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온의 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1. 들어가는 말

1990년대에 불교윤리 연구에 있어서 새롭게 나타난 연구 흐름이 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 서양 윤리이론 및 개념과의 관련 속에서 불교윤리를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의 윤리학의 주요 문제들에 대하여――특히 응용 윤리학 분야에서의 환경오염문제, 생명문제 등에 대하여――불교적 답변을 모색하는 연구가 그것이다. 붓다의 교설은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역사성, 사회성, 구체성을 가지므로 그것은 다른 윤리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논의될 수 있으며 특정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처방과 해법을 가지고 있다.

새롭게 나타난 불교윤리의 연구 흐름은 이러한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불교윤리는 동양의 다른 윤리 전통과 마찬가지로 개체적 권리에 근거한 윤리라기보다는 관계에 근거한 공동체적 윤리를 지향한다. 불교윤리는 개체성보다는 관계성을 중시하고 개인의 존재 의미도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드러나고 실현되는 것으로 본다. 예컨대 개체성보다는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는 불교의 무아, 연기, 공의 개념을 생각해 보자.

끊임없이 철두철미하게 자아 부정을 강조하는 무아, ‘나’라는 존재의 관계적 의존성을 부각시키는 연기의 원리, 혹은 ‘나’라는 존재의 절대성과 실체성을 부정하는 공은 권리에 전제가 되는 자아의 개체성을 강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자아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망념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윤리는 개인의 권리의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으며 서구 근대시민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권리의 개념은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문제는 불교의 핵심교설인 무아, 연기, 공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불교는 이것들 이외에도 다른 많은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것들에 의거하여 권리에 대하여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주도적인 불교윤리학자 중의 한 사람인 키온(Damien Keown)은 사성제와 오계로부터 권리의 개념을 유도해 내고자 한다.

그는 “불교에 ‘인권’이 있는가(Are there ‘Human Right’s in Buddhism?)”(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4, 1995)라는 논문에서 불교윤리에서의 인권 개념의 존재여부를 검토하고 불교에 인권의 개념이 미발달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이러한 논지를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원리적으로는 인간의 선의 실현과 관련하여 사성제의 후반부(멸제와 도제)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구체적으로는 오계의 의무가 동시에 권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불교의 권리 개념에 관한 키온의 논의를 살펴보고, 그의 논의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자.

키온은 불교의 권리개념을 고찰하기에 앞서서 서양에서 권리의 개념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부터 검토한다.

 

2. 키온의 논의

1) 서양에서의 권리

서양에서 권리를 의미하는 라틴 어 ‘rectus’와 희랍 어 ‘orektos’는 모두 ‘올바른(right)’, ‘곧은(straight, upright)’을 의미한다. 키온은 그후 ‘옳음(rightness)’이라는 말이 도덕의 영역으로 전이되어 권리로서 개인적으로 부여된 권리(entitlement)를 지칭하게 되었다는 대거(Dagger)의 분석에 주목한다.

이 단계에서 권리는 ‘곧음(straightness, rectitude)’을 의미하고 옳음은 굽음이나 휨의 반대말로 사용된다. 중세를 거치면서 이 말은 문화적으로 독특하게 사용되다가 17세기 홉즈(Hobbes)에 이르러 그 의미가 분명해져 ‘개인적인 권력(personal power)’을 의미하게 되고 오늘날까지 이 의미가 정치이론에서 핵심적 의미로 사용된다.

로크(Locke)에 이르러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식에 근거한 자연권의 개념이 발전되고 이 자연권은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연권은 어떠한 사법적 혹은 정치적 과정에 의해 협의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수단에 의해 제거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양도할 수 없다.

