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익순 현대불교신문 취재부기자

    편집자 주
    이번 세미나지상중계에서는 8월 8·9일 양일에 걸쳐 현대불교신문부설연수원에서 열린 한국불교학회(회장 이평래) 여름워크숍에서 발표된 글 가운데 세 편을 요약·소개한다.‘불교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워크숍에서는 줄기세포·환경·종교문제 등 사회현안에 대한 불교적 접근이 이뤄졌다. 여기서 소개할 발표문은 김성철 동국대 교수(불교학)의 ‘불교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 줄기세포 연구’, 윤영해 동국대 교수(불교학)의 ‘한국기독교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불교적 성찰’, 서재영 동국대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의 ‘불교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환경문제’ 등 3편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 줄기세포연구

- 김성철(동국대 불교학과)

최근 생명공학과 관련된 황우석 교수의 연구성과가 알려지면서 ‘줄기세포’란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이에 대한 윤리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줄기세포란 뼈나 간, 심장, 신경, 피부 등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장기 세포로 분화 가능한 ‘기초 세포’인데, 식물의 ‘줄기’에서 수많은 가지가 솟아나는 데 비유하여, ‘줄기세포(Stem cell)라고 명명되었다.

그런데 줄기세포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배아(胚芽)줄기세포’이고 다른 하나는 ‘성체(成體)줄기세포’이다. 성체줄기세포는 각종 장기세포에 잠재되어 있든지 혈관 속에서 혈액과 함께 우리의 몸을 순환하다가, 손상된 장기를 아물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극히 미량이라서 채취하기가 지극히 어렵긴 하지만 ‘탯줄 속의 혈액’을 의미하는 제대혈과, ‘피를 만드는 조혈기관’인 ‘골수’에 비교적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줄기세포 가운데 윤리적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배아줄기세포’이다.

줄기세포는 생체 밖의 시험용기에서 배양이 가능하며, 적절한 물리화학적 조건이 주어질 경우 시험용기 내에서 신경, 혈관, 연골, 심근 등 그 어떤 장기세포로도 분화할 수 있는데, 특히 배아줄기세포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채취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줄기세포연구를 포함한 생명과학기술은 그 쓰임은 물론이고 그것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윤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수정란을 시험관에서 줄기세포단계까지 배양하여 각종 실험을 하는 것은, ‘성체로 성장 가능한 개체’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살인행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을 것인가에 따라 ‘살인의 범위’는 달라진다.

