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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禪) 무엇이 문제인가
심재룡 서울대 교수
[2호] 2000년 03월 10일 (금) 심재룡 서울대 교수

1. 이끄는 글

그 동안 한국불교, 혹은 한국선(韓國禪)의 특성에 관한 논의는 주로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양면성을 중심으로 개진되어 왔으며 대체로 수긍할 만한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논의들을 토대로 현대 한국의 선불교에 국한해서 주로 그 부정적 면모를 짚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반드시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더 많아서가 아니라, 한국불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의 종교, 세계 속의 불교로 거듭나기 위해서 철저한 자기반성이 요구된다는 저간의 공론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이라고 보아주기 바란다.

대상을 한국선에 국한한다고 하지만 선불교가 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고, 또 선불교의 문제가 한국불교의 역사적, 구조적 모순과 얽혀 있기 때문에 엄밀하게 한국선의 문제만을 따로 떼어내어서 다루기보다는, 한국의 선불교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시켰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원산지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단지 몇몇 학자의 손에 의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나, 아니면 불가촉민의 한풀이 수단으로 최근에야 불교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중국불교는 문화혁명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만나 이미 지나가버린 시대의 문화유산 내지 관광상품으로 전락해버린 감이 없지 않다. 일본불교는 이미 12세기에 그들 나름의 종교개혁 같은 세속화의 길을 걸어 상업화·가업화(家業化)되었다.

단순하고 ‘미신적인’ 대중의 불교와 세계적 수준이라고 말하는 아카데미즘의 불교가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일본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정일치(敎政一致)인 티베트 불교는 최근 중국의 침략으로 그 정치적 명맥을 외국에서 유지하며, 반작용으로 불교를 전세계에 포교하는 데 힘을 쏟고 있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서양식 불교는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철학 내지 서양적 생활 방식의 대안으로 연구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아마도 한국 산사(山寺)에 묻힌 불교는 철저한 하안거(夏安居)·동안거를 거치는 혹독한 수행과 그 계율의 엄격성으로 본래 불교의 진면목을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전통이라고 내세울 만하다. 그러나 현대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그 폐해를 살펴보노라면, 한국불교의 자부심은 간 데 없고 일말의 위기의식마저 고개를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눈에 띄는 문제점들 가운데 몇 가지만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선 잊어버릴 만하면 들고일어나는 조계사 사태와 같은 집단적 이권다툼에서 보이는 ‘세속화’의 문제이다. 여기서 세속화라 함은 물론 종교집단의 본질을 벗어난 타락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탈선행위는 번뇌와 그 양상이 매우 흡사하다.

끊기가 힘들고 때가 되면 반복적으로 연기적 속성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그러하며, 근본적인 치유책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세계의 유수한 언론매체를 통해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조계사 사태와 같은 현상은 한국불교가 치유해야 할 대표적 번뇌 중 하나이다. 번뇌는 인(因)과 연(緣)과 그 연기적 관계를 명확히 봄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그 구조가 결코 간단치 않다는 데 있다.

다음으로 ‘수행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승단의 세속화와 타락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한국선의 문제는 그 근본 원인을 궁극적으로는 모두 수행의 부재에 돌릴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불교의 경우, 출가수행자뿐만 아니라 일반 재가신자에게도 수행은 그 본분에 속하는 일이다. 적어도 수행이 종교적 이상을 향한 실천궁행을 의미하는 한, 수행이 없는 불교는 존립 의의를 잃게 된다.

