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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들의 삶을 통해 본 동물의 도덕적 지위 / 서재영
서재영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23호] 2005년 06월 10일 (금) 서재영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1. 머리말

오늘날 생태윤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이나 생명을 가진 생명체에 국한되지 않고 나무나 바위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처럼 윤리의 범주는 인간의 권리, 동물의 권리, 생명의 권리, 자연의 권리와 같은 포괄적인 전체에 대한 논의로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발전의 과정을 충실하게 밟아오지 못했다. 인간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고의 중심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깃발을 꽂기 무섭게 우리에게 닥친 현실은 전지구적 생태위기였다. 여기서 우리는 새만금이나 천성산과 같은 무정물의 권리와 도덕적 지위에 대한 철학적 담론으로 빠르게 전이되어 갔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고려(Moral consideration)'의 대상에 대한 사유가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보편적 생명으로, 생명에서 생태적 전체로 차근차근 진행되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생태윤리로 건너뛰면서 가장 앞선 이론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첨단의 윤리를 사고하면서도 그 이전에 정립했어야 할 동물의 권리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논의는 간과되고 있었다. 생태적 담론의 주제가 무정물을 사유한다고 해서 유정들의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개체 생명은 전체와 분리하여 사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개체적 특성과 개체가 처한 상황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물들은 굳이 생태위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행위와 인간중심의 문화 속에서 고통 받거나 생존이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2) 각주2) 체세포 복제를 통해 배아 줄기세포를 만들어 낸 황우석 박사의 연구성과는 전 세계적인 사건이 되고 있다. 하지만 동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또 다른 고통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서 수많은 동물들이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가 생태적 전체로 확장되었다고 해서 동물의 권리와 도덕적 지위에 관한 문제가 덤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권리, 동물의 권리, 생명의 권리는 최후까지 담보되어야할 본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불교사상에는 동물이나 생명에 대한 윤리가 다른 어떤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게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불교생태학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동물에 대한 도덕적 지위와 생명에 대한 자비의 윤리이다. 그런 점에서 동물의 권리에 대해 불교생태학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는 것은 의도하지 않게 생략된 중간과정을 다시 복원하고 불교생태학의 균형을 바로잡고 내실을 다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본고는 이 같은 상황인식에서 선사들의 삶을 통해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내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전통적 동물관과 생태학적 동물관

1) 전통적 형이상학의 동물관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인간을 여타의 자연적 존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바라보았다. 인간은 '언어', '마음', '자유의지', '영혼' 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은 자연을 지배하는 엄격한 기계적 결정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3) 각주3) Joseph R. DesJardins, 김명식 역, 《환경윤리》, (서울:자작나무, 1999), p. 342
그리고 지배적인 세계관에서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파악하기 때문에 '자연 안의 인간(man in nature)'이라는 이미지로 그려진다.4) 각주4)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 343

따라서 인간이 자연 환경의 일부라는 생태학적 전체주의는 수용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과 자연을 엄격히 구분하고 인간에게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에 대한 지배적 형이상학의 뿌리는 서구의 전통사상이나 종교에서 기원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언어능력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인간은 언어능력이 있기 때문에 도덕·정의·불의·선악을 사유하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5) 각주5) 로저 트리거, 최용철 옮김,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 (서울:간디서원, 2003), p. 67

그는 인간과 짐승들을 대비하여 짐승들은 이성이 없는데 반해 인간은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성적 능력이야말로 도덕적 기능으로서 인간을 짐승과 구별해 주는 특성이자 문명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라고 보았다.6) 각주6) 로저 트리거, 같은 책, p. 72

그는 이런 인식을 토대로 식물은 동물을 위해,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명의 위계적 질서를 설정했다.7) 각주7) Aristoteles, 《정치학》, 1권 8장,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 162 재인용)

이는 식물이나 동물 같은 자연적 존재들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인간에게 독점적으로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인간중심적 사유는 기독교적 전통에서 더욱 강고해진다. 즉 인간 종(種)이 유일무이하다는 유대교의 관념을 물려받은 기독교는 이를 로마에 전파했다. 그리고 불멸의 영혼을 인간에게 부여하고,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는 관념을 덧붙임으로써 인간종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8) 각주8)Piter Singer, 김성한 옮김,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 (서울:인간사랑, 2002), p. 324

《성경》에 따르면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길짐승과 바닷고기가 다 두려워 떨며 너희의 지배를 받으리라."9)며 다른 생명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무서운 권리를 인간에게 독점적으로 부여한다. 각주9)《성서》, (서울:대한성서공회,1980), p. 11

그러나 린 화이트(Rynn White)는 기독교의 이 같은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야말로 자연 파괴의 사상적 근거라고 비판한다.10) 각주10) L. White, Jr., 이유선 역,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 《과학사상》 창간호, (서울:범양사, 1992), p. 295

화이트의 비판은 16세기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살펴보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야생동물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신의 섭리에 의해 동물은 인간이 사용하도록 운명 지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을 죽이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동물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11) 각주11) Thomas Aquinas, 《신학대전》, 3권 2부,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 162)

그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가졌지만 동물들은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12) 각주12) 로저 트리거, 같은 책, p. 95

아퀴나스는 영혼도 없고 이성적이지도 못한 피조물에게까지 인간이 자애로울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이성을 갖추지 못한 존재들은 선(善)을 소유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인데, 선은 오직 이성적 피조물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3) 각주13) Piter Singer, 같은 책, p. 330