의학자나 일반과학자들의 경우 수정란이 형성된 후 자궁 내벽에 착상되기 전까지 약 보름간은 생명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는 수정란 이후부터 생명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기독교나 유태교, 이슬람교와 같은 셈족의 종교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죄악시해도 사람 이외의 동물을 죽이는 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반면, 불교나 힌두교, 자이나교 등 인도(印度)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인간을 죽이는 ‘살인’은 물론이고 다른 동물을 죽이는 ‘살생(殺生)’ 역시 ‘악한 행위’로 간주한다. 줄기세포연구를 포함한 생명과학기술, 또 의료기술의 개발과 시술을 위한 윤리적 지침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종교적 신념과 가치관이 이렇게 각양각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서 먼저 이야기할 것은 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세포 내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 자체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전자가 조작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이런 자연의 섭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조작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의 인지(認知)는 과거의 ‘미신적 생명관’에서 벗어나 ‘무상과 무아와 공과 연기’의 진리에 접근한다. 또, 복제인간이 탄생한다고 해도 불교의 업(業) 이론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만들어지는 복제인간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인조인간’이나 ‘사이보그’와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다. ‘나와 시간을 달리하여 탄생하는 일란성 쌍둥이’이다. ‘신체를 만드는 업종자(業種子)’만 나의 그것과 유사한 ‘독립적 인격체’이다. 쉽게 말해 나의 ‘쌍둥이 동생’일 뿐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장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복제인간이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불교윤리적으로 조망할 때 ‘유전자를 조작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살생’이 문제가 된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선과 악의 기준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으로, ①‘살생하지 말라’, ②‘훔치지 말라’, ③‘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거짓말하지 말라’, ⑤‘술 마시지 말라’는 재가자의 오계(五戒)를 들 수 있는데, 여기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첫 번째 덕목인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는 ‘사람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줄기세포연구는 물론이고 의약품이나 의학기술의 개발을 위해 이루어지는 실험이나 시술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살생’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생명체’를 불교용어로 ‘중생(衆生)’이라고 부르는데, 불교에서는 동물과 식물과 광물 가운데 오직 동물만을 중생으로 간주한다. 현대 생물학에서는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도 생물에 포함시키지만, ‘중생’의 범위에 식물은 들어가지 않는다. 불교용어로 말하면 ‘업(業)’을 짓게 하는 ‘운동기관’과, ‘과보(果報)’를 받게 하는 ‘지각기관’을 가진 동물만이 생명체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동물의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한다. 그렇게 죽은 영혼은 자신이 깃들 육체를 찾아 허공을 떠돌아다닌다. 일반적으로 ‘귀신’이라고 말하는 이런 영혼을 불교에서는 ‘중음신(中陰身)’이라고 부른다. 사망과 탄생의 ‘중간(中間) 단계에 있는 존재’란 의미이다. 물론 중음신의 몸[色陰]은 엷은 빛과 같아서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중음신은 사망 후 늦어도 49일째 되는 날 수정란에 부착된다. 그 때 수정란은 비로소 새로운 육체로 자라나게 되고 그에 부착한 중음신은 다시 새로운 생(生)을 시작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삶이 이런 식으로 무한히 되풀이 된다고 보기에 생명체의 범위에 수정란까지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되기 이전의 정자나 난자에는 영혼이 부착되어 있지 않기에 생명체가 아니다. 낱낱의 세포도 생명체가 아니다. 영혼이 떠나간 뇌사자의 몸도 생명체가 아니다. 따라서 정자나 난자, 일반세포, 뇌사자의 몸 등을 해체하는 것은 ‘살생’ 또는 ‘살인’ 행위가 아니다. 또 배아줄기세포에 자극을 가해 분화된 신경세포나 심근세포 등도 생명체의 부속품일 뿐 생명체 그 자체는 아니기에 그것을 조작하거나 해체하는 것을 살생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후 성장을 시작한 ‘수정란’을 해체하는 것은 분명히 일종의 살생행위이다. 또 그런 ‘수정란의 외피’에 체세포를 주입하여 줄기세포까지 성장시킨 후 그것을 해체하는 것도 살생에 속한다. 과거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켰던 기술에는 이런 유의 ‘살생’이 수반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황우석 교수가 개발한 기술은 많은 점에서 과거의 기술과 다르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수정란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난자의 외피’에 체세포를 주입시킴으로써 줄기세포를 얻는다. 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여기서 사용된 ‘난자’나, ‘체세포 조각’은 생명체가 아니다. 또, 이렇게 난자의 외피에 체세포를 주입하여 얻어진 ‘유사(類似)수정란’의 경우, 자궁과의 연결부인 태반을 이루는 부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자궁 내벽에 착상시켜도 성체로 성장하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과정을 통해 줄기세포를 만들어내는 행위에 대해, ‘살생’ 또는 ‘살인’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황우석 교수가 개발한 기술은 기존의 기술보다 윤리적인 문제를 덜 일으킨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물론 그 언젠가 이런 ‘유사수정란’을 자궁 내에 착상시켜서 성체로 성장하게 하는 기술이 개발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과정에서 일어나는 살생의 죄업은 ‘모르모트’나 ‘원숭이’와 같이 온전한 감각능력을 갖춘 실험동물을 살해하는 죄업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별것도 아닐 수 있다. 거대포식자인 인간에게 음식물과 생활용구와 의약품과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희생되어 온 다른 동물들의 눈에는, 지금 이렇게 줄기세포연구의 윤리성을 논하는 것이 그야말로 ‘인간 종(種: Species)들의 새삼스러운 호들갑’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까지 전진해 온 인류문명이 한 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설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지금의 이런 문명에 대해 불교에서는 어떠한 답을 제시해야 할까? 원칙적으로는 육식을 금하고, 동물실험도 모두 중지해야 한다. 또 출가한 스님이 되는 것만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다. 그러나 이런 최선의 삶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언덕 위에 서서, 굴러 내려가는 수레를 향해, 내려가지 말라고 외쳐보았자, 수레는 계속 굴러 내려가다가 나동그라지듯이,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을 향해 ‘이슬과 같이 맑게 살라’고 강요해보았자 ‘쇠귀에 경 읽기’와 같이 헛수고가 되기 쉽다. 굴러 내려가는 수레를 보았을 때, 보다 바람직한 행동은 수레에 뛰어올라가 그 방향을 조정하여 안착하게 해 주는 것이리라. 불교의 가르침을 우리 사회에 접목시킬 때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최선책(最善策)이 아니라 차선책(次善策)을 제시해야 한다. 신라시대에 원광법사 역시 ‘살생하지 말라’는 최선의 윤리지침의 수준을 낮추어 ‘잘 가려서 살생하라[살생유택(殺生有擇)]’는 차선책을 제시한 바 있다. 줄기세포연구에 대한 불교적 차선책은, 실험이나 시술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살생의 악업’을 극소화 하고, 그런 연구를 통해 이룩할 ‘이타(利他)의 선업’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험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짓게 되는 살생의 죄업을 가능한 한 줄이고, 이런 실험을 통해 얻어진 기술이 연구자나 시술자 개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난치병을 치료하는 이타적 목적으로 쓰이도록 하는 일이다.