그러나 사부대중 모두에게 수행이 본분이라는 상식은 종종 외면당한다. 선가(禪家)의 참선행법은 체계적인 수행이론에 의존하기보다는 개별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옥석을 구분하기 어렵고, 선지식의 존재에 대한 의존도 높아서 객관적 검증의 길이 사실상 막혀 있다는 점도 선수행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불교에 최소한 10년 이상 꾸준히 참선 수행하는 수좌들이 극소수에 머무는 것은 선불교의 수행법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한 데에도 일단의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처음부터 바른 수행의 길로 들어서기도 어렵거니와, 열심히 수행하다가도 길을 잃거나 퇴굴심으로 인해 중도에 폐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선수행하는 수좌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염불, 간경, 주력, 심지어 도교 계통의 수행을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끝으로 ‘불교의 노령화’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 문제 역시 앞의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사실 현대 한국에서 불교신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노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신심이 한국불교를 그나마 지탱해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신심은 바른 이해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할 때, 노보살들의 신심은 불법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과인가? 나이 든 사람의 지혜가 갖는 가치를 폄하할 의도는 조금도 없지만, 불교가 무한한 가능태로서 개방적으로 사고하는 젊은이들의 외면을 받아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이 야기하는 문제가 ‘승려수의 감소’ ‘기복신앙화’ ‘불교에 대한 광범위한 오해’ 등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이상은 현대 한국불교의 문제점 가운데 두드러진 몇 가지를 열거해 본 것이다. 이 간단한 일별만으로도 우리는 그 문제들의 실체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즉 한국 현대불교의 문제들이 대부분 독존, 또는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한국 선불교가 갖는 한계로부터 직간접적으로 파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선불교에서 찾는 전통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고, 그러한 ‘선 일변도의 상황’이 현대 한국불교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한국선’에 대한 반성은 시간과 공간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하는 현상적 분석을 기초로 이루어질 것이다.

먼저 역사적 분석으로서 한국선의 현재의 모습을 만든 과거의 인과 연을 다루게 될 것이고, 다음으로는 구조적, 제도적 분석으로서 현대 한국이라는 특정한 문화환경 속에서 선불교가 갖게 된 특성 및 한계를 짚어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역사적 분석

1) 선불교 그리고 한국선의 위상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우선 ‘한국선’의 독자성을 주장할 근거가 있는가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과연 전통적인 중국선(Chan)이나 20세기 초 전세계로 퍼져 나간 일본선(Zen)과 차별되는 한국선(Son)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특정한 종족이나 사회를 위한 편협한 도그마가 아니라, 모든 중생들에게 근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고통을 제거하여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사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서, 1천6백 년의 장구한 역사 속에 그리고 한국인의 심성 속에 뿌리를 내리고 현실적 삶의 원리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 본래의 보편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은 대승불교의 제2 중심지로 불린다.

이것은 중국에 있어서 불교의 성공적인 토착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초창기의 수입불교기를 지나 방대한 역경(譯經) 사업을 거친 후, 천태(天台)·화엄(華嚴)의 정치한 교학불교의 성립과 그 뒤를 잇는 선불교의 태동으로 이른바 ‘중국불교’는 완성되었다. 성공적인 토착화 이후 불교는 수세기에 걸쳐 중국문화에 서서히 편입되어 갔다.

그 가운데서 선은 불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주체적 반응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어 왔다. 그러나 문화의 흐름이란 언제나 얻은 것 못지 않게 잃은 부분을 갖게 마련이다. 선불교 역시 인도불교의 성공적인 중국적 변용이라는 면을 가진 반면, 한편으로는 불교 본래의 보편성을 잃어버리고 Chan 이데올로기화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사정은 Zen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선종은 중국불교의 종교개혁이요, 혁명이다.” 워낙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 사람이라지만 호적(胡適:1891∼1962)조차 도가 지나친 표현을 썼다. 그 학자적 명성에 눌려서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며 선종이 과연 불교를 얼마나 개혁했는지조차 알아보려 하지 않고, 다만 그 과격한 문자적 표현과 기상천외의 수행방법에만 호기심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선은 철학이 아니라, 초이성적 직관이다.” 호적에 못지 않게 선불교를 마치 일본의 국교인 양 서양에 알리는 데 공헌한 스즈키(鈴木大拙:1870∼1966)의 발언이다. 그는 일본 특유의 모방술로 선종을 불교라는 모태로부터 떼어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역사로부터 절단하여 허공에 떠도는 구름처럼 자유라는 이름으로 소위 반이성적 성격만을 종합하여 예쁘게 포장해서 ‘젠(Zen)’이라는 상표를 붙인 다음 지나친 합리주의와 두 차례의 세계전쟁 뒤 실존적 허무주의에 식상한 서양의 일부 지식층을 파고들어 그 판매에 성공하였다.

