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윤 한국불교 선학연구원장

1. 서언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 요사이 크게 유행하는 테크노 여가수 이정현의 히트곡 〈바꿔〉의 가사 내용이다. 마침 구시대 정치인을 향한 퇴출 압력과 시민단체의 4·13 국회의원 총선 낙천·낙선운동 열기와 연결돼 인기가 더욱 치솟고 있다.

바꿔! 확 바꿔! 모두 다 바꿔! ‘새 천년’에 진입한 21세기의 화두다. 단순한 노래, 그것도 젊은이들이 온몸을 비틀어대며 외쳐대는 테크노 음악, 댄스 음악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노래가 지금 새 천년의 인류문명사를 밝히는 횃불처럼, 구세주처럼 등장해 있는 ‘변화와 개혁’을 가벼운 터치로 속시원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은 새로운 세기의 대안사상인가’라는 엄청나고 심각한 주제의 서두에 유행하는 노랫말을 인용해 본 것이다. 선은 세속의 논리를 뛰어넘는 ‘초논리의 논리’를 가진 초형이상학이다. 현대문명, 곧 서양문명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기의 문명을 이끌 대안사상(代案思想:Alternative thought)의 모색 역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거창한 문제를 아침 이슬처럼 명멸하는 유행가로 풀어보려는 것 자체가 어설픈 수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은 원래가 이렇게 싱거운 것이다. 싱겁고, 모순투성이고, 엉뚱한 역설(paradox)이고, 허튼소리로 일관하고 있는 게 선의 본래 면목이다. 이는 장난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확 바꾸려는 채찍질이다. 물질문명·기계문명 등으로 특징지어져 온 현대문명은 분명히 20세기 말로 그 한계를 드러낸 채 종언을 고했다. 현대문명의 종언에 대한 세계 지성들의 공감대는 이미 마침표를 찍은 지 오래다. 현대문명은 곧 서구문명이라 할 수 있다.

서구문명의 한계를 드러낸 극적인 예의 하나가 ‘환경문제’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이끌어 온 서구문명은 인간의 물질적 행복지수를 높여만 준다면 자연을 얼마든지 정복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논리가 대형 공장을 수없이 많이 짓고, 굴을 뚫고 산을 깎아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개발 제일주의’를 뒷받침해 주었다. 지구상의 인류는 몇 세기 동안 이른바 경제개발의 단꿀을 빨아 먹는 행복(?)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저 아프리카의 빈민들이 이러한 행복의 꿈을 꾸어보기도 전에 인간의 물질적 행복을 무한대로 보장해 주리라 믿었던 개발전략이 환경오염·생태계 훼손·자연파괴라는 재앙을 불러왔다.

이 재앙은 보통 재앙이 아니다. 인류의 멸망을 위협하는 단계로 현실화되고 있다. 기상이변과 대기오염 등은 핵전쟁에 의한 인류 멸망보다도 훨씬 더 실감나는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환경오염 문제는 이제 ‘그린 라운드’를 통해 세계 공통의 규제로 그 재앙을 막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환경오염은 한 마디로 현대문명의 개발전략이 초래한 인과응보(nemesis effect)라 할 수 있다. 뒤늦게나마 이를 반성하는 환경보존운동이 전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 날로 확대되고 있음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환경운동은 이제 새 천년을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의 문명건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새 천년과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 지구촌을 진동시키고 있는 구호는 ‘변화와 개혁’이다. 이제 개발전략 중심의 현대 물질문명은 환경문제의 예에서 보았듯이 분명히 한계점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건설’이라는 화두가 제시된 것도 이같은 인류의 다급한 현실 때문이다.

세상은 인류 구원을 위한 새로운 틀의 문명건설과 그에 따른 엄청난 변화와 개혁을 요구받고 있다. 기존의 사유체계를 확 바꾸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변화와 개혁이다. 이미 20세기 말부터 몰아친 변화와 개혁의 파고는 ‘구조개혁’이니, ‘리엔지니어링’이니, ‘벤치마킹’이니 하는 용어들을 양산하면서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모든 걸 다 바꿔!’ 개인과 가정·회사·사회·국가·세계가 한결같이 외쳐대는 절규이다.

새로운 천년에 삶의 나침반이 될 새 틀의 변화와 개혁은 기존의 사유체계를 확 바꾸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가히 혁명적인 개벽이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기관과 회사의 직원을 몇 명 줄이고 일부 부서를 통폐합하는 것은 극히 하드웨어적인 개혁의 한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과 같은 사고체계의 일대 혁명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유체계의 혁명, 곧 의식혁명이 오늘날 인류가 요구받고 있는 변화와 개혁의 핵심내용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류문명 건설에 절실한 필요충분 조건이다. 흔히 ‘정보화시대’ ‘정보혁명’으로 특징지워지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우리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확 바꾸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변화와 개혁을 이미 실감하고 있다.