연구자의 마음가짐 역시 줄기세포연구 도중 발생할 수도 있는 죄를 선으로 돌리게 한다. 모든 연구자는 연구도중 희생되는 생명들에 대한 연민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나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 받는 환자들을 치료해 주기 위해 이 연구를 한다’는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항상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불교적 성찰

- 윤영해(동국대 불교학과)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기 시작한지 약 200여 년이 넘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관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다윈(《種의 기원》, 1859)과 프로이드(《환상의 미래》, 1927) 이후 그간 종교가 누려온 모든 권력은 과학적 합리주의로 이양되기 시작했다. 특히 兩次대전(1914, 1939)의 대량학살 앞에서 종교의 무기력과 광기를 동시에 목도함으로써 사람들은 종교를 향해 냉소를 마다하지 않았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종교적 가치관과 이념에 따라 살았던 한국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종교적 진정성을 지닌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1. 종교 부흥 시대의 기독교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한반도 남쪽은 종교부흥의 시대였다. 조선조 504년을 지배해온 유교권력이 근대화라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해체되면서 20세기 초의 한국사회는 종교적 공황기였다. 이 틈에서 해방 이후 새롭게 부상한 종교가 기독교와 불교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6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다. 필리핀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기독교가 유달리 한반도 남쪽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유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일본이나 대만에서는 기독교가 좀처럼 환영받지 못했다. 도쿄나 타이베이 시내에서 십자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이나 대만과는 아주 다르다. 한국의 경우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치면 이미 전통종교가 된 불교보다도 신자 수도 많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더욱 크다. 동북아시아 3국의 역사적 문화적 정황이 비슷한 가운데서 유독 종교적 현실만은 이토록 현격하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지적된다.

