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차석 강사

중국행, 선의 세계를 향한 열정

내가 중국에 갔던 것은 돌이켜 보니 너무나 비현실적인 결정이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사람이 가정을 등지고 무책임하게 유학을 결심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이를 체험해 보고 싶다는 어린아이 같은 열망만으로 중국행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관심을 가져왔던 ‘선의 세계’와 그로부터 파생된 모든 궁금증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나의 의구심을 풀기 위한 최적의 방법은 중국이란 나라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오래도록 가져왔던 의문들과 갈증을 제대로 풀지 못할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98년 8월 말 북경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북경생활은 관광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시간이 나는 주말이면 나의 알량한 중국어 실력을 믿고 북경 시내 내지는 외곽에 있는 사찰을 참배하러 다녔다. 북경은 1천여 년 이상 중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다양한 불교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예컨대 티베트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장학연구소를 설치하여 집중적으로 티베트학을 연구하는가 하면, 민족대학에서 티베트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를 양성하고 있기도 하다. 나아가 티베트 승려들을 북경으로 초빙하여 용허궁이라는 사찰에 상주시키고 티베트 불교를 보호하고 있기도 하다.

또 전래의 선종사찰이나 계율을 위주로 하던 개태사와 같은 사찰도 있다. 황룡사, 혜충사, 앙산촌 등 어쩐지 우리들의 귀에 익숙한 사찰들이 실체는 없이 이름만 전하는 경우도 있다.

정치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북경에 근거지를 둘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각 민족의 다양한 형태의 불교가 북경에 옮겨져 왔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천년의 불교문화가 응집된 곳, 북경

북경에서 라마불교를 대표하는 사원은 용허궁이다. 아니 북경 시내에 있는 사원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사찰이다.

청나라의 설립 주체가 만주족이며, 그들이 라마불교를 숭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용허궁의 위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절의 역사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명나라 때 관방(官房)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이후에 1694년 강희대제 33년에 이 터를 넷째 황태자인 윤정(胤禎)에게 하사하여 황태자 궁이 되었다.

이후 황태자 간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에서 넷째 황태자인 윤정이 승리하여 옹정황제가 되었다. 옹정황제의 사후 그의 아들인 건륭황제에 의해 이곳에 옹정황제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그를 위해 아침 저녁으로 라마식 기도와 독경을 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청나라 황실의 전례(展禮)사찰이 되었다.

용허궁 전경

이후 완전히 사찰로 바뀐 것은 건륭 9년인 1744년의 일이다. 용허궁은 이전에는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전 규모의 5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조계사의 10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 용허궁을 사찰로 만든 이유는 중에는 부황이었던 옹정황제에 대한 건륭황제의 효심도 있었지만 몽장(蒙藏)지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도 있었다.

건륭 자신이 이와 같이 불교를 신앙하는 것은 황교(黃敎:라마교)를 흥륭시키는 정책이며, 자연스럽게 불교를 ‘治國定邊 安衆蒙藏(나라를 다스리고 변방을 편안케 하며, 몽고와 티베트지역을 안정시킨다.)’의 방편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것이 선전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스님들이 상주하며 사찰을 관리하고 조석으로 예불을 드리거나 티베트 식 도제를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 전당에는 티베트 밀교식의 불상이나 장엄구가 두드러지며, 티베트 밀교식 불교의례도 시행되고 있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구복신앙에 치우쳐 있다. 갈 적마다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신도들은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불단 위에 놓고 법사는 기도가 끝난 뒤에 돌려준다.

그럼으로써 그 물건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지니게 되고, 그 위신력이 언제나 그 소유주와 함께 하며 돌보아 준다는 것이다. 개방화 이래 중국인의 삶도 날이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초월적 존재인 부처님께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리라. 용허궁(擁和宮)은 만주어로 평화, 환락, 아름다운 집이란 의미이며, 매일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을 행하고 있다.

단 법당에는 불상 이외에도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사인 쫑카파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티베트 어로 쓰여진 불경을 암송한다는 것이 여늬 사찰과 다른 점이다. 현재 용허궁에 상주하는 젊은 승려들은 티베트 어로 쓰여진 불경을 텍스트로 공부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개인적으로도 티베트는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은 남경에서 중국인 30만 명이 학살된 것에 분노하며 일본인들의 야만적인 행위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국민당을 대륙에서 축출한 이후 티베트를 침공하여 최저 60만 내지 최고 120만 명의 티베트 인을 살상하는 인간 이하의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용허궁과 달리 북경의 불교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찰로 개태사가 있다.

