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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
김용표 동국대 교수
[2호] 2000년 03월 10일 (금) 김용표 동국대 교수

1. 다원주의와 대화 문명시대의 도래

지난 20세기에 일어났던 가장 획기적인 종교사적 변화는 종교다원주의 이론의 대두와 함께 전개되어 온 종교간의 대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 평화회의(World Parliament of Religion)’는 6천여 명의 전세계 종교인들과 학자들이 모여 기존 종교계의 배타적 편협성과 독단주의를 비판하면서 종교간의 대화와 이해의 필요성을 제기한 최초의 모임이었다.

이러한 대화운동의 시작에 대해 종교 배타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로마 교황 레오 13세는 이러한 모임을 ‘무분별한 집회’라고 규정하고 가톨릭의 절대성을 희석시키는 종교 평등주의(religious indifferentism) 사상의 대두에 강한 우려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종교간의 이해와 협력은 이미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으로, 지구화 사회의 특징인 ‘경계를 넘고 간격을 좁힘(cross the border, close the gap)’이라는 포스트모던 정신이 종교간의 문제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65년 로마 카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에서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고 배타주의에서 포괄주의로 전환하는 결단을 내렸다.1) 바울 6세의 칙령(Ecclesiam suam, 1964)도 “대화는 우리 시대의 요구이다. …… 현대사회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동적 행동의 과정은 대화를 요구한다. 사회의 다원화와 인류가 현시대에 성취한 성숙성은 또한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종교간의 대화의 시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987년에 ‘불교학-기독교학 연구협회(Society for Buddhist-Christian Studies)’가 창립되었고, 1993년에는 인도 뱅가로에서 ‘세계종교대회 백주년기념대회’가 열려 각 종교의 교리를 초월하는 인류 공동의 윤리인 ‘지구윤리(A Global Ethic)’도 제정 선포하였다. 한국에서도 몇 해 전 신학대학 교수가 기독교 잡지에 부처님의 탄신 축하와 그리스도교인에게도 부처님의 자비의 빛을 비추어 달라는 글을 실은 바 있고, 20세기를 마감하기 며칠 전인 1999년 12월 23에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은 조계사 앞에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게시하는 등 종교간의 이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날로 높아 가고 있다.

그러면 새 천년을 여는 21세기는 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다원주의와 화해를 지향하는 인류 문명사적 당위성과 함께, 성숙한 종교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 모든 위대한 종교가 지닌 영적 차원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른바 포스트모던(post-modern)사회라는 말로 압축되고 있는 지구화 시대로의 진입과 함께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간의 이해의 문제는 문화사적 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동양 종교사상에는 상극(相剋)의 선천(先天) 시대에서 상생(相生)의 후천(後天)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문명사관이 있으며, 서양에서도 1960년대부터 서양력의 ‘물고기자리’에서 황도(黃道)의 제11궁인 ‘물병자리 시대’로의 전이에 따른 새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는 이가 늘어났다. ‘뉴 에이지’라는 유사종교 운동이 70년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새 시대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종교문명의 대전환에 대하여, 칼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axial age)’론을 제기한 바 있다.

‘축의 시대’란 B.C. 800에서 B.C. 200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 시대에 붓다·소크라테스·공자·노자 등의 인류의 위대한 성인이 나타나 자기 종족 이기주의 빠져 있던 인류에게 보편적 사랑과 깊이 있는 정신 문명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사관이다. 최근의 이론으로는 한스 큉(Hans Ku촦ng)의 ‘패러다임 전이(Paradigm-Shift)’의 개념과 에베르트 코우신스(Ewert Cousins)의 ‘제2차 축의 시대(Second Axial Period)’이론 등이 있다. 코오신스의 ‘제2차 축의 시대론’은 야스퍼스 이론의 연장으로, 그 핵심이 되는 내용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는 분열되었던 인류의 정신이 다시 하나로 종합되는 ‘대화로의 전환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레널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도 이 이론에 동조하면서 ‘독백에서 대화로의 전이’는 인간 의식의 혁명적 반전이며 인류 역사상 참신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래 종교는 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진리 인식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적 종교 이해는 단순한 문화적·사회적 필요에서뿐만 아니라 성숙된 종교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깊이있는 종교인들은, “깊이 들어가서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 길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Deep down, all religions are the same, different paths are leading to the same goal).”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송대(宋代) 선불교의 거장 무진(無盡) 거사 장상영(張商英)이 지은 《호법론(護法論)》의 서문을 쓴 무애(無碍) 거사 정흥덕여(鄭興德與)는 이 글에서, “천하에 진리는 둘이 아니고 성인의 마음도 둘이 아니다(天下無二道 聖人無兩心).”라고 설파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이고 연역적인 종교일치론보다는 실제로 체험을 통해서 종교의 동일성을 통찰하고 있는 이가 있다.

