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현대철학이 불교를 주목해야 할 이유,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필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인격을 정립하고 현대라는 공간의 성격을 확인할 것이다.

철학하는 자에게, 아니 보다 넓게 인간의 삶의 방식을 반성하고 그 삶의 조건으로서의 현대문명의 성격을 성찰하는 자에게, 현대문명 전반에 대하여 불교적 인격이 발하는 불찬성, 이의, 반대의 목소리를, 작지만 천둥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한다. 불교적 인격을 기술하기 위해서 초기불교의 석존이나 고려의 보조 국사 지눌을 택하지 않고 현대의 법정을 택했다.

그 이유는 그의 글 안에 불교적 인격의 모습과 그 인격에 비친 현대의 성격이 선명하게 포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정은 1960년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아름답고 쉬운 한글로 된 서정적이며 이지적인 수필을 통하여 선(禪)의 소리를 인간의 거리로 전달해 주고 있다.

그의 수상집이 수년 전에 이미 수백 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하니 해방 이후 그 어떤 불교인보다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선이 선방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활로를 찾아 인간의 거리로 뛰쳐나와야만 비로소 창조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수상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가 관찰하고 사유한 자연의 소리, 인간사, 그리고 음악, 미술 등의 예술이 가진 미에 대한 얘기 또한 담고 있다. 필자가 특히 주목하려는 부분은 그가 그려낸 불교적 인격의 특성과 현대라는 공간의 성격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박법정(1935∼ )은 전통적 선사라고 할 수 있는 이효봉(1888∼1966)을 은사로 득도하고, 1970년대 수년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남의 송광사에 부속된 불일암에 주석하다가 6, 7년 전부터 강원도의 산골로 거처를 옮겨 독거하고 있다. 독신 수행승이 된 일, 승단의 일원이 되는 일, 그리고 독거하는 일은 인간이 바로 살아가기 위해서 공간 선택이 긴요함을 말해 주고 있다.

2. 불교의 사명:본래적인 자아의 회복

법정의 불교 이해는 다분히 실존주의적이다. 실존·존재·단독자·본래성 등의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1)

그에게 불교는 본래적인 자기의 회복을 약속해 준다. 출가의 참된 의미는 비본래적인 자기로부터 벗어나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가는 데에 있다.

부처님은 ‘본래적인 자기’로 귀환한 사람이며, 불교는 ‘인간의 본래면목’이 어떤 것인가를 자각케 하는 문을 마련해 놓은 종교이다.2) 중국 당의 임제(臨濟:?∼866/867)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나 나한을 만나면 조사나 나한을 죽인다.”는 말, 무위진인(無位眞人)이란 말도, 모두 본래적인 자기의 회복 또는 자신의 존재의미의 확인, 또는 본래의 건강의 회복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 자기를 당당한 실존이라고도 했다. 본래적인 인간의 특성은 무엇인가? 먼저 개성과 창조에 있다. 획일과 범속의 강물에 휩쓸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기의 특성을 일깨우면서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 불교는 자기 빛깔과 자기 소리 찾기를 가르쳐 주는 종교이다.

무아란 말도 비본래적인 자신을 털어 버림으로써 본래적인 자신을 크게 일깨우라는 뜻이다. 본래적인 자기의 또 다른 특성은 사유의 태도이다. 사유의 특성은 자연과 사물에 대해서 셈하지 않는 태도로, 무소유와 개방의 태도로 나타난다.

법정이 즐겨 읽은 생택쥐페리(1900∼1944)의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빌리면, 새로 사귄 동무 얘기를 했을 때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들은 “나이가 몇이냐? 형제가 몇이냐? 아버지가 얼마나 버느냐?” 하고 묻는다.

이는 계산주의적 태도이다. 사유의 태도에서는 “그 동무의 목소리가 어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를 채집하느냐?”라고 물어야 한다고 했다.3)

법정은 불교의 말을 빌려 사량분별(思量分別, 비즈냐나:vijn??a)을 분별망상의 지식으로, 프라즈냐(prajn?)를 무분별의 지혜로 각각 불러 대조하고 있다. 법정은 사람들 특히 지식인은 분별하고 사량하기를 좋아한다고 본다. 많이 알고 있다는 말은 복잡하고 미묘하게 분별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외부적인 지식에만 의존할 때 자기 언어와 사유를 잃는다. 소외감도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사량분별이 말 그대로 대상을 사량하고 분별하는 능력이라면, 지혜(般若)는 대상에 대하여 무소유와 개방, 공감의 태도다. 이런 의미에서 선이나 명상이 기본적으로 혼자 있음이지만 혼자 있음으로 인격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인격은 다른 생명 공동체―인간적인 이웃과 자연, 그리고 우주―와 더불어 살아갈 때 비로소 완성에로의 길로 간다고 할 수 있다.

