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욱 서울대학교 강사

지난 해 가을 동화사 담선법회가 간화선을 진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올가을에도 간화선 국제 학술대회가 예정되어 있다. 근래 여러 학회에서도 간화선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으며 간화선을 주제로 한 단행본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최근 한국 불교계의 화두는 가히 간화선이라 할만하다.

간화선이 한국 불교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눌(知訥 1158~1210)이 《대혜어록》 속 대혜(大慧 1089~1163)의 말을 보고 대오각성하면서 간화선을 소개한 이후, 혜심(慧諶 1178~1234), 경한(景閑 1298~1374), 보우(普愚 1301~1382), 혜근(慧勤 1320~1376) 야운(野雲 ?~?), 휴정(休靜 1520~1604), 경헌(敬軒 1544~1633), 긍선(亘璇 1767~1852), 경허(鏡虛 1849?~1912), 성철(性徹 1912~1993)등 한국 불교의 종장들은 모두 간화선을 수행하라고 가르쳤다.

이렇듯 한국 불교계는 돈오를 위한 첩경으로 간화를 계승해 왔으며, 간화선은 정통성을 보증하는 기준으로 인정받아 왔다.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조계종단이 간화선만을 유일한 수행법으로 인정했다1)는 점을 상기하면, 간화선이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라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간화선에 대한 연구물은 결코 적지 않다. 그 대부분은 간화선을 선수행 방법론으로 한정하여 조망한 것이다. 특히 한국 학계의 연구물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곤 이 부류에 포함된다. 이렇게 된 연유는 아마도 한국 불교 수행론에서 간화선이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일 것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학자의 직업병은 의심병이라 했다. 학문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고 천생 우치무문범부를 자처한 이상, 의심은 제 2의 천성이 되었다.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가 남긴 어록과 대혜의 연보, 당시 대혜와 관련된 역사서를 읽다보면 몇 가지 의문이 들곤 한다. 한국 불교에 전해져 내려오는 간화선과 《대혜어록》의 간화선은 과연 전적으로 일치하나? 현실 속 간화선의 모습은 대혜 간화선의 정신에 부합할까? 그런 의문이 논의의 출발이다.

간화선 연구의 현황

현대의 연구들은 대혜의 의도와 대혜 간화선의 진면모를 밝혀내고 있을까? 지금까지 대혜의 간화선은 주로 선 수행론의 지평에서 연구해 왔다. 이 관점에서 연구한 주제가 대혜의 묵조선 비판과 ‘무자(無字)’공안이다. 이 중 묵조선 비판에 관한 연구는 간화선과 관련한 연구물 중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한다. 이런 연구 경향에 따라 간화선은 묵조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수행법이라는 상식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무자’공안에 관한 연구에서는 대혜가 제시한 간화선의 유일한 화두는 무자공안이라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

대혜가 묵조선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며 묵조선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수행법이 간화선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문헌에는 묵조선을 비판한 내용보다도 문자선과 사대부의 경전공부 등의 문자공부, 공안을 절대시하는 사이비 공안선과 분석적 사고를 비판한 내용이 훨씬 많다. 따라서 《대혜어록》에 나타난 그의 문제의식은 비단 묵조선 비판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혜는 ‘무자’화두 외에 분별적 사고와 문자공부로 인해 공부가 정체된 사대부에게 “마른 똥 막대기(乾屎) 화두를 붙잡아라”고 권고한 적이 있다.2) 나아가 그는 1141년(紹興 53세) 형양(衡陽, 湖南省)에 유배되었을 때 선종 각파 조사들의 상당(上堂)과 시중(示衆)에서 고칙공안(古則公案) 661칙을 추출하여 평창(評唱)과 착어(着語)를 붙였었다. 1141년은 대혜가 형양에 유배되었을 때이다.