기존의 유행 감각과 계절 관념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유행 파괴·계절 파괴와 지난날의 공간개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사이버 공간’이 등장해 우리의 일상생활 속 깊숙이 이미 편입돼 있다. 오늘의 화두는 확실히 ‘다 바꿔’야 하는 변화와 개혁이다. 그리고 21세기 지구 인류의 화두는 ‘환경과 복지’다. 새 문명 건설을 위한 변화와 개혁의 필요조건은 ‘발상의 전환’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생각이 바뀌지 않은 외형적인 개혁은 잠시 눌러놓은 용수철에 불과하고 일시 휘어잡은 대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휘어잡은 손을 놓으면 대나무는 다시 꼿꼿이 선다. 선은 달마대사가 6세기 초반 인도로부터 중국에 온 시점을 계기로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인들의 인생과 철학·종교와 어우러져 동양철학의 우뚝한 한 봉우리를 형성했다.

흔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동문서답으로 비유돼 온 선문답이 기존 사유체계를 깨부수기 위해 설파하는 ‘발상의 전환’은 21세기 새 문명 건설이 요구하는 ‘다 바꿔’에 다시 없는 자양분을 공급할 만한 보고(寶庫)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카오스 이론·복잡화 이론·사이버 이론·홀로그래피 이론 등 정보화 시대의 과학혁명도 선이 1천5백 년 동안 일관되게 지향해 온 일원론적 세계관과 우주관의 현현에 다름 아니다.

선은 여기서 21세기의 대안사상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단초를 열게 된다. 문명은 단순한 기술개발에 의해 형성되는 게 아니다. 문명은 언제나 당위성을 설명해 주는 이데올로기를 주춧돌로 삼아 건설된다. 지금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 건설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절실하다. 그래서 세계의 지성들은 21세기의 정보화시대와 환경·복지라는 화두를 풀기 위한 대안의 이데올로기를 정립하고자 한다. 근·현대 문명을 이끌어 온 서구사상과 기독교사상은 현대문명의 종언과 함께 그 명(命)을 다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대안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게 자연친화적인 노장사상과 주관적 유심론의 최고봉인 선사상이다. 선은 세속의 기존 논리체계와는 전혀 다른 ‘역설의 논리구조’로 일관돼 있다. 그리고 철저한 만물일여(萬物一如)의 일원론이다. 이는 서구사상의 특징인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이원론(二元論)과는 전혀 배치된다. 또 이원론에 입각한, 근·현대 문명이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온 합리성까지도 뒤엎는 모순의 아성이며 역설의 도가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변화와 개혁이 요구하고 있는 발상의 전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선은 흔히 서구인들이 호기심을 갖는 신비주의가 결코 아니다. 기존의 논리체계를 뛰어넘은 초논리의 논리이며 서구 형이상학을 넘어서 있는 초형이상학일 뿐이다. 오직 이러한 초논리, 초형이상학의 선사상이 기존의 이분법적인 사유체계로 틀을 짠 문명에서 수용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선적인 사유체계가 절실히 필요해졌고 문명의 흐름이 그와 같은 방향으로 기수를 돌리고 있다. 이미 구미 선진국의 석학들이 선사상을 21세기 대안사상의 하나로 폭넓게 깊이 천착하는 가운데 정신분석학·경영학·스포츠 분야 등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세상을 다 바꿔!” 이정현의 히트곡 가사는 이제 단순한 유행가 구절이 아니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을 다 바꿔야 한다. 과연 이같은 다급한 절규로 새로운 문명 건설을 갈구하는 인류에게 선이 과연 그 대안사상이 될 수 있는가를 새로운 세기의 화두인 변화와 개혁, 환경, 복지의 측면에 관련시켜 보다 폭넓게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2. 선과 발상의 전환

  1. 분명히 빈 손이지만 그 안에 호미를 쥐고 있고
    나는 분명히 걷고 있지만 소 등 위에 타고 있다.
    사람이 다리를 건너가니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

    空手把鋤頭 步行騎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

위진남북조 시대 양말진초(梁末陳初)의 선림 거사였던 부대사(傅大士, 일명 등州善慧 : 497∼569)의 5언율 게송이다. 부대사는 이 게송의 끝 구절에서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고 읊조려 가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내보이고 있다.

이는 일상적으로 추론해 온 지식과 인식의 범위를 확 뛰어넘은 발상이다.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다. 그러나 오늘의 변화와 개혁은 이같은 발상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오죽하면 기업체들이 구조개혁을 하면서 ‘마누라 하고 자식만 빼놓고는 모두 다 바꿔’라고 외쳐댈까. “다리가 흐르는 것이지 물이 흐르는 게 아니다!” 흔히들 돈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자, 미친 사람의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 선이 자리하는 곳이란 본래 이런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다. “위대한 정신에는 다소나마 광기(狂氣)가 섞여 있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서 말하는 ‘광기’란 선적인 발상의 전환 바로 그것이다. 에디슨·뉴턴 같은 천재적 발명가들도 모두 다 학교 성적은 열등생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천재적인 광기가 있었고, 그 광기로부터 터져나온 발상의 전환이 위대한 발명과 발견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마찬가지다.