3. 생명 공동체:인간, 자연, 우주

법정의 본래적인 자기찾기는 욕망의 자아를, 소유와 탐닉에서 나를 확인하려는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이웃, 자연, 우주 전체를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느끼고 공존하려는 것이다.

이런 자아관은 그의 불교적 행복관으로 이어지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상적인 인간에 찬성할 수는 없다. 일상인들은 “행복은…… 절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4) 는 말을 믿지도 실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대한 언급을 살펴보자. 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구도와 사회적인 행위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고, ‘자연의 소리’와 ‘우리 시대 세상의 소리’, 이들 두 종류의 소리를 들어왔다고 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홀로 지낼 때가 많으면서도 의식의 흐름은 늘 세상과 함께 이어져 있으며, 사람은 원천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기본적인 구조는 세상에 있음이요, 세상에 있음은 함께 있다는 뜻이니, 세상을 떠난 개인의 삶은 그 의미가 없게 된다고도 말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불교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이타적인 비(悲)의 실천보다는 개인의 무사안일에 탐닉하고 있는 것 같다는 질책도 아끼지 않았다.5) 법정은 한때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반독재 민주회복 투쟁의 선봉에 섰던 월간지 《씨알의 소리》의 편집위원이 된 적도 있었고, 서울 봉은사에 머물며 어용화된 불교종단의 사시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대표적 반정부인사였던 함석헌(1901∼1989)과 장준하(1918∼1975)를 가까이하면서 민주수호 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 서명 운동에 참여했다.

수상집 《서 있는 사람들》은 그 책제목을 통해서 70년대 정치적 사회적 여러 연유로 자리를 잡지 못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민을 표출하고 있다. 법정은 사람이 원천적으로 사회적 존재라고 하기도 하고 이 땅에 민주실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적도 있지만,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1. “……당신과 나 인간 개개인이 변화하지 않고는 세상은 결코 변화될 수 없다. 현재의 이 사회와 세상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회가 우리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어떤 틀 속에 밀어넣고, 또 그 틀은 사회라는 구조 속으로 우리를 밀어붙인다.”6)

우리가 사회를 만들고, 사회가 또 우리를 만든다고 했다. 사회가 하나의 구조로서 우리를 틀 속에 밀어 넣는다고 하면서도 개개인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변화와 사회 변화, 이것들 둘 중 한편이 다른 한편에 우선된다고 하기보다는 상호 관련되어 있음을 더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상호관련성보다 개인 변화를 더욱 강조한 적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사회와 정치 공간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식을 갖게 되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광장과 [사유의] 뜰은 다르다. 광장에는 군중의 집회만 있지, 사색의 여백은 없다. 요 근래에 광장에서는 누런 정치의 냄새만 풍긴다.

그러나 뜰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사(私)적인 생활의 푸른 여백이다. 우리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저마다 생각의 공간을 지녀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 사유의 뜰이 없다. 아쉬운 일이다.7)

정치적 광장과 사유의 뜰 사이에서 택일의 문제에 부딪히자 법정은 정치의 색깔은 누렇다 하고, 사적 공간은 푸르다고 해서 후자를 선택했다. 건강하고 푸른 사적 공간의 확보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왜 푸른 색깔이 정치 영역에서는 확보될 수 없다고 보았을까.

민주 수호를 위한 그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성공하지 못한 노력이었을까. 다음으로 자연이라는 생명 공동체에 대한 법정의 이해를 살펴보자. 그의 자연에 대한 감수성과 교감력은 놀랍고 그 표현은 아름다워 선입견 없이 수상을 읽노라면 독자는 자연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법정은 물미역을 먹을 때 해안선에 밀려드는 물결소리와 갈매기 울음을 함께 들을 수 있으며, 제초제로 죽어 가는 장미를 보고는 ‘내 출혈 같은 아픔’을 느낄 수 있고, 해질녘에 피는 달맞이꽃을 ‘애들’이라고 부를 만큼 친근감을 가지며, 철지난 뜰에서 져버린 꽃들의 넋을 그리워 할 수도 있었다.

