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결 동국대 교수

1. 시작하는 말

불교적 전통 안에서 ‘성(sexuality)’과 관련된 논의는 아직도 ‘안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까칠한(?)’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불교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성적 청정성을 수행생활의 최고 덕목으로 간주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가 무엇보다도 삿된 욕망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을 종교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사정이 이럴진대, 불교교단 안에서 이론적인 측면에서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이를 직접 거론하는 것은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대외적 이미지나 근본적 성격을 훼손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위험성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윤리적 청정의지가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자연적 욕망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불교적 관점에서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1)

이는 말을 바꾸면 불교가 역사적으로 발전, 전개되는 동안, 그리고 오늘날에도 불교 교단 주변에는 크고 작은 스캔들(?)이 항상 일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2) 역사적 시기나 지역에 따라 수용 정도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었을지 모르나 ‘동성애(homosexuality)’의 문제도 별로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본다. 이 논문은 그와 같은 불교의 동성애에 관한 인식을 역사적 사례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 어떤 종파의 견해가 아닌, 보편적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한 불교의 입장표명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아시아의 종교전통들과 동성애의 연관성에 대한 학문적 논의들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었지만, 특히 불교와 동성애 관련 논의들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일부 서구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불교와 동성애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은 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3) 이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세계 종교전통들과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동성애에 대한 나름대로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불교전통 안에서도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많은 다양성이 존재했던 만큼 동성애에 관한 태도도 서로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일본불교가 대체로 동성애의 관습에 대해 관대했거나 심지어 권장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면 인도불교의 경우에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와 동성애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단정 짓기에 앞서 반드시 해당 불교가 어떤 시기의 어느 지역 불교였는가를 밝혀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단서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역사에서 동성애를 대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말해 ‘중립적(neutral)’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이성애(heterosexuality)와 동성애(homosexuality)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sexuality) 자체와 독신수행(celibacy) 중 어떤 것을 삶의 목표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일 불교교단 안에서 동성애가 비난을 받았다면 그것은 동성과 성행위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계율로 금지된 성행위 일반을 즐겼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즉, 불교는 깨달음의 달성에 장애가 되는 그릇된 욕망의 대표적 상징인 성행위(동성애도 포함됨)를 금기시했지 특정한 신체 부위를 사용하는 동성애 행위만을 별도로 거론한 적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동성애에 대한 기본 입장을 중립적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불교가 일어나고 번성했던 문화권이 항상 동성애를 가치중립적으로만 받아들였다고 볼 수는 없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이런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 불교문화권 내의 동성애 사례와 불교교단의 대응 태도

불교경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붓다 자신이 동성애적 행위에 직접 관심을 표시하거나 그것의 도덕적 의미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린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승단 법의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동성애와 관련된 언급들은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율장에서는 이성애나 동성애를 막론하고 어떠한 종류의 성행위도 금지하고 있으며, 이 규범을 어긴 승가 구성원에게는 예외 없이 교단 추방이라는 가장 가혹한 처벌, 즉 바라이죄를 물었다.

인도불교에서 동성애자 문제가 특히 교단의 입회 자격과 관련하여 초미의 관심사가 된 적이 있다. 여기서 이른바 판다카(pan.d.aka)로 분류된 사람들은 비구계 또는 비구니계를 수지할 수 없었다. 이들이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늘날의 의학 상식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체로 양성의 생식기를 동시에 지니고 태어났거나 통상적 의미의 동성애자 또는 복장성도착자(transvestite) 증세를 보였던 사람들이 아닌가라는 추정을 해 본다.4) 교단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출가자의 신분을 얻고 나서도 과거와 같은 행동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는 곧 일반 대중들의 승가에 대한 도덕적 평판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처럼 외형적으로 구분이 가능한 사람들과 달리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자신의 동성애적 성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금지조항을 찾아볼 수 없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도불교에서 판다카의 출가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곧 당시의 불교교단이 동성애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다룬 《자타카(Jataka)》에서는 붓다와 아난다의 동성애적 만남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등 동성애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적어도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불교와 동성애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동성애 문제에 관해 긍정이나 부정과 같은 섣부른 결론 도출은 삼가해야 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 인도불교의 경우