이 때 그는 문자공부, 사이비 공안선과 분석적 사고 등 당시 학계의 병폐를 시정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 661칙을 1147년에 제자들이 편찬한 것이 유명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이다. 대혜가 ‘무자’공안만을 간화선의 유일한 공안으로 제시했다면, 그가 20여 가지의 공안을 제시했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661칙을 선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무자공안만이 자기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고 여타의 공안은 외부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역시 흔쾌히 동의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대혜에 따르면 외부에 대한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은 간화선에서 요구하는 의심이 아니고, 단 하나의 거대한 의심에 의해 소각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른 똥 막대기’ 화두로 하나의 의심을 타파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대혜가 제창한 간화선은 묵조선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수행법이고 ‘무자’공안만이 간화선 수행의 공안이라는 관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런 유형의 연구는 간화선이 선불교 수행론 발전에 차지하는 의의를 발굴해 내었으나, 시야를 축소했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닌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간화선을 제시한 대혜의 문헌에 나타난 그의 문제의식과 활동시기가 동아시아 종교와 사상 발전에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대혜에 의해 간화선이 완성된 시점도 남북송(南北宋)교체기이며, 유학이 학술적으로 정제되어 성리학이란 형태로 발전된 시점도 바로 그 시기이다.

이 때 불교계와 유학계는 서로 극렬하게 비판하면서 서로를 모방하고 흡수하여 학술적으로 세련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 시절 선불교와 유학의 관계는 ‘대립물의 통일’이라 할 수도 있고, ‘적과의 동침’이라 할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마치 상대를 증오하면서도 매혹되는 애증의 수렁에 빠진 연인이었던 것이다.

대혜가 남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면면은 선사보다도 사대부가 주류를 이룬다. 《대혜어록》, 《속전등록(續傳燈錄)》, 《나호야록(羅湖野錄)》, 《운와기담(雲臥記譚)》, 《총림성사(叢林盛事)》, 《오등회원(五燈會元)》등의 문헌에는 대혜와 관련된 인사 총 135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중 관직명이 명시된 인사는 76명이고, 선사나 거사 등 관직명으로 등록되지 않는 인물이 59명이어서 최소 전체의 56.3%가 관직자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중 관직명이 기재된 인사와 거사를 합치면 87명이어서 64%가 士大夫인 셈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가 사대부와 많은 교류를 했음은 분명하다.

특히 대혜가 원오(圓悟 1063~1125)를 만나는 데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장상영(張商英 1043~1122), 대혜에게 ‘임제(臨濟)의 재흥’이라는 칭호를 얻게 해 주었으며 비명을 써 준 장준(張浚 1086~1154), 주희(朱熹 1130~1200)에게서 “학문이 근본부터 말단까지 스승 대혜로부터 받은 것이다”3) 라는 평가를 받는 장구성(張九成 1092~1159), 그 외 왕응진(汪應辰), 여본중(呂本中)은 당시 최고위 관리이자 정치계의 거두였으며(and/ or) 학술계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장상영을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주전파이면서 도학계열에 속한다.

더욱이 “사대부 가운데 이 책(대혜어록)을 읽고 깨친 자가 많았다”4) 라는 기록이 있고, 재상을 지낸 장준이 대혜의 제사를 직접 지냈으며, 주희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장도를 떠나면서 짐 속에 《대혜어록》 한 질만을 지녔다5)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혜와 그의 간화선이 사대부에게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일찍이 주희는 간화선에 대해 “무릇 독서하고도 글의 속뜻을 구하지 않고 깊이 탐색하고도 의견이 도무지 없다는 것이 바로 근년에 불교 쪽에서 말하는 간화이다”6) 라고 비평했고, 대혜를 ‘선가의 협객’7) 이라고 경계했다. 주희의 이와 같은 말은 대혜가 사대부들에게 끼친 영향이 어떠했는지를 웅변한다.

대혜는 사대부 문화에 친숙했고 유학의 지향을 체득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대부 가문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었다. 이에 따라 그의 법어나 시중 그리고 서간문에는 사서삼경으로 대표되는 유학 경전과 《노자》, 《장자》등의 도가 문헌이 빈번하게 인용되어 있으며, 왕필(王弼 226~249),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소식(蘇軾 1037~1101) 등 역대 중국 지성이 거론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직시하고 간화선을 온전히 이해하려 한다면 보다 너른 시야에서 조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대혜의 문제의식과 간화선의 정신

대혜가 이른바 신비궁(神臂弓) 사건으로 유배(1141, 紹興 13년, 55세)되어 사면된(1156) 지 3년이 되는 해(1159), 그는 사대부 이대성(李大性)에게 “학자들이 옳지 못함을 버리고 옳음에 돌아가게 한다”는 취지의 법어8)를 했다. 이는 그가 1134년(紹興 4년, 46세) 민중에 거주할 때 공부하는 사람들이 잘못 공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옮음과 옳지 못함을 판정하는 글(辨正邪說)〉9)을 쓴 지 25년 후의 일이다.

