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 불교학의 현재와 미래

 

-붕어빵이 붕어라는 신념과 반지성주의를 넘어

 

1. 한국의 ‘불교학’ 그리고 놀라움의 체험

필자는 지금도 불교학계 안에서 경이로운 일들을 자주 겪는다. 그것은 대부분 불교학 관련 학회에서 일어나지만, 학위논문 심사나 불교 관련 단체 행사에서도 종종 겪는다. 이런 일들은 이제 필자의 일상에 익숙한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어딘가에서 나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 다음과 같이 적은 적이 있다. “두 가지 놀라움이 늘 주변에 함께한다. 하나는 전혀 앞뒤가 안 맞는 말들을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여러 시간씩 떠들 수 있는 인도철학을 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경멸감을 넘어선 경외감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에 대한 동경이나 환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인도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나를 향하는 주변의 놀라움이 그것이다.” 여기서 ‘인도철학’을 ‘불교학’으로 바꾸어 읽어도 사정은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필자는 왜 특히 불교학계에서 그렇게 자주 이러한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이제 그 고민의 실타래들을 정리하고 가닥을 잡아 한국에서 불교학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제조건과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야기를 조금 쉽게 풀어나가기 위해 먼저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붕어빵의 본질은 붕어일까 빵일까? 붕어빵에 붕어를 갈아 넣어야 그것이 붕어빵일까? 길거리서 붕어빵을 사 먹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조금은 엉뚱해 보이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바로 필자가 여기서 풀어놓으려는 불교학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전제조건들, 그것에 대한 해명이다. 이 조건들이 갖추어지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학문 생태계 구축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야 할 것이다.

2. 붕어빵의 본질은 붕어가 아니고 빵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들어 있지 않다고 해서 붕어빵이 붕어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붕어빵은 풀빵의 한 종류일 뿐이고 그 모양이 붕어 모양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불교학은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다. 학문의 한 분야이고 그 학문이 다루는 대상이 불교일 뿐이다. 그래서 비유하자면 불교학은 붕어가 아니라 붕어빵이다. 그리고 붕어빵이 헤엄치지도 않고 횟감이나 매운탕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불교학 역시 종교적 진리를 가르치지 않으며 니르바나를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이 당연한 상식조차 논쟁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생각이 있다는 사정이 바로 필자가 경험하는 ‘불교학에서의 놀라움’들을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그 맥락은 대략 이렇다. 불교학은 다루는 대상이 불교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특별하고 가치가 있어서 다른 모든 학문과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태도가 한국에서 미래의 불교학이 어떻게 모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무력화시키는 핵심 기제이고, 그 본질은 허구적 위기론이며 반지성주의의 집단적 발현이다. 이 때문에 이것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불교학의 미래에 대한 생산적 고민이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따라서 불교의 진리를 다루기에 불교학은 여타 학문과 다르다는 신념을 주장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글을 읽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권한다.

그리고 불교학이 불교의 진리를 다룬다는 주장에는 불교학이 불교의 교학과 동일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전제는 크게 보아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초래한다. 하나는 불교학의 다양한 연구분야의 소외 문제다. 불교음악이나 불교 예술품을 다루고 불교건축을 연구하는 것이 불교학의 중요한 연구분야임에도 불교학이 교학과 등치되면서 그 연구에 필요한 사회적 지원과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둘째로 불교학이 교학의 반복이나 학습도구로 간주되면서 다른 근대적 학문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교학 역시 누적적 지식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상식이 관철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결과로 불교학이 딜레탕트와 데카당스의 근현대 ‘조국 근대화’를 외치던 시절의 역사적 급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 집단이 지식을 창출하고 누적시키는 학문체계 자체에 대한 근대적 확신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전문가의 권위뿐만 아니라 ‘전문가’라는 사람들 자체가 사라지게 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이러한 현재 상황에는 많은 요소가 복잡하게 섞여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다룰 때도 많은 새로운 요소들이 개입될 것인 만큼, 수많은 소리들이 뒤섞인 지금 상황에서 생산적 미래를 위한 신호와 그것을 저해하는 잡음을 구분하는 냉철한 판단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하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붕어빵이 붕어가 아니라 빵이라는 것, 그 상식을 다시 확인하고 상식으로 관철시키는 비판적 논의이다. 이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붕어빵의 모양을 바꾸려면 붕어빵을 찍어내는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이 관철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학을 누적적 지식체계 산출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학문 활동이 아니라 종교 활동의 일부로 혹은 종교 활동을 위한 도구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시도와 주장은 여전히 많다. 물론 이런 주장들이 긍정적으로 용인되고 추구될 수 있는 특별한 맥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사찰이나 불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불교대학’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진행되는 신도 교육과정은 교리에 대한 지적 교육을 포함하며 이는 종교 활동의 일부다. 이 맥락에서는 한국 고등교육의 문제나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체계 문제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바로 ‘대학’이니 ‘학문’이니 하는 말들이 다양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종교 활동의 일부로 자리 잡은 이런 맥락이 불교학에서 생산되고 구축되는 수많은 정보들을 공유하고 사회적인 자산으로서 역할을 찾아가는 맥락인지라 큰 틀에서 학문 활동의 한 영역이라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겠다. 하지만, 한국 불교학의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므로 필자는 여기서 전문적인 연구 활동과 직업적 전문가로서의 학문후속세대의 교육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3. 붕어빵에 붕어를 넣겠다고 하지 말고 어묵을 먹어라