영원주의 신비주의자 슈온(Frithiof Schuon)은 《종교의 초월적 통일》(The Transcendent Unity of Religions, 1975)에서 세계의 종교를 현교(顯敎, exoteric)와 밀교(密敎, esoteric)로 구분하는 교판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즉 세계 종교는 수직적인 여러 종교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밀교적 신앙과 현교적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현상은 모든 역사적 종교에 공통으로 나타나지만, 오직 밀교적 종교 신앙에서만 종교의 공통 본질은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종교의 공동적 본질을 슈온은 ‘초월적 통일(the transcendent unity)’이라고 이름하고, 이 ‘초월적 통일’을 절대와 유한(有限) 사이의 불이성(不二性)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에크하르트가 신과 영혼 사이에서 경험했던 것, 우파니샤드의 예언자가 ‘브라만’과 ‘아트만’ 사이에서, 또는 ‘그것’과 ‘너’ 사이에서 감지했던 것, 불교의 니르바나(涅槃)와 무명(無明)의 사이에서 보았던 것 등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동일한 통일성”이라고 보고 있다.

마치 시인이 시의 언어에서 시를 발견하듯 밀교적 신앙은 전통 속에서 궁극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종교의 교리나 상징을 넘어서 빛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밀교적 신앙의 심오함 속에 종교의 깊은 공동의 본질과 보편적 신앙이 내재되어 있다는 슈온의 주장은 공감이 가는 요소가 많아 보인다.

종교적 진리는 특정 교리나 전통으로 왜곡되기 이전의 빛의 근원을 투시할 때 비로소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종교의 본질을 특정 종교의 교리나 전통에서만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2. 종교 배타주의,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에 대한 검토

새로 전개되고 있는 대화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 불교를 비롯한 인류 종교사가 보여 왔던 배타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 패러다임의 특성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종교의 절대진리화 작업에 몰두해 왔다. 자기 종교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으며 다른 종교에서 궁극적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이른바 배타주의(exclusivism)에 대한 확신이 대부분 종교의 근본 입장이었다.

따라서 다른 신앙은 필연적으로 구원의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단순한 신앙 논리는 사회적으로는 ‘너와 나’를 나누는 이분법적 태도로 나타나게 되고 자기 우월주의(ethnocentrism)에 빠져 타종교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을 갖게 되고, 미움과 갈등을 일으켜 심지어는 전쟁까지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교 배타주의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배타적인 교리나 감정에 기인되어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이익 집단화하려는 비종교적인 아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배타주의는 이원적(二元的)인 교리 체제를 지닌 종교나 유일신교(唯一神敎)에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러한 교리 체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셈족의 종교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은 타종교를 우상 숭배나 이단으로 쉽게 비하시킨다. 배타주의의 유형은 ‘예수 중심 배타주의’나 ‘교회 중심 배타주의’ 또는 유태인의 ‘선민 사상’이나 이슬람교의 ‘마지막 예언자 사상’ 등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어떤 형식의 대화나 협력도 불가능하게 된다.

배타주의보다는 완화된 입장으로 종교 포괄주의(inclusivism)가 있다. 이는 자기 종교의 우월성과 구원의 최종성을 말하면서도 타종교의 진리성과 구원의 가능성을 일부 인정하는 입장이다. 또는 자신의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입장은 다른 종교의 진리를 배척하지 않으며 자신의 종교 속으로 끌어들여 이해하려 한다. 즉 자기 우위의 입장에서 타종교의 가치와 효용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동양의 전통 종교들은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종교 포괄주의는 타종교를 이해하려는 관용적 태도를 지닌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와 반대 입장이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종교의 궁극성과 최종적 구원 논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배타주의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가톨릭을 비롯하여 자유주의 신학 계열의 개신교에서도 여러 형태의 포괄주의적 사상이 나타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한 현상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 배타주의 신조에 대한 문제 의식의 자각이라 보여진다.

