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룡 조계종 불학연구소 상임연구원

한국불교의 정체성 어떻게 세워야 하나

‘한국불교의 성격, 혹은 정체성은 무엇인가?’ 불교학 전공자나 수행자에게 있어서 항상 떠나지 않는 질문이지만 그 대답은 쉽지가 않다. 한국불교의 세계화란 과제에 당면하여 다시금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묻게 된다. 즉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한국불교의 특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비구승단의 수행풍토, 특히 ‘간화선看話禪’이다. 최근 몇 년간에 교계와 학계에서는 ‘간화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국의 간화선은 그 실참실수의 전통이 온전히 살아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점만 가지고도 국제적인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선종과 교종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한국불교의 전통에서 그 특징을 ‘간화선’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간 한국불교의 특징을 ‘회통불교’라 규정하여 왔고, 선사상의 특징 또한 ‘화엄선(華嚴禪)’이라 주장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수행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 증대와 간화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척되면서 ‘간화선’을 통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 그런데 간화선 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증폭되면서 ‘간화선과 화엄 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 가’ 하는 문제를 다시금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아주 소박한 데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불교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고, 깨달음이란 궁극의 구경각이다. 그리고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의 방법이 구경각에 이르는 최고로 빠른 길이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구경각의 자리, 깨침의 세계는 어떠한 모습인가’하는 궁금증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을 선지식에게 요구한다. 물론 이 때 확철대오한 선지식이야 속 시원히 말해 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화두 참구를 통하여 직접 체험해 보아야 안다.”라는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경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선종은 성불(成佛)의 객관적 표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성불에는 일정한 표준이 없기 때문에 ‘성불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하는 것이 선종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모순이다. 그러기에 명안종사(明眼宗師)에 대한 인가(印可)가 강조된다. 동정일여·몽중일여·오매일여의 세 가지 관문을 반드시 돌파해야 한다. 정말 구경각을 이룬 명안종사가 출현할 때만이 간화선은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부처의 심인(心印)을 계승한 명안종사가 부재하는 경우 간화선의 권유는 무지(無知)와 사견(邪見), 광선(狂禪)과 치선(癡禪)에 빠지게 할 위험성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래서 선종이 흥행하게 되면서 선사(禪師)들의 주관적인 깨달음에 의존하기 보다는 다시 교종에서의 불경과 같은 객관적인 권위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근대 서양철학이 왜 신(神)에 의한 절대적 권위, 즉 도그마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하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간화선을 대중화·생활화·세계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국 간화선은 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어 있다. 그 위기의 실체는 ‘불교 내외적으로 다가오는 간화선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빠사나의 도전은 어찌 보면 가벼운 것일 수 있다. 간화선이 체계화 되어지고 대중화되어져 신비의 외피를 벗는 순간, 간화선 내부로부터 필연적으로 쏟아질 강도 높은 비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 도전을 감당해야 하는 과제가 성철을 떠나보낸 이후 남아 있는 선지식에게 던져져 있다.

간화선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대중화 생활화를 추구하면 간화선 이외의 수행체계 ·교리체계와의 의사소통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불경의 권위와 언어를 근본적으로 부정했던 선(禪)이 다시 언어와 논리에 의하여 체계화 된 객관적인 권위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조사어록 조차도 언어와 개념으로 구축된 이상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간화선의 내재적 논리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화엄을 부정하던 간화선이 이제 화엄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한국의 선사(禪師) 가운데에서 간화선과 화엄과의 관계에 깊이 천착한 분이 보조 지눌과 퇴옹 성철이다. 이들에 의하여 제기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은 한국불교계에 있어서 해방이후 최대의 담론이 되었다. 이 두 사상 간의 논쟁은 깨침(悟)과 닦음(修)에 관한 논의가 중심에 있지만, 다른 한 축은 ‘간화선과 화엄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 내지 해석의 문제가 내재 되어 있다. 물론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보조 지눌은 회통적인 입장을 퇴옹 성철은 단절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상반된 그들의 주장의 이면을 들어다 보면 자신이 살고 있던 역사적 현장 속에서 간화선을 정착시키려는 고뇌와 노력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고는 지눌과 성철 간의 새로운 논쟁의 불씨를 만들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두 선지식의 가르침을 통해 ‘앞으로 한국의 간화선은 화엄 및 교학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나’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선과 화엄과의 인연

그런데 왜 하필 ‘화엄’인가? 부처님의 근본사상으로 바로 들어가거나 유식·반야 등의 사상으론 안 되는가? 성철이 그토록 비판한 대상이 바로 해오점수(解悟漸修)·화엄선(華嚴禪)인데 다시 그리로 가겠다는 것인가?

