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불교와 성

불교미술을 통해 성이 표현된 예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다만 현대미술에서 불교적 사유의 세계를 작업의 주제로 삼은 이들의 작업 중에 간혹 성을 직접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다룬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사실 불교란 성과 욕망을 잠재우거나 휴지케 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 헛된 욕망의 무망함을 깨닫고 일체의 번뇌를 소진케 하고자 하는 수양이 바로 불교적 수행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성이 소극적이어야 한다거나 부정해야 하는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불자의 행위를 규정한 것이 불교의 계율일 텐데 그것은 가장 잘 사는 법 즉 살아가는 요령을 일러주고 있다. 그러니까 순간순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매뉴얼인 셈이다. 그런데 이는 어떠한 행동이 죄를 범하는 게 되니까 하지 말라는 식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을 하면 난감한 경우에 처한다는 것,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식의 계율이다. 그 계율에 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대목들이 있음을 읽은 적이 있다.

성과 관련해서 접한 것 중에 하나가 일본의 진언 다치카와류의 수행, 일종의 목숨을 건 수행의 한 예다. 여성 파트너와 승당(僧堂) 안에 틀어박혀 수십 일 동안 계속 섹스를 하는 수행이었다고 한다. 무척이나 괴로운 수행이었을 텐데 해골 모양의 본존을 만들어놓고는 섹스를 한 후에 서로의 체액을 그 본존에 발라가고 그런 식으로 몇 주일 동안 계속 바른 후에 만원(滿願)의 날이 되면, 해골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진언 다치카와류의 수행이라고 전한다. 그러니까 성에 대한 어설픈 욕망 같은 것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그런 수행방식이었던 것 같다. 성에 대한 어렴풋하거나 막연한 욕망을 한 번에 끝장내 버리는 단호함이 깃든 수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일종의 죽음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수행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불교가 좋다〉(동아시아, 2004)에서 접한 ‘석존釋尊과 제자의 섹스 문답집-팔리어 성전 『율장』초역’에는 성에 관한 적나라한 대목들이 적혀있어서 초기 불교에서 성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려준다. 사실 석존은 추상적인 계율을 제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나는 계율을 제정해야 할 시기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의 가르침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을 때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자들 중에서 구체적인 성과 관련된 경험, 체험을 통해 분별을 내려주는 것이었다고 보여 진다. 예를 들어 이런 구절들이 들어있다.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성기를 질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며, 깨 한 톨만큼이라도 들어가면 관계를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언젠가 한 청년이 웁파라반나(연꽃색)라는 여성 수행자에게 사랑을 품었다. 청년은 그녀의 초가에 숨어서 기다렸다가 귀가한 그녀를 범했다. 석존은 이 일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지 않은 경우에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그녀에게 무죄를 선언했다.”, “언젠가 한 출가수행자가 나무로 만든 여성의 상을 보고 욕망을 느껴 성기를 그 상의 다리 사이에 갖다댔다. 죄를 묻는 그에게 석존은 ‘교단 추방은 아니고 깊이 참회하라.’고 답했다.”, “언젠가 한 출가수행자가 어떤 여성에게 사랑을 느꼈다. 그 마음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무덤을 파서 그녀의 뼈를 가져왔다. 그 뼈를 잘 빻아 반죽하여 질 모양으로 만든 다음 그것에 자신의 성기를 집어넣었다. 석존은 그에게 교단 추방을 선언했다.”,“많은 출가수행자들이여, 다섯 가지의 원인에 의해 성기는 발기한다. 욕망에 의해서, 대변을 보고 싶을 때, 소변을 보고 싶을 때, 바람에 의해서, 벌레에 물려서, 많은 출가수행자들이여, 이 다섯 가지 원인으로 성기는 발기하는 것이다.”

