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대각사상 연구원 연구부장

1. 서언

1927년 2월 5∼14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는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대회에는 ‘조선대표’가 참가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자주독립의 타당성을 의연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대회의 개요뿐만 아니라 그 대회에 한국 대표가 참가한 배경과 대표로 참여한 인물에 대한 이해는 매우 미흡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그 대회의 개요를 살피면서 당시 그 대회의 조선 대표로 참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김법린(金法麟)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범어사 승려 출신으로 중앙학림을 졸업한 김법린은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3·1운동 직후 김법린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의 일선에 있었으나, 뜻한 바 있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뒤 1928년 귀국한 이후에는 불교청년운동과 불교 교단의 정상화를 위해 진력하였다.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원으로 활약하였음은 그 실례이다. 김법린은 8·15 해방 이후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문교부장관, 동국대 총장 등을 역임한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필자는 최근 근·현대 불교사를 연구하면서 김법린의 행적을 주목해오던 차, 그가 그 대회에 참가한 대표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당시 조선대표가 그 대회에 배포한 문건인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를 입수할 수 있었다.

필자가 그에 관련된 제반 개요 및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파악한 것이 많지는 않지만 우선 현재까지 파악한 그 대회의 제반 내용을 정리하고, 〈한국의 문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는 그 대회에 관한 개요를 이해함과 동시에 일제하 불교계 민족운동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진한 내용의 보완은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2. 김법린의 참가 배경

김법린은 어떤한 배경에서 그 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였을까? 이 전후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회에 참가하기 이전 그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

김법린은 1899년 8월 23일 경북 영천군 신령면 치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 인근의 은해사(銀海寺)로 출가하였다. 이후 범어사 명정학교의 보습과 및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수학하였고,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그의 출신을 범어사로 전적(轉籍)하였다.

그후 서울의 휘문고보에 진학하였지만 졸업하기 1년 전인 1918년에는 불교 중앙학림에 편입하였다. 역사적인 3·1운동이 발발하였을 때, 김법린은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라는 한용운의 지시를 받고 3·1만세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3·1운동 거사 전날 밤 10시, 지시를 받은 김법린은 중앙학림의 동료들과 함께 인사동의 범어사 포교당에서 긴급 회의를 갖고 대책을 숙의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그 결과 김법린은 김상헌과 함께 범어사의 만세운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3월 1일 김법린은 독립선언서를 서울 시내에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서 낭독식에 참가하는 등 서울시내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후 3월 5일 그는 경부선 열차를 이용하여 부산 범어사로 내려왔다. 범어사에 도착한 김법린은 범어사의 원로 승려인 오성월·이담해·김경산 등을 면담하고 서울의 만세운동을 알렸다.

그리고 범어사 중견 승려인 유석규, 김상호와 범어사에서의 만세운동 추진을 상의하였다. 그 요지는 범어사 강원, 지방학림, 명정학교의 학인들이 중심이 되어 동래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결행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 학인들의 대표격인 주동 인물과 상의하여 의거일을 3월 18일로 정하였다. 거사 직전 지방학림과 명정학교의 졸업생을 위한 송별회가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의거의 목적, 방법 등을 설명하고 적극적인 동참을 확약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위에 이용할 태극기·선언서·격문 등도 준비하였음은 물론이다. 이같은 거사가 성공한 것은 범어사 학인 32명의 결사대가 조직되어 그 의거의 중심에 있었기에 가능하였다.2)

이같은 김법린의 용의주도한 준비에 의해 범어사 의거는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김법린은 범어사 의거를 주도한 직후 곧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일제는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법린은 중앙학림의 동지들과 함께 더욱더 민족운동의 최일선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상해로 망명하였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우면서 점차 민족운동의 중심부로 진입하였다. 당시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점차 민족운동의 구심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김법린은 임시정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 다시 국내에 들어온 그는 국내의 불교계 동지들에게 상해의 소식을 전하여 주었다.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민활하게 전달한 것이다. 그는 김상헌·김대용과 같이 만주(안동현)로 건너가 동광상점(東光商店)이라는 쌀 가게를 내고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상해와 국내 간의 비밀활동을 전개하였으니, 혁신공보(革新公報)의 발행도 그 활동 중의 하나였다.3)