중국에서의 선(禪)의 출현은 한편으로 화엄사상의 교학적 바탕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 화엄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그 논리적 철학적 수행적 측면에 있어서 화엄과의 유사성이 강하다. 즉 선과 가장 근거리에 있는 것이 바로 화엄사상이다. 한국 불교는 화엄과 더욱 깊은 인연이 있다. ‘한국불교는 겉은 선(禪)인데 속은 화엄’이라고 진단한 성철의 지적은 사실이다.

단적으로 우리의 사찰은 선종 사찰이라 표방하고 있으면서 대적광전을 통하여 화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선과 화엄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즉 화엄은 한국의 교학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선은 그 출발부터가 화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즉 선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올 때 이를 수용한 주체들의 사상적인 토대가 다름 아닌 화엄이었다.

예를 들어 조계종의 종조이자 가지산의 개산조인 도의(道義)는 37년 간 중국에 머물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깊은 감응을 받았으며, 화엄사찰인 보단사에 체류하면서 화엄에 깊이 심취했다가, 후에 선종에 몰입하게 된다. 홍척의 뒤를 이어 실상산문 제2조가 된 수철(秀澈)은 남원(東原京)의 복천사(福泉寺)에서 윤법(潤法)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명산을 찾아다니며 선을 닦는 여가에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지리산 지실사(智實寺)에 가서 모든 불경자료를 열람하였다.

사굴산문의 개산조 범일의 뒤를 이어 선풍을 크게 떨친 개청(開淸)은 당초 《화엄경》을 공부하였다가 선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물론 개청이 이렇게 방향을 돌리게 된 데에는 화엄학의 한계에 대한 그 자신의 자각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선을 출발시킨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사들의 사상적인 토대가 화엄을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고려 후기 다시 한국선을 크게 중흥시킨 지눌의 경우에 있어서도 화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선사(禪師)로서 그는 젊은 시절을 선과 교의 일치점을 찾으려고 고민하다가 이통현의 〈화엄신론〉을 통하여 해결점을 찾게 된다. 그가 수행법으로 제시한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경절문 중 원돈신해문이 바로 화엄의 수행법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 말 중국의 석옥 청공으로부터 임제선의 법맥을 이은 태고 보우 또한 화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보우는 13세 때 양주 회암사 광지(廣智)선사를 스승으로 하여 득도하여 19세 때에 가지산(迦智山) 총림(叢林)에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話頭)로 선지(禪旨)를 참구하고, 26세 때에는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다. 그 후 화엄의 한계를 자각하고 다시 37세에 무자(無字)화두를 참구하여 깨닫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구산선문의 선사들은 물론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되는 도의국사 그리고 중흥조인 보조 지눌과 태고 보우 모두 화엄사상에 심취하였다가 다시 선의 세계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성철이 지눌의 선사상을 화엄선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한국의 선은 그 태생부터 역사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 있어 화엄을 떠나서 논의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보조 지눌의 회통적 입장

간화선과 화엄과의 관계에 대한 보조 지눌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저서는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이다. 《원돈성불론》은 지눌의 화엄사상을 정초한 책으로 이통현의 《신화엄론(新華嚴論)》의 성기사상(性起思想)에 입각하여 닦음의 기초로서 돈오頓悟에 바탕해야 함을 밝힌 저작이다. 이는 《수심결(修心訣)》과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서 밝힌 성적등지(性寂等持)·정혜쌍수(定慧雙修)의 근거를 확실히 하는 역할과 함께, 화엄의 근본보광명지(根本寶光明智)를 매개로 하여 간화선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있는 기능을 겸하고 있다.

《간화결의론》은 지눌의 간화선 사상을 밝히고 있는 작품이자 우리나라에 최초로 간화선을 소개한 책이다. 이 두 책은 지눌 사후 5년 후인 1215년에 그의 제자인 혜심(慧諶)에 의해 발견되어 간행한 것이다. 혜심은 이 두 책을 간행하는 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슬프다. 근래에 불법의 쇠퇴함이 심하다. 선(禪)을 종으로 삼는 이는 교(敎)를 배척하고, 교를 숭상하는 이는 선을 비방한다. 선은 곧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곧 부처의 말임을 알지 못한다. 교가 선의 그물(網)이라면, 선은 교의 벼리(綱)이다. 그런데도 선과 교는 서로 원수와 같이 견해를 지어서 법(法)과 의(義)의 두 가르침을 서로 모순되게 만들어 버렸다. 마침내 다툼이 없는 문에 들어가 실다운 도를 밟지 못하게 되었다. 보조스님께서는 이점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을 저술하였다.