몸·성의 역사와 미술

인간이 미술행위를 통해 ‘성’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한 역사란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먹는 것의 해결과 성욕의 분출이라는 두 가지 것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초기 구석기 시대인 기원전 30,000~25,000년경에 다뉴브 강 빌렌도르프에서 발굴된 이른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풍만한 여성상은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 아래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그보다도 당시 남성들이 품었던 여성미의 이상형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사지가 축약된 매우 풍만한 이 여성 인체는 심미적 이상과 종교적 상징성을 반영한 것이자 임신한 여성상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고 또한 엉덩이가 발달된 그래서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 목숨을 영위하는 활동을 하면서, 문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남긴 무수한 시각이미지들은 다름 아니라 당대를 살았던 성원들의 집단적 사유, 종교관, 세계관, 성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미술사의 흐름 역시 바로 그런 과정의 전개를 정확히 반영해 보여주고 있다.

중세 이전까지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미술 등은 인간의 성행위 자체를 상당히 노골적이고 당당하게 회화와 조각으로 남겨놓았다. 성이라는 것이 숨기고 부끄럽고 추악한 것이 된 것은 유럽이 기독교신앙으로 통일되는 이른바 중세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죄를 지은 인간의 육체를 혐오스러운 것이고 성행위란 것 역시 숨기고 은밀하게 치러야 하는 것이 된 셈이다. 육체를 영혼과 분리시켜 부차적이고 불경한 것으로 보는 정신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성은 엄격한 통제 하에 들어갔다.

르네상스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인간 육체의 그 관능성과 현실적 미감과 성적욕망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아마도 경제적 번영과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에 따른 현실주의적, 유물론적 세계관들이 팽배하면서 인간/육체를 새롭게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는 인간/육체를 이성의 실현의 도구로서, 노동의 대상으로 도구화시키는 한편 권력과 생성과 유지를 위해 통제하였다. 육체를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자본의 가치 증식을 꾀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른바 후기자본주의 구조에서는 육체자체가, 성 자체가 상품화과정에 적극 편입되었다. 육체를 정신으로부터 분리해 그것만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나르시시즘적인 욕망이 새삼 주목되고 있음을 본다. 의식과 육체의 분열 그래서 성은 인간의 역사 이래 가장 위기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우리들의 성 개념은 종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 경계를 끝없이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오늘날은 그런 면에서 위기의 육체와 성의 시대인 것 같다. 자본주의의 고도화 단계에 따라 육체/성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발달에 따라 미디어, 권력. 기호의 테러리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위기의 육체가 되어 버렸다. 그 육체는 하나의 관념, 성 관념이다. 세계의 종언을 향한 탈 육체적인 경험으로 성은 언제나 가장 어두운 유혹의 기호로서 자멸적이다. 사실 이러한 성 개념의 급격한 변화는 1980년대의 문제이기 이전에 이미 1960년대부터 중요한 변화를 보였다.

1960년대 미국은 자아를 해방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하는 몸부림으로 뒤척이던 시기였다. 그런 목적 아래 마약 사용은 매우 두드러졌다. 이 당시는 미국이 격동기에 처해있을 때였고 따라서 모든 가치가 급격하게 전도되어 버린 변혁기였기에 젊은이들은 인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기존의 가치와 질서, 권위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 대항의 방법론은 다름 아니라 백인 중심의 문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윤리관에 도전하기 위해 취해진 것들이고 그것이 히피, 락 음악, 반전운동성해방, 여성해방, 자연 속으로의 도피, 환각제의 사용 등이었다고 여겨진다. 개인은 국가에 우선한다고 인간선언을 한 당시 젊은이들은 기성체계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문화를 모색하기 위해서 환각상태 trip을 체험하려고 한 것이다.

그를 통해 무한한 자유를 얻고자 하고 자유로운 성, 프리섹스를 구가하고자 했다. 나아가 종래의 고유한 가족제도와 결혼제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제스처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란 다름 아니라 임노동자들-한결같이 가정을 이루고 있어 오로지 가정에 메일 수밖에 없는 이들로 이루어진 구조이고 가정이라는 틀이 가장 초석이 되는 사회인데 이것이 붕괴된다면 자본주의 역시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대시되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가정을 꾸리거나 아이를 낳지 않기에 그렇다. 자식을 낳을 수 없다. 따라서 사회로부터 부과되는 의무나 책임에서 훨씬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또한 대다수가 ‘예술’에 종사한다. 일반 직장에 들어갈 수 없기도 하지만 예술가란 존재는 그 누구보다도 노마드적이지 않은가!