다만 이성을 갖지 못한 존재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경우는 그들이 인간에게 도움이 될 때라고 한정짓는다. 여기서 아퀴나스의 사상은 생명에 대한 도구적 가치관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데카르트 역시 이 같은 사상적 범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적 사유를 추종함으로써 동물에게 가장 고통스런 결과가 담긴 사상을 피력했다.14) 각주14) Piter Singer, 같은 책, p. 338

그는 동물들이 불멸의 영혼을 갖지 않는다는 기독교의 입장을 수용함으로써 동물들은 의식이 없다는 결과를 인정한다. 데카르트는 자연 전체를 하나의 기계로 바라보기 때문에 인간 이외의 동물은 순전한 기계이며 자동인형에 불과하다. 물론 인간의 몸도 기계이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예외라는 것이다.15) 각주15) 최명관, [데카르트의 사상과 근대과학], 《과학사상》 Vol.2 (1992), p. 149

따라서 정신이 없는 동물들은 쾌락이나 고통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그저 시계와 같은 기계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기계에 불과하다.16) 각주16) Piter Singer, 같은 책, p. 339

이 같은 가치관에 입각해 본다면 인간을 제외한 동물이나 식물은 어떤 권리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필요에 따라 그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파괴하더라도 아무런 죄가 성립될 수 없다. 이처럼 지배적 가치관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종교와 철학에서는 오로지 인간만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인간중심주의적 가치관을 견지한다.

2) 생태철학적 동물관

생태철학에서는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견지하는 이상과 같은 인간중심적 가치관을 전복한다. 근본생태론(Deep Ecology)을 주창하는 학자들은 인간을 자연의 다른 부분과 별개의 존재로 바라보는 지배적 세계관을 거부한다.17) 각주17)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 342

아느 네스(Arne Naess)를 비롯해 빌 드볼(Bill Devall), 조지 세션즈(George Sessions)와 같은 생태철학자들은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과 자연을 도구적 이용가치로 바라보는 현대의 산업주의를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생존하고 번성할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인식을 새롭게 확립하기 위해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여 '생물평등주의(Biospherical Egalitarianism)'를 강조한다.18) 각주18) Arne Naese, [The Shallow and the Deep, Long-Range Ecology Movement: A Summary], (George Sessions, Deep Ecology for the 21st century, Boston: Shambhala, 1995), p. 152

근본생태론에서는 인간과 생물, 인간과 자연을 상호 위계적이거나 차별적인 존재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생물평등주의와 공생의 원칙(principle of symbiosis)은 생명들 간에 위계적 상하관계가 존재한다는 계급적 입장을 반대한다.19) 각주19) Arne Naese, 위에 글, (George Sessions, 같은 책), p. 152

심지어 폭스(W. Fox)는 존재의 장(場)에서는 존재들 간에 확고한 존재론적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20) 각주20) Warwick Fox, "Deep Ecology: A New Philosophy for Our Time?", Ecologist14 (1984), p. 5
그런 점에서 생태윤리는 자연물들 간의 관계, 무생물, 그리고 종과 생태계 등과 같은 생태적 전체에 대해서도 '도덕적 지위(moral standing)'를 부여하는 전체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21) 각주21)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 250

이는 곧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들 사이에 개입해 왔던 전통적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틀이 해체됨을 의미한다.
동물해방 운동가인 피터 싱어(Peter Singer) 역시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동물을 제외하는 것은 마치 인간의 도덕적 권리(moral rights)를 논하면서 여성과 흑인을 제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종차별적 가치관의 부당성을 성토한다.22) 각주22)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 191

그는 인종이나 성(性)을 근거로 도덕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부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생물의 종(種)이 다르다고 도덕적 지위를 부정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주장한다.23) 각주23)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 192
싱어는 종에 따라 도덕적 가치를 박탈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에 대해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종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다른 종의 이익을 배척하는 편견 또는 왜곡된 태도"24) 각주24) Piter Singer, 같은 책, p. 41
라고 비판했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이성과 영혼의 유무가 도덕적 권리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공리주의자 벤담(J. Bentham)은 "문제는 그들이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이다."25)라며 도덕적 근거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각주25) 제레미 벤담, 《도덕과 입법 원리에 대한 서설》,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 344)

벤담에 따르면 한 존재에게 '동등한 고려의 권리(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를 부여하려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특징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capacity for suffering)'26) 이라는 것이다. 각주26) 벤담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데미언 키온은 도덕적 지위를 유정성에만 근거지우려고 하면 몇 가지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인간이나 동물들은 도덕적 권리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전공학에 의해서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차단되었을 경우 그들에게는 어떠한 윤리적 근거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고통을 느끼는 것이 도덕적 지위의 유일한 기준이 될 경우 고통 없이 생명체를 죽이는 행위에 대해 어떠한 윤리적 부당성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Damien Keown, 같은 책, pp. 79-80)
이러한 능력은 언어 능력이나 고등수학을 풀 수 있는 지성적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27) 각주27) Piter Singer, 같은 책, p. 43

만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도덕적 지위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경우 도덕적으로 고려해야할 대상은 인간이라는 제한된 범위를 뛰어넘는다. 살아 있는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감각적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은 그만큼 광범위한 생명체로 확장된다.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라는 것은 분명히 도덕적 관심을 모든 형태의 생명체로 확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28) 각주28) Damien Keown, 허남결 옮김, 《불교와 생명윤리학》, (서울:불교시대사, 2000), pp. 73-74.