적어도 46세 때부터 71세 때까지, 그는 이러한 문제를 심히 우려했고 시정하려 분투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두 글의 요지는 “옮음과 옳지 못함을 판정하여, 학자들이 옳지 못함을 버리고 옳음에 돌아가게 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대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진단한다. “근년 이래 이 도를 공부하는 사람이 흔히 근본(本)을 폐기하고 말단(末)을 추구하면서, 옳음(正)을 배척하고 옳지 못함(邪)에 투신한다.”10) 문제는 여기에 있다. 많은 연구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대혜가 비판하는 대상이 묵조선이나 묵조선 계열의 선사에 한정될까?

여러 연구에서 인용되는 다음의 구절에 그 해답의 첫 실마리가 있다. “오늘날 도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두 가지 병에 심각하게 걸려 있다. 그 하나는 말과 글귀를 너무 배워 그것을 근거로 기묘한 생각을 하는 병이다. 다른 하나는 달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버리지 못하고 말과 글귀에서 깨달음에 들어가려 하면서도, 불법과 선의 도는 말과 글귀에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서는 모두 폐기하고 줄곧 눈을 감고 죽은 체 하는 병이다.

말하자면 ‘조용히 바로 앉아 마음을 관찰하는 고요히 비추기’라는 것이다. 이 사악한 견해로 무식하고 용렬한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말하기를, ‘하루 종일 고요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루의 공부이다’라고 한다. 안타깝구나. 정녕 알지 못하겠는가? 이 모든 것이 귀신 집의 살림살이처럼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 두 가지 심각한 병을 제거해야 비로소 배울만한 바탕을 지녔다고 할 만하다.”11)

많은 연구들이 이 구절을 대혜의 묵조선 비판의 전거로 끌어 왔다. 이 구절에 대혜가 묵조선을 비판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혜가 비판한 대상이 묵조선만일까? 분명히 대혜의 문제의식은 불교계(僧) 뿐만 아니라 속인(俗)을 포함한 학계 전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혜가 본 학계 전반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언어에 집착하는 태도와 언어를 거부하는 태도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불교계를 포함한 송대 학계에 만연한 병폐였다. 불교계의 문자선과 공안선 그리고 유학의 문장학과 훈고학이 하나의 유형이고, 조동종의 묵조선이 다른 하나의 모델이다.

그렇다면 대혜는 당시 학계의 병폐를 시정하기 위해 어떤 방책을 내놓았을까? 1138년(紹興 8, 50세) 임안(臨安) 경산사(徑山寺)에서 대혜는 도를 공부하다가 지적 능력과 지식 축적이 장애가 되어 학문이 정체된 사대부에게 9개 항목의 금기사항을 제시했다.

㉮ ① 마음을 보전함으로써 해결하기를 절대로 기다리지 말라.
㉯ 다만 망상으로 뒤집어진 마음과 따지고 분별적으로 사고하려는 마음과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과 지식과 견문으로 이해하려는 마음과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한꺼번에 내려놓고, 다만 그 자리에서 나아가 화두를 잡아라.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는 “무(無)”라고 대답했다. 이 한 글자야말로 허다한 나쁜 지각을 없애는 무기이다.
㉮ ② “있다(有)”와 “없다(無)”라는 [이분법적 형식논리]로 사고하지 말라.
③ 도리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말라.
④ 의근에 따라 분별적으로 사고하지 말라.
⑤ 눈썹을 휘날리고 눈을 깜박이는 상황에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⑥ 언어 위에서 살길을 찾지 말라.
⑦ 활동이 없는(無事) 껍질 속에 휩쓸리지 말라.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알려고 하지 말라.
⑨ 문자를 인용하여 증명하지 말라.
㉰ 하루 종일 행주좌와 언제나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無(없다)”라는 [화두를] 붙잡고 깨달으려 하라.
㉱ 일상의 현실을 떠나지 않고 이렇게 공부해 나가기를 한 달 열흘에 저절로 알아낼 수 있으니, 한 군의 사방 천리의 일이 어느 것도 막힘이 없을 것이다. …… 일상의 현실을 떠나서 따로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물결을 떠나서 물을 찾고 그릇을 떠나서 금을 찾는 것과 같다. 찾으면 찾을수록 멀어진다.12)

