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여는 언어 이전의 세계

선은 분석적 사고보다는 직관에 의하여 세계의 본질을 명쾌하게 제시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거두절미한 직관의 표현은 일반인은 물론 상당히 연구하고 수련한 사람에게도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명쾌함과 난해함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데, 명쾌한 면을 살려서 이해 가능하도록 접근하고자 한 것이 최근에 출간된 한형조 교수의 선어록 해설서 《문무관, 혹은 너는 누구냐》이다. 이 책은 선어록들 가운데에서도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무문관》을 번역하고 해설한 것이다. 제목 옆에 “너는 누구냐”는 부제가 특이하다. 결국 문도 없는 관문을 통과해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진면목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애초에 주간 <현대불교>에 97년 4월 2일부터 98년 12월 30일까지 2년여에 걸쳐 연재되었고, <한겨레신문>(99년 4월 27일)에도 서평이 실렸을 뿐 아니라 <불교신문>을 통해 아래에 다룰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지상논쟁이 전개된 바 있다. 이 책은 선에 처음 접하는 사람의 입문서도 될 수 있고 상당히 접해 본 사람이 새롭게 정리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다만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쓴 저술이 아니라 독립된 이야기들에 대한 해설서이므로 체계성은 다소 떨어질 수 있다. 이에 대한 보완으로 저자는 글머리에 이 책을 읽는 순서를 제안하고 있기도 하다.

구성이 이러하므로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몇 가지 논의가 될 만한 것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하겠다. 그 전에 한 가지 지적해 둘 것은 《무문관》이 48칙이라는 것은 거의 정설인데 이 번역본은 여타의 《무문관》에 비해 보면 3칙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제4칙 달마가 수염이 없구나(胡子無鬚), 제20칙 아주 힘센 사람(大力量人), 제34칙 알음알이는 도가 아니다(智不是道)가 그것이다. 선의 기초는 무엇일까? 이 책의 에필로그에 그 대답이 있다고 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매끄러운 문장과 깔끔한 해석, 친절한 해설 때문이었지만 정작 고개를 끄덕인 것은 책 뒤에 부록으로 4쪽 정도 붙은 에필로그에서였다. 책상물림의 학자가 어떻게 이렇게 힘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사실 책을 읽으면서 엉뚱하게 이런 것이 의문스러웠는데, 그 뒷이야기에서 해결된 것이다. 치열한 구도열! 그러한 치열함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마주친’ 것은 그냥 문자나 파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만약 새로 이 책을 읽을 분이라면 에필로그부터 읽을 것을 권하는 바이다. 이 책과 관련하여 쟁점이 되고 있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저자는 <불교신문>(2543년 5월 25일, 제1720호)과의 인터뷰에서 선(禪)이 미래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간화선으로 깨달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 긍정여부를 떠나 오랜만에 보는 통쾌한 주장! 이 중에서 전자는 저자의 책에서 언급된 바 없고, 후자는 ‘돈오(頓悟)의 과잉’이라는 주장과 함께 선의 역사적 전개 맥락 위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두 문제와 그에 얽힌 논쟁은 관점의 문제이고 지면 관계상 자세히 논할 수도 없지만 한 가지 정리해 둘 필요는 있다. 영원한 시간 속에 미래사회라 할 때 미래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이며, 대안이라 할 때 대안의 개념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 선수행을 하고 있고, 적어도 선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선이 미래사회의 대안이 아니라면 당장 선을 포기할 것인지? 중요한 것은 현재, 그리고 앞으로 교계(敎界)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어떤 전망을 제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선이 미래 사회의 대안이 되는지의 논쟁은 이것부터 정리가 되어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돈오의 과잉’ 역시 이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한다. ‘돈오’에 과잉이란 있을 수 없다. 실은 ‘돈오라는 주장의 과잉’을 말하는 것이다. 몰록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깨달은 양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며 선의 전개 속에서 표방된 표어들 중에는 이런 돈오의 과잉을 부추길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대해 반론도 (아니, 주로 반론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저자가 돈오의 과잉을 주장하는 근거로 “허세와 자만에 빠져 수련을 게을리 하고 대중의 정재(淨財)를 헛되이 소모하는 죄업(p. 135)”, 심지어 “역겨운 거드름을 풍기는 도적들이 신성한 도량을 더럽히고(p. 317)”, 그래서 작금의 조계종 종권 다툼과 같은 문제가 있음(<불교신문> 7월 20일)을 계속 제기하고 있는데, 반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토로한 것은 보지 못하였다. 가령 저자의 진단이 틀렸다 하더라도 병(病)은 여전히 교계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언어는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주지하다시피 선(禪)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면서도 방대한 어록을 남겨 두고 있다. 결국 최후에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언어란 어쨌든 유용한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너무 쉽게 언어를 버리지 말 것(p. 4)”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실제로 언어문자를 통해 저자는 ‘선’의 알맹이(흔히 思想이라 말하는 것)와 그 역사적인 전개에 대해 상당히 깊은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설 중 일부는 확실히 성철 스님의 《본지풍광》과는 어투가 다른 듯하다.

