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지금 서양에서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의 열풍이 불고 있다. 1960년대에 미국 사회에 일었던 선(禪)의 붐(Zen Boom)이 제1차 명상 열풍이라면 현재는 제2의 명상 열풍이다. 서양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마음챙김 명상은 원래 불교에서 유래했지만, 종교적 색채를 벗어버리고 세속적 명상법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주로 스트레스 감소, 개인의 행복과 복지 증진을 위한 집중력 향상, 업무성과 향상, 심지어 더 나은 성생활을 위해서도 활용되고 있다. 또한 새로운 심리치료 기술로서 재포장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계발 방법으로도 유용하다고 상업적으로 마케팅하고 있다. 

최근 마음챙김과 관련된 산업의 규모는 4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 판매되는 도서 중에는 6만 권 이상에 ‘마음챙김’이라는 제목이 붙어서 이점을 부각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마음챙김 육아, 마음챙김 식사법, 마음챙김 교습법, 마음챙김 치료법, 마음챙김 리더십, 마음챙김 금융 등이 그것이다. 도서뿐만 아니라 마음챙김이라는 제목의 각종 워크숍, 온라인 학습, 잡지, 다큐멘터리 영화, 스마트폰 앱, 쿠션, 팔찌, 미용 제품 등도 있다. 그런가 하면 마음챙김 수련 프로그램은 학교, 월스트리트, 실리콘밸리 기업체, 로펌, 정부기관, 미군에도 들어가 있다. 

그런데 마음챙김 명상의 원류인 초기불교의 위빠사나는 현재 사회 각 분야에서 열풍이 불고 있는 마음챙김과는 그 목표가 달랐다. 불교적 맥락에서 볼 때 마음챙김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모든 존재의 실상인 무상, 고, 무아를 깨달아 삼독심(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없애고 대자유를 얻고자 하는 수행법이다. 대부분의 미국 불교단체에서는 이 전통불교의 수행법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전통불교의 오계(五戒)도 틱낫한의 수행단체에서는 ‘다섯 가지 마음챙김 수행’이라고 제시하고 있으며, 다른 많은 미국 불교단체에서도 마음챙김을 서양문화에 맞게 창의적으로 변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기업체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활용되고 있는 세속화된 마음챙김 운동의 정당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에 대한 비판과 반론을 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글의 전개는 먼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서양 불교단체에서 마음챙김 수행법이 서양 불교의 특징적인 흐름으로 정착되어 가는 양상을 고찰해본다, 이어서 마음챙김이 불교의 맥락을 벗어나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재포장되어 활발하게 확산하고 있는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세속화된 마음챙김 명상의 특징적 형태인 ‘맥도날드식 마음챙김(McMindfulness)’1)에 대한 비판적 담론 및 그에 대한 반론을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서양의 불교와 마음챙김 명상

현대 서양불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마음챙김 명상이다. 마음챙김이란 빨리어(Pali)의 사띠(sati), 한자어로는 염(念), 그리고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번역되는 말이다. 마음챙김은 불교의 기본 수행인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정념(正念, samma-sati)에도 적용되고, 호흡 수행법인 입출식념(ānâpānasati)에도 적용된다. 초기불교의 마음챙김 수행은 20세기 초 불교가 아시아로부터 서양으로 전파되어 서양 불교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광범위하면서도 다채로운 양상으로 서양화되었는데, 그 이후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었던 1980년대부터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여러 불교공동체에서 마음챙김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서양인들은 학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적 변화, 직접적인 종교 체험, 자비를 일상생활에서 구현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불교에 이끌린다. 그들에게 불교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미국인들의 이러한 성향으로 인하여 사회참여 불교가 발달하게 되었고 더불어 사회복지 증진을 위한 수단으로서 마음챙김도 촉진되었다. 