개태사 전경
이 사찰은 북경 서쪽 교외 35킬로미터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북경 시내가 평지인 데 비해 남산 높이 정도의 마안산 중턱에 자리잡고 북경 시내를 굽어본다. 이 절은 당나라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져 있으며, 청나라 말기까지 북경 인근의 모든 사찰을 관장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나 태평천국을 비롯하여 의화단 등 농민전쟁의 발발, 군벌의 발흥과 일본의 침탈, 공산화 이후 문화혁명으로 인한 파괴 등등은 사찰의 급속한 황폐화를 초래하여 옛날의 영화는 세월의 긴 그림자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당우는 80년 이후 복원한 것이라 하는데 곳곳에 모택동 만세, 중화인민 만세라는 구호가 빨간 글씨로 쓰여져 있어 보는 이들의 눈을 자극하고 있다. 현재 개태사의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모양이며, 산세에 의지하여 건축된, 우리나라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가람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중앙을 중심으로 산문전, 천왕전, 종고루, 대웅보전, 가람전, 조사전, 천불각(유지), 세심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을 중심으로 왼쪽은 요사로 사용되는 많은 전각들이 조형미 있게 배열되어 있는데 과거에는 율원이나 강원, 요사 등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또한 오른쪽으로는 선불장이 변한 계단이 있고, 지금은 기념관으로 사용되는 작은 전각들이 뒤로 배열되어 있다. 금당은 없어지고 기단석만 남아 있지만 그밖의 석조물이나 전각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개태사는 여늬 사찰과 그 역사나 문화에 차이가 있다. 특히 개태사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태사는 양자강 이북에서 공부한 예비승려들이 수계를 받고자 할 때 계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선불장 전경

선불장 안에는 이전에 수계 당시에 사용하던 계단이 원형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다. 수계를 받을 때 증명을 담당하는 스님들이 앉았던 의자도 그대로 남아 있다. 돌로 만든 계단은 측면에 양각으로 수많은 보살상을 조각하고 있는데 매우 아름답다. 또한 사찰 안에는 풍광이 매우 수려하고 사찰의 역사 만큼이나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백송을 비롯한 다양한 수종의 거목들이 가득하여 사찰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석등을 비롯한 비교적 크지 않은 석조물들은 투명한 플라스틱 덧집을 씌워 산성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는데 의외로 이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북경의 대기오염은 서울에 비하면 심각한 정도의 수준을 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태사는 스님들이 상주하며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지장본원경이나 화엄경보현품, 관세음보살보문품 등을 작은 책자로 만들어 참배하는 사람들이나 시주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한편으론 신도들의 자문에 응하고 있는데 어떠한 내용을 주고받는지는 필자의 중국어 실력이 워낙 출중하여 알 수가 없었다.

북경 시내에는 무수히 많은 사찰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은 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있거나 흔적만 남아 있는 사찰들이 많다. 대표적인 사찰이 향산 공원 안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 벽운사이다. 이 사찰이 유명해진 것은 당우의 웅장함이나 조각의 화려함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근대 중국의 아버지라 칭송하는 중산 손문이 서거했을 때 그의 유체를 안치했던 탓이기도 하다.

사찰 안 그의 유체를 모셨던 곳에는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으며, 중산의 유체를 모셨던 당우의 바로 후면에 자리한 금강보좌탑 안에도 잠시 손문의 유체를 안치하고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이 금강보좌탑은 밀교의 영향이 농후하게 풍겨나오는 건축물이다. 특이한 것은 승려들이 거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우도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는데 아직 중국불교협회로 이관되지 않은 듯했다.

중국정부는 고찰이라도 정부의 허락하에 불교협회로 사찰 관리권을 이관하게 되면, 불교협회에서 승려들을 파견하여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찰을 찾는 참배객들은 북경시민, 외지인, 외국인을 합하여 말 그대로 인산인해다. 이런 곳에서 포교를 한다면 북경시민을 불자화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찰이 어디 이것뿐인가.