대혜는 사대부 부직유(富直柔 ?~1156)의 공부 병폐를 계도할 목적으로 이 글을 썼다. 이 글 속의 아홉 가지 금기 사항은 후에 지눌, 혜심, 휴정을 거치면서 그 내용을 한두 개씩 첨삭한 채, 한국 불교계에 소개되었다. 위의 글과는 달리 지눌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는 ①이 빠진 대신 “진실로 없다는 없음(無)인가라고 헤아리지 말라(不得作眞無之無卜度)”와 “미혹된 마음으로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不得將迷待悟)”가 추가되어 있다.13)

또 혜심의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14)과 휴정의 《선가귀감(禪家龜鑑)》15)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른 바 간화 십종병(十宗病)이다. 이들 문건들은 옳지 않은 선 공부의 문제점을 척결하기 위해 대혜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위의 아홉 가지 조목 중, ⑦ “활동이 없는 껍질 속에 휩쓸리지 말라”는 묵조선의 본성보존 공부를 지적한 말이면서 묵조선에 경도된 사대부의 현실도피 경향을 겨냥한 말이다. 대혜는 조동종 계열의 선사들이 청정한 본성을 지키기 위해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하면서 좌선에 몰두한다고 보았고, 이를 비판한 것이다.

그는 묵조선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본성을 자연스레 발휘할 것을 주문했다. 왜냐하면 청정한 본성은 이미 외부와 소통하고 있으며 본성이 외부와 소통한다는 전제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혜가 볼 때, 《육조단경》의 자성 청정과 정혜(定慧), 그리고 마조(馬祖 709~788)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진정한 의미는 일상생활에서의 발용이다. 적어도 대혜의 견지에서는 수렴과 발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본래 청정성이라 할 수 있으며, 수렴 공부와 발용 공부를 동시에 함께 진행시켜야만 진정한 공부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본다면 조동종의 묵조선처럼 내부 청정성을 강조한 나머지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하고 내부로 수렴시키기만 하는 공부는 공부라 할 수 없고, 그런 본성은 설혹 그것이 본성이라 칭해진다 하더라도 생명력 없이 고체화된 본성이어서 본성일 수 없다.

한편 대혜는 여러 차례 사대부들이 책임의식을 방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기 위한 해방구로 묵조선을 공부한다고 비판했었다. 대혜는 “오늘날 도를 배우는 선비들은 대부분 한가하게 앉아서 줄곧 머물기만 한다”16)고 통탄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대혜는 그렇게 된 병인을 안일하게 공부하는 사람과 사이비 선생 양측에서 찾는다. “종종 사대부 중에는 총명하고 영리한 자질에 휘둘리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흔히 시끄러운 상황을 싫어하다가 옳지 못한 법사 무리가 정좌를 제시하는 것에 쉽사리 경도된다”17)는 말은 이런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옳지 못한 법사 무리는 누구일까? 바로 묵조선을 설교하는 무리이다. “옳지 못한 법사 무리가 묵조선을 설교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아무 일에도 관여하지 말고 쉬고 그치라고 가르친다”18)

라는 대혜의 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실제로 대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이비 선생이 사대부와 선사를 오도한다고 이렇게 통탄했었다. “보통 사람은 천명이 깃들어 있는 곳을 몰라서 다른 사람들을 불구덩이에 넣기를 좋아한다.”19) “사람들로 하여금 줄곧 삶을 허무하게 만들고 함부로 죽게 한다.”20) 말하자면 대혜는 묵조선의 폐해를 “호랑이 귀신”21)이 “마구 지껄이고 도를 어그러지게 하면서”22) “사람들을 땅 구덩이에 파묻는 것”23)이고, “장님 한 명이 장님 무리를 이끌고 불구덩이에 강제로 끌어들이는 것”24)라고 극언한 것이다.