싱어 역시 이 같은 벤담의 입장을 수용하여 동물권(Animal Rights)의 사상적 근거로 삼고 있다. 싱어는 인지적 능력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유정성(有情性)이 존재의 도덕적 근거라고 주장한다.29) 각주29) Piter Singer, 같은 책, p. 47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통적 형이상학의 핵심적 특징은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유에 근거해 있다. 반면에 생물평등주의를 주창하는 학자들의 입장은 인간과 다른 생명들 간의 본질적 차별성을 해체하고자 노력한다. 바로 이 점에서 생물평등주의적 사유에 대해 선(禪)이 사상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왜냐하면 선의 가치관은 이분법적 가치관과 분별심을 극복하고 중도적(中道的) 인식을 깨닫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에서 말하는 무념(無念)과 무상(無相)의 가치관은 겉으로 드러난 형태나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능력에 따라 존재의 도덕적 권리를 차별하는 종차별주의를 극복할 철학적 근거로 탐구해 볼 가치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 같은 선의 정신이 선사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에 주목한다.

3. 인간과 동물의 공존과 동물의 도덕적 지위

1) 수행자의 삶과 그 반려(伴侶)로서의 동물

왕실과 중앙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교학불교와 달리 선종의 활동무대는 산간벽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30) 각주30) 최현각, 《선학의 이해》, (서울:불교시대사, 2003), p. 118

수행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과 수행공간이 이처럼 심산유곡을 무대로 삼았던 만큼 자연과 동물 등 인위적 문화 밖에 존재하는 야성적 세계와의 접촉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동물들과 생활영역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수행자들의 삶 속에는 동물들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이 등장한다.

전등사서(傳燈史書)와 어록(語錄) 속에는 인간과 동물에 얽힌 다양한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선의 생명윤리,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 그리고 동물의 존엄성과 도덕적 지위에 대한 선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위산영우( 山靈祐;771-853)는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로부터 법을 받고 산문을 개창한 곳은 인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호남성(湖南省) 대위산(大 山)이었다. 이곳은 민가라곤 굴뚝의 연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산골로 짐승이 사는 동굴에 가까웠다.31) 각주31) 최현각, 위의 책, p. 154

《전등록》에는 그가 깊은 산속에서 원숭이를 벗 삼아 살았으며, 도토리와 밤 같은 나무 열매로 연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32) 각주32)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대정장(大正藏) 51, p. 264c

선사들의 수행공간이 산과 숲 속이었던 관계로 자연히 동물들과 접촉이 빈번해졌고 따라서 그들과의 공존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 공간은 모든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 생명공동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가지 위에 새가 둥지를 틀듯 자연의 한 귀퉁이에서 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과화상(鳥 和尙)은 나무에서 까치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33) 각주33) 경덕전등록, 대정장51, p. 230)

이처럼 선사들의 삶은 지극히 자연과 동화된 삶을 지향했으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인간중심적이고 인위적인 공간으로 가꿈으로써 자연과 동물들을 소외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인간과 동물들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토대가 성립된다.

불수암 행인(佛手巖 行因) 선사도 자연적 삶과 동물과의 공존이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석굴에서 혼자 수행했던 그의 곁에는 항상 사슴과 금낭조(錦囊鳥)가 머물고 있었다.34) 각주34)경덕전등록, 대정장51, p. 395b.

또 사조도신(四祖道信;580-651)의 방계로 우두종(牛頭宗)의 개조였던 우두법융(牛頭法融;594-657) 역시 베옷 한 벌만 걸치고 산에서 혼자 살았는데 그도 동물들과 각별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도신이 찾아와 거처를 묻자 법융은 자신이 거처하는 작은 암자로 안내했다. 그러나 암자 주변에는 호랑이들만 우글거리고 있었다.35) 각주35) 경덕전등록, 대정장51, p. 227)

《조당집》의 기록에 따르면 도신을 작은 암자로 안내했는데 "그곳에는 범과 이리가 앞뒤로 둘러서 있고, 사슴 떼가 사방에 뛰놀고 있었다" 36)고 기록되어 있다. 각주36) 《조당집(祖堂集)》3卷, 고려장(高麗藏)45, p. 249下)

이상과 같은 내용을 미뤄볼 때 선사들의 삶은 숲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동물들과 상호 유기적인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법융은 이들을 두려운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생활했다는 기록에서 선사들과 동물의 관계가 친밀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호랑이와 이리떼를 보고 도신이 손사래를 치며 '무서워라'하며 두려운 시늉을 내자 법융은 "스님에겐 아직 그런 것이 남아 있습니까?"37)라고 반문한다. 각주37) 《景德傳燈錄》, (大正藏51, p. 227)