위의 혜심의 발문을 통하여 보면 당시 불교계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선과 교가 서로 비방과 쟁투를 일삼는 심각한 대립의 모습이다. 이러한 원인에 대한 지눌은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한 몰이해와 그로인한 파벌의식에 있다고 진단한다. “교가 선의 그물(網)이라면, 선은 교의 벼리(綱)이다”라는 관계를 제대로 정립할 때 다툼이 없는 문에 들어가 실다운 도를 밟을 수 있다는 것이 지눌의 입장이다.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의 저술동기가 여기에 있다고 혜심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지눌의 선과 교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보다 구체적으로 ‘간화선과 화엄과의 바른 관계 정립’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화엄의 내용을 담고 있는《원돈성불론》과 간화선의 내용을 담고 있는《간화결의론》을 저술하였다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의 간화선의 출발은 ‘화엄’과의 제대로 된 관계 정립, ‘화엄’과의 회통, 화엄과의 대결의식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화선을 한국 땅에 정착시킨 사명자의 역할을 지눌은 이 두 저술을 통하여 치밀하고도 충실하게 담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다. 한국에 간화선을 정착시킨 인물에 대하여 《선문염송》을 저술한 진각 혜심 혹은 중국에 건너가 임제종 후손들에게 직접 인가를 받아온 여말 삼사(三師)(태고 보우·나옹 혜근·백운 경한)를 꼽곤 한다. 그러나 만약 보조 지눌의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의 저술이 없었다면 교종과의 경쟁 속에서 선종의 우위를 점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간화선 또한 그 생명력을 꿋꿋하게 지니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눌은 대부분의 저술들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질문을 통하여 제기하고, 그에 대하여 대답하는 문답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질문 속에는 항상 지눌의 첨예한 문제의식이 들어있다. 철저하게 문제를 파고들어 대중들이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질문으로 제기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비판하는 가장 예민하고 첨예한 지점을 질문으로 삼는다. 모순되는 내용을 질문으로 제기하고, 그것을 비모순의 차원에서 논파하는 방법을 취한다. 따라서 저술 속에 나타난 지눌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저술에 등장하고 있는 ‘질문’에 주목해야 한다.
《원돈성불론》의 질문의 내용은 이렇다.

    ① 그대(지눌)의 주장을 들어보면, “오늘날 마음을 닦는 사람은 먼저 날마다 사용하는 자기 무명(無明)의 분별종자(分別種子)를 모든 부처의 부동지(不動智)로 삼고서 그 다음에 성품(性品)을 의지하여 선(禪)을 닦아야 비로소 묘미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한 ‘부동지’의 불과(佛果)는 본각(本覺)에 해당하는 이치로서의 부처(理佛)인가? 아니면 새로 이루어진 현상으로서의 부처(事佛)인가?

    ② 오늘날 마음 닦는 사람이 반조하는 부동지(不動智)의 부처란 본래 깨달은 이치의 부처(理佛)인가? 아니면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부처를 말하는가? 만일 과지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비록 타과(他果)와 자과(自果)가 다르지만 반드시 원융문(圓融門)의 이치에 따라서 보편이란 의미로 보아야 하며, 또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포섭된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항포문(行布門)에 의거하면,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노사나불(盧舍那佛)과 박지위(縛地位)의 닦지 못한 중생의 경지를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③ 그대(지눌)는 부처와 중생이 동일한 몸(同體)이며, 서로 다른 몸(異體)이 아니라 주장한다. 그런데 오늘날 시방세계에서 몸(正報)과 세계(依報)가 물든 연기(染緣起)와 깨끗한 연기(淨緣起)로서 분명하게 차별이 있어 자타의 상속(相續)이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노사나불을 어떻게 한결같이 자기의 부처로 삼을 수 있겠는가?

    ④ 지금까지 그대(지눌)가 말한 바는 이미 상세히 들었다. 그러나 고금의 선문에 통달한 자는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고 한다. 이것은 성품(性)의 한 측면인 깨끗한 바탕(體)으로서,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⑤ 오늘날 범부가 마음을 깨달아 부처를 성취하는 것은 구경(究竟)인가, 구경이 아닌가? 만일 구경이라면 어찌 처음 마음(初心)이라고 이름하며, 만일 구경의 경지가 아니라면 어찌 올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이름하는가?

