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스와 르벨·마티유 리카르 지음, 이용철 옮김, 승려와 철학자(창작시대, 1999)

이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교수로 프랑스 한림원의 정회원인 아버지 장 프랑수아 르벨과, 분자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1965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프랑수아 자콥의 지도로 일류 과학자의 길을 가던 중 지도교수와 아버지의 곁을 떠나 히말라야 산중에서 티베트 불교에 입문해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 마티유 리카르 사이의 대화록이다.

과학자의 길을 밟고 있던 아들의 돌연한 출가선언에 절망했던 아버지, “최고 수준의 과학문명을 공부한 이후 갑자기 불교 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선회한 아들(15쪽)”. 그러니까 불교를 학자적 취향에 따라 서양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려는 서양의 철학자와, 서양과학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불교수행자의 길에 접어든 승려가 부자지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흥미를 크게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승려는 대화상대자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수행자의 입장에서 서양철학의 한계를 철저하게 타파하고 있어서, 서양철학과 불교를 비교하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양자 간의 이질성을 한층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먼저 장 프랑수아는 “아들이 이전의 모든 경력을 포기하면서까지 불교에 입문한 이유가 전적으로 불교 자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15쪽)”고 말하면서 마음속에서 그러한 결심이 싹트기 시작한 건 언제였고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마티유는 “과학의 연구 활동이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결국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15, 16쪽)”이라면서 과학은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1966년 20세 때 중국의 침략을 피해 히말라야 남쪽을 따라 부탄으로 피신한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영화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는 마침 히피의 시대여서 서양의 젊은이들이 인도와 히말라야로 향했던 시기였다.

마티유뿐만 아니라 미국의 라마 수리야다스, 람 다스, 스티븐 레바인 등도 이 무렵 그곳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들은 이후 30여 년 간 불교연구와 수행에 매진해 최근에 미국과 유럽에서 부는 불교 바람의 대부분은 이들의 활동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마티유에 따르면 티베트 불교의 수행자들은 자신이 가르친 바를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사람들, 즉 성자나 현자처럼 완벽한 존재의 이상에 부합한다는 점. 서양철학에서 이론과 실천의 문제가 많이 논의되기는 하지만, “인간의 차원에서 완벽함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티베트 수행자를 의미한다(20쪽).”라고 마티유는 생각했다.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의 진열대처럼 느껴지는 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직접 확인했던 것이다.

서양에서 찬탄의 대상이 되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그는 ‘저것이 내가 열망하는 것인가?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은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뭔가 허전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스승으로 모신 칸규르 린포체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다. 린포체에게서 나오는 깊이, 힘, 적정(寂定)이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둘의 대화는 ‘과학의 연구에서 정신세계의 탐구로’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육체와 인식의 관계’ ‘불교의 심리학과 형이상학’들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다가 ‘외적 행동과 내면 성찰’을 테마로 동양과 서양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는다. 불교는 우리 일상생활 대부분이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장 프랑수아가 말하자, 고통이란 상대적 진리에 속하며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은 아니라고 마티유는 반박한다.