당시로는 천동설(天動說)이 진리고 정설이었다. 지구가 자전이라는 엄청난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몰랐고 믿지 않았다. 다만 코페르니쿠스만이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부대사가 설파하고 있는 선리(禪理)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두 사람 모두 기존의 사유체계로 보면 미친 놈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빈 손과 호미를 각각의 둘이 아닌 하나로 보면 ‘빈 손이지만 호미를 들고 있는 것’이 된다. 소를 타고 가지만 앞으로 가고 있다는 동일성에서는 걸어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논리를 긍정할 수 있는 ‘무분별의 분별’과 ‘분별 속의 무분별’을 체득하고 나면 ‘다리가 흐른다’는 논리가 전혀 미친 놈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은 우리가 진리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이유를 육안에 보이는 사물의 겉모습만을 보고 기존의 논리체계와 사유방식에만 의존하고자 하는 부당한 집착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선은 기존 논리의 횡포와 일상 언어의 편향성에서 탈피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소리 높여 외쳐 왔다. 선이 설파해 온 사유체계의 전환이 없이는 삶의 깊이에 도달할 수도, 우주 본체의 진리를 올바로 파악할 수도 없다.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는 건 과연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분별의식이 생기기 전 아주 어릴 때 기차여행을 하면서 기차는 가만히 있는데 창밖의 나무가 번개처럼 지나가고 있다고 착각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때의 그 아이는 전혀 착각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이 어린아이처럼 분별의식을 갖지 않고 나와 나무·기차가 다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주체와 객체, 주어와 동사의 혼연일체만 이루어지면 지금 내가 건너고 있는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 것이다.

선에서는 언어란 언어일 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언어가 실재(實在)와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언어를 떠나 실재로 직접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다리는 고정돼 있고 물이 흐른다고 인식해 왔고 보아 왔다. 과연 이것이 절대적인 인식일 수 있을까. 가령 달나라나 화성에도 인간과 비슷한 존재가 살고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다리가 흐르고 물은 고정돼 있다’는 지구상의 인간과는 다른 인식체계를 수립하고 그렇게 표현하기로 언어적 약속을 하면 ‘교류수불류(橋流水不流)’가 달나라와 화성 사람들의 진리다.

따라서 우주 본체에서 보면 ‘물이 흐른다’는 지구촌 인류의 사유체계가 결코 절대적인 진리라고 할 수만은 없다. 우리는 여기서 선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전개해 온 역설과 역유(逆喩)가 전혀 미친 놈의 얘기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지구상의 인류가 논리적,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언어를 내세워 고집하는 진리를 과신할 필요는 없다. 사물의 명상(名相)과 기존의 논리만 벗어난다면 술은 춘향이가 마셨는데 이도령이 취하는 정신적 해방(자유)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선이 말하는 ‘해탈’이다. 이런 선문답이 있다.

  1. 문 : 어떤 것이 제불(諸佛)의 출신처입니까.
    답 : 산이 물 위로 걸어간다.(東山水上行)

선불교 운문종 개산조인 운문문언 선사(864∼949)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또 남송(南宋) 때의 조동종 부용도해 선사(1043∼1118)의 상당법어도 있다.

  1. 청산이 항상 걸음을 옮기고 있고,
    돌계집은 밤에 아기를 낳는다.

    靑山常運步 石女夜生兒

부대사와 운문·부용의 선지(禪旨)는 모두가 하나같이 본체와 현상이 하나이고, 부분과 전체가 경우에 따라 서로 호환(互換)하면서도 각기의 개체성과 보편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일원론적인 선학(禪學)의 체용일여론(體用一如論)이나 ‘호환의 원리’를 체득해 기존의 유·무 분별, 긍정과 부정을 초월하는 논리다. 체용일여의 논리를 꿰뚫고 나면 산이 걸어가고 다리가 흐르는 주어와 술어의 일체성을 따라 물아일체 속의 ‘청산상운보(靑山常運步)’ 하고 ‘석녀야생아(石女夜生兒)’ 하는 진리를 보게 된다.