이런 교감력은 동물에까지 확장된다. 모기, 금붕어를 가족처럼 느낄 수 있으며, 쥐에게 설법했는데 그 쥐가 알아들은 것 같다는 경험도 말하고 있다. 나아가 반드시 유정(有情)의 존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끼 돋은 돌을 방에다 들여놓고 서로 듣고 눈길을 주고받으며 한겨울을 났다는 얘기도 있다.

법정에게 자연은 이용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공존, 감사와 환희의 존재이고, 거룩함과 신성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해는 해님(또는 일광보살)이고 달은 달님(또는 월광보살)이며, 그들의 고요한 음덕에 우리가 두 손을 모을 존재이다.

생명에 대한 법정의 사유는 자연계와 우주에까지 확장되어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에서 나는 우주의 호흡이 내 자신의 숨결과 서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라고 했다.8) 본래적인 자아라면 빗소리 안에서 나와 우주가 서로 이어지거나 일치되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4. 감성의 회복:머리보다는 가슴과 손발

본래적인 자기를 회복하고 다른 인간과 자연, 우주 사이의 연결이나 일치는 사량분별하는 머리로 되는 일이 아니라 감성으로 되는 일이다.

감성이 회복돼야 한다. 법정에게 감성의 회복은 청각을 비롯해서 시각, 후각, 미각 등의 감각 전체의 회복을 뜻한다.

감각의 억제나 절멸이 아니라 그 해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성이 너무도 팍팍하게 메말라 있다. 머리와 입을 가슴과 발에 대조시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머리와 입만 커다랗게 열려 있지 가슴과 발은 점점 퇴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인간으로 팔팔한 생명의 빛을 잃어간다. 따라서 대지와의 관계가 그만큼 멀어지고 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대지는 모든 생명의 근원, 선은 대지와 밀착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의 단련이다.9) 현대인에게 머리와 입은 발달하고 가슴과 발은 퇴화되어 있다. 그래서 생명의 빛을 잃어 간다고 했다. 생명의 중심은 가슴에 있다.

사랑도, 다정한 눈빛, 정겨운 음성이 모두 가슴에서 나온다. 그 중심이 마비되면 죽음이 온다. 그런데 현대문명은 머리를 과신하는 대신 가슴과 손발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거기에 문명의 병이 있다. 머리, 물질, 현대문명이 모두 한 통속인 셈이다.

가슴의 따뜻함이 사람됨의 조건이고, 이웃과 사물과의 조화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10)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가 아니라 가슴이 따뜻한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5. 수행론:선(명상), 관법

현대라는 공간에서 분별의 지식을 어떻게 반야로 심화시키고 사유하는 본래적인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가?

선(禪) 또는 명상을 해야 한다. 선이란 앞서 말한 대로 “대지와 밀착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의 단련이며, 좌선 그 자체가 본래적인 자아의 살아 있는 모습이고 대안락의 법문이다.”11)

마음과 몸은 내 몸이고 내 마음이므로 선 또는 “명상은 홀로 하는 정진”일 수밖에 없다.12) 심신의 훈련과 정진이 필요하다고 한 점에서 법정은 진정 불교적이다. 본래적인 자아의 회복을 위해서는 외부의 정보에서 벗어나 홀로 있으며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기의 일상을 객관화하여 반성하고, 철저한 자기응시를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각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과다한 접촉으로 인해 홀로 있는 시간을 거의 잃어버린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밀(密)에서 툭 트인 허(虛)를 익힐 필요가 있다. 무심한 경지가, 순수의식의 상태가 아쉬운 것이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순수해지고, 궁리를 하며, 가장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깊은 것을 들여다보게 되고, 높은 것에 눈을 주게 된다. 죽음과 영원 같은 비일상적인 것을 헤아리게 된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은 텅 빈 데에 오묘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텅 비우지 않고는 새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자기 생명의 우물을 고이게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내심 또는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일을 ‘관(觀)’이라고도 했다. 자연과 마음(내면)의 소리듣기로 나타나는 관법(觀法)을 권유하고 실행하고 있는 법정은, 수행법이 반드시 선불교의 화두선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다고 여기며, 초기불교의 경전인 중아함 《염처경(念處經)》에 제시되고 있는 몸·느낌·마음·현상(身受心法)에 대해서 똑바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끊어 버려야 한다고 해서 사념처 수행도 지지하고 있다.

