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원 시스템 경영연구소장

1. 지식사회의 원형과 불교적 이해

1) 지식사회란 무엇인가

지식사회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다. 지식은 돈과 같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며, 책이나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지식은 언제나 인간 상호관계에 의해 창조되고 축적되며 새로운 가치로 확대된다. 예를 들어 봉건사회에서는 기사가 중심 세력이었고,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중심이었다면, 탈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식인이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결국 지식인의 의지와 역할이 미래사회의 진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는 대규모 생산시설에서 많은 양의 재화를 생산하는 산업사회와는 달리, 인간의 지식과 정보가 부가가치의 주요한 원천이 되는 사회이다. 기존의 산업사회가 공급자 중심의 하드웨어적 사회라면, 지식사회는 수요자 중심의 소프트웨어적 사회이다.

또한 산업사회가 조직화되고 규격화된 사회라면, 지식사회는 최종사용자(end user)의 요구에 따라(on demand) 무한한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이 가능한 유연한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많은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계층이 엄청난 힘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논의된 지식사회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지식사회의 전부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불교적 차원에서 지식사회를 접근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2) 그냥 ‘지식’이 아니라 ‘선지식’이다.

우리는 지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보통 ‘지식’이라 하면 ‘생각하여 아는 작용’ 또는 ‘식견’ ‘지력’ 등을 의미한다. 게다가 ‘지식인’의 의미도 그저 ‘많이 아는 사람’ 정도에 머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식사회란 뛰어난 두뇌와 학력의 소유자만이 우위를 점하는 사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이란 본래 ‘칼야나미트라(Kalya?.amitra)’라는 범어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벗으로 사귈 만한 사람 또는 스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를 한역으로 ‘선지식(善知識)’이라 하였으며, 지금 우리가 말하는 지식이란 바로 선지식을 줄인 말이다. 이렇듯 지식이란 무엇을 ‘안다’가 아니라 ‘아는 사이(知人)’를 말한다. ‘인간’이란 한자어가 개체와 개체간의 관계에 기초한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인식과 이해를 망라하여 연결한 체계를 중요시한 개념, 다시 말해서 인간 상호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지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독립된 개체로서의 가치보다는, 다양한 인간과 조직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등 무한한 정보원(源)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파생되어, 새로운 가치로 창출될 수 있는 가능성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지식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할 수 없으며, 무궁한 수의 ‘파트너링과 네트워킹’ 위에 존재한다. ‘지식인’이란 혼자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21세기 지식사회에는 하루하루 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다. 또한 축적해 놓은 데이터베이스를 더불어 소유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이다.

3) 인터넷과 ‘인드라넷(Indra net)’

지식사회는 네트워크 사회이다. 인터넷 등 전세계를 연결하는 방대한 네트워크에 의해 무수한 네티즌 간에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마치 《화엄경》에서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인드라의 그물과 같다. 이는 모든 개체가 상호작용을 통해 의존관계에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지식의 참다운 의미는 이러한 네트워크 사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분명해졌다.

산업사회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던 규모의 경제에서 벗어나, 이제는 연결의 경제(economics of linkage)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 동안 컴퓨터라면 보통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stand alone) 형 아니면 중앙집중식 처리방식의 메인프레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인드라 그물은 좁게는 그룹웨어(groupware)에서부터 넓게는 인터넷이나 인드라넷의 개념을 무한히 확장한 것과 같다.

여기서 지식이란 이러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각 데이터베이스 간의 관계에 존재하는 무궁한 양의 정보를 말한다. 한 개인은 네트워크의 어느 곳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이를 통해 모든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또한 전부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조직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과 같다.