붕어빵의 기원은 일본의 도미빵(たい焼き)이지만 그 뿌리는 이전부터 있었던 일본식 풀빵인 이마가와야키(今川焼き)로 알려져 있다. 이마가와야키는 타원형 풀빵에 팥소를 넣은 것인데, 이것이 도미빵과 구분되는 핵심은 바로 모양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붕어 모양이 붕어빵의 핵심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 역사적인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결국 붕어빵의 본질은 붕어가 아니다. 붕어빵은 헤엄치지 않으며, 붕어빵을 횟감으로 쓰는 사람도 매운탕으로 먹는 사람도 없다. 붕어빵의 본질은 풀빵이다. 하지만 붕어빵의 본질은 붕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확신을 현실에 구현시키기 위해 붕어빵에 생선 살을 갈아 넣겠다고 하는 상황이다. 그런 맛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간단하게 어묵을 드시라고 권하겠다.

붕어빵이 붕어라는 주장들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강한 버전과 약한 버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교 교학이나 수행론(의 모델)을 따라 학문으로서 불교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주장은 주로 종교 활동에 치중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듯하다. 반면 약한 버전으로 ‘불교 교학이나 수행론(의 모델)을 따라 학문으로서 불교학이 나름의 차별성을 지닌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고 나아가 미래를 선도하는 더 훌륭한 학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주로 불교학을 한다는 학자들이 학술대회나 학술논문에서 개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주장이 불교 신자들에게는 ‘학문’이라거나 ‘전문가’라는 권위를 입은 타인의 신앙 간증을 통한 일체감의 확인이자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증을 안겨주는 감동은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사찰의 불교대학에서나 할 만한 이야기가 학문으로서 불교학의 미래를 향한 모색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주장들이 불교학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논의 자체를 가로막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불교학을 한다는 이들이 종종 개진하는 붕어빵이 붕어라는 약한 버전의 주장은 강한 버전과 섞여 사회적으로 유포되는 것은 물론, 종교적 관점에서 강한 버전을 지지하는 이들의 개인적 지향을 약한 버전과 섞어 학문 세계 안으로 유입시킨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이들은 사실 붕어빵이 붕어이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붕어빵에 생선 살을 넣어 붕어빵이 붕어가 되는 이상을 구현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지적 편향은 ‘반지성주의적 확증편향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붕어빵 고민은 접어 두고 마음 편하게 어묵을 드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붕어빵이 붕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주장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필자를 이해하기를 고대하지 말고 필자가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맞는 일이다. 모든 현실은 그 역사적인 맥락이 있고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붕어빵을 풀빵이 아니라 붕어라고 하는 주장들이 왜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생각을 풀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현상을 매도하는 것은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리적 안정을 찾는 효과적인 방법일지언정 사회적으로는 게으르고 위험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4. 거리에서 붕어빵을 먹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창피하지 않다

필자가 꽤 오래 이어오던 인도 고전어 야간강좌가 있었는데, 겨울철이 되면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 내려오는 길에 으레 수강생 모두를 붕어빵 장수 앞으로 몰아가곤 했다. 필자가 놀랐던 것은 붕어빵에 대한 수강생들의 환호가 아니라 붕어빵을 입에 물고 손에 종이봉투를 든 채 의기양양해 하는 교수를 보는 수강생들의 반응이었다. 왜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먹는 중년의 남성은 점잖지 않아 보이는지 궁금했다. 테이크아웃 커피야 음료이니 샌드위치랑 비교하면 붕어빵의 문화적 코드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근대 학문으로서 불교학을 하는 일이 왜 많은 사람에게는 그 자체로 충만한 학문적 활동이 아니고, 결여된 어떤 것으로 끝까지 못마땅한지 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질문거리로 남는다. 철학 전공자가 신학 전공자에게, 아니면 문학 이론가가 작가에게 결여감이나 못마땅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왜 그들에게 불교학은 마치 팥소가 빠진 붕어빵처럼 충족감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에게 불교학은 불만족스러운 현실이고 극복되어야 할 결여의 상태이며, 이러한 불만족은 불교도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불만인 것으로 보인다. 주목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이러한 결여감은 불교학이 학문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불교학만이 학문 이상의 것일 수 있다는 우월성으로 포장되는 논리 전개의 패턴을 따른다는 것이다. 뒤집어 이면을 보면, 결국 불교학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성 주장은 불교학을 둘러싼 불안감과 열등감의 집단적 발현인 셈이다. 이 불안감과 열등감의 뿌리를 짚어내야 미래의 불교학을 향한 허구적인 위기론과 진단을 넘어서는, 헛바퀴 돌지 않는 불교학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필자는 붕어빵을 잘 먹는다. 그리고 그것이 어릴 적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세련된 말로 ‘소울 푸드’라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붕어빵 사 먹는 일이 내게는 창피하지 않아요!”라고 떠들지 않는다. 그런 주장을 할 시간에 맛난 붕어빵을 먹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불교학은 특별하게 위대한 학문이어서 굳이 학문일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은 떠들지 말고 그렇게 떠들 시간에 차라리 학문 활동을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그 떠드는 소리는 실제로 학문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오직 방해가 될 뿐이다.

