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상적 정치철학을 탐구한 역저

누가 이 책을 번역할까?

필자는 대학원 선배인 이철훈 선생의 권유로 처음 이 책을 원서(Buddhism and Political Theory)로 접했을 때, 누가 번역할 수 있을지 쓸데없는 걱정이 앞섰다. 불교와 정치사상을 함께 다루는 것이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상좌부와 대승불교 등의 경전들을 인용한 단락도 즐비했기 때문이다. 또, 동남아 근대화 시기에 이르기까지의 불교 정치사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기에 이를 잘 번역하려면 역사적인 흐름에 대한 안목도 필요하고, 동서양의 시민성을 다루는 장에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서양윤리학적 배경지식도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박병기 교수와 이철훈 선생의 번역으로 재탄생한 《불교, 정치를 말하다》를 읽으면서 말끔히 해소되었다.

쉽고 간결한 설명

우선, 이 책의 장점은 무아(無我)에 대한 간결한 설명에서부터 드러나는 것과 같이 상식 수준에서 불교 정치이론에 대한 해석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저자 매튜 무어(Matthew J. Moore)✽는 불교 경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가르침을 무아(無我), 무상(無常), 연기(緣起)로 정리하고, 이와 같은 존재론적 특징이 어떻게 정치철학적 가르침으로 이어지는가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정치철학의 이론들이 인간 삶에서 정치가 필수적이라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무상의 가르침에 기초하는 정치이론은 정부 고유의 중요성과 지위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는다(서문, 18쪽). 아울러,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고자 한 원저의 집필 의도에 따라 공저자들은 이 책의 제목을 ‘불교와 정치이론’ 대신에 ‘불교, 정치를 말하다’로 번역했고, 호흡이 긴 문장들을 우리말로 읽기 쉽게 다듬기 위해 애썼다.

다음으로, 이 책은 불교 이론의 역사적 전개를 따라서 정부론 및 정치이론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 주요 경전을 짧게 인용하면서 간략한 설명을 덧붙여서 정치학에 낯선 독자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필자에게는 다소 낯선 동남아의 불교 경전도 다수 인용되어 있지만, 가독성 있는 번역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근대화 시기 동남아 불교국가들의 정치체제 변화까지도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처음에는 현실 불교국가의 정치적 변화가 이 책의 전반적인 전개와 다소 어긋난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불교의 근대화를 다루는 3장을 읽고 나서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3장은 전통적으로 불교 정치이론에 기반했던 국가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공화주의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이를 통해서 저자는 불교의 정치이론이 현대 공화정에도 적용 가능한 탄력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물론 저자는 현대 공화주의와 불교가 직접적으로 연결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군주제를 수용하는 불교 국가도 있기 때문이다(4장, 86쪽). 하지만 저자는 불교국가의 현실정치가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소개하면서도 불교가 민주적 정부와 다양한 형태의 해방운동과도 관련을 맺었다는 점(4장, 69쪽)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동서양의 시민성에 대해서 간명하게 비교하고 또 차이점을 분석한다. 서양의 시민성 전통과 초기불교의 이론을 비교하면서 그 둘의 유사성을 ‘제한적 시민성(limited citizenship)’으로 명명한다. 이는 정치가 인간 삶의 여타 양식과 비교했을 때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일이 아니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즉, 정치는 현실적으로 인간 삶에 불가피하며, 또 도덕적으로도 실질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치가 다른 여타의 영역에 비해서 배타적인 우선성을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 추구를 위한 활동이나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비해서 부차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5장, 123쪽). 사실, 서양윤리학적 접근에 익숙한 필자는 이 책이 인간의 정치적 본성의 실현에 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할 것이라고 은연중에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는 달리, 정치적 삶이 가지는 최소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불교적 이상사회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성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이 책의 흐름이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신선함’은 단점일까?