키온은 17, 18세기의 이와 같은 자연권의 개념이 현대의 인권개념의 선구가 되었다고 본다. 이와 같이 서양에서 자연권이라는 개념의 발달은 그다지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그러면 서양에서 자연권의 개념발달이 이렇게 더딘 이유는 무엇일까? 키온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로 서구 대부분의 역사에서 권리는 사회 지위와 밀접히 연결되어 본질적으로는 사회에서의 지위나 역할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로마시대나 중세사회에서의 위계적 사회구조는 자연권 개념 발전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들의 의무와 책임은 관리들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그때 관리들은 대체로 세습되었다. 둘째로 계몽주의시대의 사회정치적 지적발달과 함께 권리 개념이 발전되었으나 철학적으로는 인권에 대한 개념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이론들이 (이미 그 이전부터) 항상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즉 종교적으로는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은 존엄과 존경을 받는 개아로서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고가 있었으며, 세속적으로는 공통된 인간성의 토대 위에서 개인을 공평하게 다루는 이념(스토아주의자들의 저작 속에)이 있었다. 현대는 어떠한가? 키온에 의하면 현대의 권리에 관한 담론에는 권리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일치하는 단일한 정의는 없다. 그러나 현대에서 권리는 ‘개인적인(personal) 것’이거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현대에 있어서 권리 보유자는 어떤 종류의 혜택(benefit) 혹은 부여받은 권리(entitlement)를 갖는다.

 

부여받은 권리는 청원권(claim-right)과 자유권(liberty-right)의 형태로 나타난다. 청원권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이거나 부정적 요구를 부과하는 것을 누리는 혜택’이며 자유권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부과되는 권리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누리는 혜택’이다.

키온은 최종적으로 권리를 ‘청원권이나 자유권을 권리의 소유자에게 부여하는 혜택’이라고 정의한다. 키온에 의하면 어떠한 권리에서든지 막론하고 권리 소유자는 항상 혜택을 받는 입장에 있으며 이러한 권리의 특징은 초기 역사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보유되어 왔다. 키온은 권리의 특징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불교의 권리 개념 이해에 적용한다. 그는 이러한 이해를 불교의 오계에 대한 이해에도 적용하여 오계로부터 권리의 개념을 유도해 낸다.

2) 불교와 권리

산스크리트 어 rju(곧은) 그리고 팔리 어 uju나 ujju(곧은, 정직한)는 모두 객관적 의미에서 ‘곧은(straight)’을 의미하여 ‘올바른(right)’이라는 말을 은유한다. 따라서 도덕적 의미의 곧음(rectitude)은 서양이나 산스크리트 어 그리고 팔리 어 모두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어원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산스크리트 어나 팔리 어에는 개인적으로 부여된 권리(subjective entitlement)로 이해되는 ‘권리’는 없다.

그런데 이 사실이 불교사상에 권리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키온은 거위드(Alan Gewirth)의 다음과 같은 연구에 주목한다. 거위드는 모든 문화에는 권리를 나타내는 말이 없더라도 모든 문화가 권리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권리의 개념은 봉건사상, 로마법, 희랍철학, 구약, 원시사회에서도 발견된다. 한 아프리카 부족의 연구에서 거위드는 영어의 권리와 의무라는 말이 ‘해야만 한다(ought)’를 의미하는 하나의 말에 의해 지칭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 말의 가장 좋은 번역을 ‘마땅히 해야 하는(due)’이라고 하고 이 말이 항상 사법적 관계를 수반하여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키온은 거위드의 이러한 연구를 불교에서 권리의 개념을 이끌어내는 데 활용한다.

키온은 권리라는 말을 갖지는 않더라도 모든 문화가 권리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 거위드의 주장이 불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그는 불교에도 권리라는 말이 없지만 권리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본다. 키온에 의하면 불교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 즉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것’(혹은 모든 관점에서 옳고 공평한 것)은 법(dhamma)에 의해 결정된다.

한 사람은 자신이 마땅이 해야 하는 법의무를 수행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에게 마땅히 (타인이) 해야 하는 것’, 즉 법의 범위 안에서 자신에게 부여된(entitled) 권리를 갖는다. 예컨대 법은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결정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의무는 다른 사람의 권리에 상응한다. 남편이 아내를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면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부양받을 권리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남편의 재산을 보살필 권리를 갖는다면 남편은 아내에 의해 자기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권리를 갖는다. 법의 범위 안에서 왕이나 정치지도자의 의무가 정의를 공평하게 베푸는 것이라면 국민은 법의 범위 안에서 공평하고 불편파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갖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전불교에서 권리의 개념은 개인들 사이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 즉 규범적인 것이다. 법의 범위 안에서 남편과 아내, 통치자와 국민, 선생과 학생 등 모두는 권리와 의무로 분석되는 상호의무를 갖는다. 키온에 의하면 불교에서는 법의 요구가 권리보다는 의무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예컨대 ‘아내는 남편에 의해 부양받을 권리를 갖는다’라는 말 대신에 ‘남편은 아내를 부양해야 한다’는 표현을 통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권리는 개인적으로 부여된 권리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법의 범위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의 통합적 부분으로 인정된다.