위의 질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묻고 있는 자는 당시 화엄종의 사람이거나 화엄적 교양에 바탕한 사람이다. 대답하고 있는 지눌은 선종의 선사(禪師)의 입장에 서 있다. 즉 지눌은 선(禪)을 당시 화엄이라는 교학적 바탕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은 당시 불교계의 보편적인 사상이었고, 주류였다. 이점이 중요하다. 지눌은 화엄의 논리로서 화엄의 사상을 논파하고 있다. 이는 화엄사상이 주류인 당시 불교계에 선이 들어설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눌에겐 기존의 화엄사상을 논파하고, 조사선의 돈오(頓悟)를 닦음의 기초로 삼고, 그러한 닦음은 구경각과 다르지 않다는 선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화엄철학이 필요했다. 그러한 고민을 지눌은 이통현의 《신화엄론》을 발견함으로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눌의 말을 들어보자.

논주(論主·이통현)의 취지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요컨대『화엄경』의 큰 뜻을 분석하여 말세의 보살로 하여금 생사윤회의 길 위에서 모든 부처의 부동지(不動智)를 단박 깨달아서(頓悟) 처음 깨달아 마음을 일으키는 근원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므로 두 번째 법회에서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普光明地智)’로써 전각(殿閣)의 이름을 삼아 십신(十信)의 법문을 설하되, 바로 여래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큰 작용이 방소(方所)의 한계가 없이 중중(重重)하여 끝이 없음을 보이시어, 이것으로써 믿는 마음을 삼았다. 또 십색(十色) 세계와 십지(十智) 여래와 십수(十首) 보살을 들어 법을 내세워 보이며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그리고 ‘선종에서 견성성불이라 하는데, 이러한 입장은 마음의 체(體) 만을 갖추었을 뿐 상(相)과 용(用)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보조가 말하고 있는 돈오(頓悟)가 과연 구경각(究竟覺)인가?’하는 등의 날카로운 내용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고 지눌은 이통현의 《신화엄론》에 근거하여 선(禪)의 정당성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대답하였던 것이다.

《원돈성불론》은 지눌의 화엄사상을 정초한 것이고, 그의 사상이 선교일치(禪敎一致)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통현의 화엄론을 가지고 당시의 화엄론자를 비판하고 자신의 선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저술이기도 하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선종의 우위 상황에서 선교일치를 바라보면, “선사(禪師)가 교외별전을 고집해야지 왜 화엄을 말하고 나아가 선교일치를 입에 담는가!”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화엄의 절대적 우위 속에 선종이 처해 있다면 ‘선교일치’를 주장하여 사회적 호응을 얻어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지눌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지눌이 선교일치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원돈성불론》을 통하여 선과 교가 다른 것이 아니며, 선과 교가 올바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지눌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통하여 드디어 간화선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역설하고 화두를 드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그러한『간화결의론』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① 어떤 사람이 목우자(牧牛子·지눌)에게 물었다. 화엄교학에서 이미 법계(法界)의 장애가 없는 연기를 밝혔다. 그런 까닭에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선문(禪門)에서는 십종병(十種病)을 뽑아서 다시 화두(話頭)를 참구하라 하는가? 역시 묻는 자는 화엄교학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다. 당시 화엄교학은 당당했다. 그들에겐 굳이 새로운 간화선이 필요하지 않았다. ‘화엄의 법계연기설로 아무런 장애가 없는데, 굳이 화두를 참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이 첫 질문에서 간화선을 이 땅에 처음 소개하는 선구자의 어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나머지 질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② 이미‘법성(法性)이 원융(圓融)하여 연기(緣起)함에 막힘이 없다’고 한다면 비록 듣고 헤아림이 있다고 하여도 어찌 장애가 되겠는가?

    ③ 그렇다면 반야경(般若經)에서“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라든지, 또 돈교(頓敎)에서“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음을 이름 하여 부처라 한다”는 것처럼, 이들 역시 말을 떠나고 근심을 끊는(離言絶慮)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④ 돈교(頓敎)에서 교설을 비판하며 벗어날 것을 권하고 형상을 부수어서 마음을 없애라 한다. 선문의 화두에서도 또한 잘못된 알음알이(惡知惡解)를 깨뜨리고 집착을 부숴 진리를 드러낼 것을 강조한다. 돈교와 선문이 진리에 들어가는 행상이 서로 같은데 어찌하여 돈교는 다만 이치를 깨달아 부처가 될 뿐 막힘없는 법계를 깨닫지 못하고, 선종에서 경절문의 분지일발(噴地一發)은 법계의 일심을 자세히 깨달아 저절로 원융한 덕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하는가? 똑같이 말을 떠나고 생각을 떠났는데 어째서 하나는 치우치고 하나는 원만하다고 하는가? 만일에 자기를 옳다하고 남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한 증거가 있다면 한두 가지를 설명하여 이러한 의심을 제거해 달라.

