향전환을 해본다. 왜냐하면, 질문이라는 행위를 통해 선수행자로 하여금 세계의 열려있음을 보도록 하는 것이 선불교 공안선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눌에게 화엄교학과 돈교의 문제는 그 이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현실의 성격, 그리고, 이론과 수행자의 현실과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런 점에서 《간화결의론》에서 지눌의 프로젝트는 모순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이론화의 불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보여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또한 《간화결의론》은 그 이전의 공안서적, 즉, 《벽암록(碧巖錄)》이나 《무문관(無門關)》 혹은 심지어 그의 제자 혜심이 편찬한 《선문염송집 (禪門念頌集)》과는 다른 부담을 안고 있다.

이 서적들이 단지 공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반해, 지눌은 공안의 유용성을 논의함으로써 또다시 화엄교학에 대해 자신이 비판했던 문제점과 똑같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사실상 《간화결의론》의 철학적 담론이 실체론에서 반실체론적 사고양식으로 방향전환을 하면서 가지는 문제점과 유사한 문제점을 갖게 만든다. 이는 사실상 불교철학에 있어서 전혀 새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는 또한 현대 서구 대륙철학에서 탈근대철학이나 해체철학의 텍스트가 항상 안고 있는 부담이기도 하다.

《간화결의론》에서 지눌은 공안이나 화두에 대하여 어떠한 정의도 제공하지 않는다. 지눌이 공안선을 화엄교학이나 돈교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응책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지눌은 화두 자체는 병을 고치는 말(破病之談)도 아니고 진리를 완전히 제시하는 언어(全堤之語)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화두에 대한 정의를 언어화하지 않는 것은 지눌이 비판하고 있는 화엄교학의 문제점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조심성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눌은 수행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화두가 완전한 진리를 제시한다거나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조금만이라도 생각한다면 바로 그 순간 언어 표현에 의해 형성된 한계 안으로 떨어질 것이니, 이것이 어떻게 살아있는 화두(活句)를 들고 있는 것이라 하겠는가""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 혹은 "마 서근(麻三斤)"혹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拘子無佛性)"180
같은 화두가 불교의 연기법칙이나 공에 대해 어떠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사실상 부조리 같아 보이는 선문답은 그것이 행해지면서 더 이상 논리적 사고의 전개를 차단한다. 그리하여 화두는 철저히 "맛도 없고 근거도 없는"상태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두의 작동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메를로-뽕띠의 질문 행위처럼, 화두는 수행자의 마음에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화두를 들었을 때, 수행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일상의 논리의 어떠한 곳에서도 화두를 풀어낼 논리를 발견할 수 없다. 논리의 부재는 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면서 화두는 수행자의 마음에서 목표를 잡지 못하고 떠돌기 시작한다. 수행자가 기존의 논리 체제에서 화두가 일으킨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를 실패하고, 화두의 언어가 일상적 언어체계에서 이해되어지기를 멈출 때, 화두는 결국 수행자에게 답이 없는 질문을 일으킬 뿐이다. 질문이라는 행위는 화두 수행에서 '의심'이라는 행위로 연결되고, 의심은 결국 고착화된 세계관, 자아관을 넘어서 수행자의 마음에 공간, 틈을 형성하게 된다.

사물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는, 그리하여 질문이라는 행위를 통해 존재와의 접촉에 의해 침묵을 경험하는 메를로-뽕띠의 질문자처럼, 공안선의 수행자는 기존 언어체계를 가지고 스스로가 구축해 놓은 존재와 세계, 사물의 의미의 한계를 직면하면서 화두가 일으킨 질문의 방향을 자신에 대한 실존적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불교나 메를로-뽕띠가 보듯이, 세계는 부단한 일어남의 흐름이며, 이 '일어남(起, happening)'이라는 직물이 과거, 현재, 미래를 거쳐 무한수의 조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되어 진다면, 언어적 관습 그 자체는 이러한 현실을 표현하는데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언어를 제거함으로써, 현실과 언어사이의 괴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 중에 있지 않다.

언어는 인간 존재에 있어서 선택적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이 반철학(反哲學)으로 변함으로써 철학 그 자체로 회귀한다는 메를로-뽕띠의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철학은 이론적 체계와 제도화된 이해를 구성함으로써 존재자의 세계와 진리에 대한 태도를 열어주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닫아왔다. 제도화된 철학의 자폐성(自閉性)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세계의 모습에서부터 존재자가 잠시나마 안전성을 부여하는 이론화의 세계를 제공한다는 가치로 인하여 허용되어왔다.