물론 두 분의 학문적 업적이 폄하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선불교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선종은 요컨대 호적이 지적하듯 중국불교의 개혁도 아니요, 스즈키가 강조하듯 이성을 벗어난 직관만도 아니다. 선종은 인도불교의 개념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더욱 철저하게 실천에 접목시켜 중국인의 체질에 맞게 개량한 불교이다. 불교라는 큰 틀을 무시하고 벗어나서 선만을 따로 강조함은 마치 부모를 무시하는 방종한 자식의 배역적 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선불교를 마치 중국인들의 특유한 체질이나 성격이 아니면 불가능한 업적이듯이 그 중국적 성격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은 선불교의 보편성을 무시하는 편파적 인종 중심적 태도이다. 선종은 말 그대로 불교의 한 수행법인 선정(禪定:산스크리트 어로 dhya?a를 중국 발음에 비슷하게 禪那로 옮김에 따라 나중에 那를 떼어버리고 禪으로만 종파명을 삼았다.)을 기초로 하여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종파의 하나이다.

선종에서는 단 한 번도 개념적 교리적 전회(轉廻)라 할 만한 사건이 없었다. 단지 깨침을 향한 다양한 기법의 개발이 주목되며, 잿밥에만 관심 있던 사판승(事判僧)들에 반발해서 진정한 사문의 길을 걷고자 했던 그들의 순수했던 구도정신은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불교 본래의 청정수행을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려는 종교적 열정과 의지의 발로였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의 본디 정신에 돌아가려는 자기혁신의 노력으로 선종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석학의 선불교에 대한 태도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쉽게 간취할 수 있다. 선불교의 특수성을 그토록 강조했던 그들의 배후에는 서세동점의 역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화의식과 서양문명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빼고 나면 선불교는 단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와 선불교는 자세히 살펴보면 본질적 차이는 물론이고 단순한 개념상의 차이도 없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사실 중국선, 일본선 그리고 한국선에서 교리·사상상의 차별적 특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본질에 있어서 개별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선불교뿐만 아니라 불교 그 자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어쨌든 ‘정체성’이라는 말이 특수성을 의미하는 한, 중국선·한국선·일본선이라는 것이 애시당초 가능하지도 않으며, 기껏해야 한국선이란 중국선의 아류라는 달갑지 않은 ‘정체성’만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는사실이다.

그게 싫다면 우리도 스즈키가 했던 것처럼 중국선과의 차별화를 위해 다소 말이 안 되는 논리일지라도 가져다 밀어부쳐야 할 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일 뿐더러 자칫 선불교의 본질에 대한 왜곡으로 그칠 위험이 있다. 오히려 한국선의 정체성은 선불교의 특수성·차별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놓아버릴 때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나마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자주 언급되는 선교일치(禪敎一致), 회통성(會通性)의 예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다. 선불교의 특수성·차별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한국선의 정체성을 질식시키는 것이며, 그때의 한국선이란 고작 ‘한국에도 선불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본질에 있어서의 ‘한국선의 정체성’이 가능한지의 여부와 그것이 갖는 한계를 도외시할 때의 위험과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젠 중국이라는 문화의 전달자(혹은 공급자)에 대한 수혜자로서의 한국 선불교가 갖는 특성에 대해서 논의할 차례이다.

2) 법통론(法統論) 그리고 한국선의 정체성

한국문화는 과거 반만년 동안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특히 중국 문명권의 한 축으로서 지역적 독자성을 유지하며 발전하여 왔음에 틀림없으나, 그 중에서도 유독 한국불교는 여태껏 교리 면에서나 교단의 조직 면에서 중국불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자로 된 불경이 그러하고 선종 일색의 교단적 면모가 그러하다. 어찌 보면 선불교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리 달가운 구석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른바 사대주의적 풍조에서 불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으므로 과거야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아직도 구태를 벗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법통(法統)에 대한 논란에서도 드러난다. 선종에서는 이심전심으로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전달된다는 법맥(法脈)의 순수성을 중시한다. 정통성의 근거가 어느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따르느냐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느 스승에게서 침튀김을 받아 그 마음자리를 이어받았는가가 진짜와 가짜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데 있다.