동성애에 대한 인도불교의 기본입장은 소위 판다카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대하던 방식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pan.d.aka’라는 단어는 그 어원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apa+an.d.a+ka’, 즉 “고환이 없는(사람)”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5)

그러나 츠빌링(Leonard Zwilling)에 따르면 이 말은 글자 그대로 거세된 남성을 뜻하는 ‘eunuch(내시)’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eunuch’란 용어는 무슬림 시대 이전의 인도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다카 및 이와 유사한 개념들은 오히려 “고환이 없는(?)” 사람처럼 허약하거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어법의 단어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6) 유명한 주석가인 붓다고사(Buddhaghosa)에 의하면 판다카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대별될 수 있다고 한다.

① 물을 ‘뿜은’ 사람(칊sitta-pan.d.aka): 다른 사람의 성기를 입으로 빨아 사정에 이르게 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자

②‘질투하는’ 사람(us칤ya-pan.d.aka): 다른 사람들이 성행위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질투심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자, 즉 관음증 환자

③‘수단을 사용하는’ 사람(opakkamika-pan.d.aka): 어떤 특별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정액이 분출되도록 하는 자

④‘2주 동안만’ 다른 사람(pakkha-pan.d.aka): 과거의 업 때문에 음력 한 달 가운데 2주 동안만 판다카가 되는 사람, 즉 다른 2주 동안은 자신의 욕망을 정상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자

⑤‘남성이 아닌’ 사람(napum.saka-pan.d.aka): 임신 순간부터 남성성이 결여된 자7) 등이 곧 그들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붓다고사와 아상가(Asa ?ga)의 공통된 입장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또 다른 주석가인 야소미트라(Ya큦omitra)의 판다카 분류는 위의 두 사람과 거의 대동소이하나 ‘opakkamika-pan.d.aka’대신 거세된 자(the castrate)를 뜻하는 ‘l칤.na-pan.d.aka’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아무튼 판다카는 다양한 종류의 성기능 장애와 변형을 가진 사람들로,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양성애자나 선천적인 양성기 보유자 또는 동성애자들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교단은 왜 이들의 정식 출가수행을 막았던 것일까? 그 계기가 된 사건을 《마하바가(Mah칊vagga)》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때 어떤 판다카가 출가하여 승려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는 많은 젊은 승려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리 와 보시오. 존경하는 스님들, 제발 나를 더럽혀 주시오.” 그 승려들은 그를 비난하면서 말했다. “저리 꺼져, 판다카야! 우리가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젊은 승려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판다카는 키가 크고, 건장한 행자승들에게 다가갔다. “이리 와 보시오. 존경하는 스님들, 제발 나를 더럽혀 주시오.” 그 스님들은 그를 비난했다. “저리 꺼져, 판다카야! 우리가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행자승들에게 비난을 들은 그는 코끼리 사육사들과 마부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리 와 보시오. 어르신들, 제발 나를 더럽혀 주시오.” 코끼리 사육사들과 마부들은 그를 더럽혀 주었다.

그들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은둔자들, 붓다의 추종자들은 판다카들이며 판다카가 아닌 사람들은 판다카들을 더럽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수행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승려들은 코끼리 사육사들과 마부들이 불평을 늘어놓으며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들의 스승인 석가세존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세존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승려들이여! 만일 어떤 판다카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그를 출가하지 못하게 하시오. 만일 그가 이미 출가를 했다면 그를 교단으로부터 추방하시오.”라고.8)

