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하비 영국 선더랜드대학교 교수

“Avoiding uninteded harm to the
environment and the Buddhist ethics of intention”

피터 하비 (영국 선더랜드대학교 교수)
번역 : 배상환 |  동국대 BK21 연구교수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기 원하며 어떤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가? 환경을 잘 보살피려는 불교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존중받는 불교 사상으로써 가장 연관성이 있는 생각과 가치는 무엇인가? 남에 대하여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며, 그것에 수반되는 나쁜 업보를 강조해야 하는가? 아니면 좋은 행위(업)를 수반하는 환경친화적 행동을 하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가?

의도의 연관성

불교적 윤리의 본질에서 보면 업이라는 것은 행동 배후의 의지나 충동에 휘말리는 하나의 행위로 강조되어진다. 말하자면,

오 비구들이여! 의도(cetan)를 가지고 몸과 말과 정신을 통해 실천하는 것, 그것이 내가 말하는 업이다. (A. III. 415)

많은 계율에서 당면한 행동이 ‘의도되지 않은 것(asancicca)이라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죄가 아니다. (Vin.III.78) 예를 들어 건축 현장에서 어떤 사람의 머리에 돌을 떨어뜨렸다면 죄가 아니다. (Vin.III.81) 더 나아가 앤드루 헉슬리(Andrew Huxley, 1995)가 언급한 것처럼 최소한 불교 신도의 맥락에서 의도되지 않게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불리하게 적용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pp.194~5) 마치 쿠루담마 자타카(Kurudhamma Jtaka)에서 행사용 불화살을 쏘아 올린 어떤 왕이 그 중 한 개의 화살이 호수에 꽂혀 물고기 한 마리를 죽이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같은 문제에 괴로워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강조하는 것과 같다. (J.III.366~381)

실제로 많은 계율1)에서 ‘주의하는 마음(asatiy)’이 없거나 (‘방심’했거나 어쩌면 ‘부주의’한 것으로 인하여) 모르고 행한 행동이 ‘의도되지 않은 것’이라면 잘못이 없다고 명시한다. 이런 무죄 조항은 땅을 파헤쳐 작물에 피해를 입히고, 생명이 있는 줄 알면서 물을 뿌려 생명을 죽이는 단타계율(pcittiya)에 해당된다. (Vin. IV.33,35,49,125) 하지만 몇몇 계율(vinaya)의 경우는 무모한 행동을 구체적으로 비난한다. 어떤 스님들이 재미로 영취산(vultures Peak) 아래로 돌을 던져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하자. 수도원에서 추방되는 것을 동반하는 바라이죄(prjika)가 완전히 적용되지는 않더라고, 그들에게 비행에 대한 책임이 주어진다. (Vin.III.82)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해서 언제나 용서 해주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는데 딱히 의도가 필요치 않은 경우에 특히 그렇다. 부수(parivra, 附隋)라는 죄목에서 스님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경우는 ‘마음이 혼란(satisammos)’하기 때문이다. (Vin.V.102, 194) 이런 경우에 대해 미국 상좌부 학파의 타하니싸로(Thanissaro)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도되지 않고 행동 했을 때 부주의함이 나타나고, 당연히 책임이 있는 영역에서 신중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들이 있다. 공공의 재산과 개인의 필수품을 잘 간수하는 것과 관련한 많은 계율들이 이런 항목에 해당된다. 이런 처벌을 수반하는 소소한 규칙들이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유지되도록 유용한 교훈을 줄 것이다. (Thanissaro 1994, pp. 24-25)

작은 생명을 부주의하게 죽이는 행동은 어떤가? 《밀린다팡하》(Milin- dapanha, p.116)는 과즙을 얻기 위해 사탕수수를 으깨는 과정에서 벌레를 죽이는 것은 비난받을 행동이 아니라고 한다. 사탕수수에 벌레가 붙어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전혀 의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계율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ajnantassa)’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생물이 살고 있는 물을 사용함으로써 생물을 죽이는 경우에 ‘물에 생물이 있는 것을 몰랐을 경우’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 (Vin.IV.125). 하지만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완전한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동물을 죽이는 것에 관하여 완전한 단타계율이 되려면 ‘의도적으로 알고’ 행하여야 하지만, 스님이 생물인지 아닌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활을 쏜다면 여전히 작은 죄 항목인 ‘비행’에 해당 한다. (Vin.IV.125).

이와 비슷하게 생물이 산다고 알고 있는 물을 흙이나 풀에 주는 단타계율(Vin.IV.49) 위반은 방심하였기에 몰랐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잘못은 없지만, 생물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치 않을 때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비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물을 죽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는 것은 약간 비난받을 행동이란 것을 의미한다. 고의가 아니라고 해도 이 행동이 어떤 생물을 죽일 수도 있다고 예측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스님과 비구니에게는 악한 행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승려의 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의도된 행위가 포함되어야 하지만, 상황에 대한 지식이나 불분명한 지각에 따라 결과가 좌우되는 다른 죄목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방심해서 저지른 어떤 죄들은 면죄될 수 있지만, 주의 깊지 못했거나 특히 무모하게 저지른 일들은 죄가 될 것이다.

특정한 승려의 윤리적 덕목에서 어떤 행동이 ‘도덕적이다·훌륭하다’ (팔리어로는 kusala, 산스크리트어로는 kuala)고 결정하는 기준은 행동의 원인·동기에 ‘근본(mla)’이 있는 것이다. (M.I.47) 말하자면 탐욕, 증오 혹은 망각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부도덕적인 것이고, 탐욕이 아닌 것(자비나 금욕), 증오가 아닌 것(자애나 자비)이나 망각이 아닌 것(지혜)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도덕적인 행동이다. 또한 행동이 본인이나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원인이 되든지 (부도덕적 행동, M.I.415-16), 혹은 아니든지 (도덕적 행동), 그리고 더 나아가 부도덕 혹은 도덕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과 연관성이 있다. (Harvey 2000:46-48)

환경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피해

여기서 잠재적인 문제란 어떤 생물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인식된 행동이다. 심지어 긍정적인 동기가 있는 행동이 사실 자연이나 그 안의 생물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환경적 영향이 사람들의 행동이 의도되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의도적인 피해를 피하는 것이 불교 윤리가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자연에 살고 있는 생물을 직접적이고 의도적으로 해치는 행동이 불교 윤리와 정면충돌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 멸종 위기 생물인가 아닌가와 상관없이 동물을 죽이는 것
◎ 피해를 줄 것을 알면서 어떤 지역에 유독 화학 폐기물을 버리는 것
◎ 삼림에 살고 있는 동물의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넓은 면적의 삼림을 태우는 것

예를 들어, 《범망경(Brahmajla Stra)》의 보살을 위한 48가지 가운데 두 번째 계율은 다음과 같다.