이는 그룹웨어나 인드라넷을 상상해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나는 그룹웨어에 대해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저장한다는 의미에서는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도 모두가 내 소유라는 점에서는 또한 전체이다. 최근 맥킨지사는 ‘상호작용(interaction)의 신경제학’이론을 펼치고 있다. 이는 “산업발전이란 기업 내부 혹은 기업간 상호작용을 통한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이것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흔히 산업사회에서의 성장이란 기술의 진보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사실 진보의 원천은 무한한 요소 간 상호작용에 의한 시너지효과에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식이란 인드라 그물처럼 무한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인연법의 결과이다. 지식사회는 이러한 상호의존관계를 바탕으로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세상이다.

4) 지식의 가치는 공유에 있다

지식사회의 또 하나의 특성은 카피레프트(copyleft)라 규정할 수 있다. 이는 리처드 스톨먼이 소수의 정보독점에 대항하는 새로운 소유권 개념으로 창안하였다. 즉 기술의 핵심에 관한 소유권은 저자가 갖되 그것을 수정하고 배포하는 권리는 공공의 소유로 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로 재생산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자는 발상이다.

카피레프트는 ‘정보와 지식은 나눌수록 더욱 커진다’는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는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립하기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창의에 의해 끊임없이 정보의 완성도를 높임으로써, 서로에게 유익하게 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선가는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법을 전하는 입실면수(入室面授)의 폐쇄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은 중생에 대한 직접적인 메시지라기보다는 이심전심으로 훈습되는 향기와 같은 것이다. 비록 그 향이 무슨 향인지 몰라도, 향기는 세상과 중생의 마음을 정화한다. 때문에 깨달음은 선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소유가 된다. 또한 깨달음의 가치는 나눌수록 더욱 커지며,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더욱 더 큰 가치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지식의 가치는 공유에 있다.

출가정신은 곧 무소유에 있으며, 재가는 적극적으로 소유하되 결과적으로는 회향하게 된다. 끝없이 펼쳐지는 네트워크상에서 자신의 존재만을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노숙자(digital homeless)’이기를 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무소유 정신을 잃어버리고 모든 가치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려는 데 불교의 문제가 있다.

5) 지식은 유기물이다

지식사회는 ‘물리학적 사고’로부터 ‘생물학적 사고’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사회이다. 즉 물체를 분해하였다가 다시 조립할 수 있다는 요소 환원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는 거대한 상호작용성을 바탕으로 할 때만이 생명력을 갖는다’는 유기체적 사고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이란 본래 생물학적 용어로써, ‘환경과 반응하면서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요소들의 유기적인 집합체’를 의미한다. 또한 인간 상호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도 넓은 의미의 시스템이다. 불교는 곧 시스템 이론이다. 불교와 지식사회는 시스템 이론에서 만나고 있다. 선지식이란 바로 시스템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상호작용을 통해 균형을 유지(homeostasis)함으로써 언제나 살아 숨쉬는 유기체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식은 선지식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는 단락화되고 말았다. 지식이란 파이를 잘라먹듯이 조각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식을 소유가치 내지는 기능가치로 이용하는 데 급급해 왔다. 이처럼 도막난 지식은 오랜 세월 동안 지배논리에 영합하거나 특정인의 이해를 위해 도구화되었다. 조각난 지식은 조각난 유리처럼 무기가 되어 이 세상에 상처를 입히게 마련이다.

혼돈과 갈등, 불평등과 무질서로 점철된 인간사는 곧 무기물화한 지식의 역사이다. 우리는 지금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지식가치의 극대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논하는 지식이란 겨우 말라빠진 북어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북어 수준에서 벗어나 동해바다 속을 힘차게 헤엄치는 명태로 돌아가는 일이다.

술안주로 쫙쫙 찢어서 고추장 찍어 먹는 말라깽이에서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의식은 확연히 달라진다. 단순히 입맛의 차원을 넘어 감각의 미학으로, 그리고 생의 외경(畏敬)으로까지 승화된다. 우리는 평소 생활주변에서 수많은 시스템을 접하고 또한 사회 시스템 속에 살아가지만, 의식은 철저히 무기물화되어 있다.