이와 같이 불교에 권리의 개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키온은 ‘불교에 권리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불교는 개인이 권리를 갖는 것을 부정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요컨대 키온은 비록 권리의 개념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경전 속에 미발달된(embryonic) 형태로 나타나 있다고 주장한다.

3. 불교와 인권

유엔(UN)헌장에서는 오늘날 인권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연권, 즉 인간 본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권리로 취급한다. 유신론적 전통에서는 인간 존엄의 궁극적 근원은 인간의 신성성이다. 즉 ‘인간의 존엄은 인간이 신의 이미지로 창조되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불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질문에 대하여 키온은 사성제의 멸제와 도제에 내포된 인간의 선에 대한 평가 속에서 인간 존엄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고 답한다. 사성제의 멸제와 도제는 인간의 번영과 자아실현에 대한 설명이며 인간의 존엄은 이러한 인간의 선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키온은 인간의 존엄/인권의 근거를 다른 방식으로 찾으려는 학자들을 비판한다. 그는 쿵, 이나다, 그리고 페레라를 차례로 비판한다.

쿵(Kung)은 불교의 열반, 공, 법신의 개념을 절대화시켜서 유신론적 신의 개념에 상응하는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즉 유신론적 입장에서 인간은 절대자인 신의 형상을 띠고 있어서 존엄한 존재라고 주장하듯이 불교도 열반, 공, 법신의 개념을 절대화시켜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키온은 세 가지 점을 들어 이를 비판한다.

첫째로 열반, 공, 법신의 세 개념은 대승불교 학파들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있어서 인권의 공통된 토대가 되지 못할 것이며, 둘째로 이 세 개념은 유신론에서처럼 인간 존엄의 근원이 되기는 어려우며(어떤 불교도도 인간이 이러한 것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지 않을 것이므로), 셋째로 설령 이상의 형이상학적 토대가 대승불교 속에서 인지될 수 있을지라도 인간 존엄의 근거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특히 상좌부 불교에 의하면 이상의 세 개념은 초월적 절대자가 아니므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 키온의 비판이다. 이나다(Inada)는 인권의 근거를 연기법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인권이 인간 본성에 근거하며 인간 본성은 인간 권리의 궁극적 근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인간 권리의 궁극적 근원은 서로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의 역동적이고 관계적 본성에 있으며, 인권의 정당성은 사람들 자신들에게서보다는 사람들간의 관계성(interrelatedness)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에 의하면 “결과적으로 불교의 관심은 각 개인의 경험과정――기술적으로 연기라고 알려진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연기는 중요한 불교의 교설로 아마도 역사적 붓다에 의해 설해진 가장 중요한 교설이다.

 