    ⑤ 그렇다면 선종의 깨달음에 들어가는 사람은 비록 돈교의 근기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일과 일이 막힘없음을 깨달았으므로 원교에는 해당해야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원교 외에 별도로 비밀히 전하는 가르침(敎外別傳)의 근기가 있다고 하는가?

위의 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당시 화엄 교가들의 생각에는 법장(法藏)의 화엄교판에서 말하는 돈교(頓敎) 혹은 원교(圓敎)와 특별한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즉 돈교에서도 이언절려(離言絶慮)가 있으며, 화두가 지해(知解)의 병통을 제거하는 것처럼 교설을 비판하여 말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지눌은 돈교와 원교를 차례로 비판하고 간화선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간화결의론》의 마지막에서 지눌은 화엄과 간화선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화두를 드는 방법 중 참의(參意)와 참구(參句)로 구별할 수 있음을 들어 밝히고 있다. 즉 화엄의 방법은 언어를 통하여 이해하는 ‘참의’에 해당하고, 간화선은 의심을 통하여 들어가는 ‘참구’임을 말한다. 그리고 참구만이 활구(活句)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한 지눌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므로 고덕은 ‘조사의 도를 깨달아 반야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말세에는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 뜻에 의거하면 화두에는 참의(參意)과 참구(參句)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요즘의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은 대부분 참의를 살필 뿐 참구를 얻지 못하므로, 원돈문에 의거하여 바른 이해를 밝혀낸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관행과 용심에 여전히 보고 들음으로써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다.

(물론 이것은) 다만 지금의 문자법사들이 관행문에서 안으로는 마음 있음을 헤아리고 바깥으로는 여러 이치를 구하고, 더욱 이치를 구함이 자세하여 도리어 바깥의 형상에 집착하는 병을 얻는 것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어찌 참구로서 의심을 깨뜨려 직접 일심을 깨달아 반야를 발휘하고 널리 유통하게 하는 사람과 같게 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와 같이 깨달음의 지혜를 드러낸 사람이 지금 시대에는 보기 힘들고 듣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지 화두의 뜻을 살피는 참의에 의지하여 올바른 지견을 밝히는 것만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의 견처(見處)도 물론 교학에 의지하여 관행하면서 정식을 떠나지 못한 사람과는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부디 엎드려 바라건대 관행하여 세상을 벗어나려는 사람은 선문의 활구(活句)을 참구하여 빨리 깨달음을 증득하면 매우 다행하고 다행할 것이다.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에 있어서 지눌의 입장은 ‘선교일치’적인 입장에서 ‘교외별전’ 적인 입장으로 전환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지눌의 진정한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해석은 학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화엄이 우위에 있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두 입장 모두 간화선을 소개하고 정착시키기 위한 데 필요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땅에 간화선을 최초로 소개한 지눌이 화엄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근본적인 방식은 역시 회통적이라 하겠다. 화엄을 인정하고 화엄과의 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두 관계의 회통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지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간화선이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퇴옹 성철의 단절적 입장

비움은 가득 참이 있었을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선에서는 언어와 논리의 떠남을 추구하지만, 그 떠남은 언어와 논리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전제하고 있다. 또 역으로 언어와 논리를 떠난 자만이 진정한 언어와 논리를 구사할 수 있다. 언어와 논리의 세계인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주는 한계성에 대하여 철저한 자각이 없고서는 선(禪)은 출발할 수 없다.

발심(發心)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선(禪)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떠나는 것이다.

언어와 논리, 일체의 분별을 철저히 배격한 성철 자신의 삶은 오히려 철저히 분별과 논리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선사(禪師)인 성철의 삶에서 주목이 되는 것은 끊임없는 지적 추구이다. 동서철학을 넘나드는 지성과 선·교를 넘나드는 불교 교학에 대한 해박함은 독서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원택은 「성철 스님의 행장과 말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 뒤에 스님의 행장에 대한 자료정리의 중요성을 느끼고, 태어나신 생가에서부터 행적을 더듬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스님의 조카 되시는 분에게서 스님께서 생전에 보시던 책을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책들을 뒤지다가 스님께서 손수 적어 놓으신 책 목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책 제목을 열거해 보면, 행복론·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7대 철인전·민약론·남화경·근사록 ·하이네시집·신구약성서·자본론·유물론 등등 70여 권의 책이었습니다.