이렇게 대혜는 학자들이 묵조선에 경도되어 수렴 공부에 몰두하는 세태를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명은 학자들의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말했고, “내가 구업 짓는 것을 꺼리지 않고 힘써 이러한 폐단을 구제해 왔더니, 이제 그 잘못됨을 아는 자가 더러 있게 되었다”라고 자부했던 것이다.25)

결론적으로 대혜가 묵조선을 비판하는 의도는 묵조선 수행법 자체의 오류를 공격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묵조선을 가르치는 조동선 계열이 다른 사람을 오도하고 사람들이 그에 휘말리는 세태를 우려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묵조선을 가르치는 조동종 계열의 선사를 극렬히 비판했다. 그렇지만 그가 절박하게 비판한 취지는 학자들이 묵조선에 경도되어 선과 유학의 근본정신을 망각함을 시정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의 글에서 ② “있다와 없다라는 논리로 사고하지 말라”, ③ “도리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말라”, ④ “의근에 따라 분별적으로 사고하지 말라”는 사유 능력을 과신하면서 분별적으로 사고하는 사조에 대한 우려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런 사조는 북송대의 문자선과 유학에 일반적으로 내재한 경향이었다. 실제 대혜는 사대부를 “총명하고 영리한 자질로 분별적으로 사고하는 자”26) 라고 정의하면서, 원리에 입각하거나 이분법적 논리로 사고하는 것이 사대부 공부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했었다.

또 ⑥ “언어 위에서 살길을 찾지 말라”와 ⑨ “문자를 인용하여 증명하지 말라”는 문자선의 언어종속 경향을 비판한 것이자 사대부가 경전에 의존하여 다독하고 경험적 지식을 축적하는 경향 즉 문장학과 훈고학의 병폐를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알려고 하지 말라”는 화두 참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화두를 분석하는 경향을 지적한 말이다. 이런 지적들은 모두 북송대부터 만연한 문자선과 공안선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대혜의 묵조선 비판으로 알려진 위의 글은 묵조선 비판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위의 아홉 가지 항목은 송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묵조선, 문자선, 공안선에 내재한 문제점을 지적한 말이면서, 송대 유학계를 대표하는 문장학, 훈고학, 성리학에 내재한 문제점을 경고하는 말임과 동시에, 그런 문제점을 유발하는 학자들을 계몽하기 위한 말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대혜가 위와 같이 학문 일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이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제시한 공부가 간화라는 사실이다. ㉯에서 대혜는 전통적으로 선불교에서 금기시하는 망상으로 뒤집어진 마음과, 문자선, 공안선, 문장학, 훈고학의 문제점인 분별적으로 사고하려는 마음과 지식과 견문으로 이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묵조선과 현실도피적인 사대부 공부의 문제점인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척결할 것을 권고한다. 척결의 방법으로 대혜가 제시한 치유책은 바로 간화이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사항은 이 진단과 치유책이 사대부에게 쓴 편지(〈답부추밀 答富樞密〉)에 실려 있다는 점이다. 편지의 수신자인 부직유는 추밀원 지사(樞密院 知事)를 지냈으며 진회(秦檜 1090~1155)의 시기를 받아 파직된 주전파 도학자이다. 이런 점에서, 대혜가 간화를 제시하면서 염두에 둔 대상은 사대부를 포함한 학자 일반이며 그가 말하는 아홉 가지 조목은 학문 일반에 관한 준수사항이라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글 속의 아홉 가지 조목은 선 공부의 방법과 지향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학문 일반의 방법과 지향에 관한 대혜의 지침이라고 할 만하다. 대혜는 묵조선만을 겨냥하지 않았고 사대부의 공부를 포함한 송대 학문의 폐단을 우려하면서 이를 치유하려 했으며, 그 대안으로 간화선을 제시했다 할 수 있겠다.

행주좌와와 간화선

간화 공부가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나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 간화 공부는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나 시행되고 있을까? 또 여기서 말하는 일상생활은 무엇을 의미할까?