또한 마음챙김 명상이 주류로 부상하게 된 이유 중에는 불교와 과학의 결합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서 신경생물학 분야가 마음챙김 명상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특히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사용하여 연구자들은 마음챙김 명상이 공감 능력, 자기성찰, 우울증을 저지하는 긍정적 심리상태를 관장하는 뇌의 특정 부위의 구조와 기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로써 마음챙김 수행을 통하여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믿음이 과학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 미국불교는 불교 지도자들의 성추문 사건들이 터지면서 위기와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진보적이고 자유분방하던 1960년대와 70년대의 분위기는 1981년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보수적으로 바뀌어갔다. 불교단체에서도 보다 더 보수적인 윤리규범이 요청되던 시대였는데, 베트남 출신의 선승 틱낫한(Thich Nhat Hanh)이 불교 계율의 중요성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전통불교의 오계(五戒)를 이른바 ‘다섯 가지 마음챙김 훈련’이라는 마음챙김 명상으로 제시하면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다. 틱낫한은 이처럼 불교의 계율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마음챙김을 창의적으로 제시하며, 마음챙김에 대한 수십 권의 저서를 내고 또 ‘마음챙김 생활공동체(Communities of Mindful Living)’와 같은 수행단체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서양에서 마음챙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1990년 미국에서 불교사회운동은 틱낫한의 ‘마음챙김 생활공동체’와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조애너 메이시(Joanna Macy), 로버트 에이킨(Robert Aitken)이 출범시킨 불교평화단(Buddhist Peace Fellowship)이 주도했다. 전자는 마음챙김을 통한 사회참여와 일상생활 중의 윤리와 수행을 강조하였고, 후자는 주로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 개인의 영적 성장에 대한 전념, 그리고 높은 수준의 자기비판 같은 1960년대 시대정신의 정수를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추진해갔다.

2000년대 초에 이르러 마음챙김은 서양 불교계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었다. 불교단체들은 아시아의 문화적 요소들을 걷어내고 서양에 적합한 수행과 문화에 대한 많은 토론을 거쳐 정착이 이루어졌다. 아시아 출신의 지도자에서 서양인으로 세대교체도 완료되었고 불교 지식도 심화된 상태였다. 이제 불교단체들은 유튜브, 블로그, 도서, 웹사이트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불교에 바탕을 둔 마음챙김 담론을 문화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마음챙김 수행에 관해서는 수많은 교재가 출간되었는데, 그중에는 마음챙김을 일상생활과 사회운동을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통찰이 많았다. 