하이덴취에 있는 대종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명한 북경중앙미술학원이 있는 근처에는 융복사 거리가 있다. 이곳은 융복사가 있던 곳인데 사찰을 허물고 호텔을 지었다. 융복사의 편액은 호텔 정면의 꼭대기에 걸어놓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명동거리처럼 젊은이들이 찾는 쇼핑과 먹거리와 휴식의 공간으로 변해 있다.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벽운사의 야경
그런 것을 상기하면서 벽운사를 걷노라면 왠지 쓸쓸한 마음이 든다. 정녕 불교는 사양길에 접어든 골동품과 같은 종교인가. 실용성은 없고 보존의 가치는 있는 문화유산에 불과한가. 벽운사를 참배하던 당시 괜스레 심사가 뒤틀려 동행한 사회과학원 선생에게 왜 이 절에는 스님이 보이지 않느냐고 딴청을 부리자 “있기는 있는데 포교의 자유가 없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벽운사뿐만 아니라 북경 인근의 사찰은 우리 나라의 사찰과 건축 양식이나 조각 등에서 커다란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사찰의 일주문을 통과하면 사천왕상이 있는 사천왕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사천왕문과 일직선상으로 후면에 대웅보전이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수많은 당우가 배치되어 있다. 비로전, 무량수전, 관음전, 선불장, 지장전, 대웅전 등등 사찰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알려주는 전당의 이름들이 전혀 낮설지 않다. 뿐인가.

각각의 전당 정면에는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련이 낮익은 고문체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북경 시내에 있는 수많은 사찰 중에서 한국사람이 반드시 참배해야 할 사찰이 있다. 바로 법원사다. 법원사는 북경시 광안문 안의 남횡가의 북쪽에 있다. 법원사는 당나라 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인데 원대 이후 북경에 진입한 회교도들이 법원사 인근에 모여살기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옛날에는 사찰의 규모나 면적이 매우 방대했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지만 지금은 5분의 1정도의 규모로 축소되어 있다.

곳곳에 자리잡고 묵묵히 서있는 고목이 아니라면 이곳이 천년사찰이라는 것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일부는 아직 복원조차 되지 않았는지 공개하지 않고 출입을 금지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불학원이 이곳에 있다. 1956년에 설립되었으나 명맥만 유지하다가 개방 이후 홍콩신도들의 후원과 북경 인근에 거주하는 신도들의 후원을 받아 초현대식 불학원을 건립한 것이다.

생각건대 불교관련 서적만을 놓고 말한다면 북경 시내에서 이곳만큼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 도서관은 없다. 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출간되는 불교계의 학술지, 잡지, 신문, 서책 등은 거의 들어오고 있다고 관계자는 말한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부러울 정도로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재질이 있는 승려들을 교수요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석박사과정도 개설되어 있는데 총 9명 정도가 재학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박사 과정에 있는 승려들은 주로 사회과학원 세계종교연구소 불교학연구실 주임인 양증문 선생에게 지도받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중국에서 승려가 되는 과정은 한국과 비슷하다. 우선 지원하여 승려가 되는 사람이 있고, 어려서부터 사찰에서 성장한 사람이 있다. 다른 점은 공산당에서 파견한 승려가 있고, 사찰에 거주하는 사람을 모두 승려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승려는 중국불교 협회가 인정한 출가자를 말한다. 원나라 시대에 이 법원사에는 유명한 지공(指空) 스님께서 주석하시면서 선법을 선양하고 계셨다. 이 무렵은 고려의 말기에 해당하는데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나옹혜근 스님, 무학자초 스님, 지천 스님, 달현 스님, 혜청 스님, 사도달예 스님 등의 고려 스님들이 이곳에 유학와 지공 스님에게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불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사찰이다. 문화혁명이라는 시련기를 견뎌내고, 다시 중국불교의 부흥을 위해 도제를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산문으로부터 일직선으로 천왕문, 대웅보전, 민충대, 비로전, 관음전, 장경각이 있으며, 양측면으로 부속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옛 건물들은 비교적 퇴락한 편이며, 부속건물에는 사찰에 근무하는 재가자들도 함께 살고 있다. 방산은 북경 시내에 속해 있지만 북경 외곽지역이다.