이것은 어떤 인생의 과정에 있어서 경험적 사건의 일어남이 총체적이고 관계적인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연기와 인권간의 관계에 대한 이나다의 입장은 인간은 다른 모든 존재처럼 연기설 속에 설명된 관계적 과정의 부분이다는 것이다. 누구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 서로를 돌본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 각각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존중해야 할 권리들의 예는 안전, 자유, 그리고 생명이다. 키온은 이상과 같은 인권의 근거로서 연기법에 대한 이나다의 설명은 논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연기설로부터 인권을 이끌어내는 것은 마술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호적으로 구성된 존재영역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동료 인간들을 상호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립하는 것은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모자로부터 토끼를 나오게 하는 것과 같이 사실로부터 가치를 유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 논증이 아니다. 요컨대 키온에 의하면 인권이 연기설에 근거한다는 이나다의 주장은 우리 모두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서로를 좋게 대해야 한다는 권유 이상이 아니다. 페레라(Perera)는 불교의 철학적 토대를 탐구함에 의해서라기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 속에 권리가 암시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페레라는 초기불교가 자기 보호와 자기 행복의 욕구 그리고 자기 지배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한다고 보고 이것이 바로 인권의 토대가 된다고 한다. 키온에 의하면 바라는 것, 즉 욕구에 권리의 토대를 둔다는 것은 문제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자살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끝장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욕구가 결여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는 타인이 어떻게 되든 더이상 개의치 않고 타인을 학대하는 경우에도 인권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또한 페레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덕 문제는 어떤 수준의 욕구가 있어야 하는지 혹은 그 욕구가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되는데, 키온은 욕구의 인지가 도덕적 사려의 출발점일 수 있지만 그 목적일 수는 없다고 비판한다. 페레라가 인간 존엄의 본질을 인간의 자기 지배(governance)에 대한 책임감에서 찾고 자기 지배에서 인권의 일반적 토대를 찾는 데 대하여 키온은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경전상의 증거를 페레라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키온에 의하면 이러한 입장은 질서사회를 향해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이성이나 자율성과 같은 인간의 능력과 관계되어 있지만 경전은 이와 반대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아간냐 숫타에서 정치사회의 발전은 빈곤과 퇴폐의 결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키온은 열반, 공, 법신의 개념의 절대화에서 인권의 개념을 찾고자 하는 쿵, 연기설로부터 권리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이나다, 그리고 자기 보존과 자기 행복의 욕구 및 자기 지배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권리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페레라 등 모두를 비판한다.

그러면 권리의 근거에 대한 키온의 대안은 무엇인가? 키온은 사성제에 주목한다. 우선 그는 인간 존엄의 근원이 사성제의 고제나 집제 속에 주어진 인간 조건의 분석 속에서 찾아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인권이 인간 본성에 대한 사실적 비평가적 분석, 오온과 같은 인간 본성의 심리 신체적 구성물, 욕구나 충동과 같은 인간본성의 생물학적 본성, 혹은 상호의존의 깊은 구조(연기)로부터 도출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대신에 그는 인간 존엄의 근원이 사성제의 멸제와 도제에 의해 주어진 인간 선의 평가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키온은 불교에서 인간 존엄과 권리의 근원이 사성제의 후반부, 즉 인간 선에 대한 포괄적 설명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키온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 기본권과 자유는 인간의 번영(flurishing) 및 자아실현과 절대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방식은 인간 존엄의 근원을 선에 참여하기 위한 인간 본성의 무한한 능력 안에서 찾는 불교의 입장을 잘 대변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키온은 오계로부터 인권의 개념을 도출한다.

그는 우선 불교의 계가 인권에 대한 현대의 선언과 판이하게 보여 권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종의 약속으로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약속한다는 것(udertaking), 즉 수계한다는 것은 법(dharma)이 제시하는 지켜야 할 의무를 형식적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키온은 계의 의미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계는 권리와 상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라는 의무를 권리와 상관시켜 분석함으로써 키온은 계로부터 권리의 개념을 도출한다. 예컨대 첫번째의 계가 의미하는 권리는 부당하게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인데 여기에서 희생자가 갖는 권리는 공격자에 대한 부정적 청원권으로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이다.

희생자는 공격자가 존중해야 할 의무인 생명권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무의 성격을 지닌 계들은 각각 권리로 환언된다. 그리하여 생명권, 자신의 재산을 도둑질당하지 않을 권리, 충실한 결혼(생활)을 보장받을 권리, 거짓말당하지 않을 권리가 생겨난다. 더 나아가서 키온은 자유권과 안전권과 같은 인권들이 불교도덕 일반으로부터 유도되거나 그 안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노예상태에 있지 않을 권리는 경전의 생명 있는 존재들에 대한 거래금지에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권리들은 법의 범위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으로서 불교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 키온의 입장이다. 계의 의무성이 권리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특정 시각에서 계의 사회정의와의 연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키온은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계의 사회정의와의 연계성은 상좌부 전통에서 오계를 사회정의 유지를 위한 자기 훈육의 토대로 옹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복지, 평화, 정의를 증진시키고 영속시키기 위한 근본 원칙으로 간주하는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키온에 의하면 오계는 여러 가지 인권헌장과 대체로 일치한다.

인권헌장들은 종교적 계율을 권리라는 용어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일정 수의 계율이 다른 사회 상황들을 만나 필요에 따라 확장될 수 있는 것처럼――확장되어 수가 많아진 율장의 규칙들에서 처럼――인권헌장의 많은 조항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의 기본권리와 자유로부터 추정된 것들이다.