가장 두드러진 불교 도서로는 조지프 골드스타인(Joseph Gold-stein)의 《하나의 다르마, 서양 불교의 출현(One Dharma: The Em-erging Western Buddhism)》을 들 수 있다. 2002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골드스타인은 서양 불교의 비전을 세 가지로 즉 마음챙김, 자비, 지혜로 규정하면서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다. 골드스타인의 이 같은 선언은 초기불교 이래로 모든 불교전통이 공유하고 있는 계정혜(戒定慧)의 수행체계를 서양문화에 맞게 변용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도덕과 윤리 영역인 계율은 세상의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추진력이라고 할 자비로, 궁극적인 깨달음을 향한 선정수행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 판단을 가하지 않고 현재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마음챙김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서양 불교의 대세는 이제 마음챙김을 통해서 존재의 무상(無常)을 자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혜와 자비를 계발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마음챙김이란 대체로 마음, 신체, 환경의 상호연관성을 알아차림 하고, 불교 수행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그러한 알아차림을 닦아가는 명상법을 의미한다. 또한 마음챙김 명상은 상좌부 전통의 단체뿐 아니라 선불교 단체와 티베트불교 공동체에서도 기본적인 수행으로서 강조된다. 이처럼 다양한 종파 및 전통에서 자유롭게 행해지고 있는 마음챙김은 서양 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불교 명상이 불교의 경계를 넘어 미국문화에 광범위하게 전파된 계기가 된 것은 1978년에 창설된 불교평화단과 더불어 1979년 존 카밧진(Jon Kabat-Zinn, 1944년생)에 의해 창안된 새로운 명상법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둘의 차이는 전자가 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불교의 통찰과 삶의 조화를 추구한 데 비해, 후자는 아예 불교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세속적이고 비종파적인(non-sectarian) 마음챙김의 혁신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카밧진은 역시 다른 많은 베이비부머들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탐구하면서 1960~70년대를 보냈으며, 이제는 미국불교의 고전이 된 필립 카플로(1912~2004, Philip Kapleau)의 《선의 세 기둥(The Three Pillars of Zen)》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선불교를 접하고 명상수행을 시작했다. 이후에는 힌두교의 신체단련법인 하타요가와 상좌부불교 명상 등의 다양한 수행법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공부하였고, 매사추세츠대학교 의료센터에서 박사후과정으로 해부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어느 불교 집중수행에 참가한 카밧진은 질병과 스트레스 관련 질환의 치료를 위해 명상을 임상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 카밧진과 그의 동료들은 대학 내 메디컬센터의 예방 및 행동의학과 안에 스트레스 감소 클리닉(Stress Reduction Clinic)을 설립했는데, 광범위한 만성질환과 통증 환자가 이 클리닉의 마음챙김 명상 8주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큰 효과를 체험하였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마음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MBSR: 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과정’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보급했는데, 현재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명상은 바로 이 엠비에스알(MBSR)을 가리킨다. 카밧진은 판사, 교육자, 가톨릭 사제들 그리고 올림픽 육상선수의 훈련에도 이 프로그램을 활용하였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나중에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1990년대 중엽에 그들은 역시 매사추세츠대학의 후원을 받아서 ‘의학, 건강보호, 그리고 사회를 위한 마음챙김 센터(Center for Mindfulness in Medicine, Health Care, and Society)’를 창설하여 교도소, 학교, 기업체, 공장 등에도 마음챙김을 적용해 나갔다. 카밧진의 마음챙김 명상법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사회에서 불교가 전통적인 종교철학 및 수행으로부터 일상적인 삶을 위한 사상과 기술로 바뀌어가면서 불교와 무관하게 일반 대중을 위해 현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음챙김 명상의 열풍

2003년과 2014년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에는 각각 지그시 눈을 감고 편안한 얼굴로 명상에 잠겨 있는 금발의 날씬한 젊은 여성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여성의 표정도 밝고 긍정적이다. 시사잡지에서 두 번씩 커버스토리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명상은 이제 서양에서 대중화에 접어들어 젊은 세대로 확산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2003년의 기사 제목은 〈명상의 과학(The Science of Meditation)〉인데, 제목만 봐도 1960년대에 베이비부머에 의해 열렬히 수용되고 신봉되었던 선불교의 명상이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었으며, 2000년대에 접어들어 과학적으로 그 효능이 입증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선불교를 통해 영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했던 베이비붐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에 대한 실망, 냉전의 공포, 전후 사회질서의 붕괴라는 혼란 속에서 선불교 명상을 대안문화, 대안종교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로서 수용했지만, 이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종교보다는 과학을 신봉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명상 운동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도 짐작해볼 수 있다. 

2014년의 커버스토리 〈마음챙김 혁명(Mindful Revolution)〉에는 ‘스트레스로 지친 멀티태스킹 문화에서 집중을 찾는 과학’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제목을 보면 명상의 트렌드가 마음챙김 수행으로 바뀌었으며 마음챙김이 이제는 하나의 혁명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음챙김은 멀티태스킹과 과열경쟁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도구로서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방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2018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새로운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5년간(2012~2017)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던 세 가지의 대체의료법(요가, 명상, 카이로프랙틱) 중 명상은 그 인기가 가파르게 상승하였다. 이 통계에 의하면 명상 인구는 2012년 4.1%에서 2017년 14.2%로 3배 넘게 증가하였지만, 요가와 카이로프랙틱은 소폭 상승에 그쳐 10% 내외였다. 현재의 추세를 감안할 때 명상의 상승세는 자명하다. 

