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본지 편집위원장

김성철
동국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장
새 정권이 들어섰다. 그 색깔과 노선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앞으로 나라 살림을 책임져야 할 정권이기에 임기 동안 순항(順航)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불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바람직한 국가운영 방안에 대해 조언해 본다.

불전에는 ‘칠불쇠법(七不衰法)’이란 가르침이 있다. ‘나라가 쇠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일곱 가지 국가운영 방안’이라고 풀이된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군주국인 마가다국(Magadha國)의 아자따사뚜(Aj칊tasattu) 왕이 공화국인 왓지연합국(Vajj칕聯合國)을 침공하려 할 때, 왓지국의 장로들이 나라를 보전하는 방안에 대해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묘책을 제시하셨다.

① 정기적으로 모여서 나라의 안녕에 대해 함께 논의한다.
② 나라에 일이 있을 때 즉시 모여서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한다.
③ 전승되는 규범을 어기지 않는다.
④ 노인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⑤ 마을에 사는 여인들을 보호하며, 억지로 끌어다 살게 하는 일이 없다.
⑥ 그들의 나라 안이나 밖에 있는 탑과 묘를 잘 모시며 시주한다.
⑦ 성자와 아라한들을 잘 봉양한다.

한역 경전에서는 이런 칠불쇠법이 왓지국 장로들의 요청으로 베푼 가르침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빨리 경전에는 왓지국을 침공하려 하는 아자따사뚜 왕을 저지하기 위한 가르침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그 내용 역시 판본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어쨌든 위에 열거한 일곱 가지 기준이 한 나라의 흥망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이다. 전통적 주석들을 참조하면서 칠불쇠법을 이 시대의 언어로 풀면 그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⑴ 중지(衆智)를 모아 정책을 결정하며 화합하여 실행한다.
⑵ 전승되는 규범을 철저히 지키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
⑶ 연장자와 조상을 공경하고 전통적 종교의례를 존중한다.
⑷ 도덕성을 갖춘 고결한 수행자를 봉양하고 존경한다.

짐승의 경우 언어가 없기 때문에 중지를 모을 수가 없다. 기러기 떼가 날아갈 때 그냥 선두만 따라갈 뿐이다. 사슴의 무리나 원숭이의 무리는 힘이 가장 강한 수컷의 지시만 그저 따를 뿐이다. 그야말로 소위 ‘영도자’나 ‘선각자’의 명령을 추종함으로써 운영되는 것이 동물의 사회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통치방식 역시 동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어(言語)는 있었지만 언로(言路)가 막혔기에 국가정책과 관련한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은 금지되었다. 소위 ‘영도자’의 한 말씀 한 말씀이 그대로 법이 되어 실행되었다. ‘근대적 법치(法治)’가 아니라 ‘전(前)근대적 인치(人治)’의 시대였다.

과거 인류 역사의 재앙이었던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이 힘의 정상에 설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 방식이 민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칠불쇠법에서 가르치듯이 중지(衆智)를 모아 정책을 결정하며 화합하여 실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토론과 논쟁을 통해 중지를 모을 수 있었기에 제국주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정책’, ‘최강의 정책’을 고안해 내면서 세계 도처의 ‘피식민지’를 잠식하여 결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신화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이란, 찰스 다윈이 발견했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가 사회과학적으로 구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새 정권의 출범을 맞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중지를 모아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정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한반도 대운하사업’일 것이다. FTA와 같은 ‘조약’의 경우에는 앞으로 언젠가 우리에게 해가 된다고 판단될 때 그것을 파기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좁디좁은 강산에 대운하의 ‘상처’가 팰 경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한반도 남동부와 중서부를 연결하는 운하사업은 공사기간 동안 ‘소득 분배를 위한 취로사업’ 정도의 효과는 볼지 몰라도, 그로 인해 초래될 재앙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나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의 건설 목적이었던 ‘항해시간 단축’을 기대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속초와 한강을 잇는 운하를 파서 동해를 떠난 배가 서해로 직항하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한 길인지 중지를 모아야 한다. 한번 뽑은 칼이라고 해도 그것이 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어야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어질고 현명한 지도자일 것이다.

서구 계몽기에 나타난 ‘사회계약이론’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사회든, 정치집단이든, 학교사회든, 종교집단이든 하나의 사회나 집단이 성립하고 존속하려면 그 사회나 집단에서 제정한 약속, 즉 규범이 잘 지켜져야 한다. 한 사회나 집단에서 제정한 규범은 콩가루 같은 개개인을 묶어주는 끈과 같은 역할을 한다. 흔히 얘기하듯이 ‘법치(法治)’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나의 국가가 성립하고 존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법을 위반할 경우 준엄한 처벌이 뒤따르고 법 질서를 잘 지킬 경우 그를 보상하는 이득이 있어야 하며, 준법과 위법을 가르는 법의 잣대는 공명정대해야 한다. 특히 검찰의 자존심과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하고 모든 재판이 신중하고 공평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거대한 계약사회’인 국가는 와해되고 만다. 칠불쇠법에서 ‘전승되는 규범을 철저히 지킬 것’을 권하는 깊은 이유가 이에 있다.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과거 몇 년 전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준법의식을 회고해 보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하나의 국가사회’로서 존속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뇌물과 청탁이 만연한 공무원 사회, 수치심을 잊은 지 오래인 학교에서의 촌지 수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법치에 대한 냉소, ‘전임자 예우’라는 천인공노할 법 관행, 기업인과 정치권력의 음흉한 결탁…. 우리의 현대사에서 나라 전체가 내란에 휩싸일 위험이 적어도 두 번 있었다. 1961년에 발생했던 5·16쿠데타와 1979년의 12·12사태가 바로 그것이었다. 두 경우 모두 군부 내의 반대파와의 교전으로 인해 끔찍한 내란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를 저지한 것은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군사력’이었다. ‘법 질서를 와해한 정의롭지 못한 세력’의 손을 미국이 재빠르게 들어주면서 그 반대세력의 준동을 억제했기 때문이었다.

힘의 우열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는 짐승의 사회에서는 최정상의 ‘하나’ 이외에는 모든 구성원이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또 설혹 정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얼마 후 새로운 최강자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법리와 규범이 무시되고, 금력이나 권력의 서열이 정의(正義)를 대신하는 사회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사회와 다를 게 없다.

언젠가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그 구성원 모두가 불행하다. 그러나 칠불쇠법에서 가르치듯이 ‘규범이 철저히 준수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 내가 권력과 금력의 서열에서 하위로 내려가더라도, 내가 노쇠하여 기력이 떨어지더라도 어느 누구도 나를 함부로 유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상’과 ‘전통종교’가 존중되는 사회는,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가치관과 인생관이 충돌하는 일이 적기에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평화로운 사회이다. ‘재력이나 권력과 같은 동물적 힘을 가진 사람’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도덕성을 갖춘 고결한 수행자’가 존중되는 사회에서는 나보다 상위에 있는 사람이 언제나 나보다 선량하고, 지혜롭고, 자비롭기에 결국은 그 구성원 모두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모든 불전의 가르침이 그렇겠지만, 칠불쇠법의 취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동물적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칠불쇠법의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다. 칠불쇠법은 인간사회를 인간사회답게 만든다. 새로운 정권의 담당자들이 우리 사회의 존속과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반드시 마음 깊이 새기고 구현해야 할 가르침이다. ■

김성철(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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