법융의 태도는 수행자가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며 겉모양에 따라 차별한다면 올바르지 않다는 반문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동물들은 산 속에서 수행했던 선사들의 도반(道伴)이었으며 동시에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삶의 반려(伴侶)였음을 엿 볼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위산과 조과의 경우처럼 수행자들이 살아간 삶의 양식이 인간중심적이며 인위적이지 않고 동물들처럼 자연적 환경에 동화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동물과 선사들이 함께 살았다는 전등사서의 이 같은 기록이 설사 과장된 내용이거나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속에 담긴 생태적 함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같은 내용을 선전(禪典)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선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대목이며, 동물과 인간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수행자의 삶이며 본받아야 할 윤리적 인식이라는 내용을 강조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보여 주는 이 같은 사례는 단지 같은 공간 속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았다는 수준을 넘어서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로 기술되기도 한다. 즉 선사들은 동물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고 역으로 위기에 처한 동물을 도와주면서 인간과 동물이 상호의존적 관계로 그려지는 대목도 발견할 수 있다. 신라의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는 중국 대륙을 행각(行脚)하다가 회창의 폐불을 만나게 된다. 국사도 은거하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기력이 쇠진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국사는 동물들이 가져다 준 떡과 음식으로 기운을 차렸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38) 각주38)《祖堂集》17卷, (高麗藏45, p. 339中)

동물과 수행자들의 관계는 인간과 미물과의 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삶의 공간, 자연이라는 생명의 사원에서 함께 살아가는 평등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기록하는 선전의 편찬자 역시 선사들의 위의(威儀)가 대단하고 법력이 높아서 동물들을 감복시키고 그들을 조복(調伏) 받아서 동물들의 섬김을 받았다는 식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마치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을 기록하듯, 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기록하듯 자연스러운 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 같은 태도야말로 전등사서에 기록된 내용의 역사적 진실 여부를 떠나서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선의 정서적 분위기와 감성적 인식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2) 수행을 외호하는 도반(道伴)으로서의 동물

수행자와 동물의 관계는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관계로 승화되면서 동물의 지위가 종교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대목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동물들은 선사들의 수행을 돕고 외호(外護)하는 도반으로 인식되는 부분이 그것이다. 사조도신(四祖道信)의 방계 혜충(慧忠)에 얽힌 기록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혜충선사는 평생 옷 한 벌, 그릇 하나로 생활할 만큼 검소한 수행자였다. 이런 선사를 흠모한 신도들이 공양미를 올리자 도둑들이 이를 훔쳐가려 했다. 하지만 호랑이들이 그런 도둑들로부터 공양미를 지켜 주었다는 내용이다.39) 각주39)《景德傳燈錄》, (大正藏51, p. 229a)

여기서 동물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반려라는 의미를 넘어 선사들의 수행을 돕고 외호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 같은 내용 속에는 동물은 미물이라거나 맹수라는 인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선사들을 지켜 주고 그들의 수행이 가능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호법신장으로 그려진다.

물을 수행의 반려자로 삼아 수행했던 선사들의 일화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혜충(慧忠)이 대표적이다. 혜충은 동물을 함께 수행하는 도반(道伴)이나 제자(弟子)로 생각했다. 어느 날 장손(長遜)이라는 태수가 혜충이 머무는 곳을 찾아와 제자가 몇이냐고 묻자 혜충은 서넛쯤 된다고 했다. 제자들을 볼 수 있느냐는 장손의 요청에 선사는 선상(禪床)을 탁탁 쳤다. 그러자 호랑이 세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나타났다.40) 각주40) 《景德傳燈錄》, (大正藏 51, p. 229a)

또 남악회양(南嶽懷讓)의 법손 선각선사(善覺禪師) 역시 호랑이 같은 맹수를 제자로 두었다고 한다. 41) 각주41)《景德傳燈錄》, (大正藏51, p. 261c)

이처럼 맹수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기록은 동물도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선사들의 인식을 보여 주는 대목이며, 그들도 본성은 청정(淸淨)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선사들은 동물과 인간의 본질적 차별이나 우열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사들은 진리를 통해 구제할 대상을 인간에게 국한시키지 않았다. 동물들을 제자로 두었다는 것은 동물도 인간과 같은 구제의 대상이 되고, 진리를 이해하는 존재로 인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적 질서에 따라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차원을 넘어 동물들과 정신적 가치를 함께 나누는 관계로까지 승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동물도 그 본성에 있어서 인간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도 인간과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보장받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자들의 삶과 언행은 동물과 사람이 비록 외형적 모습에서는 다르지만 인간과 동일한 테두리 내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법(法)을 나누기도 한다. 이 같은 인식에서 비로소 동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공존의 철학이 나오고, 그 같은 철학과 신념은 실제로 동물과 인간이 함께 여행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하며, 서로에 대한 인정(認定)을 넘어 서로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4. 동물의 불성(佛性)과 생명의 평등성

1) 동물의 불성(佛性)

혜능은 중생의 불성(佛性)에는 남북이라는 인위적 차별과, 범부와 성인이라는 구분도 없다고 했다.42) 각주42)《돈황본단경》, (大正藏48, p. 337b)

그렇다면 불성은 사유하는 인간에게만 있고 동물이나 미물들에게는 없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불성론 역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유하는 인간에게만 도덕적 권리와 가치를 부여해온 전통적 형이상학과 종차별주의적 관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선의 불성관(佛性觀)은 인간중심주의나 종차별주의 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 준다.