그러면 서양인들은 왜 명상에 열광할까? 존 카밧진 등이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미국의 마인드풀 커뮤니케이션스(Mindful Com-munications)라는 마음챙김 공익기업은 기업체를 위한 명상 보급에 앞장서며 《마음챙김(Mindful)》이라는 잡지도 발간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웹사이트에 마음챙김 명상의 이점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첫째, 명상은 급성 및 만성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연구에 의하면 마음챙김 호흡법은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뇌의 영역인 편도체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둘째, 규칙적인 마음챙김 훈련은 집중력을 향상시킨다. 멀티태스킹 할 때 집중력이 고갈될 수 있지만, 명상을 계속하면 하루에 10분 정도의 호흡 수련만으로도 주의(attention)의 ‘근육’을 구축함으로써, 집중력과 산만함에 대한 알아차림을 향상할 수 있다. 

셋째, 명상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자비심을 높여준다. 연구에 따르면 자비명상은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변화시켜 이타적인 행동을 증가시킬 수 있다. 

넷째, 마음챙김은 편견을 감소시킨다. 우리의 뇌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마음챙김은 무의식적인 부정적 편견을 알아차리고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된다. 

다섯째, 마음챙김은 정신건강을 향상시킨다. 마음챙김에 기반한 인지치료는 불안과 우울증을 성찰과 사유를 통해 완화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는 명상의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다. 즉, 마음챙김 명상은 불교 명상에서 유래했지만 불교적인 색채가 보이지 않으며 스트레스 완화, 집중력 향상, 심리적 안정감, 정신건강 향상 등을 위한 세속적인 자기계발법으로서 대중에게 수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 용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마음챙김 명상은 주의력과 집중력을 강화하는 훈련이라고 광고하고 있으며, 이러한 능력은 현대사회의 어떤 분야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옹호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현재 마음챙김 명상은 세계적으로 800여 개의 의료기관에서 보완의학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심리상담 분야에서도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미국 법조계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로스쿨뿐 아니라 로펌과 변호사 단체에서도 업무상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법조인에게 업무능력 제고, 의뢰인에 대한 서비스 개선을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군대, 소방서, 경찰, 콜센터 등 감정노동 직무에서도 많이 도입되고 있다. 이 외에도 마음챙김 명상은 애플, 페이스북, 트위터, 페이팔, 링크드인, 이베이, 나이키 등 수많은 글로벌 기업도 도입하여 기업문화로 확산되고 있다. 2016년 피델리티 자산운용사(Fidelity Investments)의 조사에서도 미 경제 전문지 《포천(Fortune)》이 선정한 500대 기업 중 22%가 직원 건강증진과 삶의 질 개선, 결근 축소 및 생산성 향상 등을 위해 마음챙김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 중이라고 한다. 

기업들은 지속적인 성과를 창출하는 조직을 만들려면 구성원의 업무능력을 반드시 향상시켜야 한다는 인식 아래 이처럼 마음챙김 명상을 경영에 적극 도입하고 있는데, 명상 열풍은 이미 한국에도 불어닥쳤다. 삼성전자는 2017년에 경북 영덕에 연수원을 건립하고 명상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경북 문경에 힐링센터를 개원하고 명상을 통한 자신과의 소통, 오감 깨우기, 커뮤니케이션 훈련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SK와 KT 등에서도 명상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많은 기업이 다양한 형태로 명상을 접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마음챙김은 특히 소비자본주의의 메카인 미국에서 점증하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업무력을 향상시키고, 행복을 증대하기 위한 자가요법으로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챙김의 보편화는 시기적으로 스트레스가 하나의 질병으로서 보편화된, 특히 198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자유화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강압적이고, 변화무쌍하고, 경쟁 지향적 사회 분위기가 급속히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카밧진은 과학과 명상을 결합한 이 마음챙김이 단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능을 넘어서 전 인류 혹은 전 세계의 르네상스를 촉발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고 또 인류와 세계가 향후 몇백 년 동안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마음챙김 명상에 대한 비판과 반론

전술한 바와 같이 지금 서양의 마음챙김은 서양 불교단체에서 행해지는 불교적 마음챙김이 있는가 하면, 불교라는 종교색을 배제하고 사회 전반과 기업체 등에 확산되고 있는 엠비에스알(MBSR) 방식의 마음챙김이 있다. 후자의 경우, 의도적으로 불교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오계(五戒), 팔정도, 탐진치의 제거 등 불교의 윤리 · 도덕적 규범을 제외하고 단지 명상의 방식만 취하여 미국문화에 적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스트레스와 불안증세의 완화 등 건강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다른 곳에 적용될 경우 단순한 집중력 훈련으로 축소되거나 비윤리적이고 탐욕적인 목적에 악용될 우려도 있다. 이처럼 악용이나 남용되고 있는 마음챙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데, 가장 영향력 있는 비판자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의 교수이자 불교 신자인 로널드 퍼서(Ronald Purser)가 있다. 