14. 도깨비불을 놓은 것에 관하여―붓다의 제자들은 태음년 4월에서 9월까지 악한 의도로 삼림을 태우거나, 산과 평지의 식물을 태우기 위해서 도깨비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런 불은 그 시기의 동물들에게 특히 유해하고, 사람들의 집, 도시와 마을, 절과 사원, 들판과 작은 숲, 더불어 보이지 않는 신들과 정령들의 거주지와 소유물로 퍼져나갈 수 있다. 스님은 생명이 사는 곳에 의도적으로 불을 일으켜서는 결코 안 된다. 만약 고의적으로 불을 놓는다면 제2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도적이지 않은 행동이 나쁜 업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계율이 어떤 행동을 비난한다는 사실에 반추하여 보면) 어떤가? 지금 세계가 직면한 환경 문제의 범위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해로운 영향이 의도된 것은 드물다. 예를 들어,

◎ 화석 연료로 인해 일어난 지구 온난화와 도미노 현상들
◎ 오존층의 감소
◎ 물품 제조와 일자리 배출 등의 부작용인 산업 유출물, 살충제와 화학비료 같은 농업 화공약과 소음으로 인한 공기, 토지, 수질 오염
◎ 자원고갈
◎ 생물의 멸종 (예를 들어, 벌목이나 인간의 침범으로부터 일어난 것)

이안 해리스(Ian Ha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환경오염으로 규정된 많은 것들은 산업 활동 등에 의한 의도되지 않은 부산물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환경의 붕괴가 불교의 관점에서 꼭 악행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특히 붓다가 ‘모든 조건부의 생물은 영속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가르침을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불교인들이 환경오염과 환경쇠퇴를 찬성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허상일 것이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을 바르게 적용하는 것은, 아마도 잠재적인 환경 파괴자들이 그들의 행동이 의도되지 않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인식을 마음속에 점차 심어주는 일일 것이다. (Harris, 2000; 115-16)

해리스는 더 나아가 ‘불가피한 환경 변화에 대한 올바른 불교적인 해답’이 중도(中道)임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오염된 물질을 방출하는 생산을 지지하는 피하는 것과 오염된 자연을 다시 복구하려는 환경보호를 말한다. 나는 불교도들의 이러한 대응이 광범위한 중도적 실천의 어디 쯤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불교도들 스스로의 행동이 가져올 의도되지 않은 피해를 어디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되묻고 싶다.

의도되지 않게 환경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행동들에 대한 불교도의 대답은 무엇이여야 하는가? 이런 영향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어렴풋이 알 수도 없다면 (가능한 영향에 대해 일부러 관심을 갖지 않기 전에는), 연관성이 있는 도덕적 책임을 돌릴 실제적 가능성은 없다. 이것과 위에서 말한 생각 없이 돌을 던져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인 승려들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만약 행동이 직접적으로는 해를 미치지 않았지만, 도미노 효과가 해를 가져온다면, 어떤가? 행동의 결과에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가?

이 점에 관하여 말해주는 좋은 예증은 소위 ‘덕을 쌓는 것’이라는 목적으로 생물에게 선한 일을 하려는 것이었지만, 실제 생물에게는 연쇄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 불교적 행동이다. 예를 들어, 태국의 어떤 사람들은 ‘존재를 자유롭게 한다는’ 긍정적인 의도에 의해, 잡힌 새들을 방생하려 돈을 지불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새를 잡아 돈을 벌도록 조장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새를 해치거나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

던킨 윌리엄즈(Duncan Williams)는 중세 일본에서는 축제 때 물고기를 잡아 나중에 방생하였는데, 많은 물고기가 방생 전에 죽는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Williams, 1997:155) 이 두 가지 경우 모두가 선한 동기가 의도되지 않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되면서, 이익과 동시에 다른 것에 해를 끼치지 않게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명백한 경우가 되는 것이다.

큰 고통을 받는 말기 환자를 치료할 때 있어서는 때때로 도미노 현상을 무시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의사는 환자가 죽어 가는 것을 알면서 점점 늘어가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진통제의 양을 늘릴 수 있다. 이것은 실제 안락사와는 다른 것 같으며, 불교적 관점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듯하다. (Keown, 1995: 175; Harvey 2000: 300-301) 하지만 이제 이런 의사의 자비로운 걱정은 자연을 해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행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계율에서는 어떤 스님이 아픈 스님을 치료하려고 약을 주었으나, 죽었을 경우에 죽이려는 뜻이 없었다면 죄가 없다고 한다. (Vin. III, 82) 앞에서 설명한 진통제의 비유에서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는 바라이죄(prjika)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행동이 죽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고, 진정한 무모함의 요소가 있었다면 아마도 (스님의) 비행과 동일하게 취급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위의 문제를 대하는 불교의 다양한 태도를 강조하는 문제 중 하나는 육식의 문제이다. 초기 불교와 상좌부 학파에서는 스스로 죽이건, 다른 사람에게 죽이라고 부탁하건 간에 의도적인 살생은 제1규율을 어기는 것이라 말한다.2)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를 포함한다.

◎ 식당에서 생선을 가리키며 요리해 달라고 하는 행동
◎ 푸줏간에서 고기를 주문하는 것

하지만 시장에서 이미 죽은 동물의 고기를 사는 것은 죄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동물이 보시용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보이거나, 들리거나, 의심되지 않으면 스님들은 고기를 보시 받는 것이 허용되었다. (Vin.I.237-8; Harvey 2000: 159-63)

대승불교에서 육식 금기에 대한 논쟁은 동아시아에서는 유력했지만, 티베트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불교신자와 수도 보살을 위한 범망경 법전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3. 육식에 관하여-붓다의 제자는 고의적으로 절대 육식을 하여선 안 된다. 모든 유정물의 육신을 섭취해서는 안 된다. 육식을 하는 자는 큰 자비의 씨앗과 불성의 씨앗을 없애고, (동물과 초월적) 존재가 그를 회피하도록 만든다. 이들은 무수한 죄를 범한 자이다. 따라서 보살은 어떤 경우에도 모든 유정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만약 고의적으로 육식을 한다면 제2의 규율을 범하는 것이다. (Buddhist Text Translation Society)

《능엄경(Lakvatra Stra)》에서는 세 가지 관점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계율의 사상에 위배된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비롯해, 육식에 반대하는 일련의 논증을 담고 있다 (Suzuki 1932, 211-12; 1930, 368-71; Harvey 2000: 163-65). 이것과 관련하여 다양한 논증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① 모든 존재는 전생에서 엄마나 친한 친구와 같은 친한 사이였다. 모든 존재를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대하듯 자애로 바라보아야 하고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
② 육식은 명상의 진행을 방해한다.
③ 육식은 나쁜 환생에 이르게 하고, 채식은 좋은 환생으로 이르게 한다.
④ 어떤 고기도 먹지 않는다면, 고기를 파는 시장이 없어질 것이고 아무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개인의 행동이 개인의 의도나 본인에게 미치는 결과를 생각하는 것을 넘어, 남들에게 미칠 의도되지 않은 도미노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불교 전통에서는 실상 어떤 긍정적인 선행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 보시-관대 또는 베풀기
◎ 자애와 자비
◎ 도움 (팔리어로 attha-cariy, 산스크리트어로 tathrthacary, D.III.152)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나쁜 업보를 가져오지는 않지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좋은 업보를 가져온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테라바다(상좌부) 전통에서조차 채식은 좋은 것으로 간주했지만, 자발적인 것이지 의무적 수행은 아니었다.