① 정치·경제적 해석
한국은 제 스스로 독립을 성취하지 못했다. 미국은 우리를 해방시켜준 은인이었으며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한 마디로 미국은 한국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그러한 미국이 자신의 국익을 위해서 한국에 미국문화를 심고자 기도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한국사람들의 뇌리 속에 미국문화를 심어놓기에 기독교만큼 좋은 도구는 없었다. 미국은 자주독립을 외치며 전통문화를 신봉하는 김구보다 미국시민권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을 선택했다. 한국에 기독교가 손쉽게 퍼져 나아간 것은 이러한 정치적 정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구호물자들은 교회를 통해서 뿌려졌다. 한국을 미국 생산품의 소비시장으로 만들어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그 첨병역할을 한 것이다. 또 일본인들로부터 접수한 적국재산은 기독교인들에게 우선적으로 배정돼 기독교의 경제적 기반은 더 강화될 수 있었다.

② 사회·문화적 해석
이런 정치·경제적 종속이론과 달리 한국 기독교의 성공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해석도 있다.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유교나 불교 같은 전통종교들이 설득력을 잃어가던 때에 기독교는 근대문명과 동일시되면서 거의 무조건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근대문명과 기독교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서구사회에서 근대화과정과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반비례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와 반대였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문화적 성격을 기독교 고속성장의 이유로 지목한다. 한국은 언제나 문화적 사대주의를 추종해 왔다는 것이다. 한국은 중국문명의 주변국으로서 언제나 강대국 중국이 숭배했던 종교를 좇아가며 받아들였다.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한국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레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지정학적인 숙명 때문에 강한 쪽에 붙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몸으로 겪은 한국 사람들은 종교도 항상 강대국의 것을 추종하는 것이 체질화되었으며, 기독교의 성공은 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③ 한국만의 이유
중국, 한국, 일본의 동북아시아 3국은 비슷한 점이 많다. 고대서부터 근대까지 이들 세 나라는 역사적으로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왔고 또 문화적으로도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든 이유들이 한국만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든 이유들은 한국, 일본, 대만에 모두 한결같이 적용되는 이유들이다. 기독교가 활동해온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은 세 나라가 모두 같았다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한국에서만 성공한 한국만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성공과정에서 펼친 운동은 선교와 사회봉사라는 두 갈래 길이었다. 선교도 적극적이었지만, 후자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봉사는 다시 교육과 의료의 두 부문에 집중되었다. 한국의 우수한 사립학교들은 대부분 기독교 종립학교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립대학교 중에서 기독교 재단이 아닌 학교는 한 두 개뿐이다. 전체 숫자로 따지면 더 심각해진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기독교가 고속성장을 거듭한 것은 그들이 한국사회의 시대적 현안에 헌신한 결과였다. 반대로, 불교를 비롯한 한국의 전통종교들이 기독교에게 자리를 내 준 것은 그들이 한국사회의 시대적 과제에 헌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이 좋은 예다. 서구에서 완전히 몰락해 버린 기독교가 한국에서 다시 부흥한 요인은 이런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아시아에서 실패한 기독교, 그리고 불교

한편 일본이나 대만에서는 불교가 이러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의료와 교육에서 대만과 일본의 불교는 기독교가 헌신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기독교가 실패하고 불교가 성공한 동남북 아시아의 국가들에서 불교는 교육이나 의료뿐만 아니라 문맹퇴치와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현안에 충실히 헌신해 왔다. 태국이나 베트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과 달리 일본이나 대만 혹은 동남아시아에서 기독교가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분명히 존재한다.

한국불교는 한국에서 성공한 기독교와 아시아에서 실패한 기독교의 원인을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그 성공과 실패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성장을 멈춘 한국 기독교

90년대 들어 한국에서도 기독교는 성장을 멈추었다. 2000년대 이후 기독교 교역자들은 신자들의 숫자가 감소추세에 들어섰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주요한 이유는 그들이 6~80년대에 해온 시대와 사회의 현안에 헌신하는 노력을 버리고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충족에 주력한 결과라고 믿는다.