지식인일수록 시스템 접근방법을 강조하지만, 지식 자체가 유기적 속성에서 벗어나 단락화 되어 있는 현실에서, 시스템적 사고란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모든 사회적 병폐의 원인도 여기서부터 찾아야 한다. 이처럼 지식사회의 원형은 이미 불교사상 속에 구현되어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불교적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지식사회를 열어 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2. 지식사회와 불교의 위기

1) 지식독점체제의 해체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육은 특정인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소수 지배계층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었다. 지식은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인식되지 못하였으며, 지배논리에 부합하는 변형된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지식계층은 대부분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는 지적 수준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도 승려계급은 가장 대표적인 지식인 집단이었다. 우선 승려는 글을 읽고 형이상학적 사유가 가능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대다수 무지몽매한 속인에 대해 상당한 지식 격차가 있었다.

따라서 승려 가운데 사상가, 철학자, 시인 등 한 시대사조를 풍미했던 대표적 지성이 등장할 수 있었으며, 모든 지식의 영역에서 속인의 사표로서 카리스마적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비록 조선조에 있어서 승려는 최하위 천민으로 전락했었지만, 긴 세월 동안 선비들이 지식을 교감할 수 있는 상대란 오직 승려뿐이었다.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도 14세기까지 교회의 성직자는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이들 이외에 봉건영주건 농민이건 글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지식의 힘이 교회의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영주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교회는 휴전을 명령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이 명령은 지켜졌다――과 한데 어우러져 서구유럽의 역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교육의 기회가 무한히 열려있는 현재에 있어서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있는 속인에 비해, 성직자의 교육은 상대적으로 편중되거나 오히려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더구나 정보의 홍수시대에 이를 수용할 교육체계가 미흡하다 보니, 급변하는 사회현상에 대한 승려의 인식 수준은 매우 낮은 상황이다. 종교의 본질적인 측면과 성직자에게 부여되는 일정한 카리스마를 제외한다면, 승려가 속인에 대해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더 이상 지식에 대한 비교우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계율에 충실치 못하고 수행조차 게을리 하는 일부 승려에 의해 불교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가는 무조건 속인의 경배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처하게 된다.

2) 아직도 귀속지위이다

우리사회는 ‘성취 지위(achieved status)’보다 ‘귀속 지위(ascribed status)’의 비중이 큰 사회이다. 언론에 보도되는 개각명단이나 고위관료의 명단을 보면 특정대학 출신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들 상당수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 그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지만, 소속된 집단의 힘에 의지해 능력 이상으로 성장한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역학관계에서 소수는 아웃사이더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어느 선에서 물러나야 하는가를 스스로 알게끔 되어 있다.

불교의 경우도 철저한 자기수행과 공정한 경쟁을 바탕으로 성취지위를 확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현상은 종단의 요직이 철저히 사판화되면서 심화되고 있다. 총무원장 선거는 각 문중끼리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인 야합을 통해 치러진다. 여기서는 어떻게 힘있는 문중의 지지를 받느냐가 승리의 관건이 된다. 그리고는 논공행상이 이루어진다. 그외의 소수 세력들은 몇 푼의 돈에 소신을 팔아 넘긴다. 결국 선거는 철저히 힘과 돈의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일부 정치승은 힘있는 문중으로 건당하는 식으로 야욕을 키워가기도 한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조계종의 법통도, 깨달음을 전수하기 위한 전통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혈통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인맥 중심의 파벌주의의 산물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마치 입만 열면 자신이 쭛쭛대군의 후손이라고 내세우는 것과도 같다.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구태여 조상을 들먹이며 그 후광을 입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의 법칙에 의해 존재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들끼리 있을 때보다 다른 집단의 영향을 받을 때 의사결정에 더 조심스럽게 임하는 ‘경계적 이행(cautious shift)’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보편적 가치에 대한 접근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지식사회에서는, 그 동안 일부 사판승들이 누려왔던 배타적 권리는 송두리째 벗겨져야 한다. 지금처럼 귀속지위가 난무하는 승가는 이미 승가가 아닌 것이다.