환경적 - 사회적 쇠퇴에 대한 전통적 불교 사상의 연관성

환경과 생명에 의도되지 않은 피해를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교의 논리를 더 깊이 고찰하기 전에, 이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 불교 사상에서 인간 행동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다양한 불교 문헌에서 환경은 인간의 도덕 상태에 부합한다고 본다.

단순히 인간이 뽐낼 수 있는 중립적 공간이나, 인간의 행동에 영향 받지 않는 불모의 그릇으로 보지도 않는다. 환경은 명백하게 생태학적 결과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들의 행동이 환경에 가져올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기세인본경(Agganna Sutta)》은 지구의 유정물이 발전하는 초기 단계를 설명하며, 이러한 교훈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D.III.94-93) 신적 존재가 바다위에 떠다니는 맛있는 크러스트를 먹고 난 뒤에 이전의 상태에서 추락하여, 물질적 신체를 가지게 되고 나중에는 성별도 구분한다.

처음에 그들의 환경은 윤택했지만, 나중엔 열악해져서 더 탐욕스럽게 탈취했다. 달콤한 맛의 버섯을 먹었고, 그 다음은 만초를 먹었지만, 외모의 차이가 생기고 좀 더 아름다운 존재로 자만하게 되고 오만해지자 이것들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빨리 자라는 쌀을 마치 ‘채집인’ 혹은 ‘사냥-채집인’처럼 필요할 때 매일매일 모아서 먹었다. 하지만 게으름 때문에 한번에 일주일 분의 쌀을 모으기 시작한 다음부터 쌀도 빨리 자라지 않아 경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땅은 논으로 나뉘게 되었고 (농경사회가 발전했으며) 재산의 개념이 생겼고, 곧 도둑도 생겼다. 바로 이것이 유정물과 그들의 환경이 함께 진화 (혹은 함께 퇴화) 하는 모습이다.

이런 과정에서 모든 존재는 의도적으로 환경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탐욕을 통하여 고통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불교의 제2의 고매한 진리(ennobling truth)가 점차 커지게 되면, 자만심·게으름과 탐욕에서 나온 그들의 행동이 환경에 피해를 일으키는 조건으로 조성될 것이다.

인간은 행동의 순수한 물질적 요소뿐만 아니라, 그것의 도덕적·부도덕적 특성을 통해 환경적 영향을 받는다고 여긴다. 이처럼 ‘업보가 때때로 환경을 통해 사람에게 되돌려 진다’고 생각 되어질 것이다. 따라서 만약 한 국가의 지도자가 그릇된 행동(adhammika)을 하면, 나쁜 본보기가 사회 전반과 태양과 달에 퍼질 것이고, 따라서 별들이 행로를 벗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낮과 밤, 달과 2주간, 계절과 해의 맞물림이 어긋날 것이고, 바람은 계절에 맞지 않게 불 것이다. 그래서 신들은 화가 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되었기에 하늘의 신은 충분한 빗물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흉작이 들 것이고, 곡식을 먹고사는 인간은 쇠약해지고 수명이 줄 것이다. 옳은 행동은 이것과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A.II.74-6) 정확히 어떤 연관성을 가지건 간에 이것의 교훈은 간단하다. 인간의 비윤리적 행동에 날씨와 계절은 혼돈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글은 인간의 행동이 날씨가 좋고 나쁜 것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끔 그렇게 상응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비주의와 진보의 개념

소비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점차 세계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고 있다. 말하자면 점점 더 많이 ‘소비’하려는 것이 문자적으로나 은유적으로 행복을 향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비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생존하고 안정을 찾고 행복하기 위해 의지하는 지구의 날씨와 생태계에 점점 더 큰 부담을 준다.
소비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또한 인간사의 필연적 ‘진보’의 개념과 맞물려간다. 글쎄 20세기 동안 특정 지역에서는 윤리적 진보가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폴포트 캄보디아 대살상과 루인드 등지의 대량학살 등이 예가 될 것이다.

물론 붓다의 시대부터 점진적인 윤리와 정신의 전반적인 쇠락의 개념은 있지만, 전통적으로 불교는 필연적인 사회진보의 윤리적 관점을 가지지 않는다. 《전륜왕경》에는 과거에 자비로운 세계 왕인 전륜성왕(Cakkavatti)의 아들이 사람들이 가난하도록 방치하여 도둑이 난무하게 되고, 그에 따른 전반적 사회 불안과 부도덕 행동을 바로잡지 못하여, 문명이 쇠퇴의 길을 걷고 결국 폭력 시대에는 인간의 수명이 10년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아마도 현재 세계의 몇몇 분쟁에서 희생되는 소년병사를 연상시킨다) 묘사했다. (D.III. 58~77)

이것에 반대하여 숲 속으로 은둔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나타나, 사람들의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하고, 힘을 합쳐 도덕적 사회를 재건하면서 다시 그들의 수명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미륵보살(Buddha Metteyya, 산스크리트어 Maitreya)이 최후에 오기 전까지, 윤리적인 사회가 발전한다면 인간의 수명이 8만 년으로 늘어날까! 이 신화를 우리의 현재 상황과 비교해보면, 현재 인간 사회가 윤리적 행동과 행복이 증가하는 곡선에 있는지, 아직도 쇠퇴하는 중인지 확실하지 않다. 아마 20세기는 우리가 목격할 최악의 것들이 이었던 것일까? 아닐까? 만약 후자라면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 문제는 바로 점점 더 많은 자원을 위해 투쟁하는 것과 보다 안락한 환경을 차지하려는 투쟁의 씨앗일 것이다.