5. 딜레탕트 불교학과 데카당트 불교학

한국의 불교학은 한국의 여러 학문분야, 인문학 분야에 한정해 보더라도 후진적인 양태가 특히 두드러진 분야이다. 필자는 여러 분야의 학회에 참석해 보지만, 아직까지 발표시간의 제한 따위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관행이 관철되는 학회는 불교학회 이외에는 본 적이 없다. 학회 발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발표시간 내에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도록 지도하고 교육하는 상식적인 과정도 겪어본 적이 없는 발표자들이 각자 자신의 ‘깨달음’과 자신의 ‘진리’를 설파하는 자리이니만큼, 분야가 불교학인 이상 학술발표 행사 일정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후진적인 행태의 학술 활동이 관행화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인데, 필자는 이것을 불교학의 데카당스화와 딜레당트화라는 관점에서 본다.

‘데카당트’라는 말은 불어에서 ‘타락’을 뜻하는 ‘데카당(décadent)’에서 나온 말이다. ‘데카당트’는 문화사조의 말기적 타락 풍조를 가리키는 말로 종종 기존의 사회적 권위에 (삐딱하게) 저항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불교는 사실 조선시대 이래 데카당트했다. 조선시대를 지탱했던 유가의 사회윤리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가장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권위, 즉 부모에 대한 자식의 태도[孝]를 인간 사회의 기본 원리로 삼아 구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왕과 신하는 물론이고 사회적 위계질서의 뼈대는 모두 효를 모델로 삼아 구축된 상하관계의 반복 패턴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조를 요샛말로 ‘프랙탈 구조’라고 한다. 따라서 유가 지식인들에게 효를 통한 위계질서 창출에 삐딱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 출가자의 이상을 가르치는 불교는 사회악의 뿌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근대기를 지나면서 대한민국이 반공과 친미 그리고 기독교 세력 주도의 국가로 재편성되면서 한국 불교계는 유가적 정치권력에 대해 갖고 있던 모멸적 충성의 태도를 지금까지도 유지하게 되었다. 사실 전근대와 미몽 그리고 미신의 상징이 되거나 혹은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상황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에 익숙하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교는 오늘날 조선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데카당의 위치에 있는 것이 맞고 데카당의 위치에서 어떤 저항적 힘을 보여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불교도들이 조선시대 이래 역사 안에서 능동적인 저항의 데카당스를 구현한 역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실권자의 호의를 구걸하는 것을 ‘저항’이라고 부르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한국불교는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한 데카당스였을 뿐이다.

이런 일들이 한국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국의 불교가 겪은 문제가 특별하고 심각한 난치의 희귀 질병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구열강의 식민화를 겪은 아시아 각국에서 불교도들은 모두 자존감 회복을 위해 몸부림쳤고, 그 방향성과 내용은 모두 비슷비슷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거나, 불교는 바로 과학이라거나, 불교에서는 믿음이 없고 모든 것이 설명과 합리적 설득으로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투의 수많은 포장과 억지스러운 재구성이 있었다. 이 연장선에서 불교는 현대인의 병을 고친다거나, 불교는 환경문제에 대한 해답을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거나, 불교는 경제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거나, 불교는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시킬 묘안이라거나 하는 거울 앞에서(만) 이루어지는 시위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그것이 지금도 불교학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토론과 연구 주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흐름 자체의 역사적 배경과 현실적 무게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짚어야 할 지점은 이러한 고민과 질문들에 대해 한국의 불교계 혹은 한국의 불교학계가 데카당트 편향의 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학의 데카당트화는 사실 딜레당트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불교학은 많은 이들에게 신앙생활의 일부이자 취미생활이다. 그래서 한국 불교학계를 지배하는 흐름은 화엄이나 천태교학이나 선종이나 유식학 혹은 아비달마가 아니고 딜레탕트 불교학이다. ‘딜레탕트’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즐기다’라는 뜻의 ‘dilettare’에서 나온 말이다. 즉 취미 활동으로서 불교학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불교학계는 불교라는 살아 있는 종교와 연계된 학계이다 보니, 그 사회적이고 재정적인 기반이 독특하다. 그리고 출가자이거나 혹은 일반인이거나 간에 취미생활을 좀 강하게 했던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불교학계 안으로 침투되거나 혹은 포섭될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는 불교계 대학의 불교학 전공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직업으로서 전문가 집단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학문적 권위가 종종 종교적 권위,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종교 전통의 교학적 해석과 충돌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한국 불교학이 딜레탕트 불교학에 짓눌려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고, 미래를 논할 처지가 되지 못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붕어빵은 추위에 떨지 않는다