그러면 키온은 오계를 통한 이상과 같은 절대적인 도덕의무와 절대적인 권리의 뒤집기식 변용을 어떠한 근거에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가? 그는 계에 대한 자신의 분석의 정당성을 불교가 생명 신성의 원리――불살생에 대한 범인도적 가르침 속에서 발견되는――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계를 예외없는 규칙들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인권에 대한 현대의 이론들은 불교의 도덕가치들――이것들이 법의 범위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what is due)’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에서――과 조화를 이룬다. 인권의 현대적 개념은 독특한 문화적 기원을 가지지만 인권의 근저에 놓인 인간 선에 대한 전제는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들로 하여금 공통적으로 인권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게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달라이 라마가 천명한 범세계적 윤리는 여러 종교에 공통되는 핵심적 가치들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 원칙들은 새로운 것도 서구적인 것도 아닌 것이다.

 

4. 키온의 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상이 키온의 불교의 권리 개념 존재에 대한 논변이다. 이제 우리는 쿵, 이나다, 그리고 페레라의 권리 개념 추론 방식에 대한 키온의 비판이 타당한지 그리고 키온 자신의 권리 개념의 유도방식이 타당한지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불교의 핵심개념들을 절대화시킴으로써 인간 존엄의 토대를 찾아야 한다는 쿵에 대한 키온의 비판은 설득적이다. 왜냐하면 쿵은 개념의 절대화 더 나아가서는 개념의 초월자화를 시도하고 있고 이는 불교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불교가 일관성 있게 거부하고 있는 것 또한 개념의 절대화이며 키온의 비판은 이를 잘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설에 의하면 인간 존재는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관계적 과정의 부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므로 서로를 돌보아야 하며, ‘돌본다는 것’은 서로의 권리존중을 의미한다는 이나다의 입장에 대한 키온의 비판은 어떠한가?

살펴본 바와 같이 키온의 비판의 핵심은 이나다가 연기라는 인간 존재의 실상(사실)으로부터 당위(가치)를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의 현실이 그러하니 그렇게 살라’는 말은 논리성을 갖기보다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문은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사실과 당위(가치)의 문제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붓다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에 대한 당위/가치들은 인간 존재의 실상(현실, 사실)의 분석에 근거한다.

예컨대 사제의 전반부가 우리의 존재실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후반부는 어떻게 행위해야 한다는 당위이다. 즉 윤회하는 고통의 실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실천해야 할 당위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나다에 대한 키온의 비판은 그다지 설득적이지 않다. 자기 보존과 자기 행복의 욕구 그리고 자기 지배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인권의 토대를 찾고 있는 페레라의 입장에 대한 키온의 비판은 어떠한가?

키온은 자기 보존이나 행복 욕구가 도덕의 목표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지배에 대한 책임감이 인권의 토대라는 논점은 경전적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페레라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키온의 비판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행복(열반)은 도덕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지만 행복(열반)에의 욕구 자체가 도덕의 목표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지배와 관련한 페레라의 권리의 토대 주장 또한 키온이 말한 대로 충분한 경전적 증거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교의 권리 개념에 대한 키온 자신의 논지는 타당한가? 살펴본 바와 같이 키온의 주장의 핵심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의 토대는 인간의 선(열반)을 실현하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중시하는 불교의 입장(사성제의 멸제와 도제)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둘째로 불교의 법이라는 도덕규범은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의무이고 이 의무는 권리를 내포한다. 구체적으로 오계라는 의무는 권리로 변용될 수 있다.

키온의 첫째 주장부터 검토해 보자. 첫째 주장의 타당성은 ‘멸제와 도제로부터 선실현의 능력과 가능성(열반, 혹은 인간 번영과 자기 실현)을 끌어내는 것은 타당한가?’와 ‘선 실현 능력과 가능성이 존엄성과 권리의 토대인가?’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긍정적으로 답변할 수 있을 때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두 물음에 대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 답변이 가능한 이유는 한편으로 ‘열반 실현의 능력과 가능성이 인간 모두에게 구유되어 있다’는 말은 불교의 근본 전제이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선(열반) 실현 능력과 가능성은 인간만이 갖는 것으로서 어느 경우에도 박탈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키온의 두번째 주장을 검토해 보자. 즉 법의 범위 안에서의 의무는 권리를 내포하여 오계라는 도덕적 권리로 변용될 수 있는가?

