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식 서울대 강사

1. 머리말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는 선종이고 그 중에서도 간화선(看話禪)이 정통적 수행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간화선 이외의 수행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수행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불교계 주류 특히 전통불교의 계승을 자처하는 측에서는 간화선만이 절대적으로 유용한 수행법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때때로 간화선 수행법의 유용성 혹은 절대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교계의 주류의 태도를 보면 간화선이 한국불교의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처럼 보이기도 한다.

간화선의 결점에 대한 지적은 간화선 자체의 결점이 아니라 간화선 수행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의 결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간화선 이외의 수행법에 대한 관심은 간화선에 대한 무지의 결과로 치부되고 있다. 적어도 한국 불교계에서 간화선이라는 수행법만큼은 정통적 교리로서 어떠한 도전이나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신성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처럼 절대적인 한국의 간화선 전통은 어떠한 배경 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것일까. 그리고 현재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간화선의 전통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간화선을 절대적 수행법으로 내세우는 수행자들이 보기에는 뱀의 다리를 그리는 것처럼 쓸데없는 질문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간화선은 당연히 수미일관된 전통이며 처음 제시된 이래 지금까지 불변한 전통인데 거기에서 무슨 변화를 찾고 과정을 찾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한국의 간화선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였고, 그러한 변화 과정에 한국불교의 변모 과정이 담겨 있다.

사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의거할 때 영원불변한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이것은 간화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한국 간화선 전통의 형성 과정과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불교가 어떠한 전통을 가져왔는지를 살펴보고 현재의 한국불교가 전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는 유용한 방법이 될 것이다.

2. 지눌의 선사상과 간화선의 수용

한국불교에서 간화선이 처음으로 수용된 것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3∼1210)에 의해서였다.

원래 간화선 자체가 지눌보다 두 세대 정도 앞서는 남송의 대혜종고(大慧宗┳:1088∼1163)에 의해서 처음 체계가 잡힌 것이었으므로 한국의 간화선 수용은 그렇게 시기적으로 늦었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에서도 간화선이 일반화된 것은 원나라 이후이므로 지눌의 간화선 수용은 오히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의 간화선 수용은 대혜종고나 그 제자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지눌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던 과정에서 얻게 된 것이었다. 지눌의 비문에 의하면 지눌이 십여 년 간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무언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대혜어록》을 보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도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參禪)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라는 구절을 보고서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면서 편안함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지눌은 대혜의 어록을 중요하게 여기며 수행에 활용하였고, 이 책의 내용을 통해 간화선을 이해하고 이를 주요한 수행법으로 확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사용하였다.

하지만 지눌이 간화선만을 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요한 선수행법은 3문 즉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3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 중 마지막의 간화(경절)문이 곧 간화선을 주장한 것이고 앞의 2문은 간화선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수행법이었다.

원돈신해문은 중생인 우리 범부들의 마음이 곧 부처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성적등지문은 그러한 마음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하여 정(定)과 혜(慧)를 쌍수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수행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지눌의 초기 저술들에서는 이러한 수행법에 의거하여 ‘자신의 본래 깨끗한 마음을 믿고 깨닫고서 그 성품대로 선(禪)을 닦는’ 것을 선수행의 요체로 거듭하여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두 가지 수행법은 바로 지눌이 주장한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의 핵심이었다. 원돈신해문에 의한 깨달음이 곧 돈오(頓悟)이고 성적등지문에 의한 정혜쌍수의 실천이 곧 점수(漸修)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법 그리고 돈오점수의 사상은 지눌이 간화선을 접하기 이전에 제시한 사상이었다.

이 수행법들은 주로 육조 혜능의 《단경》과 이통현의 《화엄론》을 보고서 확립한 사상인데 지눌이 이 책들을 접한 것은 대혜의 어록을 접하기 훨씬 이전이었다. 지눌이 대혜의 어록을 통해 새롭게 접한 간화선의 수행법은 이러한 수행법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이론도 거부하고 오로지 화두의 참구에 의해서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간화선의 입장에서 볼 때 중생인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주장조차도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으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간화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원돈신해문이나 성적등지문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부정되어야 할 내용이었던 것이다. 지눌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화선을 수용한 후기의 저술에서는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한계를 지적하고 간화문의 방법이 보다 완전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지눌 최만년의 저술로 그의 사상을 총정리하고 있는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는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내용을 설명한 뒤 이러한 수행법보다 화두를 통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간화선의 경절문 혹은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이 보다 완전한 수행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눌은 간화선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수행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법집절요》에서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법집절요》에서는 성적등지문의 내용을 수상정혜(隨相定慧)와 자성정혜(自性定慧)로 나누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원돈신해문에 대해서도 마음의 구조와 작용을 여러 개념을 이용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화엄의 이론과 비교하기까지 하고 있다.