① 전 근대성
일정 수준 근대화를 학습한 한국 사람들은 이제 기독교의 중심교의가 근대적 시민의식과 함께하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의 기독교 중 가장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는 이를 따라 잡기는커녕 점점 더 뒤처지고 있다. 서구에서의 근대화는 곧 종교적 독선이나 편견에 대한 합리주의를 의미했고 맹목적 전통의 권위적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한국 기독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많은 점에서 계몽적 해방의 담론과 실천을 절실히 요구받고 있다.

② 배타성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전형적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그리스도론적 구원론을 고집하는 한 한국 기독교는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구원사건에 의한 구원 독점권의 주장은 이분법과 비타협적 극단주의에 다름 아니다.
다종교 사회에서의 이러한 배타성은 종교가 갖는 전형적 기능인 사회통합의 기능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스포츠와 매스 미디어에게 이런 역할을 내준지 오랜 종교가 사회분열의 역기능으로 작동하는 한 국민들로부터의 외면을 면할 수 없다.

③ 팽창주의
한국 기독교의 6~80년대 고속 팽창은 신도 수 30만을 넘는 세계 최대 단일 교회와 세계 50대 거대 교회 중 26개를 보유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성과에 도취된 교회는 그동안 실천해 온 시대적 과제와 사회에의 헌신이라는 성공 요인을 등지고 교세 확장이라는 팽창주의만을 신봉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한국 시민들에게 결국 이기주의로 비칠 수밖에 없고 서서히 외면당하고 있다.

④ 도덕적 해이
도덕이 종교의 정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 시민들은 종교인들에게 자신들보다 높은 도덕적 인격을 요구한다. 한국 사회 전반의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교회의 양적 팽창에 따라 교회가 부유해지면서 교회 내에서 가진 자의 부패와 타락은 필연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교회 내 빈부 격차에 따른 갈등이 교회세습으로까지 번지자 시민들의 시선은 더욱 냉담해지고 있다.

⑤ 기복주의
기복은 포기하기 어려운 종교의 한 속성이지만, 이는 종교의 핵심기능인 자기 변혁적 초월을 등지고 현세적 자기 이익에 함몰을 면하기 어렵다. 기복주의는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를 유도한다. 즉, 기복주의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종교들을 골라서 믿는 카페테리아식 종교현상을 낳는 것이다. 기복주의는 세상, 즉 사회의 변혁과 구원을 논하기보다는 개인의 이기적 복락에 봉사함으로써 종교를 타락시킨다.

⑥ 문화 창도력의 상실
근대화의 진행과 함께 경제, 정치, 사회, 학문, 예술, 스포츠, 심지어 레저와 오락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모든 분야에 걸친 근대문화의 창도자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제 20세기를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는 그 창조적 위상을 상실하고 세속 문화를 답습하는 데에 머무르고 있다.

⑦ 예언자
닥쳐오는 불의의 표징을 미리 읽고 과감하게 이에 맞서 정의를 부르짖고 수호하는 예언자적 기능은 기독교가 사회를 향해 갖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70~80년대 민주화 투쟁에서 보여준 기독교의 실천은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의 기독교는 시대의 진리와 정의를 읽어내는 안목의 둔화는 물론 현실 순응과 타협의 조짐을 더 크게 보여주고 있다.