날마다 가까이서 부딪치는 사람이나 사물이 곧 선지식일 수 있고, 내 운을 띄우고 깨우쳐 주는 대상이 곧 선지식이니,13) 선지식도 선사만이 아니고 결코 먼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빈 마음으로 귀를 열어 놓아 자연의 질서에 귀를 기울이는 길은 마음의 때를 정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연과 내면의 소리듣기는 본래적인 자신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그의 글은 소리듣기 얘기가 많다. 소리듣기의 대상은 새소리, 바람소리, 토끼나 노루가 푸석거리면서 지나가는 소리, 꽃피는 소리, 시드는 소리, 지는 소리, 그리고 심지어 세월이 한숨 쉬는 소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듣기는 마침내 곧 나의 내면의 뜰을 들여다보는 일로 이어진다.14) 관이라 하든 참선이나 명상이라고 하든 이것들은 모두 “마음의 고요와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이다.”15)

6. 현대도시문명 비판과 종교의 사명

법정에게 현대사회는 “과잉소비 사회”이고 “포식사회”로 “인간을 멍들게 하고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만든다.”16)

현대인은 “기계문명의 자손들”이며, “이른바 신흥종교인 텔레비전교의 신자들이요 영상의 노예들”이며17) 소리에 중독된 자들이다.

현대인이 하는 일, 텔레비전과 라디오, 인간의 특권인 직립보행을 앗아가는 자동차, 이것들 모두가 사유를 앗아간다. 그 결과 시정인은 범속한 동질화에 빠져서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소비자’로 불리는 수많은 개인이 그 소비를 통해서 직접, 간접으로 물과 공기를 더럽히고 있다.

그러니 적게 쓰고 적게 버리는 일은 이 시대의 미덕이다.”라고 했다.18) 소비자로서 우리는 행복을 얻었는가. 아니다. 도리어 “마음은 안정을 잃고 자연환경은 날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인간의 행복은 생산과 소비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친숙하고 조화로운 관계에 의해서 행복은 보증된다.”19) 과다한 소비는 행복을 주지 않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깨고 말았다고 한다. 법정은 명상을 위해서는 “될 수 있으면 눈과 귀에 방해물이 적은 고요하고 깨끗한 방”이 필요하다 하고,20)그와 같은 장소를 선택했다. 인간의 정서를 이루는 데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빛과 소리라고 여긴 법정은 도시공간에서 발생하는 빛과 소리는 명상이나 참선을 방해한다고 본다.21)

명상을 위해서 반드시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텔레비전 등에서 나오는 빛과 소리는 기본적으로 번뇌, 무심히 마음 열기, 잔잔한 평안과 기쁨을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바로 여기에 현대 도시문화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있다.

본래적인 자기를 각성시키는 것, 갖가지 현대문명의 해악으로부터 인간을 풀어 주는 것이 종교의 기능이다. 불교를 제대로 수행한 불교인이라면, 그가 근본에서부터 현대문명의 여러 측면을 비판하게 되리라는 점은, 법정이 문명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를 대조하고 후자의 편을 들 때에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생명의 질서가 없는 문명의 소리는 우리 마음을 자꾸 흐트러 놓으면서 어지럽히지만,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완벽한 생명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듣는 마음을 정결하게 맑혀 주고 편하게 가라앉혀 준다고 본다. 관과 사유를 위해서는 자연과 시골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사유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삭막한 도시나,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뒤덮인 길가가 아니라 잡초가 무성한 오솔길이다. 오솔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새롭고 생각도 맑고 싱싱하게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도시에는 그런 뜰과 오솔길이 거의 없다. 있어 보았자 거닐 여가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거리에서는 교통지옥으로 사무실 안에서는 숫자놀음으로 항상 시간의 여유도 없다고 했다.22)

7. 반인간중심주의적 태도

인간이 스스로 자연과 우주의 중심에 자리 잡고 둘레에 있는 것을 종속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소유, 이용, 전유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를 인간중심주의적인 태도라고 해보자.

이 태도는 본래적인 자기의 것은 아니다. 해님과 달님이라는 말속에 자연에 대한 경애과 일치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었다.