이후 상해로 돌아온 김법린은 임시정부에서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집 발간에 이용될 자료 수집에 나섰다. 이에 그는 국내로 잠입하여 귀한 사료를 확보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 당시 상해에 망명한 불교계 지사들과 임시정부가 추진한 것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집과 불교계의 여력을 독립운동에 투입시키는 의용승군(義勇僧軍)의 조직이었다.

그 결과 범어사·통도사의 자금이 임시정부에 제공되었으며, 김포광이 불교계 대표로 상해에 특파되었고 이담해·오성월·김경산이 임정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한편 의용승군 조직은 승려의 비밀결사를 지향한 것이었는데, 그 전제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와 임시의용승군헌제가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서 신상완, 김상헌, 김법린 등은 국내로 잠입하여 범어사, 석왕사 등지에 거점인 기밀부(機密部)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1920년 4월 6일 그 운동의 중심 인물인 신상완이 서울에서 체포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당시 김법린은 일제에 의해 미체포 인물(이종욱·백성욱·백초월 등)로 지목되어 일제의 피체 대상이었다.4)

이에 김법린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시 상해로 와서 때를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공부를 해야 할 것인지. 결국 1920년 4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5)

그는 대학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생각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단념하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는 국민당 지도자였던 왕조명(王兆銘)이 주도한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라는 장학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는 유능한 중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에 김법린은 그 유법검학회의 후원을 얻어 프랑스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6)

1920년 10월 그는 상선을 타고 싱가포르 해협과 인도양을 거쳐 40여일 만에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항에 도착하였다.7)

프랑스의 파리에 도착한 그는 우선 어느 부호의 집에 들어가 청소부를 하면서 불어를 배웠다. 불어를 좀더 배우기 위해 그는 프랑스 북부의 플래르시로 가서 포래로 시립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23세의 나이로 공부를 한 그는 이듬해 7월에는 파리대학교 부설 외국인학교로 옮겨 공부를 지속하였다. 그 무렵 파리의 동포 27명을 규합하여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어느새 김법린은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대학교(소르본대) 철학과에 입학였으니 때는 1923년 11월이었다.

학비 조달을 위해 병원의 막일까지 하면서 수학한 결과 1926년 7월,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파리 인근의 지방은행에 다니며 1926년 11월 파리대학원에 입학하여 근세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김법린의 이력이 1927년 2월에 개최된 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것이다. 그 대회 직전에 프랑스 파리에 있었으며, 능숙하게 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실력이 자연 그로 하여금 조선대표의 자격을 구비케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그의 확고한 민족의식은 그 대회에서 세계 각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여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했다.

3. 대회의 개요

1927년 2월 5∼14일,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의 개최 배경과 성격에 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분야가 매우 많다.8)

이 대회는 1925년 겨울 전, 세계에서 압박받는 민족과 계급의 공수동맹(攻守同盟)으로 생존권을 보전하기 위해 결성된 반제국침략주의대연맹9)이 기관을 설치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그 대회에는 세계 각처의 124개 단체에서 147명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는 ‘조선대표’가 정식으로 참가하였는데, 그 대표는 김법린과 당시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이극로(李克魯), 이의경(李儀景:일명 이미륵), 황우일(黃祐日) 등 4명이었다.10) 그러면 어떤 연고로 이들이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는가를 주목해 보자. 이에 관해서는 이극로의 회고록에 그 사정에 관한 편린이 전하고 있는11) 바, 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극로와 독일 베를린 대학의 동창인 김준연(金俊淵)12)은 동아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그 대회가 브뤼셀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했으며 ‘국내’의 대표로서 이극로와 황우일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파견의 주체가 어느 단체인지, 신문사인지 혹은 독립운동가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김준연이 만주로 가서 그 여비를 이극로에게 송금하였으며 그후 독일유학생 대표로 이의경이 포함되고, 프랑스 유학생 대표로13) 김법린도 포함되었다. 또한 당시 여행중이었던 허헌도 이 4인의 대표와 그 대회에 관한 일을 상의하였는데, 허헌은 신문기자 자격으로 대회를 참관하기로 하였다.14)