그는 현재의 마음챙김 명상이 ‘맥도날드식 마음챙김(McMindful-ness)’일 뿐이며 신자본주의를 고착화하는 영성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맥도날드식 마음챙김이란 용어는 불교 지도자이자 심리치료사인 마일스 닐(Miles Neale)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의미는 대체로 세속적이고 비종파적인(non-sectarian) 영성으로 상품화된 기업 친화적 마음챙김, 혹은 패스트푸드 체인점 맥도날드와 유사한 기업적 전략을 취하는 마음챙김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마음챙김과 맥도날드를 비교해보자면, 우선 맥도날드의 설립자 레이 크록(Ray Kroc)은 바쁜 미국인들에게 자동화와 표준화를 통해서 일관성 있게 음식을 배달해주고자 하는 비전을 실천에 옮겼다. 명상가 존 카밧진은 한 집중수행 중에서 얻은 비전을 바탕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변용하여 통증, 스트레스, 불안에 대처할 수 있는 마음챙김 명상을 창안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제품이 전 프랜차이즈에서 품질과 내용 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카밧진은 미국인들에게 엠비에스알이라는 표준화된 커리큘럼을 만들었고, 프로그램 지도자들을 매사추세츠 워체스터에 소재한 카밧진의 마음챙김센터에서 교육시킨 다음, 기업, 학교, 정부, 군대와 같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내어 마음챙김 명상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켰다. 맥도날드의 햄버거가 어디서든 그 맛이 동일하듯 카밧진의 프로그램도 내용, 구조, 커리큘럼이 전 세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카밧진에 의하면 행복이란 내면의 일이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알아차림 하면서 의도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현재의 순간에 참여하면 된다고 한다. 이것이 곧 세계를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우리의 불만과 고통의 기본적 원인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으며, 매 순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주의하지 못함으로써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데, 이 때문에 우리는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퍼서는 이런 식의 행복이란 긍정심리학 및 여타 행복산업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스트레스를 탈정치화할 뿐이고, 결과적으로 마음챙김은 원래의 불교적 맥락에서 분리되어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착화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가령 마음챙김 명상에서는 우리가 일자리를 잃고, 건강보험을 상실하고, 자녀들이 학자금 융자로 빚더미에 빠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프다고 해도, 더 집중적인 마음챙김을 통해서 개인의 정신적 · 정서적 회복력을 높이라고 한다. 하지만, 퍼서는 보다 더 근본적으로 볼 때 이것은 스트레스와 고통의 원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경제체제에 있음을 의도적으로 피해간다고 지적한다. 즉, 그에 의하면 고통의 원인을 개인의 마음에서 찾는 것은 탐진치를 극복하여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기업의 탐욕을 고착화하고 사회적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과도 무관하다. 

퍼서는 마음챙김 명상에서 말하는 ‘스트레스 감소’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하는데,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아래서 기업들은 부를 쫓아서 불평등을 심화시키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은밀하게 우리를 압박해왔는데, 이때 과도한 경쟁에서 나오는 스트레스는 질병으로 간주되고, 사적인 문제가 되며,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게 되어 있다. 마음챙김의 행상(지도자)들은 자본주의와 영성이 조화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스트레스의 원인을 깊이 통찰함 없이 개인 차원에서 스트레스를 완화하고자 한다. 마음챙김의 지도자들은 불교의 마음챙김 수행에서 계율, 자비의 실천, 그리고 자아의 집착을 깨서 대자유를 얻으려는 목표를 뺀 채로 대중을 가르치는데, 이런 식으로 상품을 판매하고 그 상품을 재포장하는 방식이 문제다. 