하지만 《전륜왕경》 시나리오의 상승 부분에 진정한 사회의 진보라는 것은 나눔과 상호지원 그리고 신뢰가 형성되는 건전한 방향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과 같이 묘사 되었다. 따라서 반드시 윤리적 진보는 윤리적 행동과 제휴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탐욕과 공격성은 행복한 세계를 만들지 못한다. 반대로 개인의 선한 행동이 행복한 왕생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공공의 선한 행동은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의존성

불교적인 동기로 생태 운동을 고취하려는 시도를 하는 현대작가들은3)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상호의존 네트워크 안에서 우주의 개개의 존재가 서로 ‘상호의존’한다는 화엄의 이미지인 인드라 그물망(indra’s net)을 자주 인용한다. 개개의 존재는 어떤 방식이든 조건적인 삶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서로에 의지해서 존재가 가능하고, 서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각각의 존재가 총체에 기여한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체가 세계의 유일한 원천으로 당연히 간주된다. 프랜시스 쿡(Francis Cook)은 이러한 관점을 ‘우주론적 생태학’의 하나로 본다. (1989:214)

베트남의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이 말하듯 “우리 스스로는 무아의 요소들과 태양, 식물들, 박테리아와 대기로 만들어졌다.” (Badiner, 1990:117)4)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스테판 뱃첼러(Stephen Batchelo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독립된 것들로 가득 찬, 독립된 세계에 살고 있는, 독립된 존재로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우리를 지탱하는 환경에서 독립적이고, 우리가 사용하고 유희하는 것들로부터 독립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들의 일부인 것처럼 그들도 우리의 일부이다. (Batchelor & Brown, 1992:32).

이런 불교생태학 저자들의 함축적인 논리는 우리는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우리가 지탱해 살고 있는 환경을 존중하며, 그 밖의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유해물질을 폐기하는 것처럼 환경을 해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명백하게 이 세상에 공존한다. 우리는 더 자비로운 사람들과 사물들에 의존해 있는 만큼 그들에게도 의존한다. 그렇지만 어떤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가에 관해 우리가 확실히 선택할 수 있다면, 또한 책임도 있다. 자연과의 상호의존성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을 학대하는 사람들도 인간으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불교는 야생의 자연에 가치를 두는가?

이안 해리스는 약간 회의적인 어조로 환경론이 불교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불교의 환경론은 서구에서 유래된 많은 환경 문제들을 통한 대응으로 발전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자각적 문제로 최근에 부상한 이러한 환경적 사고는 서구에서 처음 일어났던 근대화의 파괴적인 결과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리스는 『전륜왕경』에서 사람들이 다시 고도로 윤리를 깨닫게 되면, 미래에 다가 올 황금의 시대를 인용한다. (D.III.74-5) 그때는,

도시와 마을들은 서로 매우 가까워서, 수탉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편안하게 날 수 있다. 이 완벽한 세계에는 도시와 교외의 환경만 남는다. 정글은 완벽하게 정복된다. (Harris, 1991: 108)5)

해리스는 위의 발췌문에서 문명이 ‘야생의 몰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표현했다고 본다. 위의 발췌문은 물론 흥미롭다. 인간 문명이 급격히 몰락하는 것으로부터 정글로 도피하고, 이어서 점진적으로 인간의 자비와 문명이 재건되고, 길들어진 자연이 없는 인간 문명의 번영이 (모든 것은 덧없기에 잠시 동안) 축적되는 것으로 말한다. 비윤리적 사회가 스스로를 쇠약하게 만들고 소생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진정한 도덕적 인간 문명은 아마 중간적인 야생공원 같은 자연을 가진 밀집된 인간 커뮤니티의 환경에서만 (문헌은 실제로 마을, 도회지, 도시라고 말한다) 지구가 파괴되지 않고 지구를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공원이나 작은 숲을 만드는 사람, 다리와 물을 마실 곳과 우물을 건설하는 사람,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그들에게 업의 충만은 항상 많아질 것이다. (S.I.33)

아마 이것은 고도의 도덕적 사회에서는 야생을 정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매세지이며, 따라서 실제적인 야생이라는 것은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미묘하고 복합적인 메시지이다.

실제로는 야생의 가치는 상좌부 문헌인 『테라가타(Theragth)』에서 초기 아라한들에 의하여 많은 게송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많은 게송들이 선종에서 그들 세대의 최초의 스승으로 간주되는 대가섭을 인용하여 지어졌다. (vv.1062-70) 대가섭은 아름다운 바위에 대하여 읊조리며 ‘순수한 물줄기의 물은 차갑고’, ‘인다고파카(Indagopaka) 벌레들로 뒤덮이고’ (v.1063), ‘코끼리와 공작들의 울음이 메아리치고, 구름으로 덮인 하늘같이 아마 꽃들로 뒤덮여있다.’ (v.1068)라고 평가했다. 즉,

맑은 물과 큰 바위산에 원숭이와 사슴들이 항상 뛰어 노니며, 습한 이끼가 뒤덮인 돌들이 나를 기쁘게 한다. (vv.1070)

사리불의 말을 인용하면, “(보통) 사람들이 기쁨을 찾지 못한다고 하여도, 숲은 항상 즐거움으로 차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들은 그곳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쾌락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v.992) 깨달음을 얻는 자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기에 감각에서 벗어난 자연을 음미할 수 있다. 비구 부흐타(Bhta)는 “밖에서는 천둥이 울리고, 비가 내리고, 송곳니를 가진 맹수가 포효하는 밤에 동굴 안에서 느긋이 명상한다”고 말한다. (v.524) 더 평화로운 맥락에선 비구 라마예카(Rmaeyyaka)는 “짹짹거리는 새의 울음소리 사이에서 고독에 대한 헌신은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은 동요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v.49)

이런 초기 전원적 불교 수행자들에게 환경 그 자체는 특히 끊임없는 변화와 무상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비말라(Vimala) 비구가 “땅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바람은 불고, 깨달음은 하늘에서 번쩍인다. 나의 생각은 평화롭고, 마음은 집중되었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v.50) 또한 환경은 마치 산이 확고부동의 이미지인 것처럼, 그와 같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v.1000) 이와 비슷하게 비구 마하나마(Mahnma)는 “많은 관목과 나무가 있는 산이 (나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v.115) 전체적으로 초기 성인이 사랑했던 산과 숲에서는 집착하지 않는 기쁨, 대담한 에너지 그리고 충만한 깨달음 같은 재능을 개발할 수 있었다. 비구 카우다윈(Kudyin)은 “바람이 차갑고 달콤하게 불 때, 나는 산꼭대기에 앉아 나의 무지함을 산산이 흩뿌릴 것이다”라고 대담하게 단언했다. (v.554)

숲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시인 산티데바(Sntideva)는 그의 《보리행경(Bodhicaryvatra, VIII. 26, 28)》에서 숲이 집착을 떠나보내는데 도움이 되는 즐거운 곳이라고 찬미했다.