북경 도심에서 한 시간 반 가량의 거리이다. 방산은 이전의 이름이고 현재는 석경산(石經山)이라 부른다. 돌에 새긴 경전이 있는 산이란 의미일 것이다. 이곳에는 운거사란 고찰이 있고 운거사에서 대략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석경산이 있다. 그러나 운거사와 석경산은 역사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있어 운거사 하면 석경산, 석경산 하면 운거사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석경산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藏石經者 千年矣. 始曰石經山, 至今也(석경을 보관해온 지 천 년이라. 비로소 석경산이라 하는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란 구절이 산 속에 쓰여져 있기에 유래했다고 한다.

운거사 전경
운거사나 석경산의 연기는 매우 오래되었다. 수나라 대업 연간에 어떤 스님 한 분이 산 속에 도달하여 머물길 수년. 조용히 석경을 새기기 시작했으니 바로 정완(靜琓) 스님이다.

이분은 천태종을 개창한 천태지의스님의 스승이신 혜사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석경을 새겨 보관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전한다. 혜사 스님은 중국불교 역사상 대표적인 법난인 3무1종 가운데 제1차 법난이 막 시작되던 시대에 살았다. 파불과 불경의 소각, 승려의 환속 등 처절하기 비길 데 없는 법난을 목격한 혜사 스님은 자신의 제자인 정완 스님에게 후세를 위해 석경을 새기라고 유언했다.

언젠가 광란의 시대가 끝나고 광명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확신하고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도록 석경을 새기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혜사의 유지는 대대로 계승되어 명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이곳의 석경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운거사 안에 있던 요대의 탑 밑에 안장되어 있던 석경이다. 이것은 탑을 해체하는 중에 발견되어 보관하다가 1999년 9월 9일 오전 9시 9분 9초에 다시 탑 속에 안치하여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둘째는 석경산의 석경동에 있는 석경이다.

석경산은 전체가 돌산인데 정완 스님 이래 각 시대마다 수 많은 스님들이 석굴을 만들어 벽면에 불경을 새기는가 하면 청석판에 불경을 새긴 다음 석굴에 넣고 영구히 폐쇄시킨 것이다. 석경동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이 뇌음동(雷音洞)이다. 일명 화엄동이라 하는데 유일하게 개방하는 곳이다. 이 동굴은 원래 천연동굴이었는데 그것을 좀더 다듬어 현재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동굴의 면적은 커다란 교실만 하며, 삼면의 벽면에는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등의 대승경전이 새겨져 있다. 화엄경의 분량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동굴의 대부분이 화엄경으로 새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뇌음동 왼쪽 한켠에는 한글로 작은 안내문이 기록되어 있는 석판이 있는데, 다름 아닌 고려 출신인 혜월(慧月) 스님께서 이 동굴을 완성했다는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운거사 사지에 의하면 원나라 말년에 오대산을 참배하고 이곳 운거사에 내방한 고려 스님이 계셨는데 바로 혜월 스님이었다. 당시는 혼란기라 사찰 재정이 넉넉지 못했던 탓에 석경작업은 일시 중단상태에 빠져 있었다. “사찰은 터만 남아 있어서 장차 정완 스님의 경전을 새긴 공덕이 훼멸될 것이 애석하여 마침내 모연하여 돌과 집과 경판, 화엄당을 거듭 수리했다. 일이 끝나자 석장(錫杖)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에 혜월 스님은 사명감을 가지고 석경작업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바로 뇌음동과 함께 석경산을 지키는 제불보살로 승화하셨던 것이다. 뇌음동 벽면에도 고려국 승 혜월이란 이름의 간기가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보잘것 없지만 불법을 사랑하고 불법에 미혹하여 방랑하는 필자도 그분의 숭고한 보살정신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고려인의 후예로서 얼마나 그분이 자랑스러운지 몰랐다. 생각하면 그분은 이곳에서 얼마나 간난의 세월을 보냈을 것인가.

1년 여의 짧은 시간도 지루하고 힘든데 하는 생각을 하니 감히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경망스러운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국공산화 이후 중국 정부는 석경산 운거사의 문물과 고적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보호와 연구에 적극적인 협조를 하고 있다. 중국불교협회는 1950년대 이후 운거사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을 진행했으며, 발굴된 석경은 모두 탁본을 떠놓았다. 석경의 재료가 모두 청석인데 이 청석은 햇볕을 장시간 받으면 서서히 마멸되는 성격이 있다고 한다.