칼 라너(Karl Rahner)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서도 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익명의 기독교도(anonymous Christian)’라고 보는 기독교 포괄주의를 말하고 있다. 즉 비기독교인도 이교도로 여기지 않고 언젠가는 기독교의 구원으로 완성될 잠재적인 기독교 신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포괄주의는 결국은기독교에만 최종의 구원이 있다는 점에서 불교적 포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불교 포괄주의는 다른 종교의 진리를 배척하지 않으며 타종교를 불교 속으로 수용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불교 포괄주의는 절대 진리에 대한 개념 자체를 해소시킴으로써 진리 주장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데 반하여, 기독교 포괄주의는 자신의 절대 진리 사상을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관용을 베푸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종래의 배타주의보다는 발전된 것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괄주의는 종교 다원주의를 향한 예비적 이론이 되고 있으며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위해 배타주의보다는 한 걸음 진보된 이론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면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를 넘어서 현대 종교의 새 패러다임으로 대두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살펴보자. 종교철학적으로 다원주의라는 용어는 각 종교가 동등하게 구원의 길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또는 종교적 진리가 한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론이며, 사회적으로는 여러 종교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성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종교 다원주의 사상가 존 힉(John Hick)은 《신은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God Has Many Names)》에서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하나의 궁극적 실재(the one ultimate reality)’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종교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종교’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어떤 것이 참된 종교인가 하는 물음은 적절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는 ‘예수 중심적 모델’에서 신앙의 보편적인 모델인 ‘신중심적 모델’로 전환하는 종교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신적 실재(神的 實在)’를 중심으로 세계 종교의 동질성을 파악하려는 입장도 이러한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불교와 같은 종교에는 해당되지 않게 된다는 비판을 의식한 그는 1981년부터는 ‘신적 실재(神的 實在)’ 대신 ‘실재(Reality 또는 the Real)’라는 모델의 제시를 통하여 ‘실재 중심적 패러다임’을 주창하고 있다.

또한 그는 종교적 숭배나 묵상, 체험의 대상이 되는 실재를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라는 용어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2) 그렇다면 세계 종교는 왜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가 하는 본래의 질문이 남아 있다. 존 힉은 여기에 대해, “종교적 신앙은 우리의 삶과 분리된 어떤 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지리, 기후, 경제적 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간의 문화,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그러므로 존 힉의 종교 사상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동양적 포괄주의까지 모두 비판하며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레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도 《종교 내의 대화(Intrareligious Dialogue)》에서 세계 종교를 무지개로 은유하고 있다. 즉 서로 다른 종교 전통은 신적 실재(divine reality)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의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무수한 색깔과 같다는 것이다.

그 광선은 종교, 전통, 교리 등을 통해 굴절된다. 예를 들면, 녹색이 황색이 아니듯이 힌두교는 불교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색상을 바라 볼때 어디에서 황색이 끝나고 녹색이 시작되는지 그 경계를 잘 알 수는 없다. 그 빛깔의 경계는 잘 알 수 없으나, 어떤 특수한 빛깔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백광(白光)이라는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실재는 많은 이름이 있으며 각 이름은 불이(不二)의 신비 자체를 가르친다. 이 신비는 궁극적 종교의 요소로서 교리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곳, 어떤 종교에도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여러 종교 다원론자들의 견해는 논하는 차원은 다르나 상대적인 가운데도 모든 세계 종교는 공동의 본질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상은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립이나 갈등이 있을 수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3. 부처님의 타종교에 대한 기본 입장

그러면 불교는 타종교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어떠한 태도로 대응해 왔을까?

《범망경(梵網經, Brahmaja?a sutta)》에는 부처님 당시의 여러 종교사상가들의 진리 주장에 대해 62가지 주제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신론을 비롯하여 유물론, 숙명론, 고행주의, 도덕부정론, 자유의지 부정론, 쾌락주의, 회의주의 등 수많은 종교사상이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진리 주장 속에서 과연 어느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의 한국 종교계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천주교, 천도교, 유교, 통일교, 증산교, 도교, 무속종교 등의 와중에서 불교인들은 과연 타종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한국 불교도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보면, 교단적으로는 배타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교리적으로는 포괄주의적 해석을 하고 있으며, 종교 체험적으로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참된 불교인이라면 타종교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지녀야 할까? 이 문제의 해답은 부처님이 타종교인을 대하면서 보여주신 여러 사례를 통해 그 원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1) 정법(正法)에 입각한 비판적 입장

부처님의 타종교인에 대한 교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연기설(緣起說)에 바탕을 둔 ‘비판적 입장’에 있었다. 이는 불교의 기본 교설인 연기론에 비추어 타종교의 교설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입장이다.