4. 불교적 성찰

시대와 사회의 현안에 헌신하지 못하는 종교는 사회적 의미와 기능을 상실한다. 게다가 그런 순기능은 고사하고 도리어 사회적 이익집단에 불과한 역기능만을 갖는다면, 그 종교는 반드시 시민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90년대 이후 기독교 성장의 실패는 비단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장을 멈추기로는 불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조사방법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한동안 성장하던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탄력을 잃고 있다. 게다가 불교의 일시적 성장요인은 기독교와 달리 선조의 잠재적 유산 덕이 컸다. 이제 그 유산의 효용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국불교의 부흥을 일시적 부흥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려면, 한국불교는 한국 기독교의 성공요인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하며 그 실패요인 또한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시아와 한국 기독교의 실패요인은 한국불교에도 예외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경험의 축적과 탈근대의 지향을 동시에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비교우위의 관용성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열린 종교가 되지 못한다면, 호도된 물량적 팽창주의를 버리고 초월[지혜]과 헌신[자비]이라는 근본이념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속됨의 세속성에 함몰되어 청정과 무소유의 승가정체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개인적 위안거리의 서비스에 안주하며 초월적 자기변혁과 사회변혁에 헌신하지 못한다면, 세속문화를 답습하며 문화의 소비자로 전락하여 문화적 창도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시대적 징표와 현안에 몽매한 채 현실에 타협하며 흘러갈 뿐 사회와 시대의 불의에 과감하게 맞서 싸우지 못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익 집단적 이기심에서 벗어나 환경, 생명, 분배, 통일, 평화, 인권, 의미창출 등 이 시대 한국사회의 현안에 헌신하지 못한다면 한국불교의 부흥은 일시적 현상에서 그치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 : 환경문제

- 서재영(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우리가 서구의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세기 남짓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근대화의 이름으로 급속하게 진행된 사회와 경제체제의 재편은 전통적 가치관과 삶의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서구적 경제체제와 가치관의 보편화는 우리에게 눈부신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와 더불어 인류가 처한 환경위기의 보편화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환경위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사회가 지닌 특수성보다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지배적 가치관과 문화적 전통들이다. 환경문제 자체가 전 지구적 문제이므로 환경문제를 고찰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보편적 문제와 위기의 뿌리를 고찰하는 것이다.

본고는 이 같은 인식에 근거하여 ‘도시화’, ‘기술 의존적 삶’, ‘소비문화’와 같이 현대 한국사회의 중심적 주제가 되고 있는 문제들을 생태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도시화된 삶의 파괴성과 한거정처(閑居靜處)

현대의 도시화는 가장 무서운 반생태적 삶의 양식을 대변한다. 세계적 환경단체인 지구의 벗 국제본부는 2002년에 열린 지구정상회의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저해하는 101가지 사례(Dirty 101 after Rio)’를 발표하고 첫째 사례로 도시화를 꼽았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이후 도시지역의 인구는 7억5천만이었지만 현재는 25억 명에 달하며, 2025년경에는 약 50억이 도시로 집중될 것으로 예측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도권 면적은 전 국토의 11.7%에 불과하지만 수도권에 집중된 도시인구는 전체 인구의 48%에 육박한다. 일반적으로 도시화는 자연을 인간만을 위한 공간으로 단순화 시킨다. 풍요로운 생명의 사원이었던 곳들이 도시로 변하는 순간 아스팔트와 시멘트 블록이 깔리면서 무수한 생명들은 삶의 터전에서 배제된다. 따라서 도시화는 생명의 빈곤을 야기하며, 존재들의 상호 관계성에 대한 영속적인 단절을 초래한다.

도시의 삶은 대개의 경우 일회적 소비와 재생불능의 폐기로 이어진다. 따라서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시화로 치닫는 문화와 도시화된 삶에 대한 전면적 반성과 전환이 요구된다. 그래서 근본생태론자들은 비인간적 생명체의 번영은 다른 생명을 배제하는 과밀한 인구와 도시화의 감소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도시에 밀집된 인구의 과도한 집중은 다른 생명체와의 공존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효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가 살 곳(碧松深谷行者所棲)”이라 했다. 전통적으로 불교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자연적 삶을 지향해 왔다. 수행자다운 삶을 위해서는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를 택해야 한다는 ‘한거정처(閑居靜處)’는 이 같은 불교적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천태(天台)는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한적함[閑]’이라 하고, 산란하고 시끄러움을 멀리 피하는 것을 ‘고요함[靜]’”이라 했다. 그런 점에서 불교가 지향하는 삶은 도시의 분주함을 벗어나 자연과 동화된 고요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최근 전국 사찰에서 시행되고 있는 템플 스테이와 단기 출가 등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불교적 삶의 양식에 대해 깨닫고, 우리의 삶을 다시 자연적 삶으로 되돌릴 수 있는 정서적 훈련이 진행되어야할 것이다.