나무들은 악의를 품지 않기에, 그것들로부터 기쁨을 얻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이들과 언제 함께 살수 있을까? 언제든 나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태곳적 상태의 광대한 땅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쉬고 방랑하며 살 수 있을까? (Crosby and Skilton, 1996: 90)

그는 《대승집보살학론(iksamuccaya, 大乘集菩薩學論)》의 최상수소문경(Ugradatta-paripcch, 最上授所問經)을 인용하면서 “숲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아와 소유의 개념이 없는 초목과 나무와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Bendall and Rouse, 1971: 193) 그는 또한 “만약 보살이 남들을 가르치거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잠시 동안 숲을 떠나있어야 한다면, ‘동굴과 숲의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Bendall and Rouse, 1971: 194)
『우바이계경(Upsakala stra, 優婆塞戒經)』에서 계율에 따르려는 보살은 “도시에 가는 것은 칼 없이 숲으로 가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Shih, 1994: 161) 이것은 아마도 유혹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숲은 평정을 찾을 필요가 있는 길들여지지 않은 위험의 이미지로 사용된 것이다. 그렇지만 숲이 명상하기 좋은 공간이라는 점도 고려할 때, ‘평정’은 숲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탐욕, 증오, 망상 같은 숲의 야생동물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도시에 사는 어떤 태국 사람이 멀리 떨어진 숲 속 수도원을 찾아가 명상을 위주로 하는 ‘숲 속에 거주하는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산업발전

세계는 앞으로 더욱 더 산업화된다. 산업화가 인간의 노동을 덜어주는 물건을 만들어내고, 교통은 좋아지고, 더 큰 건강과 즐거움을 (예를 들어, 기분 좋아지는 음악을 손쉽게 들을 수 있는 것) 가져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산업화는 반성과 명상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은 더 빠르게 돌아가기 때문에, 반성과 명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의도한 결과는 아니고 도미노 효과이다. 더 많은 기초 필수품의 요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쉽게 충족되면서 우리가 갈구하고 추구하는 것은 더 많이 요구되어지기 때문에, 이것들을 살 돈을 벌기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무지 혹은 불교에서 첫 번째 진리인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라는 면을 간과하기 때문에 생긴다.

산업 생산성은 인간 에너지의 표현이다. 상좌부의 아비달바(Abhidhamma) 문헌에서 이런 성질은 훌륭한 상태나 그렇지 않은 상태로 강화되고 증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서 산업 생산성은 사람과 동물과 환경을 해치지 않는 물건들에 집중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산업화 되어진 거친 세계의 자원을 ‘먹는 소비자들’도 과식은 영양결핍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이젠 깨달아야 한다.

재산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망쳐놓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망쳐놓지 못한다. 부자가 되려고 갈망함으로써 어리석은 자들은 마치 다른 사람을 (망치는 것)처럼 스스로를 망친다. (Dhammapada v. 355)

재산은 다음과 같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인간과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고 윤리적인 방법으로 축적한 재산
◎ 본인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재산을 사용하고, 고용인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과 공유되는 재산
◎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스럽게 집착하지 않는 재산 (S.IV.331-7;Harvey 2000: 187-238)

『유마힐소설경(Vimalakrti-nirdea stra, 維摩詰所說經)』에서 유마거사(Vimalakrt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직업에서 이윤을 얻지만, 온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Tsunoda et al, 1964: I.101)

어떻게 훌륭하게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옳은가 알게 된다면, 속임수, 사기, 거짓말 등으로 돈을 벌어 ‘세속적인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은 도덕적인 면에서 장님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윤만 쫓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보지 못하는 ‘애꾸눈’이 되는 것과 같다. (A. I.129-30)

올바른 생계

성스러운 팔정도(Ennobling Eightfold Path)에서 ‘올바른 생계’의 요소는 정직한 생계 수단을 수반하지만 (M.III.75), 그렇지 않으면 다른 생물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말하자면 무기 (무기상이 되는 것), 생물 (예를 들어, 도살하기위해 동물을 키우는 것), 고기 (도살자나 고기판매상, 사냥꾼이나 어부로 사는 것), 술이나 독을 거래하는 것은 ‘그릇된 생계’로 간주된다. (A.III.208) 대승불교의 《범망경(Brahmajla stra, 梵網經)》의 「보살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32. 유정물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붓다의 제자는 칼과 곤봉, 활이나 다른 살인 도구를 팔아서는 안 되고, 개조된 저울이나 측량 도구를 지녀서도 안 된다. 관직을 사람들의 재산을 압수하는데 남용해서는 안 되고, 마음에 악을 품고 다른 사람을 구속하거나 감금하거나, 그들의 앞길을 고의로 방해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고양이나 개, 여우나 돼지 혹은 그런 동물을 키워서도 안 된다. 만약 고의로 이런 행동을 한다면 제2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Buddhist Text Translation Society)

현대 불교도는 다른 형태의 그릇된 생계수단을 덧붙일 것이다. 예를 들면 동물실험을 하는 것, 살충제를 개발하는 것, 무기산업에 종사하는 것, 어쩌면 심지어 탐욕과 증오와 망상 혹은 진실을 왜곡을 조장하는 광고 산업에 종사하는 것 등이다. (Saddhatissa, 1972: 52)

세계를 위한 선행

깨달음을 얻고 위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스스로나 타인 혹은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원하지(ceteti) 않는다. 그는 본인과 타인과 혹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그리고 세계 전체의 안녕을 원한다. 비구들아! 그렇기 때문에 그가 깨달음을 얻은 자고 위대한 지혜를 가진 자인 것이다. (A.II.179)

일반적으로 불교 전통에서 세상에 좋은 이익을 주도록 행동하는 이상과 사상들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에는 인간과 지구를 공유하는 다른 존재를 위한 환경의 이익도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태도는 성스러운 팔정도의 제2의 요소로써 바른 생각(정견)이고, 총체적 지혜로써 옳은 관점이다. (M.I.301) 말하자면 지구의 자원에 덜 욕심을 부리는 것이 금욕적 생각이고, 악한 의지가 아닌 모두에게 자애를 가지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잔인한 행동이 아닌 자비를 위한 생각이기도 하다.

이것과 연관된 고찰은 자연에 해롭거나 이로운 행동 모두 때때로 현존하는 인간의 수명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장기적인 결과를 가진다. 우리는 확실히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손과 그 후 세대에게 평화롭고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자연을 남기도록 노력해야 하는 불교적 실천을 수행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과 천연자원의 훼손은 무지와 탐욕 그리고 지구의 생물을 존중하지 않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손을 존중하지 않는 것까지 이르렀고, 현재 속도로 계속해서 자원을 훼손한다면, 후세 자손들의 세계적 평화는 요원하게 되며 방대하게 손상된 행성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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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서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도 역시 지구로부터 피해와 고통을 받을 미래의 인간으로 (그리고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침대를 만들고 있다면, 미래에는 우리가 그곳에 누워야 할 것이다.