다른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설하는 종교나 철학사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논리 정연하게 비판하면서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를 가르쳤다. 세계와 인생에 대한 잘못된 마음가짐인 우치(愚癡, 無明)에서 잘못된 종교나 철학도 나오기 때문이다.

2) 관용적 평화주의

부처님은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평화를 가르쳤다. 부처님을 모든 다툼에서 떠난 이(ranamjaha)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범망경(梵網經, Brahmaja?a sutta)》(남전대장경 6, 52-53)에는 당시 인도사상계의 62종의 견해에 대하여, “여래는 이미 이러한 여러 견해들의 장단점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보다도 더 휼륭한 것도 알고 있지만 지식에 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적멸(寂滅)과 해탈을 얻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제자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면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며, ‘타종교와 다투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타종교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나 분노, 시기, 질투, 증오 등의 감정은 이기주의적 탐욕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견해인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미움은 노여움이 아닌 사랑으로, 악은 선으로 정복하라고 설했으며, 적대주의와 미움을 가르치는 자에게는 “미움은 미움에 의해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인도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완성한 후 불교의 정법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했던 아쇼카(B.C.272∼232 재위) 왕도 비문 칙령에서, “자신의 종교만을 존중하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지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성장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행동이 그와 같지 않으면 자신의 종교의 무덤을 파는 것이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모든 이의 종교의 교의에도 귀기울이도록 하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관용과 이해의 정신은 불교가 2500년에 거친 긴 역사를 통해서 전쟁과 어떠한 박해의 사례도 없게 하였던 것이다.

3) 이성과 경험에 의한 진리 판단

부처님은 특정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적 정당성을 자신의 냉철한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 검증해 볼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불교의 이성적 태도는 과학적 사고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맹목적 신앙이나 독단론에 대한 비판 정신에서 온 것이다.

《칼라마경(Ka?a?a-sutta)》에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진리 탐구의 자유와 비판 정신을 가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거듭 들어서 얻은 지식이나 들려 오는 소문이라 해서, 전통이나 종교적 권위를 지닌 성전 때문에, 추측이나 그럴듯한 논리 때문이나, 이것은 우리 스승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어떤 교설에 이끌리지 말라.

다만 그대 스스로 어떤 것이 온전치 않고, 나쁜 것인가를 알 때 버리도록 하라. 반대로 유익하고 온전하며, 선한 것일 때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르도록 하라.” 이러한 가르침은 맹목적 믿음이나 전통의 힘을 강요하는 종교에 대하여 이성과 현실주의를 강조하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4)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진리 선포에 대한 비판

부처님은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진리를 선포하지 않았다. 불교가 타종교에 대해 도그마적 배타성을 보이지 않는 것은 불교와 부처님만이 진리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였다.

《상응부경전》(II.25)에서는 “여래가 이 세상에 나타나든 출현하지 않든 간에 현상의 본성, 현상의 규칙적인 형태나 조건성으로서의 연기법은 존재한다. 이를 여래는 발견하고, 이해하고, 드러내 보이고, 가르쳤다.”고 설하고 있다. 이 세계는 연기법에 의해 존재하며 온 우주는 이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세상에 나오던 나오지 않던 간에 연기의 진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계시 종교와 같은 배타적 절대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누구나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다. 설사 불교를 만날 인연이 없었던 이도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독각불(獨覺佛)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에 예배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5)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의 구별 방법

부처님은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 불만족스러운 종교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정하여 설하신 바 있다. 《산다카경(Sandaka-sutta)》(중부경전1:515~ 8)에는 참다운 종교를 판단하는 법을 설하면서 사이비 종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① 물질계의 실재성만 믿고 사후의 삶을 부정하는 종교, ② 부도덕한 윤리를 강조하는 종교, ③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성을 부정하는 종교, ④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지 않고도 모든 존재가 최후의 구원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인은 윤회와 인과를 믿지 않거나 10선(善) 등을 부정하거나,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구원과 해탈에 대한 자기 책임성을 부정하는 종교라면 당연히 사이비 종교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산다카경》은 위의 네 가지 사실을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① 교주의 전지성, ② 계시를 주장하는 종교, ③ 형이상학적 종교, ④ 실용적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종교 등은 불만족스러운 종교라고 지적하고 있다. 불교에서 보는 참된 종교란 윤회와 재생, 도덕적 가치, 자유, 해탈을 얻는 책임성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6) 구원에 대한 자기 책임

부처님은 신과 같은 타자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신의 은총에 기대어 구원을 찾는 종교는 잘못하면 도덕적 책임감이나 주체적 노력을 소홀히 할 위험성이 있다. 부처님은 창조신과 주재신의 개념을 부정하고, “여래는 이러한 신의 개념에서 자유로워졌다.”(장부 경전 1:22) 고 선언했다.