간화선의 수행법에 근거하여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법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계는 있지만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법이 일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고 후학들에게 제시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눌에게 있어서 간화선의 수행법과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의 수행법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었을까. 그의 저술에 의하면 지눌은 이 수행법들의 차이를 우선 근기상의 차이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간화선법은 최상근기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초심(初心)의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에 의하면 이 열 가지 알음알이의 병도 진성연기(眞性緣起)로서 취하고 버릴 필요가 없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말로 가리키고, 지시하고, 듣고 헤아리는 바가 있으므로 처음 발심한 공부인들도 믿고 배워서 행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경절문(徑截門)은 직접 비밀한 가르침을 전함에 있어 말도 없고 가리키는 것도 없어 듣고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법계가 막힘 없이 연기한다는 이치조차도 곧 말하고 이해하는 장애(說解之碍)가 된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밝게 알고 완전하게 알게 되겠는가. (《간화결의론》)

이 내용만으로 보면 원돈신해문과 간화경절문은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완전히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성적등지문에 대하여 별도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성적등지문이 원돈신해문에 의한 頓悟에 자연히 따르는 漸修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은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수행법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수행법인 것이다.) 이 경우 당연히 간화선의 경절문이 완전한 가르침이고 원돈신해문은 불완전한 가르침이 된다. 그리고 근기에 따른 것이라면 두 가르침은 교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눌은 두 근기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 것 같지는 않다. 원돈신해문에 의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가 다시 경절문의 방편 즉 간화선에 의해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시한 법문은 모두 언어에 의하여 이해함으로써 깨달아 들어가는 사람을 위하여 (깨달음의 대상인) 법(法)에 수연(隨緣)과 불변(不變)의 두 가지 뜻이 있고 (깨닫는 주체인) 사람(人)에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이 이해하면 본(本)과 말(末)이 분명해져서 사람이 분명하게 이해하여 불완전한 가르침에서 완전한 가르침으로 나아가 빨리 보리(菩提)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언어에 의하여 이해하기만 하고 몸을 돌리는 길(轉身之路)을 알지 못한다면 하루 종일 관찰하여도 오히려 알음알이(知解)에 묶이고 편안히 쉴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지금 나의 문하에 언어를 떠나 깨달음에 들어가면서 알음알이를 단박에 없앨 수 있는 사람을 위하여 (중략) 조사들이 경절방편(=화두)으로 학자들을 인도한 말들을 뒤에 제시하여 참선하는 뛰어난 사람들이 몸을 벗어나는 한 가닥 활로가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한다. (《법집절요》)

이 문장에서도 ‘언어에 의하여 이해함으로써 깨달아 들어가는 사람’과 ‘언어를 떠나 깨달음에 들어가면서 알음알이(知解)를 단박에 없앨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지만 실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언어에 의하여 깨달은 사람들에게 ‘몸을 돌리는 길’을 찾을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경절문에 의한 깨달음이 오직 최상근기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못한 근기이지만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가르침을 통해 일정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달성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원돈신해문과 간화경절문이 연결될 소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간화문이 오로지 별도의 최상근기의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두 가지 가르침이 함께 제시되기 힘들지만 원돈신해문에 의하여 일정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곧 간화문에 의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지눌이 간화문을 다른 가르침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더욱이 지눌은 현실에 있어서 곧바로 간화문에 의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1) 현실에 존재하는 보통 사람들의 근기에 맞춰 깨달음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가르침이 간화경절문만큼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유용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지눌이 말년까지도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간화선을 완전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에 입각하여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원돈신해문 등의 가르침을 함께 선양한 지눌의 입장은 대단히 특징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 교학의 발전과정을 보면 대승불교와 선종의 등장에서 보듯 새로 대두한 학파들은 기존의 가르침을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한 방편적이고 불완전한 가르침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들의 가르침만이 참된 가르침이고 이러한 가르침은 근기가 뛰어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오직 최상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만이 옳은 가르침이기 때문에 다른 가르침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눌도 선종에 상대되는 교학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초기의 저술에서부터 교학불교의 한계를 지적하고 선종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간화선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그 가르침이 가장 뛰어나고 완전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간화선만에 의한 수행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보통 근기의 사람들이 수행하는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방법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눌이 왜 이러한 태도를 취하였을까. 그의 간화선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아직 충분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다양한 수행의 길을 추구해보고 많은 후학들을 지도한 선사로서 간화선이라는 가르침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할 수 있기 난해한 따라서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타당한 이해가 아닐까 한다.