‘잡초(雜草)’로 불러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 표준설정은 인간의 오만일 따름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들과 함께 살고 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그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이 사람 표준으로만 생각하고, 둘레의 사물을 인간 중심의 종속적인 관계로 여기기 때문에 지금 지구촌에 온갖 이변이 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잡초만 해도 그렇다. 논밭에 자라난 잡초는 곡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뽑아내지만, 잡초 그 자체는 결코 ‘잡초’가 아니라 그 나름의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커다란 생명의 잔치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23)

우리가 곡식을 위해 제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잡초 또한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 잡초라는 말은 농경이라는 인간문화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이런 인간중심의 태도가 비록 유용성을 갖고는 있지만 생명의 잔치를 방해한다. 지구의 온갖 이변도 그런 태도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다.

8. 말과 글, 학자에 대한 비판

법정은 말과 글, 그리고 소위 학자에 대하여 깊이 불신하고 있다. “사실 말이란(글도 마찬가지) 시끄러운 것이고 공허한 것이다.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여기저기서 얻어듣거나 주워모은 관념의 찌꺼기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앎은 말 이전의 침묵에서 그 움이 튼다.”24) 관념의 찌꺼기들을 모으는 자의 대표가 바로 지식인이다. 그런 지식인 또는 학자와 신앙인을 대조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1. 신앙인은 영원하고 참된 것을 찾지만, 학자들은 그 해석을 찾는다. 우리들의 삶에는 해석이 필요치 않다. 삶은 몸소 사는 일과 스스로 체험하는 일과 순간순간 누려야 할 일들이다.

    이래서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신비다. 종교적인 이론은 그 어떤 종파의 것일지라도 생동하는 삶에서 벗어난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 공허한 말의 덫에서 뛰쳐나와 스스로 당당하게 살 줄을 알아야 한다.25)

영원하고 참된 것을 찾는 일은 해석을 찾는 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삶은 몸소 체험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은 신앙인이 되지 못한다. 머리로 안 것을 책이나 논문으로 써서 자신의 이름을 달아 출판하는 일, 이것이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그건 진정한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말과 글은 주로 영원을 찾지 못했을 때, 스스로 체험하지 못했을 때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식인이란 본래적인 삶의 방식과는 관계없이 직업이나 생존의 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삶과 글에 대한 법정의 태도를 보면, 바른 글쓰기에 최소한 두 조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우선 본래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는 일, 둘째 그 글이 독자로 하여금 그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거나 일치시키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말할 때’ 그래서 가사자(可死者)들, 대지, 하늘, 신들, 이것들로 하여금 서로 대면하게 하고 서로 통일되는 모습을 전해준다면, 그때 말과 글은 ‘공허’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26)

9. 법정과 하이데거

법정의 글에는 실존주의 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다. 그가 전문 철학자는 아니지만 하이데거와 그의 사상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어에 대한 생각에서 법정과 하이데거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보았다. 이것 이외에도 법정은 여러 면에서 하이데거와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아래 두 인용을 보자.

매순간 매일 그들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묶여 있다. 매주 영화들이 그들을 일상적이지 않은, 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상상의 영역으로 보내 주고, 세계도 아닌 세계에 대한 망상을 준다. 그림 잡지들은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다. 그 모든 것들――현대의 통신 기술들이 그것들로써 인간을 자극하고 공격하고 몰아대는 그 모든 것들――이 이미 농장 주위의 그의 땅보다 더 가깝고, 땅위에 있는 하늘보다 가까우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것보다 가까우며, 마을의 관례와 습속보다 더 가까우며, 그의 고향의 전통보다 더 가깝다.27)

관점에 있어서 이런 근본적인 혁명이 현대철학에서 발생했다. 이 혁명으로부터 세계와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지위와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다. 세계는 이제 계량적 사유의 공격에 노출된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이 공격 앞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믿어진다. 자연은 거대한 가솔린 저장소가 되고, 현대의 기술과 산업을 위한 에너지 원천이 된다. 세계 자체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원리적으로 기술적인 관계는 17세기 유럽에서 처음 발전되었다.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는 오랫동안 미지의 것이었고, 그 이전 세기와 이전 역사에서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28)

위의 두 인용은 어느 독일 작곡가에 대하여 1955년에 행하고 1959년에 출판되었던 하이데거(1889∼1976)의 추념사의 일부이다. 여기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그들’은 독일인을 가리키지만 현대 도시공간에 살아가는 일반인을 다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비판,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라는 매스 미디어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 하늘, 땅, 자연의 변화에 대한 감수성 회복, 이런 것들은 법정의 글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주제들이어서 위의 인용이 법정의 글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이다.