근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기존의 사고체계로 보면 역설이고 논리의 모순이다. 그러나 가장 한국적인 제주 하루방 디자인의 TV 수상기 세트가 세계인의 호감을 사서 크게 히트함으로써 이 역설의 진리는 증명이 됐다. ‘불규칙 속의 규칙과 규칙 속의 불규칙’을 설파한 최신의 카오스 이론도 선의 역설적 논리구조 바로 그것이다. 이제 이처럼 부분과 전체, 불규칙과 규칙이라는 이분법적 분별의 사유체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사이버라는 가상공간과 지상의 실제공간도 분별이 없어져 버린 게 정보화시대의 오늘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종래의 가짜와 진짜 구분은 사이버 공간의 등장으로 하루 저녁 물거품이 됐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혁명적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의 기존 분별의식은 언제나 산은 움직일 수 없는 것, 물은 흐르는 것으로만 보도록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 깊숙이 자리한 의문과 아쉬움은 이처럼 고정관념화한 지식을 뛰어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선적인 사고이며, 새 패러다임의 문명이 요구하고 있는 사유체계이며, 변화와 개혁이 아닌가.

인류 역사상의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견·발명도 이같은 발상의 전환을 본질로 하는 선적 사고방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기존의 사유체계들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있다. 평생직장은 능력급제와 벤처기업 시대의 개막으로 흘러간 옛노래가 됐다. 여자들이 겨울에나 신던 목이 긴 부츠를 ‘밀리터리 룩(Military Look)’이라는 유행으로 여름에도 거리낌 없이 신는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여름에 부츠를 신으면 머리가 좀 돈 사람 취급을 했다. 그뿐인가. 적어도 찬바람이 부는 초가을이나 돼야 팔고 사던 밍크 코트가 한여름철 세일의 성시를 이룬다.

또 여름에나 먹던 오이소박이와 열무김치가 겨울철 식탁에 일상으로 오르고, 반대로 겨울에나 먹을 수 있던 김장 포기김치를 한여름에도 흔하게 먹는다. 이른바 ‘유행파괴’고 ‘계절파괴’다. 5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변화고 혁명이다. 과학의 발달, 기술의 개발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도 충격적인 변화다. ‘다리가 흐르는 것’도 겨울철 열무김치처럼 구체화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발상의 전환만 하고 인간의 언어표현 약속만 바꾸면 아주 쉽게 실현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실감나게 체험하고 있는 충격적인 많은 변화와 개혁, 그리고 정보화시대라는 새로운 문명이 요구하고 있는 사유체계의 혁명은 선이 1천5백 년 동안을 거듭 설파해 온 그것과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선과 정보화시대의 사고가 일치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인류문명의 본래면목이 그러해야 하는 것인지를 가름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선리와 정보화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보화시대의 세계적 선두 주자인 미국의 빌 게이츠와 일본의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 사장은 많은 저명 대학의 초청 강연과 매스컴 인터뷰에서 ‘정보화시대의 핵심 요소는 아이디어와 감수성’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아이디어와 감수성은 말을 바꾸면 창의력과 직관력이다. 바로 정보화의 핵심 요소인 창의력과 직관력은 선수행의 핵심 내용으로 누누이 설파돼 온 것이다.

선수행이란 사물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창의력과 직관력의 배양이며 고양이다. 돈오(頓悟)니, 견성이니 하는 깨달음도 고양된 창의력과 직관력의 전광석화 같은 폭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가(禪家)는 창의력과 직관력이 배양되지 않은 제자를 절대 인가(認可)하지 않는다. 요사이 말로 하자면 그런 제자는 결코 졸업장을 수여하거나 학위를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제자들 역시 자신의 창의적인 독창성과 주체성을 금과옥조로 여겨 스승의 선법(禪法)을 맹목적으로 암기하거나 추종하지 않았다. ‘덕산의 법을 이었으나 덕산의 선법만은 긍정하지 않는다(嗣德山 又不肯德山).’ 방(棒 : 몽둥이질)으로 유명한 덕산선감 선사(782∼865)의 사법 제자 암두전할 화상이 스승의 선법에 맹종하지 않겠다는 독자성을 선언한 사자후다. 암두는 선종 법계(法系)상 분명한 덕산의 법제자다. 그러나 암두는 “덕산의 선법만은 긍정할 수 없다.”는 말로써 스승과는 다른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선법을 펴고자 했다. 또 그의 법화(法化) 역시 사뭇 덕산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음도 사실이다.

‘위산에서 30년 동안 밥을 얻어 먹고 똥을 누었지만 위산의 법만은 배우지 않았다.’ 위앙종 개산조인 위산영우 선사(771∼853)의 사제(師弟)로 위산이 제자 앙산혜적 선사에게 법을 전해 종문의 기틀을 확고히 다질 때까지의 시간적 틈새를 메우면서 위앙종이라는 선종 종파의 초석을 놓는 데 크게 공헌했던 장경대안 선사(793∼883)가 자신의 독창적인 선법을 밝힌 말이다. 장경대안은 위산과 한 스승 밑에서 배웠고, 30년 동안을 같이 살며 같은 선지를 펼쳐 왔지만 그 방법과 천착하는 안목은 전혀 같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암두와 장경이라는 두 선사가 토해낸 사자후는 한 마디로 선이 창의적인 독자성을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드러내 보인 단적인 예다.