성철의 돈오돈수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가 삶 속에서 철저한 논리적 사유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의 떠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철이 화엄과의 단절적인 입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엄 교학 자체를 부정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화엄교학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것의 뛰어넘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성철은 일제시대와 해방이후 분단과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변혁과 혼란의 시기를 살다 갔다. 구한말 불교계는 조선의 억불상황 속에서 종단의 형태조차 희미해진 상황에 처했었다. 식민지 상황 속의 불교계는 피폐해진 불교교단을 다시 새우는 일과 친일불교의 식민성을 극복하는 일과 불교근대화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해방이후 한국사회는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의 도전과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불교계는 분쟁과 분열의 과정을 겪었으며, 이러한 와중에서 한국불교의 주도권은 비구 중심의 조계종이 차지했다. 이 일련의 근현대한국불교사의 중심에 성철로 대표되는 선지식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는 종교에 있어서 세속화를 의미한다. 서양의 기독교의 종교개혁이 그러했고, 일본의 불교 근대화가 그러했다. 중국은 공산주의 상황에서 문화혁명을 겪었다. 한국의 불교는 이러한 보편적인 근대화의 과정에서 보면 중세의 복고적 가치의 부활로 설명될 수 있다. 세속화란 이성적 사유와 개인적 욕망에 대한 긍정을 말한다. 서구 기독교의 출현에서 보듯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도 변하기 마련이다.

한국사회가 성철과 간화선 사상에 빠져든 것은 종교사의 흐름에서 보면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어쩌면 일제 식민시대와 분단이데올로기 그리고 군사독재 상황 속에서 한국 사회는 종교의 세속화를 용납하지 않고, 종교가 가지는 성(聖)스러움의 본질을 추구하도록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근대 간화선을 뿌리 내리게 한 것은 경허와 용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현대 한국불교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는 원동력은 1947년 성철과 청담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의 법대로 살자’는 것을 모토로 한 문경 봉암사 결사와 효봉과 구산으로 이어지는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제2 정혜결사 운동이다. 해방이후 분단과 독재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대처와 비구의 분쟁 속에서 성철은 비구가 중심이 된 선 수행 종단을 세워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의식에 투철했다. 해방이후 초기 불교계는 지금처럼 비구가 중심이 아니라 대처가 중심이었다.

선(禪)이 중심이 아니라 교(敎)가 중심이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비구 중심의 조계종단이 주도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성철은 이렇게 출발하는 비구 종단을 이끌어가는 중심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간화선 수행을 통하여 선지식으로서의 모범을 보였고 그를 통해 대중으로부터 확고한 존경과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한국불교의 법맥》, 《선문정로》, 《본지풍광》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출현한 것이다.

성철이 간화선사로서 화엄에 대해 드러낸 입장은 부정적이다. 지해(知解)를 조장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화엄’이며 ‘교학’이라고 판단한다. 화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대신 한걸음 더 나아가 지눌의 돈오점수사상을 비판의 중심에 세운다. 화엄사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선문의 이단사설로 취급되어 진다. 한국의 선사상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지눌을 비판의 대상에 올려놓고 선수행자들에게 더욱 철저하고 엄격한 수행을 강요한 것이다.

지눌이 아닌 부처님과 조사들의 경지를 수행의 현실적 목표로 삼게 만든 것이다. 그만큼의 엄격한 수행을 통해서도 한국불교는 제자리를 찾기 힘들다는 성철의 불교계에 대한 인식과 내면적 고뇌를 돈오돈수사상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화엄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선문정로》의 서언에서부터 성철의 이러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지해(知解)는 정법(正法)을 장애하는 최대 금기이므로 선문(禪門)의 정안조사(正眼祖師)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에서 지해종도(知解宗徒)라 하면 이는 납승(衲僧)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은 이렇게 가공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해를 쫓는 무리들은 바로 화엄을 포함한 교가(敎家)를 말하는 것이다. 알음알이를 통해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를 수 없으니 그 길을 따르는 납자는 이미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성철은 ‘알음알이(知解)=화엄=돈오점수’를 등치시키고 이를 한꺼번에 비판한다. 이는 지해의 병통을 지적하는 지눌의 방식과 사뭇 다르다. 지눌은 화엄에도 알음알이를 벗어나는 길이 있음을 주장하는 교가의 주장을 들어주고 그것을 다시 논리적으로 논파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눌의 《간화결의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론 이(화엄에서 말하는) 뜻과 이치(義理)가 비록 가장 완전하고 오묘한 것이지만, 결국은 식정(識情)에 의해서 듣고 이해하여 헤아리는 것이므로, 선문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경절문(徑截門)에서는 불법을 이해하는 지해(知解)의 병통이라고 하나하나 모두 버리는 것이다. 무자 화두는 하나의 불덩어리와 같아 가까이 가면 얼굴을 태워버리는 까닭에, 불법에 관한 지해(知解)를 둘 곳이 없다.