그러면 여기에서 대표로 참여했던 인물들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극로는 1920년 상해의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와 근 10여년을 중학과정부터 대학교육을 이수하여 1927년 5월에는 베를린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후일 19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15) 일제에 징역 6년의 판결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의경은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이미륵이었다.

당시 대회에 참석했던 대표들.좌로부터 이의경, 김법린, 허헌, 이극로
경성의학전문에 재학중 3·1운동에 참여한 후 상해를 거쳐 독일로 망명한 그는 하이델베르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의학, 동물학 등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1928년 7월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1931년 이후에는 오히려 문학에 몰두하여 기념비적인 작품을 독일문단에 발표하였다.16)

황우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극로와 함께 국내대표로 선정된 것을 보면 당시 독일에 체류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대회가 종료될 때까지 동참하였는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17) 신문기자 자격으로 참여한 허헌은 일본 명치대학의 법과를 1908년에 졸업하고 그 직후 변호사가 되었는데, 3·1운동시에는 민족대표 47인의 변호인단으로 활동하였다. 이후에는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과 보성전문 교장을 역임하고, 1925년에는 조선변호사회 회장에 피선되었다.18)

그는 1926년 5월 세계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세계일주 여행을 하다가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대회는 예비회(2. 5∼9)와 정식회(2. 10∼14)로 구분하여 진행되었다. 예비회에서는 대회에 출석하기 전에 각 단체 대표단을 구성하고 통일된 의견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회 전날에는 신문기자를 초청하여 참가한 배경 및 소신을 밝히는 회견을 가졌는데, 조선대표도19) 반제국주의 관련의 연설을 하였다. 이에 그 대회에 참가하게 된 한국인 4인은 ‘조선대표단’을 구성하고 이극로가 단장을 맡기로 하였다.

당시 그 대표들은 대회 직전에 상의를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안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이극로는 회고하였다.

  1.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20) 실행하여 조선 독립을 확보할 것
  2. 조선 총독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3. 상해 대한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대회에 참가한 조선대표는 위의 요지로 한 제안을 대회 간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대회 집행부는 조선대표가 제출한 안건을 소홀히 하였다. 당시 그 대회에 참가한 약소국의 대표들도 제안을 하였지만 대부분 무시당하였다.

1927.3.23일자 동아일보에 대회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주된 의제는 반영운동(反英運動)이었기에 그에 관련된 국가인 중국·인도·이집트의 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던 것이다. 이에 제출된 안건을 배척당한 조선대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벨기에의 자유전당이라는 에그멍 궁전에서 본회의는 2월 10일 오후 8시에 개최되었다. 회의장 안에는 조선의 태극기도 게양되었으며 사회 평등, 민족 자유라는 문구가 있는 포스터가 있었고, 제국주의 타도를 의미한 선전문을 순한문으로 쓴 것도 있었다. 본회의 첫날, 김법린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압박을 탄핵하는 기조 연설을 하였다.21)