2. 기술 의존적 삶의 과도한 무게

한국은 초고속 인터넷이나 휴대폰 같은 정보통신 분야에서 국제적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 한 정부기관은 “기술의 속도가 경제의 속도”라고 선전한다. 대중매체들은 연일 기술의 진보에 대해 보도하며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사회적 담론을 생산한다. 여기서 과학과 기술은 곧 풍요로운 삶을 위한 조건처럼 인식되고, 자연히 우리들의 삶은 기술 의존적 삶으로 질주한다.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에서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욕망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끝없는 기술의 발전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빈곤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기술의 결핍, 엄밀하게 말해서 상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새로운 욕망이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끝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휴대폰과 첨단의 가전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단지 이를 위해서 더 많은 노동과 자기희생이 요구된다. 물론 이 같은 과정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과도한 생산에서 초래되는 자연자원의 고갈과 생태계의 파괴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 강렬한 기술의 마력에 노출된 감성은 과도하게 흥분되어 자연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 자체가 현대적 삶의 둥지가 됨으로써 인간은 기술 없이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생태철학자들은 기술의존적인 삶에서 탈피할 것을 강조한다.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삶에서 기술에 대한 의존성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기술은 인간을 자연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키지만 그 해방을 통해 획득된 자유는 오직 기술에 종속될 수 있는 자유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위적 삶을 거부하고 자연적 삶을 지향했던 수행자들의 생활방식은 기술 의존적 삶에서 벗어난 독립적 삶을 탐구하는 우리들에게 오래된 대안이 된다.

3. 소비문화의 만연과 소욕지족(少欲知足)

도시 곳곳에 백화점과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서 상품들로 넘쳐나고, 그와 더불어 쇼핑백의 부피도 점차 커져가는 것이 우리사회의 단면이다. 이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 코드 가운데 하나가 소비문화임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상품경제는 증가한 생산물의 판매를 필요로 하므로 자연적 생산성에 의해 억제되던 인간의 욕망은 자유롭게 해방된다. 생산자는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음을 확인시키고, 끝없는 욕구불만을 추동한다. 만족한 소비자는 상품경제의 몰락을 의미하므로 마케팅은 사람들에게 갖지 못한 빈곤감을 촉발시키면서 끝없는 소비로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어리석은 개와도 같아서 움직이는 물건을 보기만 하면 문득 짖어대니,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라는 황벽(黃檗)의 질타는 강렬한 상품의 유혹에 빠져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문제는 이 같은 소비문화와 생태적 안정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의 환경위기의 뿌리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자르뎅은 근본생태론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 ‘지구를 가볍게 밟는(tread lightly on the Earth)’ 생활양식의 증진을 꼽고 있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소박하며, 상대적으로 非 기술 의존적이며, 자족하는 정신이며, 탈중심화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달마는 “구함이 있으면 모든 것이 괴로움이고 구함이 없으면 그 자리가 곧 즐거움[有求皆苦 無求卽樂]”이라 했다. 따라서 참다운 도(道)의 실천은 곧 물질적 욕구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생태적 삶은 불교에서 말하는 도(道)의 삶과 맥락이 상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도를 실천하는 삶은 그 자체로 생태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혜능도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 알아서(少欲知足) 재물(財)을 떠나고 색(色)을 떠나는 것이 양족존(兩足尊)”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을 받드는 실천은 곧 소욕지족하는 삶의 태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소욕지족의 삶은 종교적 실천이자 수행자의 삶으로 제시된다.