무엇보다도 붓다는 판다카들이 같은 승가 구성원들과 동성애나 유사 성행위를 벌임으로써 기존의 교단 질서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9) 이는 넓은 의미에서 수행에 결정적 방해가 되는 성행위 일반을 금지하는 조치였을 뿐만 아니라 승가의 화합과 존속을 위한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대중들로부터 얻은 청정 교단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면서 일반신자들의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불교교단의 최고경영자로서 붓다가 때때로 일반사회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현실주의적인 면모를 보인 적도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10)

다른 한편, 《자타카》에서는 전생의 붓다가 아난다와 동성애적 감정을 주고받았음을 시사하는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있어 고대 인도인들의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반드시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나야(Vinaya)》에서는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성행위를 수행의 가장 큰 방해 요소로 인식하고 이를 금지시키고 있지만, 붓다와 그의 동료들의 전생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는 《자타카》는 동성애적 감정들로 넘쳐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니카야(Nik칊ya)》에서도 남성의 동성애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처럼 《니카야》가 동성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초기불교가 암묵적으로 동성애를 긍정하거나 묵인한 것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도 있다. 물론 침묵을 단서로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시도는 언제나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존즈(John Garret Jones)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종류의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두 사람 모두) 교단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왜냐하면 두 당사자는 똑같이 교단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거나 이로 인해 생기는 아이에 대한 양육 책임을 떠맡게 될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교단에 합류할 때 이미 벗어났었다. 정반대로 두 사람은 동일한 가르침과 동일한 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적인 유대감 속에서 서로 친밀감을 유지할 가능성이 컸으며, 이는 각자가 보다 더 중요한 목적들이라고 간주했던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11)

《니카야》가 동성애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비유할 수 있다면, 《자타카》는 이를 웅변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우리는 전생의 붓다가 제자이자 수행비서인 아난다(A칗anda)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동성애적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신체적 접촉을 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된다. 예컨대, “언제나 함께 산책하고… 사색하고 몸을 비비고 있었으며,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코와 코를 맞대며 뿔과 뿔을 맞대고 매우 행복해 하던”12) 두 마리의 사슴으로 묘사되고 있는 설화가 그것이다. 또 다른 설화에서는 두 사람이 브라만계급의 부모를 둔 젊고 잘생긴 아들들로 등장하는데, 함께 있기 위해 부모의 뜻을 어기고 결혼하기를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설화에서는 인간의 몸으로 변신한 어느 사악한 뱀 왕이 아난다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왕은 “이 금욕 수행자를 칭칭 휘어 감고 자신의 왕관을 아난다의 이마 위에 내려놓은 채 애정이 충족될 때까지 얼마 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13)고 한다. 이에 대해 존즈는 “《자타카》에 나오는 우정에 관한 언급들로 미루어 볼 때 동성애적 감정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성애적 관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은 수없이 듣고 있었음을 상기시켜 본다면… 동성애적 관계의 위험성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14)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자타카》에 나오는 전생의 붓다와 아난다의 설화가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동성애적 행위인가라는 점은 다시 한 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한다면 함께 고행의 길을 걷고 있는 동성 수행자에 대해 따뜻하게 보살펴 주고 싶은 동성애호적 감정(homoerotic emotion) 정도가 아닐까?15) 왜냐하면 《자타카》에 나오는 설화들에서는 두 사람의 동성애적 감정을 유추할 수 있는 에피소드는 많아도 동성애적 행위를 직접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행자의 생활과 양립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인간적 교제였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16) 이와 유사한 동성애의 역사적 사례들은 불교의 전파경로를 따라 아시아의 각 지역 승려들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2) 티베트 불교의 경우

티베트에서 발견되는 동성애의 관습은 전적으로 다돕(lDab ldobs)이라고 불리던 울력승들(working monks)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행해지던 비밀스러운 성행위였다. 이에 반해 출가 승려들이나 재가 신자들은 대체로 동성애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17)