추운 겨울, 좌판 위에 줄 서 있는 붕어빵들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불기운이 있어서 붕어빵은 추위에 떨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붕어빵은 애초에 무생물인지라 추위에 떨지 않는다. 불교학은 분과학문으로서 불교를 다룬다. 따라서 불교학은 불교의 위기에 떨지 않는다.

‘불교학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불교학의 위기’는 불교학을 수행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변변한 학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느끼는 무력감의 반영일 뿐이다. 자신의 편견과 아집을 학문이라고 포장하지만 학문이 지녀야 할 객관성과 소통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는 현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허구적인 가짜 학문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병적인 분열이 만들어낸 현상에 불과하다. 무력한 허구적 지식을 세계에 투사할 때 자신의 위기라고 말하지 않고, 세계의 위기라고 말하는 어법을 배웠을 뿐이다.

무력한 지식인의 무기력감은 현실과의 병적인 분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분열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의 분열을 의미한다. 이들이 자신의 불안을 공식화하면서 사회적인 권위를 주장하고자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수사법이 바로 허구적인 위기의식이다. 그래서 불교학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고, 각자 그 해결책을 목 놓아 울부짖는 선각자의 모습이 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모두가 공유하는 것은 그 허구적인 문제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분열의 한계에 대한 각자의 좌절감이다. 위기에 처했다는 불교학계 안에서 모두가 각자 선각자인지라 각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지만 아무도 남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수십 명의 노랫소리가 한꺼번에 흘러나오기 때문에 아무도 남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 옛날에는 상(喪)을 당했을 때 상주 대신 곡(哭)을 하는 계집종이 있어서 ‘곡비(哭婢)’라고 불렀다. 불교학계에서 무한 반복되는 ‘인간성의 위기’ ‘현대사회의 위기’ ‘불교의 위기’ ‘불교학의 위기’가 모두 곡비들의 생계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불교의 위기’라거나 ‘종단의 위기’를 ‘불교학의 위기’라고 치환하는 수사들이 허구적이라는 것은 ‘불교학의 위기’를 떠드는 사람들도 그리고 듣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것은 각자의 노래를 부르는 것뿐이다. 그것이 노래방을 찾는 목적이다. 하나의 내용을 다루는 대화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가 전국 모든 대학의 인문대 학장단에서 주창되면서 국가지원금의 인문학 분야 할당을 주장하던 정치적 맥락의 구체성을 덮어두고서, 불교학의 위기가 인문학 위기의 일부라고 주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실제로는 대학 내 인문대학의 위기였을 뿐이고, 자기계발의 도구로서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진지한 노력으로서의 인문학, 그리고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교양을 잘 포장해서 제공하는 ‘인문학 시장’은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호황이다. 대중에게 소비되는 인문학을 인문학이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중에게서 소비되고 대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불교학을 불교학이 아니라고 할 필요도 없다. 다만 한 사회의 총체적 역량 중의 하나로 전문가 집단을 양성하고 유지하며, 전문적인 학적 지식을 창출해서 누적시키는 직업으로서의 학문 활동을 수행하는 불교학이 딜레탕트나 데카당트 불교학이 되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민은 좁은 의미의 불교학이 한국에서 자생력을 가진 학문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는 길을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지이다. 붕어빵의 비늘을 잘 제거하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스승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붕어빵을 잘못 다루면 비린내가 난다는 경고는 아재들의 유머로 넘기고 싶다. 다시 확인하자. 붕어빵은 붕어가 아니고 빵이다.