3) 사판승은 집 지키는 개

지식사회는 콘텐츠(contents) 중심 사회로서, 간판보다는 실제적인 프로그램의 구현 가능성에 의미를 둬야 한다. 그러나 지식인의 유별난 자리중시 사고가 지식사회의 진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니장(Paul Nizan)이 ‘집 지키는 개’라고 이름지어 주었던 사판 지식인들이야말로 지식사회의 가장 큰 적이다. 이들에게는 그저 자기 집 잘 지키는 것이 최선이다. 승가도 예외가 아니다.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차원에서 보면, 이판과 사판은 결코 둘이 아닌 조화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이판승’이라면 고고한 선승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판승’하면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처럼 들리는 게 보통이다. 그 본래 의미야 어떻든 자리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갖가지 다툼 등으로 사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너무도 강하게 남아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사판은 이판으로부터 일시적으로 그 지위와 권한을 부여받은 것에 불과하며, 언제든 이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가치는 오직 자리 지킴에만 있다. 한번 사판의 지위에 있던 승려는 계속해서 사판에만 머물며, 일정 소임을 마치고 수행자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이는 그리 흔치 않다.

게다가 갖가지 음행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기는 속인의 탐욕을 무색케 할 정도이다. 특히 유명 관람료사찰의 경우, 일부 승려는 주지육림에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수십 년 동안 계속돼 온 조계종 분규는 곧 사판승간의 밥그릇 싸움이다. 이쯤되면 출가의 의미는 이미 상실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출가자에 대한 재가의 합리적인 견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행보다는 집 잘 지키는 일이 그리도 절실한, 이것이 바로 지식사회를 맞이하는 불교의 서글픈 모습이다.

4) 그레샴의 법칙을 우려한다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이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16세기 토머스 그레샴이 제창한 학설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식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지식의 그레샴 법칙’이 된다. 내용인즉 대부분의 조직구성원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정보와 지식은 기꺼이 공유하되 정말로 중요한 아이디어 등은 독점함으로써 배타적 이익을 누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승가를 유지하는 힘은 공동체 정신에서 나온다. 이는 지식과 정보를 공동의 자산으로 축적하여 운영하는 그룹웨어와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경전에만 살아 있을 뿐 현실은 정반대이다. 사실 승가처럼 통제가 불가능하리만큼 개인주의화된 집단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삼보정재도 개인의 호주머니 속에서 관리되며, 그 과정은 철저히 이중 파일 속에 숨겨져 있다.

기껏해야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인연에 따라 ‘블랙박스’ 속을 오갈 뿐이다. 따라서 지식의 공유는 말뿐이며, 실제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란 별다른 가치가 없는 지식이기가 쉽다. 그러다 보니 사찰의 재산과 문화재 관리 및 운영에 관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공유할 기회가 없다. 그리고 수없이 이루어지는 불사의 경우도 한 개인의 머리속에서 진행되어 간다.

그러다가 주지의 임기가 끝나면 껍데기만 인수인계 되고, 중요한 내용은 주지를 따라 떠나게 된다. 심지어 신도명부가 입력된 프로그램 파일을 통째로 가지고 떠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주지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모든 시스템을 새로이 구축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승려들이 자신의 지위에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가치 있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욕구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는 단위 사찰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단도 마찬가지다. 종권이 매번 혁명적으로 교체되다 보니, 종권은 승자의 전유물처럼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뒤 배타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축적되지 않는 지식은 언제나 소모적이며, 새로운 가치로 재생산될 수 없다.

문제는 불교적 가치의 보편화를 위해 일부 사판들이 배타적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상과 같이 볼 때, 불교는 원론적으로 지식사회에 매우 적합한 사상적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과 현실간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이제부터 불교적 이념의 구현 가능성을 제시해 본다.