오늘날도 이들은 기존의 성 개념과 부단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성의 해방이란 인간의 해방이기에 그런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성도덕과 성 관념은 철저히 역사적이다. 유럽에서 비로소 성도덕이란 것이 나온 것은 19세기 들어와 이른바 부르주아들이 하층 계급에 흔했던 야비하고 문란한 남녀 관계에서 자신들을 분리하려는 의도 하에 엄격한 성도덕을 내세웠고 여기에는 프롤레타리아를 억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개입되어 있었다.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독자적 도덕률로 대중에게서 자신을 지키며 이전의 인간의 원시적 성 본능에 강한 제한을 가한 것이다. 19세기의 엄격한 성도덕의 규제는 새롭게 힘을 획득한 부르주아들이 부과한 것이고 또한 프로테스탄티즘이 융성해지면서 자신과 가족들의 도덕을 엄격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전례가 없을 정도의 큰 책임을 아버지의 어깨 위에 부과했다. 부인의 순결과 정조를 강요하고 자녀들의 성을 규제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가족이기주의와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그런 면에서 서로 상호보완적이다. 가족 이기주의는 침탈적인 자본주의의 위협에 대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보호와 강화가 사실은 자본주의 질서를 보호하고 강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당시 드가와 로트렉이 그린 당시의 창녀들은 근대산업사회로 말미암은 육체와 성 관념의 전폭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음을 반영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위선적인 부르주아들의 성윤리, 매춘이 보편화될 수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 구조 등에 대한 인식의 편린이 이들의 그림에 우울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성에 대한 지식, 육체에 대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비약했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도움으로 성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새로운 근거를 얻어 풍부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사실 프로이트 만큼 현대인의 육체적 존재에 대한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신체 그 자체가 신체에 가해진 자극과 마찬가지고 사고와 성격형성의 근원이 되고 정신생활에 중대한 작용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항문을 통해 성격이 형성된다는 그의 주장은 모든 이들을 당혹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간의 문화전체가 붕괴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성도덕 개혁의 충격 역시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는 ‘확실한 것이 없는 시대’로 특징 지워진다. 대전의 결과로 희생된 것은 성도덕과 가정 내의 전통적 권력관계였다. 이미 1918년이라는 시점에서 과거의 도덕 질서가 붕괴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헨리 밀러는 이렇게 말한다. “의혹과 질투가 마침내 광적인 정신착란에 이르는 것은 육체가 쇠잔해지고 정신이 흐려지고 혼이 멍해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악덕이 맹위를 떨치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악마인지 천사인지 알지 못하고 여성을 격멸해야 하는지 동성애가 악덕인지 은총인지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잔인함과 광란의 극단, 가장 무기력한 복종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별것 아닌 것,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투쟁하고 혁명을 일으키고 엄청난 희생을 지불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바로 전에 일어난 전쟁이 그렇다. 성의 양극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붕괴의 핵심이다. 그리고 혼이 죽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위대한 남성, 위대한 행동, 위대한 주의 및 위대한 투쟁을 잃어버렸음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과거 수 백 년 간 유지되던 혼인제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여자에 대한 공상은 더욱 야비해지고 한층 잔인해졌다. 프라이버시는 무시되었고 동성간의 은밀한 접촉을 위하여 병적인 자기 색정, 동성애, 그리고 여성복을 착용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전쟁은 성을 심리적으로 타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 성병을 낳았다. 육체(인간성)의 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정절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실 1920년대 와서 유럽남녀가 누린 성생활은 전쟁 전에 비해 아주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비로소 남녀는 섹스를 실험하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로렌스는 “육체는 이제 겨우 생명을 얻은 정도이다. 그리스인들은 육체를 아름답게 드러냈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죽였고 그리스도가 그 숨을 끊어 버렸다. 그러나 지금 육체는 다시 소생하고 있으며 묘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쟁 후 창녀들은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들은 부르주아사회에서 해악적인 존재들이지만 부르주아사회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원시적 관능성을 구현하고 있었다. 세계대전은 많은 것을 현실화했던 것이다. 불결함, 질병, 잔학, 고통, 살육 그리고 섹스 없이 참호 속에서 지내면서 성적욕망을 해결해야 했던 이들에게 육체와 성은 전쟁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문화가 그간 오랫동안 신체를 보다 열등한 것으로 과소평가해 상태에서 벗어나 신체는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존재의 가치라는 인식이 팽배해지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현대는 건전한 성도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상대를 선택하는 데서 육체적 아름다움은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라는 것은 골격, 근육, 피부 등과 같은 우발적인 요소에 호감이 생겨남으로써 형성되기 마련이다. 허영심과 아름다운 육체를 찬미하는 것은 어느 문화에서도 공통적인 것이고 그것들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결국 자손을 생산한다는 것은 성욕이 육체적으로 표현된 결과이다.