3. 원 간섭기 불교계의 간화선 유일주의

지눌에 의해 수용된 간화선은 이후 고려 불교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사상을 계승하는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하여 간화선 사상이 꽤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지눌의 후계자인 혜심(慧諶)은 대혜종고의 간화선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자무불성간화론(狗子無佛性看話論)》을 저술하여 화두 참구법을 논하였고, 화두 참구를 위한 공안집(公案集)으로 《선문염송》을 편집하였다.

또 그가 수선사의 주법(主法)으로 있는 동안에 대혜종고의 저술인 《정법안장》이 수선사 승려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지눌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된 간화선법이 수선사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수선사의 간화선 사상은 지눌의 입장을 계승하여 간화선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화두 이외의 이론에 의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혜심은 스승인 지눌의 가르침으로 간화경절문 이외에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원돈신해문의 가르침을 얘기하는 《원돈성불론》을 간화선 이론서인 《간화결의론》과 대등하게 간행하였다. 또 여러 수행법을 종합하고 있는 영명연수(永明延壽)의 《만선동귀집》을 절요하였는데, 연수의 가르침은 간화선법의 수행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원 간섭기를 전후하여 고려에는 이러한 수선사의 간화선 경향과는 다른 새로운 간화선 경향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원 간섭기 초기에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활약하던 몽산덕이(蒙山德異)는 모든 이론적 가르침을 부정하고 오로지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는 것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 그의 사상이 중국에 갔던 왕실과 일부 승려들을 통해 수용되면서 고려 후기 불교계의 지배적 사상으로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

‘무자’ 화두의 참구는 이미 대혜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지눌과 혜심도 중요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덕이는 이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고 가서 오로지 ‘무자’ 화두에 의한 간화선만을 유일한 선종의 수행법으로 강조하였다. 덕이는 무자 화두의 강조와 함께 본분종사(本分宗師)에 의한 인가를 주장하였다. 수행자가 화두를 제대로 깨우쳤는지 그래서 온전한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어떠한 이론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없고 오로지 이미 온전한 깨달음을 얻은 본분종사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으므로 무자 화두의 참구를 통해 일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자신의 깨달음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본분종사를 찾아가 확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의 참구가 이미 이론의 틀을 넘어선 것이므로 그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고 보면 화두의 수행을 강조한 후에 본분종사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원나라 불교계에서 덕이의 비중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쩐 일인지 고려 사회에서 덕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많은 승려와 지식인들이 덕이와 교류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의 제자가 고려에 찾아왔을 때에는 고려의 승속이 온통 그를 환영하는분위기였다.

그의 법어가 수행의 기본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그가 편찬한 여러 책들이 고려 불교계에서 널리 유통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덕이가 주장하는 무자 화두의 참구와 본분종사에 의한 인가라는 사상이 고려 불교계에서 간화선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화두의 참구만을 강조하는 덕이의 간화선 사상이 영향력을 증대하면서 고려의 선종에서는 화두 참구 이외의 수행은 점차 정당성을 부정당하게 되었다.

오로지 화두의 참구만이 제대로 된 수행법이고 그 이외의 수행법은 모두 부적당한 수행법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원 간섭기가 진행되는 동안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 그 결과 원 간섭기 후기에 이르게 되면 선승들 내부에서 무자 화두의 참구를 최고의 수행법으로 간주하고, 일정한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는 본분종사를 찾아 자신의 깨달음을 인가받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심지어는 교종 승려들의 사이에서까지도 이러한 풍조를 본받아 화두 수행에 몰두하고 본분종사에게 인가를 받는 것이 승려로서의 능력을 인정받는 풍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자연히 이 시기에는 승려들의 중국 유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화두를 깨달은 본분종사가 중국 승려들로 간주된 이상 자신의 깨달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중국에 유학하여 본분종사의 인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승려들의 중국 유학은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중국의 본분종사에게서 인정받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인 보우나 나옹 등의 행적도 이러한 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보우와 나옹은 국내에서 일정한 깨달음을 얻었지만 모두 중국에 들어가 본분종사를 찾아 인가를 받고자 하였고, 인가를 받은 이후에야 그들은 공식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것으로 인정되어 왕실과 일반 신자들의 존경과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원 간섭기의 간화선 경향은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화선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고려에서처럼 철저하게 무자 화두만을 참구하고 본분종사에게 인가를 받으려는 선수행의 모습으로 자리잡지는 않았다. 다양한 선수행법이 공존하고 있었고, 화두 참구의 방법도 다양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널리 읽힌 간화선 관련 서적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고려에서는 몽산 덕이의 저술을 제외한 다른 간화선 관련 서적은 거의 읽힌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앞 시기에 널리 읽혔던 지눌의 저술도 원 간섭기에는 거의 간행되지 않았고, 당시 중국의 간화선을 대표하는 승려로 중국과 일본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고봉원묘(高峰原妙)와 중봉명본(中峰明本)의 저술도 이 시기에 유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선종 서적으로 인정되던 《무문관》조차도 이 시기 고려에서는 읽혀지지 않고 있었다. 고려의 불교계는 오로지 몽산덕이의 저술을 통하여 간화선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사상 경향만을 유일한 간화선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조선시대 간화선의 성격