7. 붕어빵은 길거리 음식이고 그래서 훌륭한 음식이다

가짜 학문을 학계에서 수용해야 하는 물적 토대와 구조를 가진 불교학계는 데카당트 불교학과 딜레탕트 불교학의 큰 흐름에 기생하는 측면이 있어서, 이러한 경향성과 단절하지 못한다. 허구적인 학문, 다시 말해서 학문이지 못한 채로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데카당트, 딜레탕트 불교학이 바로 불교학계의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자기분열과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학문 활동을 지향하지만 학문 활동이 불가능한 딜레탕트이자 데카당트 불교학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어떤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분열과 불안의 탈출구는 자기확신의 강화를 더욱 강력하게 추동하게 된다. 이것이 현재 불교학계가 학문이기를 주장하면서도 스스로 학문이기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무한 반복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직에 종사하거나 혹은 연구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마저 이렇게 자기분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사회에 잠재하는 전통의 일부인 학문전통, 즉 서당이나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유가적 학문전통과 사찰과 강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불교적 학문전통이 근현대의 딜레탕트 전통과 섞여 한국의 불교학계 안에 혼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낳게 된 사정은 전통 학문의 교육방식이나 성취가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대적 학문을 교육한다고 주장하는 교육기관의 교육 내용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의 부실은 간단하게 교육자의 부실에서 초래된다. 불교학을 전공하고 공식적인 학위를 받은 수많은 연구자들이 여전히 학적 성취를 이루어 현재의 학문적 성과 위에 자신의 몫을 보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분열적 상황에서 그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딜레탕트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통해 생존의 방편을 마련하고, 데카당트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통해 자신에게 향할 수 있는 모든 학적 비판을 무력화하는 것뿐이다.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서 근대기의 열등함을 메우기 위해 매진했던 한국사회의 여러 분야는 이제 세계적인 선두권 경쟁에 나설 만큼의 성취를 확보했다. 그런데 불교계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신도나 출가자 수의 감소라거나 종교적 영향력의 감소에서만 사정이 열악한 것은 아니다. 불교학계는 아직도 세계 학계, 그리고 가까운 일본의 불교학계가 이루어낸 성취를 번역하고 소화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에 놓여 있다.

불교 전통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과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학생들은 이미 주어진 자료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로 너무나 많은 형태의 ‘불교들’과 방대한 연구자료 앞에서 주눅이 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가르치는 사람도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해를 상상으로 대체하고 자료를 신념으로 대체하면서 자기가 만든 자기만의 ‘불교’를 그려내는 훈련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이해가 아니라 익숙해지는 적응 과정을 거쳐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불교적 용어로 포장해서 구사하는 일정 정도의 수사적 훈련을 받은 연구자가 양산된다.

불교학 교육이 실제로 수사적 기술 교육이라고 하면 어리둥절할지 모르겠지만,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담고 있는 면이 있다. 참고로, 모든 경제학 이론이 사실은 수사학 교육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해 두겠다. 아무 말이나 마구 내뱉은 다음에 상대방이 무어라 하거든 ‘내 말까지 포함해서 일체개공’이라고 대답하는 일을 초급에서 배운다. 나중에 좀 더 모양새 나는 말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사사무애’라고 대답하는 일을 중급에서 배운다. 그다음에 좀 더 강한 적을 만나서 앞뒤가 안 맞는 헛소리라고 비판을 받으면 그때는 “진제에서 보면 그런데 속제에서는 다르죠.”라고 대답하는 일을 고급과정에서 배운다. 이런 직업훈련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학계에 연구자로서 자리를 잡고 나면 공유되지도 않고 공유될 필요도 없는 활동들을 불교학의 이름으로 지속해 나가게 된다.

현재 한국 불교학계의 관행은 눈앞의 현장에서 상황을 모면하는 일에 매몰된 면이 크다. 따라서 연구결과의 누적을 통한 학문으로서의 불교학과 불교학계의 발전을 논하는 것은 과욕이 되고 만다. 이것은 결코 즉문즉답의 불교 전통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불교 전통이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부패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이제 불교학이 학문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이라 합창하는 이 허구의 노래를 끝내야 한다. 불교학은 학문일 뿐이고 학문으로서만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불교학은 깨달음을 주지도 않고 공덕을 쌓는 일도 아니다. 그저 학문일 뿐이다. 붕어빵은 원래 길거리 음식이었고 싸구려 길거리 음식이었기 때문에 훌륭한 음식이었고, 아직도 훌륭한 음식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불교학을 통해 자신의 종교 생활에 보탬을 얻을 수 있고, 자신의 연구분야에 대한 지식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붕어빵을 카페에 앉아 커피와 함께 우아하게 먹고 싶은 사람은 그럴 수 있고, 카페 주인이 허락만 한다면야 나쁠 것이 없다. 개인이 가진 학문적 역량의 한계를 불교적 세계관에 투철하지 못한 학문 풍토 탓으로 돌리거나 불교적 세계관을 체화시키는 언필칭 ‘진정한’ 불교학을 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그럴듯한 평가로 자조하지 말아야 한다.

2009년 한국에도 일본식 도미빵을 파는 카페 체인점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교양 있는 중년 신사가 커피 한 잔과 뭔가 영어 활자라도 잔뜩 박혀 있는 신문을 한 손에 들고 카페에 앉아 먹자면, 그리 나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필자에게 이런 도미빵은 붕어빵이 아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사카린이 잔뜩 들어간 팥소를 먹던 필자에게 붕어빵은 원래 불량식품이었고, 나는 불량식품을 먹고 자랐으며, 붕어빵의 팥소에 가득한 사카린 맛을 내 소울 푸드가 가진 원판 맛이라고 생각한다. 요지인즉슨, 불량식품이었기 때문에 나는 붕어빵을 먹고 자랄 수 있었다.