성적 자극이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곤 하지만 결국 육체적 매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우리들은 성적으로 긴장한다든지 성적 쾌락을 방출한다든지 하는 육체적 불가사의한 영속적 힘에 계속 지배를 받고 있다. 육체는 고통의 가장 큰 원천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기에 그렇다. 동시대 미술 역시 그러한 몸과 성이 인식을 드러내고 표현한다.

불교적 사유를 다룬 작품 속의 성

성을 주제로 한 미술을 에로티시즘미술이라고들 한다. 에로티시즘미술이란 인간의 원초적 본능 안에 속하는 성의 표현을 지칭하는데, 그것은 크게 보아 누드, 남녀의 사랑표현 및 서오간계 혹은 성기의 메타포 등을 일컫는다. 또한 성애나 성적 욕구를 표현한 미술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전성(全性, sexuality)적인 측면에서 미학적이고도 사회적인 가치를 함유하고 있는 예술의 한 장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인간의 그 본능적 충동, 에로티시즘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심리적 추구를 담고 있는 일종이 상징적 개념이다. 이는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탐구와 열정, 인간의 심리적 추구, 그 자체로서 타인을 향한 자신의 내비침, 내보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심리적 표현행위가 갖는 특징을 지칭한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은 성적인 태도, 성에 대한 갈망, 열정, 친화력, 성에의 이끌림, 성애적 표현 등의 본질에 다름 아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이 숙명인 단절과 죽음, 고독과 허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바로 에로티시즘이기도 하다. 사실 섹스는 성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도 성적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독특한 존재의 한 방식이며, 이는 고독(단절, 죽음, 소외)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불교미술과 에로티시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로서는 근자에 한국현대미술에서 접한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단초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불교적 사유를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작가들의 작업 안에 성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가 그것이다.

김아타

우연히 발견한 사실인데 눈에 띄는 모텔의 간판들 중 상당수가 ‘파라다이스’, ‘낙원’, 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낙원은 그 모텔 안에 존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들 열반을 꿈꾸며 모텔로 직행한다. 서구인들에게 낙원이란 잃어버린 에덴동산에 대한 상실감을 강렬히 투사하는 단어다. 파라다이스란 말은 원래 페르시아에서 나온 말인데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뜻한다. 불모의 사막지대에 사는 유목민들은 오아시스를 자신의 삶 주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것을 파라다이스라 칭한 것이다.

사실 열반은 동양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 열반은 욕망과 개개인의 의식이 사라졌을 때 도달하는 초월적인 행복의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다. 즉 인간 육체의 한계에서 해방되어 우주와의 일체, 지복(至福)에 이르는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생의 고통스런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를 듯한 깊은 미소와 신들의 모습, 비물질성, 정신성을 강조한 추상회화, 시원에 닿을 듯한 구름과 바다, 대지 등 대자연의 이미지에서 경외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인간이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곤 한다.