법정과 하이데거 사이에 보이는 또 하나의 유사성은 계량적(calculative) 사유와 명상적인(meditative) 사유에 대한 구분과 현대인이 후자에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는 지적이다.29) 명상적인 사유도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누구든 나름대로 자기의 방식으로 명상적인 사유의 길을 따를 수 있다고 한 점에서도 유사하다.30)

위의 하이데거의 글에 대지와 하늘이 언급되었다. 여기에 가사자와 신적인 것을 갖추면 저 유명한 4자가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진정한 의미에서 거주하려면 이들 넷이 필요하다고 했다. 죽어야 할 존재로서, 대지 위해서 대지를 구원하고 하늘 아래서 하늘을 하늘로 받아들이며, 신적인 것 앞에서 신적인 것을 신적인 것으로 기대함으로써 진정 거주할 수 있다. 법정이 비록 이들 넷을 ‘거주함(Wohnen)’이나 ‘4자(Geviert)’라는 말 아래 묶은 것은 아니지만,31) ‘4자’에 대한 생각은 그의 수상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법정의 용어인 ‘대안락’ ‘평안’ ‘중심’이란 말은 진정한 의미의 거주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물론 법정과는 다른 점도 많을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작업 배경이 다르다는 점에 있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배경으로 작업을 하며 그 존재 망각의 역사를 비판했다. 또 다른 차이는 하이데거의 근대에 대한 의식을 나타내는 다음 구절이 아닐까 한다.

  1. “우리가 근대라고 부른 시대는 ……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된다는 사실로서 규정된다. 인간은 모든 존재자의 바탕에 놓여 있는 주체(subjektum)이다. 그것은 근대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대상화와 표상가능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32)

근대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되는 일, 사물에 대한 이와 같은 권력의지를 근대라는 시대의 특성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대상화, 표상화, 권력 의지의 발현은 근대만의 특성이 아니라 일상적 인간――범부――, 즉 무엇을 욕망하고 소유하는 인간, 그 중심에 자기를 두는 인간 일반의 특성으로 보고 있다.

비록 법정도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의 차이를 날카롭게 구별하고33) 현대사회를 다방면으로 비판했지만, 사량과 반야의 차이는 초기불교 이래 노상 불교의 골격을 이루어온 것이다. 현대문명의 많은 특성은 근대 또는 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뿌리는 생물의 종으로서의 인간의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0. 나오는 말
:핵심적 질문들, 현대철학이 불교에서 배워야 할 것

법정의 수상은 단순히 맑고 향기로운 자연에 대한 묘사만은 아니다.

그의 수필은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일에 대한 관심, 비판, 요구, 소망을 담고 있어서 일면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는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 회복과 그 자아의 감수성 회복을 불교적 입장에서 표현하고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필자가 그의 글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현대문명, 도시문명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비본래적인, 비감성적인 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불찬성, 이의와 반대의 목소리이다. 이것이 비록 곱고 약해 보이지만 천둥소리로 들어야 한다.

우리가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현대문명의 성격을 성찰하기 위하여 어렵게 하이데거와 같은 서양 철학자를 반드시 읽을 필요가 없다. 법정의 글이 철학자의 소리는 아니지만 그 안에 섬세한 사유와 당당한 반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철학자들이 전문 철학서에만 매달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그 방식에 깊이 관련된 사상과 언어가 안고 있는 한계를 자각하고 그것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것, 색다른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현대철학이 불교의 어떤 부분에 주목하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인간에게 비합리적인 힘――욕망의 이름으로든 무의식의 이름으로든――의 강력함에 대한 불교의 경고를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욕망이라는 비합리의 힘은 우리의 신체에 스며든 것이므로 신체에 대한 훈련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여실지견의 능력(지혜 또는 반야)이 획득될 수 없다.

합리론자들은 인간에게 자율적 이성의 능력이 있다 하고, 그 이성의 토대 위에서 윤리적, 사회적 이론을 펴고 있다. 하지만 신체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는 어떤 합리적 이론도 도로에 그치고 말 것이다.34) 신체의 훈련 없는 올바른 자아의 정립과 자율은 허구라고 하는 것이 석존 이래의 불교의 단호한 입장이다. 그래서 선을 “심신의 단련”이라고 했다.