다돕은 규모가 큰 사원에서 육체노동을 하거나 지역 내의 각종 운동경기에도 참가하면서 일종의 경찰처럼 활동하던 비정규직 승려들이었다. 골드스타인(Melvyn Goldstein)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들은 엄격한 규율을 준수해야 하는 사찰생활에는 어울리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환속을 할 경우, 승려로 있을 때보다 사회적 신망이나 경제적 안정을 누리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사람들로 성격 규정될 수 있다.18)

그들은 잠재적인 사회부적응자들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보다 엄격한 규율의 지배를 받는 정식 승가 구성원이 되기에 앞서―사찰에서는 이들을 절 주변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일종의 사회교육 효과를 거두는 측면도 있었다. 규모가 제법 큰 사원에서는 다돕의 비율이 전체 구성원의 10%에 이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어쨌든 그들은 사원의 하루 일과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 필요한 갖가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다돕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우리가 바깥에 서있는 벽이라면, 다른 승려들은 안에 들어 있는 보물이다.”19)라고 말했다.

골드스타인의 말을 빌리면 다돕들은 성적인 목적달성을 위해 어린 소년을 유혹하거나 심지어 납치를 하면서까지 동성애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동성인 남성을 유혹하기도 했다고 한다.20) 그러나 다돕들은 사원의 규범이 어떤 형태로서든 삽입성교를 할 경우 교단 추방이라는 바라이죄로 간주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교묘한 방법을 동원했다.

즉, 그들은 계율을 본래의 취지보다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상대방의 입이나 항문 또는 질에 직접 삽입하는 대신, 등 뒤에서 상대방의 다리 사이로 성기를 삽입함으로써 성적 자극을 얻는 성교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다돕들의 동성애 파트너가 된 젊은 승려나 어린 재가 신자들은 동성애의 상대자가 되었다는 치욕감을 감추기 위해 이런 사실을 비밀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카비존은 골드스타인의 연구결과가 단지 다섯 사람의 정보 제공자에게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신뢰성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특히 어린 소년들을 납치했다는 것은 당시의 가족 중심적 티베트 사회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다돕 승려들 사이에서 동성애의 관습이 존재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다돕들이 동성애자였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는 대부분의 다돕들이 사원의 법규나 구성원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21)

다돕들은 동성애를 나눈 상대방이 요구하는 대가를 둘러싸고 종종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사찰 당국자들에게 불려가 처벌을 받기도 했다. 처벌 이유는 승려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언성을 높여 싸웠다는 것과 넓은 의미의 성적 위반, 즉 동성애 행위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와 같은 종류의 과오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재가 신자들이나 출가 승려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거나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시 말해 티베트 사회는 다돕들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산이나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그들의 도덕성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동성애 행위로 인해 그들은 종종 개인적으로 행실이 나쁜 승려들로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종교적 경건함을 앞세워 자신의 비행을 숨기는 위선적인 사람들처럼, 가장 사악한 부류의 사람들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다돕들은 적어도 정직의 미덕은 가지고 있었으며, 옛날부터 정직함을 칭송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던 티베트인들에게 다돕들은 나름대로의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22) 요약하면 티베트 불교는 다돕들의 동성애 행위를 종교적으로 단죄하려고 한 측면보다는 그들의 또 다른 장점들을 교단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고려한 측면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3) 중국불교의 경우