그 깨달음을 얻는 데서 열반에 이르는 길은 시작될 것이다. 열반에 드는 것은 에고의 소멸을 말한다. 과거의 개인적인 삶은 전체 속에 용해되고(옴마니반메훔, 즉 연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대해(大海)로 떨어져 녹아든다는 말이 이것을 의미한다), 그때 평화와 법열이 보상처럼 따라온다고 한다. 열반에 들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가능한 열반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욕망들로 인해 가설된 이 지상의 삶이 과연 낙원이고 열반이고 파라다이스일까? 김아타는 법당 안에서 벌거벗은 남녀 모델들이 투명 아크릴 박스 속에 낮아서 마치 참선하듯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뮤지엄 프로젝트’)을 사진 촬영했다. 이들은 저마다 선정, 열반에 든 것 같기도 하다. 열반이란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며, 선정이란 ‘생활 속의 집중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적 의식이 자리하는 사찰 안의 경건한 불상, 수많은 나한상을 배경으로 체모와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남녀의 벗은 몸이 도열해 있다. 성스럽고 장엄한 장소에 벗은 살들이 적나라하게 자리한 이 신체작업은 시각적으로 아주 강렬하고 도발적이며 불경스럽기도 하다. 모든 욕망을 잠재우고 세속적인 자취들을 정화시켜야 할 법당 풍경에 느닷없이 쾌락과 욕정의 몸 풍경이 환각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성과 속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모든 쾌락과 정화, 자기 부정이 섞여 있는 풍경이다. 김아타는 그러한 수행이 일어나는 공간에 비릿한 육체를 날것으로 제시했다. 그 몸은 인간 본질이자 욕망의 정체이자 박제된 인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 육신이 들어간 네모난 박스는 서양적 가치관·미학·사전적 의미의 박물관 등을 의미하며 나아가 일종의 자신의 사상적 울타리로서의 포르말린이자 인식적 거리두기를 가시화하는 장치의 구실을 한다. 그런가 하면 틀에 박힌 사회적인 관습·규범·제도·지배이데올로기·의식의 통제·고립, 안과 밖,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등 다양한 것을 암시한다.

세상과 격리된 작고 적막한 법당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고통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 듯도 하다. 이 인간들은 더 이상 관념적이거나 이상적인 완결된 신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세계 속에 던져진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 신체 덩어리는 물화(物化)된 인간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몸은 우리가 세계에 다가가는 중요한 방식이다. 또한 몸은 인간의 주체이다.

벗는다는 것은 다시 원초적인 인간으로 되돌리는 행위이고 여기서 나신의 육체는 가장 아름다운 자연이 된다. 사실 사람은 자연의 진화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근원인 자연에 대한 깊은 향수가 자리한다. 가식이나 허례를 벗으면 그 자리에 벌거숭이가 있다. 어떠한 사회적인 신분도 나타내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신체, 서로 다른 익명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알몸을 드러내는 이러한 과정은 진정한 자기 발견, 해방의 증표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기 자신을 세계에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고정관념이나 틀을 제거하고, 가능한 의식에 앞선 우리의 모과 세계가 직접적으로 맞닿는 순간, 바로 그러한 ‘참 자유의 세계’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그릇된 이데올로기와 관념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나와 타자가 진정으로 교감하는 세계, 자기동일성을 찾아가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그것이다.

백남준

백남준은 비디오 작업을 통해 불교적 사유를 몇 차례 다루었다. 부처상이 모니터와 마주하고 있는 ‘TV부처’가 가장 유명한 비디오 조각 중 하나다. 그런가하면 부처와 여자의 누드이미지가 함께 한 작품이 그것이다. 상당히 매력적인 앞이 작품은 모니터 뒤의 카메라가 부처를 정면으로 촬영하여 머리와 가슴 부분들이 화면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화면/카메라는 제작과 수신의 과정에 명상하는 이 인물을 연결시켰고, 이와 같은 순간적 회로 속에서 부처는 화면 위의 자신을 고요하게 바라본다. 그러니까 부처는 자신의 영상 앞에서 명상을 하지만 그 영상은 거울에 비친 상처럼 거꾸로 재연되어 있지는 않다.

이 설치작품은 이른바 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테크놀로지를 서로 결합시킨 것에 해당한다. 드러누워 있는 부처와 동일한 포즈로 알몸으로 길게 누운 알몸의 금발 백인여자의 육체가 대칭을 이루는 작업은 성과 속의 적나라한 충돌을 보여준다. 비디오의 기본적인 특성은 모니터 화면을 통해 카메라가 녹화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이와 같은 비디오의 시점을 적극 활용한 작가다. 그는 비디오라는 매체를 확장시키는 수단으로서 즉각적인 특성을 도입하였고, 이를 통해 모니터 화면과의 관계 속에서 카메라 위치를 탐구하였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알려진 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부분의 창작생활을 유럽과 미국에서 보냈으며, 1956년 유럽을 여행하다 독일에 정착하면서 전위음악과 퍼포먼스에 대한 그의 관심을 쏟아 부었다. TV라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최초의 예술적 탐구는 63년 독일 부버탈에서 가졌던 개인전에서 소개되었는데, 이 전시에서 그는 TV세트의 송전수신을 왜곡시키고 변형해 옆으로 뉘거나 혹은 거꾸로 놓는 등 변조된 TV뿐 아니라 인터랙티브 비디오 작업도 선보였다.