그리고 이극로는 분과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에 원동위원회(遠東委員會)의 정치산업부의 위원이 되었다. 이극로는 당시 그 기회를 활용하여 조선 문제에 관한 안건 채택에 관하여 대회 의장단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는 조선 문제를 채택치 않은 불공평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에 의장단은 숙의를 한 후, 조선 문제의 토의는 중의에 붙여 그 가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배경에서 나온 표결에서 약소민족 대표는 대부분 찬성하였지만, 그 결과는 3표차로 부결되었다. 2월 14일 최종 회의에서는22) 간부들의 제의안과 각 대표단의 결의안이 낭독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압박에 대항하고 민족 자유를 위한 대연맹’을 창립한다는 것과 영국대표 린스베리를 그 위원장으로 선출하는 등 9명의 집행위원을 선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각 단체의 결의안 5∼6건은 대회에서 낭독하여 통과시키고, 기타사항은 시간관계상 집행위원회에 일임하였다. 아시아 문제에 관련해서는 ‘아세아민족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단체는 아시아 문제를 연구하고 아시아 민족간의 상호관계를 도모하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조선, 중국, 인도, 시리아에서 각각 1명씩 위원을 선발하었다. 조선의 위원으로는 김법린이 피선되었다.

대회가 종료된 이후 이극로는 독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고 영국의 런던으로 떠났다. 이미륵도 역시 독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한편 김법린은 일단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이후 1927년 12월 9∼11일 벨기에의 수도 룩셈부르크에서 개최된 피압박민족대회의 간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였다.23) 그후 그는 네덜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1928년 1월 14일 귀국하였다.24)

고국을 떠난 지 8년만이었다. 그런데 그의 귀국은 1927년 4월경 이미 국내 불교계에 알려졌다.25) 이는 1927년 3월 16∼19일 각황사에서 개최된 재단법인 교무원 평의원 총회에서 김법린의 귀국 여비를 보조하기로 결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그 총회에 참석한 평의원인 황운곡(黃雲谷)은 ‘불란서 파리대학에서 고학으로 성공하여 불란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범어사 학생 김법린 씨의 귀국여비를 보조하기를 발의’하여, 각 본산 주지가 평균 10원씩을 표준하여 300원을 기부하되 그 지불을 교무원의 예비비에서 지출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26)

1928.1.26일자 동아일보 기사.김법린의 귀국소식이 실렸다.
그리고 그의 활동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이전 동지인 김상호는 전국 사찰을 돌며 그의 귀국 여비를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귀국에 즈음하여 불교계에서 귀국하여 불교계를 위해 일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당시 돈 6,000원이 동봉되었다. 김법린은 프랑스에서 계속 공부를 할 마음도 있었지만 불교계의 간곡한 호소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길에 올랐던 것이다.

귀국한 그는 우선 그의 출신 사찰인 범어사로 가서, 귀국 후 최초 강연을 1928년 2월 14일에 가졌다.27) 그는 각황사와 교무원에서도 불교 강연을 하였다.28) 이후부터 김법린은 불교청년운동과 식민지 불교의 극복을 위한 최일선에 다시 섰던 것이다. 조선불교청년회의 재기,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불교청년단체의 통합, 만당 결사,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의 개최, 종헌 실행운동, 사찰령 극복 및 사법 개정운동, 교단 정상화 운동 등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당시 불교계의 중요한 움직임29)의 중심에는 김법린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편 그는 1929년 12월 6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반제국주의자동맹의 베를린 사무국에서 초청을 받았지만30) 일제의 탄압으로 참가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193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구택대학(駒澤大學)에서 범어와 인도철학을 다시 공부하는 향학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4. 대회에 배포된 문건, ‘한국의 문제’

김법린 등 조선대표는 그 대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 및 신문기자들에게 일제에게 침략을 당한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문건을 제작하였다. 이에 필자는 그 문건에 기재된 제목을 활용하여 ‘한국의 문제’로 명명하겠다.