좋은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관점 그리고 환경을 유지하고 지속하도록 도와주는 가치의 관점에 대하여 상좌 불교의 『길상경(Magala sutta, 吉祥經)』의 축복 리스트에는 ‘쾌적한 환경에서 살도록(patirpadesavso)’이라는 항목을 포함하고 있다. (Sn.260) 만약 지역의 환경이나 세계의 환경이 혼란해지면, 평화를 찾고 명상을 하는 등의 불교수행의 환경조건이 혼란해진다. ‘생물권’이라는 것은 해양, 대지 그리고 지층권의 대기를 수용하는 수 마일의 두께의 얇은 봉투와 같다. 오직 이곳의 조건이 맞을 때에만 지구에서 생명이 살 수 있고, 쾌적한 환경을 위해서는 더 까다로운 조건이 필수적이다.

《담마파다(Dhammapada)》의 주석서에서는 전생에 마가하(Magha)로 살면서 선행을 쌓아 3천대천세계의 우두머리 자리를 얻은 사카(Sakka)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Dhp.A.I.264-72) 말하자면, “마가하는 방치된 환경 속에서 거친 사람들과 마을에서 살면서 마을에 행복을 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마가하는 본격적으로 마을을 청소한 다음에 길을 매끈하고 평평하게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마을 사람들이 일하는 그를 보았을 때, 마가하는 ‘천상으로 가는 길을 만든다’고 말했고, 32명의 남자가 점차 그를 돕기 시작했다. 나중에 여자들도 돕기 시작했다. 마을의 촌장은 점점 강해지는 마가하의 영향력을 질투해서, 그와 그의 동료들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평정과 애정이 그들을 보호했다.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그 지역에 아름다움과 평화를 가져왔다.” 이 이야기는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Sarvdaya) 슈라마다나(ramadna) 마을개발운동에 비유되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대승불교 관점에서 아상가(Asaga)는 그의 《보살지지경(Bodhisatta-bhmi, 菩薩地持經)》에서 보살윤리의 핵심적 요소는 ‘존재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것(sattavrtha-kriy)’이라고 생각했다. (Harvey 2000: 131; Tatz, 1986: 16) 이것은 사람들이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행동을 포함하는데, 말하자면 야생 동물들을 보호하는 것, 코끼리들을 자연력에서부터 보호하는 것, 재난을 겪은 사람을 조력하는 것 그리고 빈민에게 원조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Tatz, 1986: 50-5) 현대적 맥락에서 환경문제와 위험의 요소들을 말한다면, 지구 온난화를 줄이도록 실천하는 것을 확실히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많은 붓다의 화신들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조건 속에서 이 세계보다 깨달음에 이르는 ‘정토’를 구현하려고 하는 한, 지구를 좀 더 평화롭고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보살 수행이라고 확실히 생각할 수 있다.

타 존재를 보살핌

불교의 원칙은 인간과 다른 존재가 윤회의 사이클 안에서 함께 고통 받는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에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유정물에게 비폭력으로 대하라고 충고한다. 인간의 도덕적, 정신적 능력 때문에 특히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지만, 한편 같은 능력 때문에 다른 존재를 멋대로 착취하면 안 되며, 친절과 보살핌으로 나름대로의 우수성을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천신들에게도 같은 의무가 있다. 사카(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가하가 남들에게 도움을 주어 신의 신분을 얻은 자)는 한번 그의 군대가 아수라의 군대로부터 도망간 적이 있었다. 그의 전차가 어떤 새 둥지들을 망가뜨리려는 것을 보고 퇴각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아수라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도 추격을 그만두었다.) (S.I.224)

《전륜왕경》에서 이상적인 지도자는 마을과 국가에 사는 다양한 단체의 사람들과 동물과 새들을 망라하여 모두를 위해 ‘경계하고, 감시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자로 보았다. (D.III.61) 아쇼카 왕이 동물의 안녕과 관련해 내린 칙령은 다음을 포함한다.

14 돌 칙령 2: 모든 곳에서 신들의 사랑을 받는 피야다시(Piyadasi) 왕은 두 종류의 의료적 치료를 위한 조항을 만들었다. 인간을 위한 의료 치료와 동물을 위한 의료치료이다. 인간과 동물에게 쓸 수 있는 약재를 구할 수 없는 곳에서는 내가 제공하여 키우게 할 것이다. … 칙령 7 … 길을 따라서 나는 뱅골 보리수나무를 심어, 동물과 사람에게 그늘을 제공하게 하였고, 또한 망고나무도 심었다. 8 크로사스(krosas) 간격으로 우물을 파고 쉼터를 지었고, 여러 곳에 동물과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우물을 만들었다. … 나는 사람들이 법을 수행할지도 모른다는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였다. (Dhammika, 1993)

《우바이계경(優婆塞戒經)》은 보살에 대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나무가 없는 곳에 기둥을 세우고 동물을 위해 그늘을 만들었다. … 그는 두려움에 떠는 동물들을 보면서, 그들을 돕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고, 사냥꾼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제공하여 다정한 말들로 (사냥을 그만하도록) 설득했다. (Shih, 1994:133-4) 만약 그가 국수를 조금 개미에게 주면 헤아릴 수 없는 보답을 얻을 수 있다. (Shih, 1994:113)

《범망경》48에서 보살을 위한 제2의 계율은 다음을 포함한다.

20. 유정물을 해방하는 것의 실패― 붓다의 제자는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유정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수행을 연마해야 한다. … 만약 보살이 죽임을 당하는 경계에 있는 동물을 본다면, 고통과 죽음을 탈출할 수 있도록 그것을 구조하고 보호할 수 있는 방도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제자는 언제나 유정을 구조하고 이끄는 보살행을 가르쳐야 한다. (Buddhist Text Translation Society)

물론 추가 조항을 덧붙일 수 있는데, 말하자면 타인이 먼저 해칠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해방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환경에 사는 다른 종류의 유정물의 이익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때때로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그들의 이익을 무시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다른 종류의 생명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종종 인간을 해치는 도미논 효과를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점점 더 민감해져야 할 것이다. 불교는 자주 자신과 타인의 피해, 그리고 진정한 이익은 서로 뒤얽혀있다고 가르친다.