견성에 이르는 선의 방법론은 전적으로 ‘직관적 통찰’에 의존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논리적 분석이나 사량적(思量的) 분별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을 한눈에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는 게 선의 진리 접근 방법이다. 이같은 선수행의 전통적 테마인 창의성과 직관력은 정보화시대의 핵심 요소와 일치될 뿐만 아니라 구미 선진국에서는 이미 그 선리를 실용화하고 있다. 특히 정신분석학은 선리를 학문 영역과 임상치료에 폭넓게 활용한 지 이미 오래다. 근래 경영학에서도 ‘직관경영(intuitional management)’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20세기의 경영은 한 마디로 분석경영이 풍미했다.

기업을 시작하려면 원가분석·시장조사·마케팅 전략 등 치밀한 분석을 거쳐 성공을 확신할 수 있어야만 착수했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남미·러시아 등을 강타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현대 분석경영이 성공의 만능은 아니었다. 가령 도심에 칼국수집을 하나 여는 데 한 번 지나가다가 대충 보고 ‘여기면 될 만하다.’는 직관적 판단을 내리고 시작하는 경우가 오히려 그 지역의 집세, 사무실 근무 인원, 점심시간의 유동인구 산출 등을 꼼꼼히 따져 보고 시작한 분석경영의 기법보다 더 성공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관경영의 대표적 사례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난날 중동 건설공사에 건자재를 바디선으로 운송한 예와 서산 간척지 공사 때 고철선으로 바다의 급류를 막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본 경우를 들 수 있다. 정회장의 두 가지 사례는 초등학교 학생에게 물어보아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같은 경영기법은 비분석적인 직관적 판단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결과는 막대한 운송비 절감과 공기 단축이라는 엄청난 경영효과를 가져왔다.

물론 직관경영이 만능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때로는 직관력이 치밀한 분석력보다 더 정확하고 사물의 본질 접근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렵다. 스포츠에서 선이 실용되고 있는 생생한 예를 하나만 보자. 미국 프로농구(NBA)의 시카고 불스팀 감독을 1998년 시즌까지 맡았던 유명한 필 잭슨 감독의 얘기다. 그는 1994년 시카고 불스팀이 3년 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자 스포츠 기자들이 몰려들어 회견을 하면서 “3연패를 달성한 선수 훈련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선수들을 선적으로 훈련시켰다.” 필 잭슨 감독의 간략한 대답이었다.(〈뉴스위크〉 1994년 6월 24일자) 과연 그가 말한 ‘선적인 훈련’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선수들로 하여금 승부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는 얘기다. 선이 지향하는 주관적 유심론의 실천구조는 바로 ‘무심’이다. 필 잭슨 감독은 바로 이 선적인 무심의 경지를 선수들에게 체득시켰던 것이다. 모든 감독과 코치들이 입으론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힘껏 뛰라고 말한다.

선수들 역시 관념적으로는 그렇게 하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세속 인간인지라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선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승부에 속박당하면서 긴장과 압박감을 갖게 된다. 필 잭슨 감독의 ‘선적인 훈련’은 바로 이같은 구두선(口頭禪)이 아닌 선적인 수련을 통한 무심의 체득이었던 것이다.

그는 선수들을 코트에 들여보내기 전 잠시의 틈새 시간이라도 내서 좌선을 하게 해 무심의 심지(心地)가 흔들리지 않도록 안정시켰다. 시카고 불스팀의 시합 전 좌선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단 1분, 5분씩이라도 꼭 한다. 현재도 시카고 불스팀의 참선은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류문명 건설이 시작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과연 선이 시대 사조에 얼마나 부합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선이 실용화되고 있는 사례들을 몇 가지 예시했다. 여기서 우리는 선의 핵심 내용과 정보화시대의 핵심 요소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 선이 새로운 세기의 대안사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져봐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3. 선과 자연

  1. 계곡물 소리가 바로 부처님 설법인데
    산빛인들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랴
    여래의 8만4천 법문을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 이처럼 드러내 보일 수가 있을까.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며 선리를 깊이 천착, 자신의 문학과 인생에 나침반으로 삼았던 소동파 거사(1036∼1101)의 〈계성산색(溪聲山色)〉이라는 오도송이다. 자칭 ‘전생에 중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던 동파는 여산 동림사의 동림상총(東林常聰) 선사를 참문하고 바위나 산천초목도 부처님과 똑같은 설법을 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화두를 받았다.