반면에 돌의 성질이 비교적 부드럽고 무르다 보니 글씨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수, 당, 오대, 송, 요, 금, 원, 명의 각 왕조를 거치며 수많은 승려들이 대대로 계승하며 석경을 새긴 탓에 지금은 일종의 석경대장경이 되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을 때 주은래 당시 중국 총리가 인도에게 석경산 석경의 3분의 1을 주고 국경 분쟁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석경의 일부는 인도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장된 낭설이라 생각하지만 이곳의 석경이 그만치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 중국정부는 이것을 매우 소중한 중국의 국가중점유물로 지정하고 있다. 원나라 말기 혜월 스님께서 이곳의 석경 역사를 계승한 이후 오래지 않아 티베트의 승려인 쯔티다얼빠오가 당도하여 훼손된 경판을 수리하고, 복간했다.

이 사업은 어떤 몽고 관리의 찬조를 얻어 완성되었다고 하니, 이 유물은 중국인만의 유물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불교인들의 신앙심이 응축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소중한 유물이 완성되는 과정에 우리들의 조상이 연관되어 있으며, 아니 그 역사의 단절을 막아 준 스님이 계시다는 점에서도 북경 여행에서 필수 방문지로 기억해야 하리라 본다.

‘무(無)자화두’ 조주선사의 발자취

필자가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참배한 사찰은 매우 많다. 명나라 시대의 불화가 벽화로 그대로 남아 있는 법해사, 고찰의 전설과 웅장하고 아름다운 탑파군과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담자사 등. 그러나 무엇 보다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웠던 것은 조주 스님(778∼987)께서 만년에 주석하시며 선풍을 진작시켰던 옛날의 관음원이었던 백림선사를 참배한 일이다. 백림선사를 참배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98년 9월 말 우연한 기회에 그곳에 가는 스님과 동행하게 되었다.

백림선사는 북경에서 남쪽으로 기차를 타고 가면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석가장(石家莊)에서 다시 1시간 거리의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북경을 둘러싸고 있는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도시이다. 우리들은 북경서역에서 석가장을 향하는 기차를 타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석가장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봉고차를 대절하여 백림선사가 있는 조현(趙縣)까지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어둠이 대지를 삼키기 시작하였을 때였다. 그곳에는 조선족 출신인 명화(明和)란 스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분의 안내를 받아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방사를 배정받았다. 원래 이 절은 퇴락하여 조주탑과 측백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었는데 홍콩신도들의 후원으로 현재의 가람 규모로 중창했다고 한다.

막 도착했을 무렵은 이미 어둠에 덮혀 사찰의 면모를 알 수 없었지만 이튿날 보니 신도들이 숙식하며 정근할 수 있는 요사채며, 강당, 종무소 등등 많은 전각들이 질서정연하게 법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어 매우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사찰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이 조주탑이다.

조주선사의 탑
조주 스님께서 입적하시자 사리를 수습하여 이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조주 스님의 호는 진제(眞際) 선사, 탑명은 광조(光祖)지탑이라 했다. 현존하는 탑은 이후 허물어진 것을 원나라 시대에 다시 세운 것이다. ‘特賜大元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之塔(조주에 있는 고불 진제광조국사에게 특별히 하사하는 탑).’이라 한다. 높이 33미터의 7층탑이다. 조주 스님께서 이곳에 당도한 해는 85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나이 60세 되던 해에 은사이신 남전보원선사께서 입적하신다.

조주 스님은 남전 스님을 60까지 손수 시봉했으며, 당신께서 존경했던 남전 스님께서 입적하시자 사리를 수습하여 안치한 다음에 20년간 중국 천하를 주유하였다. 20년간의 운수행각을 마친 다음 당신의 고향인 산동에서 멀지 않은 조현에 관음원을 세우고 전국에서 몰려오는 운수납자들을 제접했다. 그러니까 80세부터 120세까지 이곳에 주석하셨던 것이다.

필자는 새벽예불에 동참하기 위하여 종소리에 맞추어 일어나 세수하고 법당으로 향했다. 홍콩서 온 신도들은 모두 밤껍질과 같은 색깔의 신도용 가사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것은 중국불교의 근대화 이후 보편화된 것이라 했다. 범성일여(凡聖一如), 승속일체(僧俗一體)를 의식에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어둠이 가시고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만끽하며 사찰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있는데 법당 정면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이 측백나무 투성이다. 특히 법당 앞쪽에서 수령을 알 수 없는 측백나무 고목들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도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측백나무니라(庭前栢樹子).”고 대답하게 만든 그 측백나무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사찰 이름을 백림선사라 부르게 만든 백림(栢林)이다.