불교는 타종교의 가치를 판단할 때 인간의 노력에 의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가 하는 점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자주적 정신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을 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최후의 가르침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와 같이 부처님이 보여 주신 타종교에 대한 태도는 오늘의 불교도들이 타종교를 대해야 할 태도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당시에 존재했던 수많은 종교와 철학사상과의 조우에서 스스로의 종교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면서 외도들을 교화하였다.

불교도들은 부처님이 보이신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잘 음미해야 한다. 즉 비판적이면서도 관용적인 태도, 이성적 신앙, 사이비 종교와 불만족스러운 종교를 선별할 줄 아는 능력, 타종교 교리의 수용 방법, 주체적인 노력에 의한 자기 구원의 태도 등이 곧 불교가 타종교를 보는 눈이자 입장인 것이다.

4.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위한 대승의 원리

1) 모든 진리 주장으로부터의 자유와 무한한 개방성

대승불교에 와서 불교는 법(法, dharma)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용수(龍樹)는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에서, “만일 교법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같은 사상은 자신의 교법에 대한 애착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타종교에 대한 증오에 의해 애증과 모순의 갈등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금강경》에는 여래가 설한 법까지도 절대 진리로 집착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수보리여! 여래가 스스로 “나는 설해야 할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말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진리를 설한다고 해도 설할 진리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비로소 진리를 설한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이러한 열린 진리관은 모든 종교사상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대승의 공(空, s쳕?yata?)의 가르침은 무한한 개방성, 즉 끊임없이 열린 테두리 없는 마음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불교의 종교 다원주의 이해는 구원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점에 있지 하나의 공통된 실재가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불교는 일종의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종교 다원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진리가 상대적인 것과 같이 여러 종교도 다른 역사와 문화 전통에서 생성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세속적 진리(俗諦)의 입장에 볼 때, 모든 진리는 역사적이며 상대적이다. 이러한 진리의 본성은 인간 언어의 한계성과 그 해석의 문제, 그리고 종교 현상의 역사적 성격의 이해를 통해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 진리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절대적·정적·단일 논리적이었으나, 현대의 진리관은 점차 비절대적·역동적·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진리관은 이미 2천여 년 전 불교나 힌두교 사상가들이 비절대적 인식론에서 주장했던 것으로, 불교도에 있어서 진리의 비절대화(非絶對化)란 어떤 새로운 사실이 아닌 것이다. 불교는 어떤 절대 진리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경전적 진리도 단지 방편적인 길(ma?ga)을 가르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어떤 진리 주장의 언어도 궁극적으로는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다. 진리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 참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각되고 이해되는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양식의 상대적 진리관은 항상 새로운 진리를 찾고있으나, 불교는 어떠한 진리 개념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용수(Na?a?juna), 월칭(Chandra-k沖rti), 승랑(僧朗) 같은 중관 사상가들은 어떤 진리, 어떤 실재의 관념도 버릴 것을 가르쳤다. 진리에 대한 무집착이야말로 참된 진리를 향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은 여래의 법설(法說, Dharma-des첺na?)까지도 절대 진리로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야경에서 설하는 테두리 없는 공(空)은 무한한 열림의 세계로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궁극적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관(空觀)을 바탕으로 한 불교는 진리 주장이나 종교간의 대화에서 “어떠한 입장도 없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는 다른 모든 종교의 절대적 진리 주장을 상대화시키게 되는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자신은 아무런 진리도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한 하나의 강한 주장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반야경이 가르치는 일체법공(一切法空)의 교설도 하나의 입장과 견해인데 이것을 진리 주장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공 또한 공하다’는 것이다. 공의 교설은 공에 대한 어떠한 집착도 허용하지 않는다. 공은 절대 진리나 실재에 대한 영원한 부정의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타종교를 바라보는 불교의 눈은 독특한 점이 있다. 이는 종교 다원주의를 하나의 공감대로 이해하게 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며, 오늘날 다종교사회가 나아가야 할 희망적인 길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2) 진리 주장과 다툼에 대한 화쟁회통(和諍會通) 방법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은 모든 다툼에서 벗어난 이’다. 그러면 과연 불교도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종교적 진리 주장이나 논쟁을 화회(和會)할 수 있을까? 우리는 중관(中觀)사상의 ‘모든 견해를 떠남’을 기초로 하여, 원효(元曉, 617∼686)가 그의 일생 동안 일관하여 화두로 삼아온 화회의 논리를 종교간의 대화와 이해의 방법론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원효의 화쟁회통(和諍會通)은 그의 사상이라기보다는 부처님이 설한 교법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어 밝히기 위한 해석학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종요(宗要)’와 ‘개합(開合)’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서로 다른 진리 주장의 화회를 시도했다. 여기에서 “종(宗)은 널리 펼쳐 놓는다는 말이며, 요(要)란 이를 다시 하나로 돌아가게 한다.”는 말이다.3)