이 문건의 제원은 가로와 세로가 15×23cm이며, 지질은 모조지이다. 겉 표지에는 ‘한국의 문제’라는 제목을 각각 영어, 불어, 독일어로 쓰고, 그 아래에 원색의 태극기를 교차된 상태로 그려 놓았다. 그 하단에는 동아시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지도에는 한국, 일본, 중국의 주요 도시가 영어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문건은 총 8쪽인데 ‘Korea’라는 제목 아래 독일어 4쪽 영어 4쪽으로 1910∼1926년의 한국의 실상을 요약하였다. 또한 앞과 뒤의 내지에는 일제의 식민지 침탈상을 도해로 요약하였다.

맨 뒤의 표지에는 문건의 인쇄처인 독일의 살라 운트 스타인코프(Saladruck Zieger £ Steinkopf) 주소가 기재되어 있다. 현재 이 문건의 원본은 독립기념관의 자료로 등록되어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다. 이 자료가 독립기념관의 자료로 등록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본래 이 자료는 독일에서 유학하였으며 그 대회에 참석한 이미륵이 독일 뮌헨 대학의 교수인 자일러(Seyler) 교수에게 제공하였다. 자일러 교수는 이미륵과 뮌헨 대학 생물학부 동물학과 동기 동창생이었다.

자일러 교수는 이 자료를 40년간 개인적으로 보관해 오다, 1969년경 독일로 유학 간 성신여대 정규화 교수(독문학)에게 제공하였다. 정규화 교수 또한 이 자료를 보관해 오다, 1984년 7월 14일 독립기념관 설립운동이 추진될되고 있을 때에 독립기념관설립추진위원회에 이를 기증하였던 것이다.

대회에 배포된 문건. '한국의 문제' 표지와 (왼쪽)과 'Korea'로 시작되는 본문(오른쪽)
이 문건의 겉 표지 하단에는 연필로 ‘Brusel 10 Feb 27’ ‘Mirok’라고 씌어져 있는데 이는 이 자료가 분명히 그 대회에 활용되었다는 것과 이미륵의 연고를 확실히 말해 준다. 그러나 이 문건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우선 이 문건을 서술·인쇄하게 된 시점과 주체의 문제다. 조선대표로 선정된 4인이 전부 모여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독일에서 인쇄되었기에 독일에 체류하던 이극로·이미륵·황우일이 상의한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또한 이 문건의 인쇄 수량이라든가, 인쇄비 조달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또한 이 문건의 내용을 서술한 당사자는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간다. 그러나 독일어와 영어로 된 문건의 내용을 살펴 보면, 서로 같은 글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는 한글로 문건의 내용을 먼저 집필한 다음 영어와 독어로 동시 번역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같은 상황을 전제로 할 때 영어 번역은 김법린이 했을 가능성이 많다.

프랑스로 유학하기 전 김법린은 미국 유학을 꿈꾸며 한때 영어 공부에 전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어 번역은 이극로·이미륵·황우일 가운데 한 사람이 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다음으로 이 문건과 앞서 이극로가 언급했던 대로 대회에 제안하기로 한 ‘3항의 내용’과의 연관성이다. 요컨대 오히려 3항과 관계된 부분이 미진하여 연설 등의 형식으로 보충하기로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러나 벨기에 오기 이전 이 문건은 이미 인쇄되었을 것이기에 그 대회에 참가한 초기의 일종의 전략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한편 인쇄의 주무자는 이극로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문건의 인쇄처가 베를린이었다는 것을 볼 때, 당시 베를린 대학에 재학중인 이극로가 이를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문건의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겠다.

우선 문건의 앞뒤 내지에는 1910∼1926년 식민지 침탈상을 한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수, 일본인의 토지침탈, 한국인의 생활고, 한국인과 일본인 지주의 자본 비교, 학교 교육의 차별, 한·일 양국인의 관료의 수 등을 도해하여 제시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한국은 문화를 갖고 있는 독립국이라는 점, 일제의 국권강탈과 그 피해,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 3·1운동 등에 대해 간략히 제시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일제는 한국을 무력으로 지배할 수 없음을 전제하면서, 한국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일제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개진하고 있다. <끝>