8. 붕어빵에 팥소가 없다니!

왜 한국의 불교학계는 이러한 소모적인 딜레탕트 불교의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불교학계가 재정적으로 불교계에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표면적 판단에 불과하다. 딜레탕트 불교의 모습은 대개 불교철학, 불교사상사, 불교교학 분야에서 두드러지며, 불교사학 분야만 하더라도 양상이 사뭇 다르다. 이유는 바로 구체적인 자료와 연구대상을 가진 논의로 학계의 담론이 집중 혹은 제한되는 연구분야 나름의 특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역사 연구방법론의 가장 진보된 형태는 《화엄경》에 나와 있다는 논문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불교철학을 다루는 논의에서는 플라톤에서 칸트며 헤겔이고 심지어 양자역학까지 모두 《화엄경》에 이미 나와 있는 내용이라는 저술들이 넘쳐난다.

불교를 사상사 혹은 철학 위주로 다루게 된 것은 근세기 일본에서 근대적 대학 체계를 구축하면서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을 서양철학에 대응하는 것으로 학과편제에 도입시켜 제도화한 역사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면서 불교학이 교학 위주로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불교학계의 풍토 전반을 지배하는 ‘반지성주의’적 경향이다. 반지성주의는 결코 판단을 위해 정보와 사실을 모으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태도, 그러한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반지성주의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보기에 신뢰할 만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린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는 믿을 만한 정보는 바로 그 정보를 전해주는 사람이 자신과 동종의 세계관을 공유하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된다는 맹점이 있다.

불교도로서의 신뢰 관계가 정보의 내용에 대한 검증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나니, 동종선호 본능과 맞물려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대학의 물리학과를 폐지하고 《화엄경》만 외우게 하면, 머지않아 노벨물리학상은 항상 한국 사람들이 받게 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서로 주고받으며 나름 불교학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제안하건대, 가까운 곳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관리자들을 모두 《화엄경》 암송자들로 대체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교학 위주의 불교학이 불교학의 주류로 자리 잡은 것은 실제 현상이고, 그 현상의 근저에 자리 잡은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불교학계 전반의 풍토가 ‘반지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깔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제 불교학을 한다는 것은 왜 결여된 학문을 하는 것으로 자인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불교학이 다루는 내용 자체가 한 개인이 학습하고 연구하기에는 너무나 큰 부담을 주는 것들이다. 너무나 이질적인 문화권들에 걸쳐 너무 다양한 발전을 보여준 역사가 배경에 있고, 그 역사와 문화를 다루기 위해 익혀야 하는 무수하게 많은 그리고 너무도 다른 언어들이 본격적인 학습을 시작하기도 전에 넘어야 하는 산으로 주어져 있다. 그렇다 보니 한 연구자가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큰 맥락을 분명하게 파악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앞에서 연구자로 남아야 할 사람들은 그 무거운 짐의 무게에 눌려 결국 종교인의 자리 혹은 딜레탕트 혹은 데카당트 연구자로서의 편안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결국 많은 헛소리들이란,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상황과 문제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한계에 마주친 상황에서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역량의 한계에 대한 자조적인 인정에 불과하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불교학자가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태도는 바로 역사성에 대한 인식과 인정이다. 불교라는 종교를 탈역사적이고 탈시간적인 진리체계로 받아들이고 모든 차별화된 불교들이 다 같은 불교라는 태도는 불교 전통의 교학 체계가 견지해온 기본적인 태도다. 불교학은 불교 내의 종교적 활동으로 포섭되는 교학이 아니다. 불교학은 교학 전통이 구축한 내용들마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의 역사성을 인지하고 해명하면서 이루어가는 학문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역사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학문으로서 불교학을 가르는 기준선이다. 탈역사성은 진리를 따지는 작업이든 혹은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섭렵한 작업이든 간에 반지성주의의 핵심적인 성격을 반복하게 만든다.

반지성주의는 객관적 학문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 즉 반박 가능성을 차단한 곳에서 자란다. 한 극단에 근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으며 반대 극단에는 냉소주의가 마주 보고 있다. 근본주의의 입장은 탈역사성에 근거해서 교리가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이라고 주장하며 교리가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신념과 체험이 곧 앎이고 지혜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사고체계에 대한 교정 가능성을 지닌 모든 정보를 차단한다. 자기 자신이 진리판단의 주체가 되고, 오해에 의한 창조가 확증편향을 통해 추진력을 얻으며, 그것이 자신의 창조물을 통해 자기확신으로 다시 강화되는 무한동력의 회로가 작동한다.