다른 종을 보호하는 것

아쇼카 왕의 칙령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7 칙령: 5 … 나의 대관식의 26년 후에 다양한 동물이 보호되도록 공표하였다. 앵무새, 멧새(mainas), 아루나(aruna), 붉은 거위, 들오리, 물새(nandimukhas), 박쥐, 여왕개미들, 테라핀, 뼈 없는 물고기, 베다레야카(vedareyaka), 돌고래, 거북, 호저, 다람쥐, 사슴, 황소, 오카핀다(okapinda), 야생 당나귀, 흰 비둘기, 집비둘기 그리고 유용하지도 식용도 아닌 모든 네발동물들이다. (여기서 많은 동물들은 추측된 것이다.) 새끼와 함께 있거나 새끼에게 젖을 주는 암염소, 암양, 암퇘지는 보호해야 하며, 6개월이 안된 새끼들도 마찬가지이다. 수탉은 거세해서는 안 되고, 생명이 숨어있는 수풀을 태워서는 안 되고, 숲도 이유 없이 혹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서 태워서는 안 된다. 동물을 다른 동물의 먹이로 주면 안 된다. (Dhammika, 1993)

멸종위기의 종을 거래하고, 인간이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여서 멸종으로 몰아가는 것은 현재 세계적인 문제이다. 위의 칙령은 아쇼카 왕이 다양한 종의 생물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불교가 종 그 자체를 보호하려는 특별히 강력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언제나 어떤 종에 속해있던 모든 유정물의 고통을 걱정했다. 변화와 무상으로 이루어진 억겁(eons-old)의 세상에서 (현재 통상적이 속도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종이 멸종하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으로 죽어가는 종은 고통 받은 개체로 인지되어 불교의 관심은 이들에게 쏠려 있어야 한다. 고래들을 구하는 것은 찬성해야 하는가! 불교의 원칙은 고래라는 ‘종’을 구하는 것에는 강하게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쇼카 왕의 칙령이 이와 같이 종의 멸종을 막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는 한 멸종위기의 종을 (그 종의 개체들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종의 개체를 죽여야 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전통 불교 윤리에서는 명백하게 최후의 코뿔소들을 죽이는 것이 많은 개체수의 동물들 예를 들면, 소와 같은 동물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코뿔소의 종을 멸종시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죽이는 것은 매우 파괴적인 행동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더 나쁜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하나의 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여전히 고통 받는 존재들의 조건부적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멸종된다면 (적어도 우주의 이 지역에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동 아시아 불교에서는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불성’을 지닌다고 간주하지만) 다른 종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말 할 수는 없다. 적어도 고등 생물은 어떤 덕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따라서 그들을 잃는 것 역시 깨달음의 정신적 과정을 방해하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동물에 대해서 멸종으로 몰아가는 것임을 알면서, 심지어 고의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동물을 죽이는 것은 멸종위기에 처하지 않은 생물을 죽이는 것보다 확실히 더 나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멸종 위기 동물 중 하나는 호랑이인데, 이런 위협에 처하게 된 이유의 일부분은 호랑이의 일부를 먹는 것이 생식력을 키워준다는 전통적 중국의 믿음 때문이다. 따라서 점점 작은 수의 호랑이가 여전히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 타이완으로 ‘애완동물’로 수입되고 있다. 1986년에 그곳의 한 불교 지도자가 중국에서 새해 때 호랑이가 식용으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 12마리의 호랑이를 살 계획을 세웠다는 보도가 있었다.

세계적 모라토리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첨단의 어획 기술을 남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고래들을 멸종 위기의 동물이 되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포경사업은 여러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섬이라는 사실은 바다를 커다란 식품 공급소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고기는 하등 생물로 보았기 때문에, 아마 육식을 걱정하는 불교에 의해서도 해산물을 선호하는 전통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건실한 배들이 많아지고 점점 더 세속주의에 물들면서 많은 고래들이 사냥되었다. 평균적으로 일본인에게 고래를 죽이는 것은 (물론 독실한 불교도는 소도 죽이고 싶지 않겠지만) 소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의 포경 사업에서 추도식을 강조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보면, 불교가 ‘모든 유정’에 대한 근심을 표명하면서도 일본의 스님들이 때때로 포경선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고래들을 위해 추도식을 진행한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Hoshino & Takeda, 1987: 310). 카플로(Kapleau)는 1979에 선종 사찰이 주최한 행사에서 관리들과 큰 포경 회사의 간부들이 청중으로 참석한 고래 추도식을 보고했다. (1981: 46-50) 불행하게도 추도식은 포경을 저지하는 어떤 내용도 담지 않았고, 일종의 사람들의 양심을 달래는 것에 더 가까웠다. 이것은 동물 집단을 고의적이지 않게 해치는 경우가 아니다. 의도적으로 죽인 다음 추도식이라는 붕대로 보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일본 고래잡이들은 그들이 잡는 동물이 실제로 멸종하는 것을 당연히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감하고 지적인 존재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

지구 자원 요구의 축소

충분한 재활용을 하지 않는 것과 지구의 천원자원을 점점 많이 사용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더 많은 땅이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이용 되여 후대에게 적은 천원자원을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화석연료의 과도한 사용이 지구 온난화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불교의 가치는 만족하는 문제와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을 비난하는 제2의 계율을 통한 문제와 관련 있는 듯하다. 반면에 이것은 직접적으로 절도와 사기와 관계가 있지만, 또한 지구의 천연자원 창고에서 ‘제 몫보다 더 많이 취하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볼 수도 있겠다.

옷은 ‘재활용’에 관련한 인상적인 예를 담고 있다. 아난다(nanda)는 오래된 관복으로 침대의 겉 커버 만들고, 그 겉 커버를 침대 요로 다시 만들고, 오래된 침대 요는 바닥 커버를 만들고, 오래된 바닥 커버는 발수건을 만들고, 오래된 발수건은 걸레를 만들고, 그 걸레가 오래되면 조각을 내고 흙과 섞어서 석고 바닥을 만들었다는 승려를 언급했다. (Vin.II.291)

공적인 책임

이 논문의 핵심과 관련된 문제는 공적인 책임에 대한 것이다. 환경의 파괴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의 행동의 집합적 결과이다. 우리는 모두 이 과정의 개인적인 투입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다. 또한 이미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밝혀진 행동에 대해서 확실한 윤리적 책임이 있다. 이런 책임만 있는가? 아니다. 우리의 행동은 타인의 나쁜 본보기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반대로 타인에게 나쁜 본보기를 남길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본보기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전륜왕경』에서 사회를 향상시키는 윤리적 행동에 대한 공공의 노력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그리고 마가하의 이야기가 환경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을 남들에게 불어넣어 주었는지에 주목하라. 더 나아가 불교에서는 행위는 몸, 말이나 뜻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한다. 만약 환경에 존재하는 생물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거나, 단체의 한 명이라도6) 그런 피해를 주려는 의도하거나, 그런 행동을 동조하는 말을 하거나, 심지어 정신적으로 성원한다면 나쁜 업을 만드는 것이다.7)

달라이 라마의 ‘우주적 책임’에 대한 사상은 이것과 연관성이 있다.