㉰와 ㉱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간화는 하루 종일 행주좌와 언제나 실시되어야 한다. 대혜는 이렇게 권고한다. “현실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을 따져보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억지로 그것을 제거하려 하지 말라. 다만 따져 보는 상황에 나아가 부담 없이 화두를 굴려라. 그렇게 한다면 얼마든지 헛된 노력을 덜 수 있고, 무한히 힘을 얻을 수 있다.”27) 이 대목 역시 현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실천을 외면하는 송대 학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간화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대혜가 말하는 행주좌와의 외연은 어디까지일까? 대혜는 일상에서 실행해야 하는 모든 활동 자체가 공부하는 시공간이라고 본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조용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에 한정될 수 없고, 조용한 곳과 시끄러운 곳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공부의 내용 역시 현실의 일상생활과 사고 활동하는 모두를 포함한다.28)

바로 이런 생각이 담긴 구절을 보고 지눌은 대오각성한 것이다.29) 다른 말로 대혜와 그의 간화선이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바탕에는 대혜의 이와 같은 철학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대혜는 공부를 통해 얻는 궁극적 경지는 현실과 격절된 적정의 경지를 얻었을 때가 아니라, 현실의 일상생활에서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조작과 강제가 없이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낄 때 얻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30)

대혜가 제시하는 일상생활에서의 활동에는 선사와 사대부를 포함한 문화인이 학문하면서 수행해야 하는 공부과제가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중 불교적인 내용으로는 성불하고 조사가 됨, 조용히 좌선함, 생사의 문제에 초탈함이 예시되어 있고, 유학적인 내용으로는 가정과 가문에서의 직분 수행, 사회적 교류와 사회적 직분 수행이 모두 포함된다.31) 특히 사회적 직분 수행은 정치참여로 구체화되고, 정치참여는 정치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개입을 의미한다. 대혜가 유배에서 해제된 다음 해인 1157년(69세) 아육왕사에서 보낸 편지에서 이런 내용을 알 수 있다.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이 가르침을 널리 펼쳐 임금이 어진 이를 등용하여 천하를 편안케 하고자 하는 뜻에 보답한다면, 진실로 그대가 아는 바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바라건대 벌어지는 일을 감당하고 견디어 내어, 끝까지 지금처럼 일을 수행해 나간다면, 불법과 세간법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다. 한편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한편으로 농사지으면서 불법을 오랫동안 익힌다면,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다 하는 것이다. 어찌 허리에 십만 관을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 고을의 관리가 됨이 아니겠는가?”32)

놀랍게도 선사 대혜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까지도 수행이라고 주장한다. 선사가 대중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라고 촉구하고 전쟁 참여도 일종의 수행이라고 규정하는 태도는 참으로 충격적인 사실이다. 불교의 전쟁참여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대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쟁을 종식하고 인권유린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전쟁 참여이다. 여하간 대혜는 분명 방어전쟁을 포함하는 정치의 장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대혜는 말 그대로 일상 현실의 모든 조건이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며, 일상 현실에서의 모든 대응 활동이 수행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대혜는 일상 현실 속에서의 진리 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세간의 현실적 모습을 무시하지 않고 실상에 대해 담론한다. 그리고 이 진리는 법위(진리 차원)에 있으면서도 세간의 현실적 모습에 상주한다.”33) 일상 현실에서의 공부는 일상 현실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다. 사대부가 수행할 일상생활에서의 공부와 선사의 그것은 다른가?

사대부에게만 일상의 현실사회가 수행의 장소인 것은 아니다. 선사에게도 일상의 현실사회를 벗어난 수행은 독해이다. 선사 대혜는 스스로 세상일에 개입함으로써 선사에게도 일상의 현실사회가 공부의 장소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대혜는 75세 때 남송의 군대가 승전하고 개선하자 승전기념 대중연설을 했다. 연설의 주제는 다음 게송이다. “자욱한 먼지 단번에 씻기니 하늘은 드높고 / 온 천하가 모두 손아귀에 있도다. / 세간 출세간의 모든 일 분명하게 깨치니 / 주인공은 또렷또렷하여 어둡지 않구나.”34) 그는 또 “군주를 사모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지녔다”35)고 술회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대혜는 정치적 사건에 연류되어 유배당했었다.