즉 ‘종요’란 개합(開合)과 동의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효가 말한 ‘합(合)’의 세계란 부처님이 깨달은 불교의 최고 경지로 돌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열고 합함이 자유자재하고 주장과 논파가 서로 걸림이 없다(開合自在 立破無碍).”라고 하는 화쟁의 경지는 원융 무애한 궁극적 자유를 성취한 이의 마음의 작용이라 할 것이다. 이 경지를 원효는 《화엄경소》에서, “이렇듯 막힘 없고 걸림 없는 법이 법계에 들어가는 법문의 길이며 모든 위대한 보살들이 이 길에 들어섰고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여기서 나오신 것이다.

성문과를 증득한 성자들도 이 경지에서는 귀머거리나 장님이 되어 버리고 범부나 근기가 하열한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웃어 버리거나 놀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법에 들어서는 길을 얻으면, 한 생각을 지나지 않고 무변한 삼세에 두루 나타나고 또한 시방의 세계가 미세한 티끌 속으로 들어가 버리니 이러한 이치를 어떻게 생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원효가 생각하고 있는 화회는 양시(兩是)의 논리가 아니라 모든 진리 주장과 견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일심(一心)의 경지에 도달할 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4) 이러한 원효의 화쟁의 논리를 종교간의 이해의 문제에 적응시켜 볼 수 있다. 즉 모든 이원적 사고에서 벗어나 무애와 자재에 바탕한 마음에 있을 때 비로소 모든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종교간의 우열이나 폐쇄된 진리 주장과 종교 이기주의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5. 맺는 말

불교는 세계의 어는 종교보다도 타종교와의 이해와 협력을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교리 체계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종교이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사상과 진리 탐구의 자유,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존중, 배타적인 진리 주장에 대한 비판, 열려 있는 진리관, 대화를 통한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대승의 공(空)의 무한한 열림의 가르침에는 모든 폐쇄된 교리나 전통을 깨뜨려 줄 수 있는 역동성이 있다.

불교는 진리의 상대성, 경전언어의 방편성, 진리에 대한 무집착과 무애 자유의 마음 등을 통해 화쟁을 가르친다.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과 같은 종교다원세계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방향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종교간의 대화 운동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이 주도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불교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선도하는 불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종교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비교종교학적 지성의 연마와 아울러 대화를 위한 이론과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전의법(轉意法)5) 등과 같은 부처님이 타종교인을 교화할 때 사용하신 방법이나 입장을 다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불교인들은 타종교인들이 배타적인 교리에 집착하고 있다면 이들이 자신의 교리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그 진리 주장을 다시 검토해 보도록 권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서구 종교에서 중요시 해온 정의와 심판의 논리보다는 지혜와 자비의 덕목에 내포되어 있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정의와 심판의 개념에는 이원론적인 도그마와 비관용적인 윤리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의 마음이 인생과 우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와, 여기에서 솟아나는 자비의 마음으로 가득 찰 때 종교간의 이해와 협력의 길도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끝>

김용표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미국 템플대 대학원 종교학 박사.현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한국 종교교육 학회 이사. 국제원효학회 상임이사. 저역서로 <해조음><반야중관학 체계에서의 경전 언어 해석학><보리행경> <종교의 세계:비교종교>등이, 논문으로 <통일적 종교다원주의에서의 공동본질 문제에 대한 중관학적 해명><선불교와 하시딕 신비주의에서의 궁극적 만남의 의미><종교언어의 문제와 경전 해석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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