마조의 법을 이은 동사화상(東寺和尙)에 얽힌 선화(禪話)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고 있다. 어느 날 동사화상이 배휴(裴休)와 함께 불전(佛殿)에 들어갔는데, 마침 참새 한 마리가 부처님 머리 위에 앉아 똥을 싸고 있었다. 이를 본 배휴가 저 참새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고 묻자 동사화상은 그 참새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했다. 43) 각주43)《祖堂集》15卷, (高麗藏45, p. 328c)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불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대목이다. 선의 이 같은 불성관은 지배적 가치관이 견지하고 있는 동물과 인간의 종차별주의적 사유를 와해시킨다. 지배적 가치관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도덕적 위계가 존재한다는 종차별주의적 관점에 기반해 있다. 그러나 싱어는 이 같은 차별이 부당함을 역설한다. 그는 '이익(interests)에 대한 동등한 고려'라는 개념을 통해 도덕적 권리가 인간에게만 한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44) 각주44) Piter Singer, 김성한 옮김,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 (서울:인간사랑, 2002), p. 10

인간은 동물을 식량이나 노동력 또는 재산이라는 도구적 차원에서만 생각해 왔다. 이 같은 인간중심의 편견과 차별적 인식으로 인해 동물에 대한 학대와 살육이 정당화되어왔다. 그러나 싱어는 인간중심적 가치관으로 인해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동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을 주장한다.45) 각주45) Piter Singer, 같은 책, pp. 12-14

불성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종차별주의의 해체를 통한 동물해방의 윤리도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문제다. 불성의 관점에서는 인간에서 동물과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생은 동일한 불성을 지녔다고 보기 때문이다. 불성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본질적 가치에 있어서 인간과 동물의 차별이 정당화 될 수 없다. 여기서 불성은 인간과 동물의 차별적 가치관을 극복하고 불이(不二)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실천을 낳을 수 있는 도덕적 윤리관의 근거가 된다.

2) 동물의 자연적 삶과 평상심(平常心)

선사들이 보기에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의 삶은 도(道)의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래서 선 수행은 종종 목우(牧牛)에 비유된다. 어느 날 석공혜장(石鞏慧藏)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마조가 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혜장이 소를 먹인다고 하자 마조는 어떻게 먹이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혜장이 "잡초 밭으로 한번 들어가면 얼른 고삐를 잡아당깁니다."라고 하자 마조는 "그대야말로 참으로 소를 잘 먹이는 구나" 46)라고 칭찬했다. 각주46) 《景德傳燈錄》6卷, (大正藏51 p. 248b)

십우도(十牛圖)를 연상시키는 이 선화의 특징은 수행을 목우에 비유한다는 것이다. 목우를 수행에 비유하는 이유는 동물들이 가진 자연성(自然性)에 대한 이해로 보인다. 선은 인위적 조작이나 취사심(取捨心)을 경계하는데 동물들은 인위적 욕망이나 취사심이 없다. 사자는 백수의 제왕이지만 배가 고프지 않는 한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동물들의 자연적 삶은 평상심(平常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 예로 조주종심(趙州從 ;778-897)의 일화가 있다.

한 스님이 조주에게 "무엇이 평상심(平常心)입니까?"라고 묻자 조주는 "늑대나 여우다"47)라고 답한다. 조주에게 늑대나 여우와 같은 야생동물들의 모습은 그대로 평상심의 삶을 살아가는 도의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각주47)《趙州錄》, (卍續藏118, p. 315a)

《마조록》에 따르면 평상심(平常心)이란 인위적 조작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으며, 취사심(取捨心)이 없고, 단상(斷常)과 범성(凡聖)에 대한 차별상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48) 각주48)《馬祖錄》, (《卍續藏》119, p. 812a)

사람들은 늘 밖을 향해 상(相)에 물들고 취사심을 갖지만 동물들은 늘 평등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평상심이란 결국 자연적 질서와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잔다"49) 각주49)《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卍續藏118, p. 211b)

는 임제(臨濟)의 인식을 가장 극명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은 동물들의 야성적 삶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선사들은 동물들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도(道)의 삶을 사는 본래성의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동물들도 그 본성의 마음에 있어서 부처님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인식이 도출된다. 선에 심취했던 당대(唐代)의 문장가 황노직(黃魯直)이 영원유정(靈源惟淸) 선사에게 보낸 시문에서 "흰 암소와 살쾡이도 마음이야 그대로 부처이다[白  奴心卽佛]."50) 라고 했다.각주50)《羅湖野錄》, (합천:장경각, 2536), p. 33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마조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인식은 여기에서 동물에게로 확대된다. 따라서 동물들은 비록 호랑이의 얼굴을 하고 용의 눈동자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객(客)의 모습일 뿐이며, 그 주인은 바로 부처님과 동일한 본성이다.

선사들의 이 같은 인식에서 인간과 동물이라는 위계적 사유는 해체된다. 오히려 동물이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남전(南泉)은 대중을 향해 '삼세의 제불은 모르지만 살쾡이나 암소는 안다'고 설법한다. 51) 각주51)《祖堂集》16卷, (高麗藏45, p. 331c)

이는 '남전백고(南泉白 )'52) 라는 고칙(古則)으로 《종용록》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각주52)《從容錄》下卷, (합천:장경각, 1993), p. 26

부처님도 모르는 것을 동물이 안다는 것은 언어문자로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표면적 의미를 살펴보면 동물들은 그 자연적 삶으로 인해 '부처다', '조사다'라는 분별심(分別心)을 가진 인위성으로 알 수 없는 도(道)의 경지를 살아간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동물에겐 인간과 같은 욕망과 집착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조화롭게 살아가며 그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인 존재들이다. 선사들은 바로 이 같은 삶의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5. 동물의 설법(說法)과 동물의 종교적 지위