무명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12연기설은 심신 훈련 없는 모든 인간――철학자를 포함한――이 밟아 가는 무지의 여로를 그려 놓은 것이다. 철학자라고 해도 신체 훈련이 없다면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그러하듯 법정 또한 데카르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서양의 합리론 전통에 대하여 심각한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법정은 하이데거류의 사유와 연대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실재를 명석판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사유주체(Cogito)라고 하든 순수의식이라고 하든 신체와 동떨어진 그런 주체를 상정하는 한, 그리고 영혼과 신체를 이분법적으로 보아서 신체를 영혼 없는 자동기계와 같이 움직인다고 보는 한, 불교는 그런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이성적 주체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권력의 정통성에도 심각한 의의를 제기할 것이다.

둘째, 신체 훈련에 장소 선택이 핵심이란 점을 가르친 일에도 주목해야 한다. 욕망과 소비의 공간이 아닌 양질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승려의 출가는 바로 그런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법정에게 공간에 부유하는 빛과 소리의 성질이 자아 형성의 관건이다. 불안과 평안한 거주 사이의 차이는 빛과 소리의 성질에 주로 기인한다고 하고, 현대의 매스 미디어가 제공하는 것들은 대체로 불안을 낳는다고 보았다.

셋째, 불교가 갖고 있는 근원적 비판력에 주목해야 한다. 현대라는 공간에 몸을 노출시키는 한 본래적인 자아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수상을 읽는 사람이 독서에서 위안을 얻거나 생활상에 약간의 변화를 이룰지도 모르지만, 법정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근원적 비판력은 현대문명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서 위험과 경고를 발하고 있고, 현대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나온 말과 글 자체에 대하여 겸손을 가르쳐 준다.

넷째, 현대문명에 대한 법정의 비판의 소리를 그것과 반대되는 소리와의 관계설정이라는 문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정의 글에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누런’ 정치, 사회, 역사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적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소비사회·후기산업사회·선진정보사회의 증후군과 그 삶의 양식에 대해서 심각한 비판이 담겨 있다. 계량주의적 주체에 대한 비판, 문명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거부,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자’에 대한 비판, 나아가서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 이들이 모두 어우러진 현대문명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 있다. 역사, 사회, 정치에 대한 거대 서사도 보이지 않고, 도시인의 질적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 또한 잘 보이지 않는다.

현대인을 “텔레비전교의 신자들이요 영상의 노예들”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양질’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양질’의 영상을 만들어 내는 일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35) 우리 사회 전반에서 발생하는 다양하고도 강력한 소리들, 가령 정치개혁의 구호와 생존경쟁에서의 승리 등의 목소리를 감안하면 법정의 목소리는 극히 미약하다.

다양한 소리 중의 하나로 하버마스와 같은 근대론자의 것이 있다. 하버마스가 하이데거류의 탈근대적 담론을 비판하며 역설하듯 근대성의 기획과 계몽 그리고 해방의 담론이 다 헛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36) 아직 우리 사회의 합리화와 인간해방의 면에서 계몽, 개혁, 진보되어야 할 분야가 많고 그 역사가 일천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여러 면에서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토론을 통해서 얻어진 합의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근대성의 기획, 해방, 개혁을 논하는 자의 사유와 불교적 인격의 사유, 이 둘은 그 시각이 너무 다르고 그 차이가 너무 커 불가통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 글의 첫머리에서 불교적 인격이 내는 목소리를 불찬성, 이의, 반대의 소리라고 했다. 리오타르가 역설하듯 새로운 것은 이 양자 사이에서 도출될 합의가 아니라 불찬성, 이의, 반대에서 나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7)

이들 상반된 두 목소리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필자는 지금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고쳐 질문할 수는 있다. 근대성의 기획과 법정 식의 문명 비판, 이 두 시각에서 어떻게 제삼의 새로운 것을 이끌어 내느냐 하는 질문으로. 이 질문을 주체라는 개념에 주목해서 다시 한번 더 질문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주체――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 안에 정립되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문화에서 다방면으로 활용되고 강화되어온 저 ‘주체’――를 보다 개방적으로 만들 길이 있는가? 사량분별의 태도에서 반야의 태도로, 머리 위주의 문명에서 가슴과 손발 위주의 문명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공간 속에 횡행하는 빛과 소리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방면으로 선이나 명상이 법정이 부여한 것보다 더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이 법정의 불교가 현대 철학자들에게 던지는 화두이다.38) <끝>

허우성
서울대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미 하와이 대학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현재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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