대한민국 역사가 시작된 이래 아득히 먼 옛날부터 대한민국은 한민족, 즉 고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했는데 이 종족은 중국 민족이나 일본 민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민족은 4천 년 이상이나 내정과 외교정책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려 왔다. 그들은 외국문화를 흡수하여 그들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킬 줄 알았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문화를 인접 국가들에게 전해 주었다. 중국문화와 인도의 사상은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일본은 한민족의 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인구 면에서 한민족을 능가하는 일본 민족은 평화롭게 사는 이웃 나라 땅을 자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한동안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 인접국가를 유린한 적이 있으며, 그 이후에도 한반도의 해안지대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서 해적질과 강도질을 자행해 왔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해가 갈수록 두 민족 사이의 적대감을 고조시켰으며, 근대적인 유럽식 전쟁방법을 충분히 숙지하고 난 일본인들은 마침내 수천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오던 전쟁을 끝내게 되었고, 이제 220,000평방km의 영토와 20,000,000만의 국민을 가진 대한민국은 일본의 속국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1910년 8월 29일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이 이끄는 이 시대의 열강들은 앞다투어 이 합방을 인정하려고 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우리 한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곧 조국의 상실이자 자유의 상실이며, 앞으로 예상되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함 바로 그것이다. 일본이 이 합방 이후――17년이 경과했다――한국에서 무력을 사용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그 동안 한민족에게 강요되어 왔던 경제적 삶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언급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한민족의 경제적 손실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국에서 기생하는 일본인들을 먹여 살리는 비용인데, 그들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으며 작년에는 근 50만 명에 이르렀다. 오래된 통계를 들더라도 이 기생충들은 연 50,000,000파운드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공물 때문에 한국의 상류층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가난과 실업의 도탄에 빠졌다. 3년 전 실업자 수는 997,000명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 경제의 손실이라는 이름하에 포함되어야 할 손해액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일본인들의 기생으로 말미암아 한국민들에게는 어떠한 민족 기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일본의 정치경제학 원리는 대문자로 인쇄된 한 절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망이 좋은 모든 사업은 일본인들만 보유하도록 되어 있다. 외국무역뿐만 아니라 중요한 국내무역도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다.

한국과 연간 75,000,000파운드에 이르는 외부세계 간의 무역이 완전히 재편성됨으로써 20,000,000명의 강요된 소비자를 가진 이 시장의 독점을 통해 매년 일본인들이 얻는 이익이 얼마인가는 쉽게 계산해 볼 수 있다. 전도 유망한 한국의 석탄 광산들은 작년에만 순이익 2,500,000파운드를 일본에 가져다 주었다. 전체 인구의 3/4 이상이 종사하고 있는 농업의 순 생산량은 연간 약150,000,000파운드에 이른다. 현재 한국 전체의 땅 1/3은 일본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사유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다.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농민들은 극도로 착취당하고 있으며 한 가구당 연간 평균 수입이 10파운드에 불과한 실정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다른 경제 분야에 대한 확실하고도 정확하게 집계된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 경제 전체 생산량의 최소한 절반은 일본인들에 의해 수탈되고 있다고 보며 이는 조금도 과장된 주장이 아니다. 다섯 식구를 가진 한 가정이 년간 약 10파운드만으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한국인의 피폐된 경제적 삶은 결코 한국인들이 근대적 방법으로 자신들의 농토를 경작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합방 이전까지는 경제발달 면에서 꾸준한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지식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착취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일본인들은 한국에서의 그들의 범죄행위를 외부 사람들에게 숨기는 방법을 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은 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 내륙 등지의 원시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직 개화가 덜 된 나라이다.