그래서 대혜선사(大慧禪師)는‘이 무자는 잘못된 앎과 지적인 이해(惡知惡解)를 깨뜨리는 무기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깨뜨리는 주체(能破)와 깨뜨려지는 대상(所破)을 구별하고 취하고 버리는 견해가 있다면, 이것은 여전히 말의 자취에 집착하여 자기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어찌 뜻을 얻어 다만 화두를 드는 사람이라고 이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지눌이 지해를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경절문(徑截門)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하였지만, 화두를 통하여 지해의 병통을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면에 있어서 성철과 지눌의 견해는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성철은 지눌이 이와 같이 《절요사기》와 《간화결의론》을 통하여 지해의 병통을 여러 곳에서 지적하였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해종도라는 올가미를 쉽게 풀어주지 않는다. 《선문정로》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解悟)인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문의 최대의 금기인 지해(知解)임을 명지(明知)하였으면 이를 완전히 포기함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선문정전(禪門正傳)의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은 추호의 지해도 이를 불조(佛祖)의 혜명을 단절하는 사지악해(邪知惡解)라 하여 철저히 배격할 뿐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지해를 권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조는 규봉(圭峯)의 해오사상(解悟思想)을 지해라고 비판하면서도 절요(節要)·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등에서 해오사상을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러니 보조는 만년에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문이 아님은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원돈사상을 고수하였으니 보조는 선문의 표적인 직지단전(直旨單傳)의 본분종사가 아니요, 그 사상의 주체는 화엄선이다. 선문은 증지(證智)임을 주장한 결의론의 결미에서 원돈신해인 참의문(參議門)을 선양하였으니, 보조의 내교외선(內敎外禪)의 사상은 여기에서도 역연하다.

위의 성철의 입장을 종합해 보면 간화선의 최대의 금기사항은 지해이며, 화엄의 원돈신해는 지해를 표방하기 때문에 선문의 바른 입장은 지해를 표방하는 이러한 화엄사상과는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지눌은 화엄의 원돈사상을 고수하고 있으니 결국 내교외선(內敎外禪)이며, 화엄선의 주창자라는 것이다.

성철이 간화선을 정초하면서 삼은 제1 명제는 ‘불교 수행의 목표는 구경각·증오이며, 그 최대의 장애는 알음알이(知解)다. 그리고 알음알이의 장애를 무찌를 수 있는 최대의 무기가 바로 화두 참구를 통한 간화선이다’ 라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지눌의 입장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어느 누구도 이러한 명제에 대하여 쉽게 공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성철의 주장에서는 논리적인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 지해와 화엄과 돈오점수를 등치시키고 이를 자신의 설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해와 화엄을 등치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논리체계가 필요하다. 또 화엄과 돈오점수를 등치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논리체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확실히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눌의 사상 속에서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과 경절문과는 다른 사상체계라고 전제한다. 즉 지눌의 사상체계 내에서 경절문은 제외시키고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 만을 지눌의 사상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해오와 증오의 구분을 통해 이해하면, 돈오점수의 돈오가 구경각이 아닌 해오에 해당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해오(解悟)와 지해(知解)와 해애(解碍)를 등치시키는 것은 또 다른 주장이다. 이 또한 논리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차이는 그 강조점을 수행의 출발에 두는가, 수행의 도착점에 두는가 하는 문제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질문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화엄사상은 꼭 지해의 장애에 걸리고 구경각에 이를 수 없는가?’
‘돈오점수 사상과 지눌은 지해의 장애를 묵과하고 구경각을 목표로 하지 않는가?’
또 ‘지눌의 사상 속에서 돈오점수와 간화선이 모순관계에 있고, 전기와 후기 사이에 사상이 변한 것인가?’

우리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에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 박성배 등이 이미 지적 한 것처럼 지눌과 성철의 수행법은 흡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지눌: 교리학습(불경공부)--> 돈오(해오)--> 점수(만행겸수, 용맹정진)--> 증오
성철 : 백일법문, 삼천배, 불경, (지눌의 해오(돈오)에 해당하는) 어떤 계기--> 간화(삼관돌파)--> 구경각[증오, 성철의 돈오]

따라서 돈오점수가 해오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또 돈오돈수 사상이 자비행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공감을 얻긴 어렵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모두 혜능이 단경에 밝힌 돈오(頓悟)를 강조하고 있다. 더군다나 돈오점수가 북종 신수의 점수(漸修)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보조 사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성철은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화엄과는 단절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진의가 과연 어디에 있었으며, 지금의 우리에게 성철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우리가 풀어야할 문제이다.