3. 지식사회를 위한 불교적 대안

1) 나르시시즘을 버리자

불교의 교리는 무상과 무아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자신을 객체화하고 대자(對自)적 관계에 의해 검증받음으로 해서 주관에 머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세상은 늘 변하고 자신도 흐르는 시공 위에 놓여 있지만, 언제나 고정된 존재가치를 느끼려는 아상(我相)에 빠져 있다.

특히 승려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바로 자기 도취이다. 자기도취에 빠진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나르시시즘’은 미소년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물 속의 자신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자기도취는 자신만이 완전한 존재이며, 자신은 누구보다 훌륭하다고 믿고 싶은 심리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누가 묻지 않아도 자신의 조상을 들먹이면서도, 남의 가문에는 서슴지 않고 ‘상놈’으로 비하하는 우리의 양반의식과도 같다. 상당수 불교인은 불교만이 제일이며, 남의 종교는 공부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우리의 경우 종립대학에서 타종교에 대한 접근은 제도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또한 교수임용도 자신들의 인연에 따라 묵시적으로 이루어진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경우, 신학대학에서조차 교과과정 중에 불교과목이 상당히 많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타종교의 성직자 가운데 불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참선을 생활화하는 경우는 있지만, 불교인의 타종교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기독교를 매우 천박한 종교로 매도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지독히 자폐적인 시스템이다. 이는 타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참다운 앎이란 미망을 깨트리는 것,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disillusionment)에서 시작된다. 불교교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 또한 타종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전해 온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아무리 밉다 해도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타종교의 실체를 부정하려 들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불교적 본질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이러한 자기도취는 유연한 사고의 결여로, 불교의 미래를 더욱 질곡으로 치닫게 할 위험이 있다. 불교인들은 타종교와의 교류 및 이해를 통해 스스로의 미망을 깨트려야 한다. 타종교뿐만 아니라 대립되는 모든 사상조차 선지식이 됨을 알아야 한다.

2) 색깔 있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지식사회는 차별의 시대이다. 모든 사물은 현상으로 나타날 때, 인(因)과 연(緣)에 따라 서로 다른 모양과 속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를 차별이라고 한다. 즉 내리는 비, 내리쬐는 햇빛은 평등하지만, 지상의 초목은 각기 그 속성에 따라 크게 자라는 것도 있고 크지 않은 것도 있다.

또한 붉은 꽃도 있고 흰 꽃도 있다. 손가락의 길이가 들쭉날쭉한 것이야말로 본래 의미의 차별이다. 모든 손가락의 길이, 굵기, 위치가 같다면 손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영어에서 “I am all thumb in English.”라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나는 영어에 있어서 모두 엄지손가락이다.”이지만, 실은 “나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의미이다.

현재 불교의 사회적 인프라는 타종교에 비해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다. 타종교가 개화기 이후 대학, 병원, 사회복지 등에 엄청난 투자를 해온 반면, 불교는 사회발전에 거의 무임승차해 온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 결과 불교는 사회의 중심적 위치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불교의 미래는 정말 암담하다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의 가치를 차별화에서 찾을 때이다. 이를 위해 불교인이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교육의 경우도 그렇다. 지금의 제도교육은 산업사회에 적합한 균질화된 인력을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양화된 사회에서는 철저히 차별화된 교육시스템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각자의 개성과 관심에 따라 ‘경우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른바 ‘대안학교’가 그것이다. 불가의 고유한 전통인 도제식 교육이 필요한 분야도 있다. 또한 불교는 미래사회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환경과 생태문제 등에 관해서 타종교에 비해 훨씬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 나라는 불교국가 가운데 선가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국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 세계인이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선 센터’의 건립도 추진되어야 한다. 무조건 기독교적 방식을 추종하기보다는 불교적 특성과 전통을 살려 차별화해 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을 모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지식사회는 모든 사물을 나름대로의 가치에 따라 적절히 차별화하는 사회이다. 또한 모든 주체가 자신의 가치를 알고 최선을 다하는 사회이다. 이처럼 지식의 가치에 의한 평가야말로 최선의 업적평가이자, 동기부여 수단이기도 하다.