기껏해야 한국인들은 과거 한때 고도의 문화를 가졌던 종족에 속했을 뿐 현재 그들은 다른 열강들과 겨루거나 외국의 침입에 대해 자신을 방어할 만한 힘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일본의 문화적·경제적 지도와 군사적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한국에 기생하고 있는 모든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나쁜 관습과 일부 개개인들의 결점을 기술하고 일반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모든 발전은 일본인들의 덕택으로 돌려진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잘못된 한국인상이 외국인들에게 비쳐져 왔던 것이다. 이른바 일본의 선의의 문화정책이라는 것은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삶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고 아무런 죄도 없이 어두운 감방 속에서 사라져 갔던 모든 유능한 한국인들의 투옥과 동일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의 문화정책이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모든 학교와 고등교육기관 및 점증하는 대학들을 폐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필요한 학교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6∼7세의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말하도록 강요한 것도 일본의 인도주의적 정책이었다. 한국인들은 한국어로 된 신문이나 책을 인쇄할 수 없다. 한국인은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나라에서 자기 자본과 한국노동자들을 고용한 어떠한 산업시설도 만들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한국의 경제적 삶을 조직하고 한국의 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은 투옥이라는 판결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읽거나 민요를 부르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일본인 지배자가 이런 ‘범죄사실’을 듣게 되면 자신은 감옥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 문화가 장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각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국의 현재 상황이 일본에 아무런 명예가 되지 않으며 오해를 제거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이런 강도 행위는 결국 한국인들의 문화적 발달과 전체적인 발달을 질식시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일본의 외교정책에 오도된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정책에 만족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다. 한국인들은 언제나 일본 통치의 적이었다.

세계는 한국에서 일본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많은 정파들은 문화적으로 원시적인 이웃나라 사람들에 의한 한국의 억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기생충들에 의해 나라가 강제로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사를 조직했다. 일본의 정책에 반하는 모든 활동들에 대해 일본은――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도구들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야만인들이라고 부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짐승 같은 방법으로 대답했다.

일본에 거슬리는 행동을 시도했다는 의심을 받는 어떤 사람의 전 가족을――노인과 어린아이들을 가리지 않고――쏘아 죽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때때로 교회와 학교를 포함한 한 마을 전체가 반일 감정을 품었다는 이유로 불태워진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 마을의 주민들은 집안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며 그 결과 이들은 대량 도살로부터 탈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강탈 정치에 반대하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 보기에 재능 있는 한국인 경쟁자들도 사정없이 짓밟혔으며, 따라서 한국의 발달 전망은 매우 어두워지고 말았다.

뛰어난 일부 한국 지식인들은 일본의 고문기구에 시달려야 했다. 고문들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추운 겨울에 찬물을 끼얹기 일쑤고, 손톱 밑 살을 쑤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춤추는 몽둥이가 살갗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또한 갈비뼈를 벌리기도 하고 몸의 일부에서 피부를 벗겨내기도 했다. 부식성 물질을 강제로 항문에 집어넣기도 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고문 방법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일본경찰에 의해 모든 반일 활동을 막는 교정책으로 채택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갖가지 야만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식자층의 지도를 받아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했다. 그것은 결코 최후의 조치가 아니다. 우리는 장차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자유운동을 무력과 반역죄라는 명목으로 진압하고 있다.

이 운동이 평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지역에서도 무력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자유운동에 대한 일본의 첫 대응은 군대와 경찰병력을 증강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총독이 소환되고 새로운 사람이 왔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자유운동이 이전 총독의 통치방법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전 총독의 ‘무력정권’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세 가지 신문을 허용하고 한국인들의 언론규제를 완화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들은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복되는 판매금지와 불리한 출판물을 차단하기 위한 뇌물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독립선언 이후 노동자와 청년운동 조직들은 고사상태에 빠졌다. 무력으로든 반역죄로든 일본은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투쟁은 우리를 자유의 삶으로 인도할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나거나 우리 한민족이 불행과 배고픔 그리고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는 일, 이 둘 중의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대각사상 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 <한국 근대 불교사 연구><한국 근대불교의 현실인식><용성><우리가 살아온 한국불교 100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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