예컨대 불살생이라는 나의 도덕적 의무는 ‘부당하게 상해받지 않을(혹은 죽임당하지 않을) 나의 권리’로 변용될 수 있는가? 즉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지키는 도덕적 의무를 타인에게도 동일한 정도로 요구하여 나의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는가? 사실상 우리는 붓다의 직접적 교설로부터 이에 대한 긍정적 답변을 찾기란 어렵다. 그런데 키온은 ‘해야 한다(ought)’라는 말 속에는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는 거위드의 연구 결과를 오계 해석에 적용한 것이다.

그 결과 오계라는 의무 각각에 상응하는 권리를 유도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의무에 상응하는 권리에 대한 주장은 붓다의 교설에 의거한 논증이라기보다는 키온의 추론적 분석일 뿐이다. 법의 범위 안에서의 불교의 도덕의무가 권리로 변용된다는 키온의 주장에 대한 이하라의 비판은――이것이 붓다의 입장이나 경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논리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오히려 설득력을 가진다.

이하라는 발레 댄서의 예를 들어 오계와 같은 도덕의무가 권리를 내포하여 권리로 변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Craig Ihara, “Why There Are No Rights in Buddhism-A Reply to Damien Keown,” 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2, 1995). 여성 무용수의 몸을 들어올리는 역할을 의무로 가지고 있는 남자 무용수가 상대의 몸을 들어올리지 못했을 때 그는 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지만 여자 무용수는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자 무용수는 남자 무용수에게 ‘너는 나를 들어올려야 했었다’라고 하고 그의 의무 불이행을 지적할 수는 있으나 여자 무용수의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남자 무용수에 의해 들어올려지는 것이 여자 무용수의 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도 권리로 변용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하라의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의 무아나 공에 근거할 때 우리는 불교 안에서 권리의 개념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즉 불교의 근본교리는 인간의 권리의 개념과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불교에 권리의 개념이 있다는 키온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설득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측면이 있다. 즉 인간의 존엄과 권리의 토대는 인간의 선(열반)을 실현하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있으며 이는 사성제의 멸제와 도제에 나타난다는 주장은 설득적이지만 법이라는 도덕적 의무가 권리를 내포한다는 주장은 붓다의 교설 내에서의 논증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도덕적 의무가 권리로 변용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불교에 권리의 개념이 미발달의 형태로 내재한다는 키온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최고의 선(열반)을 실현할 무한능력을 가지고 이를 실천해 간다고 할 때(멸제와 도제에 입각하여) 우리들 모두는 존엄성을 가지며 이 존엄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권리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생명권/생존권, 재산권, 속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 배우자에게 성실하게 대우받을 권리 등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갖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키온처럼 불교의 도덕적 의무로부터 권리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취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존엄성 내지는 인간다움의 보존의 차원에서 불교는 일상에서 요구되는 여러 가지 권리를 보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생명보존의 관점에서 굶어 죽지 않을 권리 내지는 개인이나 공권력에 의해 폭행당하지 않을 권리,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에 대한 소유권과 처분권, 친구나 국가로부터 진실을 들을 권리, 배우자에게 성실함을 요구할 권리 등등 무수한 권리들이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불교적 관점에서 오계 등과 같은 도덕적 의무들의 이행을 요청받으면서 동시에 오계와는 다른 근거에서 인간다움을 지킬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성 내지는 인간다움의 보존의 차원에서 주장되는 불교의 권리의 개념은 서양 근대 시민사회 이후 자유주의 윤리에서 주장되는 권리의 개념과 동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윤리는 자유주의 윤리에서처럼 자아를 원자적이고 개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관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으로 이해하여 윤리의 주체인 자아에 대하여 판이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권리의 개념 또한 무아, 연기, 공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끝>

안옥선
전남대 철학과.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하와이 주립대 철학박사. 현재 전남대 강사. 저서로 <Compassion and benevolence>, 논문으로 <초기불교 윤리의 한 이해><초기불교 윤리의 프라이버시 지양성과 공사 구분 거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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