종조(宗祖)의 문제는 법맥의 순일한 계승을 정통성의 근거로 삼는 승단에게는 생명처럼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종의 전통은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자세한 문제들은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정체성과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법통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국 현대불교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기셨던 성철 스님은 1976년에 내놓은 《한국불교의 법맥》의 증보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즉 “……보조는 산성(散聖)으로 한국불교의 정통 법맥에 잇댈 수 없다. 한국불교 조계종은 청허(淸虛)의 제자들이 주장한 대로 중국에 가서 임제계(臨濟系)의 석옥청공(石屋淸珙)으로부터 입실수수 법을 받아온 태고보우를 종조로 모셔야 한다. ……”

이것은 한 마디로 보조 국사를 조계종의 중흥조로 모실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당시 조계종의 최고 어른이셨던 성철 스님의 이러한 주장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우선, 불법의 진리는 과연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전달된다는 그 특이한 전달 방식에 있는 것일까? 이심전심을 주장하는 선종에서나 그 종파적 견지에서 법맥을 따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지 몰라도, 불교 일반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어떻게 불법을 선양하고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지를 더 중하게 여긴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백보를 양보하여 전법의 법맥이 조계종의 정통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 전승의 역사성 자체가 의심되길래 임제-태고 종통설이 생겨난 채영(采永)의 《해동불조원류》를 두고 그 당시만 해도 승려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또 태고에서 청허로 이어지는 법맥은 날조라는 것은 당대의 정다산(丁茶山) 선생도 지적한 바이고, 요즘의 사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슨 중국의 권위 있는 법맥을 업지 않고도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훌륭한 전통을 세운 보조를 젖히고 굳이 꼭 중국의 선사에게 심인(心印)을 받아 온 태고를 종조로 모셔서 무슨 득이 있을 것인가? 진리의 기준이 왜 하필 중국선의 법맥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 필자는 해묵은 조계종의 종조·중흥조 논쟁을 재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를 통해서 한국선의 정체성·주체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것뿐이다. 우리는 자생적 민족선―앞에서 언급한 대로 물론 한계는 있겠지만―을 내세울 수 있는 훌륭한 선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자생적 민족선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불교사의 첫 페이지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조사의 심인을 받고서야 불교사업을 시작하셨던가?

선종에서 그토록 존숭하는 《육조단경》 《대혜서장》에서 깨달음의 심인을 얻었던 보조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단지 그것뿐인가? 보조는 의병투약(依病投藥)의 정신에 입각한 다양한 수행문과 한국불교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회통적 교학체계로 자생적 민족선을 위한 독창적 하부구조를 완성하지 않았던가? 그 모든 우리 것을 다 버리더라도 중국의 삼류 선사에게 얻은 침튀김만은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발상 그 자체가 하나의 화두 같아서 도대체 뜻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한국선의 정체성을 문제삼고자 한다면, 이제 사대주의를 저변에 깔고 있는 맹목적 법통론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로 우리는 한국선의 정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한국선이라는 전통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 5백년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선은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모든 지적 상부구조가 모조리 쓰러져 버린 오늘날에도 그 왕성한 생명력을 더욱 발하고 있다. 바로 그 끈질긴 생명력은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순수하고도 혹독한 구도행이 한국선의 역사를 채워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모진 탄압 속에서도 그리고 타국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추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보인다는 것, 이것을 빼놓고 다른 어떤 것을 정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수입불교, 모방불교 그리고 과거문화에 대한 단순한 묵수가 그러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그 생명력이란 단적으로 각자(覺者)―정안종사(正眼宗師), 선지식(善知識)―가 계계승승하여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심전심을 핵심으로 하는 선불교에 이보다 완벽한 정체성은 없는 것이다.

중국선이 이미 형해화된 불교에 대한 반발로 본래의 불교로 돌아가고자 한 순수한 종교적 열정의 발로였다면, 한국선은 그 열정이 아직도 불타고 있는 살아 있는 불교라고 한다면 지나친 자화자찬일까? 지금까지의 역사적·이론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이제 현대 한국 선불교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실제적인 문제들을 따져보도록 하자.

3. 구조적 분석

1) 선불교 전통에 내재한 문제들

이 글의 초두에서 언급한 조계사 사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도대체 그러한 수치스러운 일은 왜 자꾸 반복되는가?

그 사태는 한국선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불거져 나와 폭발한 대표적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여러 문제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사태이지만, 먼저 ‘수행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점잖치 못한 표현이지만 ‘닭 벼슬보다도 못한 것이 중 벼슬’이라는 말이 있다.