인도불교와 마찬가지로 중국불교에서도 동성애에 관한 한 전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중국불교의 태도나 동성애 관습의 존재유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연구저작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크롬프톤(Louis Crompton)의 지적대로 중국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일차적으로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이며 종교적이거나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미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일화적인 것”23)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중국불교의 태도를 살펴보는 데 바탕이 될 경전적인 자료나 그 외의 자료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최소한 유교와 도교가 한결같이 동성 간의 성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과 특히 한대(기원전 206~220년 경)에는 황제들이 중국사회의 다양한 계층들로부터 선발된 남성 애인을 두는 것을 규범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 중립적인 것이라면―고대 중국에서 대체로 동성애를 문화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우리는 이와 동일한 태도가 중국불교에도 적용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따라서 자신들과 같은 성을 가진 승가 구성원들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그들의 성적 선호와 양립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적 가능성으로서 주저 없이 출가생활을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성적 선호가 사찰 내에서 육체적으로도 표현되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웰치(Holmes Welch)는 자신의 고전적 저서인 《The Practice of Chinese Buddhism: 1900~1950》에서 “중국의 불교승려들은 유럽의 승려들보다 훨씬 더 쉽게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24)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전의 불교승려이자 자신의 정보 제공자이기도 했던 중국인이 동성애 행위라고 말한 사례도 알고 보니 기껏해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즉 나이 많은 승려와 젊은 승려 사이의 순수한 애정 정도로 밝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불교 교단 안에서 동성애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웰치에 따르면 자신이 연구하는 동안 만난 중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성애적 유혹을 ‘저급한 취향(low taste)’이라고 여겼으며 이 또한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이와 같은 적대적인 태도는 중국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인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는 동성애에 대해 혐오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25)

하지만 우리는 근대 이전의 중국불교에서는 동성애의 관습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간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인 쿠카이(空海, 774~835)가 중국에서 동성애의 관습을 수입해 와 일본에 소개했다는 역사적 기록이다. 이러한 전설이 얼마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동성애의 관습을 일본에 들여 온 것을 쿠카이의 많은 업적들 중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는 점과 그 후 쿠카이가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전적으로 거짓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즉, 쿠카이가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동성애의 관습을 목격했거나 몸소 실행해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교는 가족과 사회적 의무를 저버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성애를 비난하지 않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명대(1368~1644)에는 남성 동성애자들이 함께 사는 것을 허용한 가족들도 있었다. 또한 사랑을 갈구하던 여성들 간의 동성애는 간통보다는 오히려 나은 것으로 여겨졌다. 17세기 무렵 중국에 상륙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동성애적 행위에 대해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않는 중국인들을 보고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당시 중국에서 동성애 관계는 남자 배우들 사이나 귀족들의 규방 또는 첩들 사이에서, 그리고 매음굴에서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명대의 문학 속에는 일부 비구니들이 레즈비언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레즈비언의 고전’에는 내생에 지아비와 아내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두 여장부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결혼식’ 증인으로 붓다를 내세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전한다. 19세기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독립적이었던 비단 직조공들의 친목모임인 금란회(金蘭會)가 경우에 따라 레즈비언 부부를 받아들이기도 했다.26) 이후 20세기 초중반의 사정에 대해서는 위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바가 있다.

동성애에 대한 중국불교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사례는 미국에서 활발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선화(宣化) 선사의 말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동성애는 … 저급한 중생계로 다시 태어날 씨앗을 심는 일이다.”27) 물론 이런 견해에 대해 현대의 많은 동성애 운동가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28)

4) 일본불교의 경우

전통불교가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는 대체로 중립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일본불교의 경우에는 예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불교에서 동성애는 남성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성적 쾌락이자 비밀스럽고 신비한 관습이라는 이유로 찬양되거나 장려되고 있었다. 우리는 14세기부터 남성 간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수많은 문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동성애의 전형은 나이 많은 승려가 젊은 행자승을 애인으로 삼는 것이었다.

14세기 문헌인 《치아관음연기(稚兒觀音緣起)》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승려에게 젊고 아름다운 행자승(치아)의 형상을 한 애인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15세기의 한시와 3개의 후대 문헌들 속에는 9세기 일본 진언밀교의 개창자인 쿠카이가 남성 간의 동성애 관습을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소개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15세기부터 진언밀교의 여러 외전들은 이성간의 성행위를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로 찬양해 마지않았으며 방금 언급한 문헌들은 동성애의 관습을 승려들의 정당한 행위라고 말했다.