1) 법(法)을 이해하는 동물

동물은 단순한 미물이 아니라 인간과 삶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 받아들인 선사들의 인식은 보다 종교적 의미로 확대되어 동물을 통해서 진리를 보고 자연을 발견하기도 한다. 《경덕전등록》에 기록된 가비마라(迦毘摩羅) 존자에 관한 내용은 동물에 대한 교감이 정신적 영역으로 확장됨을 보여 준다. 즉 가비마라 존자가 산으로 수행하러 가는 길에 큰 뱀 한 마리를 만났는데 뱀이 똬리를 틀어 존자의 몸을 칭칭 감았다. 이에 존자가 삼귀의(三歸依)를 일러 주자 다 듣고는 뱀이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53) 각주53)《景德傳燈錄》2卷, (大正藏51, p. 210a)
동물들도 법을 알아들을 줄 아는 중생이며, 참다운 진리의 영역에서 소외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선사가 천태산에서 하루 한 끼의 공양을 하며 《법화경》을 읽는데 일곱 줄을 동시에 읽으면서 60일만에 《법화경》을 모두 암송하자 염소 무리들이 감동하여 무릎을 꿇고 앉아 들었다는 내용도 있다. 54) 각주54)《景德傳燈錄》2卷, (大正藏51, p. 421c)

이 같은 기록들은 상징적 의미를 암시하는 신화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종의 대표적 전등사서를 통해 그 같은 내용들이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설사 신화적 내용일지라도 그것이 선종의 중심적 텍스트로 수용되는 과정을 통해 동물도 참다운 본성(本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유는 성문화(成文化)된다. 그리고 성문화된 텍스트는 시간의 권위가 더해지면서 이후 선수행자들의 정신세계로 응축된다.

이렇게 동물도 인간과 같은 중생이며, 그들도 법을 알아듣는다는 인식은 그들을 위한 설법(說法)도 가능케 한다. 위산선사는 까마귀에게 생반(生飯)을 주다가 "오늘은 까마귀를 위해 상당(上堂)하여 설법하리라."55) 라고 말한다.각주55) 《仰山錄》, (卍續藏119, p. 864a)

염소와 같은 짐승들도 법을 듣고 이해한다는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동물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 이상할리 없다. 여기서 동물과 사람이라는 종의 차별은 무의미 해진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자면 선사들의 인식 속에는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道)를 아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자성(自性)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동물과도 공유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엿보게 한다.

2) 진리를 설하는 동물

선의 전통 속에 나타난 동물은 도를 이해하는데 머물지 않고 도(道)를 설하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청량문익(淸凉文益;885-958)의 문도인 덕소국사(德韶國師;891-972)는 "모든 부처님은 항상 세상에 나와 계시며, 언제나 설법으로 사람들을 구제하신다. 원숭이의 울음과 새소리와 초목과 숲이 모두 그대들의 공부를 도우리니, 잠시도 그대들을 위하지 않는 때가 없다."56)고 설파했다. 각주56) 《景德傳燈錄》25卷, (大正藏51, p. 409c)

제불(諸佛)의 모습은 원숭이의 울음으로, 새소리로, 산천초목의 모습으로 법을 설하며 중생들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어느 날 현사사비(玄沙師備;835-908)가 상당하여 설법할 때 제비새끼 우는 소리를 듣더니 "실상(實相)을 깊이 논하고 법요(法要)를 훌륭하게 설명하는구나."57) 라고 했다. 각주57) 《玄沙錄》, (합천:장경각, 1991), p. 175
현사는 동물도 법을 설한다고 함으로써 동물의 종교적 지위를 인간과 동등하게 간주하고 있다.

이처럼 새와 나무가 설법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경전적 근거에 대해서 《동산록》은 《아미타경》을 근거로 들고 있다.58) 각주58)《洞山錄》, (卍續藏119권, p. 898a)

동산이 어느 날 운암(雲巖)에게 무정설법이 무슨 경전에 근거한 것이냐고 질문하자 운암은 《아미타경》에서 '물과 새와 나무숲이[水鳥樹林]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한다'59)는 구절을 통해 그 근거를 제시한다. 각주59)《洞山錄》, (卍續藏119권, p. 898a)

동산은 무정설법은 중생의 언어나 사량분별(思量分別)의 마음으로는 들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무정설법은 인위적 사유를 초월해야 들을 수 있다. 만약 진리가 언어와 사유의 영역으로 제한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가 그랬던 것처럼 동물들은 진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은 진리란 인위적 사유를 통해 접근해 갈 수 없는 곳에 있다고 함으로써 이성적 사유의 유무가 진리를 깨닫는 척도가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진리를 둘러싸고 있던 이성과 언어적 울타리가 해체됨으로써 동물도 진리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진리는 논리와 이성을 초월해 있으며, 새와 짐승도 그 법을 설한다고 바라봄으로써 모든 존재는 인간과 본체론적 관점에서 동일하다는 가치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동물에게도 인간이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법(法)이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들도 그와 같은 법(法)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전에 나타난 동물관에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물들도 인간과 동등한 종교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다.