3) 승가도 지식집단화 해야 한다

종교를 움직여 온 힘은 카리스마에 있다. 카리스마(charisma)란 그리스 어로 ‘신에 대한 선물’이란 뜻이며, 현재는 지도자로서 특별히 매력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복종이 지배자를 만든다.”는 헤르만 헬러의 말처럼, 카리스마적 권위란 다수에 인정에 의해 떠받들어지지 않으면 결코 생겨날 수 없다. 구체적으로 보면 신자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받는 성직자 또는 천재적인 전쟁수행 능력을 가진 장군에게 카리스마적 권위가 부여된다.

성직자에 대한 카리스마가 무너지면서 종교행위에도 중대한 변화가 뒤따르고 있다. 출가의 의미도 과거처럼 현실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 내지 실천방법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속세와 철저히 단절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뛰어들어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에 도전하는 식으로 변하고 있다.

80년대 들어 민주화투쟁에 앞장서거나 인권과 노동운동에 적극적인 진보성향 승려들의 실천행이 그것이다. 또한 사회복지의 일선에서 자비를 실천하거나, 화쟁의 정신으로 민족의 동질성 회복에 주력하고 있는 승려들도 있다. 이제는 승려도 사회의 어느 일면을 담당하는 전문가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무소유를 지향하는 신분에 대비되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많은 승려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과거처럼 속인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예경의 대상이길 원하고 있다. 이러한 성직자는 중생을 깨우쳐 주기는커녕, 오히려 현재의 한계에 머물러주길 원하고 있다. 재가신자의 의식의 고양은 곧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종교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성직자의 자질과 지식수준이 종교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승가의 권위가 현저하게 약화된 세태에서 자연히 기복행위에 치중하게 된다. 고통에 빠진 신도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제사장의 지위가 아니고는, 절대 우위를 점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찰이 삼재풀이를 하거나 운명론을 가르치는 장소로 변질되기도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지만 일부 종교는 점점 더 기복에 빠지고, 사이비 승려의 사기행각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종말론으로 위기의식을 부추겨 신자들의 정상적인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는 다른 종교의 행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로고스적 지식에 한계를 느낀 성직자들이 세상의 파토스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승가도 어느 한 전문분야에 매진함을 통해 지식집단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카리스마를 전문지식으로 대체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오히려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종교 본래의 의미에 부합하는 것이다.

과거처럼 철저한 자기수행에만 전념하는 청정비구로서의 삶이 아니라면, 차라리 현실 속에서 역할분담을 통해 출가자의 본분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지식사회에는 성직이라는 허위만으로 과거와 같은 절대우위를 누릴 수 없다. 그럼에도 성직자가 현재와 같은 의식에만 머문다면 지식사회의 진전에 중대한 저해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4) 죽은 불교에서 살아 숨쉬는 불교로

걸프전이 한창일 때 프랑스 언론인 이그나시오 라모네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군사력으로 남의 나라를 점령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을 시끄럽게만 할 뿐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어리석은 것이 스포츠 내셔날리즘이다.

구소련과 동독이 그러했듯이, 금메달을 아무리 많이 따도 국민생활이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다른 나라를 경제와 문화의 힘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백범 김구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 가지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며 문화의 힘을 역설하였다. 지금이야말로 수십 년 동안 하드웨어적 성장과 개발을 절대가치인 양 여겨왔던 우리의 의식과 패턴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할 시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든 지방마다 고유한 놀이문화와 축제가 있다. 일본의 경우 일년 내내 마쯔리(祭)가 끝이질 않는다. 이는 마을사람들의 공동체의식을 다지는 본래의 의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관광 차원에서도 이것 보다 훌륭한 상품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경우 사월초파일 연등행렬을 빼고는 이렇다 할 길거리 축제를 보기 어렵다. 사실 하드웨어만을 본다면, 우리의 사찰이나 고궁은 남방불교국가의 사원이나 중국의 자금성에 비해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된다. 게다가 서울 거리는 유럽의 도시에 비하면 정말 볼거리가 없는 시멘트 숲에 불과하다.