그가 유배당한 이유는 고종(趙構, 1127~ 1162 재위)과 진회가 주전파 장군 세 사람을 축출한 사건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비궁 사건이다. 그는 선사로써 정치적으로 군주에 대립하여 유배당하는 중국 역사상 희귀한 예의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선사 대혜는 마음공부와 현실 속에서의 공부 즉 현실 개입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마음공부와 현실 개입은 서로 갈등하지 않을까? 그는 마음공부와 현실 개입의 긴장을 이렇게 푼다.

“다만 시끄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대나무 의자와 부들방석에서 공부할 때의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소에 마음을 올곧게 고요히 간직하는 것은 바로 시끄러운 곳에서 발휘하고 적용시키기 위함이다. 만일 시끄러운 곳에서 힘을 내지 못한다면, 마음을 고요히 간직하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36)

“공부가 지극하지 못했으면 공부했다고 할 수 없고, 공부가 지극해도 발휘·적용이 없으면 공부했다고 할 수 없으며, 공부가 사물을 교화하지 못했다면 공부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37) 이 두 말에 따르면, 일상생활에 간화 공부를 하는 것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간화를 통한 마음공부가 전제되지 않은 채, 현실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현실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마음공부는 진정한 공부라 할 수 없다. 간화를 통한 마음공부와 현실에서의 활동은 서로를 요청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돈오선의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는 대혜는 현실문제에 적극 개입했으며 그가 제시한 공부는 현실에서의 활동으로 완성되는 체계이다. 따라서 선불교는 사회적 실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일부의 생각은 조심스레 다시 생각해 봄직하다. 당(唐)의 한유(韓愈 768~824)를 기점으로 송의 주희가 선불교의 대사회 실천 결여를 비판한 이래, 조선의 유학자들은 대부분 이런 관점에 입각했다. 현대의 호우와이뤼, 런지위, 푸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평가가 상식으로 인정되어왔다 하더라도, 대혜와 그의 간화선을 통해 본다면 그런 생각은 치우친 견해이거나 선입관이라 할 수 있다.

대혜가 당시의 불교계와 유학계에 만연한 병폐를 해결하고자 제시한 공부가 바로 간화이다. 대혜는 자기를 점검하는 “마음가짐 바로잡기 공부”를 최우선 과제로 요구했다. 점검의 필수조건인 “확고부동한 의지”와 “하나의 거대한 의심”의 계기가 바로 간화이다. 이 점에서 간화는 마음공부의 첩경이자 자기 성찰의 계기이다. 또 간화는 마음공부 이후에 이어져야 하는 현실에서의 활동을 실행하게 하는 계기이다. 따라서 간화는 대혜가 제시한 공부의 핵심요소이며, 바로 이 때문에 대혜가 제시한 공부를 ‘간화선’이라 부르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대혜의 관심이 묵조선 비판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시각은 협소하기 그지없다. 대혜의 문제의식과 간화선의 본모습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혜어록》을 통독해야 한다. 《서장(書狀)》이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서장》은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대혜어록》을 일독해보면, 그의 시선이 당시에 융성하던 제반 학문과 그런 학문을 하는 학자들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대혜의 본의와 간화선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송대 학계 일반에 대한 연구를 동반해야 한다. 당시에 유행하던 문자선, 공안선, 묵조선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나머지 한편으로는 《육조단경》 및 각 어록의 본성론과 수행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야 하며 각별히 원오의 선에 대한 연구를 우선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훈고학, 촉학(蜀學), 호남학(湖南學), 그리고 정이(1033~1107)에서 주희로 이어지는 정주학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혜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각 분파의 문헌을 인용했고 그 내용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위와 같이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 선사들의 어록에 나타난 간화선의 성격을 비교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원오, 대혜, 지눌, 혜심, 서산, 성철 등 간화선을 발전시키고 계승한 조사의 선에는 그 기본 정신이 유유히 흐르고 있겠지만, 주안점의 차이도 분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노력이 모아질 때만 간화선이 갖는 본디 성격이 알려질 것이며, 간화선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변희욱
서울대학교 강사.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박사. ‘宗密 哲學에서 <知>의 역할과 의미’, ‘禪佛敎의 마음공부와 세상구제- 知訥 ‘勸修定慧結社文’의 한 분석’, ‘사대부 학문 비판을 통해 본, 대혜의 유학적 선’ ‘大慧 看話禪 연구’등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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