 1598년의 《홍법대사서(弘法大師書)》에서는 쿠카이의 환영이 나타나 승려들과 행자승들의 성교 방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독신수행의 승가 이념이 결혼을 한 승려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해당하는 1667년 한 학자가 동성애 시집인 《돌 진달래》를 지었는데, 내용의 대부분은 어떤 승려가 행자승인 자신의 애인에게 바치는 외설스러운 연가로 구성되어 있다.29) 또한 1687년의 《남색어경(男色御鏡)》에 따르면 쿠카이는 사찰 밖에서는 남성 동성애, 즉 남색을 가르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무사들과 상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와 같은 남성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여러 종파들의 승려들은 비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승려들이 자신의 행자승이나 소년 남창들과 더불어 동성애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색어경》은 임제종의 선사들이 단체로 매음굴을 방문함으로써 남창들의 몸값만 부풀려 놓았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쯤에서 중국과 일본의 동성애 관습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불교학자 포르(Bernard Faure)의 입장을 들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저자들은 남성 간의 동성애가 일본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수용되었으며 또한 일본 사찰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특히 도쿠카와의 통치 아래 강화되었던 조치인, 사찰 내에 여자들이 거주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조항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히라주쿠에 따르면 그것의 계율 위반적 성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었고, 마침내 남색은 승려들의 특권처럼 간주되었다.”30)고 논평한다.

그러나 일본불교 교단에서 이와 같은 남성 간의 동성애가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성기의 삽입을 통한 성적 음란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율장의 근본 취지는 원칙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의 동성애 승려들은 교단 추방이라는 바라이죄에 저촉될 가능성이 큰 위험한 관습이었던 것이다.31) 흥미롭게도 《치아관음연기》, 《홍법대사서》, 《돌 진달래》, 《남색어경》 등과 같은 동성애 관련 저술들은 나이 든 승려들이 자신의 동성애 파트너인 치아의 역할과 기능을 종교적으로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가령, 치아는 자신의 애인이 종교적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헌신의 표본이자 천상의 인물 또는 보살의 화신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이다.

3. 나가는 말; 지역 불교의 동성애 관습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불교교단 안에서 일어났던 동성애의 관습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일반적 개념 속에 포함된 몇 가지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다소 진부하기는 하지만 동성애는 크게 ‘동성애적 욕구(homosexual desire)’와 ‘동성애적 행위(homosexual act)’, 그리고 ‘자신을 동성애적 지향성을 가진 사람과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태도(a conscious self-identification as a person of homosexual orientation)’ 등으로 세분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예를 들면, 동성애적 욕구는 종종 성행위 속에서는 결코 해소되지 않으며(때때로 ‘부모 자식 간의 감정’으로 남음), 많은 문화들 속에서 동성애적 행위는 그 행위자의 ‘(성적) 지향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함축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 동성애적 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화들 속에서 자기 동일시를 위한 ‘동성애적 지향성’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심지어 그와 같은 개념이 작동하고 있는 문화들 속에서도 어떤 남성이 동성애적 항문 섹스에서 (‘삽입자’로서) 능동적 역할을 했다면, 이는 규범적인 이성애 남성으로서의 그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결코 손상시키지 않았다고 한다.32)

츠빌링에 따르면 고대 인도불교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당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판다카들 가운데는 레즈비언들과 남성 동성애자들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의식하지 못한 넓은 의미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불과했던 셈이다.33)

그 결과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판다카들은 동성애 행위에서도 대부분 삽입되는 역할, 즉 수동자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능동적 역할을 하는 삽입자들에게도 마땅히 돌아가야 할 도덕적 비난을 혼자서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오히려 판다카들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난잡한 유형의 중성 인간들로 낙인찍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발달한 ‘동성애’ 개념을 불교의 동성애 관습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를 빌려 쓰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둔다.