인사동거리는 어떤가. 영국여왕이 찾았다고 하지만 외형만으로는 정말 낮 뜨거울 정도이며, 그 부실한 내용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외형적인 기준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제부터는 콘텐츠에 충실해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한다. 사찰에서는 ‘동양 최대의 불상’을 건립한다며 신자들의 골을 뺄 것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도량 안에서 ‘승무’ ‘바라춤’ ‘범패’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죽은 역사를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주요 사찰마다 갖가지 행위예술과 공연 및 전시 등을 통해 불교예술의 대중화를 기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도심의 주요 사찰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규모의 경제를 향해 치닫던 과거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지식사회의 패러다임에 적응하는 길이기도 하다. 불교문화는 단지 불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불교의 보편화는 교리 중심이 아니라 문화예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마치 책장의 부연 먼지 속에 쌓여 있는 책처럼 활용되지 않는 지식은 곧 죽은 지식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수백 년 된 그릇의 골동품적인 가치가 아니라, 직접 밥을 먹는 데 필요한 밥그릇의 역할처럼 우리의 삶에 유익하게 활용하는 일이다. 이처럼 창조적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고 외형적 가치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삶에 남는 것은 공룡의 역사가 증명하듯 쇠락뿐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박제화된 지식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지식이다. 이제 죽은 불교에서 살아 숨쉬는 불교로의 의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5) 불교의 세계적 보편성을 위해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나온 밀레니엄을 통해 고려의 금속활자가 지식의 전파에 기여한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앞으로 전개되는 사회가 지식사회라고 하는 전제에서 보면 그 의의는 더욱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지식의 전파와 축적에 뛰어난 민족으로서, 지난 천년간 대표적인 글로벌 스탠더드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800여 년 전에 지식의 가치를 인식했었다는 점은 실로 위대하지만, 현실은 ‘위대한 바보’일 따름이다.

미래사회에 한 국가의 힘은 얼마나 많은 세계적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준의 핵심은 바로 문화적 인프라에 있다. 그렇다면 국가경쟁력도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인프라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문화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며, 세계인에 의해 인지될 수 있는 제품의 컨셉도 문화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구텐베르크’라는 이름 하나도 엄청난 상품이 되어 있다. ‘구텐베르크 박물관’ ‘구텐베르크 거리’ 등 그의 업적을 기리는 수많은 기념물과 각종 행사로 천문학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다.

그밖에 유명음악가, 문인, 화가 등이 남기고 간 발자취도 새로운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문화를 고양하는 중심지로 세계인들을 모으고 있다. 돈도 벌면서 세계인으로 하여금 그 문화의 향기에 취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직지(直指)조차 불란서의 박물관에서 잠자고 있다. 직지를 처음 인쇄했다는 청주의 흥덕사를 1986년에 사적 315호로 지정하고, 인근에 고인쇄박물관을 세운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도 국내인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지난 천년 간 서구사회 못지 않은 뛰어난 지식을 축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활용치 못한 채,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만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직지를 활용한 각종 행사와 기념물을 통해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한국적 선의 세계화도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범세계정보망(GII)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의 안방에 할리우드의 영화가 상영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문화적 패권주의라고 비난하기보다는, 문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가질 때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토인비는 “20세기 최대의 사건은 불교가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불교의 보편적 가치의 발현인 것이다. 그 꽃은 바로 우리가 피워야 한다. <끝>


박승원

중앙대 경영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경영학 박사.현재는 시스템 경영연구소장으로 정보시스템 분야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으며 새시대 불교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21세기 기업파괴><이제는 이판사판이다><지식재발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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