퍼서에 의하면 수련생들을 진정한 자유를 얻기는커녕 스트레스를 야기한 바로 그 상황에 순응하게 될 뿐인데, 마음챙김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이라면 이러한 역기능적 구조를 무너뜨리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마음챙김의 지도자들은 개인적 스트레스에도 사회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만, 그들은 집단적인 고통을 제거할 체계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의 혁명적 잠재력을 빼앗고 또 마음챙김을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진부한 것으로 축소시키고 있다고 퍼스는 비판하고 있다. 

퍼서는 엠비에스알의 명상법인 ‘판단하지 않고 오직 현재의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기’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을 제기한다. 

이런 명상법으로부터 큰 윤리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주장은 옳지 않고, 오히려 도덕 지능을 쉽사리 약화시킬 수 있다. 마음챙김 옹호자들은 스스로의 수행이나 우연한 자기발견을 통해서 윤리적 행위가 당연히 일어날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마음챙김은 사실상 도덕도 윤리도 없고 사회적 자비 실천의 비전도 없이 상품화되면서 자본주의의 시장에 묶여 있다. 과잉판매되고 상품화되어서 어떤 도구적 목적에도 부합될 수 있는 기술로 축소되었다. 그러므로 마음챙김은 자본주의가 낳은 만성질환이나 불안 등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정치적 변혁에 대한 잠재력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그 옹호자들은 부지불식간에 기존 체제의 현상유지를 지지하고 있다. 마음챙김은 주의(attention)가 어떻게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애플 같은 기업에 의해 돈으로 바뀌고 또 교묘히 조작되고 있는지를 성찰하지 않으며, 그 옹호자들은 문제의 근원을 단지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으려 하면서 그 해결책을 우리에게 판매한다. 

퍼서는 또한 마음챙김의 사유화와 그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마음챙김을 통해서 개인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 알아차림’ 속에서 자유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지 눈을 감고 호흡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옹호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마음챙김 혁명의 요체다. 그런데 이렇게 사적인 영역으로 물러나면서 마음챙김은 자아의 종교가 되고, 공공의 영역이라는 개념은 붕괴되고, 자비의 실천이라는 낙수효과도 우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영성은 사유화(privatization)라는 신자유주의의 의제와 분명하게 연계되어 있다. 시장 세력들은 이미 마음챙김 운동의 추진력을 이용하고 있으며 마음챙김의 목표도 고도로 제한된 개인적 영역으로 맞추어가고 있다. 마음챙김은 단지 개인 차원에서 ‘불안과 동요를 진정시켜주는 것’으로 축소되며, 그것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정치 경제적 불평등에는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유화되고 심리학적으로 설명되는 마음챙김에 전념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주의 깊고, 회복력을 가지도록 최적화해주어서 개인들이 그 체제 안에서 제 역할을 지속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복은 혁명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인다.

퍼서에 의하면, 피할 수 없는 치열한 경쟁에 노출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회의 운영에 대한 모든 결정은 경쟁자들이 자신의 선을 최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효율적인 메커니즘, 즉 시장의 작용에 맡겨야 한다. 국가, 자발적인 단체 등을 포함한 다른 사회적 행위자들은 시장논리의 원활한 작동에 방해가 될 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마음챙김은 갈고 닦아야 할 기술 혹은 사용해야 할 자원으로서 이것을 숙달하게 되면 경쟁의 스트레스와 불안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챙김은 이처럼 개인적 복지를 최대화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이 아닌 순응을 가르칠 뿐이라고 퍼서는 비판한다. 

승려이자 저명한 초기불교 학자인 비구 아날라요(Bhikkhu An-ālayo)는 좀 더 불교적인 입장에서 퍼서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그는 엠비에스알이 ‘맥도날드식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에 부합한지를 고찰한다. 