모든 인간의 경험은 자기 자신만의 경험이며, 우리의 모든 뇌는 두개골이라는 통 속에 갇혀 있는, 통 속의 뇌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나의 경험은 나만의 경험이고 나에게 절대적이며 진리이다. 그렇지만 경험이 나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경험이 남과 공유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우리가 산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빠진 주체들이 경험의 일차성과 그 경험의 객관성 혹은 타당성을 뒤섞기 시작하면, 우리 안에 반지성주의가 자리를 잡는다. 반지성주의를 불교의 핵심인 수행론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생물학적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pañcaskandha)이 갖는 물리적 세계의 검증을 인간이 피해갈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벽에 부딪힐 때 반지성주의자들은 역사성의 망각을 순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한다. 다시 말해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반대론자들을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제압하려 한다. 이 제압이 이루어지는 한 그 반대론의 역사적인 맥락이 망각되는 한에서 자신의 유아론적 세계는 온전하게 방어된다. 이러한 방어를 이루기 위해 불교학회에서는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도 하면서 학문을 하는 장이라 상상하기 어려운 행태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싸우는 반지성주의자들 모두는 아마도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안기기 마련이고 이 상처를 핥는 각자는 자신이 비참한 하이에나가 아니라 상처 입은 사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위안이 필요할 때 그들에게는 항상 음모론의 탈출구가 주어져 있다. 자료와 근거로 그리고 논리로 자신의 주장이 도저히 방어되지 않을 때 “외국 가서 불교를 배운 것들이 통 불교를 몰라서 그래!”라거나 외국의 대가가 학적으로 증명을 마친 사실들에 대해서는 “서양놈들은 결국에는 불교를 모르더라고……”라는 대응을 할 수 있는 길이 주어지는 것이다. 수많은 불교학의 대가들이, 서구인들의 경우에는 특히, 불교가 아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인 경우가 많으니 이 경우에는 마침 이런 핑계를 둘러 붙이기도 좋다.

‘대중’이 ‘지혜’를 내장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 의미 없는 동어반복이거나 혹은 허구적인 대중추수적인 태도의 표현에 불과하다. ‘시장은 항상 옳다!’라는 주장은 바로 시장이 자산의 가격을 정하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 된다. 대중이 무엇을 지혜로 받아들일 것인지 정하는 최종 심급이라고 한다면 대중은 지혜롭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다. 지식인의 무덤 위에서 대중 지성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지식인은 죽고 네트워크가 살아났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한국 불교학계의 담론이 사회 일반을 향해 과연 실제로 기능하는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상대를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논리를 택한다. 그것이 반지성주의의 또 다른 폭력적인 면이다. 근대 학문으로서 불교학은 수입된 전통이고 따라서 그 이질성이 우월성으로 경험되는바, 열등감의 세련된 발현으로서 한국에서만 가능한 불교학 혹은 한국적인 불교학을 주장하는 방식의 왜곡이 다시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수입된 이론이나 방법론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논의는 계속되고 있지만, 그러한 논의 자체가 되돌이표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한 논의가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불교학만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오래된 질문이다.

결국 붕어빵에 크림이나 채소 따위를 집어넣어 가짜 붕어빵을 만드는 사악한 무리에 대한 비난이 필요하고 진정한 붕어빵이란 단팥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만이 남아 붕어빵에 대한 진정한 애착을 공유하는 집단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아주 자주 비난할 상대방이 없거나 저주할 구체적인 내용이 없을 때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에 대한 인식을 만들고 공유하면 된다. 이것을 우리는 ‘음모론’이라고 부른다. 붕어빵을 타락시키기 위한 거대한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새로 나타난 피자 붕어빵을 보게 되는 순간 누구나 온몸으로 실감하며 확인하게 될 것이다.

9. 붕어빵의 모양은 그 틀에서 나온다

붕어빵의 붕어 모양은 노점 주인장이 만들어낸 조각 작품이 아니다. 붕어빵을 굽는 틀이 붕어 모양이어서 붕어빵은 붕어 모양이다. 불교학이 학문인 이상 불교학은 학문의 제도적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재생산 구조를 통해 유지된다. 불교학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불교학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에 대한 고민이어야 한다.

학문으로서 불교학에 대한 고민은 제도의 운영 문제와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학문 활동은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제도적으로 영위된다. 특히 학문의 누적적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 후속세대의 양성은 대학이라는 제도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한국 불교학의 발전에 대한 고민은 상당 부분 미래 불교학자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제도에 대한 고민으로 치환된다.

여기에서 다시금 비제도권의 교육과 연구 기능을 부정적인 것으로 도려내거나 제거하자는 것은 아니다. 비제도권에서의 교육과 연구를 더 넓은 학문 생태계의 장 속에서 함께 움직이고 발전해야 하는 영역으로 인정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직업적 전문가로서 학자를 양성하는 제도를 고민하는 맥락에 개입되어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교학과 같은 인문학 분야의 연구활동과 학문후속세대의 교육은 주로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불교 종단들이 설립한 대학들―동국대학교, 금강대학교, 위덕대학교, 중앙승가대학교, 원광대학교 등―과 같은 고등교육기관들마저도 불교학 관련 강좌 개설은 물론이고 해당 학과들의 확장은 고사하고 유지할 만한 상황에 있지도 않다. 한국의 대학들이 일반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대학 구조조정의 물결 속에서 큰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난망한 일이다.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을 외국의 대학들에 위탁하는 불임의 대학 체계가 이미 구축되어 있다.

