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맞는 불교의 퓨전

부처와 테러리스트
사티쉬 쿠마르 | 역자 이한중 | 출판사 달팽이
1. 시대에게 말 걸기

불교의 역사는 2,500년이다. 2,500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불교는 다양한 옷을 갈아입었다. 선재(필자)가 언뜻 떠오르는 것부터 적어보아도 초기불교라는 모습에서부터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 등의 모습이 있었고, 대승불교라는 같은 이름 안에서도 유식불교니 천태불교니 화엄불교니 하는 세세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불교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뭐든지 원형이 최고야. 재해석이니 하는 것들은 죄다 원형을 망쳐버리는 일들이지.” 하며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올바를 것인데 이질적인 것들이 첨가되어 변질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불교도 하나의 문화로 보고 긴 세월 이어진 불교의 역사를 재해석의 역사라고 이해해야 할까?

선재가 보기에 변질이라는 시각의 대표가 바로 결집 때 계율을 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이미 “소소한 계율은 버려도 좋다”고 하셨는데도 그들은 굳이 사소한 계율 하나까지도 바꾸지 못하게 했다. 아마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직후의 위기 의식이 발동했을 것도 같고, 또 생활 방식에 대한 규정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유연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선재는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스님들의 외모는 2,500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불교를 재해석의 역사로 보는 시각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미 후대 내용의 단초가 모두 마련되어 있고 이후는 내용을 첨가하거나 재해석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대승불교의 ‘공’은 초기불교의 ‘연기’를 재해석한 것이고 ‘무아’의 가장 급진적인 재해석이 바로 선의 ‘살불살조’라고 한다. 사실 선불교의 내용과 초기불교의 내용은 언뜻 보면 서로 너무도 달라 아예 다른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런 시각 덕분에 불교를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맞는 불교의 재해석은 과연 무엇일까? 아니, 거창하게 재해석까지는 거론하지도 말자. 2,500년 전의 부처님 말씀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선재가 늘 품고 있는 의문이다. 매일매일 전국의 사찰에서 의례로 남아있는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움이 되게 하는 불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선재가 생각한 답은 불교를 이 시대와 대화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시대가 필요한 일을 불교가 듣고 그 필요한 것을 불교가 이야기해주면 되는 일이다. 그러자면 불교가 이 시대에 말을 걸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

2. 진실과 방편

상황에 맞게 말을 거는 방법을 불교는 일찍부터 ‘방편’이라는 용어로 써왔다. 마치 거대한 강줄기가 흐르며 가느다란 실개천을 만들어 온 천지를 적셔주는 것처럼 진실의 큰 줄기를 따라 방편이 있어왔다. 선재가 보기에 방편은 무척 중요하다. 방편이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의 근기를 따라서 불교를 전하는 방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편은 사람들이 불교를 접하는 최초의 것이면서 불교를 바라보는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도를 아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날 때 선재가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은 대순진리교의 교의나 진리성이 아니라 “도를 아느냐?”는 말과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통해 선재가 알 수 있는 대순진리회란 길거리에서 뜬금없는 말을 건네며 제사를 강요하는 집단 정도에 그치고 만다.

불교라고 예외일 수 없다. 누군가 전생치료를 통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말을 스님에게 들으면 그 사람이 아는 불교는 전생치료가 다이고, 장엄한 예불 모습을 보고 불교에 반한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예불이라는 의식이 불교의 전부다. 그래서 선재는 방편을 늘 고민한다.

이런 선재에게 누군가 《부처와 테러리스트》라는 제목의 작은 책을 권했다. 세상이 점점 포악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이 때에 앙굴리말라 이야기를 들어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적절한 방편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새롭게 쓰는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불을 불로 맞서기보다는 테러를 더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철학을 내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이야기를 통해 소개하자는 것이다. 지금처럼 험난한 시대에 우리는 용기 있고 창조적이고 자비로울 필요가 있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맥락으로 볼 때 앙굴리말라 이야기는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8-9쪽)
맞는 말이다. 특히 이야기를 통해 소개하겠다는 지은이의 방편이 선재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그런 방편을 통해 과연 얼마나 적절하게 진실을 전달하는가 하는 점이다.

3. 퓨전의 유혹, 방편은 모두를 허용하는가

선재는 일단 짧은 앙굴리말라 이야기를 책 한 권의 분량으로 소개하면서 테러 문제와 비폭력의 문제, 사형제도의 문제까지 언급하는 지은이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의 말마따나 대단한 상상력으로 죽음의 그림자에 눌린 앙굴리말라가 생명의 산파 역할을 하기까지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런데 선재는 군데군데 나타나는 의외의 단어들 때문에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집착’이니 ‘영성’이니 하는 것들이다.

선재는 지은이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몇 번의 클릭으로도 지은이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가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이며 2004년 4월에 한국을 다녀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런 평가를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2002년 ‘우리쌀 살리기 100인 100일 걷기 운동’, 2003년 ‘새만금 삼보일배’와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2004년 도법, 수경 스님의 탁발 순례. 전국을 누비면서 온몸으로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확산시키고 있는 이 운동들을 떠올리다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다.