이론화와 해석의 결과로 얻어지는 안정성과 이로 인한 불가피한 현실의 위반에 반대해서, 지눌은 질문이라는 행위를 통해 선수행자를 메를로-뽕띠의 표현대로 '세계의 열림'속으로 내보낸다. 불교사상을 이론화하는데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공안을 제시하면서, 공안선의 "이론"은 그리고 공안에 대한 어떠한 언어표현도 결국은 그 자체의 모순에 빠진다고 하는 짐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공안선의 목적이 연기고 공이라는 비실체론적 세계관을 이론화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사실상, 공안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도구 역시 화엄교학이나 돈교가 사용한 똑같은 틀, 즉 언어와 이론화라는 점은 공안선을 언어적으로 표현해내려는 지눌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안선 전통은 언어의 이중적 기능을 말해준다. 메를로-뽕띠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언어의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3. 살아 있는 언어, 죽은 언어

철학이 질문이라는 행위에 수반하는 회의와 불안감을 평서문이 담고 있는 확정성과 안전성으로 변화시킬 때, 그것은 언어에서 역시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를 빼앗아 버린다. 의미화의 작업은 내적 외적으로 형성된 본체의 고착화와 제도화가 되며, 이때의 언어는 그대로 질식해 버린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언어를 "말하여진 언어/침전된 언어(le langage parl )"라고 부른다. 침전된 언어는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지워버린다.

침전된 언어의 죽음과 같은, 혹은 유사죽음과 같은 상태와 달리 "[언어]가 그 자체의 표현의 행위를 창출하는, 그리하여 언어가 언어 기호로부터 의미로 나를 나아가게 하는" 언어를 메를로-뽕띠는 "말하는 언어(le langage parlant)"라고 부른다.

침전된 언어는 "언어 기호와 그 기호에 의해 익숙해진 의미의 이미 인정된 관계의 무더기" 로 구성되어 있다.
존재와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함 속에 가두어 두려는 철학, 그리하여 그들을 교의화(敎義化)하고 제도화하는 그런 류의 철학처럼, 침전된 언어는 존재자의 경험을 이미 기성 상품화된 표현 안에 가두어 버린다. 침전된 언어의 꿈은 객관적 과학적 언어의 꿈이기도 하다. 이러한 침전된 언어와 달리, 말하는 언어는 기존의 언어 기호와 의미체계에서부터 새로운 비밀의 의미를 창출해낸다.

이처럼 두 종류의 언어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메를로-뽕띠는 관념철학과 변증법적 철학의 실체론적 접근에 반해서 질문의 행위에 의한 반실체적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나타난 존재와 언어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고 한다. 지눌의 간화선 언어에 대한 설명 역시 언어에 대한 그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유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간화결의론》의 결론 부분에서 지눌은 대혜의 말을 인용하며 화두의 언어의 두 가지 양상을 제시한다.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활구(活句)를 참구하여야 할 것이다. 결코 사구(死句)를 참상하여서는 안 된다. 활구를 참구하면 이를 영구히 잃지 않을 것이나, 사구를 참구하면 한다면 자기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지눌은 활구와 사구의 개념을 참구(參句)와 참의(參意)라는 화두참상의 두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좀더 구체화 한다. 이 둘을 앞의 활구-사구와 함께 생각해 보면, 참의는 사구참상(死句參詳), 참구는 활구참상(活句參詳)과 함께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지눌은 이미 《간화결의론》의 서두에서 사구 참상은 화엄교학이나 돈교에서의 언어와 다를 바가 없다고 못 박은 바 있다. 즉 사구 참상에서 참선자는 여전히 그 언어가 제시하는 뜻을 객관화하여 자신의 현실 안으로 들여오기를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활구참상은 참선자의 마음, 즉 일심을 그대로 통하여 반야의 지혜를 밝히고 있다고 본다. 메를로-뽕띠의 침전된 언어처럼, 지눌의 사구 역시 언어체계, 그리고 그 체계가 구성해 놓은 일상성에 매몰되어버리는 언어다. 이에 반해서 활구는 참선자와 그 참선자의 마음 사이에 중계 역할을 하는 언어다. 메를로-뽕띠의 말하는 언어처럼, 활구는 존재자(Being)의 말없음과 의사를 소통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점에서 메를로-뽕띠와 지눌은 둘 다 우리의 언어체계가 가지고 있는 현실과 사고의 고착화라는 문제를 다시 언어를 통해 극복해 내려는 노력을 통해, 반실체론적 사고 양식이 어떻게 실체론적 언어관을 극복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4. 전환점