승려가 천대받던 시절 스님네들의 속내가 묻어나는 자조적인 말이지만, 그 말이 불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말은 아니다. 도대체 조계종 총무원장과 사찰의 주지라는 ‘벼슬’이 무엇이기에 스님네들이 그토록 신명을 바쳐 취해야만 하는 것인가? 물론 여기서 그 복잡한 정황과 제각기 주장하는 바 시시비비를 일일이 따져볼 겨를이 없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잿밥’에 관심을 보이는 수행승과 교단의 타락상은 진지한 수행이 없는 현실의 반증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청정수행이 외면당하는 데에는 선불교의 수행 전통이 한몫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선불교의 수행은 어렵다. 그나마 ‘점차적’ 수행이라면 인격적 성장을 느껴가며 언젠가 도래할 ‘시절인연’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나아가련만, 일세의 사표로 우러름을 받는 종문의 선지식께선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이 선문(禪門)의 정로(正路)라고 하시며 점수(漸修) 운운하는 자는 진리의 뜰을 황폐하게 하는 잡초이므로 뽑아버려야 한다고 호되게 질책하신다.

수행법이 근기에 맞아야 함은 불교 수행의 상식이다. 개개인의 기질이나 능력에 맞지 않는 수행은 부처를 이루기는커녕 역효과가 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근기를 무시한 ‘유일무이한’ 길은 많은 이들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승려가 수행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명확한 수행관도 없는 터에 점수행은 닦지 말라니, 계율이나 청규가 재물이나 권력에 눈먼 승려들에게 구속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수행의 부재로 인해 연기(緣起)하는 문제들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리고 모두가 다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선불교의 생명 유지에는 선지식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선지식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선지식뿐이다. 언필칭 수행은 선지식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지만 구도자들은 누가 선지식인지, 또 누가 선지식의 흉내를 내고 있는지 막연한 추측이나 남들의 판단 외에는 알 수 있는 방도가 없다. 이것은 비단 불교 특유의 문제는 아니지만 수행 원리와 그 실제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규준을 갖추지 못한 선불교의 약점이 아닐 수 없다.

단적인 예로 객관적 검증이 쉽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것을 악용하는 사이비의 횡행은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불교의 종파성(宗派性)’이라는 문제를 따져보자. 한국불교의 타락상의 배후에는 언제나 꽤 큰 세력의 두 집단이 싸우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는 ‘○○연합회’니, ‘△△회의’니, ‘××협의회’니 하여 두어 개의 대규모 집단이 대립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그 집단들은 다시 수많은 문중이나 집안으로 세분화된다.

선불교는 말 그대로 다수의 ‘집안’ 단위의 세포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신경계’나 ‘호흡기관’ 따위의 조직은 형성되어 있지 않다. 물론 여기에서도 세속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법의 피를 받은 집안의 번창을 위한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세포단위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 구속력은 세속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선불교의 개인주의적 경향은 그 뿌리가 매우 깊다.

이심전심으로 전승되고, 선지식에게서 내밀히 심인을 받아 왔던 전통이 바로 그 기원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 집안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듯이, 한 선지식을 중심으로 일군의 수행자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문중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집단 형성의 과정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집단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한 선지식을 모시고 나면, 선불교의 수행에 있어서 더 필요한 요소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연고와 소통이 없는 다수의 원자적 집단들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자적 수행공동체가 배타적 종파성을 띠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두번째 문제인 ‘인가(認可)의 객관성’ 문제이다. 인가와 관련된 시비는 선종사의 이곳 저곳에서 발견된다. 선가의 전적에 나타나는 법거량으로 보건대 그 인가라는 것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란 느낌을 버릴 수 없다.

그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과 보편성의 확보에 대한 열정의 부재가 안타까운 것이다. 아무튼 인가에 있어서의 객관성의 결여가 원자적 수행공동체에 배타적 종파성을 부채질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오늘날의 한국선에도 배타적 종파성의 전통은 여전하다. 다만 그 종파성이 예전처럼 인가 문제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돈’ 문제에서 주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파벌다툼의 양상이 더욱 천박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시각을 좀 달리해서, 선불교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야기된 현대 한국불교의 뒤안길을 답사해 보도록 하자.

