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창밖,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본다. 차가운 바람 앞에서 그저 맥없이 고개를 수그리며 떨고 있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푸르고 씩씩했고 거침없었던 벌판에서 이제는 얼어붙지 않으려고 맨몸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흔들어야 하는 저 서늘한 풍경 속에서 나는 미욱했던 내 삶의 길들을 되돌아본다.

흰머리와 잔주름이 날로 깊어간다. 어느 때부터였을까,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일상과 동행하고 있다. 아등바등 몸을 추스르며 살아온 생물체로서의 한살이…….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늘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지난날들을 돌이키며 나는 불현듯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다는 어떤 절박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며 어떻게 살아왔는가.

젊었었다, 꿈이 있었다. 열정이 있었다.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살아왔었다. 구하기 위하여, 얻기 위하여, 온전히 나의 생각을 이루기 위하여 밤낮없이 앞을 보며 달려왔었다. 덕분에 조금은 풍요로워지고 좋아지고 편안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명치끝에는 항상 한 줌의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며칠 전, 꿈에 보이던 친구의 부음이 마침내 날아왔다. 위암과 췌장암 수술을 받고서 끈질기게 투병 중이던 그는 한때 대기업 임원으로 열심히 살았고 그런 결과, 퇴직 후에도 나름의 명성과 부(富)를 누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이었을까, 그는 아내마저 뇌출혈로 쓰러지는 불운 속에서 홀로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이 겪는 아픔이 자신을 한 번도 돌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탓이라고 아쉬워했었다.

어디 나라고 예외이겠는가. 결국엔 빈손으로 가야 하는 삶의 여정에서 이제는 허망한 욕념들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주어진 하루하루를 유순하게 받아들이며 그 무엇에도 매달리지도, 구애받지도 않는 평온한 일상을 맞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탐(貪) · 진(瞋) · 치(癡)’의 삼독이라는 세 가지의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힘쓰라 하였다. 사물을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貪이란 탐욕)을 버리고, 또한 모든 것을 감정적으로 결정하고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는 마음(瞋이란 노여움)을 버리고, 마침내 자기 마음대로 매사를 판단하는 어리석음(癡란 만심)을 버릴 때 비로소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다시금 가슴에 새겨야 할 일이다. 그것은 젊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짊어지고 온 나의 꿈과 열정과 생각들이 어쩌면 한낱 ‘탐 · 진 · 치’에 다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문득 삶이란 풍요롭게 채우기 위해 애태우는 일이 아니라 제 몫의 기쁨들을 이웃의 인연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행복이란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고도 한다. 하찮은 것 같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지나쳐버린 것들을 돌이켜보며 그런 소소한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것들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건대, 모든 아쉬움이란 마음의 높낮이에 다름 아니었다. 감사할 줄도 모르고, 서로 등을 대고 어깨를 맞추지도 못한 내 탓이었으며, 끝없이 살아갈 것으로만 골몰했던 내 삶의 옹졸함이었다. 나는 왜 알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하루하루 일상의 매 순간이 내게 유일하게 주어진 죽음의 때라는 것을, 아니 지금의 이 시간이 정작 우리가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는 마지막 때라는 것을 말이다.

아무튼 나는 내 품이 더 헐렁해지고 넉넉해져서 내가 좀 더 풍성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하여 지난 삶의 여정에서 만났던 모든 시간과 연분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불만과 아쉬움에 대해서도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마주하고 싶다.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해우소(解憂所)를 떠올려 본다. 걱정과 근심을 덜어내고 한량없이 자신을 비워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일 것이다.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무언가를 가지지 않고도 불행하지 않다면 그것은 보다 좋은 일이라고 한다.

가진 것 모두 내려놓고, 그동안의 고통 다 떨쳐놓고 안타깝게 떠나는 친구의 하늘길이 부디 평화롭기를 기원하면서 나 또한 내 안의 것들을 조금씩 비워내며 남은 날들을 초조함 없이, 그리고 매사에 감사하며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한바탕 눈보라가 휘몰고 간 산등성이에 슬몃슬몃 내려앉는 햇살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삶의 궁극은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사랑으로 다시 돋아날 푸른빛의 따뜻한 봄을 감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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