그는 귀로에서 여산 폭포의 비류(飛流)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순간 화두를 타파하고 활연대오했다. 〈계성산색〉이라는 게송은 그가 견성의 순간에 느낀 선열(禪悅)을 읊조린 선시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인도불교가 A.D. 68년 중국에 전래돼 현학(玄學)·노장철학 등과 어우러져 실천적이고 일상적인 선종(禪宗)이라는 중국불교로 개혁되면서 선은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모든 선리를 자연의 섭리로 비유해 설파했다.

특히 중국 선종 6대 조사(祖師)인 조계혜능 대사(638∼713) 이후의 ‘조사선’에서는 자연의 섭리와 불법이 하나로 일치돼 모든 선의 경계(境界)가 자연을 빌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표현됐다. 우리는 여기서 선이 얼마나 자연친화적이며, 자연을 단순한 인간의 공리적(功利的) 친화를 넘어선 불법 그 자체로서의 ‘성역’으로 받들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선사상·선철학을 관통하고 있는 모든 선리는 한 마디로 ‘자연’ 그 자체다. 선은 자연을 인간의 스승으로 받들며 배우고자 했고 적어도 인간과 자연을 동격시했다. 이는 서구사상과 철학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자리매김해 자연을 지상의 하느님 대리자인 인간의 하위개념으로 인식하고 복종시키려 했던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다. 여기서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면 자연은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다는 발상의 개발전략이 나왔다.

오늘의 환경오염이라는 인류 최대의 재앙은 바로 이러한 ‘개발지상주의’가 빚어낸 인과응보의 비극이다. 잠시 동파의 오도송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계성산색〉이라는 자연의 경계를 빌려 설파하고자 하는 선리는 대충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계곡물 흐르는 물소리와 산색의 순수함에서 심금을 울리는 우주의 노래를 듣는다. 하지만 이를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실존적인 체험이었을 뿐 언어를 초월한다. 그에 대해 말하려 해도 비슷하게나마 설명하기 어렵고, 옳지도 않다.

오직 ‘침묵’만이 그 실존적 체험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근본 질서에서는 모든 빛깔, 모든 소리가 부처님의 빛깔이요 소리다. 이같은 논리는 선정(禪定)에 들어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그 비운 자리에 산천초목이 들어와 앉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다고 이를 만유에 신(神)이 내재한다는 ‘범신론’과 동일시해서는 결코 안 된다. 다만 나와 산천초목이 필요에 따라 하나가 돼 일체를 이루었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는 각각의 개체가 되는 ‘회호의 원리’일 뿐이다.

선은 주체적인 개체성·개성주의를 철저히 신봉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즉각 부처로 인정한다. 이것이 ‘중생이 바로 부처(衆生是佛)’라는 선가의 가르침이다. 선가의 좌선과 합장 자세는 천지가 무너져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으로서 어떠한 권위로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지면서도 두 손을 모은 합장은 사람을 때리거나 싸우지 않겠다는 ‘평화의 상징’이다.

자연 경계를 빌려 선리를 설파하는 전통은 선림에 많은 선시(게송)와 낙도가(樂道歌)를 남기면서 자연을 선적(禪寂)의 고향으로 삼았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柳綠花紅).” 선사들이 심오한 불법의 진리를 선적으로 설파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른 자연 현상이 바로 비로자나불의 법신이 현현한 것이라는 얘기다. 선은 바위나 돌 같은 무정물도 불성을 가지고 있고 불법을 설한다고 본다.

6조 혜능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남양혜충 국사(?∼755)가 무정물도 불법을 설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갈파한 이래 이 소식을 지음(知音)해야 비로소 선리를 깨닫게 된다는 선풍이 풍미해 왔다. 21세기의 화두인 ‘환경’은 바로 자연이다. ‘환경’이라는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선의 자연친화사상이 절실히 요구된다. 물론 노장사상도 자연친화적이고 여타의 사상도 자연을 중시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선사상 속에는 노장사상이 상당히 녹아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서구문명이 환경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노장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다가 선사상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도 이처럼 선사상 속에 노장사상이 수용돼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선사상이 21세기 환경문제를 풀어나갈 대안사상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힐 수 있느냐의 여부는 선학의 발전적인 연구와 실천적인 역할을 얼마만큼 수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다.

확실한 점은 선만큼 자연친화적이고 자연을 경외하는 사상도 없다는 사실이다. 6조 혜능 이래 조사선을 관통하고 있는 선사상의 핵심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도 곧 자연의 도를 말한 것이다. 평상심이란 자연심, 곧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껴입는 일상생활을 이끌어가는 소박한 마음이다. 평상심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바로 그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일상생활 속에 모든 진리가 내재한다고 보는 ‘평상심시도’야말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선리의 극치다. 수많은 선사들의 낙도가 역시 자신의 생명을 자연의 질서에 맡기고 산야를 소요하면서 사는 임운자연(任運自然)의 산거(山居)를 다시 없는 선경(禪境)으로 읊조려 왔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선이 20세기 현대문명의 종말을 불러온 환경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4. 도반의식과 복지

‘환경’과 함께 21세기의 양대 화두인 ‘복지’는 상호 연대감과 인류 공동체 의식을 절대 필요로 한다.