4. 도구적 가치관의 팽배와 불성(佛性)

고속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천성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고, 간척사업을 위해 갯벌을 메우는 우리들의 활동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산과 강과 같은 자연적 사물에 대해 인위적 조작을 가하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개발과 성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늘 새로운 가치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사물에 대한 가치관은 대단히 중요한 생태학적 주제로 부각된다.

존재에 대한 지배적 세계관의 입장은 모든 존재의 정점에는 인간이 존재하며,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가치는 인간에게 얼마나 이로운가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과 존재는 인간을 위해 소비될 수 있는 도구적 대상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생명에 대한 이 같은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는 한 생명이나 개체가 가진 고유한 가치가 아니라 다른 어떤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부여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확립하는 것은 경제적 효용성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는 인간과 생태위기에 내몰린 무수한 생명들을 해방시키는 데 있어서 관건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내재적 가치란 다른 것과 교환될 수 있기 때문에 부여된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든 그 스스로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를 의미한다. 존재의 가치는 경제적 유용성, 인간에 대한 효용성이나 인위적 목적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내재적 가치론의 근간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수용은 생명을 약탈하거나 자연을 파괴할 권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재적 가치론에 비교될 수 있는 불교사상은 불성사상(佛性思想)이다. 개체 존재의 내재적 가치를 의미하는 불성은 인간·동물·식물과 무정물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존재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교설이다. 따라서 불성론은 존재의 보편적 존엄성을 드러내는 형이상학적 근거가 된다. 이 같은 가치론의 확립은 도구적 가치론에 의해 박탈된 자연적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체 모든 존재들의 내재적 가치를 확인한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성장과 개발이라는 병적인 가치 창조에 내몰리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이기도 하다. 그것은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무명(無明)의 소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성을 자각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확인이므로 인간중심의 도구적 가치관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가 된다.

5. 생태학적 자아실현과 대승적 보살행

생태위기의 근원을 이루는 형이상학적 전통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적 사유와 문화이다. 인간만을 위한 개발과 국가 정책은 오늘날의 생태위기를 가속화 시켰다. 네스는 이 같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자아실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의 종(種)은 물론이며,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인간과 동일하게 번성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네스는 서구 산업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전통에서 자아실현이란 “한 사람의 빵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자아실현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소아적 자아실현(self realization)’을 넘어서지 못한다. 생태적 공존을 위해서는 이기적 자아에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 자아의 범위가 무한히 확장되는 대자아의 실현이 요구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자아란 가족과 친구를 포함하여 자아의 범위를 인간은 물론 동물, 더 나아가 자연일반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개인과 공동체의 자아실현을 포함하여 전체로서의 자아실현을 함축하는 것을 ‘대자아 실현(Self-realization)’이라고 한다.

이처럼 생태철학적 자아실현이란 고립된 존재로서의 자아를 넘어서는 것이다. 결국 생태적 실천은 연기적(緣起的) 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나와 남을 하나로 보는 자타불이(自他不異)의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실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태적 실천은 곧 대승불교의 보살행과 맥락을 같이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에 대해 선사들은 이류중행(異類中行)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류(異類)’란 인간과 다른 육도중생들을 의미한다. 보살은 삼악도에서 벗어나기를 발원하지만 해탈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육도(六道)의 중생 속으로 들어가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이류중행이다. 따라서 환경파괴로 인해 중생의 고통이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이류중행이란 생태적 위기를 직시하고 해법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의 확장은 불살생계와 자비의 윤리가 개인적 윤리에서 모든 생명들의 삶과 전체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 확장된 보편적 윤리로 재해석될 것을 요구한다. 그동안의 생명윤리와 자비가 개인적 윤리로 한정되어 왔다면 생태적 위기의 상황에서는 전체론적이며 생태적인 윤리로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올바른 보살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사생(四生)과 육도(六道)를 한 가족으로 바라보는 전체론적 윤리를 다시 확인하고 그들을 향한 동체대비를 불자의 실천윤리로 수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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