퍼서의 주장은 엠비에스알의 지도자가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환자 혹은 학습자에게 정치적 인식을 고취하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퍼서는 엠비에스알의 ‘현재의 순간을 판단하지 않고 알아차리기’ 방식도 역시 불교와는 어긋나는 것으로서, 비판적 사고를 가로막고 착취적 상황에 대한 굴종을 지지할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날라요는 퍼서가 전제로 삼고 있는 연기법에 대하여도 비판하고 있다. 퍼서에 의하면, 붓다의 마음챙김의 본래 목적이란 ‘만물이 상호연결 되어 있다는 연기법(pratītya-samutpāda)에 대한 통찰’이므로 ‘고통을 야기하는 조건들을 도외시하는 것도 역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생각’이다. 즉, 붓다의 설법에는 고의 원인이 되는 정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알아차림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초기불교의 마음챙김이 엠비에스알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상실되었다는 것이 퍼서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아날라요는 초기 설법에서는 12연기를 종종 설명하고 있지만 고에 대한 사회정치적 원인에 대해서는 명시적 언급이 없고 또한 고를 유발하는 정치적 상황을 도외시한다는 개념도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붓다의 설법은 연기법의 통찰보다는 연기법의 가르침에 묘사된 특정한 조건을 (즉, 무명 등을) 없애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서양 불교계에 널리 알려진 ‘모든 현상의 보편적 상호연관성’에 대한 교리는 그보다 수 세기 후인 화엄불교에서 나타나는 데 비해, 붓다의 설법은 개인적 깨달음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현대의 마음챙김 수행이 고의 정치적 원인에 명시적으로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붓다의 설법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붓다의 전례를 따르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뿐 아니라 아날라요는 초기불교의 마음챙김이 의료에도 활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초기불교 경전(SN 3.13)에서 붓다는 빠세나디 왕이 음식을 잔뜩 먹고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사람이 항상 마음 챙기면서 음식을 대하여 적당량을 알면 괴로운 느낌은 줄어들고 목숨 보존하며 천천히 늙어가리.” 이 경전 구절에 의하면 마음챙김이 반드시 4념처 수행(깨달음을 위한 정념의 실천)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병의 치료에도 쓰였으므로, 엠비에스알도 그릇된 마음챙김 명상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퍼서는 “하나의 찰나적인 대상에 주의를 돌리는 것은 …… 경험적 시간을 폐쇄함으로써 생각을 멈추게 하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의 순서를 보고 체험하는 방식에 그 어떤 근원적인 변화도 유발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현재의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챙김 수행이 경험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아날라요는 초기불교의 시간관은 단지 변화의 사실을 개념화한 것으로서, 무상한 현상의 흐름의 연속체에 과거 · 현재 · 미래의 구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삼세의 시간은 지금 현재 변화하는 대상에 마음챙김 한다는 개념에 전적으로 부합되며, 지금 여기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개방과 함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퍼서는 엠비에스알 프로그램에 직접 참가하여 체험한 ‘건포도 먹어보기’ 수련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즉, 그는 건포도를 마음챙김 하면서 먹기보다는 차라리 등골 빠지게 노동하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에 의해 재배되는 건포도 농장을 성찰하고 또 소처럼 일하는 노동자를 미국 이민 및 세관의 직원들이 잡아들여 추방하는 것을 상기해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아날라요는 반론을 가했다. 즉, 건포도 명상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마음이 자기 논평을 하는 습관적 경향과는 완전히 다른 색다른 체험을 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능력을 계발함으로써 편견이 굳어지는 끝없는 마음의 수다(mental chatter)와 무수한 생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아날라요는 마음챙김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거론하면서 우리에게 절박한 문제는 이러한 체제의 문제보다는 자본주의의 번성으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폐해라고 말한다. 기후재앙의 관점에서 볼 때, 정치적 문제보다는 환경에 더 우선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챙김은 지구온난화의 재앙을 직시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고 또한 이미 시작된 기후변화에도 포기와 거부에 대항함으로써 그 위급함을 대규모로 각성시키는 데 기여할 큰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마음챙김은 임박한 기후재앙이 실제로 닥칠 때 회복의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챙김 수행은 몸, 호흡, 그리고 마음에 의도적으로 주의함으로써 현재의 순간에 더욱 완전히 참여할 수 있고, 또한 이런 식의 확립된 현장성이야말로 비상근무자들이 기후위기에 대처할 때 필요한 자질이므로 환경재앙에 효율적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방관이나 허리케인 생존 아동에게도 마음챙김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날라요는 이런 식의 마음챙김이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참혹한 피해에 대처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날라요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마음챙김 지도자가 정치적 활동을 자극해야 한다는 퍼서의 주장은 초기불교의 선례와 일치하지 않고, 심지어 마음챙김은 고대 인도에서도 건강을 위해 사용되었음이 문헌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순간에 대한 마음챙김’ 방식이 후대의 혁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음챙김이 비판적 사고를 무력화한다는 믿음은 마음챙김 수행의 목표를 단순히 생각의 부재라고 착각하는 데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의료에 적용된 엠비에스알 및 관련 프로그램에 관한 한, 맥도날드식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정당성이 없으므로, 현대의 모든 마음챙김 명상을 무차별적으로 맥도날드식 마음챙김에 포함하는 것은 오류다. 그뿐 아니라 마음챙김은 단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 굴종시키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임박한 기후재앙을 고려할 때, 난폭한 환경착취로 인한 재앙에 맞설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맺음말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마음챙김 명상이 서양의 불교계와 일반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양상과 현재 서양의 열풍에 대한 비판과 옹호의 담론을 간략하게 고찰해보았다. 아시아의 불교를 받아들이고 수십 년이 흐르면서 서양 불교계는 마음챙김 명상이라는 독특한 수행문화를 정착시켰으며 거의 모든 종파에서 이 마음챙김 명상을 수행과 생활에 적용하는 혁신을 이루어냈다. 또한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불교의 통찰은 사회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고, 그 과정에서 마음챙김 명상도 불교의 맥락을 벗어나서 세속적인 형태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필자는 서양의 명상 열풍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반론을 간략하게 다루어보았다. 세속적인 자기계발 도구로 재포장된 엠비에스알 명상이 과학적인 효능을 앞세워 널리 확산하면서 명상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특히 명상이 맥도날드식 마음챙김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업 친화적인 형태로 흘러서 자본주의의 탐욕을 고착화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비판과 그에 대한 반론이 그것이다. 