6. 윤회전생의 삶과 생명체의 무자성성(無自性性)

불교는 삼계(三界) 육도(六道)의 모든 생명을 평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산하대지(山河大地)에 머무는 모든 존재는 나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불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과 중생이 둘일 수 없고, 고등동물과 하등동물이 다를 수 없다.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이들은 모두 동일법성(同一法性)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황벽선사는 "중생이 곧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그대로 중생이니라. 중생과 부처님이 원래로 한 본체이며, 생사열반과 유위(有爲) 무위(無爲)가 원래 동일한 본체이다. 세간 출세간과 나아가 육도(六道)와 사생(四生), 산하대지와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또한 하나의 본체"60)라며 사생과 육도의 중생이 '원래 하나의 본체[元同一體]'라고 설했다. 각주60)《宛陵錄》, (卍續藏119, p. 841a)

사생이 하나라는 인식은 생물의 종(種)에 따라 서열을 구분 짓고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인간중심적 가치관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생과 육도는 종의 범주를 넘어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육도란 모든 생명들이 업연(業緣)에 따라 윤회(輪廻)하는 세계로, 중생은 일회적 삶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적으로 연속되는 과정을 따라 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천상이라는 공간을 돌고 돈다. 그러므로 윤회사상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축을 중심으로 삶의 공간적 터전이 설정된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상호관계성은 공간적, 생태적 관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존재의 행위와 시간적 경과에 따른 관계성까지 포괄하는 입체적 관계성을 설명하는 것이 윤회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윤회관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지금 눈앞에 현전(現前)해 있지 않는 생명들조차 동일한 생명이라는 통합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처럼 종(種)을 교차하여(cross-species) 윤회한다는 믿음은 불교 윤리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61) 각주61) Damien Keown, 허남결 옮김, 《불교와 생명윤리학(Buddhism & Bioethics)》, (서울:불교시대사, 2000), p. 57

이 같은 인식 속에서는 생물의 종이 차별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종이란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 인연 따라 일시적으로 드러난 모습[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데이비드 킨슬레이도 불교의 윤회관이 지닌 생태학적 의미에 대해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윤회의 과정을 통해 종이라는 경계를 자유롭게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윤회계에 존재하는 모든 유형의 생명들간에 상호연관성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둘째,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자타카(J taka)에서 부처님이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의식을 가지고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사상을 통해 인간 이외의 종을 도덕적 존재로 강조하는 것은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에 놓여 있는 절대적 구분을 약화시켜 준다고 풀이한다. 62) 각주62) David Kinsley, 원병관 옮김,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에 나타난 불교생태학], (《불교평론》15호, 2003년 여름), p. 146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는 육도를 윤회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의 모습은 특정한 모습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성(空性)이며 무자성성(無自性性)이다. 모든 생명체는 업(業)에 따라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며, 동물로 태어나기도 하며, 천상에 태어나기도 한다. 어느 한 생명도 영원한 동물로, 영원한 인간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업에 따라 자신의 몸을 받고 그 업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는 것이 생명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입능가경》에서도 중생은 육도를 윤회하며, 인간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인간이 되는 상호 역전(逆轉)의 가역성(可逆性)을 설하고 있다. 이렇게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이 통합되고, 지상과 천상이라는 모든 공간은 생명이 살아가는 하나의 시공으로 통합된다. 선의 생명관은 이렇게 다양한 생명의 공간과 생명의 종류가 결국은 무상(無常)하고 공(空)이기 때문에 동일법성(同一法性)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중심적 가치관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논하고 종의 차이에 따라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중심적 사유이자 부당한 단견이 아닐 수 없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인간만이 사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 있으며 다른 생명체에게는 그런 영혼이 없다고 보았다. 특히 기독교는 지상에 사는 모든 존재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육신의 죽음 이후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63) 각주63) Piter Singer, 같은 책, p. 324

이 같은 생각은 아퀴나스나 데카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동물은 감각적 영혼만이 존재하며 이는 육체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사후의 세계가 없다고 주장한다.64) 각주64) 로저 트리거, 같은 책, p. 95
데카르트 역시 인간의 의식을 불멸의 영혼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이러한 영혼은 물리적 육신이 분해되어도 사멸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65) 각주65) Piter Singer, 같은 책, p. 339

전통적 형이상학의 이 같은 주장은 동물들로부터 사후 세계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배타적 특출함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어왔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성의 고리를 단절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신과의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인 관계로 대체되고 말았다. 따라서 인간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들의 가치는 부정되었으며, 반면 신과 인간에 대한 권리는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동물들로부터 사후 세계를 박탈했음으로 그들의 삶은 일회성으로 끝나고 만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아무리 가혹한 폭력이 가해지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인간에게 되갚을 기회가 없다. 결국 인간은 동물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것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느낄 필요도 없다. 바로 이 같은 사유 속에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잔혹한 폭력성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 66) 각주66) 인간과 동물이 동일한 과정으로 윤회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전통적 동양사회에서는 가능하면 동물에 대한 살생을 피해왔다. 내가 죽인 동물과 나는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초기불교에서 불살생계가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이유는 동물들도 저 세상에서 자신의 살해자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슈미트하우젠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67) 각주67) Paul Waldau, 박서연 옮김, [동물에게도 공민권이 있다], (《불교평론》2002년 봄호), p. 171

불교의 윤회관은 동물에게도 인간과 동일한 사후 세계를 부여함으로써 각 개체는 업에 따라 상호 전환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는 동물과 인간이 나고 죽는 길이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 같은 가치관 속에서 동물은 때로는 전생의 부모로 인식되기도 하며, 반대로 인간은 전생의 동물로 그려지기도 했다.68) 각주68) 鳩摩羅什이 번역한 《佛說父母恩重難報經》에 따르면 어느 날 부처님께서 대중과 더불어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 있는 한 무더기 뼈를 보고 五體投地를 하셨다. 이에 아난이 三界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부처님께서 어째서 뼈 무더기를 향해 절을 하시는지 묻자 부처님께서는 그 뼈는 전생의 조상이었거나 多生의 부모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같은 윤회관은 서로 다른 생명들을 존중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삶의 양식들을 만들어왔다. 생태계 파괴의 절박한 위기에 직면한 인류에게 이 같은 형이상학적 가치관의 복원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 근거한다.