환경을 걱정하는 것이 꼭 신성한 것이거나 항상 자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집에 대해서 어떻게든 걱정을 가지고 있지만, 정말 자비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 수 있게, 행복할 수 있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집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집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자비라기보다는 걱정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지구는 우리의 집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아이들과, 친구들 그리고 거대한 집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유정물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그 집을 정리하고 보살펴야 한다. 만약 지구를 우리 집이나 어머니(Mother Earth)라고 생각한다면 자동적으로 환경에 대해서 걱정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의 미래는 지구에 매우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과, 지구의 미래는 인류에게 매우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우리에게 그다지 명확했던 사실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지구라는 어머니는 우리의 집을 어지럽히는 버릇들을 어느 정도 참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라는 어머니는 더 이상 침묵으로 우리의 존재를 수용할 수 없는 단계까지 왔다. 인간과 인간이 사용하는 기술에 대하여 많은 경로로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이 나쁘게 행동 한다”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지구가 실제로 그렇듯이 풍요롭고 윤택하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많은 사람은 자연이 소진되지 않고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잘 돌보아야만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무지에서 비롯된 과거의 파괴에 대해 용서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더 많은 정보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을 윤리적으로 재심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자, 후세에 물려주어야 하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는 확실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세대이다. … 많은 지구의 희귀한 서식지, 동물, 식물, 곤충 심지어 미생물을 미래의 세대는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능력이 있고 책임이 있다. 너무 늦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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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문제가 윤리적인 의무인가 자발적인 선행인가?

불교적 원칙에서 볼 때 우리는 생물과 서식 환경을 고의적으로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생물과 환경을 긍정적으로 돕는 행동은 도덕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하지만 이런 선행이 어떤 의미에서 의무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부도덕한 것인가? 그런 행동은 남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행동인가? 상좌부의 채식주의나 금욕적인 스님들 아니면 영웅적인 보살과 같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고귀한 몇몇을 위한 행동인가? 예를 들어 ‘기름 많이 먹는 차’ 대신 절연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고귀한 자발적 선행인가, 혹은 탐욕스럽고 해로운 부도덕한 행동을 피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 만약 그 사람이 다른 도덕적이고 좋은 업보를 부르는 행동을 실천한다면, 환경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무시하는 것이 용납될 수 있는가?

위의 달라이 라마의 주장이 이 문제와 연관성이 있다. 우리의 환경을 돌보는 것은 단순히 단도직입적으로 보면 실용적인 이유에서 도리에 맞는다. 우리의 ‘집’을 돌볼 필요가 있고 집을 헤치는 것들을 점점 더 경계하여야 한다. 이런 지식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지만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단지 멍청한 근시안(妄想)이 되지 않으려고 보살이 될 필요는 없다.

이런 논리에 덧붙여서, 불교에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자발적 선행은 미래에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업의 충만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동이 필수적 ‘의무’인가를 떠나서, 자기만족으로 간과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환경은 어떤 면에서 다른 업의 선행을 하도록 하는 선행조건이다.

더 나아가 『우바이계경』에서 보면 23가지 행동 중 6가지의 행동을 수행하는데 실패하는 것은 보살의 죄를 짓는 것이다. (Shih, 1994: 80-83) 예를 들어 새로 수확한 곡식의 일부를 삼보에 바치지 않는 것이나, 여행길에서 만난 아픈 사람을 보살피지 않는 것 등이다. 보살을 위한 『범망경』의 계율에서 48가지 제2의 계율은 아픈 사람을 돌보지 않는 것과 유정을 해방시켜주지 못하는 것, 또한 서원을 하지 못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특정한 선행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볼 수 있다.

주로 대승불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소승불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승불교의 계율은 붓다가 다른 스님이 돌보지 않는 이질이 걸린 스님을 찾는 단락이 있다. 붓다는 아난다와 함께 그 스님을 돌보고, 다른 스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당신들은 돌보아 줄 수 있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없다. 만약 스님들이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 누가 당신을 돌보아 줄 것인가? 비구들이여! 나를 돌보아 주는 사람처럼 모두 아픈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 (Vin.I.302)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병든 생물권에는 아무도 그곳에 사는 생물들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붓다가 돌보는 사람이라면 어떤 생물권에도 유효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생각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 어떤 생물도 고의적으로 해쳐서는 안 된다.
◎ 우리의 행동에 적용되어진 의도 되지 않은 결과에 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면서, 다른 생물과 함께 공유하는 생물권이라는 집을 돌봐야 한다.
◎ 또한 인간이건 인간이 아니건 다른 존재에게 이익을 주고, 유효하게 환경의 질을 높이는 행동을 행해야 한다.

    * 이 글은 런던대와 동국대 BK21 불교사상사교육연구단이 공동 주최한 불교생태학 국제 세미나 (2005.2)에서 발표된 것이다.

    1) 여기서 모든 계율의 참고문헌은 상좌부 계율이다.

    2) 예를 들어, 계율에서 만약 한 스님이 살인을 저지르라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면, 훌륭하지 않은 의도에 한 걸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미 비행이다. 만약 살인이 일어났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바라이죄가 적용 된다 (Vin.III.53, 75).

    3) E.g. Badiner, 1990:61; Batchelor and Brown, 1992:11, 35; Macy, 1991; Sandell, 1987.

    4) 프랑스에서 틱낫한 스님은 국제적으로 Tiep Hien (상호존재)이라는 명상을 통한 사회·평화 운동 본부를 설립했다. 이 운동의 행동규칙 중에 ‘인간과 자연에 해를 가하는 직업을 가지고 살지 말라’라는 문구가 있다.’ (Eppseiner, 1988: 151, 그리고 http://www.iamhome.org/14mt.htm
    참고). 틱낫한은 제자들에게 세계와 그들과의 상호관계와 세계에 대한 의무를 깨닫게 하는 시를 사용하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수돗물을 틀 때나 물을 마실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해라고 한다. “물이 이 손에서 흐른다. 내가 훌륭하게 사용해야 한다.”

    5)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서 (Batchelor & Brown, 1992: 106) 해리스는 그의 관점을 Harris 1994, 1995, 1995, 1996, 2000에서 전개한다.
    그는 《대승집보살학론(iksamuccaya, 大乘集菩薩學論)》의 최상수소문경(Ugradatta-paripcch, 最上授所問經)을 인용하면서 “숲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아와 소유의 개념이 없는 초목과 나무와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Bendall and Rouse, 1971: 193) 그는 또한 “만약 보살이 남들을 가르치거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잠시 동안 숲을 떠나있어야 한다면, ‘동굴과 숲의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Bendall and Rouse, 1971: 194)

 배상환
동국대 BK21 연구교수.동국대불교학과 졸업. 인도 바라나스 힌두대학 석사 박사 과정 졸업. ‘아비달마 교학에서 본 무위법의 소고’ ‘아견과 무아견의 상반관계’‘대승경전에 담긴 생태학적 가르침’ 등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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