이듬해 백남준은 뉴욕으로 이주해 TV와 비디오 작업을 지속하며 그의 작업의 중요한 동반자가 되는 첼리니스트 샬롯 무어맨을 만나 ‘TV브라’, ‘TV첼로’ 등 많은 비디오 작업과 퍼포먼스에서 공동작업을 한다. 60년대 말에 이르러 백남준은 TV와 움직이는 영상으로 새로운 미학적 담론을 창출하는 신세대의 기수가 된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그는 행동주의자로, 혹은 교수로 다른 신예작가들을 도와주며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며 부상하는 매체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굴, 실현해나갔다.

사실 그가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단순히 비디오아트의 시조여서가 아니라 미디어의 메커니즘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대중미디어의 단방향적 전달방식을 비판하며 끊임없는 예술적 대안을 모색하였다는 점에 있다. 흔히 백남준의 예술세계의 특징으로 이른바 ‘비빔밥 미학’으로 대표되는 혼성적 성격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혼성 그 자체보다 혼성적 요소를 절묘하게 배합하는 ‘균형’에 백남준 작품의 더 큰 미덕이 있다. 그가 상업광고를 찬미하면서도 상업광고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예술형식을 온존시킬 수 있었던 것도, 미디어의 역사를 차용하면서도 새로운 미디어의 예술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균형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는 미디어에 냉소적이거나 테크놀로지에 비관적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적 척도가 적용된 소통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가 숱한 오브제를 차용하여 테크놀로지의 속도감을 유적화 시킨 것도 자신의 작품이 인간의 상황을 되돌아보는 백미러로 기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 모니터 앞에 앉은 불상과 같은 작업도 가능했다. 서양과 동양의 충돌, 만남, 합리주의와 정신주의 물질과 사유의 느닷없는 조우, 상과 속아 충돌을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새삼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현재의 문화와 삶을 반성하게 해주는 명상의 시간을 순간적으로 부려놓아 준다.

이철수

선적 경지를 떠올려주는 이철수의 판화 중 성과 관련된 몇 편의 판화가 있다. 성기를 드러낸 스님, 벌거벗은 여자가 스님의 품에 안겨있는 장면을 통해 스님의 수행과정에서 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맞닦드리면서 극복해가는 과정에 대한 단상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의 불교적 판화의 멋은 화면에 짧은 단상으로 수놓아진 이야기와 이를 함축시킨 형상을 통해 부풀어 오른다. 간결한 이미지와 쉬운 그림, 패턴으로 디자인된 이미지로 넓은 공간을 할애하는 그이 작품은 청량하고 싱그러운 풀 향기 같은 문구들을 달고 있어 마음과 눈을 자연스럽게 끌기에 충분하다.

본시 불교란 문자를 먼저 세우기보다는 마음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세계(불립문자)이다. 그는 불교와 선의 세계를 가시적인 이미지와 문장을 통해, 판화를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지점을 구현해왔고 그것의 대중화와 소통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날카로운 칼들이 목재의 피부를 절개하고 명징한 형상과 칼끝으로 마감된 간결한 선들을 통해 자신의 일상에서 깨달은 사연들과 스님들의 수행, 불교와 연관된 내용들을 그려 넣었다. 개인적이고 종교적이며 관조적이다. 그래서 흔히들 선적이라고들 한다. 순하고 질박한 판화에 곁들인 화제는 그림과 어울려 선미를 더욱 풍겨주는데 특히나 그 문장의 맛이 예사롭지 않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미술학부 부교수. 성균관대학교대학원에서 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 큐레이터.<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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