간화선과 화엄, 단절을 넘어 회통으로

지눌과 성철과는 다른 시대적 상황에 도래해 있다. 지눌처럼 강성한 화엄종단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성철처럼 일제불교의 잔재를 의식할 필요도 없다. 간화선은 이제 한국불교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간화선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지금 한국의 간화선은 그것을 감당할 힘이 있는 것인가?

성철이 산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차이가 있다. 더 이상 한국사회는 승가에게 엄격한 성스러움을 강요하지 않는다. 군사정권의 종식과 합리적 사회 여건은 승가를 통한 대리 만족을 필요치 않는다. 자기의 수행과 변화에 더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정보화 사회 속에 자라난 신세대에게 끝없는 인내를 강요하는 것은 어렵다. 신비와 권위의 모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성철이 살던 시대와는 분명 다른 환경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화엄을 비롯한 교학과의 단절과 간화선만이 구경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엄격한 기준은 간화선의 우월성과 그 목표를 분명히 한 점에서는 강점이지만, 그 강점이 최대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 구경각이란 목표를 분명히 하였기에 아무도 간화선에 이의를 달 수 없지만, 그 만큼 선지식이 갖추어야 하는 기준은 엄격해 진다.

성철이 제시한 기준으로 보면 간화선을 지도하는 선지식은 동정일여, 몽중이여,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야 한다. 또한 임제의 정맥을 이어 받은 명안종사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통과한 선지식이 있어야 목숨을 내맡길 수 있다. 자나 깨나 한 점의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 오매일여의 경지가 인간의 몸을 뒤집어쓰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현실적으로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돈오점수 체계에서 구경각은 가능성과 지향성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현재적인 완결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며 더군다나 돈오돈수를 통한 간화선의 대중화란 현실적으로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생활화 세계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출가 승려만이 아니라 재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가능하고 솔직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성철이 말한 돈오돈수를 그대로 믿고서 간화선을 수행하려는 사람들은 명안종사를 찾아 가려 할 것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명안종사를 쉽게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스스로의 수행의 길에 들어서고 자기 수행의 점검기준은 차선책으로 경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인 경전과 선어록에 의지하여 스스로 점검하는 풍토에서는 참구가 아닌 참구를 위한 참의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런데 돈오점수를 기치로 세워 돈오에 입각한 닦음을 강조하고 구경각을 목표로 삼게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직 구경각을 이루진 못했어도 수행에 철저한 선지식이 간화선을 지도할 수 있다. 조사어록과 화엄사상 등을 통하여 구경각의 경지를 객관화 하여 사선과 광선으로 치닫는 폐단도 예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중은 돈오돈수를 추종하고, 그토록 돈오돈수를 주장하던 선지식은 돈오점수를 선택하는 상황이 전개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문제가 아니라, 간화선과 화엄과의 관계 나아가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한 정립문제가 한국불교계에 던져져 있다.

간화선을 체계화한 대혜 종고의《종문무고(宗門武庫)》에는 이통현의 화엄론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타나 있다.

도생(道生)·승조(僧肇)·도융(道融)·승예(僧叡)는 구마라즙(鳩摩羅什)의 훌륭한 제자로서 사의보살(四依菩薩)로 불리웠다. 그러나 일찍이 구라마즙과 함께 《유마경(維摩經)》에 주석을 붙이다가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에 이르러 모두 붓을 놓고 말았다. 아마도 이 경계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었기에 한 마디고 붙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장자(이통현)의 화엄론(華嚴論)은 화엄법계에 들어가서 문장을 해석했기에 마치 해와 별처럼 명백하고 얼음 녹듯 의심이 없다. 몸소 확연한 인연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간화선과 화엄과의 관계에 대한 보조 지눌과 퇴옹 성철의 두 입장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처한 불교계의 현실 속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아마도 대혜 종고의 마음속에 이통현이 있었듯이, 성철의 마음속에 지눌이 그렇게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어리석은 우리들이 말의 그물에 갇혀 서로 갈라놓고 하나를 선택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간화선과 화엄교학과의 관계가 단절을 넘어 회통으로 나아가기를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김방룡
조계종 불학연구소 상임연구원 .보조사상연구원 기획실장. 전묵대 철학과 원광대 불교학과 졸업. 저서 <한국의 사상가 10인 - 지늘>(공저) 외 논문 ‘보조 지눌과 태고 보우의 선사상 비교’ ‘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고찰’ ‘여말 삼사의 간화선 사상과 그 성격’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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