“사람들은 흔히 불교를 고통의 철학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길을 따라 나아갈수록 이러한 고통의 느낌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스며드는 무상의 기쁨으로 대치된다. 불교는 비관주의나 무기력함과는 정반대의 사상이다.(160쪽)”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양의 과학문명은 외부세계를 지배해 변화시키고자 했지만, 자기 자신은 변화시키지도 않은 채 외부세계에 대해 작용하려고 한다면 결국 지속적이고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고 마티유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외부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외부세계가 우리 내면의 행복에 미치는 효과 또한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의 발명, 전기의 이용, 망원경과 현미경의 이용 등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얻게 되는 편리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와 같은 진보가 해결한 것이라곤 그저 더 빨리 이동하거나 더 멀리 보거나 더 높이 올라가거나 더 깊이 내려가는 일 따위의 부차적인 문제들뿐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서양은 별것도 아닌 필요에 엄청난 투자를 한 셈(167쪽)”이다. 19세기 티베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많은 것을 발견한 라마 미팜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발명품을 태워 버렸다. 기계를 발명하는 일에 자기 인생을 바치고 수많은 외적 활동을 위해 자신을 잃어버리느니 차라리 내면적 변화에 전념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이처럼 세계에 영향을 미쳐 변화를 일으키는 일에만 골몰하는 서양문명은 본질적인 무언가를 결핍하고 있다. “정신적 가치가 더 이상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지 못할 때 진보는 보람없는 삶을 감추는 포장지의 역할을 할 뿐(168쪽)”이라고 마티유는 지적한다. 이 대화 곳곳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간에 분명한 입장 차이를 재확인하게 되는데, 물론 그것은 지식 중심의 서양철학에 견주어볼 때 “불교에서 제시하는 것은 정신의 과학, 즉 그 무엇보다 현재적이면서 행복과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체계를 다루는 명상 과학이라는 것(349쪽)”이 마티유의 결론이다. 서양의 과학은 우리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3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상관없이 존재의 질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질 높은 삶을 구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자기 자신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 각자의 내적 평화에 기여하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불교의 진리를 활용하여 우리 각자가 자기 내부에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완벽하게 실현해야 한다고 마티유는 말한다.(349, 350쪽) 이러한 마티유의 주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마티유는 자신의 과학적 엄정성을 티베트 언어와 그 전통의 연구에 옮겨놓았다(11쪽)”는 아버지의 지적처럼 학문적 엄정성을 지니고서 티베트 불교의 연구와 수행에 전념해 그의 티베트 불교이해는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아버지는 서양철학 전공학자로서, 아들은 티베트 불교 수행자로서 각각 자기 입장에 따라 상이한 삶, 즉 철학자의 삶과 불교 수행자의 삶을 제각기 영위한다고 할 수 있다.

서양철학은 특히 근대 이후 인식론 중심으로 전개되어 인간으로서의 삶 전체가 담론의 주제로 설정되지 못했지만, 티베트 불교는 머리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비록 부자지간이기는 해도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논의가 심도 있게 전개되지 못하고 메아리 없는 울림이 되는 경우가 많이 눈에 띈다. 그것은 바로 서양철학이 지향하는 앎과 삶, 티베트 불교가 추구하는 지혜와 자비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 마티유 역시 부자간의 대화에 불만족하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분명한 대화라 할지라도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에 필수불가결한 개인적 침묵의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체험은 곧 길을 뜻한다. 붓다가 자주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길을 가는 것은 각자의 의무이다.(350쪽)” 이 책은 본격적인 불교책으로서 오랜만에 널리 읽힌 고급독자용이고, 불교와 서양철학의 관계, 티베트 불교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등 불교전문가가 미처 못한 일을 불문학자가 해내고 있어서 불교계에 따끔한 정문일침(頂門一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족(蛇足)에 불과하겠지만, 한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아무래도 불교전문가가 아니라 불문학자의 번역이어서 불교용어와 불교적 배경의 부족은 지적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178쪽에 “불교의 실천은 세 가지 보완적인 측면…… 시각과 명상과 활동”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원문을 직접 확인해 보지 못했으나, 전후문맥과 그 의미연관에 따라 추측컨대 ‘시각’이 아니라 ‘정견(正見)’이라 해야 합당할 듯하다. ‘시각’이라 옮겨도 불어의 단어나 문법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불교와의 관련 아래 사용한 말이므로 ‘시각’이라고 해서는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333쪽에 “모든 개념적인 명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빛나는 공허의 경험을”이란 표현이 나온다. ‘공허의 경험’이라니! 차라리 ‘공(空)의 체험’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 책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붓다의 가르침이 티베트에 전파되어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티베트 민족은 수백 년에 걸쳐 특색 있는 불교를 형성했고 1959년 중국의 침략으로 인해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건립했다. 이 책의 저자 마티유는 1960년대부터 티베트 불교에 관심을 가지다가 귀의해 30여 년 간 불교수행에 전념하다가, 1997년 이 책을 불어로 펴냈다.

또한 이 책을 읽는 우리 나라의 독자는 지난 2000여 년 간 중국식의 한문불교에만 익숙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전후 과정, 즉 이미 지난 2천여 년 간 우리의 문화 속에 삼투된 한문투의 불교용어와 그 사상에 대한 충분한 고려없이 불어의 단어나 문법에 따라 우리말로 옮겨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식의 문제는 서양언어로 된 불교책의 번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우리 나라의 출판과 문화에 심각한 형태로 폭넓게 확산되어 있다.

오진탁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한림대 철학과 교수. 번역서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감산의 장자풀이><한글세대를 위한 원각경><한글세대를 위한 법화경>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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