원 간섭기의 간화선 사상은 조선 초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몽산덕이의 사상에 기초하여 무자 화두를 참구하고 본분종사에게 인가를 받는 것이 선수행의 주요한 방법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경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변화되었다. 간화선 이외의 선 수행법도 다시 주목되었고 몽산덕이의 저술 이외의 책들이 읽혀지면서 간화선의 내용도 단순한 무자 화두의 참구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 불교계의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인데,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지눌 사상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었다. 고려 중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지눌의 사상은 원 간섭기 이후에는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의 저술이 간행된 흔적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승려들의 행적에서도 지눌의 사상에 대한 관심과 주목은 보이지 않는다. 간화선 절대주의의 분위기에서 간화선만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 지눌의 저술들 특히 간화선 이전의 사상을 담고 있는 저술들은 주목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잊혀졌던 지눌의 사상은 조선왕조 개창 이후 기존의 불교계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간화선 이외의 사상까지 포괄하는 사상체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조선 초 이후 그의 저술들은 많은 사찰에서 널리 간행되었고, 승려들의 교육을 위한 기본 교재로 활용되었다. 조선 중기에 정리된 승려들의 기본 교육을 위한 교과과정은 기본적으로 지눌의 저술을 토대로 하여 수립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수행의 방법에 대한 생각도 지눌의 입장을 반영하여 ‘먼저 (원돈신해문의 방법에 의해)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세우고, 다음에 (간화선의 방법에 의해) 알음알이(知解)의 병을 제거하여 활로(活路)를 제시하자’는 방법이 선수행의 기본적 과정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간화선만을 선수행법으로 생각하는 원 간섭기 이래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의 불교계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선종의 흐름에서 찾게 되면서 간화선의 정통성이 다시 강조되었다. 고려 후기 이후 불교계에서 교종에 대한 선종의 우월성은 점점 두드러지고 있었지만 조선 중기의 본격적인 폐불 이전까지 불교계는 여전히 교종과 선종으로 구분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폐불에 가까운 탄압을 겪고 난 후 불교계에서 교종의 흐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승병의 활약 덕분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된 불교계는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사상의 순수성에서 찾았고 이 과정에서 선종의 간화선 사상이 유일하게 정당한 사상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조선불교의 정통성으로 확립된 법통의 계보는 이러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태고법통론’으로 정리된 조선 후기의 법통론은 한국의 불교가 ‘본분종사’에게 간화선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원 간섭기의 태고 보우에게서 비로소 ‘순수하게’ 시작되었고 이 ‘순수한’ 간화선 사상만이 유일하게 계승될 가치가 있는 사상으로 인정하는 논리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불교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염불문·원돈문·경절문의 3문 수행법은 이러한 간화선 중심주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수행법을 3문으로 나누는 것은 외형상 앞에서 본 지눌의 3문 체계와 비슷하고 실제로 후대에 가면 이 3문이 모두 지눌에 의해서 제창된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3문 수행법은 지눌의 사상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눌은 간화선을 우수한 수행법으로 인정하였지만 간화선만의 수행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성적등지문이나 원돈신해문과 같은 간화선 이외의 수행법도 중요한 선종의 수행법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3문 수행법에서는 간화문만이 정통적인 선종의 수행법이었다. 함께 제시된 3문의 수행법 중 염불문과 원돈문은 선종의 수행법이 아니라 선종 이외의 수행법 즉 아미타신앙이나 교학불교 즉 교종의 수행법으로 간주되었다.

