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지난겨울 동네 산책길에서 쉽사리 잊히지 않는 풍경을 만났다. 길 따라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알록달록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손뜨개로 정성껏 뜬 것이었다. 세수수건만 한 것부터 전신수건만 한 것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형형색색 빛깔 또한 다채로웠다. 꽃이나 나비나 새를 돋을새김 손뜨개로 꾸며 놓은 것들도 여럿이었다. 한겨울 무채색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월동용 수목 해충 포집기였다. 일명 해충 잠복소라고도 하는 이것은 나무에 서식하는 해충들의 유충이 겨울을 나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는 습성을 이용한 설치물이다. 대개는 짚으로 만들어 늦가을에 사람 가슴 높이쯤에 둘러놓는다. 그랬다가 월동이 끝나는 초봄에 떼어 불로 태운다. 살충제를 뿌리는 방식보다 친환경적이어서 어디서나 널리 활용되고 있는 해충구제 방식이다.

이 해충 포집기를 짚이 아닌 털실로 뜨개질을 하여 만들다니! 겨우내 털실 목도리를 두르고 서 있을 길나무들의 이 순연한 모습이라니! 반백 년 도회 생활을 해오는 가운데 내가 만난 가장 참신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길나무의 털목도리를 보면서 누구는 어릴 적 어머니를 만날 것이다. 또 누구는 누나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고모나 이모를 떠올리며 살뜰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 일의 기획자는 자꾸 메말라만 가고 있다는 도시의 인정까지 흔들어 깨우는 큰일을 해냈다.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는 이 멋지고도 먹먹한 풍경을 보면서 나는 ‘반려식물(伴侶植物)’이란 말을 헤아렸다. ‘아, 드디어 사람들이 식물들에도 육친의 정을 부여하기 시작했구나!’ 하는 감회에 젖기도 했다. 사실, 한낱 가축에 지나지 않았던 동물에게 요즘 사람들, 특히 도시인들이 기울이는 관심과 애정은 유별나다. ‘애완동물’ ‘애완견’이란 말도 옛말로 밀어내고 있는 형국이다. ‘반려동물’이나 ‘반려견’이 점점 더 널리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애완(愛玩)’에서 ‘반려(伴侶)’로의 등극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애완’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주인이고 주체이다. 그 주인이 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기는 것이다. 그 주인에게는 객체이고 대상일 뿐이다. 이에 비해 ‘반려’는 사람과 그 대상이 동등하다. 동물이든 물품이든 함께하는 그 사람으로부터 인격체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개에게 옷을 입히기도 하고, 안고 다니거나 유모차에 태워 밀고 다니기도 하는 것이다. 대학병원급 의료시설과 24시간 진료시스템을 갖춘 동물병원이 이미 성업 중이고, 한방양방협진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써 붙인 동물병원까지 등장하고 있다.

아무튼 사람들이 주로 개나 고양이에게 쏟았던 사랑을 식물에까지 넓혀간다는 것은 퍽이나 잘된 일이다. 자신의 계절에 맞춰 생명의 환희를 전해주는 꽃들은 물론 언제 어디서나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들과도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들이 반려라면, 다시 말해 ‘도반’이라면 교감의 내용이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해(苦海)라 일컬어지는 세상에 함께 머물면서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희로애락의 파고를 함께 견뎌주는 미덕을 그들이 베풀어줄 테니 말이다. 다만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생각이나 취향도 달라서 동물에게 더 끌리는 이가 있는 반면, 식물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이가 있을 따름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이 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의 성질을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로 삼는 도가(道家)의 말이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제8장에 나온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서 ‘수’를 ‘물 수(水)’가 아닌 ‘나무 수(樹)’로 고쳐 부르기를 좋아한다. ‘상선약수(上善若樹)’, 최상의 선은 나무와 같은 것이라고. 나무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이 흙과 빛으로 가장 순하게 빚은 생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양하 선생의 수필 〈나무〉를 읽기 좋아한다.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不滿足)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 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보되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보되 부러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의 첫 문단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동물에게보다 식물에 훨씬 더 많이 끌리는 편이다. 특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의 그 성자(聖者)와도 같은 생태를 보며 깊은 위안과 함께 존재론적 행복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털실에 생명을 부여하는 뜨개질의 손길처럼 한 땀 한 땀 정성을 쏟으며 살아간다면, 마음을 동물에게 건네든 식물에 건네든 무슨 상관이랴. 이런 삶이라면 자신이 살아온 그릇에 따라 소득을 얻을 것이요[衆生隨器得利益], 결국에는 살아낸 분수에 따라 보람을 얻게 될 것이라고[歸家隨分得資糧] 일찍이 의상 대사가 〈법성게〉에서 설파하지 않았던가.

무엇인가와 마음을 나누며 반려의 미학을 구현할 수 있다면 모두 스스로 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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