단점을 하나만 꼽자면, 비교철학적 주제를 다룬 4장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필자와 함께 이 책을 읽은 도덕 교사들의 공통된 견해 중의 하나는 서양철학자인 니체의 자아관과 불교의 무아를 비교해서 다루는 4장이 다소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은 이 책의 저자인 매튜 무어가 서양 정치학자라는 점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불교 정치이론은 그가 근래 들어 관심을 가지며 연구를 시작한 분야이며, 주로 비교정치학의 범주 안에서 탐구된다. 짐작건대, 서양철학에 익숙한 저자는 불교의 무아론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니체의 자아 개념과의 비교를 시도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불교 이론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오히려 읽는 데 방해 요소로 작동하기도 하고, 서론부터 3장에 걸친 불교 정치이론에 대한 설명을 잘 따라가던 독자에게 의아함을 남기기도 한다.

반면에, 이와 같은 단점은 ‘신선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니체가 말하는 자아는 이질적인 충동들의 집합체이기에 규범적 정치이론과 접목이 어렵지만, 불교의 무아 개념은 규범적 정치이론을 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내용에서는 어렵게 느껴지는 4장이지만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다. “정치와 자아에 대한 논의에서 붓다가 옳았고, 니체는 틀렸다”(4장, 117쪽).

4장의 결론이 잘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책은 서구 중심적인 관점에서 불교를 다루지 않는다(만일 그랬다면 이 책의 첫 번째 단점으로 서구 중심주의가 꼽혔을 것이다.). 오히려 저자는 이 책의 목표가 서양 정치이론가들에게 불교 정치이론의 전통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서문, 6쪽). 명시적인 목표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이 책의 저술 의도는 서양 이론가들이 ‘불교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불교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이다(서문, 4쪽). 이 대목에서 ‘서양 이론가들이 불교적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잠시 상상하면서 미소 짓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필자도 ‘불교에 대해서’ 그리고 ‘불교로부터’ 부지런히 배워야겠다는 다짐도 함께하게 되었다.

편파적인 서평의 사소한 성과

사실 필자는 이 책의 역자 중의 한 명인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박병기 교수의 제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역자인 이철훈 선생은 필자의 대학원 선배이다. 아마도 필자의 이 서평은 중립적이기보다는 ‘편파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편파적인 서평이 거둘 수 있는 사소한 성과는 역자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함께하기에 그 번역의 과정이 어땠는가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자들은 현장 교사이자 교육가이면서 ‘도덕함’을 실현하고자 부단하게 노력하는 실천가들이다. 여기서 도덕함이란 “학생들과 함께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가치와 의미의 차원에 눈을 돌리면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역자의 말, viii)”의 다른 말이다. 도덕함을 자신의 삶에서,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고자 부단히 성찰하는 역자들은 이 책을 긴 호흡으로 찬찬히 살피고 읽었으며, 번역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의 흐름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불교 정치학이 무엇인지, 불교가 말하는 이상적인 정치형태와 정부론은 무엇인지, 불교적 관점에서 시민성에 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해서 접할 수 있으며, 한 걸음 나아가 “정치가 도대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역자의 말, xiii)”에 관해서 물음을 던지고 자신만의 답변을 모색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전제가 틀리지 않는다면, 이 서평은 불교 정치이론의 지극히 피상적인 영역만을 파악하고 건드리는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책의 저술 의도 및 번역의 방향이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불교 정치이론을 소개하는 것이기에 감히 서평을 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책을 통해서 ‘삶을 위한 정치’ ‘타인의 삶에 시선을 두는 정치’를 위해서 정치학과 윤리학이 교차할 수 있고, 교차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이를 나누고자 서평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은 서양 정치이론이 제시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매력적인 대안을 찾고자 하는 독자에게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관심사와 배경지식을 가진 독자에게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주제를 제공할 수 있는 개론서이기에 눈 밝은 독자들께 소개하고 함께 읽기를 청하고자 한다. ■

 

김은미 nugurigirl@naver.com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대학원 졸업. 주요 논문으로 〈동체자비의 가능성으로서의 공감〉 〈흄 공감 이론의 비판적 고찰〉 〈메를로퐁티 상호신체성의 도덕교육론적 해석〉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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