2) 선 일변도의 전통에서 파생된 문제들

전통적으로 한국불교, 한국선의 특성으로서 자주 언급되어 왔던 것은 선·교간의 조화였다. 그러한 조화에서 선불교 중심의 질서로 재편된 것 역시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간 선불교 진영에서도 나머지 불교 전통이 가지고 있던 다양성을 감싸안으려고 무던히 애썼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성중(城中)불교에 반대해서 산중(山中)불교를 자처하고 나섰던 선불교가 국가적 불교문화 전반의 대행자 노릇을 하기가 그리 쉬웠던 것은 아니다. 선불교 중심의 질서가 오랜 역사를 가진 것과 비례해서 그간 누적된 문제 역시 적지 않다. 선불교 중심의 질서가 가져온 문제로 우선 ‘교학의 상대적 빈곤’을 들 수 있겠다. 교학의 중요성은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이지만, 선불교가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는 특히 후자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정법과 이단을 가름에 있어서 칼날 같은 엄격함을 보이는 선불교의 전통에서 정법의 계승이 선지식의 존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지적한 바이지만 이러한 편향을 어느 정도 바로잡는 길은 교학의 적극적 보완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실다운 수행을 제쳐두고 알음알이로 일관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위험한 길을 가는 이에게 필요한 상세한 지도로서의 교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교학은 교학 자체에 얽매일 때 위험한 것이지 그 순기능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선불교의 단처(短處)를 기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마디 더 보태고 싶은 것은 교학의 위상과 관련된 문제이다. 흔히 교학은 선수행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상대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교학의 의미는 좀더 포괄적이다.

즉 선불교 자체 내에도 선수행을 위한 교학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서, 실수행(實修行)의 원리와 방법, 다양한 행법들의 장단점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론체계를 교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불교가 수행이론에 대해 너무 소홀하게 취급해온 것도, 최상승선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초래한 원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선불교 중심의 질서가 다음으로 야기한 문제는 ‘선의 엘리티시즘’이다.

이 문제는 이미 앞 단락에서 충분히 암시되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선불교는 그 특성상 대중과의 괴리를 내포하고 있다. 스스로 상승근기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규정하고 있거니와 전생의 인연이나 업보에 따른 특별한 능력이 있는 이들만이 알아듣고 또 닦아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선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니면 역사적 정황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지만 여하간 현대 한국선의 안팎에서 공공연히 묵인(혹은 공언)되어온 바이다. 은연중에 몸에 밴 하근기 중생과 상근기 수행인과의 차별 의식은 그만큼 고압적 태도를 낳는다. 그러한 자세는 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자만·아만의 근인(近因)이며, 선불교가 일반 신도에 대한 배려나 중생구제를 비효율적으로 기능하게 한 원인(遠因)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은 적어도 그들이 구제하고자 하는 중생들이 ‘그 이름이 중생’일 뿐 중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지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불교에도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동의어가 있지만, ‘낮은 데로 임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실천에서 한수 배워야 할 대목이다. 기독교가 불과 두 세기만에 오늘날의 성장을 이룬 것은 선불교의 그러한 엘리티시즘이 방치한 ‘무지한 대중’ 속으로 쉽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선사들의 ‘시중(示衆)’이나 ‘상당법어(上堂法語)’에는 대중들을 위한 배려가 없다. 그 배려 없음이 고의적인 것이 아니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아무래도 중간 단계를 설정하지 않는 소위 원돈(圓頓) 불교의 오만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알아듣는 자는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인연이나 짓거나 아니면 손쉬운 타력의 길로 가라는 말인가? 적어도 한국선의 경우, 상당법어나 시중 등은 이중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그 중 하나는 조사가 언외(言外)의 언사로서 제자들의 마음(人心)을 바로 가리키는(直指) 역할이며, 사실 이것이 본래의 용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뜩이나 선가의 권위에 눌린 대중이 늘 들어도 알 수 없거나 아니면 너무나도 식상한 소리에 불과하여, 결국에는 오해로 점철된 선문화의 들러리로 전락하게 만드는 역할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 그 잘못은 법어나 법어를 발하는 선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대중에게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엄연한 한국불교의 현실임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아무튼 자기 마음 밖에서 끝없이 헤매게 하는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는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태생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수행 중심의 현대 한국불교 전통에서 여타 신행 수단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선불교는 불교의 위상이 현저하게 낮아진 조선조 이래 한국불교의 중심축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다양한 종파들의 난립이 겉보기엔 어지러울지라도 그러한 자유경쟁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자생력을 가진 전통이 수립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불교는 자율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정치권력이 자의에 따라 종파의 수나 종류를 결정했다. 자율권을 갖지 못한 승가는 왕실과 결탁한 일부 권승이나 국난에 공을 세움으로써 대접받은 승려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승려는 천민계급의 일원일 뿐이었다. 결국 승가는 소수의 엘리트 선사와 다수의 부역꾼으로 양극화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선불교는 수행으로는 참선 수행 혹은 간화(看話) 수행을 중심으로 삼되 나머지 불교 전통이 가지고 있던 요소들을 무질서하게 거둬들이게 된다. 이것은 조선조에 선종 자체의 종지에 대한 열의가 식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토종 계열의 염불 수행은 물론 진언종 계통인 밀교의 주문까지도 모두 한국불교 선종의 수행 방식으로 포섭되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선불교가 주체가 되어 여러 불교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왕에 있어온 것이어서 소극적으로 받아들였거나 ‘방치’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간혹 뛰어난 선사들이 실제로 염불을 권하거나 스스로 행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직지인심을 표방하는 선불교의 본원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참선 수행(묵조이든 간화이든)과 염불, 간경, 주력 등은 역사적인 ‘종파성’에 있어서나 ‘수행방법론상’에 있어서 다른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행법은 소위 ‘삼매력’을 닦는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 것이다.

