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이 되면 비빔밥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차례 음식을 준비한 후,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커다란 양푼 가로 모여 앉는다. 가마솥과 찬장에 남겨두었던 밥과 반찬을 모두 털어 넣고 숟가락을 들고 비비기 시작한다. 요즘 비빔밥엔 고명으로 다진 고기를 얹고 달걀부침까지 올리지만, 반찬이라야 푸성귀 나물에 생채, 집에서 기른 콩나물에 고추장이 전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온 식구가 둘러앉아 퍼먹던 그 비빔밥 맛은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일미였다. ‘이렇게 비빔밥을 만들어 묵은 음식을 모두 없애는 것은 한 해를 보내며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것이다.’라는 어른들의 덕담은 입맛에 치여 허공만 맴돌았다.

비빔밥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나라님이 전란 중에 몽진을 떠났는데 수라상에 올릴 것이 변변치 않자 맨밥에 나물 몇 가지 얹어 비벼 드린 것이 처음이라는 설이 하나다. 그런가 하면 일손이 바쁜 농번기에 밥과 반찬을 일일이 그릇에 차려 내기가 번거로워 큰 바가지에 비벼 나누어 먹은 데서 나왔다고도 한다. 아무튼 전주비빔밥이 평양냉면, 개성탕반과 함께 조선의 3대 음식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역사가 오래된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도 전주와 진주의 비빔밥, 그리고 제사 후 남은 음식을 넣고 비볐다는 안동의 헛제삿밥은 그 명맥을 유지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비빔밥은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으로 알려진 ‘글로벌 푸드(global food)’가 되었다. 여러 해 전, 대한항공의 기내식인 비빔밥이 국제 기내식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벌건 고추장을 넣은 비빔밥을 땀을 뻘뻘 흘리며 비벼 먹는 외국인의 모습도 그리 낯설지 않게 볼 수 있다. 세계 유명 도시마다 비빔밥집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고, 치맥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지도 오래되었다. 이런 인기를 따라 도심의 음식점에서 쉽게 접하는 돌솥비빔밥과 지방 관광지의 대표 먹거리인 산채비빔밥 말고도 새우젓갈, 날치알, 성게 알, 콩나물, 미나리, 꼬막, 참치, 김치, 채소, 전어, 대하, 멍게, 달래, 회 비빔밥 등 재료에 따라 그 종류는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아졌다.

생존하는 100세 이상 장수 노인들은 비빔밥이야말로 가장 권장하고 싶은 장수식품이라고 적극 추천한다. 살짝 데친 갖가지 나물에 된장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으면 여러 가지 영양분이 골고루 섭취되고 항암에 노화방지까지 효과가 만점이라는 얘기다. 거기다 누구나 편하고 쉽게 식사를 준비할 수 있으니 시간도 절약되고, 식후에는 설거지까지 간단해서 일석삼조라 한다. 맛은 물론 건강과 편의성에서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소복하게 담긴 밥상 하나가 비빔밥이다.

몇 년 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을 찾았다가 하산길에 들린 절에서 비빔밥과 냉채를 공짜로 공양받은 적이 있다. 기다리는 길손은 100m가 넘도록 줄이 길었으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산사의 음식은 정갈했고 그 맛은 오래도록 기억 속의 입맛으로 살아 있다. 줄을 서서 30여 분을 기다리자니 공양간 벽에 붙은 오관게(五觀偈)가 눈에 들어온다.

 

이 음식은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향(德香)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스님들이 발우공양 전에 외는 게송으로 ‘한 방울의 물에도 우주의 은혜가 깃들고 한 알의 곡식에도 중생의 수고로움이 있음을 알라’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 경전 《사분율》에는 식생활에 대한 부처님의 권장 말씀이 나온다. “때에 맞는 음식을 먹고, 제철에 나는 음식을 먹고, 과식을 금하고, 육식을 절제하고, 골고루 섭생하라.”고 가르친다. 이른바 태어난 곳의 음식, 즉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음식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약 같은 게 사찰음식이고 감사로 받는 게 공양이다.

불자도 아니고 덕행도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이 공양을 받아도 되나 하는 부끄러움에 망설일 때, 차례가 되어 밥과 나물 서너 가지, 미역냉채 한 그릇을 받아든다. 건너편 법당 안의 부처님이 어서 맛나게 먹으라고 잔잔한 미소를 보내신다.

대웅전에 합장하고 산문을 빠져나와 올랐던 산을 뒤돌아본다. 연두색 여린 잎이 나풀대고 줄 지어 선 오색연등이 풍경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불이문까지 따라 나오신 부처님이 자비로운 세상 가득 담긴 밥그릇 하나 쥐여주신다.

‘잘 챙겨서 조화롭게 비벼 먹으며 살거라. 흐르는 강물처럼, 훈훈한 바람처럼, 모든 것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거라. 그러다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그 밥그릇에 비빈, 비빔밥 한 그릇 공양하거라. 네 인생살이가 그득 담긴 비빔밥으로……’

nulse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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