국가정책적인 사회복지만으로는 모든 인간의 사회적 불평등과 넓은 의미의 복지를 해결하지 못한다. 복지문제는 공동체 의식을 열쇠로 해서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림의 도반(道伴)은 단순한 ‘길동무’가 아니다. 진리의 길을 함께 가고 있는 반려자로서 ‘나’를 버려 ‘너’를 구하고 생명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적 운명을 갖는 게 도반의식이다.

승려의 출가는 부모·형제자매·일가친척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처자식까지 일체의 혈연 관계를 단절하고 떠나는 것이다. 자기를 낳아 준 부모와의 혈연 관계를 끊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독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승려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을 ‘가출’이라 하지 않고 ‘출가’라 하는지도 모른다. 자기 생명의 세속적 근원인 일체의 혈연 관계를 청산하고 불문에 들어서서 만나는 사람은 전혀 남남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형사제라는 도반의식으로 전혀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면서도 속가 형제보다도 훨씬 강한 인간 관계를 새롭게 형성한다. 이것이 선가의 도반이다.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피붙이를 신임하고 사랑한다. 자고로 인간 관계에서의 믿음과 연대감은 혈연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돼 왔다.

그런데 어찌 생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과 혈육의 형제보다도 더 끈끈한 형제애와 믿음을 공유할 수 있단 말인가. 최근 중국의 신간 선학서에 선림의 도반의식이 산업사회의 ‘주식회사’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밑거름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 같은 논거의 요지는 주식회사가 혈연 관계를 떠난 남남이 모여 출자를 하고 또 대량의 타인 관계인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믿음’은 바로 선가의 도반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자급자족의 농경시대는 모든 노동인력을 사돈에 팔촌까지를 동원하는 혈연 관계의 인력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이미 대지주의 장원경제 체제가 시작되면서부터는 혈연 관계를 넘어선 다수의 인력이 필요해졌다. 더욱이 근대 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 체제의 대기업은 혈연 관계를 통한 ‘믿음의 노동력’만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이때 어떻게 전혀 피 한방울 나누지 않은 남과 자본을 함께 투자하고 직원을 믿고 고용할 수 있겠느냐는 심리적 갈등을 해결해 준 게 선가의 도반의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서양식 사고로는 ‘계약사상’에 의존해 이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남을 믿고 고용해서 회계직·경리직 등에 앉혀 돈주머니까지 맡기는 ‘믿음’의 문제가 계약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흔히 조그만 식당·찻집 등을 경영하면서 카운터는 반드시 식구나 또는 친척에게 보도록 하는 경우를 본다. 그런데 항차 어마어마한 현금이 날마다 입출되는 대기업에서 남에게 돈주머니를 맡기고 관리하게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감시와 감사를 하는 제도적 장치를 해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심리적 불안과 갈등이 해소되지는 못한다.

남을 믿고 고용해 육체적 혈연 관계 이상의 신임을 할 수 있는 주식회사의 운영은 선림의 도반의식을 도입하면 그 원리가 한점의 의혹 없이 설명된다. 70년대 남미를 풍미했던 해방신학의 독재 타도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연대(Solidarity)’나 현재 한국에서 크게 부상하고 있는 ‘4·13총선 시민연대’ 같은 연대의식도 하나의 도반의식에 기초한 시민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복지의 개념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단순한 물질적 구원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정치·환경 등 광범위한 포괄성을 갖는다. 21세기 인류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는 따라서 도반의식과 같은 확고한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 상호의 신뢰가 밑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처럼 훌륭한 선가의 도반의식이 오늘날 선림에서조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찌들고만 세태를 따라 승려들의 도반의식 역시 그 형해만이 전승되고 있을 뿐 본래의 믿음과 공동운명체적 결사의식은 크게 후퇴한 게 사실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21세기의 화두인 ‘복지’를 해결하는 데는 선가의 도반의식과 버리는 것이 곧 얻는 것이고, 확 비우는 것이 곧 꽉 채우는 것이라는 선리를 따라 나의 소유를 나누는 정신적 소양을 함양할 필요가 있다.

선이 설파하는 역설의 논리는 모든 소유와 번뇌망상을 한순간에 털어버리는 ‘방하착(放下着)’과 ‘하심(下心)’이라는 화두를 통해 극적으로 묘사돼 왔고 ‘무소유(無所有)’라는 선적인 삶을 종착점으로 하고 있다. 선이 이 시대의 과제인 복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사상으로 부상하는 데는 보다 깊은 연구를 시급히 진행해야 할 것 같다.