불교학계가 다른 인문사회과학 분야와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미국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여타 분야들과는 다르게 일본에 유학을 가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비중이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상정한 생산성을 기준으로 세계화와 미국화의 큰 흐름 속에서 뿌리내린 등재지/등재후보지를 중심으로 재구성된 학문 생태계의 문제가 불교학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기업 톰슨이 고안한 인용지수 체계를 중심으로 한국연구재단이 관철시킨 현재의 체계는 단순하게 매도될 것만도 아니고 이상적인 학문 생태계의 토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교수 집단의 나태와 권위의식 그리고 무능으로 점철되어 있던 한국 인문학계의 풍토는 마치 대마불사의 논리로 과도한 문어발식 확장을 추진했던 재벌기업들이 과도한 부채로 인해 뼈아픈 IMF 사태를 겪게 되었던 상황에 비유할 만하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이상적인 신세계를 만든 것은 결코 아니지만 상상하기 힘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관철시켰던 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대학들은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고 대학이 취업시장의 진입로로 전락했지만 제도적 합리성과 개혁성이 담보된 면도 있었다. 제도적 합리성과 투명성은 질적 성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교수직을 얻고 나면 평생을 편하게, 심하게는 갑질을 일삼으며 살던 예전 스승들의 모습을 보고 현재의 학문체계를 통탄하는 노래가 ‘학문의 위기론’으로 섞여 들려오는 곡비의 노래이다. 등재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인간 삶의 의미를 해명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진지한 노력들이 담긴 글들만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가?

결국 현재의 질문이자 고민은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제도를 운용할 것인지의 질문으로 환원된다. 해답은 개별 대학과 교육기관을 넘어서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새로운 교육을 위한 구현 가능한 최상의 자원들을 구축해 나가고 활용해 나가는 데에 있다. 구체적으로 인도 고전교육의 가장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쌍쓰끄리땀 교육만 하더라도, 현재 한국의 대학들 중에서 두 학기에 걸친 제대로 된 입문 강좌를 제도적 틀 안에서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학교는 필자가 알기로 서울대학교가 유일하다. 이것이 현실이다. 개별 대학이라면 ‘불교 한문’ ‘빨리’ ‘불교 혼성 쌍쓰끄리땀’ 강좌를 모두 개설할 가능성을 가진 대학은 거의 없다. 그나마 알음알음 개인적으로 선후배 간의 공부 모임에서 배울 기회라도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런데 눈을 돌려서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불교학회에서 이 강좌들을 온라인으로 진행한다고 해보자. 일정 수의 수강생을 모으는 일도 가능해지고, 학회 차원의 재정지원이 있다면 강사 확보가 어렵지 않을 것이고, 분야마다 인정받는 해당 분야 최고의 연구자를 강사로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온라인 강좌가 이미 대중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기술적인 문제가 그다지 크지도 않다. 산중의 산사에도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대한민국의 통신 인프라는 지리적 제한을 무화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미 몇몇 단체에서 선도적인 실험들을 수행하고 있고, 나름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검토가 가능할 만큼의 경험들을 쌓아 가고 있다.

네트워크는 권위를 통해 장악하기 어렵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네트워크는 네트워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불교학계에서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열린 네트워크 안에서 인정을 받고 새로운 권위를 얻기 위해 무한경쟁 안에 들어갈 용기를 내야 할 때라고 보인다. 불교계 대학들의 수가 제한되고 그 대학들 내에서도 본격적으로 불교학을 교육하는 단위들이 제한적이다 보니 동일교 동일학과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동종교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폐쇄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열린 네트워크를 통해 대응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제도적으로 학회 단위의 교육과정이 평가를 수행할 수 있게 하고 그 평가치를 개별 대학들이 학점으로 인정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할 길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영어 능력 평가는 대학들이 외주화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불교학회의 제도화와 법인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불교학계의 풍토가 제도에 대한 고민보다 개인의 체험과 완성에 대한 고민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붕어빵의 모양을 바꾸고 싶다면 그 굽는 틀을 바꾸어야 한다. ■

 

강성용 citerphil@daum.net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인도고전학, 철학, 티베트학을 공부하여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장 최근의 논문으로 〈쌍쓰끄리땀과 암벧까르(Ambedkar)의 소환 그리고 고대사 재구성과 인도 현대 정치의 규정요소로서의 언어〉가 있고, 저서로 Die Debatte im alten Indien, Pañcāvayava, 《빠니니 읽기: 인도 문법전통의 이해》 《Saṃskṛtavākyopakriyā, 인도 고전어 쌍쓰끄리땀 첫마당》이 있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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