위의 기준에 따르면 불교의 동성애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는 것은 곧 동성애적 성행위를 통해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는, 동성애호적 감정에 바탕을 둔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작업일지도 모른다. 불교교단이 승가 구성원들 사이의 형제애를 권장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가운데에는 때때로 형제애의 범위를 넘어서는 감정, 즉 동성애에 가까운 친밀감을 나눈 동성 사이도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앞에서 전제한 대로 만일 전통 불교가 동성애의 문제를 본질상 중립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면, 이는 ‘동성애적 행위(homosexual activity)’와 ‘동성애호적 감정(homoerotic feelings)’을 굳이 비판적인 입장에서 따로 분리하지 않았던 불교의 전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34) 우리의 지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교경전들은 이러한 동성애적 감정들을 비난하기는커녕 용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고무하고 있는 사례들을 수없이 보여준다.

동성애가 비난을 받는 경우에도 그것은 이러한 감정이나 행위들이 ‘동성애적(homosexual)’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이나 행위가 ‘성적(sexual)’이기 때문이었다. 불교적 가르침에서 성적인 행위는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을 방해하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기서도 츠빌링의 견해는 우리의 결론 도출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불교의 전통은 본질적으로 성적 비행을 다양한 유형의 금지된 여성들(agamy칊)과의 성관계 및 생식과 무관한 성행위의 실행이라는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다.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붓다고사와 《아비다르마사뭇차야(Abhidharmasamucaya)》의 주석서를 쓴 익명의 저자 단 두 사람만이 금지된 성적 대상들에 남성을 포함시키고 있을 뿐이다.35)

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전통 안에서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은 역으로 보면 동성애와 관련된 계율 위반 사례가 실제로도 드물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불교교단의 역사에서 여성인 비구니들의 동성애 행위에 대한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제법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카비존과 포르의 연구에서도 비구니들의 동성애, 즉 레즈비언 사례는 아주 드물게 인용되는 데 그치고 있다.36) 그만큼 은밀했거나 아니면 현실적으로 비구니들의 동성애 행위는 일어나기 어려웠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불교교단의 차원에서 동성애를 금지한 가장 큰 이유는 동성애 행위 그 자체의 비종교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교단의 화합과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는 풍기문란사범이기 때문이었다는 포르의 분석도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37)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및 문헌적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잠정적 결론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근본불교의 입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성적 정체성이나 지향성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넘어감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어떤 불교인들은 동성애를 전생의 성이 현생에서 다시 주장되는 결과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초기경전에는 동일한 생애 동안 성적 구별이 뒤바뀐 사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업으로 인해 남자가 여자로 되거나 반대로 여자가 남자가 된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적 정체성의 변화가 곧 정신적 향상, 즉 깨달음의 장애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성적 지향성이나 심지어 성 자체조차도 어느 정도 가변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그것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문제되거나 수행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38)

동성애에 대한 일반인들의 거부감과는 별도로 카비존은 깨달음과 동성애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불교적 깨달음을 얻는데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있을 수 없듯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사이에서도 그와 같은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모든 차별상의 본질을 공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39)

달라이라마가 인정한 바 있듯이, 불교가 특정한 종교의 범주를 넘어 현대사회의 정신적 가르침으로 거듭날 수 있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성(동성애 포함)’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불교의 관점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불교적 전통은 다른 종교들에 비해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주로 불교가 일반인들에게 독신생활을 전제한 출가수행자의 길을 걷도록 권유하는 한편, 초기경전들이 ‘마을의 습관’이라고 불렀던 남녀 간의 성행위를 거부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40)

그 결과 다른 사회윤리적인 쟁점들과 마찬가지로 성윤리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에는 아직도 애매모호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고 따라서 주의 깊게 접근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은 것이다. 불교가 일어나고 전파되는 시기에는 출가수행이 어렵지 않았을지 모르나 기본적으로 개인의 쾌락주의적 행복의 추구가 삶의 목표인 현대사회에서는 성적 정체성과 이에 따른 성적 취향, 즉 동성애도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허남결 / 동국대학교 대학원 윤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영국 더럼대학 철학과 객원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이자 본지 편집위원. 《존 스튜어트 밀-생애와 사상》 《공리주의 윤리문화연구》 《불교와 생명윤리학》 등 다수의 역서 및 논·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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