위에 제시한 필자의 관점들만으로는 오늘의 복지문제들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우선 일단의 가능성을 제시해본 수준일 뿐이다. 솔직히 이 문제는 오늘의 선가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선이 하나의 ‘대안’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용기도 없다. 다만 선의 본래면목을 되살린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만하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5. 결어

“독일의 책방 종교책 코너를 살펴보았더니 선(불교)에 관한 책이 전체의 5분의 3에 달하더라.” 1996년 독일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한 서울 중앙 일간지 기자의 생생한 전언이다.

필자는 당시 이같은 한 동료 언론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는 임기가 끝나 책이나 좀 사가지고 오려고 시간을 내 시내 큰 책방을 여러 차례 들렀다고 한다. 평소 종교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수차례 그냥 지나치다가 마지막에 허허실실로 종교책 코너를 살펴보았단다.

서구 기독교 문명권이니 종교책 코너는 기독교 관련 서적 일색이리라는 선입관을 가졌던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육조단경》이나 조사들의 ‘어록’이 상당수 이미 영역됐고 불역·독역됐다는 얘기까지는 필자도 익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지성지를 대표하는 《르 몽드》지 1면의 전단 광고로 선에 관한 책이 광고된 것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독일 특파원을 지낸 동료 언론인의 이야기를 듣고는 등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 (son·zen·chan)’은 동아시아 불교의 대승선을 말한다. 조사선으로 대표되는 대승선의 원산지는 한·중·일 3국이다. 요사이는 일본 선학자들이 앞서 선을 구미에 소개하면서 일본식 발음을 따라 ‘zen’으로 표기됐던 선이 그 원산지인 중국의 발음을 따라 ‘chan’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조사선의 본고장은 분명히 동아시아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 선에 관한 연구와 책이 오히려 구미에서 쏟아져 나오고 다방면의 실용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동아시아 3국은 오히려 선학 연구를 서구로부터 역수입해야 되는 건 아닌지……. 1999년 가을·겨울 여성 패션이 ‘선 패션’이었다.

여성들의 윗저고리는 깃이 넓은 동정형이고 색깔은 갈색이었다. 헤어 스타일은 짧게 깎아 올린 단순형. 선은 이처럼 여성들의 패션에까지 응용되고 있고 심지어는 음식장사에도 선을 내세운 ‘선식(禪食)’이 등장했다. 일종의 채식이지만 선의 이미지가 그만큼 대중화됐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패션의 갈색은 선이 그처럼 친애해 마지않는 자연 동물들의 색깔이 주로 갈색이 많다는 데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선사들은 ‘소’를 전형적인 보살도의 상징으로 자주 제시하고 진정으로 깨달으려면 ‘동물이 되라(異類中行)’고 설파한다. 동물은 자연의 일부다. 그래서 선은 사람이 동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선이 세기의 대안사상이 될 수 있는가를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날로 점증하고 있다. 관념적인 추론이 아니다. 선의 원리가 정보화시대라는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속속 실용화되고 있고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널리 조명되고 있다.

문제는 선의 본고장인 동아시아가 선리를 깊이 천착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제시해 나가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하겠다. 어찌 보면 서글프기조차 하다. 선의 통합론적이고 일원론적인 사유체계는 앞으로 다가올 새 천년의 세기들이 문화의 세기·정신문명의 세기·종교의 세기로 전망되는 오늘에서 새 문명의 나침반이 될 만하다는 기대를 져버릴 수 없다.

이미 문학·음악·영화 등에서 장르의 벽이 허물어져 이분법적인 구분이 없어져 가고 있다. 실례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구분은 이미자·패티 김·조용필 같은 대중 가수들이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같은 클래식 전용 무대에 당당히 섬으로써 그 장르의 벽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현상을 우리는 세기말에 똑똑히 목격했다. 문학도 장르를 서로 넘나드는 ‘담론(談論)’이 풍미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결코 아니다. 세계적인 추세다. 이른바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문화현상의 장르 파괴도 만물일여(萬物一如)를 설파해 온 선리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정보화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많은 실제적 현상들을 모두 그물에 고기 낚듯이 선리로 설명하고 감싸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본래면목은 선리대로 전개되는 게 우주의 섭리가 아닌지를 폭넓게 연구하면서 선사상이 20세기 이후의 대안사상이 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뜻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불교라는 일개 종교 차원의 편협한 자만심이나 공리심은 절대 금물이다. 우선 선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류문명에서 보편윤리로, 보편사상으로 자리잡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확신을 갖는 세계의 지성들이 날로 늘어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끝>

이은윤
공주사대 영문과 졸업.태안고.천안공고 교사.중앙일보 기자. 문화부장.논설위원.편집국장 대리.문화스포츠 섹션 담당 국장. 종교전문 대기자 역임. 현재 한국불교 선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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