7. 맺음말

패트릭 코베트(Patrick Corbett)는 인간의 동물학대를 고발한 《동물, 인간, 그리고 도덕》69)이란 책에서 "동물들의 삶에 대해서도 자유, 평등, 동료애 같은 고귀한 원칙들을 확장해야만 한다. 각주69)S. and Godlovitch, and J. Harris (eds.), Animals, Men and Morals: An Inquiry into the Maltreatment of Non-humans, N.Y. Grove Press

동물 노예제도는 인간 노예제도가 묻혀 있는 과거의 묘지에 함께 파묻어야 한다."70) 고 주장했다. 각주70) 송명규, 《현대 생태사상의 이해》, (서울: 님, 2004), p. 36

그런데 선전(禪典)을 살펴보면 선사들은 동물들을 삶의 반려로 받아들였으며, 그들도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고, 부처님과 똑 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보았다. 이는 선사들의 인식 속에서 동물은 인간과 평등한 도덕적 지위와 종교적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경제적 활용의 대상이거나 또는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존재로 치부해 왔다. 때문에 동물들은 인간에게 경제적으로 유용할 때에만 제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의 권리와 번성할 기회는 잔인하게 배제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동물들의 희생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관행의 근저에는 인간은 동물과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종차별주의적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선사들은 이 같은 차별성을 부정하고 동물과 인간의 평등을 주장한다. 본고를 통해 살펴본 선사들의 동물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사들은 동물을 삶의 반려(伴侶)이자 수행의 도반(道伴)으로 인식했다. 동물은 경제적 활용의 대상이라는 도구적 가치관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존엄성과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했다. 따라서 그들의 도덕적 지위와 생존을 위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가 가능해진다.

둘째, 선전(禪典)에서 그려지는 동물의 모습은 선사들의 수행을 돕고 외호(外護)하는 존재이다. 이는 동물에 대한 정서적 유대와 동물의 존엄성에 대한 감성을 풍부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종차별주의적 가치관의 핵심은 인간이 더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을 도울 수는 있어도 동물이 인간을 돕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에서는 사람이 동물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모습을 자연스러운 일로 기술한다. 여기서 동물은 인간과 동등한 존엄성을 부여받는다.

셋째, 선전에서는 동물도 법(法)을 알아들으며, 법을 설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논리적 범주를 뛰어넘은 선문답이 갖는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법이란 인간일지라도 근기(根機)가 낮으면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을 동물들이 이해한다고 기술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선사들이 보는 도란 지성적 이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적 본래성(本來性), 연기적(緣起的) 관계성의 삶, 자연과 어우러진 평상심(平常心)의 삶이 곧 도라고 보기 때문에 동물들도 그런 진리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이처럼 진리를 동물들과 함께 공유한다는 점에서 동물에 대한 선의 인식은 어떤 철학사상도 넘볼 수 없는 윤리적 포용성과 위대성을 보여 준다.

넷째, 선사들은 동물도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도 부처님의 마음과 같다고 인식한다. 동물이 위대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에게도 인간과 동일한 본성(本性)과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생태철학에서는 모든 존재는 내재적 가치를 지녔다고 바라본다. 선사들에게서 그 내재적 가치란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로 표현된다. 이로써 동물도 인간과 다르지 않은 존엄성을 인정받는다. 이 같은 선의 인식 속에서 동물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던 불평등한 차별적 근거는 소멸된다.

다섯째, 모든 중생은 육도를 윤회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레오폴드가 말하는 '여행의 동반자'라는 개념은 불교적 사유에서는 '윤회의 동반자'가 되는 셈이다. 육도는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머무르는 공간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범주다. 생태철학에서도 인간과 동물 또는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상호간의 평등을 논하지만 그것은 과학적으로 관찰 가능하고 이성적으로 수용 가능한 영역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은 육도의 중생을 모두 동일법성(同一法性)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불교적 생명관은 이성적 범주를 뛰어넘어 직관적이며 철학적인 성격을 띠는데, 이 같은 종교적 사유는 생물평등주의적 가치관을 강화하는 기반이 됨은 물론이다.

동물에 대한 이상과 같은 인식은 동물을 존중하고 인간과 같이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윤리적 근거가 된다. 동물을 대하는 선사들의 태도는 레오폴드가 주장하는 윤리의 확장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확장된 윤리를 선사들은 이미 오래 전에 구체적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선사들은 동물을 벗삼아 자연 속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들에게 동물은 공존의 대상이었으며, 법담(法談)을 나누는 도반이었으며, 진리를 알아듣는 선지식으로 인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 동물이 인간들을 향해 설법하는 종교적 능동성까지 보여준다. 이 같은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선사들의 인식 속에서 동물들은 인간과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누려왔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선사들이 보여 준 동물들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다른 생명에 대한 정서적 존중감을 확립해 주는 정신적 자원이 아닐 수 없다.

서재영
동국대 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이며,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이다. 논문으로 <선의 생태철학 연구><선의 불성관과 생명의 내재적 가치><조선불교유신론의 소회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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