조선 후기의 불교가 기존의 여러 종파를 선종으로 통합한 것이므로 수행법에서도 선종의 수행법만이 아니라 재가신자 등의 염불신앙이나 교종의 교리연구를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설정된 것이 염불문과 원돈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선종의 입장에서 볼 때 불완전한 수행법이었고 선종의 수행법으로 넘어갈 과도기적인 수행법 혹은 선종의 수행법을 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실천하는 임시 방편적인 수행법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해는 지눌의 이해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3문 중에서 원돈문과 간화문은 다름 아닌 지눌의 저서 즉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을 기본 텍스트로 인정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염불문의 텍스트인 《염불인유경》도 지눌의 저술로 얘기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얘기되고 있다. 지눌의 《원돈성불론》은 교학불교의 이론이 아닌 선 수행의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부처의 부동지불과 같다고 깨닫는 원돈신해문의 수행은 단순한 교리의 연구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으로 선종에서의 여실한 가르침에 의해서만 체득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눌은 《원돈성불론》에서 선종에서 얘기하는 ‘중생이 곧 부처’라는 깨달음이 교학불교에서 얘기하는 교리적인 앎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고, 《원돈성불론》의 저술 의도 자체가 선종의 깨달음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교종 승려들의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불교계에서 원돈문을 선종이 아닌 교학불교의 수행법으로 간주한 것은 《원돈성불론》의 내용을 선종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학불교의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불교계에서 선종의 가르침은 곧 간화선이라는 이해가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두가 아닌 이론적 이해를 통하여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원돈성불론》의 내용은 간화선만을 선종의 수행법으로 인정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교학불교와 구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조선 후기의 3문 수행법 중 원돈문과 간화문의 내용은 외형적으로는 지눌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지눌의 이해와 전혀 달랐던 것이고, 이러한 오해의 배경에는 원 간섭기에 형성된 이후 계속 이어지고 있던 간화선 절대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선수행의 요체는 흔히 ‘교학을 버리고 선종으로 나아간다(捨敎入禪).’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이는 바로 원돈문을 버리고 간화문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3문 중 염불문은 본격적인 수행의 방법이라고 얘기하기 힘들기 때문에 실제 수행의 장에서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은 원돈문과 간화문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원돈문을 버리고 간화문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인데, 만일 원돈문을 성취하고 나서 다시 그것을 버리고 간화문으로 나아간다고 이해한다면 원돈문과 간화문의 관계는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상보적인 수행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원래 지눌이 제시했던 원돈(신해)문과 간화문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원돈문을 처음부터 버리고 간화문만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원돈문과 간화문은 애초부터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수행법이 될 것이고, 특히 간화문만을 선종의 수행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선종이 전부인 불교계에서 원돈문의 수행법은 자리잡을 공간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이해방법 중 어느 것이 더 타당한지는 간화선의 효율성과 보편성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지눌에 의해 수용된 한국의 간화선은 원 간섭기에 수용된 몽산덕이의 사상적 영향을 받으면서 크게 변화되었다.

지눌에게 있어서 간화선은 가장 뛰어난 선수행법이었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선수행법은 아니었다. 그가 제시한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방법도 선의 진리를 깨닫는 데 유용한 수행방법이었다. 다만 이러한 수행방법은 간화선에 비하여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므로 간화선을 통해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간화선은 누구나 쉽게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보다 보편적이고 쉬운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방법을 통하여 일정한 깨달음에 이를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단계에서 간화선을 통해 몸을 돌이킨다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 간섭기에 제시된 간화선 사상은 다른 수행법의 효용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간화선의 수행만을 강조하였다.

무자 화두만을 참구하고 본분종사를 찾아서 깨우침을 인가받는 것이 유일한 수행법이며 그 이외의 수행법은 모두 정당하지 않은 수행법으로 간주되었다. 조선시대 불교계에서는 원 간섭기 불교계의 풍조에 대한 반성에서 지눌의 사상을 다시 받아들이고 그의 저술에 기초하여 수행법의 체계를 다시 정리하였다. 하지만 폐불의 극복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순수한 사상의 전통이 강조되면서 간화선의 정통성은 다시 강조되었다.

간화선 이외의 수행법도 인정되고 있었지만 선종의 정통적 수행법으로는 여전히 간화선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시된 원돈문과 간화문의 수행법은 외형상 지눌의 저술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지눌의 사상과는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눌의 생각과 달리 원돈문은 선종의 수행법으로는 부적절한 것으로 폄하되고 간화문만이 바람직한 유일한 수행법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선종에 있어서 화두 참구의 간화선이 유일한 수행법이라는 생각은 원 간섭기에 처음 제시된 이후 한국불교사의 흐름에 따라 당연한 가르침으로 확립되어 현재의 한국불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그 자체가 한국불교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므로 의미있게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간화선만을 정통적 방법으로 파악하던 시기가 불교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사상적으로 위축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상황에 처한 현재의 불교계에서는 전과 다른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끝>

최연식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서울대 강사. 논문으로 <균여 화엄사상 연구-교판론을 중심으로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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