서양 사회에 제2차 명상 열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동시에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 엠비에스알 명상을 보면서 필자는 제1차 명상 열풍이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의 선(禪)붐이 떠오른다. 제1차, 2차 명상 열풍의 주역은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와 존 카밧진이다. 전자는 선불교를 미국에 소개하면서 선의 종교적 측면,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제도적 측면을 언급하지 않고 선을 단지 ‘순수체험 그 자체’와 동일시하여 서양 대중의 기호에 맞게 변용하여 제시함으로써 선붐의 도화선이 되었다. 후자는 불교의 전통으로부터 마음챙김 명상만을 가져와서 서양 대중의 필요에 맞게 변용하여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선과 마음챙김은 불교 계율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스즈키는 선을 왜곡했다는 비난과 일본 제국주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엠비에스알은 특히 맥도날드식 마음챙김은 탐욕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고착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두 사례는 한 문화를 다른 문화에 이식할 때 원래의 문화를 완전히 배제하는 탈맥락화와 그 의미를 극도로 단순화한 환원주의적 접근이 왜곡과 폐해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장은화
ehj001@naver.com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졸업(박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 역임. 주요 논문으로 〈미국의 선수행 그 전개와 변용의 연구〉(박사 논문) 〈일본계 미국선(禪)의 ‘여성 참여’와 ‘사회참여’ 그리고 간화선 세계화의 담론에 대하여〉 “An Investigation of Seung Sahn’s Seon: ‘Don’t Know’ Mind, Ten Gates, and Systems of Hierarchy and Authorization” 등이 있고, 역서로 《미국불교》 등이 있음. 현재는 한국 전통서적의 영역(英譯)과 해외출판 작업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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