그래서 윗말에 대하여 이런 질문이 가능할 듯하다. 혹시 버릴 언어, 버리지 않을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언어를 버리는 시점이 정해져 있을까? 저자는 《무문관》의 체제에 일정한 기준이 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선은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책의 여러 곳에서 선의 태동과 전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본질이고 전개는 현상이므로 이 두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형식논리로 보면 모순되는 것이기도 하다. 초시간적인 것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설명하므로. 이러한 밉지 않은 모순이 이 책의 장점이다. 선의 전개를 입체적으로 서술하여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감성적인 필치로 직관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내용은 상당히 분석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러한 분석과 합리성을 통해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어 이후의 풍경을 건너다 볼 수 있지만’, 의단(疑團)이 형성되기도 전에 의심이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단, 話頭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독자 몫으로 남겨 두는 경우가 더 많긴 하다.)

이 책은 ‘선(禪) 자체(自體)’가 아니라 선에 대한 연구서로 자리를 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런데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가끔 납득되지 않는 서술이 보인다. 가령 “붓다 입멸 후 교단을 조직하고 교리를 체계화한 사리불…… (p. 234)”, “달마는 곧바로 당대 불교의 심장인 북위(北魏)의 수도인 낙양으로 올라가 당대 불교의 대표자(?)인 양(梁) 무제(武帝)를 만나 담판을 짓는다.(p. 287)” 등등. 일반적으로 사리불은 붓다보다 먼저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북위와 양은 각각 북쪽과 남쪽의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다. 혹시 전등사(傳燈史)에서 가섭(迦葉)을 강조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지나쳐서, 그리고 《맹자》의 양혜공(梁惠王)이 위(魏)나라 사람이라는 데서 혼동한 것은 아닐까?

또 “이 표어 이후 선은 ‘네가 누구냐’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으로 환원되었다.(p. 168)”는 표현도 걸린다. 우선 이 책을 통해 보건대 그 표어(直指人心 見性成佛 혹은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이전에 소크라테스적 물음이 존재했다는 설명이 없으므로 ‘원래로 돌아간다(환원)’는 설명에 어폐가 있을 뿐 아니라 심정적(독자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으로도 소크라테스가 불교의 근원자리인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개념이나 어휘설명들도 보인다.

이를테면 ‘공(空)’의 개념. “공(空)이란 비어 있다는 뜻이다. …… (p. 245)”고 하고 있다. 미립자(微粒子) 세계에서 전자와 전자들 사이에 많은 공간이 있으므로 유(有) 속에 무(無)가 있다는 것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낯선 설명은 아니다. 위처럼 ‘공(空)’이 ‘빈 것’이라는 설명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으므로 단지 관점의 차이이거나,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을 함부로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있지만 ‘공’의 개념을 ‘비어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것은 ‘있다’는 것의 상대개념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의 개념을 간략히 말하자면

오히려 제행무상 제법무아(諸行無常, 諸法無我)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한다. 또 “당신의 불법도 별것 아니었구만(p. 269)”. 이것은 임제선사(臨濟 禪師)가 깨닫는 순간 내 뱉은 말 중 ‘무다자(無多子)’를 ‘별것 아니다’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이리야 요시다카(入矢義高, 《禪과 문학》, 신규탁 옮김, 장경각, 1993)는 “장황하게 왈가왈부 하지 않는 것, 분명한 것”이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 스님의 불법은 명료한 것이었구나.”가 된다.

나는 물론 이리야 요시다카의 관점을 지지하면서 인용한 것이지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경우에 따라 번역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은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관계가 없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선종이 거의 임제종 계열임을 생각한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반성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독자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이것은 큰 문제라기보다 앞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이 책은 “한글 세대를 위한 선불교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한글 세대’라는 독자층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또 그에 맞게 일관된 서술태도를 유지하는지를 논하고 싶지만, 이런 문제는 어느 책에나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이 책은 상당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생략한다. 그러나 제기하고 싶은 것은 ‘한글 세대’라는 독자층이 설정되었을 때 글을 쓰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많은 한글 단어 옆에 영어단어를 병기하고 있다.

요즘 출간되는 책들은 많이들 이렇게 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을 쓰는 사람은 ‘당위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괄호 속에 든 영어가 원판이고 한글은 번역본이라는 의식을 형성시키고, 이렇게 한 세대가 지나가면 영락없이 고착되어 버린다. 자칫하면 한국의 불교는 ‘한글 세대’인 적이 한번도 없이 한문 세대에서 곧장 영어 세대로 옮겨 갈 판이다. 앞으로 영어가 국제어로 굳어진다고 하지만 우리가 나서서 대세론에 따라갈 필요는 없다. 결국 글쓰는 이는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진정 한글 세대의 선을 위해서.

박영록
성균관대학교 중문과 및 동 대학원 중문과 졸업. 문학박사.현재 충주대학교 중국어과 교수.논문으로 <조당집><선문답의 담화구조><백화어언료로서의 선어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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