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나는 부산대학교 아래에 있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양정 황룡산 기슭에 있는 가톨릭 재단의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래서 하루 세 번, 삼종기도를 하는 학교생활을 했다.

아카시아 숲으로 둘러싸인 교정, 꽃꽂이가 되어 있는 정갈한 복도에 화장실은 휴지와 수건이 비치된 깨끗한 수세식이었다. 화장실이나 복도, 유리창의 청소는 학생 몫이 아니었다. 외국인 수녀님들은 사랑과 유머가 넘치는 절제된 분위기로 수업을 하셨다. 당연히 수녀 선생님을 따라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점심시간에 식탁보를 깔고 밥을 먹고 나면 프란치스코회 수녀님들의 수도원 성당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성체조배를 하고 5교시 수업에 맞추어 교실로 돌아왔다.

결혼생활은 당연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살다 보니 혼자서 풀 수 없는 난감한 숙제가 생겼다. 우리 부부의 혼배미사를 집전해주셨던, 당시 김수환 주교님을 보좌하던 마산교구 사목국장님을 찾아가 상담했다. 신부님은 개헌 반대를 위한 단식을 막 풀고 돌아오신 때라 많이 조심스러웠는데 병문안 겸 인생 상담차 뵈러 갔다. 나의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들으신 신부님은 뜻밖에 짧고 명쾌한 답변을 주셨다.

“자매님, 가셔서 제대로 믿으세요.”

간단한 이 말씀은 “우리 집은 불교인데 집안에 종교가 하나라야 하지 않겠니?”라는 평화공존을 위한 시어머니의 요청을 진지하게 고민한 젊은 여성 평신도에게 주신 복음이었다. 종교를 바꾼다는 엄청난 명제 아래 죄의식에 물들지 않고 올곧은 신념으로 조화를 이루며 바르게 잘 살아가라는 따뜻한 격려였고 큰 힘이 되었다. 제대로 믿는 게 무엇인지 모르나 막연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6학년이던 1990년경 여름방학에 다 같이 유럽으로 순례 겸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파리의 어느 길가에서 ‘티베트 프리’ 로고를 그린 티셔츠를 파는 여행자를 만났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 고행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와 해방을 위한 모금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환생에 대하여, 약소국에 대하여,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과 순례의 중간 코스, 피레네산맥 속에 깊숙이 자리한 루르드 동굴 성당에서 치유의 기적을 준다는 샘물을 마시고, 사람 키만 한 촛대 앞을 걸으며 뭔지 모를 평화를 지향하던 그 마음을 생각했다. 성모 마리아를 친견한 루르드의 그 소녀와 같은 착한 영성을 흠모하는 마음은 순례 여행으로 나를 이끌었다. 미셸 성인의 은신 수도처 절해고도 ‘몽생미셸’을 새벽에 참배하며 수많은 수도자가 절대자를 향해 바친 삶을 떠올렸다.

어느 날 내 관심 분야의 그분, 달라이 라마께서 일본 도쿄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도반과 같이 친견 여행을 떠났다. 자그마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복잡한 지하철을 몇 번이나 환승하여 찾아갔다. 도쿄 성심여자대학교 교문 앞은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려는 아시아권 신자들로 북적거렸다.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찬 커다란 강당 계단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종일 이어지는 법문을 경청했다. 국경을 초월하여 찾아와 눈빛, 손짓 하나에 환호하는 수많은 사람. 구도의 열정은 뜨거웠다.

축복을 내리면 축복을 받으며 평화공존을 향한 법문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나 자신을 가장 미천한 사람으로 여기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상대방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게 하라는 메시지를 새겼다.

나에게 어떤 변화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평화는 분명 나에게 당도해 있었다. “미천한 나, 최고의 당신.” 이것은 바로 시어머니의 종교를 공부해보려고 성철 스님을 찾아갔을 때 받은 메시지가 아닌가!

무수한 생애에 걸쳐 지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자 밤새워 삼천 배를 한 사람들이 환하게 햇살이 드는 방에 앉았다. 성철 선사는 미소만 지을 뿐, 너와 나는 똑같다는 듯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서로 마주하며 그냥 앉아 있었다. 생의 답은 이미 이심전심, 염화시중의 미소로 다 전해졌다. 호랑이같이 무섭다는 분의 따뜻하고 범접 못 할 어떤 기운을 느끼며 가까이 뵙는 것만으로도 서로 감사하다는 듯이.

달라이 라마를 바라보고 그 음성을 직접 듣는 것만으로 보이지 않는 교감이 있는 것처럼, 구하는 바 없이 마음은 평안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만 할 수 있어도 주변은 평안하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았다. 단순하고 명쾌하고 어찌 보면 한없이 쉬운 것이라고 했다. 다만 깨닫지 못한 중생이기에 부단히 반복, 연습해야 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언제나 깨어 있기’가 필요하다.

사찰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불교에 닿는 길을 찾지 못할 때 지인이 송광사 여름 수련회 4박 5일을 신청하라고 했다. 그때는 무소유로 유명하신 법정 스님이 불일암에 계시면서 직접 강의도 하실 때라 100명 정원이 이미 마감을 했다.

다행히 결원이 생겨 100번째 자리로 들어간 송광사 1988년 여름 수련회에서, 법정 스님을 모시고 불교의 기본교리와 묵언과 참선을 공부하는 영광을 누렸다. 몸으로 배운 것은 잊지 않고 되새김하기 좋다고 한다. 그때 짧은 교육과정에서 잠깐 배운 것이지만 어리석은 나를 바라보는 좋은 약이 되었다.

‘제대로 믿으라’는 당부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시포스의 돌처럼 제자리인 길이다. 그래도 가고 또 가다 보면 닿을 것이고 쉬고 또 쉬다 보면 쉬어질 것이다. 평화와 공존의 합일점을 찾아가는 부단한 노력으로 그렇게 또 평범한 하루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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