사티쉬 쿠마르는 미국과 구소련의 핵무장을 비판하기 위해서 무일푼으로 인도에서 러시아,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까지 걸어서 2년 6개월에 걸쳐 8천 7백km의 ‘평화를 위한 순례’를 감행한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이다. 이후 사티쉬 쿠마르의 이 ‘녹색 순례’는 걷는 것을 통해 생명과 평화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한 수많은 시도들의 전범이 됐다. (프레시안 2004년 4월 24일.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 article.asp?article_num=30040424115549)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불교계 평화운동의 시초라는 얘기다. 정말 그 스님들이 지은이를 모범 삼아 그런 활동을 했는지는 선재로서는 확인할 길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고 해서 스님들의 노력이 의미없다거나 하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선재가 마음에 걸려 하던 ‘영성’이라는 단어, 그것이 문제다. 책에 실린 지은이 소개에도 있지만 그는 어린 시절 9년 동안 자이나교 승려 생활을 했다.

승려생활은 그 이후 나의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생활의 경험으로 나는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을 체득하였습니다. 맨발로 뜨거운 땅 위나 가시밭길을 걷는다거나, 돈과 집, 부모 없이 살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온 것은, 되돌아보았을 때, 내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정신과 세상을 분리시키는 것 ― 영성은 성자를, 예술은 예술가를, 음악은 음악인을 위한 것일 뿐이며,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 ― 이 옳지 않다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새로운 길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계속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시절을 승려로서 지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실은 그 경험에 대해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단들이 영성을 잃어버리고 그 조직의 규율에만 집착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찾는 것보다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리죠. (《녹색평론》 제53호, 2000년 7~8월호. http://gree nreview.co.kr/archive/53SK_Deric.htm. 밑줄은 필자)

지은이가 자이나교 승려였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보아도 《부처와 테러리스트》에서 이야기하는 ‘영성’은 자이나교의 ‘지바(Jiva)’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핵심적인 자이나교의 개념이 들어와 앉아 있다면 《부처와 테러리스트》의 부처를 불교의 부처님이라고 보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책에서 아무리 사성제와 팔정도를 이야기하더라고 자이나교의 마하비라가 중요한 대목에 등장(120-125쪽)하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은 자이나교의 책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선재는 이 책이 그토록 이야기하는 아힘사, 즉 비폭력 문제를 달리 볼 수밖에 없다. 아힘사야말로 자이나교를 결정짓는 중요한 특징이 아닌가 말이다. 자이나교 아힘사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지은이의 대담이 있다.

자이나교는 약 2500년 전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이나교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해치지 않는다는 아힘사의 원칙에 굉장히 철저합니다. 그들은 비폭력주의자이고, 물론 채식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게 모두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입을 여덟 겹의 천으로 가리고 다녔는데, 그 까닭은 공기중의 생물을 우연히라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천을 오직 먹을 때만 풀 수 있었는데, 먹는 동안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옷이나 다른 소지품들 ― 이불, 동냥그릇, 책들 ― 을 일일이 검사해서 벌레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얻은 것은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서 벌레나 풀을 밟지 않도록 했고, 앞을 잘 볼 수 없는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실내에서도 내 앞을 부드러운 털로 쓸면서 움직였습니다. (《녹색평론》 제53호, 2000년 7~8월호. http://greenreview.co.kr/archive/53SK_Deric.htm)
부처님은 이런 극단적인 생활방식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원칙론에 충실하자는 가섭의 주장을 물리치셨고, 열반하실 때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소한 계율은 버리라”고까지 하셨다. 선재는 무척 고민스럽다. 시대에 맞는 불교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에 과연 자이나교까지 포함시켜야 하는가?

4. 중도 방편

《부처와 테러리스트》가 전하려는 비폭력의 메시지를 선재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이나교 위주의 비폭력 메시지는 방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앙굴리말라 이야기를 통해 불교를 펼친다면 앙굴리말라를 향한 부처님의 교화 방식과 수련 방식이 더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저 대화 몇 마디에 그토록 악랄하던 앙굴리말라가 교화된다(26-27쪽)는 상상력은 너무 빈곤하다. 교화는 총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파사현정이라는 활인검이 있다는 것도 상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인 중도를 제대로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재 생각으로는 인도의 예를 보더라도 무작정의 비폭력을 주장하는 간디보다는 적절한 대응을 하는 암베드카르쪽이 불교적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앙굴리말라를 두고 재판이 벌어지는 장면이 있다. 지은이는 이 장면을 통해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지만 선재가 그리 쉽게 공감할 수는 없다. 법조계에서 사형제도를 주장하는 중요 근거인 법 감정, 즉 피해자들의 감정에 대한 대안을 “살인자를 죽인다고 해서 피해자가 살아오지는 않는다”는 말을 근거로 ‘용서’로 해결한다. 그러나 지은이가 머리말에서 이야기하듯이 용서를 위한 커다란 ‘용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해결 방안은 무척 수동적으로 보인다.

5. 방편만으로 전하는 진실

선재가 생각하는 방편의 궁극은 방편만으로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부처와 테러리스트》처럼 어정쩡하게 퓨전으로 방편이 나타나면 불교 이외의 것들이 섞여 들어와 방편이라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그동안 우리 불교계를 물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점이니 사주니 전생치료니 하는 것들이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는 현실 말이다.

방편만으로 진실을 전한다는 말은 불교적인 색채를 완전히 빼고도 불교를 전하는 방법을 말한다. 불교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부처님 말씀이라는 토를 달지 않고도 불교를 전하는 방법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쉬운 말과 누구나 이해하는 논리로 이야기를 해도 불교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21세기는 더 이상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전도나 포교의 방식을 사용할 때가 아니라고 선재는 생각한다. 큰 강물로 나타난 방편이 이제 바닷물과 합쳐져 전체를 하나의 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부처와 테러리스트》가 아쉽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것 하나. 방편만으로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는 진실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실!

 

최원섭
성철사상연구원 상임연구원.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 불교의 시각에서 문화 비평과 영화 읽기에 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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