메를로-뽕띠의 철학을 간화선과의 연장선상에서 읽으며, 우리는 20세기 대륙철학이 불교와 유사한 사고 양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본다. 이 전환은 데카르트나 헤겔의 철학에서 불교가 철저히 이들 철학의 정반대편에 놓여진 사고양식으로 이해되어졌던 상황과는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메를로-뽕띠의 철학이 근대 서구 대륙철학과 불교와의 분명했던 간격을 좁히고 있다면, 여전히 이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한 예로 메를로-뽕띠의 애매성(ambiguity)의 철학을 불교의 연기법(緣起法)과 연결시키고 있는 김형효는 이러한 메를로-뽕띠와 불교철학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를로-뽕띠의 철학에서 세속제적인 연기법(緣起法)은 이 세계의 근원적인 사실로서 그려져 있으나, 진여제적인 개공법(皆空法)은 찾아보기 어렵다. 말하자면 그는 이중긍정적인 의타기적인 연기의 법을 말하나, 그 연기의 이면이 동시에 이중부정적인 해탈법에 다름 아님을 지적하지 않는다. 선이 악에 의하여 상감되고 있고 是가 非와 별개의 독립적인 실체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되는 反실체론적, 反원자론적인 사실의 진리를 그가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선/악>과 <시/비>의 택일적 논리를 거부하고 있다. 택일적 논리의 거부는 모든 세계의 사실이 자기동일성을 보지하고 있는 독립적 개체로서 구성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동일률과 배중률의 부정을 뜻한다.

선불교 뿐 아니라 대승불교가 그 전통의 초기부터 언어와 사고, 언어와 불교적 세계관을 문제 삼았던 것과 달리, 서구 철학, 특히 서구 대륙철학은 19세기말과 20세기에 자체 내 철학의 방향전환을 이루면서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인간 사고양식에 미치는 언어의 영향, 그리고 철학하기에서 언어의 위치를 파헤치게 된다. 이러한 서구 철학의 자체의 방향전환은 불교와 서구 사상의 만남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형성해왔다.

즉, 근대 대륙 형이상학이 서구 대륙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19세기에 불교가 자아와 존재의 초월적 근거를 말살하려는 "절멸의 종교"로 이해되었던 데 비해, 대륙 형이상학이 자신이 상정한 자아와 존재의 초월적 근거 자체에 대한 내부적 비판이 일어나면서, 불교와 서구 철학은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게 되고, 그 한 예로 우리는 메를로 뽕띠의 교차적(chiasmic) 사고, 질문이라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의미, 그리고 그의 언어 철학을 지눌의 간화선과의 비교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전통이라는 이름에 얽매어있는 불교를 현대, 그리고 탈현대적 감각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글에서 시도해본 화두의 언어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철학과의 비교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일상의 익숙한 언어를 죽은 언어로 보고, 비논리의 언어를 통해, 화두 수행자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서 결국은 답이 없는 질문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심연을 보게 한다고 화두선과 화두라는 언어를 '해석'한 이 글은, 화두는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두선에 대한 이단적 해석으로 들릴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이단설을 들추기 전에 과연 화두선은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보아야한다. 화두선은 결단코 화두를 타파하여 깨침을 얻겠다고 목 아래 칼을 꽂고 좌선을 한 수행자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화두의 언어가 모든 중생들에게 삶과 존재에 대한 일말의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그 어떤 면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쩌면 가장 적절한 답을 20세기 후반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철저히 선사다웠다고 했던 퇴옹 성철(退翁 性徹, 1912-1993)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있다. 10년 장좌불와, 8년 동구불출, 조계종 종정을 지내면서도 산을 떠나기를 거부하며 지독하리만큼 자신이 주장한 선사의 모습을 지키려했던 성철, 아뢰야식의 삼세 망념까지 모두 지우고, 삼관을 돌파하지 않으면 깨침이라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돈오돈수를 주장했던 성철이 일상 수행자들에게 화두를 들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생명이 억천만 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 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은 무엇인가?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화두를 배워서 마음속으로 화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화두를 하고 행동은 남을 돕는 일을 꾸준히 할 것 같으면 어느 날엔가는 마음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 때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인간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無量大佛事)를 미래겁이 다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마음에 화두를 들고 수행하라는 성철의 가르침에서 이 화두란 어떤 화두였을까? 이 화두는 우리가 그렇게 말해온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설명해서도 안 되는 그 신비의 세계인가. 아니면, 수행자들이 자신들의 일상사의 관념이 형성해 놓은 이기적인 사고의 틀을 끊고 조금씩 자신들의 본 마음, 실존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문을 열어주는 세계로의 열림을 경험할 수 있는 단계를 말하는 것일까?

단지 천오백년의 불교 전통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불교가 어떠한 모습으로 한국 사회에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때, 열린 마음으로 불교전통과 화두 언어를 볼 수 있는 비젼이 요구되는 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진영
미국 아메리칸 대학 철학과 교수. 현재 고려대학교 철학과 방문 교수로 한국에 머물고 있다. 편저로《불교와 해체철학(Buddhisms and Deconstructions)》(근간), 논문으로〈선과 선의 언어철학(Zen and Zen Philosophy of Language)〉〈우리 시대에 있어서 선의 언어: 보조 지눌의 화두선의 경우(Zen Language in Our Time: the Case of Pojo Chinul's Huatou Meditation)〉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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