너무나 많은 일화가 우리들에게 알려진 조주스님의 화두는 이것 말고도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대답하여 유명해진 ‘無字’ 화두가 있으며, “차나 마시게(喫茶去)”, 죽을 먹고 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도에 합당하느냐는 질문에 “발우나 씻게(洗鉢去).” 등 무수하게 많다. 모두 평상심을 강조한 것이다. 촉사이도(觸事而道)라는 전통과 대승불교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면 하나는 어디로 갑니까?” 이것은 너무나 노장적이다. 도는 하나를 낳고…… 셋은 만물을 낳았다. 그렇다면 논리상 정답은 도(道)이다. 그런데 대답은 “나는 청주에서 삼베적삼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7근이다.”이다. 현실을 도외시한 이론은 쓰잘데기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당나라 시대에 수많은 선사들이 출현하여 현실을 중시하며, 창조성, 단순성, 초논리적인 직관성 등의 사상을 현양하였기에 당나라의 문화가 세계 최고의 자리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당시의 선지식들처럼 치열한 실험정신이 있는가. 송대 이후 불교가 중국문명의 주도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이후의 선불교가 지나치게 현학화, 관념화 내지는 골동품화된 데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이곳은 근년에 홍콩신도들의 후원으로 불학원 허가를 받고 도제 양성을 시작했다.

주지스님인 정혜 스님은 중국불교협회 부회장으로서 하북성 불교의 중흥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셨다. 《감로》라는 불교잡지도 발간하고 계셨으며 석가장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시고 계셨다. 공교롭게도 돌아오는 길에 북경항공대학에 다니는 석가장 출신의 어떤 여성이 우리들에게 불교책을 주면서 불교를 공부해보라고 했을 때는 신앙의 힘이 크다는 생각과 함께 코끝이 시큰거렸다.

듣건대 불교신자가 되면 고기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공산당의 탄압이 20년 가깝게 지속되었는데도 아직 불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중국인들의 심성 속에 뿌리내린 불교의 영향도 어지간하다고 생각된다. 현재의 백림선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주교가 있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다리인데 아직 건재할 뿐 아니라 매우 아름답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다리이다. 순전히 돌만 사용하여 2층으로 만든 다리인데 지금은 보호하고 있다. 이전에는 남쪽에서 조주를 거쳐 북경을 가야만 하는데 그럴 경우 반드시 조주교를 지내야만 했다고 한다.

원래의 이름은 조주교가 아닌데 이후 조주교로 알려졌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찾아와 “듣건대 이곳에 유명한 조주의 돌다리가 있다고 하던데 저는 아직 외나무 다리(獨木橋)도 보지 못했습니다. 돌다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너는 외나무 다리만 보고, 조주의 돌다리는 볼 수 없단 말이냐.” “조주의 돌다리는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당나귀도 건네주고, 말도 건네주며, 일체의 미망 중생도 건네준다.” 그렇다. 숱한 물건들이 이 다리를 건넜으며, 수많은 인간들이 이 다리를 건넜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눈앞에 있는 다리는 왜 보지 못했단 말인가. 조주스님의 설법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돌아오는 길에 자이언트 조주의 서슬퍼런 설법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급한 것입니까?” “노승이 이렇게 말하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모릅니다.” “네게 말하는데 황급하게 가죽신을 신고 물 위에 서거나 말을 달려 장안에 도착했는데도 아직 너의 가죽신발코는 젖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급한 일은 없건만 당사자들의 마음이 급할 뿐이라는 점을 경책하시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도는 우리를 멀리하지 않는데 우리들이 오직 간택할 뿐”이라는 말씀도 마찬가지 의미 아닌가.

어떤 것이 도량이냐는 질문에 “너는 도량에서 와서 도량으로 가는데 어느 곳이 도량 아닌 곳이 있느냐.”는 반문은 나에게 채찍으로 다가왔다. 도량을 장엄하기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끝>

차차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강사. 저역서로 <구도자의 나라>(공저)<불교상식백과>(공저)<중국불교사>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