비록 ‘주류’인 참선 수행 외에 여러 가지 행법이 선불교에 더부살이하는 ‘비주류’라는 것이 현대 한국불교의 일면이긴 하지만, 바람직한 관계는 양자가 주류와 비주류, 혹은 수승한 것과 열등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것’이므로 개개인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4. 나오는 글

우리는 앞서 ‘한국선의 정체성’이 있다면 그것은 끈끈한 생명력 내지 자생력일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제는 그 자생력의 유지 내지는 연장이라는 측면을 생각해 보자.

생명력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의 적응 여부에 따라 그 명암이 갈린다.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미증유의 변화의 물결을 맞아 한국선은 어떠한 대응자세를 보일 것인가? 한국선의 미래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점 몇 가지를 점묘하는 것으로 결론에 갈음하고자 한다. 앞 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지난 세기 초엽에 일본선은 세계화의 물꼬를 텄다. 반드시 바람직한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쨌든 서구를 중심으로 일본선의 열풍이 불었던 건 사실이다.

서구사회에서 선불교의 고유상표로 ‘Zen’이 통용되는 것도 그들이 지난 세기 활발한 세계화를 통해 얻은 전리품의 하나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우리는 식민통치와 내전, 그리고 먹고살기 위한 전쟁에 시달리느라 모든 분야에 걸쳐 이른바 ‘세계화’가 뒤졌고 이것은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즘 해외 포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내실이 없는 세계화란 공염불에 불과하다.

스즈키의 선도 명치유신 이래 구라파에서 공부한 수많은 유학생 집단의 체계적인 교학의 연구와 가깝게는 교토학파의 전통의 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내실을 얻는 길 중의 하나는 구체적 현실에 발을 딛고 대중과 함께 하는 길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중생과 ‘함께 하는 것’이 대승불교인 만큼 선불교 역시 본질적으로 ‘현실’과 ‘대중’을 벗어나 있지 않다.

또 그것이 선불교가 현대인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또 일본선이 매력을 끈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현대 한국선의 출세간적, 권위주의적, 귀족적 일면은 분명히 극복되어야 할 병폐이다.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반성과 대안이 시험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것 중에는 화두선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과 승려들이 함께 참여하는 시민운동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불교의 현실참여를 뒷받침하는 선불교 고유의 논리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끝으로 한국선의 상부구조를 현대화하는 문제가 있다. 제도적 측면에서 현행 종단의 조직과 기능은 좀더 효율적이고 민주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불교 내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불교 외적인 조건과 같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종교단체의 독립성을 악용한 인사, 재정 등 중대한 사안에 대한 폐쇄적인 운영은 오랜 관행이자 부패의 온상이다. 투명한 경영은 정보의 공유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사이버 시대의 의미와 희망이 있다. 현대화가 필요하기는 한국선의 교육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승원·강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승려 교육의 허실은 이미 승가 내외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던 걸로 안다. 전통적인 교육도 좋지만 전통적인 교육만을 시킨다는 것도 문제다.

21세기에 ‘조선시대의 승려’를 양산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승려 교육의 전근대성이나 비효율성의 문제는 종단의 제도적 정비와 병행해서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끝>

심재룡
서울대 철학과 및 미국 하와이대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저역서로는 <한국의 전통사상><동양의 지혜와 禪><중국불교철학사><아홉마당으로 풀어쓴 禪>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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